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준 (1927년)
1. 개요
박태준은 1927년 경상남도 동래군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성장했으며,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 5.16 군사 정변 당시 박정희의 신임을 받았으며, 국가재건최고회의 상공분과위원 등을 역임하며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수립에 참여했다. 이후 기업인으로 변신하여 대한중석 사장과 포항제철 초대 사장을 역임하며 회사를 세계적인 철강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정계에 입문하여 국회의원과 민주정의당 대표를 지냈으며, 1997년 자유민주연합 총재, 2000년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2011년 85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포스코 명예회장과 포스코청암재단 이사장을 지냈다.
| 이름 | 박태준 |
|---|---|
| 로마자 표기 | Bak Taejun |
| 한자 표기 | 朴泰俊 |
| 호 | 청암 (靑岩) |
| 출생일 | 1927년 10월 24일 |
| 출생지 |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동래군 장안면 |
| 사망일 | 2011년 12월 13일 |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세브란스병원 |
| 국적 | 대한민국 |
| 종교 | 개신교 (예장통합) |
| 본관 | 밀양 |
| 거주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대저택 |
| 부모 | 박봉관(부), 김소순(모) |
| 배우자 | 장옥자 |
| 자녀 | 1남 4녀 |
| 웹사이트 | 포스코역사관 |
| 최종 학력 | 단국대학교 |
|---|---|
| 학력 | 와세다대학교 (중퇴), 육군사관학교 6기 |
| 주요 경력 | POSCO 창립자 및 회장, 대한민국 육군 장군, 국무총리 |
|---|---|
| 국회의원 | 제11·13·14대 국회의원 (전국구), 제15대 국회의원 (경북 포항시 북구) |
| 군 경력 |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 국가재건최고회의 상공분과위원장 |
| 군 복무 | 대한민국 육군 1948년 3월 ~ 1963년 9월 22일 |
| 정당 | 무소속 |
| 직업 | 기업인, 정치인, 군인 |
| 직책 | 국무총리 |
|---|---|
| 대수 | 32 |
| 임기 시작 | 2000년 1월 13일 |
| 임기 종료 | 2000년 5월 18일 |
| 대통령 | 김대중 |
| 전임 | 김종필 |
| 후임 | 이한동 |
| 훈장 | 충무무공훈장 (1950, 1952) 화랑무공훈장 (1951, 1953, 1954) 국민훈장 무궁화장 (1974) 청조근정훈장 (2011. 12. 추서) |
|---|---|
| 수상 | 영국 금속학회 베서머 금상 (1987) 레종도뇌르 훈장 (1990) 노르웨이 국왕 훈장 (1991) 윌리코프상 (1992) 한국경영자대상 (1992) |
| 별명 | TJ |
|---|---|
| 로마자 호 표기 | Cheongam |
-
김도근가 -
김세연 (1972년)
김세연은 1972년생으로 서울대학교에서 국제경제학을 전공하고 ㈜동일고무벨트 대표이사를 역임했으며, 제18대, 제19대, 제20대 국회의원을 지내고 바른정당, 자유한국당 등에서 활동하며 2022년부터 한국스마트헬스케어협회 회장을 역임하고 있는 정치인이다. -
포스코그룹 사람 -
김만제
김만제는 1934년생으로 미주리대학교 경제학 박사 출신이며 한국개발연구원 원장, 재무부 장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등 주요 직책을 거쳐 한국 경제 정책 수립에 기여한 경제학자이자 관료, 기업인, 정치인으로, 삼성생명과 포항제철 회장을 역임하고 국회의원으로도 활동하며 은탑산업훈장, 국민훈장 무궁화장, 청조근정훈장 등을 수훈했다. -
포스코그룹 사람 -
정준양
정준양은 서울대학교 출신으로 포스코 CEO, 한국철강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광양제철소 소장 재임 시절 고품질 자동차 강판 국산화에 성공한 기업인이다. -
K리그 명예의 전당 헌액자 -
이동국
이동국은 1998년 포항 스틸러스에서 프로 데뷔하여 독일 리그를 거쳐 K리그 최다 득점 기록을 세우고 국가대표로도 활약한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이다. -
K리그 명예의 전당 헌액자 -
신태용
신태용은 대한민국 축구 선수, 지도자, 해설가로 활동하며, 선수 시절 성남 일화 천마에서 활약하고 K리그 MVP를 수상했으며, 지도자로서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달성하고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인도네시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활동한다.
