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니노 산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다이니노 산미는 무라사키 시키부와 후지와라노 노부타카의 딸로, 1017년 고이치조 천황의 어머니 쇼시를 모시는 시녀로 입궐했다. 그녀는 타카시나노 나리아키라와 결혼하여 자녀를 낳았으며, 고레이제이 천황의 유모로 활동하며 종3위로 승진했다. 다이니노 산미는 37편 또는 38편의 시가 칙찬집에 수록되었으며, 개인 시집 《다이니노 산미집》을 썼다. 그녀는 소설, 영화, 드라마 등 다양한 매체에서 다루어지며 현대에도 재조명되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다카시나씨 - 신제이
신제이는 헤이안 시대 말기의 관료이자 학자로, 호겐의 난에서 승리하여 권력을 휘둘렀으나, 권력 남용으로 반발을 사 헤이지의 난 때 암살당했다. - 다카시나씨 - 다카시나노 에이시
고시라카와 법황의 측근이자 고토바 천황 옹립에 관여한 다카시나노 에이시는 법황의 총애를 받아 정치에 깊숙이 관여했으나, 고토바 상황의 인세이 시작 후 정치적 영향력을 잃고 정토사에서 여생을 보낸 헤이안 시대 말기부터 가마쿠라 시대 초기의 여성이다. - 가주지류 - 우에스기씨
우에스기씨는 가마쿠라 시대부터 무로마치 시대, 센고쿠 시대를 거쳐 에도 시대까지 번영하며 간토 간령, 슈고 다이묘, 요네자와 번주 등을 역임했고, 메이지 시대에는 화족으로 서임되었다. - 가주지류 - 후지와라노 아사타다
후지와라노 아사타다는 9세기부터 10세기에 걸쳐 활동한 일본의 귀족이자 가인으로, 다이고, 스자쿠, 무라카미 천황 치세에 관직을 역임하고 칙찬와가집에 수록되었으며 《오구라 백인일수》에도 이름을 올렸다. - 구조류 - 후지와라노 아키미쓰
후지와라 북가 출신의 헤이안 시대 공경인 후지와라노 아키미쓰는 대신을 역임했으나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와의 갈등과 정치적 실수, 딸 관련 사건 등으로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었지만, 조정에 기여한 공로와 유소쿠코지쓰에 대한 지식은 재평가되기도 한다. - 구조류 - 후지와라노 가네이에
후지와라노 가네이에는 헤이안 시대 공경으로, 엔유, 가잔, 이치조 천황 시대에 재상을 지내며 이치조 천황의 외조부로서 섭정이 되어 후지와라 씨의 권력을 강화하고 가잔 천황에게 양위를 강요하여 영향력을 확대했으며, 그의 후손들은 후지와라노 미치나가 시대에 전성기를 맞았다.
다이니노 산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이름 | 다이니노산미 |
본명 | 후지와라노 가타이코/겐시 |
직업 | 가인 여관 |
배우자 | 후지와라노 가네타카 (이설 존재) 다카시나노 나리아키라 |
자녀 | 미나모토노 요시무네의 아내 다카시나노 다메이에 후지와라노 미치무네의 아내 |
아버지 | 후지와라노 노부타카 |
어머니 | 무라사키 시키부 |
생애 정보 | |
출생 | 년 경 |
사망 | 에이호 2년 (1082년)? |
활동 시기 | 헤이안 시대 |
주요 활동 | |
작품 | 『다이니노산미집』 |
기타 | 쇼시 천황의 여관, 고레이제이 천황의 유모 |
백인일수 | |
![]() |
2. 생애
무라사키 시키부와 藤原宣孝|후지와라노 노부타카일본어의 딸로,[1][2] 이름은 賢子|카타코일본어였다.[1][2][3] 1017년 이치조 천황의 황후였던 후지와라노 쇼시(조토몬인)를 모시는 뇨보(女房, 시녀)로 출사했으며,[7] 이후 고레이제이 천황과 황녀 테이시(禎子内親王)의 유모를 맡았다.
