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디드고리 전투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디드고리 전투는 1121년 8월 11일, 조지아 왕국의 다비드 4세가 이끄는 조지아군이 셀주크 제국의 일가지가 지휘하는 연합군을 상대로 승리한 전투이다. 이 전투는 조지아가 셀주크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고대 조지아의 수도였던 트빌리시를 탈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다비드 4세는 킵차크족, 알란족, 프랑크족 용병을 포함한 병력으로 셀주크 연합군을 기습하여 승리했으며, 이 전투의 결과로 조지아는 이슬람 세력의 영향에서 벗어나 조지아의 황금기를 열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조지아 왕국 - 아인잘루트 전투
    아인잘루트 전투는 1260년 9월 3일 팔레스타인에서 맘루크 술탄국군이 몽골 제국군을 격파하여 몽골 제국의 서진 확대를 저지하고 맘루크 왕조가 중동을 지배하는 계기가 된 전투이다.
  • 조지아 왕국 - 쾨세다그 전투
    쾨세다그 전투는 1243년 몽골 제국이 룸 술탄국을 상대로 승리하여 아나톨리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고 룸 술탄국을 쇠퇴시킨 전투이다.
디드고리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전투 이름디드고리 전투
일부조지아-셀주크 전쟁
날짜1121년 8월 12일
장소조지아 왕국 디드고리 계곡 (현재의 조지아 디드고리)
결과조지아 왕국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셀주크 제국
아르투크 왕조
딜마츠 베이국
마지야드 왕조
샤다드 왕조
트빌리시 토후국
교전국 2조지아 왕국
알란족
킵차크족
아르메니아인
프랑크 용병
지휘관
지휘관 1일가지(부상)
투그릴 빈 무함마드
두바이스 2세
지휘관 2다비드 4세
데메트리우스 왕자
병력 규모
병력 1 (현대 추정)여러 배 더 많음
병력 1 (조지아 자료)100,000–250,000명
병력 1 (튀르키예 자료)30,000명
병력 1 (중세 기독교 자료)400,000–600,000 또는 800,000명
병력 1 (중세 아랍 자료)30,000명
병력 2 (총합, 조지아 자료)55,600명
병력 2 (세부)40,000명 조지아군 (5,000명 모나스파 포함)
15,000명 쿠만족-킵차크족
500명 알란 용병
100–500명 프랑크 기사
아르메니아와 시르반 동맹군
사상자
사상자 1알려지지 않음
사상자 2알려지지 않음
관련 캠페인
관련 캠페인조지아-셀주크 전쟁

2. 배경

1080년대 이후 조지아 왕국셀주크 제국의 속국이었다. 하지만 1090년대에 셀주크 제국이 내부 분란으로 쇠약해지고 서유럽제1차 십자군을 일으켜 무슬림들이 지배하던 성지를 점령하자, 조지아의 다비드 4세는 이러한 상황을 이용했다. 그는 킵차크족과 알란족을 징집하고 프랑크족 용병들을 고용해 잃어버린 옛 영토를 회복하고 튀르크인 침략자들을 축출하여 상대적으로 강한 군주국을 만들었다.[34] 1096-7년, 다비드는 셀주크에 대한 조공을 거부했으며 조지아에 대한 투르크인들의 이주도 막았다. 1103년에서 1118년에는 여러 차례의 원정을 통해 주요 요새들을 탈환했다. 그의 최종 목적은 4세기 동안 무슬림들이 지배하던 트빌리시를 탈환하는 것이었다. 그의 군대는 아라스강에서 카스피해까지 이르렀으며, 남캅카스의 모든 무슬림 상인들이 그를 두려워했다. 1121년 6월, 조지아 군대는 트빌리시를 포위했고, 무슬림 지도층은 다비드 4세에게 조공을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34]

조지아와 이슬람 측 자료 모두 트빌리시, 간자, 드마니시의 무슬림 상인들의 항의로 인해 바그다드의 술탄 마흐무드 2세(재위 1118년~1131년)가 마르딘의 일가지 이븐 아르투크의 지휘하에 조지아로 원정대를 파견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중동에서의 그의 패권과 무슬림들 사이의 권위는 명백했다. 1119년 에데사 백국을 약탈하고 살레르노의 로제르를 아게르 상귀니스 전투에서 패배시킨 후, 기독교도에 대항하는 무슬림들의 위대한 군 지휘관이자 챔피언으로서 일가지의 명성은 널리 퍼져나갔다.

