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클린턴
1. 개요
빌 클린턴은 1946년 아칸소주에서 태어나 조지타운 대학교, 옥스퍼드 대학교, 예일 로스쿨을 졸업했다. 그는 아칸소 주 법무장관과 주지사를 역임했으며,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1993년부터 2001년까지 제42대 대통령으로 재임했다. 재임 중 경제 회복과 외교 정책에 힘썼으나,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스캔들로 탄핵안이 가결되기도 했다. 퇴임 후에는 자서전 출간, 재단 설립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으며, 힐러리 클린턴과 결혼하여 첼시 클린턴을 두고 있다.
| 이름 | 윌리엄 제퍼슨 블라이스 3세 |
|---|---|
| 출생일 | 1946년 8월 19일 |
| 출생지 | 미국 아칸소주 호프 |
| 정당 | 민주당 |
| 배우자 | 힐러리 로댐 (1975년 10월 11일 결혼) |
| 자녀 | 첼시 클린턴 |
| 부모 | 윌리엄 제퍼슨 블라이스 2세 버지니아 캐시디 |
| 학력 | 조지타운 대학교 (학사) 옥스퍼드 대학교 예일 대학교 (법무박사) |
| 친척 | 클린턴 가문 |
| 수상 | 전체 목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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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직책 | 1986–1987: 전국 주지사 협회 의장 1985–1986: 전국 주지사 협회 부의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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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위 | 제42대 미국 대통령 |
|---|---|
| 임기 시작 | 1993년 1월 20일 |
| 임기 종료 | 2001년 1월 20일 |
| 부통령 | 앨 고어 |
| 전임 대통령 | 조지 H. W. 부시 |
| 후임 대통령 | 조지 W. 부시 |
| 직위 | 제40대 및 42대 아칸소 주지사 |
|---|---|
| 부지사 | 조 퍼셀 윈스턴 브라이언트 짐 가이 터커 |
| 첫 번째 임기 시작 | 1979년 1월 9일 |
| 첫 번째 임기 종료 | 1981년 1월 19일 |
| 두 번째 임기 시작 | 1983년 1월 11일 |
| 두 번째 임기 종료 | 1992년 12월 12일 |
| 전임 주지사 | 프랭크 D. 화이트 |
| 후임 주지사 | 짐 가이 터커 |
| 직위 | 제50대 아칸소주 법무장관 |
|---|---|
| 주지사 | 데이비드 프라이어 조 퍼셀 (대행) |
| 임기 시작 | 1977년 1월 3일 |
| 임기 종료 | 1979년 1월 9일 |
| 전임 법무장관 | 짐 가이 터커 |
| 후임 법무장관 | 스티브 클라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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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턴가 -
힐러리 클린턴
힐러리 클린턴은 미국의 정치인이자 변호사로, 아칸소주 영부인, 미국의 영부인, 뉴욕주 연방 상원의원, 국무장관을 역임했으며,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 -
클린턴가 -
첼시 클린턴
빌 클린턴과 힐러리 클린턴의 딸인 첼시 클린턴은 작가이자 글로벌 보건 옹호 활동가로, 여러 대학에서 학위를 받았으며 NBC 뉴스 특파원과 클린턴 재단 부의장 등으로 활동했다. -
아칸소주의 정치인 -
더글러스 맥아더
더글러스 맥아더는 제1, 2차 세계 대전과 한국 전쟁에서 활약한 미국의 군인이자 필리핀 식민지 통치자, 극동군 지휘관, 일본 점령사령부 수장, 미합중국 육군 원수였다. -
아칸소주의 정치인 -
브랜트 스미스
브랜트 스미스는 미국의 정치인으로, 아칸소 하원 의원을 역임했으며 하원 사법 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
아칸소주의 변호사 -
힐러리 클린턴
힐러리 클린턴은 미국의 정치인이자 변호사로, 아칸소주 영부인, 미국의 영부인, 뉴욕주 연방 상원의원, 국무장관을 역임했으며,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 -
아칸소주의 변호사 -
에이사 허친슨
에이사 허친슨은 미국의 정치인, 변호사, 사업가로서, 아칸소 서부 연방지방법원 연방 검사, 미국 하원 의원, 마약 단속국 국장, 국토안보부 국경 및 교통 보안국 차관을 역임하고 2015년부터 2023년까지 아칸소 주지사를 지냈으며, 2024년 미국 대통령 선거 공화당 경선에 출마했었다.
