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선거 민주자유당 후보 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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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선거 민주자유당 후보 경선은 노태우 정부의 민주자유당 내 계파 갈등 속에서 치러졌다. 대통령 후보가 되기 위해 김영삼과 이종찬이 경쟁했으며, 김영삼이 당선되었다. 경선 과정에서 김영삼은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으나, 이종찬 후보가 불공정 경선을 주장하며 탈당, 신당 창당을 시도했다. 결국 김영삼이 과반수 득표로 최종 후보가 되었고, 3당 합당 이후 민주계가 여권의 주류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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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 후보가 39.8%의 득표율로 대전직할시에서 1위를 차지했으며, 모든 지역에서 승리하여 3당 합당의 결과를 보여주었다. -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선거 -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선거 민중대통령후보선거대책본부 후보 선출
1992년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중 대통령 후보로 백기완을 추대하기 위해 결성된 선거대책본부는 민중회의준비위원회, 진보정당추진위원회 등의 참여로 구성되어 백기완을 공식 후보로 발표하고, 기존 정당 정치의 한계를 넘어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민주주의 가치 실현과 민중의 삶 개선을 목표로 선거에 참여했다.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선거 민주자유당 후보 경선 | |
---|---|
선거 정보 | |
국가 | 대한민국 |
득표 1 | 4,418 |
득표 2 | 2,214 |
득표율 1 | 64.2% |
득표율 2 | 32.2% |
색상 1 | 파랑 |
색상 2 | 파랑 |
선거명 |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선거 민주자유당 후보 경선 |
선거일 | 1992년 5월 19일 |
이전 선거 | 노태우 (민주정의당) 김영삼 (통일민주당)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
이후 선거 | 김영삼 |
유형 | 대통령 |
![]() | |
이전 선거 |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 민주정의당 후보 선출 |
이전 선거 연도 | 1987년 |
차기 선거 |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 신한국당 후보 경선 |
차기 선거 연도 | 1997년 |
직책 | 대통령 후보 |
후보 1 | 김영삼 |
후보 2 | 이종찬 |
선거 후 정당 | 민주자유당 |
국기 이미지 | 민주자유당 로고.svg |
선거인단 | 재적 대의원 수 6,882명 당선을 위해 3,442표 필요 |
2. 경선 배경
노태우의 민정당, 김영삼의 민주당, 김종필의 공화당이 합당하여 창당된 민주자유당은 필연적인 계파 갈등에 시달리고 있었다.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당 대표는 당의 주도권을 두고 경쟁했으며, 이는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서 심화되었다. 노태우는 박철언을 차기 대권 후보로 내정했으나, 김영삼은 집단 탈당 및 반정부 투쟁까지 불사하며 반발하여 결국 철회되었다.[9]
3당 합당 당시 민정·민주·공화계의 대의원 지분율은 6.5:2.4:1.1 수준이었다. 김영삼은 자유 경선 방식으로는 민정계 후보를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여 당 지도부의 사전 조정을 통한 후보 선출을 주장했으나, 결국 자유 경선 형식을 갖추되 노태우 대통령의 막후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경선에 합의했다.[9]
2. 1. 3당 합당과 계파 갈등
노태우의 민정당, 김영삼의 민주당, 김종필의 공화당이 합당해 창당된 민주자유당은 창당 이후 계속 필연적인 계파 갈등에 시달리고 있었다. 대통령이자 당 총재였던 노태우와 당 대표였던 김영삼은 서로 당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이는 대선이 다가오면서 점점 심해졌는데, 노태우는 차기 대권 후보로 박철언을 내정하고 있었으나 민주계의 김영삼이 항의하며 집단 탈당과 반정부 투쟁까지도 고려하며 반발하자 결국 철회하는 일도 있었다.[9]3당 합당 당시 민정·민주·공화계의 대의원 지분율은 각각 6.5대 2.4대 1.1 수준이었다. 김영삼은 자유 경선 방식으론 민정계 후보에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당 지도부에서 사전 조정을 통해 후보를 선출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결국 자유 경선의 형식을 갖추는 대신, 노태우 대통령의 막후 지원을 받는 것으로 경선에 합의했다.[9]
박태준, 박철언, 이한동, 이종찬, 심명보, 박준병, 양창식 등 민정계 중진 7명으로 이루어진 7인협의회는 치열한 신경전 끝에 4월 18일 이종찬 의원을 민정계 단일 후보로 추대하기로 발표했다.[10]
당초 김영삼 측에서 박태준이 출마할 경우 탈당하겠다며 청와대와 민정계를 압박할 만큼 유력한 후보였던 박태준이었으나, 계파 단합을 위해 포기해 이종찬이 후보로 나서게 된 것이었다.
2. 2. 민정계 단일화 과정
박태준, 박철언, 이한동, 이종찬, 심명보, 박준병, 양창식 등 민정계 중진 7명으로 구성된 7인 협의회는 1992년 4월 18일 이종찬 의원을 민정계 단일 후보로 추대하기로 발표했다.[10]김영삼 측에서 박태준이 출마할 경우 탈당하겠다며 청와대와 민정계를 압박할 만큼 박태준은 유력한 후보였으나, 계파 단합을 위해 불출마를 선언하여 이종찬이 후보로 나서게 된 것이었다.