이 승리 후 일가지는 십자군과 휴전을 맺고 술탄의 형제이자 아란의 통치자인 토그룰의 초청으로 아르메니아로 북쪽으로 향했다.[22] 그는 그곳에서 기독교 조지아인에 대항하는 무슬림 연합에 합류하여 연합군을 지휘했다.[22] 그의 봉신인 아르젠, 비틀리스, 드빈의 영주 투간-아르슬란, 알 힐라의 마지야드 가문 두바이스 빈 사다카, 토그룰과 나흐치반의 아타벡 쿤-토그디가 모두 참여했다.

역사가 알렉산더 미카베리제에 따르면, "무슬림 군대의 규모는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으며, 월터 대총리와 에데사의 마태오가 제시한 60만 명이라는 엄청난 수치부터 40만 명(셈파드 스파라펫 연대기)까지 다양하며, 현대 조지아 역사가들의 추정치는 10만 명에서 25만 명 사이이다. 더 높은 수치는 과장되었지만, 모든 자료는 무슬림들이 대규모 준비를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1121년 여름 중순, 무슬림 군대는 여러 경로를 따라 진격했으며, 그중 일부는 에르주룸카르스 주를 통과했고, 토그룰 이븐 무함마드는 간자를 통해 이동했고, "곱추" 투간-아르슬란은 드빈에서 진군했다."[23]

에데사의 마태오에 따르면, 무슬림 연합군은 총 56만 명이었으며, 일가지가 그의 봉신 투간-아르슬란과 함께 지휘했고 유목 아랍 부족들의 지원을 받았다.

조지아 국왕은 연합군의 계획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연합 지도자 중 한 명을 제외하기로 결정했다. 1121년 상반기에 조지아인들은 간자 토후국 영토에서 셀주크인들을 두 번 공격하여 학살했다. 그 결과 아란의 통치자는 더 이상 이 전투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

일가지는 주요 동맹국의 패배를 알고 있었지만, 행군을 계속했다. 1121년 7월, 일가지의 군대는 조지아 영토에 진입했다. 알-파리키에 따르면, 일가지는 카르스에서 자바케티와 트리아레티를 거쳐 트빌리시에 도착하는 경로를 선택하여 진영을 구축하고 휴식을 취한 후 조지아인들에 대항하여 행동할 수 있었다. 일가지의 전반적인 지휘하에 있는 무슬림 군대는 조지아 동부의 트리아레티 계곡에 진입하여 1121년 8월 10일 디드고리 근처)와 망글리시에 진을 쳤다.[24] 트빌리시에서 하루 정도의 행군 거리였다.

일가지의 정확한 전투 계획이나 행동 방침, 전투 진형에 대해서는 경량 미사일 부대, 특히 궁수와 경기병을 선봉에 배치하여 적 전열을 교란하는 동안 주력군은 질서정연한 전투 진형으로 그 뒤에 남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것 외에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일가지의 선봉대가 다윗의 군대에 접근하여 예상보다 훨씬 적은 병력에 대해 보고했을 것이며, 이는 일가지의 자신감을 높여 예상치 못한 일을 기대하지 않게 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셀주크 경기병이 조지아인들 앞에서 기병을 타고 사격과 조롱을 시작했고, 이는 그들의 사기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주장된다. 일가지 측에 중기병이나 조지아군에 필적할 만한 기병대가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3. 전투

1121년 8월 중순, 일가지가 이끄는 무슬림 연합군은 조지아 동쪽 트리알레티 계곡을 따라 진군하여 디드고리와 망글리시 부근에 숙영했다.[34] 다비드 4세는 일가지가 트빌리시의 무슬림들과 연합하는 것을 막기 위해 기습 전략을 사용, 디드고리 산맥 근처의 산악 지대와 숲 지역을 공격 장소로 선택했다.

