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 신한국당 후보 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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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 신한국당 후보 경선은 1997년 7월 21일,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기 위해 열렸다. 경선은 대의원 투표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1만 2천여 명으로 대폭 늘어난 대의원 수를 통해 민심을 반영하고자 했다. 이회창 전 총리가 결선 투표 끝에 후보로 선출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이회창 대표의 당 대표직 유지 논란, 박정희 예찬 및 지역주의 편승 논란, 재검표 논란 등이 있었다. 신한국당은 대선에서 위기를 겪자 민주당과의 합당을 추진했고, 11월 21일 한나라당으로 통합하여 이회창 후보를 중심으로 대선에 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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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P연합은 1997년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 김종필 두 총재가 대통령 후보 단일화와 공동 정부 구성을 목표로 추진한 정치적 연합으로, 내각제 개헌을 약속했으나 불이행과 정책 갈등으로 2001년 파기되었으며, 지역주의 극복과 정권 교체에 기여했다는 평가와 함께 정략적 결합이라는 비판도 받는다. -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 - 이인제
이인제는 충남 논산 출신으로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판사, 변호사, 6선 국회의원, 노동부 장관, 경기도지사 등을 역임하며 다양한 정당을 거쳐 '피닉제'라는 별명을 얻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 신한국당 후보 경선 | |
---|---|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 신한국당 후보 경선 정보 | |
선거일 | 1997년 7월 21일 |
선거전 | 김영삼 |
선거후 | 이회창 |
유형 | 대통령 |
직책 | 대통령 후보 |
이전 선거 |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선거 민주자유당 후보 경선 |
이전 선거 연도 | 1992년 |
차기 선거 |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한나라당 후보 경선 |
차기 선거 연도 | 2002년 |
선거인단 | 대의원 12,431명 중 11,544명 참석 |
당선을 위해 필요한 조건 | 단순 최다 득표 필요 |
후보 정보 | |
![]() | |
후보 1 | 이회창 |
1차 득표 | 4,955 |
1차 득표율 | 40.94% |
최종 득표 | 6,922 |
최종 득표율 | 59.96% |
선거전 정당 | 민주자유당 |
선거후 정당 | 신한국당 |
정당색 | 신한국당 |
색상 1 | 신한국당 |
![]() | |
후보 2 | 이인제 |
1차 득표 | 1,774 |
1차 득표율 | 14.66% |
최종 득표 | 4,622 |
최종 득표율 | 40.04% |
색상 2 | 신한국당 |
![]() | |
후보 3 | 이한동 |
1차 득표 | 1,766 |
1차 득표율 | 14.59% |
최종 득표 | 탈락 |
최종 득표율 | - |
색상 3 | 신한국당 |
후보 4 | 김덕룡 |
1차 득표 | 1,673 |
1차 득표율 | 13.82% |
최종 득표 | 탈락 |
최종 득표율 | - |
색상 4 | 신한국당 |
![]() | |
후보 5 | 이수성 (1939년)이수성 |
1차 득표 | 1,645 |
1차 득표율 | 13.59% |
최종 득표 | 탈락 |
최종 득표율 | - |
색상 5 | 신한국당 |
후보 6 | 최병렬 (정치인)최병렬 |
1차 득표 | 236 |
1차 득표율 | 1.95% |
최종 득표 | 탈락 |
최종 득표율 | - |
색상 6 | 신한국당 |
기타 정보 |
2. 경선 방식
신한국당은 기존의 전당대회 대의원 투표 방식을 유지하면서도, 민심을 더 잘 반영하기 위해 대의원 수를 5천여 명에서 1만 2천여 명으로 늘리고, 선출직 대의원 비율을 확대했다.[3] 또한 당헌 당규를 개정하여 후보 중 과반 득표자가 없을 시 3차 투표까지 가는 기존의 방식에서 2차 투표까지만 가도록 하고, 재적 대의원의 과반을 득표해야 하는 것에서 출석 대의원의 과반을 얻어야 하는 것으로 변경했다.[4]
선출직 대의원 수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구분 | 인원 |
---|---|
당무회의 선출 | 500명 |
중앙상무위원회 선출 | 600명 |
15개 시·도 대회 선출 | 525명 (1개 시·도 당 15명에서 35명으로 확대) |
253개 지구당 선출 | 8,855명 (1개 지구당 당 7명에서 35명으로 확대) |
전체 대의원의 20%는 반드시 여성으로 구성하도록 했다.
