다비드 오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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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비드 오트손(Davíð Oddsson)은 아이슬란드의 정치인으로, 레이캬비크 시장(1982-1991), 아이슬란드 총리(1991-2004), 중앙은행 총재(2005-2009)를 역임했다. 그는 독립당 대표를 지냈으며, 총리 재임 기간 동안 감세 정책을 추진하고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했다. 2008년 아이슬란드 금융 위기 이후 중앙은행 총재직에서 해임되었고, 이후 신문 편집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이라크 전쟁 지지, 기후 변화 부정 등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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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 오트손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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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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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다비드 오드손 |
출생일 | 1948년 1월 17일 |
출생지 | 레이캬비크, 아이슬란드 |
소속 정당 | 독립당 |
모교 | 아이슬란드 대학교 |
공직 | |
아이슬란드 공화국 총리 | 재임 시작: 1991년 4월 30일 재임 종료: 2004년 9월 15일 |
대통령 | 비그디스 핀보가도티르 올라퓌르 라그나르 그림손 |
이전 총리 | 스테잉그림ੁਰ 헤르만손 |
다음 총리 | 할도르 아우스그림손 |
아이슬란드 공화국 외무부 장관 | 재임 시작: 2004년 9월 15일 재임 종료: 2005년 9월 27일 |
총리 | 할도르 아우스그림손 |
이전 외무장관 | 할도르 아우스그림손 |
다음 외무장관 | 게이르 하르데 |
레이캬비크 시장 | 재임 시작: 1982년 5월 27일 재임 종료: 1991년 7월 16일 |
이전 시장 | 에길 스쿠리 잉기베르그손 |
다음 시장 | 마르쿠스 외른 안톤손 |
2. 생애
다비드 오트손은 레이캬비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의사였고 어머니는 비서였다. 그의 부모는 결혼하지 않았고, 그는 외할아버지의 집인 셀포스에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자랐다. 그 후 그는 어머니, 할머니와 함께 레이캬비크로 이사했다.
그는 일찍이 연기에 관심을 보였고, 한동안 연기 학교에 다녔다. 그는 또한 김나지움인 레이캬비크 김나지움에 다녔으며, 1970년 봄에 졸업했다. 다비드는 간호사인 아스트리드 토라렌센과 결혼했으며, 그들은 아들 토르스테인을 두었는데, 그는 아쿠레이리 지방 법원의 판사이다. 그 후 6년 동안, 다비드는 아이슬란드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면서 거의 전일제로 일을 했다. 그는 작은 극장(현재는 보르가르레익후시드)의 감독 보조로 잠시 일했으며, 두 친구(토라린 엘드야른과 흐라픈 귄로이그손)와 함께 2년 동안 인기 라디오 코미디 쇼를 제작했다. 그는 한동안 신문 ''모르군블라디드''의 정치 평론가였으며, 보수 출판사인 알메나 보카펠라기드의 출판 담당 이사였다. 그는 1974년 레이캬비크 시의회에 독립당 소속으로 선출되었다.
1983년, 다비드 오트손의 오랜 친구이자 동맹인 토르스테인 팔손이 독립당의 대표로 선출되었고, 1989년 다비드는 당 부대표로 선출되었다.
1982년, 다비드는 자신의 지도력 아래 독립당이 레이캬비크 시 의회에서 과반수를 되찾으면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기회를 얻었다. 다비드는 즉시 의원 수를 21명에서 15명으로 줄였고, 레이캬비크 최대의 어업 회사를 사립 어업 회사와 합병한 후, 그란디에 대한 시의 자산을 매각했다. 덧붙여, 그란디의 이사였던 브륀욜푸르 비아르나손은 나중에 아이슬란드 전화 회사의 이사가 되었다. 레이캬비크 시장으로서 다비드는 연못에 레이캬비크 시청을 건설하고, Öskjuhlíð의 오래된 물탱크 위에 회전식 레스토랑인 펄란을 건설하는 것을 주도했다. 자유지상주의적인 성향에도 불구하고 레이캬비크 시립 극장을 지원했다. 다비드가 레이캬비크 시장으로 재임한 9년 동안, Grafarvogur가 건설되었고, Kringlan 쇼핑몰 주변에 새로운 쇼핑 지역이 조성되었다.
토르스테인이 1988년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 다비드는 1991년에 당 대표가 되었다. 다비드의 지도력 아래, 1991년 당은 의회 지지의 대부분을 되찾았다. 다비드는 사회 민주주의자들과 연립 정부를 구성했으며, 그 지도자인 욘 발드빈 한니발손이 외무 장관이 되었다. 욘 발드빈과 다비드는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발트 3국의 독립을 소련 붕괴 전에 가장 먼저 재인정하는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다비드 정부는 막대한 예산 적자를 물려받았다. 예산 적자는 1996년에 흑자로 전환되었는데, 이는 다비드와 재무 장관이었던 프리드리크 소푸손의 긴밀한 협력 덕분이었다. 중앙 은행을 정치적 압력에서 크게 독립시킴으로써 통화 제약이 가해졌다. 또한, 다비드 오트손 정부는 1990년 노조와 고용주 간의 "국가 협약" 덕분에 인플레이션을 낮출 수 있었다.
1994년, 사회민주당이 분열되면서 1995년 총선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 따라서 다비드 오트손은 진보당과 연립 정부를 구성하기로 결정했고, 그 지도자인 할도르 아스그림손이 외무부 장관이 되었다. 새 정부에서 민영화는 이전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진행되었다.