315x315px


다비드 왕은 군대를 둘로 나누어, 한 부대는 직접 지휘하고 다른 부대는 아들 데메트리우스 1세에게 맡겨 매복 후 측면 공격을 하도록 했다.[23] 아랍 연대기 작가 이븐 알아시르에 따르면, 다비드는 200명의 중기병을 탈영병으로 위장시켜 셀주크군 지휘부를 급습, 지휘 체계를 마비시켰다.[35] 동시에 십자군 기사들과 함께 적 선봉대를 공격하여 전열을 파괴하고 셀주크 궁수들을 근접전에 휘말리게 했다.

그 후 그루지야 군은 산의 서쪽에서 측면을 공격했고, 일가지는 부상당하고 전장에서 철수했다. 다비드 왕은 직접 우익을 이끌고 중장기병으로 셀주크 좌익을 공격했으며, 데메트리우스 1세는 좌익에서 셀주크 우익을 공격했다. 그루지야 보병이 합류하자 셀주크 군은 후퇴하기 시작했고, 3시간 만에 전투는 조지아 군의 승리로 끝났다.[23]

조지아 군은 3일 동안 셀주크 군을 추격하여 막대한 전리품을 획득했다.[23] 마테오스 에데스키는 끔찍한 학살이 벌어졌다고 기록했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다비드는 지형을 이용하여 셀주크 기병을 좁은 길로 유인하고 경보병으로 제압했다. 셀주크 군은 주력 부대를 공격하기 위해 경사지를 올라가야 했고, 중장기병의 측면 공격을 받아 전투 의지를 잃고 패주했다. 일가지는 십자군 기사들의 돌격으로 머리에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31]

3. 1. 양측 군대

조지아 군대의 성공은 분열된 무슬림들의 단합을 불렀다. 트빌리시의 무슬림들이 술탄 마흐무드 2세(재위 1118년 ~ 1131년)에게 탄원하자, 술탄은 조지아 정벌을 명했다. 1121년 8월 중순, 일가지의 지휘 아래 무슬림 연합군은 조지아 동쪽의 트리알레티 계곡을 따라 진군해 디드고리와 망글리시 부근에 숙영했다.[34]

조지아 왕국의 전성기 시절 영토와 영향력이 미치던 영역


전투에 동원된 군사 수는 사료들마다 다르다. 기록에 따르면 셀주크 군은 400,000명에서 605,000명 사이였다. 다비드 왕의 군대는 40,000명의 조지아인, 15,000명의 킵차크인, 500명의 알란인, 100명의 ‘프랑크족' 십자군으로 이루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아랍 연대기 작가 이븐 알아시르에 따르면, 다비드는 200명의 중기병을 탈영자로 위장해 셀주크군 숙영지에 보내 지휘부를 제거했다.[35]

조지아와 이슬람 측 자료 모두 티플리스, 간자, 드마니시의 무슬림 상인들의 항의로 인해 바그다드의 술탄 마흐무드 2세(재위 1118년~1131년)가 일가지 이븐 아르투크의 지휘하에 조지아 원정대를 파견했음을 증명한다. 1119년 에데사 백국을 약탈하고 아게르 상귀니스 전투에서 로제르 안티오크를 격파한 일가지의 명성은 널리 퍼져 있었다.

일가지는 십자군과 휴전을 맺고 술탄의 형제이자 아란 통치자인 토그룰의 초청으로 아르메니아로 북상했다.[22] 그는 그곳에서 기독교 조지아인에 대항하는 무슬림 연합군을 지휘했다.[22] 그의 봉신인 아르젠, 비틀리스, 드빈의 영주 투간-아르슬란, 알 힐라의 마지야드 가문 두바이스 빈 사다카, 토그룰과 나흐치반의 아타베그 쿤-토그디가 모두 참여했다.

역사가 알렉산더 미카베리제에 따르면, 무슬림 군대 규모는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으며, 10만 명에서 25만 명 사이로 추정된다.[23] 1121년 여름 중순, 무슬림 군대는 여러 경로를 따라 진격했다.[23]

에데사의 마태오에 따르면, 무슬림 연합군은 총 56만 명이었으며, 일가지가 투간-아르슬란과 함께 지휘했고 유목 아랍 부족들의 지원을 받았다.

