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시나노 에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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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카시나노 에이시는 고시라카와 법황의 측근이었던 타이라노 나리후사의 아내로, 지쇼 3년의 정변으로 남편이 처형된 후 법황의 총애를 받아 정치에 관여했다. 1181년 법황의 황녀 킨시 내친왕을 낳았고, 1183년 고토바 천황 옹립에 관여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도 관계를 맺고, 겐큐 7년의 정변으로 쿠죠 카네자네를 실각시켰으나, 1202년 미치치카가 사망하고 고토바 상황이 인세를 시작하면서 권력을 잃었다. 이후 정토사에서 지내다 1216년 사망했으며, 야마시나 장원은 아들 야마시나 노리시게가 상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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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시나노 에이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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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다카시나노 에이시 |
원어 이름 | 高階 栄子 |
로마자 표기 | Takashina no Eishi/Yoshiko |
출생 및 사망 | |
출생일 | 닌페이 원년 (1151년) ? |
사망일 | 켄포 4년 (1216년) |
가족 관계 | |
배우자 | 타이라노 나리후사 고시라카와 천황 |
자녀 | 야마시나 노리시게, 킨시 내친왕 등 |
아버지 | 스기쿠모 ? |
어머니 | 타이라노 마사코 (와카사노츠보네) |
기타 정보 | |
별호 | 탄고노츠보네 |
2. 생애
고시라카와 법황의 측근이었던 타이라노 나리후사와 결혼하여 야마시나 노리시게 등 여러 자녀를 두었으나, 지쇼 3년의 정변으로 남편 나리후사가 처형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이후 유폐된 고시라카와 법황의 시중을 들게 되면서 법황의 깊은 총애를 얻었고, 1181년에는 법황의 딸 킨시 내친왕을 낳았다. 같은 해 타이라노 키요모리가 사망하자 이를 계기로 법황의 신임을 얻어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기 시작했으며, 그 영향력은 우대신 쿠죠 카네자네가 "요즘 정치는 그녀의 붉은 입술 하나에 좌우된다"고 비판할 정도였다.
1183년 헤이시가 몰락한 후에는 고토바 천황 옹립에 관여했으며, 가마쿠라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도 관계를 맺고 교섭하는 등 정치적 수완을 발휘했다. 1187년 종3위, 1191년에는 딸 킨시 내친왕이 센요몬인宣陽門院일본어의 원호를 받으면서 종2위에 올랐다.
1192년 고시라카와 법황이 사망한 뒤 출가했으나, 법황의 유언에 따라 물려받은 영지를 기반으로 딸 센요몬인과 함께 여전히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법황 사후 권력을 잡은 쿠죠 카네자네에 맞서 미나모토노 미치치카와 손잡고 대립했으며, 1196년 겐큐 7년의 정변을 일으켜 카네자네를 실각시키고 조정을 장악했다.
그러나 1202년 협력자였던 미나모토노 미치치카가 사망하고 고토바 상황이 직접 인세이를 시작하면서 급격히 정치적 영향력을 잃었다. 이후 조정에서 물러나 죽은 남편의 영지에 있던 정토사(浄土寺)에서 지내 '정토사 2위'라 불리기도 했다. 1216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그녀의 영지인 야마시나 장원은 아들 야마시나 노리시게가 상속하여 야마시나 가의 기원이 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결혼
고시라카와 법황의 측근이었던 타이라노 나리후사와 결혼하였다. 나리후사와의 사이에서는 훗날 곤츄나곤이 되는 야마시나 노리시게(후지와라노 사네노리의 양자(유자))를 비롯한 여러 자녀를 두었다.그러나 지쇼 3년의 정변(1179년)이 일어나 타이라노 키요모리가 고시라카와 법황을 토바전에 유폐시키면서 정치적 격변에 휘말렸다. 법황의 측근이었던 남편 나리후사 역시 관직을 박탈당하고 이즈국으로 유배되었다. 나리후사는 유배지에서 탈출을 시도했으나, 이로 인해 키요모리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결국 수색 끝에 붙잡혀 후쿠하라에서 처형당하면서 남편과 사별하였다.