다비드의 두 정부는 미국의 든든한 동맹국이었으며, 북대서양 조약 기구를 강력하게 지지했다. 그는 미국과 동맹국들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수행한 조치를 확고히 지지하여 아이슬란드 좌파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다비드는 유럽 연합 가입에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다비드 오트손 정부(1995–2004)는 감세 정책을 시작했다. 이러한 경제 개방은 아이슬란드에 기업가적 분위기를 조성하여 국내 경제 성장을 촉진했지만, 2008-2011 아이슬란드 금융 위기의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2002년, 바우구르 그룹에 대한 논란이 아이슬란드에서 시작되었다. 2002년 여름, 아이슬란드 경찰은 바우구르 본사를 급습했다. 바우구르의 두 주요 소유주는 다비드가 그들을 상대로 캠페인을 벌였다고 비난했다. 그들은 신문인 ''프레트블라디드''를 인수했다. 이 신문은 2003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비드에 반대했다.
2003년 그는 아이슬란드의 은행법을 자유화하여 투명성을 낮추었고, 이는 막대한 외화와 높은 이자율을 가져왔다.[5]
2003년 3월 18일, 다비드와 외무장관 할도르 아스그림손은 아조레스 회담에서 미국, 영국, 스페인이 발표한 최후 통첩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이들 3개국은 사담 후세인 정부가 물러나지 않을 경우 이라크를 침공할 의사를 밝혔다.[6] 다비드와 할도르의 지지 선언으로 인해 아이슬란드는 의용군 연합 회원국 명단에 올랐다.[7] 다비드와 할도르는 이 발표를 하기 전에 의회의 외교 위원회와 협의하지 않았다.[8] 사회민주동맹 의장인 외수르 스카르페딘손과 좌파-녹색 운동 의장인 스테잉림쉬르 J. 시그푸손은 전쟁 지지를 발표하면서 의회 의정서를 위반했다고 정부를 비난했다.[9]
다비드 정부의 이라크 전쟁 지지는 아이슬란드 국민들 사이에서 대체로 인기가 없었다. 전쟁 발발 직후, ''프레티블라디드''가 발표한 여론 조사에서 응답자의 76%가 정부의 전쟁 지지에 반대한다고 답했다.[9] 2005년 갤럽이 발표한 여론 조사에서 응답자의 84%가 아이슬란드가 의용군 연합 명단에 포함된 것에 반대한다고 답했다.[10]
2003년 선거 이후, 다비드 오트손은 2004년 9월 15일까지 총리직을 유지하고, 그 후 할도르 아스그림손가 총리가 되기로 합의했다.
2004년, 다비드는 대형 사기업이 단일 미디어 회사의 지분 15% 이상을 소유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제출하면서 논란에 휩싸였다. 그러나 비판자들은 이 제안이 다비드가 정치적 적으로 간주한 바우구르 그룹을 직접 겨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알싱기는 미디어 법안의 내용을 대폭 완화하여 통과시켰다. 그러나 2004년 여름, 올라푸르 라그나르 그림손 대통령은 법안 서명을 거부했다. 다비드는 이에 대해 비판했다. 많은 사람들은 미디어 법안이 정치적 싸움의 일부인 것처럼 보인다는 데 동의했다. 오랜 갈등의 결론은 다비드 오트손이 법안을 철회한 것이었다.
총리 재임 14년 동안 다비드는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과 조지 W. 부시를 포함한 많은 서방 지도자들과 친분을 맺었다. 그는 때때로 빌더버그 그룹 회의에 참석했으며, 몽 페르린 협회에서 논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는 외무 장관으로 단 1년만 재임했다. 2005년 가을, 다비드는 정계를 은퇴하겠다고 발표했다. 게이르 하르데가 독립당 대표이자 외무 장관으로 그를 대신했다.
2005년 10월, 다비드는 아이슬란드 중앙은행 총재로 임명되었다.[11][12] 2008년 가을 아이슬란드 은행 시스템 붕괴 이후, 아이슬란드는 국제 통화 기금과 우호국에 금융 지원을 요청해야 했다. 일부에서는 다비드가 이끌던 독립당이 추진한 정책이 붕괴를 초래했다며 비난했고, 이로 인해 붕괴에 대한 조사와 재판이 이어졌다.[13][14][15][16][17][18] 그 결과 다비드의 해임을 요구하는 여론이 일어났다. 중앙은행 앞에서 시위가 벌어진 후, 새로운 총리인 요한나 시귀르다르도티르는 다비드와 다른 두 명의 총재에게 사임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이 요청을 거부했다.[19] 2009년 2월 26일, 중앙은행 관련 법률 개정 이후 다비드는 은행에서 해임되었고, 노르웨이 경제학자 스베인 하랄드 외이가르드로 교체되었다.