2. 1. 후보 등록
신한국당은 이홍구, 최병렬, 박찬종, 이인제 등 상대적으로 당내 기반이 약한 후보들에게 경선 참여 기회를 확대하기 위해 후보 등록에 필요한 대의원 수를 "8개 시도에서 1개 시도당 50~100명씩"에서 "3개 시도에서 1개 시도당 50~100명씩"으로 완화했다.[5] 또한 대의원 추천 없이 당무회의 제청으로 입후보할 수 있도록 한 규정도 없애 상향식 후보 추천 문화를 조성하려 노력했다.2. 2. 투·개표
신한국당은 투표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여러 방안을 고심했다. 1992년 경선 당시 6,660명의 대의원이 투표하고 개표하는데 6시간이 걸렸던 경험을 바탕으로, 1만 2천여 명으로 늘어난 대의원 규모에 따른 시간 지연을 우려했다.[3] 특히 7월의 무더운 날씨와 많은 참석 인원으로 인해 대회장 내부가 찜통이 될 것을 걱정했다. 2차 투표를 다음 날로 미루는 방안도 고려했지만, 그 사이에 대의원 매수 등 구태 정치 행태가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결국 신한국당은 사상 최초로 OMR 카드 형식의 투표용지를 도입하고 컴퓨터를 이용한 전자 개표 방식을 채택했다. 대의원들은 컴퓨터 감응용 푸른 잉크를 찍어 지지 후보 이름 옆 기표란에 투표하고, 투표용지는 판독기를 통해 자동으로 개표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2차 투표는 결선 진출 후보를 예측할 수 없어 OMR 카드 투표용지를 미리 준비할 수 없었고, 기존의 수개표 방식을 사용해야 했다. 2차 투표용지는 현장에서 고속 인쇄기를 통해 즉석에서 만들어야 했다.[6][7][8]
투표 전 일부 후보들은 전자 개표의 조작 가능성을 제기하며 수개표를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차 투표 결과 이회창 4,963표, 이인제 1,776표, 이한동 1,771표로, 이회창 후보와 이인제 후보가 결선 투표에 진출했다. 그러나 5표 차로 3위를 한 이한동 후보 측의 강력한 요구로 수작업 재검표가 이루어졌다.
이한동 캠프는 전수 재검표를 요구했으나, 당 선관위는 시간상 불가능하다며 일부 재검표를 제안했다. 결국 컴퓨터가 판독 불능 처리한 표 전체와 정상 개표된 표 중 2개 투표구의 표를 재검표하여 이상이 발견되면 전수 재검표하기로 합의했다.
1차 재검표 결과, 이회창 후보 표 2표와 이한동 후보 표 1표가 무효표로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일반 인주로 찍은 표도 컴퓨터가 유효표로 인식하는 등 개표 시스템 오류가 발견되었다. 이한동 캠프는 전체 재검표를 요구했고, 2차 재검표 결과 이회창 후보 표 8표, 이한동 후보 표 5표, 이인제 후보 표 2표가 추가로 무효 처리되었으나,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19][20]
3. 후보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는 총 7명의 후보가 등록했다.
기호 | 후보 | 생년 | 경력 |
---|---|---|---|
1 | 김덕룡 | 1941 | 제17·22대 정무제1장관, 제13·14·15대 국회의원 |
2 | 박찬종 | 1939 | 前 신정치개혁당 총재, 제9·10·12·13·14대 국회의원 |
3 | 이한동 | 1934 | 제51대 내무부 장관, 제11·12·13·14·15대 국회의원 |
4 | 최병렬 | 1938 | 제8대 노동부 장관, 초대 공보처 장관, 제18대 문화공보부 장관, 제12·14·15대 국회의원 |
5 | 이회창 | 1935 | 제26대 국무총리, 제8대 중앙선거관리위원장, 제15대 감사원장, 제15대 국회의원 |
6 | 이수성 | 1939 | 제29대 국무총리 |
7 | 이인제 | 1948 | 제10대 노동부 장관, 제29대 경기지사, 제13·14대 국회의원 |
최형우 전 내무장관은 뇌졸중으로 출마가 좌절되었고, 이홍구 전 총리는 국민적 호응을 얻지 못했다며 경선을 포기했다.[9] 박찬종 전 의원은 "본선 경쟁력과 무관하게 나는 대의원 확보 싸움에서 완전히 실패했다"며 전당대회 불과 이틀 전인 7월 19일 후보직을 사퇴했다.[10]
3. 1. 계파 갈등
신한국당 내에서는 민주계와 민정계가 대선 후보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였다. 민정계는 '나라를 위한 모임(나라회)'을 중심으로 이회창 전 총리를 지지하며 단결한 반면,[11] 민주계는 이인제, 이수성 등을 놓고 갈등하며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민주계의 큰 모임인 민주산악회, 정치발전협의회 등은 중립을 선언하였다.[12]이인제 경기지사, 이수성 전 총리, 김덕룡 의원 등은 민주계로, 이한동 의원과 최병렬 의원은 민정계로 분류되었다. 1996년 1월에야 신한국당에 입당한 이회창 당 대표위원과 박찬종 의원은 특정 계파에 속한다고 보기 어려웠으나, 각각 민정계와 민주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런데 지구당 위원장 및 대의원 여론조사 결과 '나라회'는 물론 민주산악회와 정발협 회원들 중에서도 이회창 후보 지지자가 많은 것으로 나타나, 이회창 후보의 당선이 유력해 보였다.
