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다키아 속주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다키아 속주는 로마 제국이 정복한 지역으로, 현재 루마니아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설치되었다. 다키아는 로마 제국에 편입되기 전부터 로마와 교류가 있었으나, 부레비스타의 통일 이후 로마의 관심이 커졌다. 로마는 데케발루스에 의해 다키아를 정복하고 속주로 만들었으며, 트라야누스 황제는 다키아를 로마 제국의 새로운 속주로 건설하고 도시를 건설했다. 다키아는 세 번의 행정 개편을 거쳤으며, 마르코만니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세베루스 왕조 시기에 재건되었지만, 3세기의 위기를 겪으며 고트족의 침입으로 멸망했다. 이후 다키아는 여러 민족의 각축장이 되었으며, 로마인과 다키아인의 후손인 루마니아인의 기원과 관련된 논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다키아 속주에는 울피아 트라이아나 사르미제게투사, 아풀룸, 포롤리숨 등 주요 도시들이 건설되었으며, 로마의 지배 아래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다키아 속주 - [전쟁]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공식 명칭다키아 속주
로마자 표기Provincia Dacia
그리스어 표기Ἐπαρχία Δακίας
별칭비옥한 다키아 (Dacia Felix)
서기 125년의 로마 제국에서 다키아 속주
서기 125년의 다키아 속주
역사
시대고전 고대
건국106년, 트라야누스에 의해 병합
멸망271/275년,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철수
이전 국가다키아 왕국
이후 국가다키아 아우렐리아나
서고트족
훈족
위치
현재 국가루마니아
세르비아
정치
정치 체제로마 제국 속주
수도울피아 트라이아나 사르미제게투사
주요 직책황제
총독
주요 인물 (황제)트라야누스 (106년 ~ 117년)
아우렐리아누스 (270년 ~ 271년)
주요 인물 (총독)율리우스 사비누스 (106년 ~ 109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시아누스 (265년 ~ 271년)
언어
공용어라틴어
통화
통화아우레우스, 데나리우스 등

2. 배경

다키아인과 게타이는 다키아로마 제국에 합병되기 전부터 로마인들과 빈번하게 교류했다.[1] 그러나 부레비스타(기원전 82년-44년)가 토착 부족들을 통합하고 공격적인 팽창 정책을 시작하면서 로마는 다뉴브 강 하류 지역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그의 왕국은 서쪽으로는 판노니아, 동쪽으로는 흑해까지 뻗어 있었고, 남쪽으로는 발칸반도까지 세력을 확장했다.[1]

기원전 74년경,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가 이끄는 로마 군단이 다뉴브 강 하류에 도착하여 다키아인들과 접촉하게 되었다.[1] 부레비스타의 세력과 영향력이 커지는 것에 대한 로마의 우려는 그가 로마 공화정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더욱 커졌다. 파르살루스 전투 직전, 그는 폼페이우스를 지지하여 로마 내전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폼페이우스 세력이 패배하면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다키아로 눈을 돌릴 것임을 의미했다.[1] 카이사르는 기원전 44년 파르티아 원정의 일환으로 다키아를 정복하여 부레비스타를 제거하고 그의 왕국을 붕괴시키려 했다.[1] 카이사르의 암살로 인해 다키아 원정은 무산되었지만, 부레비스타는 그가 통치하는 부족들을 완전히 통합하는 데 실패했다. 부레비스타 사후, 그의 왕국은 네 개, 이후 다섯 개의 소왕국으로 분열되었다.[1]

부레비스타의 죽음부터 데케발루스의 등장까지, 로마군은 다키아인 및 게타이와 계속 충돌했다.[1] 이들 부족들이 모이시아와 판노니아 인접 지역을 지속적으로 약탈하자, 지역 총독들과 황제들은 다키아에 대한 징벌적 조치를 취했다.[1]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로마 제국과 다키아인들이 로마 시대 말기까지 사회적, 외교적, 정치적으로 지속적인 교류를 하게 만들었다.[1] 이로 인해 다키아인들은 로마의 "친구이자 동맹"으로 간주되는 등 우호적인 지위를 얻기도 했지만,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이것이 로마의 주요 인사들의 후원과 연결되었다.[1] 예를 들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의 갈등 동안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35년에 다키아 왕 코티소의 딸과 결혼하고, 그 대가로 코티소는 옥타비아누스의 딸 율리아와 결혼하는 조건으로 다키아인들과 동맹을 제안했다.[1]

서기 87년 이후의 로마령 모에시아


플라비우스 왕조의 등장, 특히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즉위는 다뉴브 강 하류 및 중류 지역에서의 갈등을 격화시켰다.[1] 서기 84년 또는 85년경, 데케발루스 왕이 이끄는 다키아인들은 다뉴브 강을 건너 모이시아를 침공하여 파괴 행위를 저지르고 모이시아 총독 가이우스 오피우스 사비누스를 살해했다.[1] 도미티아누스는 모이시아를 모이시아 인페리오르와 모이시아 수페리오르로 재편성하고 데케발루스에 대한 전쟁을 시작했다. 게르만 국경에서의 문제로 전쟁을 끝내지 못한 도미티아누스는 다키아인들과 조약을 체결했는데, 이는 당시 많은 비판을 받았다.[1] 이 사건은 트라야누스 황제의 다키아 전쟁의 전조가 되었다.[1] 이때 도미티아누스는 군단 4 플라비아 펠릭스를 부르눔에서 모에시아 수페리오르의 싱기두눔 (현재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기지로 이동시켰다.[1]

트라야누스에게 충성을 바치는 다키아인 추장(데케발루스를 배신한 자)


트라야누스는 로마 군단을 이끌고 다뉴브 강을 건너 다키아로 진입하여 오러슈티 산맥 주변의 중요한 지역에 집중했다.[1] 102년, 제1차 다키아 전쟁 이후, 협상을 통해 데케발루스는 요새를 파괴하고, 다키아의 조약 준수를 보장하기 위해 사르미제게투사 레기아(루마니아 그라디슈테아 문첼루이)에 로마 수비대가 주둔하는 데 동의하는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다.[1] 또한 트라야누스는 다마스쿠스의 아폴로도로스에게 드로베타-투르누 세베린에 다뉴브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설계하고 건설하도록 지시했다.[1]

105년-106년의 제2차 다키아 전쟁은 영토 팽창과 정복이라는 매우 구체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1] 공격 목표는 사르미제게투사 레지아였다.[1] 로마군은 데케발루스의 수도를 포위했고, 도시는 항복 후 파괴되었다.[1] 다키아 왕과 소수의 추종자들은 산으로 후퇴했지만, 그들의 저항은 오래가지 못했고 데케발루스는 자살했다.[1] 그러나 다른 다키아 귀족들은 포로로 잡히거나 항복을 선택했다.[1] 항복한 사람들 중 한 명이 다키아 왕실 보물의 위치를 알려주었는데, 이는 약 226796.00kg의 과 약 453592.00kg의 이라는 엄청난 가치였다.[1]

3. 안토니누스 왕조 및 세베루스 왕조 시기 다키아 (106년–235년)

안탈리아 박물관에 묘사된 하드리아누스 황제 (재위: 117년-138년)


하드리아누스의 다키아 방문을 기념하는 청동 주화


다키아 속주 지도


다키아 지도 (124년)


다키아 포롤리센시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아풀룸에서 발견된 페르티낙스 (재위: 193년)로 추정되는 조각상.