2. 2. 고시라카와 법황의 총애
고시라카와 법황의 측근이었던 타이라노 나리후사의 아내가 되었다. 나리후사와의 사이에서는 훗날 곤츄나곤이 되는 야마시나 노리시게 (후지와라노 사네노리의 양자) 등 여러 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지쇼 3년의 정변(1179년)으로 타이라노 키요모리에 의해 고시라카와 법황이 도바도노(鳥羽殿)에 유폐되자, 법황의 측근이었던 남편 나리후사 역시 관직을 박탈당하고 이즈국으로 유배되었다. 나리후사는 유배지에서 탈출을 시도했으나, 이에 분노한 키요모리의 수색으로 붙잡혀 후쿠하라에서 처형되었다.남편 나리후사가 사망한 후, 단고노츠보네(에이시)는 도바도노에 유폐된 고시라카와 법황을 가까이에서 모시게 되었다. 본래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던 덕분인지 곧 법황의 깊은 총애를 받게 되었다. 요와 원년(1181년) 10월에는 법황의 딸인 킨시 내친왕을 낳았다. 같은 해 윤2월에 타이라노 키요모리가 사망하자, 이를 계기로 단고노츠보네는 법황의 총애와 신임을 받는 핵심 인물로 부상하여 정치에도 개입하기 시작했다. 『교쿠요』에는 우대신 쿠죠 카네자네가 단고노츠보네를 두고 "조정의 일은 오로지 저 입술에 달려 있다(近日の朝務偏に其の紅唇の上に在り일본어)"라고 비판한 기록이 남아있다. 당시 조정의 공경들은 그녀를 양귀비에 비유하기도 했다.
쥬에이 2년(1183년) 7월, 미나모토노 요시나카의 공세에 밀려 헤이시 일족이 안토쿠 천황을 받들고 수도를 떠나자, 8월에 고시라카와 법황은 안토쿠 천황을 폐위하고 새로운 천황을 세우려 했다. 이때 고토바 천황을 추천한 인물이 바로 단고노츠보네였다고 전해진다. 헤이시 멸망 후인 분지 2년(1186년)부터는 가마쿠라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의 관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아, 오오에노 히로모토와 여러 차례 교섭을 진행했다. 분지 3년(1187년) 2월에는 종3위에 서임되었다. 겐큐 2년(1191년) 6월, 딸 킨시 내친왕이 원호(院号) 선하를 받아 센요몬인宣陽門院|센요몬인일본어이 되자, 단고노츠보네는 종2위로 승격되었다.
겐큐 3년(1192년), 고시라카와 법황이 붕어하자 단고노츠보네도 출가하였다. 그러나 법황의 유언에 따라 야마시나의 소령(야마시나 장원)을 물려받았고, 마찬가지로 유언에 따라 조코도령(長講堂領)을 받은 센요몬인과 함께 여전히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법황 사후 조정에서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후원을 받는 쿠죠 카네자네가 권세를 누렸는데, 단고노츠보네는 미치치카 등 카네자네에 반대하는 세력과 손을 잡고 그와 대립했다.
단고노츠보네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 선물을 주고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요리토모가 자신의 딸 오오히메를 고토바 천황의 후비로 입궁시키려 했을 때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결국 단고노츠보네는 미치치카와 협력하여 겐큐 7년의 정변(1196년)을 일으켜 쿠죠 카네자네를 실각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후 조정의 실권은 젊은 고토바 천황을 대신하여 단고노츠보네와 미치치카가 장악했다. 그러나 겐닌 2년(1202년)에 미치치카가 사망하고, 고토바 상황이 본격적으로 인세이를 시작하면서 단고노츠보네의 위세는 급격히 약화되었다.
이후 단고노츠보네는 조정에서 물러나 죽은 남편 나리후사의 소령에 있던 정토사(浄土寺)에서 지냈다. 이 때문에 '정토사 2위(浄土寺二位)'라고 불리기도 했다.
사망 연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겐포 4년(1216년) 2월 또는 3월이 유력하다. 그녀가 물려받은 야마시나 장원은 둘째 아들 노리시게가 상속했으며, 노리시게의 후손들은 이후 '''야마시나 가'''라는 가명을 사용하게 되었다.
2. 3. 권력 장악과 정치 개입
고시라카와 법황의 측근이었던 타이라노 나리후사의 아내가 되어, 훗날 곤추나곤이 되는 야마시나 노리시게(후지와라노 사네노리의 양자) 등 여러 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지쇼 3년의 정변(1179년)으로 타이라노 키요모리가 고시라카와 법황을 토바도노(鳥羽殿)에 유폐시키자, 법황의 측근이었던 남편 나리후사 역시 관직을 박탈당하고 이즈국으로 유배되었다. 나리후사는 유배지에서 탈출을 시도하다가 키요모리의 수색대에 붙잡혀 후쿠하라에서 처형되었다.남편이 사망한 후, 단고노츠보네는 토바도노에 유폐된 고시라카와 법황을 가까이에서 모시게 되었다. 아름다운 외모 덕분인지 곧 법황의 깊은 총애를 받게 되었고, 요와 원년(1181년) 10월에는 법황과의 사이에서 딸 킨시 내친왕을 낳았다. 같은 해 윤 2월에 타이라노 키요모리가 사망하자, 단고노츠보네는 법황의 총애와 신임을 등에 업고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당시 우대신이었던 쿠죠 카네자네는 자신의 일기 『옥엽』에서 "요즘 정치는 그녀(단고노츠보네)의 붉은 입술 하나에 좌우된다"고 기록하며 그녀의 영향력을 비판적으로 언급했다. 조정의 공경들 사이에서는 그녀를 양귀비에 비유하기도 했다.
