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조지아 왕국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조지아 왕국은 3세기부터 6세기까지 로마와 페르시아의 전쟁으로 인해 봉신국으로 전락하거나 멸망했고, 7세기 초 아랍 무슬림의 정복으로 이슬람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바그라티온 왕조는 아랍의 압제에 맞서 싸우며 타오-클라르제티 지역을 통치했고, 888년 아다르나세 4세가 "조지아인의 왕"을 자칭하며 조지아 왕위를 부활시켰다. 1008년 바그라트 3세가 압하지아 왕위를 계승하여 조지아를 통일, 조지아 왕국을 출범시켰다. 11세기 후반 셀주크 제국의 침략으로 혼란을 겪었지만, 다비트 4세 치세에 '조지아 레콘키스타'를 통해 국력을 회복했다. 타마르 여왕 시대에는 '조지아 황금기'를 맞이하며 캅카스 지역에서 강력한 제국을 건설했지만, 몽골의 침략으로 쇠퇴하여 1490년 이메레티, 카헤티, 카르틀리 왕국으로 분열되며 멸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조지아 왕국 - 디드고리 전투
    1121년 8월, 다비드 4세가 이끄는 조지아 왕국군이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셀주크 투르크 연합군을 격파하여 조지아 독립과 지역 패권 장악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고 트빌리시를 탈환, 통일을 완성한 전투가 디드고리 전투이다.
  • 조지아 왕국 - 아인잘루트 전투
    아인잘루트 전투는 1260년 9월 3일 팔레스타인에서 맘루크 술탄국군이 몽골 제국군을 격파하여 몽골 제국의 서진 확대를 저지하고 맘루크 왕조가 중동을 지배하는 계기가 된 전투이다.
  • 남캅카스의 역사 - 조지아 황금기
    조지아 황금기는 11세기부터 13세기 다비드 4세 통치기에 시작되어 정치적 통일, 군사적 성공, 문화, 예술, 학문 발전을 이루었으며, 타마르 여왕 시대에 국력이 절정에 달했으나 몽골 침입 등으로 쇠퇴하였다.
  • 남캅카스의 역사 - 자캅카스 민주연방공화국
    자캅카스 민주연방공화국은 1918년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독립했으나, 한 달 만에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으로 분할되어 소멸되었다.
  • 옛 왕국 - 하와이 왕국
    하와이 왕국은 1795년 카메하메하 1세가 하와이 제도를 통일하여 건국한 입헌군주국으로, 영국 문화 수용 및 미국인 이주를 거쳐 1893년 릴리우오칼라니 여왕 폐위 후 미국에 합병되어 하와이주가 되었다.
  • 옛 왕국 - 마타람 왕국
    마타람 왕국은 8세기부터 11세기까지 자바섬 중부와 동부를 통치하며 힌두교와 불교 문화를 융합한 왕국으로, 산자야 왕조가 건국하고 샤일렌드라 왕조의 영향을 받아 프람바난 사원을 건설하는 등 전성기를 누렸으나 자연재해로 동부 자바로 천도하여 크디리 왕국으로 이어졌고 보로부두르, 프람바난 등 유네스코 세계유산 건축물을 남겼다.
조지아 왕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지도
1220년경 조지아 왕국, 영토 확장 절정기
1220년경, 영토 확장 절정기의 조지아 왕국, 현대 국경에 겹쳐 표시됨
기본 정보
공식 명칭საქართველოს სამეფო
로마자 표기Sakartvelos samepo
일반적인 긴 이름조지아 왕국
정부 형태봉건제 군주제
시대중세 초기 ~ 중세 후기
존속 기간1008년 ~ 1490년
건국통일 (1008년경)
전성기조지아 황금시대 (1122년 ~ 1226년)
혼란기왕국 섭정 시대 (1245년 ~ 1247년)
동서 분열동서 분열 (1247년 ~ 1329년)
재통일재통일 (1329년)
멸망 (사실상)1463년
멸망 (법률상)1490년
이전 국가압하지야 왕국
이베리아 왕국
카헤티 제1왕국
헤레티 왕국
바그라티드 아르메니아
트빌리시 토후국
이후 국가카르틀리 왕국
카헤티 왕국
이메레티 왕국
삼츠헤 공국
조지아 왕국 국기
14~15세기 조지아 국기 (앙헬리노 둘세르트, 피치카노 형제 등의 기록에 따름)
에그리시-압하지야 왕국 국기
국기 2
조지아 왕국 문장
바쿠슈티 왕자의 지도책 (1745년경)에 따른 "전 조지아 왕국" 문장
조지아 왕국 문장
콘라트 그뤼넨베르크의 무기집 (1480년)에 따른 "칸의 지배 하의 조지아 왕국" 문장
수도쿠타이시 (1008년경 ~ 1122년)
트빌리시 (1122년경 ~ 1490년)
공용어중세 조지아어
그리스어
라즈어
아르메니아어
아랍어 (링구아 프랑카/화폐/관청)
페르시아어 (화폐)
종교동방 정교회 (조지아 총대주교청)
통화다양한 비잔티움 및 사산 주화 (12세기까지)
디르함 (12세기 이후)
지도자 칭호군주
초대 지도자바그라트 3세 (1008년 ~ 1014년)
마지막 지도자기오르기 8세 (1446년 ~ 1465년)
국회국가 평의회
주석1124년 이후 조지아 군주의 완전한 칭호는 "왕중왕, 동서양의 전제군주, 메시아의 검, 압하지야의 왕, 이베리아의 왕, 카헤티와 헤레티의 왕, 아르메니아의 왕, 시르반의 소유자" 였다.
행정 구역
13세기 조지아 왕국의 행정 구역
13세기 조지아 왕국의 행정 구역

