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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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로그는 슬라브어 'drugъ'에서 유래된 헝가리의 도시이다.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으며, 로마 제국 시대 군사 도로가 지나갔다. 1845년 석탄 채굴 계약 이후 광산 중심지로 발전하여, 20세기 초에는 부다페스트와 연결되는 주요 교통 요지였다. 전간기에는 급속도로 발전하며 주택 단지, 학교, 병원 등이 건설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사회주의 도시로 변화했다. 1984년 도시가 되었으며, 현재는 여러 공장과 산업 단지가 위치해 있다. 2001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헝가리인이 다수를 차지하며, 로마 가톨릭이 주요 종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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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그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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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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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정보 | |
다른 이름 | Drostdorf (독일어) |
지리 | 부다페스트에서 떨어져 있음 |
행정 | |
국가 | 헝가리 |
주 | 코마롬-에스테르곰 주 |
지역 | 에스테르곰 지구 |
시장 | 야노시 티트만 (무소속) |
면적 | |
총 면적 | 11.54 제곱킬로미터 |
인구 | |
총 인구 (2012년) | 11,996명 |
인구 밀도 | 자동 계산 |
도시 인구 밀도 | 자동 계산 |
수도권 인구 밀도 | 자동 계산 |
기타 정보 | |
우편 번호 | 2510 |
지역 번호 | (+36) 33 |
시간대 | CET |
UTC 오프셋 | +1 |
하계 시간 (DST) | CEST |
UTC 오프셋 (DST) | +2 |
웹사이트 | 도로그 공식 웹사이트 |
2. 어원
이 이름은 슬라브어 ''drugъ''(드루그) - 동료, 동지, "형제"에서 유래되었다.[3][4]
필리스 산맥과 게레체 산맥 사이의 계곡은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곳이다. 아퀴쿰에서 서쪽으로 뻗어 나가는 로마 제국의 군사 도로는 오늘날의 도로그를 지나갔으며, 바닥 난방 시설이 있는 로마 시대 주거지와 배관, 무덤, 이정표 등이 발견되었다. 11세기와 12세기에 헝가리 국왕이 에스테르곰에 거주했을 때, 도로그는 성의 요리사들이 묵는 곳이었다. 중세 시대에는 모든 방향에서 도로가 이곳에서 만났고, 에스테르곰 대성당은 관세를 징수할 권리를 가졌다. 'Durug', 'Drug', 'Durugd' 등의 이름은 1181년에 처음으로 현존하는 문서에 언급되었다.[1]
3. 역사
오스만 제국의 침략으로 파괴된 중세 정착지는 1542년부터 1649년까지 사람이 살지 않았다. 이후 독일인 정착민들이 세 차례에 걸쳐 도착했고, 그 뒤를 이어 헝가리인들이 정착했다. 18세기에 도로그는 다시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부다–비엔나 도로의 우편 숙소에는 언어학자 페렌츠 카진치, 정치가 이슈트반 세체니, 귀족 페렌츠 베셀레니 등이 정기적으로 방문했다. 1767년부터 1775년까지 바로크 양식의 로마 가톨릭 교회 주변에 새로운 집과 거리가 생겨났다.[1]