하드리아누스트라야누스 황제의 사망 소식을 시리아의 안티오크에서 들었다.[16] 그는 트라야누스가 다뉴브강 북쪽의 새로운 다키아 영토를 지키도록 임명한 콰드라투스 바수스가 원정 중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로마로 돌아갈 수 없었다.[6] 트라야누스는 파르티아 원정에 많은 군대와 보조 연대를 데려가 다키아와 다뉴브강 지역의 방어가 약화된 상태였다.[4] 록솔라니족은 로마가 약속했던 지원금을 중단하자 야지게스족과 연합하여 로마에 반란을 일으켰다.[5] 이에 하드리아누스는 동쪽에서 군대를 먼저 파견하고, 가능한 한 빨리 시리아를 떠났다.[6]

이 무렵, 하드리아누스는 다뉴브강 북쪽 영토에서 계속되는 문제에 좌절하여 다키아에서 철수하는 것까지 고려했다.[6] 그는 비상 조치로 올트강을 통한 야만족의 침입을 우려하여 아폴로도로스가 건설한 다뉴브강 다리를 해체했다.[6] 118년, 하드리아누스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록솔라니와 야지게스에 맞서 싸웠고, 그들을 격파한 후 록솔라니에게 지원금을 다시 지급하기로 했다.[7] 이후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가 정복한 다키아 영토 일부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바나트의 대부분은 야지게스에게, 남부 몰도바, 문테니아, 올테니아 평원 등은 록솔라니에게 돌려주었다.[8] 그 결과, 모이시아 인페리오르는 다키아 정복 이전의 경계로 돌아갔고, 다뉴브강 북쪽의 모이시아 인페리오르 지역은 다키아 인페리오르라는 새로운 속주로 재편되었다.[9] 트라야누스 시절의 다키아 속주는 다키아 수페리오르로 이름이 바뀌었다.[9] 하드리아누스는 울피아 트라야나 사르미제게투사에 있던 제4 플라비아 펠릭스 군단의 분견대를 싱기두눔 기지로 돌려보냈다.

알루타누스 변경은 다키아 수페리오르의 동쪽 국경으로 설정되었다. 124년경, 하드리아누스는 다키아 수페리오르 북쪽에 다키아 포롤리센시스라는 새로운 속주를 만들었다.[10] 다키아 수페리오르는 프라에토르 계급의 원로원 의원이, 다키아 인페리오르와 다키아 포롤리센시스는 군 지휘관인 프로쿠라토르가 관리했다.[11] 하드리아누스는 새로운 속주에서 광산 개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12] 황제는 광산 수입을 독점하고, 기사 계급에게 채굴권을 임대하여 운영하게 했다.[13] 124년, 하드리아누스는 나포카를 방문하여 무니키피움으로 승격시켰다.[14]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138년–161년)는 다키아 속주의 방어를 강화하고 도로 보수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1] 그는 도로가 지속적으로 보수되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의 재위 시기에 제작된 다수의 이정표석들이 이를 증명한다.[2] 울피아 트라야나 사르미제게투사의 원형 극장은 '콜로니아' 과정 초기에 지어졌는데, 그의 인장이 찍힌 타일들을 통해 그의 재위 때 보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3] 또한, 포롤리숨 (루마니아 미르시드 인근)의 거대한 로마 요새 시설들은 노출된 위치를 고려하여 석재로 재건되었고, 방어 목적의 튼튼한 방벽이 추가되었다.[4] 158년경의 한 차례 봉기 이후,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다키아 속주를 다시 행정 개편했다.[4] 다키아 포롤리센시스 (오늘날 트란실바니아 북쪽)는 포롤리숨을 중심으로 유지되었고, 다키아 수페리오르는 아풀룸을 중심으로 다키아 아풀렌시스 (Dacia Apulensis, 오늘날 바나트와 트란실바니아 남부)로 변경되었다.[4] 다키아 인페리오르는 다키아 말벤시스 (Dacia Malvensis, 올테니아에 위치)로 전환되었으며, 로물라 (오늘날 레슈카 도브로슬로베니)가 중심 도시였다.[5] 하드리아누스의 초기 행정 개편에 따라, 각 다키아 행정 구역은 기사 계급인 '프로쿠라토르'가 관리하였고, 이들은 모두 아풀렌시스의 총독에게 보고했다.[4]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재위: 161년–180년) 즉위 직후, 로마 제국 북쪽 국경에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북쪽에서 이동하는 부족들이 남쪽 부족들에게 압력을 가했기 때문이다. 166년, 마르쿠스는 다키아 속주를 '트레스 다키아이'(Tres Daciae, 세 개의 다키아)라는 단일 속주로 재편성했다.[19] 이는 다뉴브 국경을 따라 커져 가는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조치였다.[19] 트레스 다키아이에는 게미나 제13군단마케도니카 제5군단 등 두 개의 군단이 주둔했으며, 황제 직속 군단장은 집정관 지위를 가져야 했다.[19] 마르쿠스는 섹스투스 칼푸르니우스 아그리콜라를 이 자리에 임명한 것으로 보인다.[19] 북쪽, 동쪽, 서쪽 국경이 모두 공격에 취약했던 다키아는 방어가 쉽지 않았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재위 기간에 야만족의 침입이 다시 시작되면서, 다키아의 방어선은 큰 압박을 받았다.[19] 166년과 167년 사이에 콰디족마르코만니족 등 야만 부족들이 다뉴브 강을 건너 다키아를 휩쓸고 모이시아를 황폐화시켰다.[19] 167년 이후, 야지게스족이 다키아에 침입하여 알부르누스 마이오르(오늘날 루마니아의 로시아몬타너)에 있는 금광 지대를 점령했다.[19]

이후 2년 동안 다키아에서 전투가 계속되었고, 169년경 다키아 총독 섹스투스 칼푸르니우스 아그리콜라는 전염병 등으로 인해 지휘권을 포기해야 했다.[19] 마르쿠스는 다키아를 다시 세 개의 속주로 분리하고,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프론토를 다키아 아풀렌시스의 총독으로 임명했다.[19] 미래의 황제 페르티낙스도 이 시기 다키아에서 활동했으나, 그의 정확한 역할은 알려져 있지 않다.[19] 170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프론토를 다키아 전체의 총독으로 임명했으나, 프론토는 그해 말 야지게스족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전사했다.[19] 170년, 코스토보키족이 남하하여 다키아를 휩쓸었다.[19] 171년, 아스팅기족이 다키아를 침입하여 코스토보키족을 격파한 후 공격을 계속했다.[19] 로마는 아스팅기족과 협상하여 이들이 다키아를 떠나 코스토보키족의 땅에 정착하도록 했다.[19] 173년, 마르코만니족은 제압되었으나 야지게스족, 콰디족과의 전쟁은 계속되었다.[19] 174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콰디족을 격파하고 평화 조약을 맺었다.[19] 이후 야지게스족을 격파하고 다키아에서 몰아낸 뒤, 로마 원로원은 175년 그에게 '사르마티쿠스 막시무스'라는 칭호를 부여했다.[19]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북쪽 국경 문제의 영구적인 해결책을 찾고자 했으나,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반란으로 인해 계획은 실패했다.[19] 180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사망하고 그의 아들 콤모두스가 제위를 계승했다.[19] 콤모두스는 전쟁 중이던 부족들과 서둘러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로마로 돌아갔다.[19] 콤모두스 재위 기간에도 다키아에서는 분쟁이 계속되었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는 185년경 다키아에서 제한적인 반란이 일어났다고 언급하며, 다키아 외곽에 살던 다키아계 부족들의 패배에 대해서도 기록했다.[19]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재위: 193년–211년) 통치 기간에 다키아 속주는 평화를 누렸고, 이전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군사 시설들이 복구되었다.[1] 세베루스는 동쪽 국경을 올트강 동쪽으로 약 14km 확장하고, 225km 길이의 리메스 트란살루타누스를 완성했다.[2] 그의 재위 기간 동안 무니키피움 수가 증가했고, 울피아 트라이아나 사르미제게투사와 아풀룸은 '유스 이탈리쿰' 지위를 얻었다.[3] 세베루스는 군사 개혁을 통해 로마 병사들이 군영 근처 카나바이에 거주하며 토지를 관리하는 것을 허용했다.[4] 또한 현지 여성과의 혼인을 허용하여, 로마 시민권자인 병사의 자녀는 시민권을 상속받았다. 시민권자가 아닌 병사는 전역 시 본인과 자녀 모두 시민권을 받았다.[5]