2. 생애
박태준은 1927년 경상남도 동래군 장안면 임랑리(현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임랑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부산 등지에서 보냈다. 6세 때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성장했으며, 1945년 와세다 대학 예과에 입학했으나 광복을 맞아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1947년 남조선경비사관학교(현 육군사관학교) 6기로 입학하여 1948년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한국 전쟁에 참전했으며, 1963년 단국대학교 정치학과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같은 해 육군 소장으로 예편했다. 군 복무 중 박정희와의 인연을 맺었다.
예편 후 기업인으로 활동하며 1964년 대한중석(현 대구텍) 사장을 거쳐, 1968년 포항제철(현 포스코) 초대 사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제철보국(製鐵報國)'의 기치 아래 포항제철을 세계적인 철강 기업으로 성장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포항공과대학교(POSTECH) 설립 등 교육 분야에도 기여했다.
1980년 국가보위입법회의 참여를 계기로 정계에 입문,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국회의원과 당 대표를 지냈고, 민주자유당 최고위원을 역임했다. 그러나 김영삼과의 정치적 갈등으로 1992년 포항제철 회장직과 국회의원직에서 물러났다. 김영삼 정부 시절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1997년 정계에 복귀하여 자유민주연합 총재를 맡았고, DJP 연합을 통해 정권 교체에 기여했다. 김대중 정부에서 2000년 국무총리에 임명되었으나 개인적인 문제로 4개월 만에 사임했다.
이후 포스코 명예회장 등으로 활동하다 2011년 12월 13일, 흉막섬유종 후유증으로 인한 급성 폐 손상으로 향년 8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사회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으며, 사후 세계 철강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주요 상훈으로는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국민훈장 무궁화장, 프랑스 레종도뇌르훈장 등이 있으며, 사후 청조근정훈장이 추서되었다. 저서로는 《신종이산가족》(1987)이 있다.
2.1. 유년 시절과 교육
1927년 경상남도 동래군 장안면 임랑리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은 부산 등지에서 보냈다. 6살 때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1945년 와세다 대학 예과(예비과정)에 입학했으나, 광복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였다. 1947년 남조선경비사관학교(현 육군사관학교) 6기로 입학하여 1년 후인 1948년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사관생도 시절, 당시 탄도학 교관이자 제1중대장이었던 박정희 대위를 만났는데, 박태준은 어려운 탄도학 문제를 잘 풀어 박정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충무무공훈장(1950, 1952)과 화랑무공훈장(1951, 1953, 1954)을 받았다. 1953년 11월에는 육군대학교에 입학하여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이후 당시 정부의 고위 관료들에 대한 4년제 대학 학위 이수 요구에 따라, 1961년 단국대학교 서울캠퍼스 정법학부 정치학과에 편입하여 1963년에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2.2. 군 복무
1947년 남조선경비사관학교 6기로 입학하여 1년 후인 1948년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사관학교 생도 시절, 그의 제1중대장은 당시 탄도학 교관이었던 박정희 대위였다. 박태준은 당시 난제로 알려져 있던 탄도학 문제를 해결하여 박정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충무무공훈장(1950, 1952)과 화랑무공훈장(1951, 1953, 1954)을 받았다. 1953년 11월 육군대학교에 입학하여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육군사관학교 교무처장을 거쳐 국방부 인사과장을 역임하던 1957년 가을, 당시 군수기지사령관이던 박정희 소장과 재회하였고, 그의 권유로 제25보병사단 참모장에 취임하며 다시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1961년 5.16 군사 정변에는 직접 가담하지 않았다. 이는 그를 신뢰하던 박정희가 쿠데타 실패 시 자신의 가족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는 훗날 박태준이 박지만의 후견인을 자처한 배경이 되기도 했다.
정변 성공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상공분과위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입안에도 관여하였다. 당시 정부의 고위급 관료들에 대한 4년제 대학 학위 이수 요구에 따라, 1961년 단국대학교 서울캠퍼스 정법학부 정치학과에 편입하여 1963년에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63년 9월 22일 육군 소장으로 예편하였다.
2.3. 기업인 활동
육군 소장으로 예편한 후 기업인으로 전향하여, 1964년 대한중석(현 대구텍) 사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부임 1년 만에 회사를 흑자로 전환시키는 경영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가 흑자로 전환시킨 대한중석은 이후 대구텍으로 사명을 변경했으며, 워런 버핏이 투자한 한국 기업 중 하나가 되었다.