2. 어린 시절과 교육
빌 클린턴은 1946년 8월 19일 아칸소주 홉의 줄리아 체스터 병원에서 윌리엄 제퍼슨 블라이스 3세(William Jefferson Blythe III영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윌리엄 제퍼슨 블라이스 주니어(William Jefferson Blythe Jr.영어)는 여행 판매원이었으며, 클린턴이 태어나기 3개월 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그의 어머니 버지니아 델 캐시디(Virginia Dell Cassidy영어, 후에 버지니아 켈리(Virginia Kelley영어)로 개명)는 클린턴이 태어난 후 간호사가 되기 위해 뉴올리언스로 가서 공부했고, 그 동안 클린턴은 홉에서 작은 식료품점을 운영하던 외조부모 엘드리지와 에디스 캐시디 밑에서 4살까지 자랐다. 당시 미국 남부는 인종 차별이 심했지만, 그의 외조부모는 모든 인종에게 외상으로 물건을 팔았다.
1950년, 어머니 버지니아가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핫스프링스에서 자동차 대리점을 공동 소유하고 있던 로저 클린턴 시니어(Roger Clinton Sr.영어)와 재혼하면서 가족은 핫스프링스로 이사했다. 클린턴은 계부의 성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15세 때 계부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자신의 성을 공식적으로 '클린턴'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계부 로저 클린턴은 알코올 중독자이자 도박꾼이었으며, 어머니와 이복동생 로저 클린턴 주니어에게 자주 폭력을 행사했다. 클린턴은 어린 시절 계부의 폭력으로 인해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으며, 14세 때는 계부에게 맞서 어머니와 동생을 보호하려 하기도 했다. 그는 나중에 계부가 세상을 떠날 무렵이 되어서야 그의 학대 행위를 용서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핫스프링스에서 클린턴은 세인트 존 가톨릭 초등학교, 램블 초등학교를 거쳐 당시 인종 분리 정책이 시행되던 핫스프링스 고등학교에 다녔다. 그는 학창 시절 활발한 학생 지도자였고, 책 읽기를 즐겼으며, 음악에도 재능을 보여 테너 색소폰 연주자로 활동하며 주립 밴드 경연대회에서 1등을 하기도 했다. 또한,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재즈 트리오 '더 3 킹스'를 결성해 활동했다.
클린턴은 16세 무렵 공직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자서전 내 인생에서 음악이나 의학 분야에서도 성공할 수 있었겠지만, 공직이야말로 자신이 진정으로 뛰어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특히 1963년에 있었던 두 가지 경험은 그가 정치인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하나는 청소년 정치 프로그램인 보이즈 네이션의 대표로 선발되어 백악관을 방문했을 때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악수한 경험이었고, 다른 하나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의 역사적인 "나는 꿈이 있다" 연설을 텔레비전으로 시청하고 깊은 감명을 받은 것이었다. 그는 이 연설을 나중에 전부 외울 정도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클린턴은 1964년 조지타운 대학교 외교학부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 그는 J. 윌리엄 풀브라이트 상원의원 사무실에서 일하며 정치 경험을 쌓았고, 아프리카계 미국인 민권 운동과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에도 관심을 가졌다. 1968년 국제학 학사 학위를 받고 조지타운 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로즈 장학금을 받아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2년간 유학했다. 옥스퍼드 유학 시절, 그는 징병을 면제받았으며 영국에서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다. 1970년에는 미국으로 돌아와 예일 로스쿨에 입학했고, 1973년 법학 박사 학위(Juris Doctor영어)를 취득하며 학업을 마쳤다.
