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W. 부시
1. 개요
조지 W. 부시는 미국의 정치인으로, 제43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그는 1946년 코네티컷주에서 태어나 예일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받았다. 텍사스 주지사를 거쳐 2000년 대선에서 앨 고어를 꺾고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2004년에는 존 케리를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다. 그의 재임 기간 중 9.11 테러가 발생하여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아프가니스탄 및 이라크 전쟁을 주도했으며, 국내적으로는 경제 정책, 교육 개혁, 사회 정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퇴임 후에는 회고록을 출간하고 그림을 그리는 등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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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조지 워커 부시 |
|---|---|
| 출생일 | 1946년 7월 6일 |
| 출생지 | 미국 코네티컷주 뉴헤이븐 |
| 거주지 |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 미국 텍사스주 맥레넌 카운티 프레리 채플 랜치 |
| 정당 | 공화당 |
| 배우자 | 로라 웰치(1977년 11월 5일 결혼) |
| 자녀 | 바버라 제나 |
| 부모 | 조지 H. W. 부시 바버라 부시 |
| 친척 | 부시 가문 |
| 학력 | 예일 대학교 (BA) 하버드 대학교 (MB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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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상 | 전체 목록 |
|---|---|
| 웹사이트 | 공식 웹사이트 대통령 도서관 대통령 센터 백악관 아카이브 |
| 별칭 | 더블유 |
| 음성 파일 | 조지 W. 부시가 9.11 테러 이후 국가에 연설하는 모습. 2001년 9월 11일 녹음 |
| 소속 | 미국 공군 텍사스 주방위군 앨라배마 주방위군 |
|---|---|
| 복무 기간 | 1968년–1974년 |
| 계급 | 중위 |
| 부대 | 제147 정찰 비행단 제187 전투 비행단 |
| 훈장 | 공군 조종사 휘장 우수 부대 표창 국방 근무 훈장 |
| 직위 | 제46대 텍사스 주지사 |
|---|---|
| 부지사 | 밥 불럭 릭 페리 |
| 임기 시작 | 1995년 1월 17일 |
| 임기 종료 | 2000년 12월 21일 |
| 이전 주지사 | 앤 리처즈 |
| 다음 주지사 | 릭 페리 |
| 직위 | 제43대 미국 대통령 |
|---|---|
| 부통령 | 딕 체니 |
| 임기 시작 | 2001년 1월 20일 |
| 임기 종료 | 2009년 1월 20일 |
| 이전 대통령 | 빌 클린턴 |
| 다음 대통령 | 버락 오바마 |
| 별칭 | 부시 주니어, 부시 43세, 부시 2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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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사스주지사 -
샘 휴스턴
샘 휴스턴은 텍사스 혁명의 지도자이자 텍사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을 역임했으며, 텍사스 주지사와 미국 상원 의원을 지내며 텍사스 독립과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
텍사스주지사 -
앤 리처즈
앤 리처즈는 텍사스 주지사와 재무장관을 지낸 미국의 정치인으로, 민주당 전당대회 기조 연설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주지사 재임 기간 동안 교도소 시스템 개혁과 학교 재정 확충을 위한 복권 시행 등의 정책을 추진했다. -
미국의 이라크 전쟁 관련자 -
딕 체니
딕 체니는 공화당 소속으로 하원의원, 백악관 비서실장, 국방부 장관을 역임하고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제46대 부통령을 지낸 미국의 정치인이자 기업인이다. -
미국의 이라크 전쟁 관련자 -
폴 브레머
폴 브레머는 미국의 외교관, 공무원, 기업인으로서 국무부 외교관, 주 네덜란드 대사, 국무부 테러 대책 조정관을 역임하고 이라크 전쟁 후 CPA 대표를 맡아 이라크 재건을 담당했으나 논란을 겪었으며, CPA 대표 퇴임 후에는 강연, 회고록 출간, 미술가로 활동했다. -
조지 W. 부시 -
토니 블레어
토니 블레어는 1997년부터 2007년까지 영국 총리를 지낸 노동당 정치인으로, '제3의 길' 노선을 추구하며 북아일랜드 평화 협정 체결에 기여했으나 아프가니스탄 및 이라크 전쟁 참전 결정으로 논란을 겪었고 퇴임 후 국제적인 활동과 자선 활동을 이어가며 경제적 성공과 사회 개혁, 이라크 전쟁 책임에 대한 복잡한 평가를 받고 있다. -
조지 W. 부시 -
2003년 이라크 침공
2003년 이라크 침공은 2003년 미국, 영국 등의 연합군이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개발 의혹 등을 명분으로 침공하여 사담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렸지만, 이후 이라크는 혼란과 종파 분쟁에 휩싸인 사건이다.