1968년 4월, 박정희 정부의 종합제철 건설 계획에 따라 포항제철(현 포스코)의 초대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제철보국(製鐵報國)'이라는 신념 아래 포항제철 건설을 이끌었으며, 창립 10년 만인 1978년에는 연간 550만 톤의 철강 생산 능력을 갖춘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포스코는 그의 리더십 아래 성장을 거듭하여 2010년에는 세계 3위의 철강업체로 발돋움했다. 포항제철 건설 과정에서 정계의 압력으로 핵심 시설 구매 허가가 나지 않자, 박태준은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에게 직접 도움을 요청했다. 박정희는 박태준이 필요한 사항을 적은 종이에 직접 서명하여 승인해주며 사업 추진에 힘을 실어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박태준은 포항제철을 경영하며 직원 복리후생 증진에도 힘썼다. 당시 한국 최고 수준의 주택단지를 조성하고, 직원 자녀들을 위한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설립했다. 또한, 1986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를 모델로 하여 포항공과대학교(POSTECH)를 설립하여 고급 과학기술 인재 양성에도 기여했다.
그의 리더십은 해외에서도 높이 평가받았다. 일본 미쓰비시종합연구소는 포스코 성공의 주요 요인으로 박태준의 리더십을 꼽았으며, 미국 스탠퍼드 경영대학원 연구에서도 한국 발전에 있어 그의 리더십이 중요했다고 평가했다.
박태준은 포항제철 설립 당시부터 정치 외풍을 막는 방패 역할을 해왔으나, 1992년 10월 김영삼 정부 출범을 앞두고 김영삼과의 정치적 불화 끝에 포항제철 회장직에서 사임했다. 이후 김영삼 정부 시절 포항제철 협력사로부터 3900여 원을 받은 혐의로 조사를 받았는데, 이는 1992년 민자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 김영삼의 반대편에 섰던 박태준에 대한 표적 수사라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이 혐의는 1995년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공소기각되었다.
사후에는 '제철보국의 이념으로 철강 불모지 한국에 일관제철소를 설립해 산업 근대화를 이끈 철강왕'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세계 철강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그는 포스코 명예회장과 포스코청암재단 이사장을 역임하며 포스코의 발전에 지속적으로 기여했다.
2.4. 정치 활동
1980년 국가보위입법회의 경제 제1위원장으로 취임하며 정계에 입문하였다. 1981년에는 민주정의당 소속 전국구 후보로 제11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국회 재무위원장을 지냈다.
1988년 민주정의당 대표를 맡았고, 1990년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의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출범하자 최고위원 중 한 명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김영삼과의 관계는 순탄치 않았다. 박태준은 포항제철 설립 초기부터 정치 외풍을 막는 역할을 자임해왔으나, 1992년 10월 김영삼과의 불화 끝에 포항제철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같은 해 10월 5일, 민자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영삼의 선거대책위원장직 제안을 거절하고 당직 사퇴서를 제출하며 백의종군을 선언했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국회의원직도 사퇴하였다.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박태준은 포항제철 협력사 등으로부터 3900 가량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수사를 받게 되자 한동안 해외에 체류했다. 이는 1992년 민자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 박태준이 김영삼의 반대편에 섰던 것에 대한 정치 보복, 즉 표적 수사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 사건은 1995년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공소기각되었다.
1997년, 김영삼 정부의 경제 정책 실패를 비판하며 포항시 북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 성공적으로 정계에 복귀했다. 같은 해 11월 자유민주연합 총재로 추대되었고, 김종필과 함께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는 이른바 DJP 연합을 통해 제15대 대통령 선거 승리에 기여했다.
김대중 정부 출범 후인 2000년 1월, 국무총리로 임명되었으나, 부동산 명의신탁 의혹이 불거지면서 취임 4개월 만에 사퇴하였다.
2.5. 사망
2001년 미국 코넬대학교 병원에서 흉막섬유종 수술을 받았으나, 이후 후유증으로 계속 고통을 받았다. 2011년 호흡 곤란으로 치료를 받았고, 같은 해 12월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였다. 결국 2011년 12월 13일,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에서 흉막섬유종 수술 후유증으로 인한 호흡 곤란 증세를 치료받던 중 급성 폐 손상이 발생하여 향년 85세(만 84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그는 포스코가 국가 산업의 동력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유언을 남겼다.
발인일인 2011년 12월 17일 서울특별시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사회유공자묘역 17묘역에 안장되었다. 배우자 장옥자와 자녀, 손주들이 유족으로 남았다.
사후 박태준은 세계 철강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명예의 전당 추천위원단은 헌정 이유로 '제철보국의 이념으로 철강 불모지 한국에 일관제철소를 설립해 산업 근대화를 이끈 철강왕'이라는 점을 들었다.