카라칼라 (재위: 211년–217년)는 세수 증대와 인기를 위해 제국 내 모든 자유민 남성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안토니누스 칙령을 반포했다.[6] 213년, 파르티아 원정 중 다키아를 방문하여 부족 간 동맹을 약화시키는 외교적 조치를 취했다.[7] 포롤리숨에서 평화 협상을 구실로 콰디족 왕 가이오보마루스를 살해했다.[8] 카라칼라 방문 기간 동안 포롤리숨에서 일부 보수 작업이 이루어졌고,[9] 주둔 부대가 카라칼라 기마상을 세웠다는 금석문이 있다.[10] 일부 학자들은 카라칼라가 다키아 국경을 동쪽으로 확장했다고 주장하지만, 명확한 증거는 없다.[19] 218년, 마크리누스는 카라칼라가 억류했던 다키아인 포로들을 돌려보냈다.[11]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시대의 금석문들이 다키아에서 발견되었다.[12] 그의 재위 기간에 세 다키아 지역 자문회가 울피아 트라이아나 사르미제게투사에서 열렸고, 아드 메디암 군 주둔지 출입구 등이 보수되었다.[13]

3. 1. 설치 (106년–117년)

트라야누스는 데케발루스의 다키아족을 정복하고 다뉴브강 너머에 다키아 속주를 설치했다. 이 속주는 그 넓이가 100,000 파케스(paces)의 10배에 달했지만, 갈리에누스 황제 때 상실되었고,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다키아에서 철수한 뒤 모이시아와 다르다니아에 두 개의 다키아가 만들어졌다.[16]

데케발루스의 왕국이 병합되면서, 다키아는 로마 제국의 새로운 속주가 되었다. 이것은 거의 1세기 전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이래로 두 번째로 생긴 속주였다.[17] 북쪽에 있는 데케발루스의 사르마티아족 동맹들이 여전히 다키아에 남아 있어, 107년까지 계속된 수많은 군사 작전이 필요했다.[18] 106년 말쯤, 로마 군단은 국경을 따라 새로운 카스트라를 세우기 시작했다. 트라야누스는 107년 6월 중순에 로마로 돌아왔다.

로마 역사가 플라비우스 에우트로피우스는 Breviarium Historiae Romanae에서 로마의 승리 이후 다키아인들의 운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다키아를 제압하고 난 뒤 트라야누스는 데케발루스가 벌인 장기간의 전쟁 속에 다키아 지역의 인구가 고갈됨에 따라, 로마 영토 전역에서 끊임없는 수의 사람들을 다키아와 그곳의 도시들로 이식하였다."

로마의 사료들은 다키아를 106년 8월 11일에 황제 속주로 언급하고 있다. 집정관 지위의 황제 직속 군단장이 다키아 속주를 관리하였고, 다키아에 배치된 두 개 군단 중 하나씩 지휘권을 맡은 군단장 두 명의 지원을 받았다. '프로쿠라토르 아우구스티'가 다키아 속주의 조세 및 군사 경비에 대한 관리를 책임졌다.

다키아 속주의 전환은 많은 자원이 소요되는 과정이었다. 로마식 용장, 포룸, 신전, 도로 포장, 퇴역한 병사들로 이뤄진 식민 도시 건설 등 도시 인프라를 구축하는 전통적인 로마 방식이 동원되었다. 그렇지만, 새로운 속주로 개척자들의 이주를 장려한 트라야누스의 노력을 제외하면, 로마 제국 정부에서는 기존 속주에서 다키아로 재정착을 거의 장려하지 않았다.

로마 정복으로 이어진 전쟁의 즉각적인 효과는 다키아 지역 내 인구 감소였다. 크리토는 대략 다키아인 500,000명이 노예가 되어 옮겨졌고, 그 중에 어느 정도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개선식을 기념하는 행사의 일부인 검투 경기 (또는 lusiones)에 투입되도록 로마로 보내졌다. 인구 감소를 메우기 위해, 로마 정부 측은 제국 전역의 로마 시민권자들과 비시민권자들로 구성된 도시 중심지들을 설치하며, 공식적인 식민지 건설 계획을 벌였다. 그럼에도, 토착 다키아인들이 다키아 지역 주변 및 외곽 지역에 남아 있었고, 지역의 유력자들은 전형적인 로마의 식민 관행에 따라 속주 행정 정부를 지원하도록 요청받았다.

트라야누스는 폐허가 된 사르미제게투사 레기아에서 서쪽으로 약 40km 떨어진 지점에 새로운 다키아 속주의 중심 도시 울피아 트라이아나 사르미제게투사를 건설하였다. 초기에는 플라비아 펠릭스 제4군단의 기지 역할을 했던 이곳은 다키아 전쟁에서 복무했던 퇴역 고참병들, 특히 마케도니카 제5군단, 클라우디아 제11군단, 게미나 제14군단 출신 군단병들이 정착하였다.

트라야누스 재위 시절에 다키아 지역 로마의 도로망이 깔렸고, 이전부터 존재하던 천연 연락선은 빠르게 포장된 로마 도로로 바뀌었다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이 도로망은 곧 더 방대한 도로망으로 확장되었다. 그렇지만, 트라야누스의 명백한 지시에 따라 만들어졌다고 확인된 도로는 두 개뿐이며 하나는 나포카와 포타이사 (오늘날 루마니아의 클루지나포카투르다)에 있는 군 주둔지를 연결하던 간선도로였다. 아이톤의 밀리아리움에 표시된 금석문 자료는 이 도로가 서기 109년에서 110년 사이 어느 시기에 완공되었다고 나타내고 있다. 두 번째 도로는 아풀룸 (오늘날 루마니아의 알바이울리아)을 가로 질러 동쪽의 흑해에서 서쪽의 판노니아 인페리오르 및 그 너머 지역으로도 이어질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간선도로이다.