1845년 에스테르곰 대성당과 광산 관리자 페렌츠 바서버, 요제프 야노스 율케 사이에 도로그 석탄 채굴에 관한 최초의 서면 계약이 체결되었다. 이후 빌모스 지그몬디, 지질학자 믹사 한트켄, 광산 기술자 헨리크 드라셰와 샨도르 슈미트 등 많은 엔지니어들이 도로그 광산 개발에 참여했다.[1] 20세기 초 도로그는 주요 광산 중심지였으며, 헝가리 국영 철도(HÉV)를 통해 부다페스트와 다뉴브강으로 연결되었다. 1906년 도로그 발전소가 건설되었고(1980년대에 120m 높이의 굴뚝으로 재건축됨), 1900년 당시 도로그 주민은 1,966명이었다(1,369명 독일인, 477명 헝가리인, 55명 슬로바키아인).[1]
전간기에 부다페스트의 공장과 인구 증가로 석탄 수요가 늘면서 도로그는 급속도로 발전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이민 온 광부들을 위한 주택 단지, 노동자 숙소, 가톨릭 교회, 개혁 교회, 학교, 유치원, 병원, 광산 관리자 클럽 및 주택, 시청, 제1차 세계 대전 기념비, 휴양지 등이 건설되었으며, 이들 대부분은 엔지니어 졸탄 가티가 설계했다.[1]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도로그 출신 약 300명이 사망했고, 전쟁 후 많은 독일인들이 추방되었다.[1] 사회주의 시대 동안 도로그는 조립식 아파트 블록이 있는 전형적인 사회주의 도시가 되었다. 광산이 점차 폐쇄되면서 정부는 게데온 리히터, 헝가르톤 음반 공장, 기계 공장 등 여러 공장을 설립했다.[1] 도로그는 1984년에 도시 지위를 얻었고, 1999년에는 산업 단지가 설립되었다.[1]
3. 1. 선사 시대 및 고대
필리스 산맥과 게레체 산맥 사이의 계곡은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 아퀴쿰에서 서쪽으로 뻗어 나가는 로마 제국의 군사 도로는 오늘날의 도로그를 지나갔는데, 여기에서 바닥 난방 시설이 있는 로마 시대 주거지와 배관, 무덤, 이정표가 발견되었다. 11세기와 12세기에 헝가리 국왕이 에스테르곰에 거주했을 때, 도로그는 성의 요리사들이 묵는 곳이었다. 중세 시대에는 모든 방향에서 도로가 이곳에서 만났고, 에스테르곰 대성당은 관세를 징수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Durug', 'Drug' 및 'Durugd' 형태로 나타나는 이 이름은 1181년에 처음으로 현존하는 문서에 언급되었다.
3. 2. 중세
필리스 산맥과 게레체 산맥 사이의 계곡은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 아퀴쿰에서 서쪽으로 뻗어 나가는 로마 제국의 군사 도로는 오늘날의 도로그를 지나갔는데, 여기에서 바닥 난방 시설이 있는 로마 시대 주거지와 배관, 무덤, 이정표가 발견되었다. 11세기와 12세기에 헝가리 국왕이 에스테르곰에 거주했을 때, 도로그는 성의 요리사들이 묵는 곳이었다. 중세 시대에는 모든 방향에서 도로가 이곳에서 만났고, 에스테르곰 대성당은 관세를 징수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Durug', 'Drug' 및 'Durugd' 형태로 나타나는 이 이름은 1181년에 처음으로 현존하는 문서에 언급되었다.[1]
오스만 제국의 침략으로 파괴된 중세 정착지는 1542년부터 1649년까지 사람이 살지 않았다.[1]
3. 3. 오스만 제국 시대
오스만 제국의 침략으로 파괴된 중세 정착지는 1542년부터 1649년까지 사람이 살지 않았다. 그 후 독일인 정착민들이 세 차례에 걸쳐 도착했고, 그 뒤를 다시 헝가리인들이 따랐다. 18세기에 도로그는 다시 통신의 중심지가 되었다. 부다–비엔나 도로의 우편 숙소에 정기적으로 방문했던 19세기 인물로는 언어학자 페렌츠 카진치, 정치가 이슈트반 세체니, 그리고 부호 페렌츠 베셀레니가 있었다. 1767년부터 1775년까지 건설된 바로크 양식의 로마 가톨릭 교회 주변에 새로운 집과 거리가 생겨났다.[1]
3. 4. 근세
필리스 산맥과 게레체 산맥 사이의 계곡은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 아퀴쿰에서 서쪽으로 뻗어 나가는 로마 제국의 군사 도로는 오늘날의 도로그를 지나갔는데, 여기에서 바닥 난방 시설이 있는 로마 시대 주거지와 배관, 무덤, 이정표가 발견되었다. 11세기와 12세기에 헝가리 국왕이 에스테르곰에 거주했을 때, 도로그는 성의 요리사들이 묵는 곳이었다. 중세 시대에는 모든 방향에서 도로가 이곳에서 만났고, 에스테르곰 대성당은 관세를 징수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Durug', 'Drug' 및 'Durugd' 형태로 나타나는 이 이름은 1181년에 처음으로 현존하는 문서에 언급되었다.[1]