3. 학력
* 일본 와세다 대학 기계공학과 입학 (1945년, 중퇴)
* 육군사관학교 6기 졸업 (1948년)
* 육군대학교 수석 졸업 (1953년 입학)
* 단국대학교 정치학 학사 (1961년 편입, 1963년 졸업)
* 국방대학원 행정학 석사
* 셰필드 대학교 공학 명예박사
4. 정치 활동 및 역대 선거 결과
1980년 국보위 경제 제1위원장에 취임하며 정계에 입문했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후보로 당선되어 국회 재무위원장을 지냈다. 1988년 제13대 총선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후보로 재선되었고, 당 대표를 역임했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창당되자 최고위원으로 참여했으며,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 민주자유당 전국구 후보로 3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김영삼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199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포스코 회장직에서도 물러났는데, 이는 김영삼 정부와의 불화 직후 이루어진 일이다. 김영삼 정부 시절, 포스코 하청업체로부터 약 3.9을 받은 혐의로 기소되어 해외에 머물기도 했다. 당시 정권 차원의 표적 수사라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본인이 금품 수수 사실 자체는 인정하여 재판이 진행되던 중 1995년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공소 기각되었다.
1997년 7월,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김영삼 정부의 경제 실정을 비판하며 당선, 4선 의원으로 정계에 복귀했다. 같은 해 11월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하여 총재로 추대되었고, 김종필과 함께 김대중 후보의 제15대 대통령 당선을 지지하는 이른바 'DJT 연합'을 이끌었다.
김대중 정부 출범 후 2000년 1월 국무총리에 임명되었으나, 부동산 명의신탁 의혹이 제기되어 취임 4개월 만에 사퇴했다. 이후 법원은 해당 의혹이 사실무근임을 판결했다.
=== 역대 선거 결과 ===
5. 기업 경영 활동
1963년 육군 소장으로 예편한 후 기업인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1964년 대한중석`(현 대구텍)` 사장으로 임명되어 1년 만에 회사를 흑자로 전환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대한중석은 이후 워런 버핏이 투자한 몇 안 되는 한국 기업 중 하나가 되었다.
1968년 4월에는 포항종합제철`(현 포스코)`의 초대 사장으로 취임하여 제철소 건설을 이끌었다. 그의 주도 하에 포항제철은 설립 10년 만인 1978년에는 연간 550만 톤의 철강을 생산하는 기업으로 성장했으며, 이후 세계적인 철강 회사로 발돋움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74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훈했으며, 1987년에는 영국 금속학회로부터 베서머 금상을 받았다. 또한, 1975년부터 1990년까지 한국철강협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철강 산업 발전에 기여했다.
교육 분야에도 관심을 기울여 1986년에는 포항공과대학교를 설립했다.
그러나 1992년 10월, 김영삼 정부와의 불화 속에서 포항제철 회장직에서 사임했다. 당시 그는 민주자유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김영삼의 선거대책위원장직을 거절하고 백의종군을 선언했으며, 이는 정권과의 관계 악화로 이어졌다. 김영삼 정부 출범 후, 포항제철 협력사로부터 3.9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당시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김영삼의 반대편에 섰던 정치적 배경 때문에 표적 수사라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 사건은 1995년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공소 기각되었다.
5.1. 포스코 경영 철학 및 리더십
박태준의 경영 철학은 '제철보국'(製鐵報國, 제철로써 나라에 보답한다)이라는 이념으로 대표된다. 이는 그가 사후 세계 '철강 명예의 전당'에 헌정될 때의 주요 근거로 언급되기도 했다. 추천위원회는 그를 "제철보국의 이념으로 철강 불모지 한국에 일관제철소를 설립해 산업 근대화를 이끈 철강왕"으로 평가했다.
그의 리더십은 국내외 연구기관에서도 높이 평가받았다. 일본의 미쓰비시종합연구소는 포스코 성공의 핵심 요인으로 "박태준 회장의 탁월한 리더십"을 지목했으며, 스탠퍼드 경영대학원의 연구 보고서 역시 한국 경제 발전에 있어 그의 리더십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분석했다.
박태준은 품질과 원칙을 중요시하는 경영 스타일을 고수했다. 1977년 포항 제3기 설비 공사 당시, 발전송풍 설비에서 부실 공사가 발견되자 공정률이 80%에 달했음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해당 부분을 폭파하고 재시공하도록 지시한 일화는 그의 엄격한 품질 관리 원칙을 보여준다.
