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시 내친왕 (107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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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데이시 내친왕은 1076년에 태어나 1096년에 사망한 일본의 황족이다. 시라카와 천황의 딸로, 3세에 이세 신궁의 재궁으로 선발되어 6년간 재임했으며, 이후 호리카와 천황의 준모를 거쳐 중궁에 책립되었다. 데이시 내친왕의 준모입후는 내친왕이 황후가 되는 전례를 만들었으며, 그녀는 용모가 아름답고 성품이 관대하여 덴가쿠를 즐기는 등 예술을 사랑했다. 21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자 시라카와 천황은 큰 슬픔에 잠겼고, 그녀의 능묘는 어머니와 함께 가미다이고 능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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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시 내친왕 (1076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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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야스코 내친왕 |
원어 이름 | 媞子内親王 |
휘 | 데이시/야스코 (媞子) |
신분 | |
이세 재궁 재위 | 1078년 - 1084년 |
호리카와 천황 준모입후 재위 | 간지 5년 (1091년) 1월 22일 - 간지 7년 (1093년) 1월 19일 (호칭: 중궁) |
이쿠호우몬인 재위 | 간지 7년 (1093년) 1월 19일 - 가호 3년 (1096년) 8월 7일 (1096년 8월 27일) |
일본 천황의 황후 | '1091년–1093년 |
가문 | |
왕가 | 일본 황실 |
출생과 사망 | |
출생 | 조호 3년 음력 4월 5일 (1076년 5월 10일) |
사망 | 가호 3년 음력 8월 7일 (1096년 8월 27일) |
능묘 | 카미다이고릉 (上醍醐陵, 교토시 후시미구)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시라카와 천황 |
어머니 | 후지와라노 켄시/카타이코 |
배우자 | 있음 |
2. 생애
시라카와 천황과 중궁 후지와라노 겐시(藤原賢子) 사이의 첫째 딸이자 호리카와 천황의 누나로 태어났다.
아버지 시라카와 천황으로부터 깊은 총애를 받았으며, 어머니를 닮아 용모가 아름다웠다고 전해진다(『중우기』). 이러한 총애는 데이시 내친왕이 재궁으로 복정되었을 때, 시라카와 천황이 역사상 유일하게 노노미야까지 직접 행차한 사례에서도 잘 나타난다.
어린 나이에 재궁으로 복정되어 이세 신궁에서 봉직하였으나, 어머니 겐시의 죽음으로 재임 6년 만인 오토쿠 원년(1084년)에 사임하고 수도로 돌아왔다. 오토쿠 3년(1086년), 아버지 시라카와 천황이 동생 호리카와 천황에게 양위하자, 간지 원년(1087년) 데이시 내친왕은 호리카와 천황의 준모(准母)로서 입내하였다.[1]
간지 5년(1091년), 데이시 내친왕은 12세의 어린 동생 호리카와 천황의 중궁으로 책립되었다. 이는 다이고 천황의 양모였던 후지와라노 온시의 선례를 따른 것이었으나, 천황의 친누나를 후비로 삼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로 당시 조정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천황과 직접적인 부부 관계가 없는 내친왕이 황후의 지위에 오르는 준모입후(准母立后) 전통의 시작이었으며, 데이시 내친왕은 준모로서 중궁에 책립된 유일한 사례이다.
간지 7년(1093년), 여원(女院)의 지위를 받아 이쿠호몬인(郁芳門院)이라는 원호를 받았다. 『중우기』는 데이시 내친왕을 "신체가 아름답고, 풍모가 매우 뛰어나며, 본성 또한 관대하고 어질며, 다른 사람을 대할 때 호의적이고 베풀기를 좋아한다"고 묘사하였다. 또한 덴가쿠를 매우 좋아하여 자주 관람하며 즐겼다고 한다.
가호 3년(1096년) 8월 7일, 21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였다. 딸을 향한 애정이 각별했던 아버지 시라카와인은 깊은 슬픔에 잠겨, 데이시 내친왕이 사망한 지 불과 이틀 만에 출가하였다.
능묘는 어머니 겐시와 같이 교토부 교토시 후시미구 다이고산 다이고지 내의 가미다이고 능이다.