궁중 생활 초기에는 후지와라노 요리무네, 후지와라노 사다요리, 源朝任|미나모토노 아사토일본어 등과 교류했으며, 이후 혼인에 대해서는 후지와라노 미치카네의 차남 藤原兼隆|후지와라노 카네타카일본어와 결혼하여 딸을 낳았다는 설[8]과 藤原公信|후지와라노 키미노부일본어와 결혼했다는 설[9]이 있다. 이후 高階成章|타카시나노 나리아키일본어와 재혼하여 아들 高階為家|타카시나노 타메이에일본어 등을 낳았다.[1]
고레이제이 천황이 즉위한 1054년에는 종3위로 승격되었고, 남편 나리아키도 다자이노다이니에 임명되었다.[10] 정확한 사망 연도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1078년의 우타아와세 기록을 통해 적어도 80세 가까이 생존했음을 알 수 있다.
어머니 무라사키 시키부에 비해 연애의 밀고 당기기에 능숙했다는 평가가 있으며, 『신고킨와카집』에 실린 아래와 같은 와카가 이를 뒷받침한다.
:매화에 덧붙여 다이니노 산미에게 보낸 권중납언 사다요리
:오지 않는 사람에게 비유한 매화, 흩어지면 그 후엔 낙심할 뿐
:
:화답 다이니노 산미
:봄 일에 마음을 조이는 꽃가지에 높은 옷자락 스치네
:『신고킨와카집』 권 제1 춘가 상
2. 1. 출생과 가계
어머니 무라사키 시키부와 아버지 藤原宣孝|후지와라노 노부타카일본어 사이에서 태어났다.[1][2] 이름은 賢子|카타코일본어였으며,[1][2][3] 한자로는 '''켄시'''로 읽기도 한다.[4]1001년 (조호 3년) 3세 무렵 아버지 후지와라노 노부타카와 사별했다. 후지와라노 노부타카와 무라사키 시키부의 결혼 생활은 3년 남짓이었다. 1017년 (간닌 원년) 18세 무렵, 어머니의 뒤를 이어 이치조 천황의 중궁이었던 후지와라노 쇼시(조토몬인)를 모시는 뇨보로 출사했다.[7] 이 시기 후지와라노 요리무네, 후지와라노 사다요리, 미나모토노 아사토 등과 교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관백 후지와라노 미치카네의 차남 후지와라노 카네타카와 결혼하여 딸 하나를 낳았고, 이 딸은 미나모토노 요시무네의 아내가 되었다. 이는 『영화 이야기』의 기록("오미야의 무라사키 시키부의 딸, 에치고노 벤, 사에몬노카미의 아이를 낳다")에서 '사에몬노카미'를 후지와라노 카네타카로 해석한 것에 따른다.[8] 그러나 남편을 '효에노카미'(兵衛督)의 오기로 보고 후지와라노 기미노부로 보는 다른 설도 있다.[9] 『이마카가미』에 미나모토노 요시무네의 아들 치보(千ሞ)가 다이니노 산미의 손자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후지와라노 기미노부는 딸이 태어난 다음 해인 만주 3년(1026년)에 세상을 떠났다.
1025년 (만주 2년), 고레이제이 천황(당시 아쓰히라 친왕)이 태어나자 그의 유모로 임명되었다. 1037년 (조랴쿠 원년) 이전에 동궁 권대진(權大進) 다카시나노 나리아키와 재혼하여, 1038년 (조랴쿠 2년) 아들 다카시나노 다메이에와 딸 하나를 낳았다.[1] 1054년 (덴기 2년), 고레이제이 천황이 즉위하자 종3위로 승진하였고, 남편 다카시나노 나리아키도 다자이노다이니에 임명되었다.[10]
정확한 사망 연도는 알 수 없으나, 1078년 (쇼랴쿠 2년)에 열린 우타아와세에 참가한 기록이 있어, 80세에 가까운 고령에도 이때까지 생존했음이 확인된다.