조지아 국왕은 연합군의 계획을 알고 있었기에, 1121년 상반기에 조지아인들은 간자 토후국 영토에서 셀주크인들을 두 번 공격했다. 그 결과 아란 통치자는 전투에 참여할 수 없었다.

일가지는 동맹국의 패배를 알았지만, 행군을 계속했다. 1121년 7월, 일가지의 군대는 조지아 영토에 진입했다. 알-파리키에 따르면, 일가지는 카르스에서 자바케티와 트리아레티를 거쳐 트빌리시에 도착하는 경로를 선택했다. 무슬림 군대는 1121년 8월 10일 디드고리 근처와 망글리시에 진을 쳤다.[24]

일가지의 전투 계획은 경기병을 선봉에 배치하여 적 전열을 교란하는 방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가지의 선봉대는 다윗의 군대가 적다고 보고했고, 이는 일가지의 자신감을 높였다. 셀주크 경기병은 조지아군 앞에서 사격과 조롱을 했지만,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조지아군은 전략적, 전술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1118년, 다비드 4세의 군사 개혁으로 왕실 근위대 '모나-스파(mona-spa)'가 창설되었다. 5만 6천 명의 조지아군에는 알란족 500명, 프랑크족 약 200명, 키프차크족 1만 5천 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다비드 군대의 핵심은 5,000명의 중무장 기병으로 구성된 모나-스파였다. 십자군, 키프차크 기병, 소수 보병은 왕의 깃발 주위에 배치되었고, 나머지는 두 날개로 나뉘어 배치되었다. 중기병은 창으로 적진에 돌격하고, 보병은 셀주크군 본대를 교전시키는 동안 기병은 재편성하여 반복 공격을 가했다. 다비드 4세는 군대 좌익, 데메트리우스는 우익을 지휘했다.

왈터 대법관에 따르면, 다비드 왕은 전투 전 군대의 사기를 북돋았다.

조지아와 쿰만족-킵차크족의 관계는 평화로웠다. 조지아 정치인들은 킵차크족을 셀주크에 맞서는 잠재적 동맹으로 여겼다. 조지아 연대기에 따르면, 조지아인들은 킵차크족의 전투 기술과 용기를 알고 있었다.[25] 1109년 키예프 루스'의 대공 블라디미르 2세 모노마흐의 승리 이후, 오트로크 칸[26][27]이 이끄는 4만 명의 킵차크족이 조지아로 도망쳐 다비드 4세 휘하에 들어갔다. 조지아-킵차크 동맹은 다비드 4세가 칸의 딸(구란두크트)와 결혼하며 이루어졌다. 킵차크족은 군장을 지급받고 정착지를 하사받았다. 그 대가로 킵차크족은 가족당 한 명의 군인을 제공하여 다비드 왕은 상비군을 편성할 수 있었다.

디드고리 전투에 참여한 프랑크(Farang) 병사에 대한 기록은 두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마테오스 에데스는 100명의 프랑크인을,[28] 왈터 대총리는 다비드가 군대 앞에 배치한 200명의 프랑크 병사를 언급한다.[29]

이들이 안티오크 공작 또는 보두앵 2세[30]가 보낸 군대였는지, 용병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프랑크와 조지아인 모두 무슬림이 공통된 적이었기에, 동맹군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을 통해 조지아에 도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3. 2. 전투 경과

조지아 군대의 승리로 인해 분열되었던 무슬림들이 단합하게 되었다. 트빌리시의 무슬림들이 셀주크 왕조의 술탄 마흐무드 2세 b. 무함마드(재위 1118 - 1131)에게 탄원하자, 술탄은 마르딘아르투크 왕조의 일가지, 알힐라의 마지야드 왕조의 두바이스 2세 b. 사다카, 술탄의 형제이자 아란과 나히체반의 지배자 투그룰과 그의 아타베그 쿤 투그디에게 조지아 정벌을 명했다. 1121년 8월 중순, 이 연합군은 일가지의 지휘 아래 조지아 동쪽의 트리알레티 계곡을 따라 진군해 디드고리와 망글리시 부근에 숙영했다.[34]