2. 어린 시절 및 교육
조지 워커 부시는 1946년 7월 6일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에서 아버지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와 어머니 바버라 부시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미국에서 여러 대 째 이어오는 부유한 명문 집안이며, 조부 프레스콧 부시는 유명한 기업가 출신으로 후에 연방 상원의원을 지냈다.
아버지 조지 H. W. 부시는 당시 예일 대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학업을 마치자마자 부친은 곧바로 석유 사업을 위해 텍사스주 미들랜드로 가족을 데리고 이주하여, 조지는 미들랜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휴스턴의 명문 사립 학교를 다녔으며, 그 후 집안 대대로 다니던 매사추세츠주의 유서 깊은 사립 고등학교인 필립스 앤도버 학교를 거쳐 예일 대학교에 입학했고, 역사학을 전공했다. 1968년 예일 대학교를 졸업한 후 텍사스 주방위군에 장교로 입대하여 중위로 퇴역했다.
텍사스 대학교 로스쿨에는 낙방했으며, 1973년 하버드 경영대학원에 입학하여 1975년 경영학 석사학위(MBA)를 취득했다. 이 기간 중 그는 이전부터 즐기던 술에 더욱 빠져들어 알코올 중독 증세를 보이기도 했으며, 1976년에는 음주운전으로 벌금 150달러를 물고 운전면허를 일시 정지당하기도 했다. 술은 결혼 후 줄이기 시작했으며, 1986년 40세 생일 이후로는 완전히 끊었다.
1977년 미들랜드 출신의 도서관 사서인 로라 웰치를 만나 결혼했다. 조지는 결혼과 함께 집안에서 믿던 성공회에서 부인을 따라 감리교로 개종했다. 부부는 1981년 쌍둥이 딸 제나와 바버라를 낳았다.
3. 사업 경력
결혼 후 미들랜드에 정착하여 석유 사업에 관계하는 동시에 조부와 부친의 뒤를 이어 정계 진출을 시도하였다. 1978년, 텍사스주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구의 연방하원 선거에 공화당 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민주당 후보에게 패했다. 하원 진출에 실패한 후, 석유 회사를 설립하고 다른 석유회사를 합병하는 등 적극적인 사업 활동을 했으나, 석유값 하락으로 그다지 많은 돈을 벌지는 못했다. 그러나 1986년 합병 후 자신이 회장으로 있던 스펙트럼 7 석유 회사를 상당한 이익을 남기고 매각하여 많은 재산을 모았다. 그 후 워싱턴으로 옮겨, 1988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는 부친의 선거운동 본부에서 일하며 정치를 익혔다. 부친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 그는 텍사스 주로 돌아가 동업자들과 함께 프로야구 메이저 리그(MLB) 구단인 텍사스 레인저스를 매입했다. 대통령의 아들로 그는 팬들과 함께 자주 경기를 관전하며 텍사스 주민들에게 이름을 알리고 인기를 얻었다.
1977년, 부시는 소규모 석유 탐사 회사인 아르부스토 에너지(Arbusto Energy)를 설립했고, 1978년부터 운영을 시작했다. 그는 나중에 회사 이름을 부시 탐사(Bush Exploration)로 변경했다. 1984년, 그의 회사는 더 큰 회사인 스펙트럼 7(Spectrum 7)과 합병되었고, 부시는 회장이 되었다. 석유 가격 하락으로 회사는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하켄 에너지(Harken Energy Corporation)에 흡수되었으며, 부시는 하켄 이사회 이사가 되었다. 하켄과 관련된 내부자 거래 가능성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었지만,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urities and Exchange Commission) 조사 결과 부시가 주식 매각 당시 가지고 있던 정보는 내부자 거래에 해당할 만큼 충분하지 않은 것으로 결론이 났다.