오스만 제국의 침략으로 파괴된 중세 정착지는 1542년부터 1649년까지 사람이 살지 않았다. 그 후 독일인 정착민들이 세 차례에 걸쳐 도착했고, 그 뒤를 다시 헝가리인들이 따랐다. 18세기에 도로그는 다시 통신의 중심지가 되었다. 부다–비엔나 도로의 우편 숙소에 정기적으로 방문했던 19세기 인물로는 언어학자 페렌츠 카진치, 정치가 이슈트반 세체니, 그리고 거부 페렌츠 베셀레니가 있었다. 1767년부터 1775년까지 건설된 바로크 양식의 로마 가톨릭 교회 주변에 새로운 집과 거리가 생겨났다.[1]
3. 5. 근대
필리스 산맥과 게레체 산맥 사이의 계곡은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 아퀴쿰에서 서쪽으로 뻗어 나가는 로마 제국의 군사 도로는 오늘날의 도로그를 지나갔는데, 여기에서 바닥 난방 시설이 있는 로마 시대 주거지와 배관, 무덤, 이정표가 발견되었다. 11세기와 12세기에 헝가리 국왕이 에스테르곰에 거주했을 때, 도로그는 성의 요리사들이 묵는 곳이었다. 중세 시대에는 모든 방향에서 도로가 이곳에서 만났고, 에스테르곰 대성당은 관세를 징수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Durug', 'Drug' 및 'Durugd' 형태로 나타나는 이 이름은 1181년에 처음으로 현존하는 문서에 언급되었다.[1]
오스만 제국의 침략으로 파괴된 중세 정착지는 1542년부터 1649년까지 사람이 살지 않았다. 그 후 독일인 정착민들이 세 차례에 걸쳐 도착했고, 그 뒤를 다시 헝가리인들이 따랐다. 18세기에 도로그는 다시 통신의 중심지가 되었다. 부다–비엔나 도로의 우편 숙소에 정기적으로 방문했던 19세기 인물로는 언어학자 페렌츠 카진치, 정치가 이슈트반 세체니, 그리고 거부 페렌츠 베셀레니가 있었다. 1767년부터 1775년까지 건설된 바로크 양식의 로마 가톨릭 교회 주변에 새로운 집과 거리가 생겨났다.[1]
도로그에서 석탄 채굴에 관한 최초의 서면 계약은 1845년에 에스테르곰 대성당과 광산 관리자 페렌츠 바서버와 요제프 야노스 율케 사이에 체결되었다. 그 후 빌모스 지그몬디, 지질학자 믹사 한트켄, 광산 기술자 헨리크 드라셰와 샨도르 슈미트 등 많은 훌륭한 엔지니어들이 도로그 광산 개발에 참여하여 더 풍부한 광맥을 개발하고 채굴을 지휘했다. 20세기 초 도로그는 주요 광산 중심지였으며, 헝가리 국영 철도(HÉV로 시작)로 부다페스트와 다뉴브강과 운하로 연결되었다. 1906년 도로그의 발전소가 건설되었으며(1980년대에 120m 높이의 굴뚝으로 재건축됨). 1900년 도로그에는 1,966명의 주민이 있었다(1,369명 독일인, 477명 헝가리인, 55명 슬로바키아인).[1]
전간기에 부다페스트의 공장과 인구는 점점 더 많은 석탄을 필요로 했고, 도로그는 급속도로 발전했다. 이민 온 광부들을 위한 여러 주택 단지가 1920년대와 1930년대에 건설되었다. 또한 대규모 노동자 숙소, 새로운 가톨릭 교회, 트란실바니아 스타일의 개혁 교회(트리아농 조약 이후 그곳으로 이주한 트란실바니아 광부에 의해 건설됨), 두 개의 새로운 학교, 유치원, 현대식 병원, 광산 관리자 클럽, 광산 관리자 주택, 시청, 제1차 세계 대전 기념비 및 휴양지가 건설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엔지니어 졸탄 가티가 설계했다.[1]
3. 6. 현대
18세기 도로그는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언어학자 페렌츠 카진치, 정치가 이슈트반 세체니, 귀족 페렌츠 베셀레니 등이 부다-비엔나 도로의 우편 숙소를 정기적으로 방문했다. 1767년부터 1775년까지 바로크 양식의 로마 가톨릭 교회 주변에 새로운 집과 거리가 생겨났다.[1]
1845년 에스테르곰 대성당과 광산 관리자 페렌츠 바서버, 요제프 야노스 율케 사이에 도로그 석탄 채굴에 관한 최초의 서면 계약이 체결되었다. 이후 빌모스 지그몬디, 지질학자 믹사 한트켄, 광산 기술자 헨리크 드라셰와 샨도르 슈미트 등 많은 엔지니어들이 도로그 광산 개발에 참여했다.[1] 20세기 초 도로그는 주요 광산 중심지였으며, 헝가리 국영 철도(HÉV)로 부다페스트와 다뉴브강에 연결되었다. 1906년 도로그 발전소가 건설되었고(1980년대에 120m 높이의 굴뚝으로 재건축됨), 1900년 도로그 주민은 1,966명이었다(1,369명 독일인, 477명 헝가리인, 55명 슬로바키아인).[1]