트라야누스 시기 '레가티 아우구스티 프로 프라이토레'
이름임기 시작임기 종료
율리우스 사비누스105년107/109년
데키무스 테렌티우스 스카우리아누스109년110/111년
가이우스 아비디우스 니그리누스112년113년
퀸투스 바이비우스 마케르114년114년
가이우스 율리우스 콰드라투스 바수스?117년


3. 2. 제1차 행정 개편 (117년–138년)



트라야누스 황제가 죽고 하드리아누스가 황제가 되면서, 다키아 속주는 변화를 맞이했다.[3] 트라야누스는 파르티아 원정에 많은 군대를 데려가 다키아와 다뉴브강 지역의 방어가 약해져 있었다.[4] 록솔라니족은 로마가 약속했던 지원금을 중단하자 야지게스족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5]

하드리아누스는 다키아에서 군대를 철수하는 것까지 고민했지만, 올트강을 통한 야만족의 침입을 우려하여 아폴로도로스가 건설한 다뉴브강 다리를 해체하는 비상 조치를 취했다.[6] 118년, 하드리아누스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록솔라니와 야지게스를 격파하고 록솔라니에게 지원금을 다시 지급하기로 했다.[7]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가 정복한 다키아 영토 일부를 포기했다. 바나트 대부분은 야지게스에게, 남부 몰도바, 문테니아, 올테니아 평원 등은 록솔라니에게 돌려주었다.[8] 그 결과, 모이시아 인페리오르는 다키아 정복 이전의 경계로 돌아갔고, 다뉴브강 북쪽의 모이시아 인페리오르 지역은 다키아 인페리오르라는 새로운 속주로 재편되었다.[9] 트라야누스 시절의 다키아 속주는 다키아 수페리오르로 이름이 바뀌었다.[9]

124년, 하드리아누스는 다키아 수페리오르 북쪽에 다키아 포롤리센시스라는 새로운 속주를 만들었다.[10] 다키아 수페리오르는 프라에토르 계급의 원로원 의원이, 다키아 인페리오르와 다키아 포롤리센시스는 군 지휘관인 프로쿠라토르가 관리했다.[11]

하드리아누스는 다키아의 광산 개발에 힘을 쏟았다.[12] 광산 수입은 황제가 독점했고, 기사 계급에게 채굴권을 임대하여 운영하게 했다.[13] 124년, 하드리아누스는 나포카를 방문하여 무니키피움으로 승격시켰다.[14]

3. 3. 보수 (138년–161년)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138년–161년)는 다키아 속주의 방어를 강화하고 도로 보수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1] 그는 도로가 지속적으로 보수되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의 재위 시기에 제작된 다수의 이정표석들이 이를 증명한다.[2] 울피아 트라이아나 사르미제게투사의 원형 극장은 '콜로니아' 과정 초기에 지어졌는데, 그의 인장이 찍힌 타일들을 통해 그의 재위 때 보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3] 또한, 포롤리숨 (루마니아 미르시드 인근)의 거대한 로마 요새 시설들은 노출된 위치를 고려하여 석재로 재건되었고, 방어 목적의 튼튼한 방벽이 추가되었다.[4]

158년경의 한 차례 봉기 이후,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다키아 속주를 다시 행정 개편했다.[4] 다키아 포롤리센시스 (오늘날 트란실바니아 북쪽)는 포롤리숨을 중심으로 유지되었고, 다키아 수페리오르는 아풀룸을 중심으로 다키아 아풀렌시스 (Dacia Apulensis, 오늘날 바나트와 트란실바니아 남부)로 변경되었다.[4] 다키아 인페리오르는 다키아 말벤시스 (Dacia Malvensis, 올테니아에 위치)로 전환되었으며, 로물라 (오늘날 레슈카 도브로슬로베니)가 중심 도시였다.[5] 하드리아누스의 초기 행정 개편에 따라, 각 다키아 행정 구역은 기사 계급인 '프로쿠라토르'가 관리하였고, 이들은 모두 아풀렌시스의 총독에게 보고했다.[4]

3. 4. 마르코만니 전쟁 및 여파 (161년–193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재위: 161년–180년) 즉위 직후, 로마 제국 북쪽 국경에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북쪽에서 이동하는 부족들이 남쪽 부족들에게 압력을 가했기 때문이다. 166년, 마르쿠스는 다키아 속주를 '트레스 다키아이'(Tres Daciae, 세 개의 다키아)라는 단일 속주로 재편성했다.[19] 이는 다뉴브 국경을 따라 커져 가는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조치였다.[19] 트레스 다키아이에는 게미나 제13군단마케도니카 제5군단 등 두 개의 군단이 주둔했으며, 황제 직속 군단장은 집정관 지위를 가져야 했다.[19] 마르쿠스는 섹스투스 칼푸르니우스 아그리콜라를 이 자리에 임명한 것으로 보인다.[19]

북쪽, 동쪽, 서쪽 국경이 모두 공격에 취약했던 다키아는 방어가 쉽지 않았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재위 기간에 야만족의 침입이 다시 시작되면서, 다키아의 방어선은 큰 압박을 받았다.[19] 166년과 167년 사이에 콰디족마르코만니족 등 야만 부족들이 다뉴브 강을 건너 다키아를 휩쓸고 모이시아를 황폐화시켰다.[19] 167년 이후, 야지게스족이 다키아에 침입하여 알부르누스 마이오르(오늘날 루마니아의 로시아몬타너)에 있는 금광 지대를 점령했다.[19]

이후 2년 동안 다키아에서 전투가 계속되었고, 169년경 다키아 총독 섹스투스 칼푸르니우스 아그리콜라는 전염병 등으로 인해 지휘권을 포기해야 했다.[19] 마르쿠스는 다키아를 다시 세 개의 속주로 분리하고,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프론토를 다키아 아풀렌시스의 총독으로 임명했다.[19] 미래의 황제 페르티낙스도 이 시기 다키아에서 활동했으나, 그의 정확한 역할은 알려져 있지 않다.[19] 170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프론토를 다키아 전체의 총독으로 임명했으나, 프론토는 그해 말 야지게스족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전사했다.[19]

170년, 코스토보키족이 남하하여 다키아를 휩쓸었다.[19] 171년, 아스팅기족이 다키아를 침입하여 코스토보키족을 격파한 후 공격을 계속했다.[19] 로마는 아스팅기족과 협상하여 이들이 다키아를 떠나 코스토보키족의 땅에 정착하도록 했다.[19]

173년, 마르코만니족은 제압되었으나 야지게스족, 콰디족과의 전쟁은 계속되었다.[19] 174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콰디족을 격파하고 평화 조약을 맺었다.[19] 이후 야지게스족을 격파하고 다키아에서 몰아낸 뒤, 로마 원로원은 175년 그에게 '사르마티쿠스 막시무스'라는 칭호를 부여했다.[19]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북쪽 국경 문제의 영구적인 해결책을 찾고자 했으나,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반란으로 인해 계획은 실패했다.[19] 180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사망하고 그의 아들 콤모두스가 제위를 계승했다.[19] 콤모두스는 전쟁 중이던 부족들과 서둘러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로마로 돌아갔다.[19]

콤모두스 재위 기간에도 다키아에서는 분쟁이 계속되었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는 185년경 다키아에서 제한적인 반란이 일어났다고 언급하며, 다키아 외곽에 살던 다키아계 부족들의 패배에 대해서도 기록했다.[19]

3. 5. 세베루스 왕조 시절 재건 (193년–235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재위: 193년–211년) 통치 기간에 다키아 속주는 평화를 누렸고, 이전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군사 시설들이 복구되었다.[1] 세베루스는 동쪽 국경을 올트강 동쪽으로 약 14km 확장하고, 225km 길이의 리메스 트란살루타누스를 완성했다.[2] 그의 재위 기간 동안 무니키피움 수가 증가했고, 울피아 트라이아나 사르미제게투사와 아풀룸은 '유스 이탈리쿰' 지위를 얻었다.[3]

세베루스는 군사 개혁을 통해 로마 병사들이 군영 근처 카나바이에 거주하며 토지를 관리하는 것을 허용했다.[4] 또한 현지 여성과의 혼인을 허용하여, 로마 시민권자인 병사의 자녀는 시민권을 상속받았다. 시민권자가 아닌 병사는 전역 시 본인과 자녀 모두 시민권을 받았다.[5]

카라칼라 (재위: 211년–217년)는 세수 증대와 인기를 위해 제국 내 모든 자유민 남성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안토니누스 칙령을 반포했다.[6] 213년, 파르티아 원정 중 다키아를 방문하여 부족 간 동맹을 약화시키는 외교적 조치를 취했다.[7] 포롤리숨에서 평화 협상을 구실로 콰디족 왕 가이오보마루스를 살해했다.[8] 카라칼라 방문 기간 동안 포롤리숨에서 일부 보수 작업이 이루어졌고,[9] 주둔 부대가 카라칼라 기마상을 세웠다는 금석문이 있다.[10] 일부 학자들은 카라칼라가 다키아 국경을 동쪽으로 확장했다고 주장하지만, 명확한 증거는 없다.[19] 218년, 마크리누스는 카라칼라가 억류했던 다키아인 포로들을 돌려보냈다.[11]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시대의 금석문들이 다키아에서 발견되었다.[12] 그의 재위 기간에 세 다키아 지역 자문회가 울피아 트라이아나 사르미제게투사에서 열렸고, 아드 메디암 군 주둔지 출입구 등이 보수되었다.[13]

4. 다키아 속주의 일상

다키아 속주의 일상은 로마 제국의 여느 속주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모습이 혼재된 공간이었다. 로마의 지배 아래 새롭게 건설된 도시들과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유지하던 토착 다키아인들의 취락이 공존했다.