2. 2. 궁중 출사와 혼인
무라사키 시키부와 후지와라노 노부타카(藤原宣孝|후지와라노 노부타카일본어)의 딸이다.[1][2] 이름은 '''카타코'''(賢子|카타코일본어)이며,[1][2][3] 한자로는 '''켄시'''로도 읽는다.[4] 1001년 (장보 3년) 3세 무렵 아버지 후지와라노 노부타카와 사별했는데, 아버지 노부타카와 어머니 무라사키 시키부의 결혼 생활은 3년 남짓이었다.1017년 (조와 6년) 18세 무렵, 어머니 무라사키 시키부의 뒤를 이어 이치조 천황의 뇨인(女院)인 후지와라노 쇼시(조토몬인)를 모시는 뇨보(女房, 시녀)로 궁궐에 들어갔다.[7] 출사 초기에는 후지와라노 요리무네, 후지와라노 사다요리, 미나모토노 아사토(源朝任|미나모토노 아사토일본어) 등과 교류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첫 혼인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후지와라노 미치카네의 차남 후지와라노 카네타카와 결혼하여 딸을 낳았고, 이 딸은 후에 미나모토노 요시무네(源基宗|미나모토노 요시무네일본어)의 아내가 되었다는 설이다. 이는 『에이가 이야기』의 기록에서 '사에몬노카미(左衛門督)'를 카네타카로 해석한 것에 따른다.[8] 다른 하나는 첫 남편을 후지와라노 키미노부(藤原公信|후지와라노 키미노부일본어)로 보는 설이다.[9] 이는 『이마카가미』에 미나모토노 요시무네의 아들 치보(師房)가 다이니노 산미의 손자라고 기록된 점에 근거한다. 만약 키미노부가 남편이었다면, 그는 딸이 태어난 다음 해인 1026년 (만주 3년)에 사망했다.
1025년 (만주 2년) 고레이제이 천황(당시 아쓰히라 친왕)이 태어나자 그의 유모가 되었으며, 황녀 테이시(禎子内親王)의 유모도 맡았다.
1037년 (조랴쿠 원년) 이전에 동궁 권대진(東宮権大進) 타카시나노 나리아키(高階成章|타카시나노 나리아키일본어)와 재혼하였고, 1038년 (조랴쿠 2년)에는 아들 타카시나노 타메이에(高階為家|타카시나노 타메이에일본어)와 딸 하나를 낳았다.[1] 1054년 (텐키 2년) 고레이제이 천황이 즉위하자 종3위에 올랐으며, 남편 나리아키 역시 다자이노 다이니(大宰大弐)에 임명되었다.[10]
정확한 사망 연도는 알 수 없으나, 1078년 (쇼랴쿠 2년)에 열린 우타아와세(歌合, 와카 경연 대회)에 참가한 기록이 있어, 80세에 가까운 나이까지 생존했음이 확인된다.
2. 3. 유모 활동과 관직 생활
조와 6년(1017년) 18세 무렵, 어머니 무라사키 시키부의 뒤를 이어 이치조 천황의 중궁이었던 후지와라노 쇼시(조토몬인) 밑에서 뇨보(女房, 궁녀)로 일하기 시작했다.[7] 이 시기 후지와라노 요리무네, 후지와라노 사다요리, 미나모토노 아사토 등과 교류한 것으로 전해진다.이후 후지와라노 미치카네의 차남인 후지와라노 카네타카와 결혼하여 1026년경 딸을 낳았다.[1] 이 딸은 훗날 미나모토노 요시무네의 아내가 되었다. 이 결혼은 『에이가 이야기』에서 언급된 "사에몬노카미(左衛門督)"를 카네타카로 해석한 것에 근거한다.[8] 그러나 이를 "효에노카미(兵衛督)"의 오기로 보고, 남편을 후지와라노 긴노부로 보는 설도 있다.[9] 『이마카가미』에 미나모토노 요시무네의 아들 지보(치보)가 다이니노 산미의 손자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긴노부는 딸이 태어난 다음 해인 만주 3년(1026년)에 사망했다.
만주 2년(1025년) 아쓰히라 친왕(고레이제이 천황)이 태어나자 그의 유모로 임명되었다. 또한 데이시 내친왕의 유모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랴쿠 원년(1037년) 무렵, 당시 동궁 권대부(東宮權大夫)였던 다카시나노 나리아키와 재혼하였다.[1] 조랴쿠 2년(1038년)에는 아들 다카시나노 다메이에를 낳았다.[1]
덴기 2년(1054년), 고레이제이 천황이 즉위하자 종3위에 봉해졌으며, 남편 나리아키 역시 다자이노다이니(大宰大弐)로 임명되었다.[10]
정확한 사망 연도는 알 수 없으나, 1078년(쇼랴쿠 2년)에 열린 우타아와세(歌合, 가합)에 참가한 기록이 있어, 80세에 가까운 나이까지 생존했음을 알 수 있다.