2. 배경

라지카와 이베리아로 알려졌던 초기 조지아 왕국들은 서기 3~6세기에 걸쳐 벌어진 로마-페르시아 전쟁으로 인해 봉신국으로 전락하거나 멸망했다. 그 후 이 지역은 7세기 초 아랍 무슬림의 정복으로 이슬람 제국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바그라티온 가문 출신의 이베리아 왕족들은 아랍의 압제에 맞서 싸우면서 타오-클라르제티 지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그들은 비잔티움 제국의 명목상 봉신으로써 이베리아 왕국을 세웠고, 888년까지 자신들의 지배권을 조지아 중부 지역(카르틀리)로 확장하면서 기반을 다졌다. 이 무렵 바그라티온 왕조는 타오와 클라르제티를 주요 거점으로 하는 세 분파로 나뉘어져 있었다.

마르완 이븐 무함마드의 조지아 침공(736년)은 압하지야인, 라즈인, 이베리아인의 동맹에 의해 격퇴되었다. 아랍 세력으로부터의 지속되는 침공, 그리고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반발심의 증가는 조지아계 국가들이 단일 봉건 군주제로 통일되는 과정의 추진제가 되어주었다. 9세기에 조지아 정교회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분리되었고, 므츠헤타 대주교의 권위를 인정했다. 교회 언어가 기존의 그리스어에서 조지아어로 바뀐 것도 이 무렵이다.[88]

3. 역사

초기 조지아 왕국들은 로마-페르시아 전쟁 동안 봉건 영지로 축소되었고, 7세기 초기 이슬람 정복의 지배를 받았다.

바그라티오니 왕조 출신의 이베리아 공왕들은 아랍 지배에 맞서 싸워 타오-클라르제티 지역을 통치했다. 이들은 이베리아 쿠로팔라타이트를 비잔티움 제국의 명목상 속국으로 세웠다. 888년, 카르틀리를 장악하고 이베리아 왕국을 재건했으나, 왕국은 세 분파로 나뉘었다.

736년, 마르완 2세의 조지아 침공은 아브카지아인, 라지카인, 이베리아 동맹군에 의해 격퇴되었다. 이러한 성공적인 방어와 비잔티움과의 갈등 증가는 조지아 국가들을 단일 봉건 군주국으로 통합하는 과정으로 이어졌다. 9세기, 조지아 교회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분리되어 므츠헤타 총대주교청의 권위를 인정받았고, 교회 언어는 그리스어에서 조지아어로 바뀌었다.[11]

10세기 다비트 3세가 주변 국가를 정벌하며 세력을 확장했고, 그의 사후 바그라트 3세가 즉위하여 조지아 왕국을 출범시켰다. 이후 조지아는 비잔티움 제국, 셀주크 제국 등과 전쟁을 치르며 영토를 확장하고, 다비트 4세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조지아 황금기11세기 말~13세기 조지아 왕국의 전성기로, 문화가 꽃피고, 군사, 정치, 경제적으로 번영했다. 조지아 르네상스, 동방 르네상스라고 불린다.[66][67]

타마르 여왕 시대에 조지아는 전성기를 누렸으나, 이후 몽골과 티무르의 침입으로 쇠퇴하여 결국 1490년에 여러 왕국과 공국으로 분열되었다.