2.1. 아칸소 주에서의 정치 경력
예일대 로스쿨 졸업 후 아칸소 대학교 로스쿨에서 강의하던 클린턴은 1974년 중간선거에서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하며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아칸소주 제3선거구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승리했으나, 본선에서는 워터게이트 사건의 여파 속에서도 공화당 현역 의원에게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다.
1975년 10월 11일, 클린턴은 예일 로스쿨에서 만난 힐러리 로덤과 결혼했다. 1976년에는 아칸소주 법무장관 선거에 출마하여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승리했고, 본선에서는 공화당 후보가 없어 무투표로 당선되었다. 그는 1977년부터 1979년까지 법무장관으로 재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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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클린턴은 아칸소 주지사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32세의 나이로 미국 최연소 주지사 기록을 세우며 주목받았다. 주지사로서 그는 교육 수준 향상과 도로 정비 등에 힘썼다. 그러나 첫 임기 동안 자동차 등록세 인상 추진 등 일부 정책은 주민들의 반발을 샀다.
1980년 딸 첼시가 태어났다. 같은 해 봄, 지미 카터 대통령의 요청으로 쿠바 난민들을 아칸소주 주방위군 시설에 수용하기로 했으나, 이후 난민들이 폭동을 일으키면서 클린턴에게 정치적 부담이 되었다. 결국 자동차 등록세 인상 문제와 쿠바 난민 사태 등이 겹치면서, 그해 재선에 도전했으나 공화당의 프랭크 D. 화이트에게 패배했다. 당시 아칸소 주지사 임기는 2년이었다.
1982년 주지사 선거에서 클린턴은 "적응과 타협의 중요성을 배웠다"고 강조하며 재기에 성공, 프랭크 D. 화이트를 꺾고 55%의 득표율로 주지사직에 복귀했다. 이후 그는 교육, 보건, 복지 분야의 개혁을 추진하며 주지사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1984년, 1986년, 1990년 선거에서도 연이어 당선되어 1992년 대통령 선거 출마를 위해 사임할 때까지 총 5선 주지사를 역임했다.
주지사 재임 기간 동안 클린턴은 남부 성장 정책 위원회 이사장, 전미 주지사 협회 부회장 및 회장(1986년~1987년), 전주 교육 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정치적 입지를 넓혔다. 1991년에는 동료 주지사들에 의해 가장 효과적인 주지사로 선정되었고, 민주당 내 온건파 그룹인 민주당 지도자 협의회(Democratic Leadership Council) 의장을 맡기도 했다. 같은 해 클린턴은 대통령 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3.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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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클린턴은 아칸소주에서의 정치적 경력을 발판 삼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도전했다. 그는 1974년 중간선거에서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승리했으나, 본선에서는 워터게이트 사건의 여파 속에서도 공화당 현직 후보에게 아쉽게 패배했다. 1977년 아칸소주 법무장관 선거에서는 공화당 후보 없이 무투표로 당선되었고, 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당 후보 지미 카터의 선거 운동을 도왔다.
1978년 아칸소주 주지사 선거에서 승리하며 32세의 젊은 나이로 주지사가 되어 주목받았다. 주지사로서 교육 수준 향상과 도로 정비에 힘썼으나, 쿠바 난민 수용 문제와 자동차 등록세 인상 등으로 인해 1980년 재선에 실패했다. 그러나 1982년 주지사 선거에서 다시 승리하여 복귀했고, 이후 1984년, 1986년, 1990년 선거에서 연이어 당선되며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 출마 전까지 주지사직을 역임했다. 이 기간 동안 전미 주지사 협회 회장 등을 맡으며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클린턴은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현직 대통령 조지 H. W. 부시(공화당)를 누르고 제42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의 당선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 최초의 대통령이자, 당시로서는 드물게 군 경력이 없는 대통령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199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하여,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이후 처음으로 재선에 성공한 민주당 대통령이 되었다. 클린턴은 2기 8년 동안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취임 당시 46세였던 클린턴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존 F. 케네디에 이어 세 번째로 젊은 나이에 대통령직에 올랐으며, 연속 2기 임기를 마친 대통령 중에서는 취임 및 퇴임 나이 모두 최연소 기록을 가지고 있다. 또한 2020년 5월에는 제임스 매디슨의 기록을 넘어 퇴임 후 가장 오래 생존한 전직 대통령이 되었다.
