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케발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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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데케발루스는 부레비스타 사후 분열된 다키아를 통일하려 했던 다키아의 왕이다. 그는 초기 다키아 왕 두라스의 궁정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로마 제국의 모에시아 속주를 공격하며 권력을 잡았다. 도미티아누스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조공을 바치는 조건으로 평화를 맺었지만, 이후 권력을 강화하고 로마에 대항했다. 트라야누스 황제와의 두 차례에 걸친 전쟁 끝에 수도 사르미제게투사가 함락되자 자결했다. 데케발루스는 루마니아에서 민족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다양한 예술 작품과 기념물에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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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케발루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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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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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다키아 왕 |
재위 기간 | 87년 – 106년 |
아버지 | 스코릴로 (추정) |
계승자 | 두라스 |
사망일 | 106년 |
사망 장소 | 다키아 왕국, 사르미제게투사 |
2. 초기 생애와 권력 장악
부레비스타 대왕 사후, 다키아는 4개, 이후에는 5개의 작은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데케발루스의 어린 시절이나 배경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는 다키아 전역에 대한 권위를 주장했던 다키아 왕 두라스의 궁정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데케발루스 페르 스코릴로(Decebalus per Scorilola)"라는 문구가 새겨진 고대 다키아 항아리가 발견되면서, 이 문구가 "스코릴로의 아들 데케발루스"를 의미할 수 있다는 추측이 제기되었다.
일각에서는 이 추측이 원래 "학술적 농담"이었으나 여러 작가들에 의해 그럴듯한 이론으로 받아들여졌다고 본다.[2] 또한, "스코릴로"가 요르다네스가 두라스 이전의 다키아 왕으로 언급한 "코릴루스(Coryllusla)" 또는 "스코릴루스(Scorillusla)"와 동일 인물일 수 있다는 추측도 있다.[3] 만약 스코릴로가 두라스의 형이라면, 부계 상속권에 따라 왕위를 계승한 두라스는 데케발루스의 삼촌이었을 가능성이 있다.[4]
서기 85년, 다키아 군대는 다뉴브 강 남쪽에 위치한 로마의 요새화된 속주인 모에시아에 대한 소규모 습격을 시작했다. 서기 86년, 두라스 왕은 모에시아 남부로 더욱 강력한 공격을 명령했다. 로마 자료에서는 이 공격을 "디우르파네우스(Diurpaneusla)"(또는 "도르파네우스(Dorpaneusla)")가 이끌었다고 언급하는데, 많은 학자들은 이 인물을 두라스 자신으로 보아 "두라스-디우르파네우스"라고 부르기도 한다.[5][6][7]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두라스와 디우르파네우스가 다른 인물이거나, 디우르파네우스가 데케발루스와 동일 인물이라고 주장한다.[8] 최근의 연구에서는 "디우르파네우스"가 데케발루스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본다.[8]
이 공격에서 다키아군은 모에시아 총독 오피우스 사비누스를 격파하고 살해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 사건은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가 직접 개입하여 더 많은 병력을 이 지역에 배치하고, 그의 장군이자 프라이토리아니 친위대 사령관인 코르넬리우스 푸스쿠스를 파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9]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니그리누스가 사비누스의 뒤를 이어 총독이 되었다.
2. 1. 도미티아누스와의 전쟁
85년부터 다키아인들은 로마 속주 모에시아를 자주 침입하여 속주 총독을 살해하는 등 도발을 이어갔다.[10] 86년, 두라스 왕을 대신하여 데케발루스가 다키아 군대를 지휘하여 모에시아를 침공했고,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파견한 로마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로마군 총지휘관 푸스쿠스가 전사했으며, 제5 알라우다 군단을 포함한 로마 군단 2개가 타파에(로마인들이 부르던 산길로, 오늘날 트란실바니아의 철문으로 알려짐)에서 기습 공격을 받아 큰 패배를 당했다.[10] 이 승리 이후 노쇠한 두라스 왕이 퇴위하면서 87년 데케발루스가 다키아의 왕위를 계승했다.[10]디오 카시우스는 데케발루스를 다음과 같이 높이 평가했다.
"이 사람은 전쟁에 대한 이해가 뛰어나고 전쟁 수행 능력도 뛰어났다. 그는 공격해야 할 때를 잘 판단했고 후퇴할 적절한 순간을 선택했다. 그는 매복에 능했고 정규 전투의 달인이었다. 그는 승리를 잘 따라가는 방법뿐만 아니라 패배를 잘 관리하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오랫동안 로마인들의 가치 있는 적수였다."[10]
푸스쿠스의 뒤를 이어 테티우스 율리아누스가 로마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88년 율리아누스는 도미티아누스 휘하의 군대를 이끌고 다키아를 침공하여 타파에 인근 전투에서 데케발루스의 군대를 격파했다.[10] 그러나 로마는 다른 전선에서 문제에 직면했다. 고지 게르마니아 총독 루키우스 안토니우스 사투르니누스가 라인강 유역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동쪽에서는 마르코마니와 사르마티아 부족, 특히 야지게스에게 패배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10][11]
이러한 상황 때문에 모에시아 방어에 병력이 필요했던 도미티아누스는 다키아와의 전쟁을 서둘러 마무리하기로 결정하고, 데케발루스에게 평화 협정을 제안했다. 로마는 데케발루스와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매년 800만 세스테르티우스라는 막대한 금액을 지불하기로 합의했는데, 이는 로마에게 상당히 불리한 조건이었다.[11] 또한 데케발루스는 그의 형제 디에기스를 로마로 보내 도미티아누스 황제로부터 직접 왕관을 받게 함으로써, 로마로부터 다키아의 왕으로서 공식적인 지위를 인정받았다.[11]
3. 권력 강화
데케발루스의 승리는 그의 위상을 크게 높였다. 그는 권력을 중앙집권화하고,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제공한 로마의 기술자들을 활용하여 요새와 전쟁 기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12]
4. 트라야누스와의 전쟁
98년 트라야누스가 로마 황제로 즉위하면서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았던 다키아 문제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이전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기, 데케발루스는 로마군을 격파하고 로마에게 불리한 평화 조약을 맺은 바 있었다.
