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프로이센 대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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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프로이센 대관구는 나치당의 행정 구역으로, 1926년 나치당 회의에서 지역당 조직 개편을 위해 창설되었다. 1933년 나치가 권력을 잡은 후 독일의 주 단위 행정 구역을 대체했으며, 대관구지휘자는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초대 가울라이터는 빌헬름 슈티히였으며, 에리히 코흐는 1928년부터 나치 정권 말기까지 대관구지휘자를 역임했다. 대관구 본부는 쾨니히스베르크에 위치했으며, 라두시킨에는 대관구 지도자 학교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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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프로이센 대관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개요 | |
![]() | |
공식 명칭 | 가우 오스트프로이센 |
유형 | 나치 독일의 행정 구역 |
수도 | 쾨니히스베르크 |
존속 기간 | 1925년 12월 6일 ~ 1945년 8월 1일 |
정치 | |
가우leiter (대관구지휘자) | 1925년–1926년: 빌헬름 스티히 1926년–1927년: 브루노 구스타프 셰르비츠 1927년–1928년: 한스 알베르트 혼펠트 (대행) 1928년–1945년: 에리히 코흐 |
역사 | |
시작 | 설립 (1925년 12월 6일) |
종료 | 해체 (1945년 8월 1일) |
이전 국가 | 프로이센 자유주 클라이페다 지역 바르샤바 주 비아위스토크 주 |
이후 국가 | 단치히-서프로이센 국가대관구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폴란드 인민 공화국 |
통계 | |
면적 (1941년 기준) | 48,867 km2 |
인구 (1939년 인구 조사) | 2,119,879명 |
현재 위치 |
2. 역사
나치당은 1926년 지역 당 조직 구조를 개편하며 대관구(Gau) 시스템을 도입했으며, 1933년 권력 장악 이후 이는 기존의 주(州) 행정 구역을 점차 대체하게 되었다.[9][3] 각 대관구를 이끄는 대관구지휘자(Gauleiter)는 막강한 권력을 누렸으며,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중앙 정부의 간섭 없이 지역 통치, 선전, 감시, 그리고 1944년 9월 이후에는 국민돌격대 조직과 방어 임무까지 총괄했다.[9][10][3][4]
동프로이센 대관구는 1926년 2월 1일 Bruno Gustav Scherwitz|브루노 구스타프 쉘비츠de 아래 처음 조직되었으며, 초기에는 빌헬름 슈티히(1925-1926), 쉘비츠(1926-1927), 한스 알베르트 혼펠트(1927-1928, 대행) 등이 짧게 지도자를 맡았다.[5][6][7] 1928년 10월 1일부터는 에리히 코흐가 임명되어 1945년 나치 독일이 패망할 때까지 대관구지휘자 자리를 지켰다.[11][12][5][6][7]
코흐는 1933년 프로이센 주 정부 수반 지위를 겸임하며 권력을 공고히 했고, 아돌프 히틀러에게 실업 문제 해결을 가장 먼저 보고한 인물로 알려졌다. 같은 해 설립된 "에리히 코흐 재단"은 공익 사업을 내세웠으나 코흐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이용되었다는 비판이 있다. 그는 나치의 강제적 동일화(Gleichschaltung)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며 당의 행정 장악력을 높였고, 정치적 반대파와 교회 등 저항 세력을 탄압했다. 이러한 통치 아래 동프로이센은 한때 "나치즘의 이상적 구역"으로 선전되기도 했다. 그러나 1935년 코흐의 부패와 권력 남용에 대한 내부 고발(특히 에리히 폰 뎀 바흐-젤레우스키 주도)로 인해 잠시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었으나, 히틀러의 개입으로 곧 복권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코흐의 역할은 더욱 커졌다. 1939년 폴란드 침공 이후 제1군관구의 전국 방위 위원으로 임명되었고, 1941년 독소전 개전 후에는 점령지인 비아위스토크 지역 행정 장관과 우크라이나 국가판무관을 겸임하며 점령지 통치와 강제 노동자 징발에 깊이 관여했다. 전쟁 말기인 1944년 11월부터는 동프로이센 지역의 국민돌격대 소집을 책임지며 지역 방어를 지휘했다.