2. 1. 재궁 시절 (1078년 ~ 1084년)
조랴쿠 2년 (1078년) 3월에 준삼궁의 지위를 받았고, 같은 해 8월 2일, 3세의 나이로 이세 신궁의 재궁으로 복정(卜定, 점을 쳐서 정함)되었다. 이어 9월 1일에는 대선직에서 첫 재원(初斎院)에 들어갔다.조랴쿠 3년 (1079년) 4월에는 하카마기(袴着, 성인식의 일종) 의식을 치렀고, 9월 8일에는 정결한 생활을 하는 노노미야(野宮)로 거처를 옮겼다. 조랴쿠 4년 (1080년) 9월 15일, 재궁으로서 임지인 이세로 향했다.
아버지 시라카와 천황은 데이시 내친왕을 특히 총애하여, 그녀가 재궁으로 복정되었을 때 노노미야까지 직접 행차하였는데, 천황의 노노미야 행차는 역사상 이것이 유일한 사례이다.
오토쿠 원년 (1084년) 9월 22일, 어머니인 중궁 켄시(賢子)가 세상을 떠나자, 재궁으로 봉직한 지 6년 만에 직위에서 물러났다. 같은 해 12월 4일에 수도로 돌아왔다.
2. 2. 준모, 그리고 중궁 (1087년 ~ 1093년)
오토쿠 3년(1086년), 아버지 시라카와 천황이 동생인 호리카와 천황에게 양위하자, 데이시 내친왕은 호리카와 천황의 준모(准母)가 되었다.[1] 간지 원년(1087년) 12월 16일, 호리카와 천황의 준모로서 입내(入内)하였다. 이는 같은 해 7월 시라카와인과 대면한 이후의 일이었다.간지 5년(1091년) 1월 22일, 데이시 내친왕은 호리카와 천황의 중궁(中宮)으로 책립되었다. 시라카와 천황은 가장 총애했던 중궁 겐시와의 사이에서 태어나 어머니를 닮아 아름다웠다고 전해지는 데이시 내친왕을 각별히 아꼈다(『중우기』). 또한, 호리카와 천황이 다섯 살 때 어머니 겐시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사실상 누나인 데이시 내친왕이 유모이자 양어머니 역할을 한 배경도 있었다.[1] 형식적으로는 다이고 천황의 양모로서 황태부인(皇太夫人)의 지위에 올랐던 후지와라노 온시의 선례를 따른 것이었으나, 천황의 친누나를 후위(後位)에 세우는 것은 전례가 없는 파격적인 일로, 당시 조정 신하들을 크게 놀라게 했다.
데이시 내친왕의 중궁 책립은 천황과 직접적인 부부 관계가 없는 내친왕이 황후의 지위에 오르는 준모입후(准母立后)라는 독특한 전통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특히 준모의 자격으로 중궁에 책립된 이는 데이시 내친왕이 유일하며, 이후의 준모들은 모두 황후에 책봉되었다는 점에서 그녀의 특별한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간지 7년(1093년) 1월 19일, 데이시 내친왕은 여원(女院)의 지위를 받아 이쿠호몬인(郁芳門院)이라는 원호를 받았다.
2. 3. 여원, 그리고 죽음 (1093년 ~ 1096년)
간지 7년(1093년) 1월 19일, 여원(女院)이 되어 이쿠호몬인(郁芳門院)이라는 원호를 받았다.『중우기』는 데이시 내친왕에 대해 "신체가 아름답고, 풍모가 매우 뛰어나며, 본성 또한 관대하고 어질며, 다른 사람을 대할 때 호의적이고 베풀기를 좋아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용모가 아름답고 우아하며, 베푸는 것을 좋아하는 관용적인 마음씨를 가진 여성이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덴가쿠를 매우 좋아하여, 자주 어소에서 관람하며 즐겼다고 한다.
아버지 시라카와인은 어행 시에는 반드시 데이시 내친왕과 함께 수레를 탔으며, 병약했던 딸을 위해 자주 사찰에 참배하여 그 무사함을 빌고 끊임없이 기도를 올리게 했다.
그러나 가호 3년(1096년) 8월 7일, 데이시 내친왕은 21세의 젊은 나이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가장 총애하던 딸을 잃은 시라카와인은 깊은 슬픔에 잠겨, 내친왕이 사망한 지 이틀 만에 출가하였다.