포스코 설립 초기, 선진 제철 기술 확보는 중요한 과제였다. 박태준은 기술 도입을 위해 신일본제철의 이나야마 요시히로 회장과의 관계 구축에 힘썼다. 그는 "물건을 훔치는 것은 나쁜 짓이지만, 마음을 훔치는 것은 좋은 것이며 전략적인 일"이라고 회고하며, 인간적인 관계를 통해 기술 도입의 장벽을 넘으려 노력했음을 시사했다. 실제로 이나야마 회장의 개인적인 지원 약속에도 불구하고, 신일본제철 내부에서는 기술 유출에 대한 저항이 있었다. 그러나 박태준은 결국 제철소 운영의 핵심인 규정집(기술 매뉴얼), 설계도면, 기계 사양 등 방대한 기술 자료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친해져야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 이러한 전략이 없다면 기술을 도입할 수 없다.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 기술까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하며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인재 양성에도 관심을 기울여 하버드 경영대학원과 서울대학교 관련 사업에 기여했으며, 직원들의 복지 향상에도 힘썼다. 포스코 직원들을 위한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조성했고, 특히 자녀 교육 환경을 고려하여 단지 내에 최고 수준의 유치원을 설립하는 등 주거 환경 개선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6. 사회 공헌 활동
박태준은 포스코 직원들을 위한 아파트 단지를 조성했으며, 특히 어린이를 위한 유치원을 포함한 최고 수준의 주택 단지를 만드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교육 분야에 대한 기여도 두드러진다. 1971년에는 60의 기금으로 포항제철장학재단을 설립했다. 이 재단은 이후 여러 차례 명칭이 변경되어 1996년에는 포항철강장학재단, 2002년에는 포스코장학재단으로 바뀌었고, 2005년에는 최종적으로 포스코청암재단으로 개편되었다. 포스코청암재단은 포스코 직원들의 교육비 지원, 학생들의 해외 박사 학위 취득 지원,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의 학교 지원 등 다양한 장학 및 교육 지원 사업을 펼쳤으며, 2007년에는 포스코청암상을 제정하여 사회 발전에 기여한 인물들을 시상하고 있다.
또한, 1986년에는 대한민국 과학기술 발전을 이끌 인재 양성을 목표로 포항공과대학교(POSTECH)를 설립했다.
7. 상훈
한국 전쟁에 참전한 공로로 충무무공훈장과 화랑무공훈장을 여러 차례 수여받았다. 포스코 설립과 운영을 통해 한국의 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금탑산업훈장과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또한, 여러 국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국내외 학술 및 산업 분야에서도 공로를 인정받았다. 사후에는 청조근정훈장이 추서되었다.
| 연도 | 훈장/표창명 | 수여 기관/국가 |
|---|---|---|
| 1950년 | 충무무공훈장 | 대한민국 |
| 1951년 | 화랑무공훈장 | 대한민국 |
| 1952년 | 충무무공훈장 | 대한민국 |
| 1953년 | 충무무공훈장, 은성화랑무공훈장, 금성화랑무공훈장 | 대한민국 |
| 1954년 | 금성화랑무공훈장 | 대한민국 |
| 1971년 | 금탑산업훈장 | 대한민국 |
| 1974년 | 국민훈장 무궁화장 | 대한민국 |
| 1979년 | 금성공로대훈장 (Großes Goldenes Ehrenzeichen am Bande für Verdienste um die Republik Österreich독일어) | 오스트리아 |
| 1979년 | 대공로훈장 | 페루 |
| 1981년 | 십자대훈장 | 브라질 |
| 1983년 | 공로십자훈장 | 독일 |
| 1987년 | 베세머 금메달 | 영국 금속학회 |
| 1987년 | 남십자성훈장 | 브라질 |
| 1987년 | 대십자공로훈장 | 페루 |
| 1990년 | 레지옹 도뇌르 훈장 (코망되르) | 프랑스 |
| 1992년 | 베르나르도 오이긴스 대십자훈장 | 칠레 |
| 1993년 | 은성공로대훈장 | 오스트리아 |
| 1996년 | 제2회 운경상 | 운경재단 |
| 1999년 | 훈일등 욱일대수장 | 일본 |
| 2011년 | 미국 금속 시장 철강 명예의 전당 헌액 | 미국 금속 시장 |
| 2011년 | 청조근정훈장 (추서) | 대한민국 |
국가위원회는 박태준이 받은 7개의 훈장(충무무공훈장 2개, 화랑무공훈장 3개, 국민훈장 무궁화장, 금탑산업훈장) 중 금탑산업훈장을 제외한 6개를 재제작하여 2011년 그의 영결식장에 안치했다. 2011년, 한국을 산업화된 국가로 변모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 금속 시장(American Metal Market)의 '철강 명예의 전당'(Steel Hall of Fame) 초대 헌액자로 선정되었다.