전투에 동원된 군사 수는 사료들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기록에 따르면 셀주크 군이 동원한 병사의 수는 40만 명에서 60만 5천 명 사이였다. 다비드 왕의 군대는 일반적으로 4만 명의 조지아인, 1만 5천 명의 킵차크인, 500명의 알란인, 100명의 ‘프랑크족' 십자군으로 구성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아랍의 연대기 작가 이븐 알아시르에 따르면, 다비드는 200명의 중기병을 탈영자로 가장해 셀주크 군 숙영지에 보내 군 지휘부를 만나게 했다. 이 병사들은 셀주크 군 지휘부 앞에서 갑자기 돌변해 그들을 죽였다. 이 급습으로 인해 셀주크 군 지휘 체계가 마비되었다. 이때 다비드는 자신의 아들 데메트리우스 1세와 군대를 분할해 여러 차례 셀주크 군대의 측면을 공격했다. 3시간에 걸친 공격 끝에 셀주크 군대는 무너져 도주하기 시작했다. 승자들은 그들 뒤에 남겨진 막대한 양의 보물과 병사들을 손에 넣었다.[35]

다비드 왕은 일가지가 티플리스의 무슬림들과 연합하는 것을 허용할 수 없었기에, 그를 가로챌 계획을 세웠다. 그는 기습 전략을 사용하여 적을 단계적으로 함정으로 유인했다. 그는 망글리시와 티플리스 사이에 위치한 디드고리 산맥 근처의 산악 지대와 숲 지역을 공격 장소로 선택했다. 1121년 8월 11일, 다비드 왕은 고대 수도 므츠헤타에서 니치비시 계곡을 따라 군대를 이끌고, 그의 지휘 아래 군대를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한 부대는 그의 직접 지휘 아래 있었고, 다른 더 작은 부대는 그의 아들 데메트리우스 1세의 지휘 아래 근처 고지대에 매복하여, 신호에 따라 측면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23]

전투의 경과는 당대의 역사 기록에서 다르게 묘사된다. 이븐 알아시르에 따르면, 다비드는 협상을 가장하기 위해 소규모 킵차크 부대를 보냈다. 무슬림들은 소규모 부대가 그루지야 군대를 떠나 보호를 구한다고 생각했기에, 그들을 위협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동안 그루지야 군은 성공적으로 대부분의 병력을 배치하여 적을 집게처럼 포위할 수 있었다. 그들의 적은 그러한 활동을 알지 못했다. 셀주크 지휘관들에게 접근하자, 탈영병들은 무슬림들의 자신감을 이용하여 그들에게 화살을 쏘아, 눈에 보이는 모든 셀주크 지휘관과 회의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을 죽였다.

이 일이 진행되는 동안, 다비드는 그의 십자군 기사들과 함께 적 선봉대에 대한 정면 공격을 명령했는데, 이는 적의 전방 전열을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셀주크 궁수들을 근접전에 휘말리게 하여, 일가지 군대의 중요한 부분을 효과적으로 제거했다. 이 계략은 무슬림들 사이에 혼란과 공황을 초래했다. 그런 다음 그루지야 군은 산의 서쪽에서 완전한 대형으로 측면을 향해 빠르게 진격하기 시작했다. 일가지와 그의 사위는 선봉대 공격에서 살아남았지만, 전투 중에 심각한 부상을 입고 전장에서 철수하여, 셀주크 군대는 사실상 지휘관 없이 남게 되었다.