전간기에 부다페스트의 공장과 인구 증가로 석탄 수요가 늘면서 도로그는 급속도로 발전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이민 온 광부들을 위한 주택 단지, 노동자 숙소, 가톨릭 교회, 개혁 교회, 학교, 유치원, 병원, 광산 관리자 클럽 및 주택, 시청, 제1차 세계 대전 기념비, 휴양지 등이 건설되었으며, 대부분 엔지니어 졸탄 가티가 설계했다.[1]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도로그 출신 약 300명이 사망했고, 전쟁 후 많은 독일인들이 추방되었다.[1] 사회주의 시대 동안 도로그는 조립식 아파트 블록이 있는 전형적인 사회주의 도시가 되었다. 광산이 점차 폐쇄되면서 정부는 게데온 리히터, 헝가르톤 음반 공장, 기계 공장 등 여러 공장을 설립했다.[1] 도로그는 1984년에 도시가 되었고, 1999년에는 산업 단지가 설립되었다.[1]
3. 6. 1.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필리스 산맥과 게레체 산맥 사이의 계곡은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 1767년부터 1775년까지 건설된 바로크 양식의 로마 가톨릭 교회 주변에 새로운 집과 거리가 생겨났다.
1845년에 에스테르곰 대성당과 광산 관리자 페렌츠 바서버와 요제프 야노스 율케 사이에 도로그에서 석탄 채굴에 관한 최초의 서면 계약이 체결되었다. 그 후 빌모스 지그몬디, 지질학자 믹사 한트켄, 광산 기술자 헨리크 드라셰와 샨도르 슈미트 등 많은 훌륭한 엔지니어들이 도로그 광산 개발에 참여하여 더 풍부한 광맥을 개발하고 채굴을 지휘했다. 20세기 초 도로그는 주요 광산 중심지였으며, 헝가리 국영 철도(HÉV로 시작)로 부다페스트와 다뉴브강과 운하로 연결되었다. 1906년 도로그의 발전소가 건설되었으며(1980년대에 120m 높이의 굴뚝으로 재건축됨) 1900년 도로그에는 1,966명의 주민이 있었다(1,369명 독일인, 477명 헝가리인, 55명 슬로바키아인).[1]
전간기에 부다페스트의 공장과 인구는 점점 더 많은 석탄을 필요로 했고, 도로그는 급속도로 발전했다. 이민 온 광부들을 위한 여러 주택 단지가 1920년대와 1930년대에 건설되었다. 또한 대규모 노동자 숙소, 새로운 가톨릭 교회, 트란실바니아 스타일의 개혁 교회(트리아농 조약 이후 그곳으로 이주한 트란실바니아 광부에 의해 건설됨), 두 개의 새로운 학교, 유치원, 현대식 병원, 광산 관리자 클럽, 광산 관리자 주택, 시청, 제1차 세계 대전 기념비 및 휴양지가 건설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엔지니어 졸탄 가티가 설계했다.[1]
3. 6. 2. 제2차 세계 대전과 사회주의 시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도로그 출신 약 300명이 사망했다.[1] 전쟁 후, 많은 독일인들이 추방되었다.[1] 사회주의 시대 동안 도로그는 조립식 아파트 블록이 있는 전형적인 사회주의 도시가 되었다.[1] 광산이 점차 폐쇄되면서 정부는 게데온 리히터, 헝가르톤 음반 공장, 기계 공장 등 여러 공장을 설립했다.[1] 1984년 도로그는 도시가 되었고,[1] 1999년에는 산업 단지가 설립되었다.[1]
3. 6. 3. 민주화 이후
헝가리의 민주화 이후, 도로그는 사회주의 시대에 건설된 조립식 아파트 블록이 있는 전형적인 사회주의 도시에서 변화를 맞이했다. 광산이 점차 폐쇄되면서 정부는 게데온 리히터, 헝가르톤 음반 공장, 기계 공장 등 여러 공장을 설립했다. 도로그는 1984년에 도시 지위를 획득했으며, 1999년에는 산업 단지가 설립되었다.[1]
4. 인구
2001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도로그는 헝가리인이 95.3%로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독일인이 4.2%, 기타 민족이 0.5%를 차지하고 있다. 종교는 로마 가톨릭이 57.4%로 가장 많고, 칼뱅주의 (8.9%), 루터교 (0.8%), 기타 기독교 (2%) 순이며, 무신론은 19.1%, 무응답 또는 미상은 11.8%이다.
