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다 우지노리 (175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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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다 우지노리는 1755년 고즈케 국 다테바야시 번 번주의 아들로 태어나, 오가키 번의 번주 도다 우지히데의 양자가 되어 가독을 상속받았다. 소자반, 지샤 부교, 소바요닌을 거쳐 1790년에 로주가 되었으며, 막부 재정 개혁에 기여했다. 러시아의 에조치 진출에 대응하여, 1806년 사망할 때까지 러시아 선박을 온건하게 퇴거시키는 정책을 추진했다. 오가키 번의 재정과 무예를 증강시켜 중흥을 이끌었으며, 52세의 나이로 사망 후 종삼위로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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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다 우지노리 (1756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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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씨명 | 도다 씨 |
이름 | 도다 우지노리 |
시대 | 에도 시대 중기 - 후기 |
출생 | 호레키 5년 12월 8일 (1756년1월 9일) |
사망 | 분카 3년 4월 26일 (1806년6월 11일) |
어릴 적 이름 | 에이노신 |
처음 이름 | 마쓰다이라 모토오키 |
이명 | 마쓰다이라 모토오키 도다 우지노리 |
계명 | (정보 없음) |
묘소 | 기후현오가키시 서외측정의 엔쓰지 |
관위 | 종사위하, 시종, 우네메노카미, 증종삼위 |
막부 | 에도 막부소샤반, 지샤부교, 소바요닌, 노주 |
섬긴 주군 | 도쿠가와 이에하루, 이에나리 |
번 | 미노국오가키번 번주 |
씨족 | 고시 마쓰다이라 가문, 도다 씨 |
부모 | 아버지: 마쓰다이라 다케모토, 어머니: 다네무라 씨 |
양아버지 | 도다 우지히데 |
형제자매 | 마쓰다이라 다케히로, 우지노리 |
배우자 | 정실: 다메코 |
자녀 | 우지쓰네 혼다 스케카타 엔도 다네쓰구 야스노부 다쓰 ( 마쓰다이라 미쓰토시 정실) 딸 (홋타 마사카쓰 정실) 딸 (야나기사와 야스타케 정실) |
번주 정보 | |
전임 | 도다 우지히데 |
후임 | 도다 우지쓰네 |
직책 | 오가키번 번주 (도다 가문) |
임기 | 1768년 ~ 1806년 |
대수 | 7대 |
소바요닌 정보 | |
전임 | 혼다 다다카즈 |
후임 | 공석 (미즈노 다다아키라) |
직책 | 에도 막부 소바요닌 |
임기 | 1790년 |
2. 생애
오가키 번주 도다 우지히데의 양자가 되어 가문을 이었으며, 이후 에도 막부에서 소자반, 지샤 부교, 소바요닌 등 여러 요직을 거쳐 간세이 2년(1790년) 로주의 자리에 올랐다. 교와 3년(1803년)에는 로주 수좌(首席)가 되었다.
로주로서 그는 당시 중요한 외교 현안이었던 러시아 제국과의 관계 설정에 깊이 관여했다. 아담 락스만과 니콜라이 레자노프의 내항 사건 당시 막부의 대응 과정에 참여했으며, 이후 러시아 선박에 대한 유화책인 분카의 무휼령(1806년) 제정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막부에서는 재정 개혁에 힘썼으며, 자신이 번주로 있던 오가키 번에서는 교육 진흥과 치수 사업에 힘쓰고 근검절약을 실천하여 번 재정을 건실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업적으로 '오가키 중흥의 명군주'로 평가받기도 한다. 분카 3년(1806년) 로주 재임 중 사망하였고, 사후 종삼위가 추증되었다.
2. 1. 가독 상속
마쓰다이라 모토키는 오가키 번 6대 번주 도다 우지히데의 양자가 되어 우지노리라 칭했다. 가독 상속에 따라 종4위하 지주 겸 우메노스케에 서임되었다. 이후 소자반, 지샤 부교, 소바요닌을 거쳐 간세이 2년(1790년) 11월 16일에 로주가 되었다.간세이 6년(1794년) 7월에는 소토쿠(総督)로서 조조지에 있는 분쇼인 묘소 수리를 담당했다.
2. 2. 러시아와의 관계
1792년(간세이 4년) 9월 3일, 러시아 제국의 사절 락스만이 표류민 다이코쿠야 고다유를 데리고 에조치(현재의 홋카이도)에 도착하여 통상을 요구했다. 고다유는 표류하여 이르쿠츠크에 도착한 뒤 시베리아 총독에게 귀국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했고,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송되어 여제 예카테리나 2세를 알현한 후 락스만과 동행하게 된 것이었다. 막부는 메츠케 이시카와 타다후사를 파견하여 회담을 진행했다. 이듬해 1793년(간세이 5년) 6월 27일 (음력), 이시카와 타다후사와 무라카미 다이가쿠는 세 번째 회담에서 로주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의 지시에 따라 나가사키로 회항할 것을 요구했다. 러시아 측은 시베리아 총독의 공문서 전달과 조난자 인도를 원했지만, 막부는 조난자 수령에만 응했다. 락스만 일행은 이에 만족하지 못했지만, 일부 목적은 달성했다고 판단하고 귀국길에 올랐다.교와 2년(1802년 2월 23일 (음력)), 막부는 락스만 사절단의 내항 등을 계기로 북방 대국 러시아가 에조치로 진출할 징후가 있다고 판단하여, 에조 부교를 설치하고 에조치를 막부의 직할지로 삼아 러시아의 남하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했다.