에우트로피우스[4], 카시우스 디오[5], 율리아누스[6][7] 등의 기록과 트라야누스 원주의 묘사에 따르면, 사르미제게투사 레기아 공방전과 데케발루스의 자결 이후 다키아 지역의 인구가 크게 감소한 것으로 보인다.[8] 그러나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전통적인 다키아 장례 풍습과 도자기 제조는 로마 시대에도 지속되었으며,[9] 이는 토착 다키아인들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체테아, 치커우 등 일부 취락들은 로마 이전 시기부터 로마 시대까지 지속적으로 사람이 거주한 흔적을 보여준다.[13]

로마 제국은 다키아 속주의 인구 감소를 메우고 경제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제국 전역에서 이주민들을 유치하였다.[17] 이들은 로마 문화와 라틴어를 다키아에 전파하였으며, 다키아의 로마화에 기여하였다.

제4군단 플라비아 펠릭스, 제13군단 게미나, 제5군단 마케도니카 등 군단과 다양한 형태의 보조 부대가 다키아 속주 방어를 담당했다.[6][7]

다키아 속주는 로마 제국의 중요한 경제적 요충지였다. 다키아의 풍부한 금, 은, 소금 광산은 로마 제국의 재정에 큰 기여를 하였다.[16] 로마식 도로 건설은 경제 발전을 촉진하고 물자 수송을 원활하게 하였다.[18]

종교적인 측면에서 다키아 속주는 로마의 전통 신앙과 동방의 신앙, 그리고 토착 신앙이 혼합된 다원적인 모습을 보였다. 유피테르, 유노 등 로마의 주요 신들과 함께 미트라스와 같은 동방의 신, 그리고 트라키아 기수와 같은 지역 신앙이 공존했다.[7]

4. 1. 토착 다키아인

푸시킨 미술관에 전시 중인 2세기 초 다키아인 포로 청동상


다키아 속주 내 토착 다키아인의 존재는 다른 속주의 게르만족, 켈트족, 트라키아인, 일리리아인 등과 비교했을 때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2] 로마 제국에 편입된 후 세워진 로마 도시들 내에서 토착 다키아인들의 존재에 대한 기록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3]

에우트로피우스[4]는 카시우스 디오[5]율리아누스[6][7] 등의 저서를 통해 사르미제게투사 레기아 공방전과 데케발루스의 자결 이후 다키아 지역의 인구가 크게 감소했다고 묘사하지만,[8] 이러한 해석에는 문제가 있다. 에우트로피우스의 '로마사 개요'에 대한 현존하는 원고 자료들은 그 내용이 일관적이지 않다. 일부 원고들은 전쟁 이후 인구 감소를, 다른 원고들에서는 트라야누스의 정복 이후 사물 또는 자원의 감소를 묘사하고 있다.[9]

전통적인 다키아 장례 풍습이 지속되었다는 고고학적 증거들이 존재하며, 다키아 속주 및 로마의 지배력이 미치지 않는 속주 주변부에서도 로마 시대 내내 도자기 제조가 이어졌다.[9] 트라야누스 원주의 마지막 부분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해석들이 존재하는데, 다키아의 인구 감소를 가속화한 다키아인의 이주를 묘사하거나,[7] 로마의 권위에 순종하고 자신들의 정착지로 돌아가는 다키아인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한다.[10]

로마 제국 전역에서 다수의 개척자들이 다키아 속주에 정착하도록 유입되었지만,[9] 이는 새로 만들어진 로마의 도시들에만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다키아 도시들 내 토착 다키아식 인명에 대한 금석문 자료가 부족한 점은 로마의 다민족 도심 인구와 토착 다키아적 성격의 교외 인구 구조가 서로 분리되어 있음을 나타낸다.[9]

다키아인들은 최소한 두 차례 로마 정부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첫 번째는 트라야누스 사후인 117년[11], 마르쿠스 스타티우스 프리스쿠스에게 진압당한 158년 때였다.[12]

체테아, 치커우 등 일부 취락들은 로마 이전 시기부터 속주 시기까지 명백한 거주의 지속성을 보여준다.[13] 도자기에서 얻은 고고자료는 이 지역 및 다른 지역들에서 토착 다키아인들의 지속된 거주를 나타낸다. 다키아의 전통적인 움집과 토갱 등 로마 이전 시기의 건축 형태는 로마 시대에도 이어졌다. 이러한 주거 형태는 오브레자 같이 로마 합병 이후에 세워진 취락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14] 대략 46여 개의 지역들은 라텐 문화 시대와 로마 시대 모든 기간에 걸쳐 있었다고 언급된다.[14]

고고학은 다키아인의 지속적인 존재를 증명하는 동시에 로마화 과정을 보여준다.[10] 전통적 다키아 도자기들은 지역 특유의 디자인과 결합된 로마식 도자기와 같이 다키아 취락에서 발견된다.[10] 다키아의 로마화가 점차 커지면서, 항아리와 '다키아식 컵'이라 불리는 낮고 두꺼운 머그잔 같이 아주 적은 수의 초기 다키아 도자기 스타일만이 변화하지 않고 유지되었다. 이 유물들은 보통 손으로 빚었으며, 도자기 물레 사용은 드물었다.[15] 주택의 경우, 옛 다키아 방식, 장식품 및 장치 종류들이 다키아 속주 설치 이전처럼 계속 사용되었다.[10] 무덤에서 나온 고고자료들은 토착 다키아인들이 쫓겨나거나 전멸당했다기에는 몹시 규모가 컸다.[10] 약 300,000km²에 이르는 지역의 교외 인구 대다수를 제거하는 것은 로마의 가용 자원으로는 역부족이었다.[9] 무덤에서 발견된 은 장신구는 일부 매장지가 토착 다키아인만이 아니라 카프리족이나 서기 200년 이전 다키아로 이주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자유 다키아인에 속하는 것일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16]

일부 학자들은 토착민들의 행정 조직인 '키비타스 페레그리네'가 다키아 속주에서 적게 사용된 점을 다키아 인구 감소의 증거로 사용한다.[7] 로마 제국에 합병되기 전, 다키아는 단일 왕이 지배하던 왕국이었고, 로마 제국의 다른 속주들에서 성공적으로 사용되었던 로마의 키비타스 체계로 쉽게 전환될 지역 부족 구조를 가지지 않았다.[17]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에 언급된 다키아 부족들은 모이시아, 판노니아, 달마티아 또는 노리쿰의 경우들과 유사하게 토착 행정 구조를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다.[18]

소수의 지역 다키아인들만이 로마의 문화적 표현의 중심이었던 금석문 사용에 관심이 있었다.[19][20] 다키아 엘리트들과 사회적, 경제적 위치를 향상시키려 했던 이들을 제외하면, 토착 다키아인 대다수는 로마 제국에 편입된 후 로마 문화 규범을 포용하면서도 자신들의 이름과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했다.