2009년 4월, 다비드는 아이슬란드가 위기 이전 몇 년 동안 은행이 고위 정치인에게 제공한 "특이하고 관례적이지 않은 대출"에 대해 조사해야 한다고 말했다.[20]
2009년 9월 24일, ''모르군블라디드''(Morgunblaðið)의 새로운 소유주들은 다비드 오트손과 할랄두르 요한네센을 신문 편집자로 고용했다고 발표했다.[21] 다비드가 편집장으로 취임한 이후, ''모르군블라디드'' 구독자의 3분의 1이 구독을 취소했다.[23] 2009년 이 신문은 6억 6700만 아이슬란드 크로나의 손실을 기록했다.[24]
2010년 4월에 발간된 아이슬란드 의회 특별 조사 위원회의 보고서에서는 다비드 오트손을 ''모르군블라디드''의 편집장으로 임명하고 경험 많은 많은 언론인들을 해고한 것이 아이슬란드의 미디어 소유주들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어떻게 조작을 하는지를 보여주는 예시로 언급되었다.[25]
2. 1. 정치 경력
다비드 오트손은 의사인 아버지와 비서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혼인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이슬란드 남부의 작은 마을인 셀포스에 있는 외할아버지 댁에 보내져 자라났다. 그의 외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외할머니와 어머니와 함께 레이캬비크로 이사했다. 어린 시절에, 그는 연기에 관심이 있어 한동안 연극학교를 다니기도 했으나, 레이캬비크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 뒤 아이슬란드 대학교로 진학해 법학사의 학위를 받았으며, 정치계에 입문해 다채로운 경력을 쌓았다.
== 레이캬비크 시장 (1982–1991) ==
다비드는 1982년, 자신의 지도력 아래 독립당이 4년 전에 세 개의 좌익 정당에 빼앗겼던 레이캬비크 시 의회에서 과반수를 되찾으면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기회를 얻었다. 다비드는 즉시 의원 수를 21명에서 15명으로 줄였고, 시에 속해 막대한 부담이 되었던 레이캬비크 최대의 어업 회사를 사립 어업 회사와 합병한 후, 새로운 회사인 그란디에 대한 시의 자산을 매각했는데, 그란디는 아이슬란드의 가장 큰 어업 회사 중 하나가 되었다. 덧붙여, 그란디의 이사였던 브륀욜푸르 비아르나손은 나중에 아이슬란드 전화 회사의 이사가 되었는데, 이는 다비드가 정부에서 마지막으로 추진한 민영화 사업이었다(2005년). 레이캬비크 시장으로서 다비드는 레이캬비크의 연못에 레이캬비크 시청을 건설하고, Öskjuhlíð의 오래된 물탱크 위에 회전식 레스토랑인 펄란을 건설하는 것을 주도했다. 다비드는 자유지상주의적인 성향에도 불구하고 레이캬비크 시립 극장을 지원했으며, 특히 1989년에 개관한 새로운 극장 건물을 지원했다. 다비드가 레이캬비크 시장으로 재임한 9년 동안, 새로운 구역인 Grafarvogur가 건설되었고, Kringlan 쇼핑몰 주변에 새로운 쇼핑 지역이 조성되었다. 강력하고 타협하지 않는 레이캬비크 시장이었던 다비드는 시 의회의 좌익 야당으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 아이슬란드 총리 (1991–2004) ==
1983년, 다비드 오트손의 오랜 친구이자 동맹인 토르스테인 팔손이 독립당의 대표로 선출되었고, 1989년 다비드는 당 부대표로 선출되었다. 토르스테인이 1988년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 당내에서는 지도부를 교체해야 한다는 여론이 팽배해졌고, 다비드는 1991년에 당 대표가 되었다. 다비드의 지도력 아래, 1991년 당은 의회 지지의 대부분을 되찾았다. 다비드는 사회 민주주의자들과 연립 정부를 구성했으며, 그 지도자인 욘 발드빈 한니발손이 외무 장관이 되었다. 욘 발드빈과 다비드는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발트 3국의 독립을 소련 붕괴 전에 가장 먼저 재인정하는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다비드 정부는 막대한 예산 적자와 비생산적인 투자를 물려받았다. 예산 적자는 1996년에 흑자로 전환되었는데, 이는 다비드와 재무 장관이었던 프리드리크 소푸손의 긴밀한 협력 덕분이었다. 그 이후 거의 지속적으로 흑자가 유지되었으며, 이는 공공 부채를 줄이고 연금 제도를 개혁하는 데 사용되었다. 일부 소규모 기업이 민영화되었다. 중앙 은행을 정치적 압력에서 크게 독립시킴으로써 통화 제약이 가해졌다. 또한, 다비드 오트손 정부는 1990년 노조와 고용주 간의 "국가 협약" 덕분에 인플레이션을 낮출 수 있었다. 1991년부터 아이슬란드의 인플레이션은 주변 국가와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다.
1994년, 사회민주당이 분열되면서 1995년 총선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 연립 정부는 간신히 과반수를 유지했지만, 단 한 석 차이였다. 따라서 다비드 오트손은 진보당과 연립 정부를 구성하기로 결정했고, 그 지도자인 할도르 아스그림손이 외무부 장관이 되었다. 새 정부에서 민영화는 이전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진행되었다. 대규모의 중요한 수산물 가공 공장 체인이 매각되었고, 일부 공공 투자 펀드가 합병되어 민간 투자 은행으로 매각되었으며, 정부가 통제하는 두 개의 상업 은행이 몇 단계에 걸쳐 매각되었다.