1989년 4월, 부시는 투자자 그룹이 메이저리그 야구팀인 텍사스 레인저스(Texas Rangers)의 지배 지분을 89에 인수하도록 주선했고, 그는 직접 500000USD를 투자했다. 그 후 5년 동안 경영 파트너로 활동했다. 그는 팀 프로젝트를 적극적으로 이끌었고 정기적으로 경기를 관람했으며, 종종 팬들과 함께 개방된 스탠드에 앉곤 했다. 1998년 부시가 레인저스 주식을 매각하면서 초기 투자금 800000USD에서 15 이상의 수익을 얻었다.
1990년대 초중반, 주지사 선거 출마 전에 부시는 야구 커미셔너(Commissioner of Baseball)직 출마를 잠시 고려했다.
4. 정치 경력
1977년, 부시는 소규모 석유 탐사 회사인 아르부스토 에너지(Arbusto Energy)를 설립했고, 1984년에는 스펙트럼 7(Spectrum 7)과 합병하여 회장이 되었다. 그러나 석유 가격 하락으로 회사는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하켄 에너지(Harken Energy Corporation)에 흡수되었으며, 부시는 하켄 이사회 이사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내부자 거래 가능성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었지만,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조사 결과 부시가 주식 매각 당시 가지고 있던 정보는 내부자 거래에 해당할 만큼 충분하지 않은 것으로 결론났다.
1989년 4월, 부시는 투자자 그룹을 이끌어 메이저리그 야구팀인 텍사스 레인저스의 지배 지분을 8900에 인수하도록 주선했고, 직접 500를 투자했다. 그는 5년 동안 경영 파트너로 활동하며 팀 프로젝트를 적극적으로 이끌었고 정기적으로 경기를 관람했다. 1998년 부시가 레인저스 주식을 매각하면서 초기 투자금 800에서 15 이상의 수익을 얻었다.
1990년대 초중반, 주지사 선거 출마 전에 부시는 야구 커미셔너(Commissioner of Baseball)직 출마를 잠시 고려하기도 했다.
1994년 텍사스 주지사 선거에서, 부시는 복지 개혁, 손해배상 청구 제도 개혁, 범죄 감소 및 교육 개선이라는 네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선거 운동을 펼쳐 당선되었다. 주지사로서 텍사스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감세인 20억 달러 감세를 추진했다. 또한, 중범죄를 저지른 미성년자가 성인 법정에 회부될 수 있는 연령을 14세로 낮추는 법안을 추진했다. 1999년에는 전력 소매업체가 특정량의 재생에너지원으로부터 에너지를 구매하도록 요구하는 법률에 서명하여 텍사스가 미국 최대 풍력 발전 주가 되는 데 기여했다. 1998년에 부시는 68%의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하여, 텍사스 역사상 처음으로 연속 두 번의 4년 임기를 채운 주지사가 되었다.
4.1. 초기 정치 활동
1978년, 텍사스주 19번 하원 의원 선거구에 공화당 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민주당 후보에게 패해 낙선했다. 이후 석유 회사를 설립하고 다른 석유 회사를 합병하는 등 적극적으로 사업 활동을 했으나, 석유값 하락으로 큰 돈을 벌지는 못했다. 1986년, 자신이 회장으로 있던 스펙트럼 7 석유 회사를 상당한 이익을 남기고 매각하여 많은 재산을 모았다.
그 후 워싱턴으로 옮겨 1988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는 부친의 선거운동 본부에서 일하며 정치를 익혔다. 부친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 텍사스 주로 돌아가 동업자들과 함께 메이저 리그(MLB) 구단인 텍사스 레인저스를 매입했다.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점과 함께, 팬들과 자주 경기를 관전하며 텍사스 주민들에게 이름을 알리고 인기를 얻었다.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부친의 선거 운동을 도왔으나, 부친은 재선에 실패했다.
4.2. 텍사스 주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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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는 1994년 텍사스 주지사 선거에 출마했다. 이는 동생 제브 부시가 플로리다 주지사 선거에 출마한 것과 동시에 진행되었다. 공화당 예비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후, 민주당 현직 주지사였던 앤 리처즈와 대결하게 되었다.