3. 1. 조지아의 통일

압하지야 베디아 대성당에 있는 바그라트 3세 프레스코화


10세기 동안 이베리아 왕 다비트 3세는 주변의 적대 국가들을 정벌하여 세력을 확장했다. 그의 치세 동안 이베리아 왕국 영역은 북쪽의 타오-클라르제티부터 남쪽의 반 호수까지 이르렀다. 978년, 압하지야에서 친 이베리아 쿠데타가 일어나자, 그는 친척 구르겐의 친아들이자 자신의 양자였던 바그라트 3세를 압하지야의 왕으로 임명했다.[89]

이후 다비트 3세와 구르겐이 잇달아 사망하면서, 바그라트 3세는 타오-클라르제티와 압하지야 전역을 다스리는 유일한 조지아 군주가 되었다. 1008년, 그는 공식적으로 통일된 조지아 왕국의 군주를 선언함으로써 '''조지아 왕국'''을 출범시켰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자신에게 복종하길 거부하는 카헤티 왕국에 대한 군사 원정을 단행하여, 1010년에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그는 이 시기에 자신을 "압하지야인, 란스, 카흐인, 카르트벨인의 왕"이라 칭했다. 또한 바그라트는 자신의 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왕권을 위협하는 클라르제티의 바그라티온 제후들의 자치권을 대폭 약화시켰다.

이후 바그라트는 아들 기오르기 1세의 왕위를 확보하기 위해 재차 사촌들을 숙청했으며, 그들의 영역을 대부분 합병시켰다. 이리하여 조지아 전역이 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슴바트 3세의 아들이 콘스탄티노플로 달아난 뒤 비잔티움 제국의 후원을 받고 그에게 맞섰으나, 대세를 뒤집지는 못했다.[90]

바그라트 3세의 집권은 바그라티온 가문이 조지아에서 강력한 권력을 구축했다는 것과, 수 세기 동안 이 지역을 괴롭혀왔던 권력 투쟁이 종식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비록 타오트빌리시와 같은 영토 일부가 각각 비잔티움, 아랍의 지배 하에 남아있었지만, 바그라트 3세는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외교 정책을 펼침으로써 이들과의 별다른 분쟁 없이 그의 통치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3. 2. 비잔티움 제국과의 전쟁과 평화

기오르기 1세의 통치는 주로 비잔티움 제국과의 전쟁으로 점철되었는데, 이는 990년 비잔티움 황제 바실리오스 2세가 반역자 바르다스 포카스를 지원한 다비트 3세를 굴복시키고 인접한 이베리아 영토를 강제로 할양받은 일로부터 비롯되었다. 기오르기 1세는 이를 되찾기 위해 기회를 노렸고, 1015~1016년 바실리오스 2세가 불가리아 제1제국과 전쟁을 벌이자, 이 틈을 타 비잔티움 국경을 침범하여 여러 지역을 약탈하고 타오를 점령했다.[1]

1018년, 불가리아 제1제국이 멸망하고 불가리아 전역이 비잔티움 제국의 속주로 편입되었다. 바실리오스 2세는 조지아 정벌에 착수했고, 약 2년간의 전쟁 끝에 비잔티움 제국이 승리했다. 기오르기 1세는 타오 지역과 서남부 영토 일부를 할양해야 했으며, 이 지역은 나중에 이베리아 테마로 조직되었다. 그의 어린 아들 바그라트 4세는 인질로 콘스탄티노플로 보내졌다.[1]

기오르기 1세가 1025년에 사망하자, 8살 난 그의 아들 바그라트 4세가 왕위를 이었다. 그는 나이가 어려 모후 마리암이 리파리트 4세 및 카르틀리 공작 이바네와 함께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타오, 트빌리시, 카헤티, 헤레티와 같은 대부분의 조지아 지역들이 외세의 지배를 받거나 독자적인 제후들의 통치를 받았으며, 귀족들의 충성심도 매우 의심스러웠다.[2]