다비드의 두 정부는 미국의 든든한 동맹국이었으며, 북대서양 조약 기구를 강력하게 지지했다. 그는 미국과 동맹국들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수행한 조치를 확고히 지지하여 아이슬란드 좌파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다비드는 유럽 연합 가입에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다비드 오트손 정부(1995–2004)는 감세 정책을 시작했다. 법인세를 18%로 인하했고, 순자산세를 폐지했으며, 개인 소득세와 상속세를 낮췄다. 이러한 경제 개방은 아이슬란드에 기업가적 분위기를 조성하여 국내 경제 성장을 촉진했지만, 2008-2011 아이슬란드 금융 위기의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2002년, 바우구르 그룹에 대한 논란이 아이슬란드에서 시작되었다. 국회에서 당시 사회민주당 대표인 외수르 스카르페딘손은 독점 가격 책정 가능성에 대한 면밀한 감독을 요구하며, 특히 바우구르를 언급했다. 다비드도 이에 동의했다. 2002년 여름, 아이슬란드 경찰은 바우구르 본사를 급습했다. 바우구르의 두 주요 소유주는 다비드가 그들을 상대로 캠페인을 벌였다고 비난했다. 그들은 신문인 ''프레트블라디드''를 인수했다. 이 신문은 2003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비드에 반대했다. 2003년 2월 9일 연설에서 사회민주동맹의 주요 대변인인 잉기보르그 솔룬 기슬라도티르는 다비드가 사업가 욘 올라프손에 대한 세무 조사를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바우구르에 대한 경찰 급습에도 책임이 있을 수 있다고 암시했다.
2003년 그는 아이슬란드의 은행법을 자유화하여 투명성을 낮추었고, 이는 막대한 외화와 높은 이자율을 가져왔다.[5]
2003년 3월 18일, 다비드와 외무장관 할도르 아스그림손은 아조레스 회담에서 미국, 영국, 스페인이 발표한 최후 통첩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이들 3개국은 사담 후세인 정부가 물러나지 않을 경우 이라크를 침공할 의사를 밝혔다.[6] 다비드와 할도르의 지지 선언으로 인해 아이슬란드는 의용군 연합 회원국 명단에 올랐다.[7] 다비드와 할도르는 이 발표를 하기 전에 의회의 외교 위원회와 협의하지 않았다.[8] 사회민주동맹 의장인 외수르 스카르페딘손과 좌파-녹색 운동 의장인 스테잉림쉬르 J. 시그푸손은 전쟁 지지를 발표하면서 의회 의정서를 위반했다고 정부를 비난했다.[9]
다비드 정부의 이라크 전쟁 지지는 아이슬란드 국민들 사이에서 대체로 인기가 없었다. 전쟁 발발 직후, ''프레티블라디드''가 발표한 여론 조사에서 응답자의 76%가 정부의 전쟁 지지에 반대한다고 답했다.[9] 2005년 갤럽이 발표한 여론 조사에서 응답자의 84%가 아이슬란드가 의용군 연합 명단에 포함된 것에 반대한다고 답했다.[10]
== 외무부 장관 및 중앙은행 총재 (2004–2009) ==
2003년 선거 이후, 다비드 오트손은 연립 파트너인 외무 장관 할도르 아스그림손과 다비드가 2004년 9월 15일까지 총리직을 유지하고, 그 후 할도르가 총리가 되며, 독립당은 총리직을 넘겨주는 대가로 파트너로부터 정부 내 추가 장관직을 얻는 데 합의했다.
2004년, 다비드는 대형 사기업이 단일 미디어 회사의 지분 15% 이상을 소유하는 것을 금지하고, 신문과 텔레비전 방송국을 동일 회사가 소유할 수 없도록 하는 법안을 제출하면서 논란에 휩싸였다. 다비드는 이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미디어가 집중되는 것을 막고, 미디어가 정치인뿐만 아니라 재벌에게도 독립적이고 비판적인 입장을 유지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비판자들은 이 제안이 다비드가 정치적 적으로 간주한 바우구르 그룹을 직접 겨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바우구르는 다른 신문, 욘 악셀 올라프손이 소유한 텔레비전 방송국, 그리고 몇 개의 라디오 방송국을 인수하여 미디어 시장의 절반 이상을 장악하고 있었다. 알싱기는 미디어 법안의 내용을 대폭 완화하여 통과시켰다. 그러나 2004년 여름, 아이슬란드 공화국 역사상 처음으로 올라푸르 라그나르 그림손 대통령은 법안 서명을 거부했다. 다비드는 이에 대해 비판하며, 욘 악셀 올라프손이 소유했던 텔레비전 방송국을 바우구르가 인수한 후, 이 방송국의 국장인 시구르두르 G. 구드요운손이 올라푸르 라그나르의 첫 번째 대통령 선거 캠페인 매니저였고, 올라푸르의 딸이 바우구르에 고용되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바우구르는 경쟁사보다 더 저렴한 가격을 제공하는 매장을 운영했고, 소유주인 욘 아스게이르 요한네손과 요하네스 요운손이 아이슬란드의 헝겊에서 부자로의 꿈을 구현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아이슬란드에서 상당한 호감을 얻었다. 많은 사람들은 미디어 법안이 일반적인 법을 만들려는 시도라기보다는 정치적 싸움의 일부인 것처럼 보인다는 데 동의했다. 오랜 갈등의 결론은 아이슬란드 헌법에 따라 대통령이 법안 서명을 거부할 경우 국민투표를 실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다비드 오트손이 법안을 철회한 것이었다.