대부분의 지휘관들이 부상을 입거나 사망하여 혼란이 초래되었고, 아마도 혼란스러운 상황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 부족했을 것이다. 다비드 왕은 주저하지 않고 그루지야 우익을 직접 이끌고, 그의 중장기병에게 선봉대를 지원하려는 것처럼 보이는 혼란스러운 셀주크 좌익으로 돌격하도록 명령했다. 내리막길을 내려오는 이점을 가진 그루지야 기병의 돌격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거의 동시에, 다비드의 아들 데메트리우스의 지휘 아래 좌익은 중장기병으로 셀주크 우익을 공격했다. 그루지야 보병이 전투에 참여하자, 셀주크 군은 공황에 빠져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후방의 거대한 틈을 통해 ''en masse''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는 많은 셀주크 병력이 도주하게 하여 대패를 초래했고, 그들의 선봉대는 완전히 섬멸되었다. 그루지야 연대기 작가에 따르면, 다비드 왕의 군대는 그들을 3일 동안 추격하여 “모두를 검으로 죽이고, 망글리시 계곡의 산과 평야의 맹수와 새들에게 내버려 두었다.”[23]

킵차크 족이 합류하면서, 셀주크 저항의 최후의 잔여 세력은 무너져 패주에 합류했다. 전투는 3시간 만에 결정되었고, 셀주크 군대는 압도당하여 많은 사상자와 포로, 그리고 전리품을 남겼다. 도망치는 잔여 세력은 며칠 동안 계속 추격당하여 재편성하거나 다른 어떤 행동을 할 시간이나 기회를 갖지 못했다.

이러한 기록 외에도, 대규모 침입군의 선봉대에 직면했을 때, 다비드는 그의 군대 이동을 위장하기 위해 근처 지형이 제공하는 이점에 의존해야 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셀주크 기병은 비교적 좁은 길로 유인되거나 속임수를 당했는데, 아마도 기동할 공간이 많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은 일가지 군대의 나머지 부대와 분리되었고, 그루지야 군은 창, 극창, 그리고 활과 투창을 사용하는 경보병으로 그들을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연합군의 나머지는 아마도 그루지야 군의 주력 부대를 공격하기 위해 경사지를 올라가야 했을 것이고, 동시에 중장기병의 측면 공격을 지속적으로 받았을 것이다. 얼마 후, 이러한 전술은 무슬림 군대의 전투 의지를 꺾었고, 곧 패주했다. 일가지는 100명의 십자군 기사들이 그의 전열을 돌파하여 셀주크 지휘 깃발을 향해 돌진했을 때 머리에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31]

4. 결과 및 영향

디드고리 전투에서 승리한 조지아는 이 지역 전체를 이슬람 세력의 영향에서 해방시키고, 당시 거의 무방비 상태였던 셀주크 제국 내 영토까지 놓고 다툴 수 있었다.[32] 일가지는 군대가 지쳐 있었고 자신도 부상을 입은 채 마르딘으로 돌아갔다.

A. 미카베리제에 따르면, "디드고리에서의 승리는 미래 조지아 세대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당시의 연대기 작가는 '우리를 떠받치는 그리스도께서 그날 우리에게 주신 기적을 어떤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트로이 전쟁과 아킬레스의 용맹함에 대한 호머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 혹은 마카비의 용기에 대한 요세푸스의 글, 또는 예루살렘에서 알렉산더와 티투스의 이야기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고 놀라움을 표현했다. 이 전투는 조지아의 국가 의식 속에 “기적적인 승리”(ძლევაჲ საკვირველი)로 자리 잡았으며, 조지아 역사의 절정 중 하나이다. 이는 11~12세기 후반 조지아의 군사 강국으로서의 부상을 알리고, 소아시아 동부에서 조지아의 문화적, 정치적 우월성을 지지하는 쪽으로 균형을 이동시켰다."[23]

4. 1. 트빌리시 탈환과 조지아 통일

1080년대 이후 조지아 왕국셀주크 제국의 속국이었다. 하지만 1090년대에 셀주크 제국이 내부 분란으로 쇠약해지고 서유럽제1차 십자군을 일으켜 무슬림들이 지배하던 성지를 점령하자 조지아의 다비드 4세는 킵차크족과 알란족을 징집하고 프랑크족 용병들까지 고용해 잃어버린 옛 영토를 회복하고 튀르크인 침략자들을 축출했다. 1096-7년, 다비드는 셀주크에 대한 조공을 거부했으며 조지아에 대한 투르크인들의 이주도 막았다. 1103년에서 1118년에는 여러 차례의 원정을 통해 주요 요새들을 탈환했다. 그의 군대는 아라스강에서 카스피해까지 이르렀으며, 남캅카스의 모든 무슬림 상인들이 그를 두려워했다. 1121년 6월, 조지아 군대는 트빌리시를 포위했고, 무슬림 지도층은 다비드 4세에 대한 조공을 약속할 수 밖에 없었다.[34]