3. 2. 反이회창 4인 연대
전당대회 전날인 20일, 이인제, 이한동, 김덕룡, 이수성 후보는 반(反)이회창 4인 연대를 결성하고, 1차 투표 결과에 따라 결선 투표에서 서로를 밀어주기로 합의하였다.[13]4. 경선 일정
일시 | 내용 |
---|---|
6월 4일 ~ 6월 10일 | 전국 253개 지구당 정기대회에서 지구당 선출 대의원 8,855명 선출[14] |
6월 11일 ~ 6월 13일 | 전국 15개 시도지부 대회에서 시도지부 대의원 1,225명 선출[15] |
6월 14일 ~ 6월 22일 | 각 지구당 및 시도지부에서 선출한 대의원 명단 접수 |
6월 20일 | 중앙위원회 몫 대의원 선출 |
6월 23일 | 당무회의 몫 대의원 선임 |
6월 27일 | 당무회의에서 전당대회 대의원 명부 확정 |
6월 29일 ~ 7월 2일 | 후보 등록 |
7월 5일 | 경기 지역 합동연설회 |
7월 7일 | 강원 지역 합동연설회 |
7월 8일 | 충북 지역 합동연설회 |
7월 9일 | 대구·경북 지역 합동연설회 |
7월 10일 | 광주·전남 지역 합동연설회 |
7월 11일 | 부산 지역 합동연설회 |
7월 12일 | 제주 지역 합동연설회 |
7월 14일 | 전북 지역 합동연설회 |
7월 15일 | 인천 지역 합동연설회 |
7월 16일 | 대전·충남 지역 합동연설회 |
7월 18일 | 경남 지역 합동연설회 |
7월 19일 | 서울 지역 합동연설회 |
7월 21일 | 대통령 후보 선출 전당대회 개최 |
5. 논란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신한국당의 후보 경선 과정에서 여러 논란이 있었다. 특히 이회창 대표의 사퇴 문제와 지역주의 편승 논란 등이 주요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5. 1. 이회창 대표 사퇴 논란
이회창 후보가 경선 중에도 당 대표직을 유지하려 하자, 다른 후보들은 경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강력히 항의했다.[16] 이 대표 측은 처음엔 사퇴 요구를 거부했으나, 결국 6월 30일 후보 등록을 마치고 바로 대표직을 내려놓았다.5. 2. 박정희 예찬 및 지역주의 편승 논란
경선 후보들은 지역 순회 연설회 중 대구·경북 지역 연설회에서 박정희를 칭송하는 발언을 하여 논란이 되었다. 그러나 이후 광주, 부산 등 박정희 정권의 탄압을 받은 지역에 가서는 박정희를 비판하는 연설을 하여 지역주의에 편승한다는 비판을 받았다.[17]6. 결과
7월 21일 열린 전당대회에서 이회창 전 총리는 결선 투표까지 간 끝에 신한국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4인 연대가 1차 투표에서 받은 표를 합치면 이론 상으론 뒤집기가 가능해보였으나, 결국 이회창 대세론을 꺾지 못했다. 이는 민정계의 승리, 민주계의 패배로 이어졌으며, 김영삼 대통령의 신한국당 탈당 등 계파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18]
이름 | 1차 투표 | 결선 투표 | ||
---|---|---|---|---|
득표수 | 득표율 | 득표수 | 득표율 | |
이회창 | 4,955 | 40.9% | 6,922 | 60.0% |
이인제 | 1,774 | 14.7% | 4,622 | 40.0% |
이한동 | 1,766 | 14.6% | colspan="2" rowspan="4" | | |
김덕룡 | 1,673 | 13.8% | ||
이수성 | 1,645 | 13.6% | ||
최병렬 | 236 | 1.9% | ||
기권 | 27 | 0.2% | 0 | 0.0% |
무효 | 28 | 0.2% | 0 | 0.0% |
총투표수 | 12,104 | 11,544 |
6. 1. 정견 발표 논란
신한국당은 축제의 장이 되어야 할 대회장이 후보자 간 상호 비방으로 얼룩질 것을 우려, 투표 전 정견 발표를 불허하기로 결정했는데, 이인제 등은 전당대회에서 대의원 긴급 동의를 통해 정견 발표 허용을 요구했으나 묵살당했다.[18] 그러나 결선 투표 때는 투표 전 후보자 정견 발표가 극적으로 합의돼 양 후보가 각 10분씩 연설을 하게 되었다.6. 2. 재검표 논란
투표 시작 전, 일부 후보들은 전자 개표는 조작의 가능성이 있다며 수개표를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9]제15대 대통령 선거 1차 투표는 오전 10시 45분에 시작해 예정보다 30분 이른 12시 45분경에 끝났다. 개표 결과, 이회창 4,963표, 이인제 1,776표, 이한동 1,771표로 나와 이회창·이인제 두 후보가 결선 투표에 진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5표 차로 3위를 한 이한동 후보의 강력한 요구로 수작업 재검표가 실시되었다.[19]
이한동 캠프 측은 전수 재검표를 주장했고, 당 선관위 측은 시간상 불가능하다며 일부 재검표를 제안했다. 결국 컴퓨터가 판독 불능 처리해 수개표된 표 전체와 정상 개표된 표 중 2개 투표구의 표를 재검표하여 한 표라도 이상이 발견될 시 2차로 전수 재검표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고, 이인제 후보에게도 동의를 얻었다.[19]
3시 반쯤 끝난 1차 재검표 결과, 이회창 후보의 표 중 2표와 이한동 후보의 표 중 1표가 무효표로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특수 잉크가 아닌 일반 인주로 찍은 표도 컴퓨터가 유효표로 개표한 것이 발견되었고, 다시 넣어봐도 유효표로 인식하는 등 개표 시스템에 오류가 발견됐다. 이한동 캠프는 이에 약속대로 전체 재검표를 요구했고, 오후 5시쯤 끝난 2차 재검표 결과 이회창 후보의 표 중 8표와 이한동 후보의 표 중 5표, 이인제 후보의 표 중 2표가 또 무효표로 바뀌었는데, 결국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고 시간만 수 시간가량 지체되는 꼴이 되었다.[19][20]
7. 민주당과의 합당
이회창 후보가 병풍 의혹으로 지지율이 추락하고 이인제 후보가 독자 출마를 선언하는 등 위기를 맞은 신한국당은 민주당과의 통합을 통해 난국을 타개하고자 했다.