쥬에이 2년(1183년) 7월, 미나모토노 요시나카의 공세에 밀려 헤이시 일족이 안토쿠 천황을 데리고 서쪽으로 도주하자, 8월에 고시라카와 법황은 새로운 천황을 세우려 했다. 이때 단고노츠보네가 고토바 천황을 추천했다고 전해진다. 헤이시가 멸망한 후인 분지 2년(1186년)부터는 가마쿠라 막부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도 관계를 맺고, 오오에노 히로모토를 통해 여러 차례 교섭을 진행했다. 분지 3년(1187년) 2월에는 종3위에 서임되었고, 겐큐 2년(1191년) 6월에는 딸 킨시 내친왕이 센요몬인( 宣陽門院일본어 )이라는 원호(院号)를 받으면서 단고노츠보네 자신은 종2위로 승격했다.
겐큐 3년(1192년), 고시라카와 법황이 사망하자 단고노츠보네도 출가하였다. 그러나 법황의 유언에 따라 야마시나 장원(山科荘)이라는 영지를 상속받았고, 마찬가지로 유언에 따라 조코도령(長講堂領)을 상속받은 딸 센요몬인과 함께 여전히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법황 사후 조정에서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후원을 받는 쿠죠 카네자네가 권력을 장악했지만, 이에 반발하는 미나모토노 미치치카 등의 세력이 단고노츠보네와 손을 잡고 카네자네와 대립했다.
단고노츠보네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선물을 주고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요리토모가 자신의 딸 오오히메를 고토바 천황의 후비로 입궁시키려 했을 때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단고노츠보네는 미나모토노 미치치카와 협력하여 쿠죠 카네자네를 실각시키는 데 성공했는데, 이를 겐큐 7년의 정변(1196년)이라고 한다. 이후 조정의 실권은 고토바 천황을 대신하여 단고노츠보네와 미나모토노 미치치카가 장악했다.
그러나 켄닌 2년(1202년)에 미나모토노 미치치카가 사망하고, 고토바 상황이 직접 인세이(院政, 상황이 실권을 쥐고 하는 정치)를 시작하면서 단고노츠보네의 정치적 영향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이후 조정에서 물러나 죽은 남편 나리후사의 영지에 있던 정토사(浄土寺)에서 지냈으며, 이 때문에 '정토사 2위(浄土寺二位)'라고 불리기도 했다.
사망 연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켄포 4년(1216년) 2월 또는 3월이 유력하다. 그녀가 남긴 야마시나 장원은 둘째 아들 야마시나 노리시게가 상속했으며, 노리시게의 후손들은 이후 야마시나 가(山科家)라는 가문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2. 4.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의 관계
헤이시 멸망 후인 분지 2년(1186년)부터 가마쿠라 막부의 수장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그녀는 교토 조정과 가마쿠라 막부 사이의 핵심 인물로서 막부 측의 오오에노 히로모토와 여러 차례 교섭에 임했다. 개인적으로도 요리토모와 친밀하여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사이였다고 전해진다.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독자적인 노선을 걸었다. 요리토모가 자신의 딸 오오히메를 고토바 천황에게 입궁시키려 했을 때, 에이시는 이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며 협조하지 않았다. 또한, 요리토모의 후원을 받아 조정에서 권력을 장악하려던 쿠죠 카네자네와 대립했다. 결국 에이시는 미나모토노 미치치카와 협력하여 겐큐 7년의 정변(1196년)을 일으켜 카네자네를 실각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는 요리토모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는 결과를 낳았다.
2. 5. 겐큐 7년의 정변
겐큐 3년(1192년), 고시라카와 법황이 붕어하자 단고노츠보(다카시나노 에이시)도 출가하였다. 그러나 법황의 유언에 따라 야마시나 장원(山科荘)을 물려받았고, 마찬가지로 유언에 따라 조코도령(長講堂領)을 받은 딸 센요몬인과 함께 여전히 정치에 관여하였다.고시라카와 법황 사후 조정에서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지지를 받는 쿠죠 카네자네가 권력을 잡았다. 하지만 이에 반발하는 세력도 형성되었는데, 미나모토노 미치치카와 단고노츠보 등이 중심이 되어 카네자네와 대립하였다.