일반적인 로마 관습에 따라, 다키아 남성들은 보조병으로 징집되어 동방 속주에서 브리타니아에 이르는 제국 전역으로 파병되었다. '다코룸 파르티카 분견대'(Vexillation Dacorum Parthica)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파르티아 원정 기간 그와 동행했고, '제1 울피아 다코룸 코호르트'(cohort I Ulpia Dacorum)는 카파도키아 속주에 배치되었다. 다키아 출신 부대에는 판노니아 수페리오르의 '제2 아우렐리아 다코룸'(II Aurelia Dacorum), 브리타니아의 '제1 아일리아 다코룸 코호르트'(cohort I Aelia Dacorum), 모이시아 인페리오르의 '제2 아우구스타 다코룸 밀리아리아'(II Augusta Dacorum milliaria) 등이 있었다. 제1 아일리아 다코룸 코호르트의 유물들이 다수 존재하는데, 한 금석문은 다키아 특유의 무기인 '시카'를 묘사한다. 금석문 자료에서 다키아 병사들은 '나티오네 다쿠스'(natione Dacus)로 묘사된다. 이들은 토착 다키아인, 로마화된 다키아인, 다키아로 이주한 개척자들 또는 그들의 후손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1990년 이후 발견된, 다키아 병사들에게 발행된 다수의 고대 로마의 전역증들은 퇴역병들이 고향 땅으로 귀향하는 것을 선호했음을 보여주며, 일반적인 로마 관습에 따라, 이 퇴역병들에게는 전역하면서 로마 시민권을 부여받았다.

4. 2. 이주자

로마 제국은 다키아 속주의 인구 감소를 메우고 경제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제국 전역에서 다양한 민족 출신의 이주민들을 유치하였다. 트라야누스는 로마 제국 전역에서 사람들을 다키아와 그곳의 도시들로 이주시켰다.[17] 이주민들은 로마 문화와 라틴어를 다키아에 전파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다키아의 로마화에 기여하였다.

1990년대에 발견된 금석문들에 남아 있는 약 3,000여 개의 인명 중 74% (약 2,200개)가 라틴어, 14% (약 420개)가 그리스어, 4% (약 120개)는 일리리아어, 2.3% (약 70개)는 켈트어, 2% (약 60개)는 트라키아-다키아어, 나머지 2% (약 60개)는 시리아의 셈어였다. 이들의 출신 지역과 상관없이, 정착자들 및 개척자들은 로마 문명과 제국 문화에 대한 실질적인 현현이며, 새로운 링구아 프랑카로서 라틴어의 사용을 들여왔다.

다키아 속주 곳곳에 산재되어 있는 인명들의 위치를 근거로 할 때, 비록 그 출신지가 금석문들에 거의 언급되어 있지는 않으나, 개척민들의 상당 비율이 노리쿰과 판노니아 서부를 기원으로 하고 있었다.

달마티아 출신의 전문 광부들(피루스티족)은 다키아의 금광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달마티아의 광부들은 보호를 받는 공동체 (Vicus Pirustarum)에 머물렀고 자신들 자체적인 지도권 (이 지도자는 프린켑스라 일컬어졌다)의 관할 하에 있었다.

4. 3. 다키아의 로마군

다키아 속주에는 로마 제국의 방어를 위해 상당한 규모의 군대가 주둔하였다. 트라야누스 황제가 다키아를 정복한 후, 최소 두 개의 군단이 새로운 속주에 배치되었다. 제4군단 플라비아 펠릭스는 베르조비스(현재 루마니아의 베르조비아)에, 제13군단 게미나는 아풀룸에 주둔하였다.[6] 동시에 제1군단 아디우트릭스도 다키아에 주둔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위치와 시기는 불분명하다.[6]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제4군단을 모이시아 수페리오르의 싱기두눔으로 이동시켰는데, 이는 다키아에 하나의 군단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6] 그러나 마르코마니 전쟁으로 인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제5군단 마케도니카를 모이시아 인페리오르의 트로에스미스(현재 루마니아의 투르코아이아)에서 다키아의 포타이사로 영구 이전하였다.[7]

로마 시대에 다키아 속주 전역에는 대규모 보조 부대가 주둔했다는 문자 증거가 있다.[6] 군사 문서에 따르면 최소 58개의 보조 부대가 보고되었으며, 대부분은 모이시아와 판노니아 속주에서 다키아로 이전되었다.[6] 이들은 ''누메리'', ''코호르테스 밀리아레'', ''퀸게나리에'', ''알라'' 등 다양한 형태와 기능을 가졌다.[6] 그러나 이들 모두가 동시에 또는 로마 다키아 존속 기간 동안 배치된 것은 아니다.[6]

다키아에는 전성기에 약 5만 명의 군대가 주둔했던 것으로 추정된다.[8]

4. 4. 취락

다키아 속주에는 로마식 도시와 토착 다키아인의 전통적인 취락이 함께 있었다. 로마식 도시는 '콜로니아'와 '무니키피움'으로 나뉘어 로마 제국의 행정, 경제, 문화 중심지 역할을 했다.
로마식 도시
토착 다키아인의 취락

  • 비쿠스: 로마식 도시 주변에 형성된 토착 다키아인의 전통적인 취락으로, 주로 농업 생산과 수공업에 종사하며 로마식 도시와 교류하였다.

주요 도시

  • 울피아 트라이아나 사르미제게투사: 다키아 속주의 수도이자 유일한 '콜로니아 데둑타'(colonia deducta)로, 로마 제국의 행정 중심지였다.
  • 아풀룸: 군단 기지로 시작하여 '무니키피움'에서 '콜로니아'로 승격되었으며, 다키아 아풀렌시스의 중심 도시였다.
  • 나포카: '무니키피움'에서 '콜로니아'로 승격되었으며, 다키아 포롤리센시스의 중심 도시였을 가능성이 있다.
  • 포타이사: 마케도니카 제5군단의 군영이 있던 곳으로, '무니키피움'에서 '콜로니아'로 승격되었다.
  • 드로베타: 다키아 인페리오르의 주요 도시로, '무니키피움'에서 '콜로니아'로 승격되었다.
  • 로물라: 다키아 말벤시스의 중심 도시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무니키피움'에서 '콜로니아'로 승격되었다.
  • 포롤리숨: 카르파티아산맥의 주요 관문을 지키는 요새 도시로, '무니키피움'이었다.
  • 디에르나: 세관 출장소가 있던 곳으로, '무니키피움'이었다.
  • 티비스쿰: 주요 로마 도시 중 하나였다.
  • 암펠룸: 다키아 최대의 광업 도시였으나, 법적 지위는 알려져 있지 않다.
  • 수키다바: '파구스' 또는 '비쿠스' 지위를 유지했다.

4. 5. 경제

다키아 속주는 로마 제국의 중요한 경제적 요충지였다. 다키아의 풍부한 금광, 은광, 소금 광산은 로마 제국의 재정에 큰 기여를 하였다.[16] 다키아는 곡물, 특히 밀의 주요 생산지였으며, 로마 제국의 식량 공급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17] 다키아 속주에는 로마식 도로가 건설되어 경제 발전을 촉진하고 물자 수송을 원활하게 하였다.[18]

다키아의 금광은 다키아를 로마 제국에 합병하는 또 다른 이유였다. 비호르산맥의 금광을 채굴하기 위해 달마티아의 광부들이 유입되었고, 이는 제국의 재정을 늘리는 데 기여했다. 알부르누스 마이오르(Alburnus Maior)의 금광은 131년에서 167년까지 번성하였으나, 시간이 흐르며 매장량이 고갈됨에 따라 그 수익이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관련 증거 자료들은 215년쯤 금광들이 폐광되었음을 나타낸다. 다키아는 또한 다키아의 국왕들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소금, 은, 구리 광산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다키아는 또한 편암, 사암, 안산암, 석회암, 대리석 등 대단히 많은 종류의 건축 자재들을 갖고 있었다.