2. 4. 사망
사망 연도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1078년(쇼랴쿠 2년)에 열린 우타아와세에 참가한 기록이 있어, 80세에 가까운 나이까지 생존했음을 알 수 있다.3. 작품 활동
다이니노 산미(大弐三位)는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친 가인(歌人)이다. 그녀의 시는 《후습유와카집》(後拾遺和歌集)을 비롯한 여러 칙찬 와카집에 다수 수록되어 전해진다.[2] 특히 그녀의 작품 중 한 수는 후지와라노 데이카(藤原定家)가 선정한 《오구라 백인일수》(小倉百人一首)에도 포함되어 널리 알려졌다.
또한, 다이니노 산미는 여러 우타아와세(歌合, 시 경연 대회)에도 참여하여 기량을 선보였으며, 개인 가집(歌集)인 《다이니노 산미집》(大弐三位集)을 남기기도 했다.[1][2]
3. 1. 칙찬와카집 수록
다이니노 산미(大弐三位)의 시 37편[2] 또는 38편이 《후습유와카집》 이후의 칙찬 와카집에 수록되었다.그녀의 시 중 하나는 《오구라 백인일수》에 58번째로 선정되었다.
> 有馬山 ゐなの笹原 風吹けば いでそよ人を 忘れやはする|아리마야마 이나노 사사하라 카제 후케바 이데 소요 히토오 와스레야와 스루일본어[5]
>
> 아리마 산 이나의 조릿대 벌판에 바람 불면
> 소리 내어 흔들리듯 어찌 그대를 잊을 수 있으리까.[6]
> — ''후습유와카집'' 12:709
다이니노 산미는 《다이니노 산미집》(大弐三位集|다이니노 산미슈일본어)이라는 개인 가집도 남겼다.[1][2]
'''칙찬집 수록 현황'''
가집명 | 작가명 표기 | 수록 수 | 가집명 | 작가명 표기 | 수록 수 | 가집명 | 작가명 표기 | 수록 수 |
---|---|---|---|---|---|---|---|---|
후습유와카집 | 다이니노 산미 | 9 | 금엽와카집 | 후지와라노 겐시 | 1 | 사화와카집 | 다이니노 산미 | 1 |
천재와카집 | 다이니노 산미 | 4 | 신고킨와카슈 | 다이니노 산미 | 6 | 신칙찬와카집 | 다이니노 산미 | 3 |
속후찬와카집 | 속고금와카집 | 다이니노 산미 | 1 | 속습유와카집 | 다이니노 산미 | 1 | ||
신후찬와카집 | 교쿠요와카슈 | 다이니노 산미 | 2 | 속천재와카집 | 다이니노 산미 | 2 | ||
속후습유와카집 | 다이니노 산미 | 1 | 풍아와카집 | 다이니노 산미 | 2 | 신천재와카집 | 다이니노 산미 | 1 |
신습유와카집 | 다이니노 산미 | 1 | 신후습유와카집 | 다이니노 산미 | 1 | 신속고금와카집 | 다이니노 산미 | 1 |
'''우타아와세(歌合) 참여 기록'''
명칭 | 시기 | 작가명 표기 | 비고 |
---|---|---|---|
조토몬인 국화 경연(上東門院菊合) | 1028년 (조겐 원년) | ||
내리 가합(内裏歌合) | 1049년 (에이쇼 4년) | ||
유시 내친왕가 가합(祐子内親王家歌合) | 1050년 (에이쇼 5년) | ||
내리 후반 가합(内裏後番歌合) | 1078년 (쇼랴쿠 2년) | 80세에 가까운 고령으로 참석하여 아들 다카이에(隆家)의 대작(代作)을 맡음 |
'''사집(私集)'''
- 《다이니노 산미집》 (별명 『토노 산미집』(藤三位集))
가장 오래된 전본은, 다이니노 산미가 쓴 것으로 전해지는 「하타지로기레」(秦紙切)이다. 단간(断簡)만이 남아 교토 국립박물관 (테카가미 「조시오」(藻塩)), 도쿠가와 미술관 (테카가미 「교쿠카이」(玉海)), 고토 미술관, 산리츠 핫토리 미술관 등 여러 집에 분장되어 있다.
3. 2. 백인일수
다이니노 산미의 시 중 하나는 《오구라 백인일수》에 58번째 작품으로 선정되었다.[2] 선정된 시는 다음과 같다.- 58번: 有馬山 ゐなの笹原 風吹けば いでそよ人を 忘れやはする|아리마야마 이나노 사사하라 카제 후케바 이데 소요 히토오 와스레야와 스루일본어
이 시는 "아리마 산, 이나의 조릿대밭에 바람 불면 '사각사각' 소리 내듯, 어찌 내가 그대를 잊을 수 있으랴."[6]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시의 출전은 《후습유와카집》(後拾遺和歌集) 권12 연가(恋歌) 2, 709번이다.[5]
《후습유와카집》에 따르면 이 시는 어떤 나이 든 남자가 자신을 잊었다고 말한 것에 대해 다이니노 산미가 지은 것이라고 한다.