8. 어록
* "짧은 인생을 영원 조국에"
* "절대적 절망은 없다"
* "사심없이 헌신하라, 무한 경쟁시대일수록 필요하다"
* "자원은 유한하지만, 창의는 무한하다"
* "조상의 혈세로 짓는 제철소다 실패하면 우향우 해서 영일만에 빠져 죽자 제철보국을 우리 인생의 신조로 삼자"
* "신뢰를 얻으면 무엇이든지 얻을 수 있다"
* "항상 애국심을 갖고 일해 달라"
* "창업이래 지금까지 제철보국(製鐵保國)이라는 생각을 잠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철은 산업의 쌀입니다. 쌀이 생명과 성장의 근원이듯 철은 모든 산업의 기초소재입니다. 따라서 양질의 철을 값싸게 대량으로 생산하여 국부를 증대시키고 국민 생활을 윤택하게 하며 복지사회 건설에 이바지하자는 것이 곧 제철보국 입니다. 우리는 국민과 인류에게 복락(福樂)을 줄 수 있는 제철산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 "국가의 부름을 받고 영일만에 모였을 때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빈손이었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핵심 기간산업인 철강산업을 일으켜 보자는 비장한 각오로 모든 조소와 부정적 논리를 뒤로하고 건설에 박차를 가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하든지 우리 손으로 국가경제를 일으켜 보려는 철저한 공인의식이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순한 고용인이 아닙니다. 포스코인이 되는 순간부터 우리는 국민에게 봉사해야 하는 공인이 된 것입니다."
* "국가로부터 일관제철 사업의 소임을 부여받은 우리는 멸사봉공(滅私奉公)의 희생정신을 발휘하여 국민의 여망에 보답해야 합니다. 개발도상국이 일관제철소를 성공적으로 건설 운영하는 것은 결코 어디에서나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개인의 희생에 바탕을 둔 헌신적인 노력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 회사는 대일청구권자금을 전용하여 건설한 민족기업입니다. 우리의 모든 정열을 바쳐 신명을 다하겠다는 굳은 각오가 필요한 것입니다."
*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것 자체가 큰 인연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속해있는 국가와 민족에게 의무감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제철산업을 일으켜야 한다는 국민적 염원과 절박한 시대적 요청 앞에서 일관제철소 건설이라는 국가적 과업을 맡게 됐을 때, 나는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큰 인연이요 회피할 수 없는 일생의 사명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경건한 마음으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온갖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때마다 나는 직원들에게 민족의 진운(進運)을 바꿀 대역사에 동참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자고 강조했습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자고 독려했습니다."
9. 평가
박태준은 대한민국 산업화의 상징적인 인물 중 하나로, '철강왕'이라는 별칭과 함께 포항제철(현 포스코)을 설립하고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워내 한국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특히 제철보국(製鐵報國)의 신념으로 철강 불모지였던 한국에 일관제철소를 건설하여 중화학 공업의 토대를 닦은 공로는 높이 평가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박정희 정권과의 깊은 관계 속에서 성장했으며, 전두환 정권 하에서 국가보위입법회의 위원으로 활동하며 정계에 입문하는 등 권위주의 정권과의 관계는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김영삼 정부와의 갈등으로 인한 수사 논란이나 김대중 정부 시절 국무총리 재임 중 부동산 명의신탁 의혹으로 불명예 퇴진한 사건 등 정치적 부침과 논란 또한 존재한다. 이처럼 그의 삶과 활동에 대해서는 공과(功過)에 대한 다양한 시각이 교차한다.
9.1. 긍정적 평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상공분과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입안에 관여하였다. 1964년 대한중석 사장으로 임명되어 1년 만에 회사를 흑자로 전환시키는 경영 능력을 보였다.