2. 1. 나치당의 대관구 조직
나치당은 지역당 조직 구조 개선을 목적으로 1926년 5월 22일 대관구(Gau) 조직을 처음 창설했다. 1933년 나치가 독일의 권력을 장악한 이후, 대관구는 기존의 주(州) 단위 행정구역을 점차 대체해 나갔다.[9][3] 각 대관구를 지휘하는 대관구지휘자(Gauleiter)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에는 중앙 정부의 간섭을 거의 받지 않았다.[9][3] 지역 대관구지휘자는 당의 행정 업무뿐만 아니라 정부 직책도 겸임하며 선전 활동, 주민 감시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고, 1944년 9월 이후에는 국민돌격대 소집과 해당 대관구의 방어 임무까지 맡게 되었다.[9][10][3][4]동프로이센 대관구는 1926년 2월 1일 브루노 구스타프 셰르비츠 아래 처음 조직되었다. 역대 대관구지휘자는 다음과 같다.
임기 | 이름 | 비고 |
---|---|---|
1925년 ~ 1926년 | 빌헬름 슈티히 | [5][6][7] |
1926년 ~ 1927년 | 브루노 구스타프 셰르비츠 | [5][6][7] |
1927년 ~ 1928년 | 한스 알베르트 혼펠트 | 대행[5][6][7] |
1928년 10월 1일 ~ 1945년 | 에리히 코흐 | [11][12][5][6][7] |
에리히 코흐는 1928년부터 1945년 나치 정권이 종말을 맞을 때까지 동프로이센 대관구를 이끌었다.[11][12] 그의 초기 부관구지휘자는 게오르크 하이드리히였으나, 1931년 부패 혐의로 포메라니아로 좌천되었다. 1933년 나치가 권력을 장악한 후, 코흐는 프로이센 주 총리 헤르만 괴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른 많은 대관구지휘자들처럼 프로이센 주 정부 수반 지위를 겸하게 되었다.
코흐는 아돌프 히틀러에게 노동자 실업 문제 해결을 가장 먼저 보고한 대관구지휘자로 알려졌으며, 1933년에는 '에리히 코흐 재단'을 설립하여 여러 사업 자금을 모았다. 그러나 이 재단은 코흐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주로 이용되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는 나치즘의 강제적 동일화(Gleichschaltung)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여 당이 행정을 완전히 장악하도록 했으며, 정치적 반대 세력이나 교회와 같은 저항 가능성이 있는 집단에 대한 탄압을 시행했다. 이러한 통제와 선전으로 동프로이센 대관구는 한때 '나치즘의 이상적 구역'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1935년, 코흐와 그의 측근들 사이에서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당시 쾨니히스베르크의 SS 및 게슈타포 책임자였던 에리히 폰 뎀 바흐-젤레우스키는 코흐의 부패와 비리 혐의에 대한 수백 건의 증거와 증언을 수집하여 당국에 보고했다. 이로 인해 코흐는 1935년 11월 26일 베를린으로 소환되어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었으나, 불과 한 달도 지나지 않은 12월 22일 히틀러의 결정으로 복권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1939년, 코흐는 동프로이센 지역을 담당하는 제1군관구의 전국 방위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폴란드 침공 이후 점령된 서프로이센 일부 지역이 동프로이센에 편입되었고, 1939년 10월 26일 새로운 제국 대관구가 설치되었다(11월부터 단치히-서프로이센 제국 대관구로 명칭 변경). 1941년 독소전이 발발하자 코흐는 인접 점령지인 비아위스토크 지역의 민정청장(Chef der Zivilverwaltungde)이 되었고, 같은 해 8월에는 우크라이나의 국가판무관(Reichskommissar)으로 임명되어 점령지 통치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코흐는 점령지에서 강제 노동자를 징발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1944년 11월 25일부터는 동프로이센 지역의 국민돌격대 소집을 책임졌다.
쾨니히스베르크 행정관구의 장(Regierungspräsidentde)은 1936년부터 1941년까지 전 총통 개인 고문이었던 Paul Hoffmann|파울 호프만de이 맡았으며, 동프로이센 주의 주지사(Oberpräsidentde)는 1928년부터 1940년까지 변호사 Paul Blunk|파울 블룬크de가 역임했다.