부시는 카렌 휴즈, 존 알버, 칼 로브 등의 선거 참모진을 구성하였다. 그의 선거 운동은 리처즈에 대한 중상모략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공개 토론에서 효과적인 변론을 통해 지지도를 높였다. 그 결과, 11월 8일 선거에서 54% 대 46%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주지사로서 부시는 불법 행위 개혁 법안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고, 교육 예산을 늘려 학교 교육 수준을 향상시켰으며, 형사 사법 제도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재임 기간 동안 152명의 사형을 집행했는데, 이는 미국 주지사 중 가장 많은 기록이다. 또한 20억 달러의 세입 초과분을 감세에 사용하여 텍사스 주 역사상 최대 규모의 감세를 단행했다. 이 감세를 통해 부시는 기업 친화적인 경제 우파로서의 이미지를 굳혔다. 교육 개혁에 있어서는 어퍼머티브 액션을 위헌으로 판결한 홉우드 판결에 따라 상위 10% 법에 서명하여, 플로리다에서 상위 20% 법을 추진했던 동생 제브 부시와 같은 행보를 보였다.
부시는 교회 등 종교 단체의 교육, 알코올 및 약물 중독, 가정 폭력 대책 활동에 대한 정부 지원을 시행했다. 그는 6월 10일을 텍사스 주의 "예수(·그리스도)의 날"로 지정하고, 이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봉사할 것"을 텍사스 주민들에게 요청했다.
1998년 11월 3일, 부시는 69%의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다. 같은 해 그는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 출마를 선언했고, 대통령 당선으로 인해 두 번째 임기 중 주지사직을 사임했다. (주지사 재임 기간: 1995년 1월 17일 - 2000년 12월 21일).
5. 대통령 선거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와 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000년 대선에서는 총 득표수에서 민주당 앨 고어 후보에게 뒤졌으나, 미국의 독특한 선거인단 제도 덕분에 당선될 수 있었다. 각 주마다 선거인단을 배정하고, 승리한 후보가 해당 주의 선거인단을 모두 가져가는 방식이다.
5.1. 2000년 대통령 선거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민주당 후보이자 현직 부통령이던 앨 고어와 맞대결을 펼쳤다. 투표 결과, 총 득표율에서는 앨 고어가 48.4%로 부시(47.9%)보다 앞섰으나, 선거인단 수에서는 부시가 271표, 앨 고어가 266표를 얻어 부시가 아슬아슬하게 승리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5.2. 2004년 대통령 선거
2004년 11월 2일에 실시된 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재선에 도전했다. 부시는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존 케리를 선거인단 수에서 286 대 251로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다.
6. 대통령직 활동
9.11 테러 직후 세계 무역 센터의 그라운드 제로에서 연설하는 부시의 모습은 그의 대통령직을 상징하는 장면 중 하나이다.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조지 W. 부시는 일반 투표에서는 패했으나, 선거인단 투표에서 승리하여 공화당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부시 대통령은 취임 후 8개월 만인 2001년 9월 11일에 9.11 테러를 겪게 되었다. 테러리스트들이 납치한 여객기들이 뉴욕의 세계 무역 센터와 워싱턴 D.C.의 펜타곤에 충돌하여 약 3,000명이 사망하고 6,0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미국은 9.11 테러의 배후로 사우디아라비아 출신 오사마 빈 라덴과 그의 테러 조직 알카에다를 지목했다. 빈 라덴의 본부와 훈련소가 아프가니스탄에 있자, 부시는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에게 빈 라덴을 넘겨주고 훈련소를 폐쇄하라고 요구했다. 탈레반이 이를 거부하자, 부시는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군사력을 동원했다. 2001년 10월, 미국과 동맹국들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군사 작전을 개시했다.
부시는 2001년 1조 3,500억 달러 규모의 감세 프로그램에 서명했고, 2002년에는 전국 일제 학력고사를 의무화하고 성적에 따라 학교에 보조금과 페널티를 부과하는 「낙오자 제로 법」(No Child Left Behind Act)에 서명했다.
9.11 테러 이후, 부시는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2002년 국정연설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란, 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규정했다. 2003년에는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이유로 이라크 전쟁을 시작했다. 사담 후세인 정권은 무너졌지만, 이라크는 정치적 혼란에 빠졌다.
부시는 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지만, 이후 더욱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그의 국내 지지율은 9.11 테러 직후 91%에서 2008년에는 19%까지 떨어졌다.