총리 재임 14년 동안 다비드는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과 조지 W. 부시,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바츨라프 클라우스, 이탈리아 총리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를 포함한 많은 서방 지도자들과 친분을 맺거나 친구가 되었다. 그는 때때로 빌더버그 그룹 회의에 참석했으며, 몽 페르린 협회에서 논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는 외무 장관으로 단 1년만 재임했다. 2005년 가을, 다비드는 새로운 세대가 이어갈 때가 되었다고 말하며 정계를 은퇴하겠다고 발표했다. 오랫동안 그의 측근이었던 게이르 하르데가 독립당 대표이자 외무 장관으로 그를 대신했다. 이러한 결정에 대한 가능한 기여 요인은 미디어 법안 실패로 인한 위기 직후의 짧지만 극적인 암 투병이었다.
2005년 10월, 다비드는 경제학 정규 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슬란드 중앙은행 총재로 임명되었다.[11][12] 2008년 가을 아이슬란드 은행 시스템 붕괴 이후, 아이슬란드는 국제 통화 기금과 우호국에 금융 지원을 요청해야 했다. 일부에서는 다비드가 이끌던 독립당이 추진한 정책, 예를 들어 규제 완화, 시장 자유화, 민영화가 붕괴를 초래했다며 비난했고, 이로 인해 붕괴에 대한 조사와 재판이 이어졌다.[13][14][15][16][17][18] 그 결과 다비드의 해임을 요구하는 여론이 일어났다. 중앙은행 앞에서 시위가 벌어진 후, 새로운 총리인 요한나 시귀르다르도티르는 다비드와 다른 두 명의 총재에게 사임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이 요청을 거부했다.[19] 2009년 2월 26일, 중앙은행 관련 법률 개정 이후 다비드는 은행에서 해임되었고, 노르웨이 경제학자 스베인 하랄드 외이가르드로 교체되었다.
2009년 4월, 다비드는 아이슬란드가 위기 이전 몇 년 동안 은행이 고위 정치인에게 제공한 "특이하고 관례적이지 않은 대출"에 대해 조사해야 한다고 말했다.[20]
== 모르군블라디드 편집장 (2009–현재) ==
2009년 9월 24일, ''모르군블라디드''(Morgunblaðið)의 새로운 소유주들은 다비드 오트손과 할랄두르 요한네센(사업 관련 신문 ''비드스키프타블라디드''(Viðskiptablaðið)의 전 편집자)을 신문 편집자로 고용했다고 발표했다.[21] 이 결정은 전 편집자인 올라푸르 Þ. 스테펜센의 해임 이후 새로운 편집자가 누구가 될지에 대한 많은 추측과 소문 속에 발표되었다.[22] 다비드가 편집장으로 취임한 이후, ''모르군블라디드'' 구독자의 3분의 1이 구독을 취소했다.[23] 2009년 이 신문은 6억 6700만 아이슬란드 크로나의 손실을 기록했다.[24]
2010년 4월에 발간된 아이슬란드 의회 특별 조사 위원회의 보고서에서는 다비드 오트손을 ''모르군블라디드''의 편집장으로 임명하고 경험 많은 많은 언론인들을 해고한 것이 아이슬란드의 미디어 소유주들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어떻게 조작을 하는지를 보여주는 예시로 언급되었다. "그들의 목표는 전문적이고 공정한 보도를 보장하기보다는 여론 저널리즘을 운영하고 특수한 이익을 보호하는 것으로 보인다."[25]
분류:아이슬란드의 정치인
분류:아이슬란드의 총리
분류:아이슬란드의 외무장관
분류:아이슬란드 독립당의 정치인
분류:레이캬비크 출신
분류:아이슬란드 대학교 동문
분류:1948년 태어남
분류:살아있는 사람
2. 1. 1. 레이캬비크 시장 (1982–1991)
다비드는 1982년, 자신의 지도력 아래 독립당이 4년 전에 세 개의 좌익 정당에 빼앗겼던 레이캬비크 시 의회에서 과반수를 되찾으면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기회를 얻었다. 다비드는 즉시 의원 수를 21명에서 15명으로 줄였고, 시에 속해 막대한 부담이 되었던 레이캬비크 최대의 어업 회사를 사립 어업 회사와 합병한 후, 새로운 회사인 그란디에 대한 시의 자산을 매각했는데, 그란디는 아이슬란드의 가장 큰 어업 회사 중 하나가 되었다. 덧붙여, 그란디의 이사였던 브륀욜푸르 비아르나손은 나중에 아이슬란드 전화 회사의 이사가 되었는데, 이는 다비드가 정부에서 마지막으로 추진한 민영화 사업이었다(2005년). 레이캬비크 시장으로서 다비드는 레이캬비크의 연못에 레이캬비크 시청을 건설하고, Öskjuhlíð의 오래된 물탱크 위에 회전식 레스토랑인 펄란을 건설하는 것을 주도했다. 다비드는 자유지상주의적인 성향에도 불구하고 레이캬비크 시립 극장을 지원했으며, 특히 1989년에 개관한 새로운 극장 건물을 지원했다. 다비드가 레이캬비크 시장으로 재임한 9년 동안, 새로운 구역인 Grafarvogur가 건설되었고, Kringlan 쇼핑몰 주변에 새로운 쇼핑 지역이 조성되었다. 강력하고 타협하지 않는 레이캬비크 시장이었던 다비드는 시 의회의 좌익 야당으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2. 1. 2. 아이슬란드 총리 (1991–2004)
1983년, 다비드 오트손의 오랜 친구이자 동맹인 토르스테인 팔손이 독립당의 대표로 선출되었고, 1989년 다비드는 당 부대표로 선출되었다. 토르스테인이 1988년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 당내에서는 지도부를 교체해야 한다는 여론이 팽배해졌고, 다비드는 1991년에 당 대표가 되었다. 다비드의 지도력 아래, 1991년 당은 의회 지지의 대부분을 되찾았다. 다비드는 사회 민주주의자들과 연립 정부를 구성했으며, 그 지도자인 욘 발드빈 한니발손이 외무 장관이 되었다. 욘 발드빈과 다비드는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발트 3국의 독립을 소련 붕괴 전에 가장 먼저 재인정하는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결정했다.다비드 정부는 막대한 예산 적자와 비생산적인 투자를 물려받았다. 예산 적자는 1996년에 흑자로 전환되었는데, 이는 다비드와 재무 장관이었던 프리드리크 소푸손의 긴밀한 협력 덕분이었다. 그 이후 거의 지속적으로 흑자가 유지되었으며, 이는 공공 부채를 줄이고 연금 제도를 개혁하는 데 사용되었다. 일부 소규모 기업이 민영화되었다. 중앙 은행을 정치적 압력에서 크게 독립시킴으로써 통화 제약이 가해졌다. 또한, 다비드 오트손 정부는 1990년 노조와 고용주 간의 "국가 협약" 덕분에 인플레이션을 낮출 수 있었다. 1991년부터 아이슬란드의 인플레이션은 주변 국가와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다.