조지아 왕국의 다비드 4세 통치하의 확장


승기를 잡은 다비드는 남은 무슬림들의 저항을 가혹하게 제압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122년, 트빌리시를 점령하고, 조지아의 수도로 삼았다. 조지아 연대기에 의하면, 도시는 “영원히 그의 자손들의 무기고이자 수도”가 되었다.[34] 중세의 사료들은 다비드의 행동이 트빌리시의 무슬림들에 대한 복수임을 강조했다. 하지만 아랍의 역사가 알아이니(1360 - 1451)는 조지아인들의 왕이 도시를 약탈하기는 했으나 결국 “무슬림들에게 무슬림 지배자 이상으로 그들을 존중해준다고 느끼게 해줬다”고 적었다.[34][35]

셀주크 군이 도망치는 수가 매우 많아 조지아 기병대는 수일 동안 수많은 포로를 사로잡았다고 한다. 사로잡힌 셀주크인들은 다비드의 왕국 재건에 이용되었다.[32] 디드고리 전투 다음 해에 조지아의 통일과 이슬람 세력의 제거가 완료되었다.

중세 자료들은 다비드가 트빌리시의 무슬림들에게 가한 복수 행위를 강조한다. 그러나 알아이니는 도시가 약탈당했음을 인정하지만, 조지아 국왕은 결국 인내심을 보였고 "무슬림들의 감정을 존중했다"고 말한다.[24][32] 박식한 그였던 그는 다른 종교에 대한 관용을 설파하고, 무슬림과 유대인에 대한 세금과 봉사를 폐지했으며, 수피와 무슬림 학자들을 보호했다.

4. 2. 십자군 국가 지원

디드고리 전투는 일가지의 군대에 압력을 받던 십자군 국가들에게 도움이 되었다. 라틴 공국들의 주요 적이 약화되면서 발두인 2세 국왕이 통치하던 예루살렘 왕국에 이익이 되었다.

4. 3. 조지아의 황금기

조지아의 다비드 4세


1080년대 이후 조지아 왕국은 셀주크 제국의 속국이었다. 하지만 1090년대에 셀주크 제국이 내부 분란으로 쇠약해지고 서유럽제1차 십자군을 일으켜 무슬림들이 지배하던 성지를 점령하자, 조지아의 다비드 4세는 이러한 국면을 이용했다. 그는 킵차크족과 알란족을 징집하고 프랑크족 용병들까지 고용해 잃어버린 옛 영토를 회복하고 튀르크인 침략자들을 축출하여 상대적으로 강한 군주국을 이룩했다.[34] 1096-7년, 다비드는 셀주크에 대한 조공을 거부했으며 조지아에 대한 투르크인들의 이주도 막았다. 1103년에서 1118년에는 여러 차례의 원정을 통해 주요 요새들을 탈환했다. 그러한 다비드의 최종 목적은 고대 조지아의 도시이자 (당시 기준으로) 4세기나 무슬림들이 지배하던 트빌리시의 탈환이었다. 그의 군대는 아라스강에서 카스피해까지 이르렀으며, 남캅카스의 모든 무슬림 상인들이 그를 두려워했다. 1121년 6월, 조지아 군대는 트빌리시를 포위했고, 무슬림 지도층은 다비드 4세에 대한 조공을 약속할 수 밖에 없었다.[34]

디드고리 전투 다음 해에 조지아의 통일과 이슬람 세력의 제거가 완료되었다. 다비드는 포위 공격하여 점령하고, 트빌리시를 조지아의 수도로 삼았다.