2. 2. 독일의 행정 구역 대체
나치의 대관구(Gau) 조직은 본래 1926년 5월 22일 나치당 회의에서 지역당 조직 구조 개선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9][3] 이후 1933년 나치의 권력 장악 이후, 대관구는 점차 독일의 기존 주 단위 행정 구역을 대체하게 되었다.[9][3]각 대관구를 지휘하는 대관구지휘자(Gauleiter)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강력한 권력을 갖게 되었으며,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에는 외부로부터 거의 간섭을 받지 않았다.[9][3][10][4] 지역 대관구지휘자는 정당 행정뿐만 아니라 정부 직책도 겸임하며 선전 활동과 감시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1944년 9월부터는 국민돌격대 소집과 해당 대관구의 방어 작전까지 책임졌다.[9][10][4]
동프로이센 대관구의 대관구지휘자는 1928년 10월 1일부터 나치 정권이 끝날 때까지 에리히 코흐가 역임했다.[11][12][5][6][7]
2. 3. 대관구지휘자의 권력 강화
나치당의 대관구(Gau) 조직은 본래 1926년 5월 22일 당 회의에서 지역 조직 구조 개선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그러나 1933년 나치가 독일의 권력을 장악하면서, 기존의 주(州) 단위 행정구역은 점차 당의 대관구로 대체되었다.[9][3]각 대관구를 이끄는 대관구지휘자(Gauleiter)의 권력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강화되어,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에는 중앙 정부의 간섭을 거의 받지 않는 수준에 이르렀다. 지역 대관구지휘자는 당 관련 행정뿐만 아니라 정부의 직책까지 겸임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선전 활동과 지역 주민 감시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1944년 9월 이후에는 국민돌격대를 소집하고 각 대관구의 방어를 책임지는 역할까지 맡게 되었다.[9][10][3][4]
동프로이센 대관구의 경우, 1928년 10월 1일부터 1945년 나치 정권이 끝날 때까지 에리히 코흐가 대관구지휘자 자리를 지켰다.[11][12][5][6][7] 코흐 이전에는 빌헬름 슈티히(1925-1926), 브루노 구스타프 셰르비츠(1926-1927), 한스 알베르트 혼펠트(1927-1928, 대행) 등이 짧은 기간 동안 대관구지휘자를 역임했다.[5][6]
1933년 여름, 나치의 권력 장악 이후 코흐는 프로이센 주 총리였던 헤르만 괴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른 많은 대관구지휘자들처럼 프로이센 주 정부 수반의 지위를 겸임하며 권력을 더욱 공고히 했다. 코흐는 아돌프 히틀러에게 자신의 대관구에서 실업 문제를 가장 먼저 해결했다고 보고했으며, 1933년에는 "에리히 코흐 재단"을 설립하여 여러 사업 자금을 모금했으나, 이는 코흐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주로 이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코흐는 나치의 강제적 동일화(Gleichschaltung)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여 당이 행정을 완전히 장악하도록 했고, 정치적 반대 세력이나 교회 등 저항 가능성이 있는 집단에 대한 탄압을 시행했다. 이러한 통치 아래 동프로이센 대관구는 종종 "나치즘의 이상적 구역"으로 선전되었다.
그러나 코흐의 권력 강화 과정에서 내부 갈등도 발생했다. 1935년 코흐와 그의 측근들 사이에서 권력 투쟁이 벌어졌으며, 당시 쾨니히스베르크의 SS 및 게슈타포 책임자였던 에리히 폰 뎀 바흐-젤레우스키는 코흐의 부패와 비리 혐의에 대한 수백 건의 증거를 수집하여 당국에 보고했다. 이로 인해 코흐는 1935년 11월 26일 베를린으로 소환되어 모든 직책에서 해임되었으나, 불과 한 달도 지나지 않은 12월 22일 히틀러의 결정으로 복권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코흐의 역할은 더욱 확대되었다. 1939년 폴란드 침공 이후 동프로이센에 주둔한 제Ⅰ군관구의 전국 방위 위원으로 임명되었으며, 1941년 독소전쟁이 시작되자 인접한 점령지인 비아위스토크 지역의 행정 장관과 우크라이나 국가 판무관으로 임명되어 점령지 통치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코흐는 점령지 주민들을 강제 노동자로 징용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1944년 11월 25일부터는 국민돌격대를 소집하여 동프로이센 방어 임무를 총괄했다.
2. 4. 동프로이센 대관구의 지도자
각 대관구를 지휘하는 대관구지휘자(Gauleiter)는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외부의 간섭 없이 점점 더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다. 지역 대관구지휘자는 정당 행정 뿐 아니라 정부 직책에도 관여하여 선전 감시 등 다양한 작전을 수행했으며, 1944년 9월 이후에는 국민돌격대 소집과 각 대관구 방어작전 역할도 맡았다.[9][10][3][4]동프로이센 대관구의 역대 지도자는 다음과 같다.