1804년(분카 원년) 9월 6일 (음력), 러시아 제국의 사절 레자노프가 히젠국 나가사키에 표류민을 데리고 와 통교를 요구했다. 막부는 메츠케 토야마 카게스스를 나가사키로 보내 의향을 전달하게 했다. 이듬해 분카 2년(1805년 3월 7일 (음력)), 막부는 레자노프에게 일본의 통상 대상국은 청나라, 조선, 류큐 왕국, 네덜란드뿐이며, 무역은 국부 유출과 풍속 문란을 야기하고 통신은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다는 점 등을 설명하며 퇴거를 명령했다. 이러한 대응은 락스만 때보다 엄격했는데, 이는 이전에 실각한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의 정책을 계승했던 마쓰다이라 노부아키마저 파면되면서 막부 내 현상 유지파가 득세한 것과, 교역 독점을 원했던 네덜란드의 공작 등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여겨진다. 레자노프는 표류민과 함께 19일에 퇴거했다.
분카 3년(1806년 1월 26일 (음력)), 막부는 일본 연안에 나타나는 러시아 선박을 온건하게 돌려보내기 위해 분카의 무휼령을 발포했다. 이 영에 따라 막부는 러시아 선박을 발견하면 설득하여 돌려보내고, 필요시 땔감, 물, 식량을 제공하되 절대 상륙시키지 않도록 지시했다. 당시 러시아가 순순히 물러날지는 불확실했으나, 막부의 대외 정책은 해안 방비 강화, 에조치 영토화, 쇄국 유지에 중점을 두었다. 이러한 유화책이 채택된 배경에는 러시아 측이 전달한 문서에 "원래 러시아는 전쟁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구절이 있었고, 러시아의 북방 진출 위협을 지나친 걱정으로 본 우지노리 등 막부 관리들의 의향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2. 3. 만년
교와 3년(1803년) 12월, 노중 수좌(首席)였던 마쓰다이라 노부아키가 사직하자 차석이었던 우지노리가 후임 노중 수좌가 되었다.막부의 주요 인물로서 주로 막부 재정 개혁에 힘쓰는 등 많은 공적을 남겼다. 당시 막부 재정은 대외 문제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낭비 등으로 인해 분카 시대에 들어서면서 경상 수지가 적자로 돌아선 상태였다. 이에 분카 2년(1805년) 6월, 경비 삭감을 위해 다이칸(代官, 지방관) 수를 줄이고, 줄어든 다이칸에게 할당했던 막부 직할령을 다이묘에게 맡기는 조치를 취했다.
또한, 자신이 번주로 있던 오가키 번에서도 교육과 치수(治水) 사업에 힘쓰고 근검절약을 실천하며 스스로 모범을 보였으며, 이를 통해 번의 재정을 건실하게 하고 무예를 증강시켰다. 이러한 업적으로 '오가키 중흥의 명군주'로 칭송받았다. 한편, 가토 시나오에게 그림을 배워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분카 3년(1806년) 4월 26일, 노중으로 재임하던 중에 사망했다. 향년 52세였다. 사후 종삼위의 관위가 추증되었다.
3. 가계
- '''아버지''': 마쓰다이라 다케모토
- '''어머니''': 종촌 씨
- '''양아버지''': 도다 우지히데
- '''정실''': 이에코(家子) - 도다 우지히데의 딸
구분 | 순서 | 이름 | 생몰년 | 비고 |
---|---|---|---|---|
측실 유마이(由舞, 스즈키 씨) | 장남 | 도다 우지요 戸田氏養일본어 | 1783년 ~ 1841년 | |
딸 | 신(慎) | 마쓰다이라 미쓰토시 松平光年일본어의 정실 | ||
측실 모토(基, 이누이 씨) | 딸 | 홋타 마사카츠 堀田正功일본어의 정실 | ||
차남 | 혼다 스케카타 本多助賢일본어 | 1791년 ~ 1858년 | 혼다 스케우케 本多助受일본어의 데릴사위 | |
삼남 | 엔도 다네무네 遠藤胤統일본어 | 1793년 ~ 1870년 | 엔도 다네토미 遠藤胤富일본어의 양자 | |
사남 | 도다 우지야스 戸田氏綏일본어 | 1805년 ~ 1855년 | 도다 우지유 戸田氏猷일본어의 양자 | |
생모 불명 | 딸 | 야나기사와 야스야스의 정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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