1994년, 사회민주당이 분열되면서 1995년 총선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 연립 정부는 간신히 과반수를 유지했지만, 단 한 석 차이였다. 따라서 다비드 오트손은 진보당과 연립 정부를 구성하기로 결정했고, 그 지도자인 할도르 아스그림손이 외무부 장관이 되었다. 새 정부에서 민영화는 이전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진행되었다. 대규모의 중요한 수산물 가공 공장 체인이 매각되었고, 일부 공공 투자 펀드가 합병되어 민간 투자 은행으로 매각되었으며, 정부가 통제하는 두 개의 상업 은행이 몇 단계에 걸쳐 매각되었다.
다비드의 두 정부는 미국의 든든한 동맹국이었으며, 북대서양 조약 기구를 강력하게 지지했다. 그는 미국과 동맹국들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수행한 조치를 확고히 지지하여 아이슬란드 좌파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다비드는 유럽 연합 가입에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다비드 오트손 정부(1995–2004)는 감세 정책을 시작했다. 법인세를 18%로 인하했고, 순자산세를 폐지했으며, 개인 소득세와 상속세를 낮췄다. 이러한 경제 개방은 아이슬란드에 기업가적 분위기를 조성하여 국내 경제 성장을 촉진했지만, 2008-2011 아이슬란드 금융 위기의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2002년, 바우구르 그룹에 대한 논란이 아이슬란드에서 시작되었다. 국회에서 당시 사회민주당 대표인 외수르 스카르페딘손은 독점 가격 책정 가능성에 대한 면밀한 감독을 요구하며, 특히 바우구르를 언급했다. 다비드도 이에 동의했다. 2002년 여름, 아이슬란드 경찰은 바우구르 본사를 급습했다. 바우구르의 두 주요 소유주는 다비드가 그들을 상대로 캠페인을 벌였다고 비난했다. 그들은 신문인 ''프레트블라디드''를 인수했다. 이 신문은 2003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비드에 반대했다. 2003년 2월 9일 연설에서 사회민주동맹의 주요 대변인인 잉기보르그 솔룬 기슬라도티르는 다비드가 사업가 욘 올라프손에 대한 세무 조사를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바우구르에 대한 경찰 급습에도 책임이 있을 수 있다고 암시했다.
2003년 그는 아이슬란드의 은행법을 자유화하여 투명성을 낮추었고, 이는 막대한 외화와 높은 이자율을 가져왔다.[5]
2003년 3월 18일, 다비드와 외무장관 할도르 아스그림손은 아조레스 회담에서 미국, 영국, 스페인이 발표한 최후 통첩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이들 3개국은 사담 후세인 정부가 물러나지 않을 경우 이라크를 침공할 의사를 밝혔다.[6] 다비드와 할도르의 지지 선언으로 인해 아이슬란드는 의용군 연합 회원국 명단에 올랐다.[7] 다비드와 할도르는 이 발표를 하기 전에 의회의 외교 위원회와 협의하지 않았다.[8] 사회민주동맹 의장인 외수르 스카르페딘손과 좌파-녹색 운동 의장인 스테잉림쉬르 J. 시그푸손은 전쟁 지지를 발표하면서 의회 의정서를 위반했다고 정부를 비난했다.[9]
다비드 정부의 이라크 전쟁 지지는 아이슬란드 국민들 사이에서 대체로 인기가 없었다. 전쟁 발발 직후, ''프레티블라디드''가 발표한 여론 조사에서 응답자의 76%가 정부의 전쟁 지지에 반대한다고 답했다.[9] 2005년 갤럽이 발표한 여론 조사에서 응답자의 84%가 아이슬란드가 의용군 연합 명단에 포함된 것에 반대한다고 답했다.[10]
2. 1. 3. 외무부 장관 및 중앙은행 총재 (2004–2009)