가장 큰 업적으로는 포항제철의 설립과 성공적인 경영이 꼽힌다. 1968년 초대 사장으로 취임하여 '제철보국(製鐵報國)'의 이념 아래 10년 만에 연간 550만 톤의 철강을 생산하는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이는 대한민국 중화학공업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고 국가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정치 외풍으로부터 포스코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김영삼 정부와의 불화로 1992년 회장직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이후 199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대중 후보의 당선을 지원하였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무궁화장(1974), 영국 금속학회 베서머 금상(1987), 프랑스 레종도뇌르훈장(1990), 노르웨이 국왕 훈장(1991), 윌리코프상, 한국경영자대상(1992) 등 국내외에서 다수의 권위 있는 상을 받았다. 사후에는 청조근정훈장이 추서되었으며, '제철보국의 이념으로 철강 불모지 한국에 일관제철소를 설립해 산업 근대화를 이끈 철강왕'이라는 평가와 함께 세계 '철강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9.2. 부정적 평가
박정희 정권 시절 국가재건최고회의 상공분과위원으로 활동하며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입안에 관여했고, 5.16 군사 정변 당시 박정희로부터 쿠데타 실패 시 가족을 부탁받을 정도로 신뢰 관계를 유지했다는 점에서 권위주의 정권과의 관계가 깊었다. 1980년 전두환 정권 하에서 국가보위입법회의 경제 제1위원장을 맡으며 정계에 입문했고, 이후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국회의원과 당 대표를 지냈으며, 3당 합당 후에는 민주자유당 최고위원을 역임하는 등 정치적 행보를 이어갔다. 이러한 배경은 포항제철(현 포스코)의 설립과 성장 과정에서 정권과의 유착 관계가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비판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김영삼 정부 출범을 앞두고는 관계가 악화되었다. 1992년 민주자유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김영삼의 반대편에 섰던 박태준은 제14대 대통령 선거 직전인 1992년 10월, 포항제철 회장직과 국회의원직을 모두 사퇴했다. 김영삼 정부 출범 후 포항제철 여러 협력사로부터 3.9 가량의 자금을 받은 혐의로 수사를 받게 되자 한동안 해외에 머물러야 했다. 당시 정치적 상황 때문에 이는 김영삼 정부의 '표적 수사'라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1997년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하여 포항시 북구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어 정계에 복귀했으며, 자유민주연합 총재로서 김종필과 함께 김대중의 제15대 대통령 선거 당선을 도왔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에는 국무총리로 임명되었으나, 부동산 명의신탁 의혹이 불거지면서 취임 4개월 만에 불명예스럽게 사퇴했다. 이후 법원에서 해당 혐의가 허위라는 판단이 내려졌다는 내용도 있다.
10. 기타
*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임랑해수욕장 근처에 박태준의 출생지와 기념관이 있다.
* 25사단 참모장 시절, 월동 저장용 김장 항아리 내용물이 고춧가루 대신 나무 부스러기인 것을 발견하고 즉시 사단장에게 보고했다. 뇌물로 입막음을 시도한 고춧가루 업자에게는 총을 겨누며 진짜 고춧가루를 가져오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 1977년 포항종합제철 제3기 설비 공사 중 공기 지연으로 어려움을 겪던 상황에서, 발전송풍 설비의 부실 공사가 발견되자 공정률 80% 상태였음에도 이를 폭파 해체했다는 일화가 있다.
10.1. 가족 관계
본관은 밀양 박씨이다. 슬하에 아들 1명과 딸 4명을 두었다.
둘째 딸 박유아는 화가로,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미국에서 미술사와 드로잉을 공부했다. 1984년 당시 판사였던 고승덕과 결혼하여 1987년 딸 고현정(Candy Koh)을 낳았으나, 2002년에 이혼했다.
셋째 딸은 전직 국회의원 김진재의 동생과 결혼했다.
넷째 딸 박경아는 파슨스 디자인 스쿨을 졸업했으며, 1988년 전두환 전 대통령의 차남 전재용과 결혼했으나 1990년에 이혼했다. 이후 1991년, 투자 회사 MBK파트너스의 창업주인 김병주(Michael Kim)와 재혼했다. 두 사람의 아버지가 군대 동기였던 인연으로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김병주는 1963년 진해구 출생으로, 하버포드 대학교와 하버드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골드만삭스, 칼라일 그룹 아시아 지사장 등을 거쳐 2005년 아시아 지역 기반의 사모펀드 회사인 MBK파트너스를 설립했다. MBK파트너스는 홈플러스 등 다수의 기업을 인수한 바 있다.
10.2. 대중 매체
* 2014년 TV조선에서 방영된 드라마 《불꽃 속으로》(炎の中へ일본어)는 박태준의 일대기를 다룬 총 20부작 드라마이다. 극본은 이한호, 연출은 김상래가 맡았다. 이 드라마에서 배우 최수종과 김권이 박태준 역을 연기했다.
10.3. 인간 관계
박태준은 군 복무 시절부터 다양한 인물들과 관계를 맺었다.
=== 정치인 ===
* 박정희: 1947년 남조선경비사관학교 생도 시절, 당시 탄도학 교관이자 제1중대장이었던 박정희 대위를 만났다. 박태준은 수학에 능하고 엄격한 자기 규율을 보여 박정희의 주목을 받았다. 졸업 후 거리를 두었으나, 10년 후 육군본부 근무 시절 군수기지사령관이던 박정희가 박태준을 참모장으로 영입하며 관계가 다시 시작되었다. 1961년 5.16 군사 정변 당시 박정희는 박태준에게 쿠데타 실패 시 가족을 부탁하며 직접 가담하지 않도록 했다. 이는 훗날 박태준이 박지만의 후견인을 자처한 배경이 되었다. 정변 성공 후 박태준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 상공분과위원장 등을 맡아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수립에 참여하고 박정희의 모든 출장에 동행했다.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후 박태준은 기업인의 길을 걸었으나, 1967년 박정희로부터 포항제철(현 포스코) 설립 특별 지시를 받았다. 박정희는 포항제철의 인사 및 경영 전권을 박태준에게 위임했고, 이는 박태준이 '제철보국(製鐵報國)'의 신념으로 포항제철을 성공시키는 기반이 되었다. 박정희는 포항제철 건설 과정에서 필요한 핵심 시설 구매 허가가 정체되자, 박태준의 요구 사항을 직접 듣고 즉석에서 승인해주기도 했다. 박정희 사후에는 그의 아들 박지만의 후견인 역할을 하며 마약 사건 등으로 어려움을 겪던 박지만을 도왔고, 삼양그룹 인수 시도도 지원했다.