다키아의 도시들은 주요 제조업 중심지였다. 청동 주물 공장이 포롤리숨, 로물라, 디에르나 등에 있었으며, 나포카에는 브로치 작업장이 위치했고, 아풀룸에는 무기 제조장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유리 제조 공장이 울피아 트라이아나 사르미제게투사와 티비스쿰에서 발굴되었다. 마을과 교외 취락들은 도자기를 포함한 수공업에 집중을 계속했고, 미커사사 같은 지역들은 이 지역의 '테라 시길라타' 생산을 위한 가마 26개와 거푸집 수백 개를 보유할 수 있었다.

4. 6. 종교

다키아 속주의 금석문과 조각 등에서는 종교에 관해 매우 다양한 내용들이 나타난다. 로마의 공식 국교의 신들은 그리스, 소아시아, 서유럽 등에서 기원을 한 신들과 함께 나타나며,[2] 그 중 43.5%는 라틴어 이름을 갖고 있다.[3] 유피테르, 유노, 미네르바, 베누스, 아폴론, 리베르, 리베라 등[4] 로마 신화의 주요 신들 모두가 다키아에서 묘사되었다.[2] 로마 신 실바누스는 유피테르 다음으로 이례적인 중요성을 띤 신이었다.[5] 그는 자주 다키아에서 '실베스테르'(silvester) 그리고 '도메스티쿠스'(domesticus) 등의 칭호로 일컬어졌으며, 이 명칭들은 판노니아에서도 쓰였다.[6]

다키아의 금석문 중 대략 20%는 군인들 사이에서 아주 인기 있던 미트라스에 대한 274번 이상의 봉헌과 더불어 키벨레아티스동방의 종교 숭배에 관해 언급했다.[7] 트라키아 기수에 대한 숭배가 트라키아와 모이시아에서 유입되었다.[7] 갈리아 지역의 말의 신 에포나가 다키아에서 확인되었고, 마트로나이도 확인되었다.[7]

다키아인들은 토착 신들을 숭배한 한편,[8] 로마의 만신전에 들어간 다키아의 신에 대한 증거는 없고,[8] 로마의 이름으로 숭배를 받은 다키아 신에 대한 증거도 없다.[9] 다키아인들이 신에 대한 의인관 개념이 부족하였으며,[2] 트라키아-다키아의 종교 및 이들의 미술이 반형상주의가 특징이었다고 추측된다.[10] 부레비스타와 데케발루스의 재위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다키아의 요새들은 성소에 조각상들을 두지 않았었다.[2] 주요 다키아의 성소가 트라야누스의 정복 전쟁 동안 파괴되었고, 다른 장소에 이런 성소를 두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외에 게르미사라같이 지방의 영적 중요성을 띤 숭배 장소들은 존재했었으며, 이 장소들의 경우에는 로마 시대에 들어서도 계속 사용되었지만, 종교 의례는 로마화에 따라 어느 정도 변화하여 지역의 영적 존재들에 대해 로마식 이름을 적용했다.[8]

5. 다키아 트라이아나의 최후의 몇 십년 (235년–271/275년)

230년대에 다키아 속주의 마지막 평화 시기가 끝났다.[10] 로물라에서 발견된 콤모두스와 엘라가발루스(222년 사망) 재위 기간에 발행된 대량의 로마 주화 비축품(약 8,000개)은 3세기 중엽 이전 다키아가 문제를 겪고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진다.[10] 전통적으로 막시미누스 트락스(235년–238년)의 즉위는 로마 제국의 50년간의 무질서 시대의 시작으로 본다.[10] 3세기에 걸쳐 고트족의 지속적인 이주가 있었는데, 이들의 움직임은 이미 마르코만니 전쟁의 원인이었고,[10] 이들의 다뉴브 국경을 향한 남쪽으로 이동은 이 지역에 이미 거주하던 부족들에 압력을 지속했다.[10] 236년과 238년 사이, 막시미누스 트락스는 다키아에서 카르피족을 상대로 군사 활동을 벌였으나,[10] 내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10] 고르디아누스 3세가 마침내 로마 황제로 즉위한 동안에, 제국의 혼란은 카르피족과 동맹이던 고트족이 238년에 히스트리아(시노에)를 차지하고,[10] 다뉴브 삼각주를 따라 형성된 경제적으로 중요성을 띠는 교역 중심지들을 약탈하게끔 하였다.[10]

필리푸스 아라부스 황제(재위: 244년–249년)


이 급습을 군사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던 로마 제국은 고트족에 매년 공물을 바치며 모이시아에서 평화를 돈으로 살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마찬가지로 보상금 지불을 요구하던 카르피족을 분노케 하였다.[10] 필리푸스 아라부스 황제 (244년–249년)는 245년에 이 공물 지급을 멈췄고[10] 카르피족은 다음 해 다키아를 침입하여 그 과정에서 로물라를 공격했다.[10] 카르피족은 243년과 247년 사이에 아마 러카리의 '카스트라'를 불태웠을 것이다.[10] 사료들은 리메스 트란살루타누스 방어선은 카프리족의 다키아 침입에 대한 결과로 필리푸스 아라부스 재위 기간에 버려진 것으로 나타낸다.[10] 계속되던 약탈은 황제로 하여금 로마를 떠나 이 상황을 맡게 하였다.[10] 장래 황제에 오른 갈레리우스의 어머니는 이 무렵 다키아 말벤시스에서 달아나 모이시아 인페리오르에 정착하였다.[10]

247년 말에 카르피족은 야전에서 결정적 패배를 당해 강화를 요청하였고[10] 필리푸스 아라부스는 '카르피쿠스 막시무스'라는 칭호를 얻었다.[10] 이러한 승전에도 불구하고, 다키아의 도시들은 방어 조치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수키다바에서 사람들은 성급하게 석재 방벽을 짓고 방어용 도랑을 팠으며, 이는 246년 또는 247년경 야만 부족들의 침입에 대한 결과로 보인다. 248년, 로물라는 취락 주변으로 다시 방벽을 세웠으며, 이는 카프리족에 맞서기 위한 추가적인 방어 장벽인 것으로 추정된다.[10] 아풀룸에서 발견된 한 금석문은 데키우스 황제 (재위 249년–251년)를 '레스티투토르 다키아룸'(restitutor Daciarum), 즉 다키아의 회복자라고 칭송한다.[10] 251년 7월 1일, 데키우스과 그의 군대는 아브리투스 전투 (오늘날 불가리아 라즈그라드) 중 고트족에 궤멸당하고 말았다.[10] 다뉴브강 하류와 흑해 서부 해안을 따라 있는 영토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고트족은 비로마화 된 다키아인 (고트족의 영향력권 안에 편입)[10]과 다키아 속주에 영향을 미쳤는데, 이에 따라 다키아를 둘러쌌고 다키아 속주의 존재를 지지하던 종속국 체계가 붕괴되기 시작하였다.[10]

갈리에누스 황제 (재위: 260년–268년)