3. 경선 방식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 출마하려면 당무회의 제청을 받거나 재적 대의원 10~20%의 추천을 받아야 했다. 대의원 추천을 받는 경우 8개 이상의 시도에서 각각 50인 이상 추천을 받아야 했다.[1][2]
전당대회 재적 대의원 수는 5월 14일 당무회의에서 당연직 2,631명 및 선출직 4,251명 등 총 6,882명으로 확정되었다. 이 중 지구당 대의원이 4,527명으로, 지구당 위원장들의 민심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할 것으로 예측됐다. 그러나 같은 지구당 내에서 위원장은 김영삼을, 대의원들은 이종찬 지지를 선언하는 등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5][6]
대통령 후보는 재적 대의원의 과반을 득표해야 했다.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자가 없을 시 2차 투표를 진행하고, 2차 투표에서도 과반 득표자가 없을 시 최고 득표자 간 결선투표를 진행해 다수 득표자를 지명하도록 했다.[7]
3. 1. 후보 등록
당초 유력 주자로 꼽히던 김종필 전 총리와 박태준 의원은 각각 김영삼 후보와 이종찬 후보를 지지하며 불출마를 선언했다.
기호는 배정되지 않았다. 다만 이원경 당 선거관리위원장과 김영삼 캠프의 김용채 총괄간사, 이종찬 캠프의 심명보 선거대책본부장이 모여 추첨을 실시, 이종찬의 이름이 투표용지의 왼쪽에, 김영삼의 이름이 오른쪽에 나오도록 하기로 하였다.
김영삼 | 이종찬 | |
---|---|---|
서울 | 250 | 348 |
부산 | 71 | 0 |
대구 | 97 | 60 |
인천 | 76 | 60 |
광주 | 51 | 65 |
대전 | 52 | 60 |
경기 | 148 | 132 |
강원 | 130 | 91 |
충북 | 96 | 52 |
충남 | 75 | 64 |
전북 | 61 | 100 |
전남 | 61 | 76 |
경북 | 82 | 55 |
경남 | 76 | 0 |
제주 | 55 | 23 |
계 | 1,381 | 1,186 |
김영삼은 추천 상한선인 1,381명을 꽉 채웠으며, 이종찬 역시 PK와 제주를 제외한 전 지역에서 50명 이상의 추천장을 받아내는 등 선전했다. 김영삼은 1,480명의 추천장을 확보했으나, 몇 장은 제한선에 걸려 못 낸 것이었고, 이종찬의 경우 부산과 경남에서도 각각 50장 이상의 추천서를 확보했으나 모종의 이유로 제출하지 않았다. 당내 최대 계파인 민정계의 지원이 절실하다는 판단 하에 김영삼 캠프는 최대한 민정계 대의원들의 추천장만 받기로 했으며, 그 결과 김영삼 측에 추천서를 써준 대의원 1,381명 중 90%는 민정계였다. 김영삼 캠프는 약세 지역으로 점친 경기도와 충남에서 이종찬보다 많은 추천서를 확보한 것에 만족감을 드러냈고, 이종찬 캠프는 지구당 위원장들 대부분이 김영삼 지지를 선언한 상황 속에서도 말단 대의원들을 포섭해 크게 뒤지지 않는 추천수를 얻어낸 것에 고무된 분위기였다.[8]
4. 후보
당초 유력 주자로 꼽히던 김종필 전 총리와 박태준 의원은 각각 김영삼 후보와 이종찬 후보를 지지하며 불출마를 선언했다.