3.1. 1992년 대통령 선거
클린턴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 예비선거에서 승리한 후, 198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던 앨 고어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이전 선거에서 부시 측의 네거티브 캠페인에 패배한 경험이 있는 마이클 두카키스의 선거 참모들을 영입하여 상대의 공세에 효과적으로 방어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선거 운동 기간 동안 클린턴은 "It's the economy, stupid영어"라는 구호를 전면에 내세우며 경제 회복을 핵심 공약으로 삼았다.
본선에서는 외교 분야에서 성과를 거둔 현직 대통령 조지 H. W. 부시(공화당)와 맞붙었다. 클린턴은 부시를 누르고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으며, 이듬해인 1993년 1월 20일 제42대 미국의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클린턴의 당선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 중 첫 대통령이라는 상징성을 가졌으며, 당시로서는 드물게 군 복무 경력이 없는 대통령이기도 했다. 또한 그의 승리로 로널드 레이건과 조지 H. W. 부시로 이어진 12년간의 공화당 집권기가 막을 내렸고, 지미 카터 행정부 이후 처음으로 민주당이 백악관과 의회 양원을 모두 장악하게 되었다. 선거 당시 일본에서는 클린턴이 젊은 시절 보이즈 네이션 대표로 백악관을 방문하여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악수하는 모습이 담긴 영상이 광고 등에 자주 활용되기도 했다.
3.2. 1996년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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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클린턴은 공화당 후보 밥 돌을 상대로 국민 투표 득표율 49%와 선거인단 279명을 확보하며 압도적인 승리로 재선되었다. 이로써 클린턴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이후 처음으로 재선에 성공한 민주당 출신 대통령이 되었다.
4. 대통령 재임 (1993~2001)
2000년 6월 5일, 클린턴은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러시아의 두마에서 연설하며, 미국의 미사일 방어 체제에 대한 러시아의 우려를 불식시키려 시도했다. 같은 해 전자 서명의 법적 효력을 인정한 전자 서명법에 서명하였다.
수년간 지속된 화이트워터 사건 조사는 2000년 9월 20일, 클린턴 대통령이나 부인 힐러리 여사가 범죄 행위에 연루되었다는 충분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는 결론과 함께 마무리되었다.
10월에는 캠프데이비드에서 이스라엘의 에후드 바라크 총리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야세르 아라파트 의장 간의 긴급 회의를 주재하여 중동 지역의 폭력 사태 종식을 위한 협정을 모색했으나, 양측이 완전히 만족하는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다. 같은 달, 중화인민공화국에 영구적 정상 무역 관계(PNTR) 지위를 부여하는 법안에 서명하여 행정부의 주요 무역 성과를 확정지었다. 이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이후 가장 중요한 미국의 무역 관련 입법 조치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국내적으로는 음주 운전 단속 기준을 혈중 알코올 농도 0.08%로 강화하는 법안에 서명했으며, 이 법안의 지지자들은 새로운 국가 표준이 매년 수백 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또한 북동부 지역을 위한 난방유 비축 제도를 영구적으로 설립하고, 비상시 백악관이 비축유를 더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에도 서명했다.