6.1. 국내 정책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국내 정책에서 다양한 분야에 걸쳐 정책을 추진했다.
| 직책 | 성명 | 임기 |
|---|---|---|
| 대통령 | 조지 W. 부시 | 2001 - 2009 |
| 부통령 | 딕 체니 | 2001 - 2009 |
| 국무장관 | 콜린 파월 (2001 - 2005) 콘돌리자 라이스 (2005 - 2009) | |
| 국방장관 | 도널드 럼즈펠드 (2001 - 2006) 로버트 게이츠 (2006 - 2009) | |
| 재무장관 | 폴 오닐 (2001 - 2003) 존 스노 (2003 - 2006) 헨리 폴슨 (2006 - 2009) | |
| 법무장관 | 존 애슈크로프트 (2001 - 2005) 앨버트 곤잘레스 (2005 - 2007) 마이클 무카시 (2007 - 2009) | |
| 내무장관 | 게일 A. 노턴 (2001 - 2006) 디크 케임프쏜 (2006 - 2009) | |
| 농무장관 | 앤 베네먼 (2001 - 2005) 마이크 조핸스 (2005 - 2007) 찰스 F. 코너 (2007 - 2008, 대리) 에드워드 토마스 셰이퍼 (2008 - 2009) | |
| 상무장관 | 도널드 L. 에반스 (2001 - 2005) 카를로스 M. 구티에레스 (2005 - 2009) | |
| 노동장관 | 일레인 초 (2001 - 2009) | |
| 보건복지장관 | 토미 조지 톰슨 (2001 - 2005) 마이클 오클랜드 레비트 (2005 - 2009) | |
| 주택도시개발장관 | 멜 R. 마티네즈 (2001 - 2003) 알폰소 R. 잭슨 (2004 - 2008) 스티븐 클라이드 프레스턴 (2008 - 2009) | |
| 교통장관 | 노먼 미네타 (2001 - 2006) 마리아 시노 (2006, 대리) 메리 피터스 (2006 - 2009) | |
| 에너지장관 | E. 스펜서 에이브러햄 (2001 - 2005) 사무엘 W. 보드먼 (2005 - 2009) | |
| 교육장관 | 로데릭 레이너 페이지 (2001 - 2005) 마가렛 스펠링스 (2005 - 2009) | |
| 재향군인장관 | 앤서니 J. 프린시피 (2001 - 2005) R. 제임스 니콜슨 (2005 - 2007) 고든 H. 맨스필드 (2007, 대리) 제임스 B. 피크 (2007 - 2009) | |
| 국토안보장관 | 톰 리지 (2003 - 2005) 제임스 M. 로이 (2005, 대리) 마이클 처토프 (2005 - 2009) |
그는 낙오 아동 방지법에 서명하며 교육 개혁을 추진했고, 공화당의 전통적인 교육 정책 기조에 따라 연방 정부의 역할 축소와 지방 정부의 교육 자율성 확대를 지지했다.
사회 정책으로는 애국자법(USA PATRIOT Act)을 지지하고, 낙태와 동성 결혼 금지를 위한 헌법 수정안을 추진했다. 또한, 사회보장제도 개혁과 소유 사회 건설을 주장했다.
부시 행정부의 외교 정책은 네오콘이라 불리는 장관들이 요직을 많이 차지하고, 기독교 우파를 지지 기반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패권을 추구하는 일방주의가 현저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6.1.1. 경제 정책
2001년 3월부터 미국 경제는 침체되기 시작하였다. 9.11 테러 이후 실업률이 늘고 경제는 더욱 악화되었다. 많은 항공사들을 포함한 회사들이 경기 침체 속에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다. 몇몇 미국 항공사들은 파산되었고, 테러 후에 그들의 보안 시스템에 값비싼 정밀 검사를 해야 했다.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비행기 여행에 두려움을 느껴 항공사들의 소득이 급격하게 쇠퇴하였다. 의회는 15의 일괄 예산을 통과시켜 국채가 피해를 입은 항공사들을 지원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국가의 경제적 어려움은 2002년과 2003년에 계속되었다. 경기 부양책으로 부시는 감세와 실업자 보조를 실시했다. 그는 또한 다른 나라들과 무역 협정들을 협상하는 데 더 넓은 권위를 의회에 물었다. 의회는 부시의 계획을 옮기는 데 법률 제정을 승인하였으나, 부시가 요구한 것보다 더 작은 감세를 통과시켰다.
2007년과 2008년에는 미국의 초대형 모기지론 대부업체들이 파산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세계금융위기가 일어났다. 이 사태는 미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금융 시장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일각에서는 이 사태의 원인으로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의 신자유주의적인 경제 정책을 지목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정확한 원인에 대해서는 전문가들 간의 많은 논쟁이 이루어지고 있다.