단고노츠보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 선물을 주고받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요리토모가 자신의 딸 오오히메를 고토바 천황에게 입궁시키려 했을 때는 미나모토노 미치치카와 함께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결국 단고노츠보는 미치치카와 협력하여 쿠죠 카네자네를 실각시키는 데 성공했는데, 이를 겐큐 7년의 정변이라고 부른다.
정변 이후 조정의 실권은 어린 고토바 천황을 대신하여 단고노츠보와 미나모토노 미치치카가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겐닌 2년(1202년) 미치치카가 사망하고, 고토바 상황이 본격적으로 인세이를 시작하면서 단고노츠보의 정치적 영향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2. 6. 몰락과 죽음
겐큐 3년(1192년), 고시라카와 법황이 붕어하자 단고노츠보도 출가했다. 그러나 법황의 유언에 따라 야마시나의 소령(야마시나 장원)을 물려받았고, 마찬가지로 유언에 따라 조코도령(長講堂領)을 받은 센요몬인(킨시 내친왕)과 함께 여전히 정치에 개입했다. 법황 사후 조정에서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등에 업은 쿠죠 카네자네가 권세를 떨쳤는데, 이에 반발하는 미나모토노 미치치카 등은 단고노츠보와 손을 잡고 카네자네와 대립했다.단고노츠보는 요리토모와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항상 선물을 주고받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요리토모가 자신의 딸 오오히메를 고토바 천황에게 입궁시키려 했을 때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단고노츠보는 미나모토노 미치치카와 협력하여 쿠죠 카네자네를 실각시키는 데 성공했는데, 이를 겐큐 7년의 정변이라고 부른다. 이 정변 이후 조정의 실권은 젊은 고토바 천황을 대신하여 단고노츠보와 미치치카가 장악했다.
그러나 겐닌 2년(1202년) 미나모토노 미치치카가 사망하고, 고토바 상황이 본격적으로 원정(院政)을 시작하면서 단고노츠보의 정치적 영향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이후 단고노츠보는 조정에서 물러나 죽은 남편 타이라노 나리후사의 소령에 있던 정토사(淨土寺)에서 지냈다. 이 때문에 '정토사 2위(淨土寺二位)'라고 불리기도 했다.
사망 연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겐포 4년(1216년) 2월 또는 3월이 유력하다. 그녀가 남긴 야마시나 장원은 둘째 아들 야마시나 노리시게가 상속했으며, 노리시게의 후손들은 이후 '''야마시나 가문'''을 칭하게 되었다.
3. 가계와 켄슌몬인과의 관계
다카시나노 에이시의 고모인 와카사노츠보네는 고시라카와 천황의 뇨고였던 켄슌몬인의 유모였다. 와카사노츠보네는 켄슌몬인이 뇨고가 된 후 정식 궁녀(뇨보)가 되었으며, 켄슌몬인이 사망한 후에도 "황태자 안토쿠 천황(켄슌몬인의 손자)의 유모와 같고, 집권자 같은 사람"이라고 불릴 정도로 권세를 누렸다.
와카사노츠보네 외에도 에이시의 친척 다수가 켄슌몬인 측의 궁녀(뇨보)로 활동했다. 여기에는 에이시의 고모인 야마토와 히고, 히고의 딸이자 켄슌몬인의 총애를 받은 미카와, 에이시의 언니 스오, 사촌 무사시, 무사시의 딸 히타치, 이즈미, 이가 등 최소 8명이 포함된다.
작가 스기모토 소에코는 와카사노츠보네의 어머니, 즉 에이시의 할머니가 헤이시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 인연으로 켄슌몬인의 유모가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또한, 에이시 자신도 이러한 관계를 통해 일찍부터 천황이나 뇨고인 켄슌몬인을 섬겼으며, 아름다운 외모와 총명한 처신으로 법황의 적지 않은 관심을 받았을 것으로 보았다.
4. 관련 작품
(내용 없음)
4. 1. 드라마
- 풀이 불탄다 (1979년, NHK 대하드라마) - 연기: 쿠사부에 미츠코
- 요시츠네 (2005년, NHK 대하드라마) - 연기: 나츠키 마리
- 가마쿠라도노의 13인 (2022년, NHK 대하드라마) - 연기: 스즈키 쿄카
4. 2. 만화
- 『엽휘비』 (작: 이치카와 준, 1996년, 주인공이 에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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