임기 말인 2000년 11월에는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베트남을 방문하여 하노이와 워싱턴 D. C. 간의 관계 개선을 추진하는 등 외교 및 국내 정책에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4.1. 국내 정책
클린턴 행정부는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을 향해 “It's the economy, stupid! (경제가 문제야, 바보야!)”라고 비판하며 경제 회복과 재정 적자 감축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초기부터 경제 정책에 집중하여 미국 경제의 중심축을 중화학 공업에서 IT 및 하이테크 산업으로 전환하는 데 힘썼다. 이러한 노력은 미국 역사상 평시 최장 기간의 경제 호황으로 이어졌으며, 인플레이션 없는 경제 성장을 달성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클린턴 행정부의 경제 정책은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의 레이거노믹스에 대비되어 “클린토노믹스”라고 불린다.
1994년 중간선거에서 뉴트 깅리치가 이끄는 공화당이 상하원을 모두 장악하자, 클린턴 행정부는 공화당의 주요 의제였던 재정 적자 감축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앨런 그린스펀 연방준비제도 의장의 자문을 받아 균형 재정을 목표로 설정하고, 임기 말인 2000년에는 230의 재정 흑자를 달성하며 재정 적자를 완전히 해소했다. 다만, 무역 적자는 해결하지 못했다. 조세 정책에서는 레이거노믹스 시기에 인하되었던 고소득자의 소득세율을 다시 인상했다. 이는 선거 운동 당시 '잊혀진 중산층'을 위한 감세를 약속했던 것과는 다른 행보였으나, 결과적으로 재정 건전성 확보에 기여했다. 한편으로는 규제 완화와 감세를 추진하기도 했는데, 이는 클린턴이 속했던 신민주당의 중도 노선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무역 분야에서는 1993년 북미자유무역협정 (NAFTA)을 체결하여 자유 무역을 확대했으며, 2000년에는 중화인민공화국에 영구적이고 정상적인 무역 관계 지위를 부여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이는 NAFTA 이후 가장 중요한 미국의 무역 관련 입법 조치로 평가받는다.
사회 정책 분야에서는 부인 힐러리 클린턴이 제안한 의료보험제도 개혁을 추진하여 국민건강보험제도 도입을 시도했으나, 민간 보험 회사와 기업들의 강력한 반대로 인해 의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실패했다. 복지 분야에서는 신민주당의 주요 인물로서 복지 개혁을 주장했다.
범죄 예방과 관련해서는 사형 제도에 대한 입장을 바꾸었다는 평가가 있다. 초기에는 반대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1992년 대선 과정에서는 민주당이 더 이상 "무고한 사람을 보호하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아칸소 주지사 시절에는 사형 집행을 재개하고 감독했으며, 논란이 된 리키 레이 레크터의 사형 집행을 예정대로 진행하도록 직접 확인하기도 했다. 또한, 2000년에는 음주 운전 단속 기준을 혈중알콜농도 0.08%로 강화하는 법안에 서명하여 이전보다 엄격한 국가 표준을 마련했다.
앨 고어 부통령이 제안한 “정보 고속도로 구상”을 적극 추진하여 IT 산업 육성과 정보 통신 기술 발전을 장려했다. 교육 분야에서도 학교에 PC를 보급하는 등 IT 교육을 강화하고, 취학 전 아동을 위한 조기 교육 프로그램 확대와 이민자의 영어 교육 지원을 추진했다.
그 외 국내 정책으로는 2000년에 전자 서명의 법적 효력을 인정한 전자 서명법에 서명했으며, 북동부 지역의 안정적인 난방유 공급을 위해 비축 제도를 영구화하는 법안에도 서명했다.
4.2. 외교 정책
부시 행정부가 국내 문제와 경제 문제를 경시한다고 비판하며 백악관에 입성했지만, 클린턴은 외교 분야에서 상대적으로 경험이 부족했다. 그의 정치 경력은 아칸소 지역 정치에 국한되었고, 민주당 내에도 외교 전문가가 부족하다는 평가가 있었다. 이로 인해 그의 초기 외교 정책은 즉흥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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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후반기에 클린턴은 외교 문제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93년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간의 오슬로 협정 체결을 중재하는 등 중동 평화 정착에 힘썼다. 2000년 10월 16일에는 캠프데이비드에서 에후드 바라크 이스라엘 총리와 야세르 아라파트 PLO 의장 간의 긴급 회의를 주재하여 폭력 사태 종식을 모색했으나, 양측이 의도를 밝혔음에도 완전한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다.