중세 자료들은 다비드가 트빌리시의 무슬림들에게 가한 복수 행위를 강조한다. 그러나 여러 자료(일부는 현재 전하지 않음)를 사용한 아랍 역사가 알아이니(1360~1451)는 도시가 약탈당했음을 인정하지만, 조지아 국왕은 결국 인내심을 보였고 "무슬림들의 감정을 존중했다"고 말한다.[24][32] 박식한 그였던 그는 다른 종교에 대한 관용을 설파하고, 무슬림과 유대인에 대한 세금과 봉사를 폐지했으며, 수피와 무슬림 학자들을 보호했다.

A. 미카베리제에 따르면, "디드고리에서의 승리는 미래 조지아 세대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23] 이 전투는 조지아의 국가 의식 속에 “기적적인 승리”(ძლევაჲ საკვირველი)로 자리 잡았으며, 의심할 여지 없이 조지아 역사의 절정 중 하나이다. 이는 11~12세기 후반 조지아의 군사 강국으로서의 부상을 알리고, 소아시아 동부에서 조지아의 문화적, 정치적 우월성을 지지하는 쪽으로 균형을 이동시켰다.[23]

참조

[1] 서적 Investigation of Communist takeover and occupation of the non-Russian nations of the U.S.S.R University of Michigan Library
[2] 서적 Nomads in the Sedentary World Routledge
[3] 서적 Journal of Medieval Military History: Volume XII Boydell Press 2014-06-19
[4] 서적 The Caucasus – An Introduction (Routledge Contemporary Russia and Eastern Europe) Routledge
[5] 서적 Edge of Empires: A History of Georgia Reaktion Books
[6] 서적 Great Soviet Encyclopedia, Volume 8 Macmillan 1973
[7] 서적 History of Central Asia, The: 4-volume set (The History of Central Asia) I.B. Tauris
[8] 서적 Geschichte Georgiens (Handbook of Oriental Studies. Section 8 Uralic & Central Asi) Brill
[9] 서적 Georgia in the 11th–12th Centuries Ganatleba Publishers
[10] 서적 The Crusades: An Encyclopedia 4 Volume Set ABC-CLIO
[11] 서적 Selçuklular Zamanında Türkiye İstanbul
[12] 서적 Artuk Oğlu İlgazi and Selçuklu Devletleri Tarihi
[13] 서적 Yukarı-Kür ve Çoruk Boyları’nda Kıpçaklar
[14] 서적 Conflict And Conquest In The Islamic World
[15] 웹사이트 'Miraculous Victory:' Battle of Didgori, 1121 http://www.armchairg[...] 2017-07-18
[16] 서적 Al-Kāmil fī al-tārīkh (الكامل في التاريخ): "The Complete History"
[17] 웹사이트 დიდგორის ომის მიმდინარეობის ეტაპები http://www.ufali.ge/[...] 2021-04-28
[18] 서적 The Making of the Georgian Nati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 서적 Летопись Изд-во «Айастан»
[20] 서적 The Making of the Georgian Nation Indiana University Press
[21] 문서 Georgica C. Winter
[22] 웹사이트 A Chronology of the Crusades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20-12-07
[23] 웹사이트 'Miraculous Victory:' Battle of Didgori, 1121 | Armchair General Magazine http://armchairgener[...] 2020-08-12
[24] 서적 E. J. Brill's First Encyclopaedia of Islam, 1913–1936 Brill
[25] 웹사이트 The Georgian Chronicles about the Cuman – Kipchak resettlement in Georgia http://titus.uni-fra[...] 2020-03-06
[26] 서적 Nomads in the Sedentary World Routledge
[27]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Early Inner Asia Cambridge University Press
[28] 서적
[29] 서적
[30] 서적 National Treasures Of Georgia Philip Wilson Publishers
[31] 서적 Journal of Medieval Military History Boydell Press
[32] 서적 k'art'veli eris istoria (The History of the Georgian Nation) Tbilisi State University Press
[33] 서적 The Making of the Georgian Nation Indiana University Press
[34] 서적 E. J. Brill's First Encyclopaedia of Islam, 1913-1936 Brill
[35] 서적 k'art'veli eris istoria (The History of the Georgian Nation) Tbilisi State University Press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