3. 3. 개인 시집
다이니노 산미는 大弐三位集|다이니노 산미슈일본어 (''Daini no Sanmi-shū'')라는 가집을 남겼다.[1][2] 이 시집은 『토 삼위집』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가장 오래된 형태로 전해지는 것은 다이니노 산미 본인이 직접 쓴 것으로 추정되는 「단백절」(하타지로기레)이다. 현재는 완전한 형태가 아니라 일부 조각(단간)만이 남아 교토국립박물관 (테카가미 「조시오」 수록), 도쿠가와 미술관 (테카가미 「교쿠카이」 수록), 고토 미술관, 산리츠 핫토리 미술관 등 여러 곳에 나뉘어 소장되어 있다.
3. 4. 겐지 이야기 부분 저작설
일부 학자들은 그녀의 어머니가 쓴 대작인 ''겐지 이야기''의 마지막 10개 장을 그녀의 작품이라고 여긴다.[2]4. 평가 및 영향
(내용 없음)
4. 1. 당대 평가
노래와 실생활에서 어머니인 무라사키 시키부에 비해 연애의 밀고 당기기에 능숙하다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다. 『신고킨와카집』 권 제1 춘가 상(春歌 上)에는 권중납언 사다요리와 주고받은 다음과 같은 와카가 실려 있다.:'''매화에 덧붙여 다이니노 산미에게 보낸 권중납언 사다요리'''
::오지 않는 사람에게 비유한 매화, 흩어지면 그 후엔 낙심할 뿐
:'''화답 다이니노 산미'''
::봄 일에 마음을 조이는 꽃가지에 높은 옷자락 스치네
4. 2. 후대 영향
- '''소설'''
- 다나카 아리코 『무라사키 시키부의 딸, 겐시』 (도쿠마 문고, 1992년)
- 시노 아야코 『무라사키 시키부의 딸. 겐시가 갑니다!』 (세이잔샤, 2016년 / 호루푸 출판, 2019년)
- 시노 아야코 『무라사키 시키부의 딸. 겐시는 멈추지 않아!』 (세이잔샤, 2017년 / 호루푸 출판, 2019년)
- 시노 아야코 『무라사키 시키부의 딸. 겐시는 정한다!』 (세이잔샤, 2023년)
- 아키 아리토 『무라사키 시키부의 외동딸』 (분게이샤, 2024년)
- '''영화'''
- 『무라사키 시키부』 (1939년, 출연: 히다카 우메코)
- 『천년의 사랑: 빛나는 겐지 이야기』 (2001년, 출연: 호시노 유즈키 → 마에다 아키)
5. 현대의 재조명
소설
- 다나카 아리코 『무라사키 시키부의 딸, 겐시』 (도쿠마 문고, 1992년)
- 시노 아야코 『무라사키 시키부의 딸. 겐시가 갑니다!』 (세이잔샤, 2016년 / 호루푸 출판, 2019년)
- 시노 아야코 『무라사키 시키부의 딸. 겐시는 멈추지 않아!』 (세이잔샤, 2017년 / 호루푸 출판, 2019년)
- 시노 아야코 『무라사키 시키부의 딸. 겐시는 정한다!』 (세이잔샤, 2023년)
- 아키 아리토 『무라사키 시키부의 외동딸』 (분게이샤, 2024년)
영화
- 『무라사키 시키부』 (1939년, 출연: 히다카 우메코)
- 『천년의 사랑: 빛나는 겐지 이야기』 (2001년, 출연: 호시노 유즈키 → 마에다 아키)
텔레비전 드라마
참조
[1]
간행물
Digital Daijisen
Shogakukan
[2]
간행물
McMillan 2010
[3]
간행물
Suzuki et al. 2009
[4]
웹사이트
Q&A
https://web.archive.[...]
2015-07-09
[5]
간행물
McMillan 2010
[6]
간행물
McMillan 2010
[7]
문서
[8]
서적
大弐三位賢子の生
風間書房
[9]
서적
紫式部日記全注釈
角川書店
[10]
문서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