기호는 배정되지 않았다. 다만 이원경 당 선거관리위원장과 김영삼 캠프의 김용채 총괄간사, 이종찬 캠프의 심명보 선거대책본부장이 모여 추첨을 실시, 이종찬의 이름이 투표용지의 왼쪽, 김영삼의 이름이 오른쪽에 나오도록 하기로 하였다.[8]
김영삼 | 이종찬 | |
---|---|---|
서울 | 250 | 348 |
부산 | 71 | 0 |
대구 | 97 | 60 |
인천 | 76 | 60 |
광주 | 51 | 65 |
대전 | 52 | 60 |
경기 | 148 | 132 |
강원 | 130 | 91 |
충북 | 96 | 52 |
충남 | 75 | 64 |
전북 | 61 | 100 |
전남 | 61 | 76 |
경북 | 82 | 55 |
경남 | 76 | 0 |
제주 | 55 | 23 |
계 | 1,381 | 1,186 |
김영삼은 추천 상한선인 1,381명을 채웠으며, 이종찬 역시 부산과 제주를 제외한 전 지역에서 50명 이상의 추천을 받았다. 김영삼은 1,480명의 추천을 확보했으나, 몇 장은 제한선에 걸려 제출하지 못했고, 이종찬의 경우 부산과 경남에서도 각각 50장 이상의 추천서를 확보했으나 제출하지 않았다. 당내 최대 계파인 민정계의 지원이 절실하다는 판단 하에 김영삼 캠프는 민정계 대의원들의 추천만 받기로 했으며, 김영삼 측 추천 대의원 1,381명 중 90%는 민정계였다. 김영삼 캠프는 약세 지역으로 점친 경기도와 충남에서 이종찬보다 많은 추천을 확보한 것에 만족했고, 이종찬 캠프는 지구당 위원장들 대부분이 김영삼 지지를 선언한 상황에서도 말단 대의원들을 포섭해 뒤지지 않는 추천수를 얻어낸 것에 고무되었다.[8]
5. 경선 과정
김영삼은 대의원의 10~20%를 차지하고 있는 공화계의 수장 김종필 최고위원을 대선 후보 추대위원회 위원장으로 영입하고, 상당수 민정계 지구당 위원장들을 확보하여 대세론을 형성했다.[11]
이종찬 후보 측은 노태우 대통령이 김영삼을 몰래 지원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경선이 불공정하다고 비판했다.[14]
5. 1. 경선 파행
김영삼은 대의원의 10~20%를 차지하고 있는 공화계의 수장인 김종필 최고위원을 김영삼 대선 후보 추대위원회 위원장으로 영입했고, 상당수 민정계 지구당 위원장들을 확보해 승리가 확실시됐다.[11] 경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도 전에 대의원들의 약 70%를 확보한 것으로 나타나 압도적인 우세를 보였다.[13] 김영삼 추대위에는 지구당 위원장, 당 고문, 13대 의원, 14대 전국구 국회의원 당선자, 정책평가위 분과위원장, 중앙위원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12]| 구분 | 서울 | 부산 | 대구 | 인천 | 광주 | 대전 | 경기 | 강원 | 충북 | 충남 | 전북 | 전남 | 경북 | 경남 | 제주 | 합계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지구당 위원장 수[12] | 34 | 16 | 4 | 5 | 4 | 3 | 21 | 12 | 6 | 9 | 8 | 9 | 19 | 22 | 2 | 174 |
이종찬 후보 측은 노태우 대통령이 몰래 김영삼을 지원해주고 있는 결과라며 비난했다.[14] 청와대 및 당 지도부에서 김영삼을 밀어주고 경선이 형식적이 되자 이종찬 후보는 불공정 경선이라며 경선 불참[15], 이후 탈당하고 새한국당을 창당해 독자 출마하였다. 그러나 큰 지지를 얻지 못하자 통일국민당 정주영 후보 지지를 선언하고 사퇴했다.
6. 경선 결과
투표 결과 재적 대의원의 과반을 얻은 김영삼 후보가 최종 당선되었다. 김영삼 후보 측은 범계파 추대위까지 발족시키며 대세론을 형성하려 애썼으나, 반(反)YS 민정계가 결집하여 이종찬 후보가 예상 밖으로 선전하였다.[16]
특히 이종찬 후보는 전당대회를 앞두고 불공정 경선을 인정할 수 없다며 보이콧을 선언했던 터라 이종찬 후보의 득표수는 초유의 관심사였다. 김영삼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종찬 후보 지지표가 많을수록 이종찬 후보의 탈당 및 신당 창당 명분에 힘이 실릴 거라는 예측 때문이었다. 실제로 이종찬 후보는 기대 이상의 득표율을 올리자 사실상 자신의 승리라고 선언했으며, 곧바로 신당 창당을 위한 사전 조직인 '새정치모임'을 출범시켰다.[17] 이후 이종찬 후보는 11월 17일 새한국당을 창당하고 대선 후보로 추대되었으나, 지지세를 확보하지 못하고 중도 사퇴했다.
김영삼과 민주계는 이로써 3당 합당이라는 도박을 시도한 지 2년 만에 대선 후보직을 거머쥠으로써 여권의 신주류가 되는 데 성공했다.
7. 경선 이후
경선 이후, 민주자유당은 김영삼 후보를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었다. 경선 과정에서 나타난 계파 간 갈등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지만, 정권 재창출이라는 공동 목표 아래 표면적으로는 봉합되었다.
경선 결과는 대한민국 정치 지형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민주공화당의 연합으로 탄생한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의 등장은 기존의 지역주의 구도를 흔들었다. 특히, 김영삼 후보는 부산·경남 지역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민주화 운동 경력을 바탕으로 전국적인 지지를 확보하여 지역주의 극복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경선 과정에서 드러난 계파 갈등과 이종찬 후보 지지 세력의 이탈은 민주자유당의 불안정한 기반을 드러냈다. 이는 이후 김영삼 정부의 개혁 과정에서 당내 반발과 정치적 불안정으로 이어지는 요인이 되었다.
참조
[1]
서적
민주자유당 당헌
민주자유당
199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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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자당, 전당대회 대의원 확정[엄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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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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