러시아와의 관계에서는 2000년 6월 5일,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러시아 두마(하원)에서 연설하며 미국의 미사일 방어 계획에 대한 러시아의 우려를 불식시키려 노력했다.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 개선에도 힘써, 2000년에는 중국에 영구적 정상 무역 관계(Permanent Normal Trade Relations, PNTR) 지위를 부여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이는 1993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통과 이후 가장 중요한 미국의 무역 관련 입법 조치로 평가받는다.
아시아 지역에서는 2000년 11월 13일부터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국 대통령 최초로 베트남을 방문하여 하노이와 워싱턴 D. C. 간의 관계 개선을 도모했다. 또한 한반도 문제에도 관심을 보여, 2000년 10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조명록 조선인민군 차수와 백악관에서 회담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임기 후반의 적극적인 외교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중동 평화 문제나 한반도 문제 등에서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임기를 마쳤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4.3. 탄핵
빌 클린턴은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 이전부터 여러 의혹과 스캔들에 연루되어 있었다. 특히 화이트워터 의혹은 아칸소 주지사 시절 부인 힐러리와 함께 부동산 개발회사 "화이트워터"를 공동 경영하며 부적절한 토지 거래 및 대출을 받았다는 의혹이다. 이 사건은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가장 큰 대통령 관련 부정 의혹으로 여겨져, 의회는 조사 위원회를 설치하고 약 8년간 조사를 벌였으나 클린턴 부부의 범죄 행위를 입증할 명확한 증거는 찾지 못했다. 이 화이트워터 의혹을 조사하던 케네스 스타 특별검사는 이후 클린턴 대통령과 백악관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의 부적절한 관계, 즉 르윈스키 스캔들에 대한 조사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비록 원본 소스에는 명시적인 탄핵 절차(하원 소추, 상원 심판)에 대한 상세 정보는 없지만, 케네스 스타 특검의 조사는 클린턴 대통령에 대한 탄핵 추진의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다.
5. 퇴임 이후
대통령 퇴임 후에는 퇴임 직전 상원의원이 된 부인 힐러리 클린턴의 선거구인 뉴욕시 하렘에 사무실을 열었다. 전 세계를 돌며 강연 활동 등을 벌였는데, 거액의 사례금을 받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클린턴 행정부 직원들은 부시 전 대통령으로부터 백악관을 인계받을 때 컴퓨터의 하드디스크를 모두 제거당하는 일을 겪었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그의 아들인 조지 W. 부시의 직원들과 교체할 때 키보드에서 “W” 키만 뽑아내는 일화를 남겼다.
2003년에는 켄트 나가노가 지휘하는 러시아 국립 오케스트라의 프로코피예프 『피터와 늑대』 CD 녹음에 참여했다. 이 음반에는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 등도 참여했으며, 클린턴은 프랑스 작곡가 장-파스칼 뱅튀스의 “늑대가 걷는 길” 낭독을 맡았다. 이 음반은 그래미상 최우수 어린이 낭독 음반상을 수상했다.
2004년 6월,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불륜 사건 등을 포함한 회고록 『마이 라이프』(My Life영어)를 출판했다. 이 책은 출간 당일 일부 서점에 줄이 늘어설 정도로 큰 인기를 끌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같은 해 9월에는 건강 이상으로 관상동맥 이상이 발견되어 우회 수술을 받았다.
2004년 7월 보스턴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 연설에서는 만장의 박수와 환호를 받았다. 여러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기는 여전하여, 2012년 7월 갤럽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의 66%가 클린턴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답했으며, 공화당 지지자 중에서도 50%가 호감을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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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1월 18일에는 고향인 아칸소주 리틀록에 “윌리엄 J. 클린턴 대통령 센터”(대통령 도서관)가 문을 열었다.