갈리에누스 황제 (260년–268년) 재위 기간 지속적인 압박과 260년 이후 갈리아의 포스투무스와 갈리에누스 간 로마 제국의 서부 지역 분열은 갈리에누스의 관심사가 다뉴브 국경에 주로 쏠려있었음을 의미한다.[10] 카르피족 및 관련된 다뉴브 부족들에 대한 반복적인 승리는 그를 '다키우스 막시무스'라는 칭호를 칭할 수 있게 해주었다.[10] 하지만, 고대의 문헌 자료들 (에우트로피우스,[10] 아우렐리우스 빅토르,[10] 페스투스[10])은 다키아가 그의 재위 시절에 상실되었다고 전한다.[10] 그는 다키아에서 판노니아로 마케도니카 5군단과 게미나 제13군단 등의 상당 전력을 이동시켰다.[10] 울피아 트라이아나 사르미제게투사와 포롤리숨의 마지막 주화들은 그의 조상(彫像)을 담고 있으며,[10] 다키아 속주 내 금석문을 세우는 일은 제국이 일시적으로 붕괴된 해[10]인 260년에 사실상 중단되었다.[10]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재위: 270년–275년)


아우렐리아누스 재위 시기 (270년경) 제국의 복원이 일어나던 기간 주화들이 발행되었고, 이 주화들에는 "DACIA FELIX" ("비옥한/행복한 다키아")라는 글귀가 새겨졌었다.[10] 팔미라 제국 문제를 다뤄야 하는 긴급한 필요성은 아우렐리아누스가 다뉴브 국경의 상황을 해결해야함을 의미하였다.[10] 마지못하여, 그리고 아마 오직 임시 조치로서, 그는 다키아를 포기하기로 결정하였다.[10] 다키아 포기에 대한 전통적인 추정 시기는 271년이며,[10] 또 다른 의견은 아우렐리아누스가 그의 군대와 민간 행정 정부가 272년-273년,[10] 더 늦으면 275년에 철수했을 것으로 본다.[10]

다키아 철수의 결과는 아우렐리아누스가 과거 모이시아 인페리오르에 속하던 지역[10]에, 세르디카를 중심으로 한 다키아 아우렐리아나라는 새로운 다키아 속주를 설치한 것이었다.[10] 로마화된 인구의 일부는 다뉴브강 남쪽의 새로운 속주에 정착하였다.[10] 다키아 리펜시스 그리고 다키아 메디테라니아 속주 등은 몇 십 년 뒤 다키아 아우렐리아나의 행정 개편이 이뤄짐에 따라 북부와 남부에 만들어졌을 것이다.[10]

6. 로마 철수 이후

로마 제국이 다키아 속주에서 철수한 이후, 이 지역은 여러 민족들이 각축을 벌이는 장소가 되었다. 고트족, 훈족, 슬라브족, 아바르족 등 다양한 민족들이 다키아 지역을 거쳐 이동하거나 정착하였다.[11] 로마 제국은 다뉴브 강 북쪽에 교두보를 유지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다키아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하였다.[11]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재위: 284년–305년)는 다뉴브 방어선을 재편성하고, 시르미움(오늘날 세르비아)에서 라티아리아(오늘날 불가리아 아르차르)와 두로스토룸에 이르는 강 건너편에 요새화된 군영들을 구축하였다.[20] 이 군영들은 다뉴브강을 건너는 중요 거점들을 보호하고, 병력들이 강을 도하하도록 해주며, 수상 순찰대들을 위한 관찰 지점 및 거점 역할 기능을 할 목적이었다.[20]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재위: 306년–337년)는 다뉴브 강 북쪽에 로마 속주를 재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20] 328년경, 그는 수키다바에 다뉴브강을 건너는 새로운 교량을 건설하고, 수키다바에서 로물라를 잇는 도로를 보수했다. 또한 그는 다프네 (오늘날 루마니아 스판초브)에 군사 요새를 세웠다. 336년 초, 콘스탄티누스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다뉴브강을 건너 그곳에 정착해 있던 고트족을 격파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다뉴브강 이북에 로마 속주를 새롭게 설치하였다.[20] 그러나 수키다바 교량은 발렌스 황제가 서기 367년에 고트족에 대한 원정을 벌일 기간 다뉴브강을 건너기 위해 이를 사용하면서 본 것이 마지막으로, 40년도 채 지속되지 못했다.[20]

옛 다키아 속주에 대한 마지막 대규모 로마의 공격은 서기 367년에 이뤄졌으며, 발렌스 황제가 고트족에 대한 대규모 원정에 착수하기 위하여 외교 분쟁을 이용하였다.[20]

다키아 지역은 이후 루마니아인의 기원과 관련된 논쟁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다코-로마인의 연속성 이론과 이주 이론이 대립하고 있다.[11] 현대 루마니아는 다키아와 로마의 유산을 계승하여 발전하였다.

7. 주요 도시


  • 울피아 트라이아나 사르미제게투사: 다키아 속주의 수도이자 콜로니아(식민시)였다.
  • 아풀룸: 무니키피움에서 콜로니아로 승격되었다.
  • 드루베타: 무니키피움에서 콜로니아로 승격되었다.
  • 롬라영어: 무니키피움에서 콜로니아로 승격되었다.
  • 나포카: 무니키피움에서 콜로니아로 승격되었다.
  • 포타이사: 무니키피움에서 콜로니아로 승격되었다.
  • 포롤리숨영어: 무니키피움이었다.
  • 올쇼바|label=디에르나영어: 무니키피움이었다.
  • 티비스쿰
  • Zlatna
  • 스키다비아: 무니키피움 또는 콜로니아였다.

참조

[1] 서적 Српска енциклопедија, том 1, књига 2, Београд-Буштрање Matica Srpska, Serbian Academy of Sciences and Arts, Zavod za udžbenike, Novi Sad-Belgrade
[2] 서적 A History of the Laws of War: Volume 2, The Customs and Laws of War with Regards to Civilians in Times of Conflict https://books.google[...] Bloomsbury Publishing
[3] 서적 Delphi Complete Works of Eutropius (Illustrated) https://books.google[...] Bloomsbury Publishing
[4] 학술지 Roman Dacia - The Making of a Provincial Society https://books.google[...]
[5] 문서
[6] 웹사이트 Commerce and the Economy: the First Growth Phase https://mek.oszk.hu/[...]
[7] 웹사이트 Zonal Urbanism Plan for Roșia Montană Industrial Area http://www.truestory[...] PROIECT Alba SA
[8] 서적 Dicționar de istorie veche a României Editura Științifică și Enciclopedică
[9] 학술지 The rise and fall of antimony: Sourcing the "colourless" in Roman glass 2024
[10] 문서
[11] 웹사이트 Toponyms of Roman Origin in Transylvania and South-West Moldavia http://alil.academia[...]
[12] 서적 The Romanians: a history. https://books.google[...] Ohio State University Press
[13] 블로그 Archaeologists may have discovered the capital of Dacia Malvensis in Romania https://romanarch.bl[...]
[14] 서적 A History of Romania https://books.google[...] East European Monographs
[15] 서적 From the Athenian tetradrachm to the euro https://books.google[...] Ashgate Publishing
[16] 서적 A History of the Laws of War: Volume 2, The Customs and Laws of War with Regards to Civilians in Times of Conflict https://books.google[...] Bloomsbury Publishing
[17] 서적 Delphi Complete Works of Eutropius (Illustrated) https://books.google[...] Bloomsbury Publishing
[18] 학술지 Roman Dacia - The Making of a Provincial Society https://books.google[...] Journal of Roman Archaeology
[19] 문서
[20] 웹사이트 Toponyms of Roman Origin in Transylvania and South-West Moldavia http://alil.academia[...]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