부시의 경제 정책은 개인의 소유권을 존중하는 소유 사회(Ownership society)를 목표로 내세웠으며, 이러한 주택 정책은 주택 버블을 초래하여 이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원인이 되었다. 또한, 공급 측면 경제학에 기반한 소위 부시 감세(수표 발송 등을 통한), 앨런 그린스펀의 후임으로 벤 버냉키를 임명한 통화주의적 금융 정책, 자유 무역( 세계화) 추진 등 신보수주의·신자유주의적 정책, “작은 정부”의 방침과도 많은 부분이 일치한다. 그러나 클린턴 행정부가 큰 재정 흑자를 기록한 것과는 달리, 부시 행정부는 두 차례의 대규모 전쟁 참전 및 경찰력 강화를 위한 테러 대책 등으로 인해 치안 및 군사 면에서 막대한 지출을 발생시켰기 때문에(밤의 경비 국가), 2004년에는 사상 최대 규모인 413의 재정 적자에 시달렸다. 부시는 자신의 이러한 정책을 “관용적인 보수주의”(Compassionate Conservatism)라고 칭했다.
그 외에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정책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법인세 감세
* “탈석유 의존 대책”을 위한 바이오에너지 도입 및 셰일가스 개발을 위한 수압 파쇄법 지원
* “주 아동 의료 보험 사업(SCHIP)” 연장 법안 반대
6.1.2. 교육 정책
부시는 낙오 아동 방지법(No Child Left Behind Act)에 서명하여 교육 문제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부시는 공화당의 전통적인 교육 정책 기조인 연방 정부의 교육 역할 축소와 지방 정부의 교육 자율성 확대를 지지하였다.
6.1.3. 사회 정책
부시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 애국자법(USA PATRIOT Act)을 지지하고, 낙태와 동성 결혼 금지를 위한 헌법 수정안을 추진했다. 또한 사적 투자 계좌 도입을 위한 사회보장제도 개혁, 소유 사회 건설, 의무 탄소 배출량 규제 반대를 주장했다. 이민자 게스트 워커 프로그램 시행은 보수주의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6.1.4. 환경 정책
부시 행정부는 환경 정책에 있어서 구체적인 내용을 제시하지 않았다. 다만, 신보수주의와 기독교 우파의 지지를 바탕으로 중동 원유 이권 추구, 아프가니스탄 및 이라크 침공 등 대외 무력 행사를 통한 미국의 패권 추구 (일방주의)를 추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태도는 군산 복합체에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는 구조라는 지적을 받았다.
6.2. 외교 정책
9.11 테러 이후, 부시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2001년 10월,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오사마 빈 라덴과 알카에다를 지원하던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을 공격했다. 2002년 국정연설에서 부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란, 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규정했다.
2003년, 미국은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이유로 이라크 전쟁을 시작했다. 사담 후세인 정권은 무너졌지만, 이라크는 정치적 혼란에 빠졌다. 전쟁 중 인질 사태가 발생하고 미국 내에서 반전 시위가 계속되었으며, 관타나모 만 수용소 운영으로 인권 침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부시는 외교 문제에 있어서 온건파인 콜린 파월 국무장관보다 강경파인 콘돌리자 라이스 보좌관의 의견을 지지하여 이라크 전쟁으로 향했다고 알려져 있다.
6.2.1. 9.11 테러와 테러와의 전쟁
9.11 테러는 부시 대통령의 임기 초반인 2001년 9월 11일에 발생했다. 테러리스트들에게 납치된 여객기들이 뉴욕의 세계 무역 센터와 워싱턴 D.C.의 펜타곤에 충돌했다. 이 테러로 세계 무역 센터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고 펜타곤의 일부가 파괴되었으며, 약 3,000명이 사망하고 6,0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오사마 빈 라덴과 그의 테러 조직 알카에다가 이 테러의 배후에 있다고 결론 내렸다. 빈 라덴의 본부와 훈련소는 아프가니스탄에 있었다. 부시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에게 빈 라덴을 넘겨주고 훈련소를 폐쇄하라고 명령했다. 탈리반이 거부하자, 부시는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군사력을 동원했다. 2001년 10월, 미국과 동맹국들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군사 작전을 개시했다.
부시 대통령은 9.11 테러 이후 이슬람 무장 항쟁을 지원하는 일부 서남아시아 국가들에 대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2002년 국정연설에서 부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란, 이라크를 악의 축이라고 지칭하여 큰 파장을 일으켰다.