그 후 시라카와인과 데이시 내친왕의 어소였던 로쿠조도노(六条殿)에 어당(御堂)이 건립되었고, 시라카와인은 그곳에 예전처럼 뇨보들을 모시게 했다고 한다(『이마카가미』). 이 로쿠조 어당은 교토 만쥬지의 전신에 해당한다. 내친왕의 어소에서 섬기던 뇨보 중에는 가인인 이쿠호몬인 아키가 있다.
능묘는 어머니 겐시와 같이 가미다이고 능(교토부 교토시 후시미구 다이고산 다이고지 내)에 있다.
3. 성품 및 평가
『중우기』(中右記)는 데이시 내친왕에 대해 身体美麗、風容甚盛、性もとより寛仁、接心好施|신체가 아름답고, 풍모가 매우 뛰어나며, 본성 또한 관대하고 어질며, 다른 사람을 대할 때 호의적이고 베풀기를 좋아한다일본어고 기록하고 있는데, 즉 용모가 아름답고 품위가 있으며, 너그럽고 베풀기를 좋아하는 성품이었다고 한다. 또한 덴가쿠(田楽)를 매우 좋아하여 자주 어소에서 관람하며 즐겼다고 한다.
아버지 시라카와 천황은 가장 총애했던 중궁 겐시와의 사이에서 태어나 어머니를 닮아 아름다웠다고 전해지는 데이시 내친왕을 특히 아꼈다(『중우기』). 데이시 내친왕이 사이구로 복정되었을 때 시라카와 천황이 직접 노노미야까지 행행했는데, 이는 천황이 노노미야를 방문한 유일한 사례로 기록된다. 사이구에서 물러난 후에는 동생 호리카와 천황의 준모(準母)가 되었으며, 이를 근거로 중궁에 책립되었다. 이는 다이고 천황의 양모로서 황태부인이 된 후지와라노 온시의 선례를 따른 것이었으나, 천황의 친누나를 후비로 삼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기에 당시 조정 신하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사건은 천황과 직접적인 부부 관계가 없는 내친왕이 황후가 되는 '''준모입후(準母立后)''' 제도의 시작을 알리는 선례가 되었다. 특히 준모입후로 중궁에 책봉된 사례는 데이시 내친왕이 유일하며, 다른 준모들은 모두 황후로 책봉되었다는 점에서 그녀의 특별한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데이시 내친왕은 더 나아가 원호 선하를 받아 이쿠호몬인(郁芳門院)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시라카와인은 행차할 때 반드시 데이시 내친왕과 같은 수레를 탔으며, 병약했던 내친왕을 위해 자주 사찰에 참배하며 기도했다고 전해진다. 내친왕이 21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자, 총애하는 딸을 잃은 시라카와인은 슬픔을 감추지 못하고 이틀 만에 출가하였다. 이후 시라카와인은 내친왕의 어소였던 로쿠조도노(六条殿)에 어당을 짓고, 옛날과 다름없이 뇨보들을 머물게 했다고 한다(『이마카가미』). 내친왕의 어소에서 섬기던 뇨보 중에는 가인인 이쿠호몬인 아키가 있다.
4. 사후
능묘는 어머니 겐시와 같이 가미다이고 능(교토부 교토시 후시미구 다이고산 다이고지 내)에 있다.
데이시 내친왕이 21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자, 그녀를 각별히 아꼈던 아버지 시라카와 원은 깊은 슬픔에 잠겨 내친왕이 사망한 지 이틀 만에 출가하였다. 그 후, 시라카와 원은 데이시 내친왕이 생전에 머물렀던 거처인 로쿠조도노(六条殿)에 그녀를 기리기 위한 어당(御堂)을 세웠다. 또한, 시라카와 원은 이곳에 내친왕 생전과 같이 뇨보(女房, 궁녀)들을 계속 머물게 했다고 전해진다(이마카가미). 이 로쿠조 어당은 훗날 교토 만쥬지의 전신이 되었다.
5. 같이 보기
참조
[1]
서적
Jewel in the Ashes: Buddha Relics and Power in Early Medieval Japan
https://books.google[...]
[2]
서적
コンサイス日本人名辞典 第5版
株式会社三省堂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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