101년, 트라야누스는 로마 원로원의 승인을 받아 직접 군대를 이끌고 다키아를 침공했다. 이는 데케발루스와의 첫 번째 다키아 전쟁의 시작이었다. 다키아군은 지형적 이점을 활용한 전술로 로마군에 맞섰으나, 트라야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의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고 결국 패배했다.
전쟁이 불리하게 전개되자 102년, 데케발루스는 트라야누스에게 항복하고 평화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은 데케발루스에게 불리한 조건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4. 1. 제2차 다키아 전쟁
102년 트라야누스에게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데케발루스는 로마의 지배를 받아들일 의사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평화 조약을 어기고 다시 군사력을 키우기 시작했다.105년, 데케발루스는 다시 군사를 일으켜 도나우 강 유역의 로마 속주들을 공격했다. 이에 트라야누스 황제는 다키아 정벌을 완료하기 위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재차 침공에 나섰다. 로마군과의 격렬한 전투에도 불구하고 데케발루스의 군대는 결국 패배했다.
106년부터 로마군은 다키아족의 수도 사르미제게투사를 공격하여 장기간의 포위전 끝에 함락시켰다. 수도가 함락되자 데케발루스는 로마군의 포로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데케발루스의 죽음으로 다키아는 독립을 잃고 로마 제국의 속주(다키아)로 편입되었다. 이 다키아 전쟁의 과정은 로마 시의 트라야누스 포룸에 세워진 트라야누스 기념 기둥에 상세하게 묘사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4. 2. 최후
105년, 데케발루스는 로마에 복종하거나 빼앗긴 영토를 포기할 의사가 없었기에, 로마를 지지했던 자들에게 보복하고 야지게스(Jazyges)로부터 영토를 병합했으며, 재무장과 로마 탈주병 수용, 요새 복구 등으로 평화 조약을 위반했다.[16] 그는 트라야누스의 공격을 기다리지 않고, 새로 점령된 로마 영토, 아마도 바나트의 요새를 직접 공격하도록 승인했다. 또한 게릴라 공격으로 로마의 진지를 계속 교란했다.[16]데케발루스는 다키아인으로 전향한 로마 보조병을 이용하여 황제의 진영에 침투, 트라야누스를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그는 트라야누스의 고위 장교 중 한 명인 폼페이우스 롱기누스(폼페이우스 롱기누스)를 생포하여 인질로 삼고 트라야누스와 협상하려 했다. 롱기누스는 독약을 먹고 자살하여 데케발루스의 계획을 무산시켰다.[16]
트라야누스는 전면적인 침공을 위해 대규모 병력을 구축하고 데케발루스에게 항복을 요구했지만, 데케발루스는 이를 거부했다.[16] 주변 부족들은 이 시점에서 데케발루스에 대한 지원을 철회한 것으로 보인다. 106년 트라야누스는 다키아의 수도 사르미제게투사를 직접 공격했다. 사르미제게투사 포위전과 인근 지역에서의 몇 차례 소규모 전투 끝에 로마는 다키아의 수도를 정복했다.
데케발루스는 가족과 함께 탈출하여 카르파티아 산맥에서 게릴라전을 계속하려 했으나,[16] 로마군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그는 포로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다키아 전쟁).

데케발루스의 죽음으로 다키아는 로마 제국에 완전히 정복되어 로마 속주 다키아로 편입되었다. 이 다키아 전쟁의 과정은 로마 시의 트라야누스 포룸에 세워진 트라야누스 기념 기둥에 상세히 묘사되어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5. 평가 및 유산
데케발루스는 오늘날 루마니아에서 민족 영웅으로 여겨진다. 그는 수많은 문학 작품, 영화, 예술 작품, 조각상 등의 소재가 되었다. 특히 19세기 루마니아 민족주의 운동 과정에서 데케발루스는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운 민족의 자유와 저항 정신을 상징하는 인물로 부각되었다. 루마니아의 정치가이자 역사가인 미하일 코갈니체아누는 데케발루스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야만인 왕"이라고 칭송하기도 했다.
공산주의 시대에도 데케발루스는 중요한 국가적 영웅으로 간주되었으며, 특히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정권 하에서는 그의 애국심과 독립 정신을 강조하며 여러 곳에 조각상을 세우는 등 적극적으로 기념되었다. 오늘날에도 데케발루스는 루마니아 민족 정체성의 중요한 상징으로 남아 있으며, 그의 용기와 독립을 향한 투쟁은 많은 루마니아인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일부 원고대주의(Protochronism) 및 다키아주의(Dacianism) 운동에서는 데케발루스를 루마니아 민족의 기원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려는 시각을 보이기도 한다.
한편, 다키아 전쟁과 데케발루스의 최후에 대한 기록은 로마에 세워진 트라야누스 기념 기둥의 부조를 통해 상세하게 묘사되어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이 기념 기둥은 로마의 관점에서 전쟁을 기록한 것이지만, 동시에 데케발루스와 다키아인들의 항전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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