2001년, 미국은 탈레반이 오사마 빈 라덴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아프가니스탄에 군대를 투입하여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렸다. 2003년에는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명분으로 이라크 전쟁을 일으켰으나, 이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2006년 12월에는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이 처형되고 이라크에 과도 정부가 수립되었지만,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이라크는 혼란에 빠졌다.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 중에는 인질 사건이 끊이지 않았고, 미국 내에서는 평화주의자들의 전쟁 반대 시위가 계속되었다. 9.11 테러 이후 체포된 테러 용의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쿠바의 관타나모 만에 관타나모 만 수용소가 설치되었으며, 이는 인권 침해 논란을 야기했다.
6.2.2. 이라크 전쟁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9.11 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2002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란, 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규정했다. 2001년 탈레반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해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시작했고, 2003년에는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이유로 이라크 전쟁을 일으켰다. 사담 후세인 대통령을 처형하고 이라크에 과도정부를 수립했지만, 이라크는 정치적 혼란에 빠졌다.
전쟁 도중 인질 사태가 발생하고 미국 내에서 반전 시위가 계속되었으며, 관타나모 만 수용소를 설치하여 인권 침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2008년 12월 14일, 퇴임 직전 부시는 이라크에서 기자 회견 중 이라크 기자 문타다르 알 자이디에게 신발을 맞는 사건이 있었지만, 부시는 재빨리 피하며 유머로 넘겼다.
6.2.3. 북한 핵 문제
는 부시 행정부의 주요 외교 과제 중 하나였다. 부시는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에 깊은 관심과 이해를 보였고, 납치 피해자 가족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백악관에서 만나기도 했다.
6.2.4. 기타 외교 정책
9.11 테러 이후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이슬람 무장 항쟁을 지원하는 일부 서남아시아 국가들과의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2002년 국정연설에서 부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란, 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규정했다. 2001년에는 탈레반이 오사마 빈 라덴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탈레반 정부를 붕괴시켰다. 2003년에는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이유로 이라크 전쟁을 일으켰다. 2006년 12월에는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을 처형하고 이라크에 과도정부를 수립했으나, 이라크는 정치적 혼란에 빠졌다.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 중 인질 사태가 발생하고 미국 내에서 평화주의자들의 전쟁 반대 시위가 계속되었다. 9.11 테러 이후 체포된 테러 용의자들을 수감하기 위해 쿠바 관타나모 만에 관타나모 만 수용소를 설치하여 인권 침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7. 퇴임 이후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2009년 7월 31일 전국경제인연합회 주최 '2009 제주 하계포럼' 참석차 대한민국을 방문했다. 그는 8월 3일 안동을 방문했고, 방한 기간 이명박 대통령과 회담을 갖고 재계 인사들을 만나는 등 미국과 한국 간 우호 관계를 과시했다. 부시 전 대통령은 "퇴임 이후 행보는 자유와 민주주의 가치 구현에 맞추고자 한다"며 "'부시 기념 도서관'과 '정책연구소'를 설립 중이며, 전 세계 독재 국가와 민주주의가 핍박받는 나라에서 민주화 운동을 벌이는 인사들의 글과 자료도 전시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의 청계재단 설립 소식에 "전 재산을 기부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대단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8. 평가 및 유산
2006년 연두교서에서 부시는 "미국은 석유에 중독되어 있다"고 선언하고, 에너지 개발 연구를 증진시키기 위한 '첨단 에너지 이니셔티브(Advanced Energy Initiative)'를 시작했다. 2007년 연두교서에서 부시는 화석연료 소비 감소와 대체연료 생산 증가를 통해 해외 석유 의존도를 줄이기 위한 노력을 계속할 것을 재확인했다.