* 김영삼: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창당되자 최고위원을 맡았으나, 김영삼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99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의 선거대책위원장직을 거절하고 국회의원직과 포항제철 회장직에서 사퇴했다. 김영삼 정부 출범 후, 포항제철 협력사로부터 3.9여 원을 받은 혐의로 수사를 받게 되어 한동안 외국에 머물렀다. 이는 1992년 민자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 김영삼의 반대편에 섰던 것에 대한 정치 보복성 표적 수사라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1997년 포항 북구 보궐선거에서 김영삼 정부의 경제 실정을 비판하며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 정계에 복귀했다.
* 김대중: 1997년 자유민주연합 총재로서 김종필과 함께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의 당선을 지원하는 이른바 'DJT 연합'을 성사시켰다. 김대중 정부 출범 후인 2000년 국무총리에 임명되었으나, 부동산 명의신탁 의혹이 불거지면서 취임 4개월 만에 불명예 퇴진했다.
* 김종필: 5.16 군사 정변에 참여했으며, 박태준과는 1997년 DJT 연합을 통해 김대중 후보를 함께 지원하는 등 정치적 협력 관계를 맺었다. 일반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 전두환: 일반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박태준의 넷째 딸 박경아가 전두환의 차남 전재용과 1988년 결혼했으나 1990년 이혼했다.
* 노무현: 일반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 고승덕: 박태준의 둘째 딸 박유아와 1984년 결혼했으나 2002년 이혼했다. 박태준 사망 당시 조문하여 "정말 위대한 분이셨고, 국가의 큰 일만 걱정하셨다", "한국 시대의 거물이었다"고 평가했다.
=== 기업인 ===
*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인 이병철은 박태준을 "군인의 기(氣)와 기업인의 혼(魂)을 가진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인 정주영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이건희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스티브 잡스가 정보기술(IT)업계에 미친 영향보다 회장 박태준이 대한민국 산업과 사회에 남기신 좋은 공적이 몇 배 더 크다"고 평가했다.
*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김우중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 손길승: SK텔레콤 명예회장 손길승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 이나야마 요시히로: 신일본제철 회장이었던 이나야마 요시히로는 포항제철 건설 당시 박태준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박태준은 그와의 친분을 통해 제철 기술 매뉴얼, 설계 도면 등 핵심 기술을 도입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1978년 중국의 덩샤오핑이 일본 제철소 시찰 후 이나야마 회장에게 중국에도 같은 제철소를 지어줄 수 있냐고 묻자, 이나야마 회장이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지 않으냐"고 답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 김병주 (마이클 김): 투자 회사 MBK파트너스 창업주. 박태준의 넷째 딸 박경아와 재혼한 사위이다. 김병주의 아버지가 박태준과 군대 동기였던 인연으로 소개받아 1991년 결혼했다.
=== 기타 ===
* 조정래: 소설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는 박태준을 "대한민국의 간디"라고 칭하며, 인도인들이 간디에게 '마하트마(Mahatma, 성스러운 영혼)'를 붙여 부르듯 자신도 박태준에게 '마하트마'를 붙여 부르고 싶다고 경의를 표했다.
* 장효조: 야구선수 장효조를 포항제철 야구단에 영입할 당시, 장효조가 서울 아파트 한 채를 요구하자 박태준은 아파트뿐 아니라 보너스까지 얹어주며 영입할 정도로 그를 아꼈다.
* 프랑수아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은 "한국이 군대를 필요로 할 때 장교로 투신했고, 기업인을 찾았을 때 기업인이 됐으며, 미래 비전이 필요할 때 정치인이 됐다"며 "박태준에게는 한국에 봉사하는 것이 지상 명령이었다"고 평가했다.
*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총리는 "박태준은 냉철한 판단력과 부동의 신념, 정의감으로 한·일 양국의 협력을 성공으로 이끌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