2003년 선거 이후, 다비드 오트손은 연립 파트너인 외무 장관 할도르 아스그림손과 다비드가 2004년 9월 15일까지 총리직을 유지하고, 그 후 할도르가 총리가 되며, 독립당은 총리직을 넘겨주는 대가로 파트너로부터 정부 내 추가 장관직을 얻는 데 합의했다.2004년, 다비드는 대형 사기업이 단일 미디어 회사의 지분 15% 이상을 소유하는 것을 금지하고, 신문과 텔레비전 방송국을 동일 회사가 소유할 수 없도록 하는 법안을 제출하면서 논란에 휩싸였다. 다비드는 이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미디어가 집중되는 것을 막고, 미디어가 정치인뿐만 아니라 재벌에게도 독립적이고 비판적인 입장을 유지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비판자들은 이 제안이 다비드가 정치적 적으로 간주한 바우구르 그룹을 직접 겨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바우구르는 다른 신문, 욘 악셀 올라프손이 소유한 텔레비전 방송국, 그리고 몇 개의 라디오 방송국을 인수하여 미디어 시장의 절반 이상을 장악하고 있었다. 알싱기는 미디어 법안의 내용을 대폭 완화하여 통과시켰다. 그러나 2004년 여름, 아이슬란드 공화국 역사상 처음으로 올라푸르 라그나르 그림손 대통령은 법안 서명을 거부했다. 다비드는 이에 대해 비판하며, 욘 악셀 올라프손이 소유했던 텔레비전 방송국을 바우구르가 인수한 후, 이 방송국의 국장인 시구르두르 G. 구드요운손이 올라푸르 라그나르의 첫 번째 대통령 선거 캠페인 매니저였고, 올라푸르의 딸이 바우구르에 고용되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바우구르는 경쟁사보다 더 저렴한 가격을 제공하는 매장을 운영했고, 소유주인 욘 아스게이르 요한네손과 요하네스 요운손이 아이슬란드의 헝겊에서 부자로의 꿈을 구현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아이슬란드에서 상당한 호감을 얻었다. 많은 사람들은 미디어 법안이 일반적인 법을 만들려는 시도라기보다는 정치적 싸움의 일부인 것처럼 보인다는 데 동의했다. 오랜 갈등의 결론은 아이슬란드 헌법에 따라 대통령이 법안 서명을 거부할 경우 국민투표를 실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다비드 오트손이 법안을 철회한 것이었다.
총리 재임 14년 동안 다비드는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과 조지 W. 부시,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바츨라프 클라우스, 이탈리아 총리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를 포함한 많은 서방 지도자들과 친분을 맺거나 친구가 되었다. 그는 때때로 빌더버그 그룹 회의에 참석했으며, 몽 페르린 협회에서 논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는 외무 장관으로 단 1년만 재임했다. 2005년 가을, 다비드는 새로운 세대가 이어갈 때가 되었다고 말하며 정계를 은퇴하겠다고 발표했다. 오랫동안 그의 측근이었던 게이르 하르데가 독립당 대표이자 외무 장관으로 그를 대신했다. 이러한 결정에 대한 가능한 기여 요인은 미디어 법안 실패로 인한 위기 직후의 짧지만 극적인 암 투병이었다.
2005년 10월, 다비드는 경제학 정규 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슬란드 중앙은행 총재로 임명되었다.[11][12] 2008년 가을 아이슬란드 은행 시스템 붕괴 이후, 아이슬란드는 국제 통화 기금과 우호국에 금융 지원을 요청해야 했다. 일부에서는 다비드가 이끌던 독립당이 추진한 정책, 예를 들어 규제 완화, 시장 자유화, 민영화가 붕괴를 초래했다며 비난했고, 이로 인해 붕괴에 대한 조사와 재판이 이어졌다.[13][14][15][16][17][18] 그 결과 다비드의 해임을 요구하는 여론이 일어났다. 중앙은행 앞에서 시위가 벌어진 후, 새로운 총리인 요한나 시귀르다르도티르는 다비드와 다른 두 명의 총재에게 사임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이 요청을 거부했다.[19] 2009년 2월 26일, 중앙은행 관련 법률 개정 이후 다비드는 은행에서 해임되었고, 노르웨이 경제학자 스베인 하랄드 외이가르드로 교체되었다.