김영삼 대통령의 신한국당 탈당이 이루어진 1997년 11월 7일, 민주당 측에서 합당의 조건으로 내건 DJP 연대에 대항하기 위한 통합 신당 구성에 합의했다고 발표하였다.[21] 신한국당은 11월 11일, 민주당은 11월 12일 각각 당무회의를 열고 합당을 의결하였다. 양당은 11월 13일 통합 신당의 대통령 후보는 이회창, 신당의 초대 총재는 조순이 맡을 것을 골자로 하는 합의문에 서명하고 이를 발표하였다.
신당의 당명으로는 신민주당, 한국민주당, 선진한국당 등이 거론되었으나, 11월 16일 양당 대표단 회의 결과 한나라당으로 최종 확정되었다. 한나라라는 이름은 '큰 나라'라는 뜻과 '하나의 나라'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다.
11월 21일, 신한국당과 민주당은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합당 대회를 개최하여 통합 신당 한나라당은 공식 출범을 보게 되었다. 먼저 오전에는 신한국당이 공식적으로 합당을 의결하기 위한 신한국당 전당대회가, 오후에는 양당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합당 전당대회가 개최되었다. 합당 전당대회에서 이회창 총재는 한나라당의 명예총재 및 대선 후보로 추대되었으며, 조순 총재는 한나라당의 초대 총재로 선출되었다.[22] 쟁점 중 하나였던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의 지위 문제는 선거대책위원회 의장이라는 직책을 신설하고 여기에 이기택 전 총재를 임명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23]
참조
[1]
웹인용
與(여) 대선후보 李會昌(이회창)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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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6
[2]
뉴스
이인제씨 탈당 대선 출마
한겨레
1997-09-1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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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 大選후보 예선검토 김영삼대통령 중립 천명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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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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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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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신한국 전대 어떻게 치러지나] -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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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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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선투표 이렇게] 특수잉크 바른 붓두껍으로 찍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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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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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국 경선] 재검표 두번…2시간이상 늦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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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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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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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국-민주당 통합 합의, 후보 이회창-총재 조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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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율 고무 "이회창, 대통령" 연호, '신정치연합' 일일이 소개 개혁 부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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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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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공동선대의장 김윤환·이기택 씨 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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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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