이름 | 임기 |
---|---|
빌헬름 슈티히 | 1925년 ~ 1926년 |
브루노 구스타프 셰르비츠 | 1926년 ~ 1927년 |
한스 알베르트 혼펠트 (대행) | 1927년 ~ 1928년 |
에리히 코흐 | 1928년 10월 1일 ~ 1945년 5월 |
[5][6][7]
에리히 코흐는 1928년부터 나치 독일이 패망한 1945년까지 동프로이센 대관구 지도자 자리를 유지했다.[11][12][5] 초기 부대관구 지도자는 게오르크 하이드리히였으나, 1931년 부패 혐의로 포메라니아로 좌천되었다.
나치당이 권력을 장악한 후인 1933년 여름, 코흐는 프로이센 자유주 총리 헤르만 괴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른 많은 대관구 지도자들처럼 대관구 지도자 지위와 함께 프로이센 주 정부 수반의 지위를 겸임하게 되었다. 코흐는 아돌프 히틀러에게 실업 문제 해결을 가장 먼저 보고한 대관구 지도자였으며, 1933년 설립된 "에리히 코흐 재단"은 표면적으로는 공익 사업 자금 마련을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코흐 개인의 재산 증식에 이용되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코흐는 나치즘의 강제적 동일화(Gleichschaltung) 정책을 통해 당이 행정을 장악하도록 했으며, 정치적 반대 세력이나 교회 등 저항 세력을 탄압했다. 이로 인해 동프로이센 대관구는 "나치즘의 이상적 구역"으로 선전되기도 했다.
그러나 1935년, 코흐와 그의 측근들 사이에서 권력 투쟁이 발생했다. 당시 쾨니히스베르크의 SS 및 게슈타포 책임자였던 에리히 폰 뎀 바흐-젤레우스키는 코흐의 부패와 비리 혐의에 대한 수백 건의 증거를 수집하여 당국에 보고했다. 이로 인해 코흐는 1935년 11월 26일 베를린으로 소환되어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었으나, 불과 한 달도 지나지 않은 12월 22일 히틀러에 의해 복권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1939년 코흐는 동프로이센을 관할하는 제1군관구의 전국 방위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폴란드 침공 이후 점령한 서프로이센 지역 일부가 동프로이센에 합병되었다. 1941년 독소전쟁이 시작되자 코흐는 인접한 점령지 비아위스토크 지역의 민정 장관이 되었고, 같은 해 8월에는 우크라이나 국가판무관으로 임명되어 혹독한 통치를 시행했다. 전쟁 기간 동안 코흐는 점령지에서의 강제 노동자 징용에도 깊이 관여했다. 전황이 악화되자 1944년 11월 25일부터는 국민돌격대 소집을 명령하며 동프로이센 방어 책임을 맡았다.
2. 5. 에리히 코흐의 부패와 권력 투쟁
동프로이센 대관구의 대관구지휘자는 창설부터 해체까지 에리히 코흐가 맡았다.[11][12] 코흐는 1928년부터 1945년 종전까지 이 지역의 대관구 지도자였다. 그의 재임 초기인 1931년에는 부대관구 지도자였던 게오르크 하이드리히가 부패 혐의로 포메라니아로 강제 이송되기도 했다.나치당이 권력을 장악한 후 1933년 여름, 코흐는 프로이센 주 총리 헤르만 괴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른 많은 대관구 지도자들처럼 대관구 지도자 지위와 함께 프로이센 주 정부 수반의 지위를 차지하며 권력을 강화했다. 코흐는 노동자 실업 문제를 해결했다고 아돌프 히틀러에게 가장 먼저 보고한 대관구 지도자였는데, 같은 해인 1933년 설립된 "에리히 코흐 재단"은 표면적으로는 여러 사업 자금 마련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코흐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코흐는 또한 나치즘의 강제적 동일화 정책을 통해 당이 행정을 완전히 장악하도록 만들었으며, 정치적 반대 세력이나 교회와 같은 잠재적 저항 세력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이러한 통치 방식으로 인해 동프로이센 대관구는 한때 "나치즘의 이상적 구역"으로 선전되기도 했다.