2008년 고유가 속에서 부시는 해상 시추 금지를 해제했다. 그러나 해상 시추를 금지하는 연방법이 여전히 존재했기 때문에 이 조치는 상징적인 의미에 그쳤다. 부시는 "미국 국민과 이 거대한 석유 매장량 사이에 있는 유일한 것은 미국 의회의 조치다"라고 말했다. 부시는 2008년 6월, "장기적으로는 대체 에너지 기술을 장려하여 석유 수요를 줄이는 것이 해결책입니다. 저희 행정부는 첨단 배터리와 수소 연료 전지와 같은 연비 향상 기술에 투자하기 위해 의회와 협력해 왔습니다… 단기적으로는 미국 경제가 석유에 크게 의존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공급을 늘려야 함을 의미하며, 특히 국내에서 공급을 늘려야 합니다. 따라서 저희 행정부는 의회에 국내 석유 생산을 확대해 줄 것을 거듭 촉구해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2008년 연두교서에서 부시는 향후 3년 동안 청정 에너지 기술을 홍보하고 기후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새로운 국제 기금에 2를 투입할 것을 약속하며, "다른 국가들의 기여와 함께 이 기금은 인도와 중국과 같은 개발도상국에서 모든 형태의 더욱 깨끗하고 효율적인 기술의 배치를 증가시키고 가속화하며, 청정 에너지 프로젝트를 재정적으로 더 매력적으로 만들어 상당한 민간 부문 자본을 활용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주요 경제국과 협력하고 유엔을 통해 온실가스 증가를 늦추고 멈추게 한 후 결국에는 역전시킬 국제 협정을 완료하기 위한 미국의 노력을 재확인할 계획을 제시했다. 그는 "이 협정은 모든 주요 경제국의 약속을 포함하고 어느 누구에게도 무임승차를 허용하지 않을 때에만 효과적일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부시는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일반 투표에서는 패했으나, 선거인단 투표에서 승리하여 공화당 후보로 당선되었다. 대통령으로서 2001년 1350의 감세 프로그램에 서명했고, 2002년에는 전국 일제 학력고사를 의무화하고 성적에 따라 보조금과 페널티를 학교에 부과하는 「낙오자를 만들지 않는 초중등 교육법」(일명: 「낙오자 제로 법」 No Child Left Behind Act)에 서명했다.
2001년 9월 11일에 발생한 미국 동시다발 테러 사건을 계기로, 부시는 세계적인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부시에 대한 미국 국민의 지지율은 미국 동시다발 테러 사건 이후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최고치인 91%에 달했다. 이후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나서 탈레반 정권을 타도하고 알카에다를 섬멸하며,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 또는 체포(데드 오어 얼라이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2003년 3월, 부시-체이니 행정부는 이라크의 무장 해제 및 민주화, 이라크 국민의 독재자로부터의 해방 등을 내세운 법안을 민주당·공화당 양당의 만장일치로 가결시켜 이라크 전쟁을 개시하여 독재자 사담 후세인 정권을 타도하는 데 성공했다. 이라크에 대해서는 「이라크가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1441호를 위반했고, 전쟁이 미국의 보호를 위해 필요했다」고 발언했다.
이라크 전쟁 중 부시는 「전시 대통령」이라 자칭하며 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재선을 목표로 출마했고, 이라크 전쟁과 국내 문제 수행을 둘러싼 논쟁에도 불구하고 상원의원 존 케리를 큰 차이로 누르고 2004년 11월 2일 재선되었다.
하지만 재선 이후 부시는 더욱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부시의 국내 지지율은 2001년 미국 동시다발 테러 직후 91%(갤럽이 기록한 역대 최고치)에서 2008년 2월 20일에는 역대 최저치인 19%로 떨어졌다. 당시 부시의 반대율은 76%까지 상승했고, 국내에서는 부시 비판이 격화되었다. 이는 2009년 1월 20일 후임인 버락 오바마에게 정권을 이양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퇴임 후 호감도는 상승하여, 2009년 1월 퇴임 당시 33%였던 호감도는 2018년 1월 61%까지 상승했다.
9. 가족 관계
* 할아버지: 프레스콧 셸던 부시
* 아버지: 조지 H. W. 부시
* 어머니: 바버라 부시
* 아내: 로라 부시
장녀: 바버라 피어스 부시
사위: 크레이그 코인
* 외손녀: 코라 코인 (2021년생)
차녀: 제나 부시 헤이거
사위: 헨리 체이스 헤이거
* 외손녀: 밀라 헤이거 (2013년생)
* 외손녀: 포피 헤이거 (2015년생)
* 외손자: 핼 헤이거 (2019년생)
1977년 친구들의 소개로 로라 웰치를 만나 세 달간 구애한 끝에 결혼 제안을 받았고, 그해 11월 5일에 결혼했다. 부부는 텍사스주 미들랜드에 정착했다. 부시는 가족이 다니던 성공회를 떠나 아내가 다니던 감리교회에 다녔다. 1981년 11월 25일, 로라 부시는 이란성 쌍둥이 딸 바버라와 제나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