4. 1. 인구 변화
연도 | 인구 |
---|---|
1850 | 540 |
1857 | 837 |
1870 | 1,161 |
1880 | 1,163 |
1890 | 1,363 |
1900 | 1,966 |
1910 | 1,949 |
1920 | 3,943 |
1930 | 5,863 |
1941 | 8,182 |
1949 | 8,855 |
1960 | 9,994 |
1970 | 10,744 |
1980 | 11,844 |
1990 | 12,798 |
2001 | 12,609 |
2011 | 12,199 |
2001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도로그의 민족 및 종교 구성은 다음과 같다.
'''민족 구성'''
- 헝가리인 — 95.3%
- 독일인 — 4.2%
- 기타 — 0.5%
'''종교 구성'''
4. 2. 민족 구성
4. 3. 종교 분포
5. 경제
도로그에는 다음과 같은 여러 공장이 있다.
- 파나소닉(Panasonic) (태양 전지 제조) (폐쇄)
- 게데온 리히터(Gedeon Richter Plc.) (의약품)
- 노보프린트사 (인쇄 복합 단지)
- 도로그-에스테르곰 열병합 발전소사 (발전소)
6. 교통
도로 10번, 111번, 117번과 부다페스트-에스테르곰 교외 철도 노선(지멘스 데지레 열차)이 이 도시를 통과한다.[1] 2006년에 주요 도로가 재건되었다.[1] 통근 버스 800번(볼보 7700A 버스)은 도시와 아르파드 히드 지하철역을 연결하며, 평일에는 20분 또는 30분 간격으로 운행된다.[1]
7. 주요 인물
이름 | 설명 |
---|---|
부잔스키 제뇌 | 축구 선수 |
그로시치 줄러 (1926-2014) | 축구 선수 |
코즈마 임레 (1940-) | 로마 가톨릭 사제, 몰타 기사단 헝가리 자선 봉사 단체 설립자, 1988-89년 헝가리에 도착한 동독 난민 후원자 |
하르기타이 난도르 (1919-2006) | 축구 선수 |
바차 페테르 (1970-) | 레슬러 |
메게리 마르타 (1952-) | 핸드볼 선수 |
서치 러요시 (1943-) | 축구 선수 |
서보 요제프 (1956-) | 축구 선수 |
8. 자매 도시
도로그는 다음과 같은 도시들과 자매 결연을 맺고 있다.[5]
국가 | 도시 |
---|---|
루마니아 | 펠리체니 |
독일 | 마리엔베르크 |
독일 | 벤들링겐 |
슬로바키아 | 지라니 |
북마케도니아 | 테토보 |
참조
[1]
웹사이트
Dorog
http://www.ksh.hu/ap[...]
[2]
웹사이트
Dorog
http://www.ksh.hu/ap[...]
2012
[3]
서적
Osídlenie košickej kotliny III
Slovenská akadémia vied
[4]
서적
Földrajzi nevek etimológiai szótára
Akadémiai
[5]
웹사이트
Külkapcsolatok
https://www.dorog.hu[...]
Dorog
2021-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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