그러나 1935년 코흐의 권력 독점과 부패에 대한 내부 반발로 권력 투쟁이 발생했다. 특히 쾨니히스베르크의 SS 및 게슈타포 책임자였던 에리히 폰 뎀 바흐-젤레우스키는 코흐의 부패와 비리 혐의에 대한 수백 건의 증거와 증언을 수집하여 당 중앙에 보고했다. 이 보고의 결과로 코흐는 1935년 11월 26일 베를린으로 소환되어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었다. 하지만 불과 한 달도 지나지 않은 12월 22일, 아돌프 히틀러는 개인적인 결정으로 코흐를 다시 복권시켰다.
2. 6. 제2차 세계 대전과 역할
제2차 세계 대전 중 대관구지휘자는 선전 감시 등 다양한 작전을 수행했으며, 1944년 9월 이후에는 국민돌격대 소집과 각 대관구 방어작전 역할도 맡았다.[9][10]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에리히 코흐는 동프로이센을 포함하는 제Ⅰ군관구의 전국 방위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폴란드 침공 후 서프로이센 지역은 1939년 10월 26일에 제국 대관구가 설치되었다. 1941년 독소전이 시작되자 코흐는 인접한 점령지인 비아위스토크 지역의 행정 장관이 되었으며, 같은 해 8월에는 우크라이나의 국가판무관으로 임명되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코흐는 강제 노동자 징용 임무를 받았다. 1944년 11월 25일부터 동프로이센에서도 국민돌격대가 소집되었다.
3. 조직
나치당은 당 조직의 행정 효율을 개선하기 위해 1926년 5월 22일 당 회의에서 가우(Gau, 복수형 Gaue) 시스템을 처음 도입했다. 1933년 나치의 권력 장악 이후, 가우는 기존의 독일 주(州)를 점차 대체하며 독일의 실질적인 행정 구역으로 기능하게 되었다.[3]
각 가우의 수장은 가울라이터였는데, 이들은 중앙 정부의 간섭을 거의 받지 않고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으며,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그 권한이 더욱 커졌다. 지역 가울라이터는 당직뿐만 아니라 정부 직책을 겸임하는 경우가 많았고, 해당 지역의 선전과 감시 활동을 주도했다. 또한 전쟁 말기인 1944년 9월부터는 국민돌격대 조직과 가우 방어 임무까지 책임졌다.[3][4]
동프로이센 대관구의 역대 가울라이터는 다음과 같다.
이름 | 재임 기간 |
---|---|
빌헬름 슈티히 | 1925년 ~ 1926년 |
브루노 구스타프 셰르비츠 | 1926년 ~ 1927년 |
한스 알베르트 혼펠트 (대행) | 1927년 ~ 1928년 |
에리히 코흐 | 1928년 10월 1일 ~ 1945년 5월 8일 |
3. 1. 대관구 본부
- 대관구 본부: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de, 그로세 슈로스 타이지 거리 7[8]
- 대관구 지도자 학교: 라두시킨Lüdischortde
- 돌격대SAde "오스트란트"(동국) 관구 집단 본부
3. 2. 대관구 지도자 학교
대관구 지도자 학교는 라두시킨Lüdischort|뤼디쇼르트de과 리펜(현재 소프호즈노예)에 위치했다.3. 3. 돌격대(SA)
동프로이센 대관구에는 돌격대(SA)의 "오스트란트(동국)" 관구 집단 본부가 위치했다.4. 인사
- 대관구 감사역 - 프리츠 슐레겔
- 대관구 국장 - 막스 클리메크 (1933년-1935년)
- 대관구 변사 및 독일 노동 전선 감사역 - 에른스트 뒤셰른
- 대관구 경제 고문 및 돌격대 지도자 - 발데마르 마구니아
- 대관구 당 강사 연맹 대표 - 한스-베른하르트 폰 귄베르크 (1935년-1945년)
- 국경 지역 국장 - 테오도르 오버랜더 교수 (1933년-1937년)
참조
[1]
웹사이트
Die Bevölkerung des Deutschen Reichs nach den Ergebnissen der Volkszählung 1939
https://www.statisti[...]
[2]
서적
Gauleiter: The Regional Leaders of the Nazi Party and Their Deputies
Fonthill Media
[3]
웹사이트
Die NS-Gaue
Deutsches Historisches Museum
2016-03-24
[4]
웹사이트
The Organization of the Nazi Party & State
The Nizkor Project
2016-03-26
[5]
웹사이트
Übersicht der NSDAP-Gaue, der Gauleiter und der Stellvertretenden Gauleiter zwischen 1933 und 1945
Zukunft braucht Erinnerung
2016-03-24
[6]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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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ll
2016-03-24
[7]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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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Adressbuch 1940
https://www.findbu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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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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