2009년 4월, 다비드는 아이슬란드가 위기 이전 몇 년 동안 은행이 고위 정치인에게 제공한 "특이하고 관례적이지 않은 대출"에 대해 조사해야 한다고 말했다.[20]
2. 1. 4. 모르군블라디드 편집장 (2009–현재)
2009년 9월 24일, ''모르군블라디드''(Morgunblaðið)의 새로운 소유주들은 다비드 오트손과 할랄두르 요한네센(사업 관련 신문 ''비드스키프타블라디드''(Viðskiptablaðið)의 전 편집자)을 신문 편집자로 고용했다고 발표했다.[21] 이 결정은 전 편집자인 올라푸르 Þ. 스테펜센의 해임 이후 새로운 편집자가 누구가 될지에 대한 많은 추측과 소문 속에 발표되었다.[22] 다비드가 편집장으로 취임한 이후, ''모르군블라디드'' 구독자의 3분의 1이 구독을 취소했다.[23] 2009년 이 신문은 6억 6700만 아이슬란드 크로나의 손실을 기록했다.[24]2010년 4월에 발간된 아이슬란드 의회 특별 조사 위원회의 보고서에서는 다비드 오트손을 ''모르군블라디드''의 편집장으로 임명하고 경험 많은 많은 언론인들을 해고한 것이 아이슬란드의 미디어 소유주들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어떻게 조작을 하는지를 보여주는 예시로 언급되었다. "그들의 목표는 전문적이고 공정한 보도를 보장하기보다는 여론 저널리즘을 운영하고 특수한 이익을 보호하는 것으로 보인다."[25]
3. 논란
2003년 3월 18일, 다비드는 할도르 아스그림손 외무장관과 함께 아조레스 회담에서 미국, 영국, 스페인이 발표한 최후 통첩을 지지했다. 이들 국가는 사담 후세인 정부가 물러나지 않으면 이라크를 침공하겠다고 밝혔다.[6] 이로 인해 아이슬란드는 의용군 연합 회원국 명단에 올랐다.[7] 다비드와 할도르는 의회 외교 위원회와 협의 없이 이 발표를 했는데, 이라크 전쟁 지지가 주요 외교 정책 결정으로 간주될 수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8] 외수르 스카르페딘손(사회민주동맹 의장)과 스테잉림쉬르 J. 시그푸손(좌파-녹색 운동 의장)은 정부가 의회 의정서를 위반했다고 비난했다.[9]
이라크 전쟁에 대한 다비드 정부의 지지는 아이슬란드 국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다. 전쟁 직후 ''프레티블라디드'' 여론 조사에서 응답자의 76%가 정부 지지에 반대했다.[9] 2005년 갤럽 조사에서는 84%가 아이슬란드가 의용군 연합에 포함된 것에 반대했다.[10]
2005년 10월, 다비드는 경제학 정규 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아이슬란드 중앙은행 총재로 임명되었다.[11][12] 2008년 가을 아이슬란드 은행 시스템 붕괴 이후, 아이슬란드는 국제 통화 기금과 우호국에 금융 지원을 요청해야 했다. 일각에서는 다비드가 이끌던 독립당의 규제 완화, 시장 자유화, 민영화 정책이 붕괴를 초래했다고 비난하며, 조사와 재판이 이어졌다.[13][14][15][16][17][18] 다비드의 해임을 요구하는 여론이 일었고, 중앙은행 앞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요한나 시귀르다르도티르 총리는 다비드와 다른 두 총재에게 사임을 요청했지만, 그는 거부했다.[19] 2009년 2월 26일, 중앙은행 관련 법률 개정 이후 다비드는 해임되고 스베인 하랄드 외이가르드로 교체되었다.
2009년 4월, 다비드는 아이슬란드가 위기 이전 몇 년 동안 은행이 고위 정치인에게 제공한 "특이하고 관례적이지 않은 대출"에 대해 조사해야 한다고 말했다.[20]
다비드는 정치 경력 전반에 걸쳐 기후 변화 부정에 관여해 왔으며, 온실 가스 배출 제한 시도에 비판적이었다. 2000년대 초, 다비드 정부는 아이슬란드가 약 330만 톤의 이산화 탄소를 협약 의무에서 제외하는 양보를 얻기 전 교토 의정서 가입을 거부했다.[29] 1997년 신년사에서 다비드는 "취약한 근거에 기반한 과학"을 토대로 두려움을 부추기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했다.[30] 2005년 독립당 전당대회 연설에서 다비드는 교토 의정서가 "매우 취약한 기반"에 근거하고 있으며, 기후 변화 공론이 "알 수 없는 감정주의와 최악의 경우 공허한 선전"에 기반한다고 반복했다.[31]
2016년 아이슬란드 대통령 후보 출마 당시 텔레비전 토론에서 다비드는 기후 변화의 과학적 현실에 의문을 제기한 적이 없다고 부인하며 "계산과 과학적 도구를 부인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그는 기후 변화 대처 시도에 대한 회의론을 반복하며, 미국, 인도, 중국 등의 완전한 참여 없이는 비효율적이라고 밝혔다.[32]
다비드가 ''모르군블라디드'' 편집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신문은 기후 변화 현실을 부정하고 대처 노력을 비판하는 사설과 기사를 정기적으로 게재했다.[33][34]
2018년, 다비드는 도널드 트럼프에 대한 공개적인 지지자라고 밝혔다.[35][36]
2021년 1월, 1월 6일 미국 국회의사당 공격 이후, 다비드는 도널드 트럼프보다 더 "''부당하게 괴롭힘을 당한"'' 대통령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조 바이든이 ''"미국 역사상 가장 무능한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37]
2024년 2월, 다비드는 민주당을 비판하고 도널드 트럼프 뉴욕 재판에 대한 지지를 보냈다.[38]
4. 기타
다비드는 공직을 맡은 이후 풍자, 코미디, 캐리커처의 대상이 되어 왔다. 1989년부터 2014년까지, 그는 코미디언 외른 아르나손에 의해 Spaugstofan과 연례 Áramótaskaupið에서 정기적으로 풍자되었으며, 1986년부터 2012년까지는 2001년의 스케치 ''Dabbi Kóngur''를 포함한다.[39] 2009년에는 다비드가 Áramótaskaupið를 위해 사용되지 않은 스케치의 일부가 되었으며, 여기서 그는 외른 아르나손이 자신을 연기하는 역할을 했다.[4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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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Davíð viss um stórsigur Trumps í Hæstarét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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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emmtilegi karlinn í sjónvarpin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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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íð sem Örn sem Daví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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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íð Oddsson klipptur út úr Áramótaskaupin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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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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