2007년 1월, 부인 힐러리가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하자,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높은 인지도와 인기를 바탕으로 힐러리의 선거 운동을 적극 지원했다. 때때로 경쟁 후보였던 버락 오바마를 비판하기도 했으나, 오바마가 민주당 후보로 확정된 후에는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오바마가 힐러리를 국무장관으로 지명할 당시에는 자신의 재단이 외국 정부로부터 받은 기부 내역 등을 공개하기도 했다.
2009년 5월, 유엔(UN)으로부터 아이티 특별대사로 임명되어 2008년 허리케인으로 큰 피해를 본 아이티의 재건을 돕는 역할을 맡았다. 같은 해 8월에는 북한 평양을 방문하여 북한 당국에 억류되어 있던 미국 여기자 2명의 석방을 위한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대통령 경험자의 방북은 1994년 지미 카터 전 대통령 이후 두 번째였다.
2010년 2월 11일, 가슴 통증으로 뉴욕시 병원에서 관상동맥 협착 부위를 넓히는 수술을 받았다. 수술 경과는 양호하여 다음 날 퇴원했으며, 2월 15일부터는 2010년 아이티 지진 피해 복구 지원 활동을 재개했다.
2013년에는 여러 차례 일본을 방문했다. 2월 3일에는 공익재단법인 미국일본협의회-재팬과 주일 미국 대사관이 주도하는 민관 파트너십 “TOMODACHI”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오사카를 찾아 대학생들과 교류했다. 같은 해 11월 16일에는 지바현 우라야스시에서 열린 “제2회 세계 여론 지도자 서밋”에 참석했다.
2013년 11월 20일에는 대통령 자유훈장을 받았다.
2015년, 부인 힐러리가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다시 출마하여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승리했으나, 과거 클린턴 부부와 관련된 여러 스캔들이 다시 부각되면서 2016년 11월 8일 본선거에서 공화당 후보 도널드 트럼프에게 패배했다.
2020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부인 힐러리와 함께 뉴욕주에서 조 바이든 후보와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후보에게 투표하기로 서약한 민주당 선거인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 바이든과 해리스의 당선이 확정된 후인 11월 8일, 클린턴은 트위터를 통해 "미국은 대화했고, 민주주의가 승리했습니다.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묶고, 우리 모두에게 봉사하는 대통령 당선자와 부통령 당선자가 탄생했습니다. 조 바이든과 카멀라 해리스에게 중요한 승리를 축하합니다!"라고 밝혔다.
2021년 10월 12일 저녁, 요로 감염증으로 인한 패혈증이 의심되어 캘리포니아 대학교 어바인 의료 센터에 입원했다. 항생제와 수액 치료를 받고 17일에 퇴원했다.
6. 가족 관계
아칸소주 호프에서 태어난 빌 클린턴의 원래 이름은 윌리엄 제퍼슨 블라이드 3세였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사망했으며, 어머니 버지니아 켈리는 간호원으로 훈련받는 동안 어린 빌을 그녀의 부모에게 맡겼다.
빌이 8세 때, 어머니는 로저 클린턴과 재혼했고 가족은 핫스프링스로 이주했다. 그의 계부는 알콜 중독자였으며, 가정 폭력으로 인해 가족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빌 클린턴은 15세 때 계부에게 어머니나 이복 형을 다시는 때리지 말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부인 힐러리 클린턴과의 관계는 빌 클린턴의 여러 스캔들, 특히 성적인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지속되었다. 힐러리가 남편의 스캔들을 무마하려는 듯한 태도를 보인 것에 대해, 일각에서는 이들 부부의 관계를 "전략적 파트너십"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이러한 도덕성 논란은 힐러리 클린턴의 대통령 선거 패배 요인 중 하나로 지적되기도 했다.
7. 저서
* 《나의 삶》(My Life영어)(200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