3. 3. 튀르크 대침공

11세기 후반, 셀주크 제국이 페르시아를 거쳐 소아시아 일대로 침입해오면서 조지아 왕국과 비잔티움 제국 사이의 협력이 강화되었다. 바그라트 4세의 딸 마리아는 1066년에서 1071년 사이에 비잔티움 황제 미하일 7세 두카스와 결혼했다.[1]

1065년, 셀주크 술탄 알프 아르슬란카르틀리를 침공하여 트빌리시를 점령하고 모스크를 건설했다.[2] 기오르기 2세는 반격하여 카르틀리를 탈환했다. 또한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셀주크의 공세에 직면한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타오 일대를 돌려받았다. 제국은 기오르기 2세에게 쿠로팔라테스카이사르 칭호를 수여하며 동부 국경 방어 임무를 맡겼다.[1]

셀주크 제국이 내전에 빠지자, 기오르기 2세는 1074년 파트스키시 전투에서 간자의 셀주크 총독을 크게 물리쳤다.[3] 그러나 1076년, 셀주크 술탄 말리크샤 1세가 조지아를 침공하여 여러 마을과 도시를 파괴했다. 1079년부터 대대적인 침공으로 조지아 전역이 황폐화되자, 기오르기 2세는 매년 막대한 공물을 바치고 충성을 서약하며 항복했다.[4]

3. 4. 조지아 레콘키스타

1088년, 대규모 지진으로 조지아에 막대한 피해가 발생하자, 기오르기 2세는 아들 다비트 4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퇴위했다.[15] 다비트 4세는 궁정 장관 콘디디의 기오르기와 함께 국가 재건에 착수했다. 군대를 재편성하여 유격전을 전개했고, 1089~1100년까지의 작전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 1099년 다비트 4세는 셀주크 술탄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을 거부했다. 튀르크인들이 물러가면서 조지아인들이 터전으로 돌아왔고, 경제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당시 말리크샤 1세 사후 셀주크 제국은 내분에 시달렸고, 제1차 십자군 원정으로 아랍권의 시선이 십자군 쪽으로 쏠린 국제 정세는 조지아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1118년까지 카헤티 왕 아그사르탄 2세 등 지역 통치자들이 다비트 4세의 군사 원정 앞에 굴복했다. 1110년 삼쉬빌데가 함락되었고, 1115년 루스타비를 공략하여 트빌리시를 고립시켰다. 1118~1120년 사이 쿠만인킵차크인들이 정착하면서 군사 개혁이 이루어졌다. 다비트 4세는 이들을 정규군으로 편입시켜 국경 방비를 맡겼는데, 이는 킵차크 칸의 딸 구란두크트와 결혼하여 동맹을 맺은 덕분이었다.

1120년 다비트 4세시르반과 카발라를 침공했고, 캅카스 동부와 남서부 셀주크 영토를 공격했다. 1121년 디드고리 전투에서 지하드를 선포하고 쳐들어온 토후국, 셀주크 제국 연합군에게 대승했다. 이후 트빌리시를 점령하고 수도로 선포하여 조지아 황금기의 시작을 알렸다.[15]

1123년 다비트 4세는 시르반샤를 공격하여 영토 절반을 빼앗고 드마니시를 해방시켰다. 1124년 데르벤트를 공략하고 헤레티 왕국을 복속시켰다. 시르반아니를 탈환하고 "아르메니아와 조지아의 왕"으로 칭했다. 캅카스 남부 전체가 조지아 왕국 영토가 되었다.

다비트 4세는 조지아 교회 건설을 후원하고, 캅카스 북부와 교역로를 통제하여 영향력을 강화했다. 비잔티움 제국에 딸 카타를 시집보내 동맹 관계를 굳건히 했다. 겔라티 수도원을 설립하고 예술적으로 유능한 군주였던.[16] 다비트 4세는 8개의 자유시 형식의 시편인 『회개의 찬가』를 작곡했다.[17]

1156년, 기오르기 3세가 데메트레 1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기오르기 3세는 아버지보다 더 적극적이고 팽창주의적인 대외 정책을 펼쳤다. 즉위한 해에 기오르기 3세는 남부의 아흘라트 토후국을 상대로 선제공격을 감행하여 성공적으로 마무리했고, 그들의 영토를 습격하여 약탈을 자행하고 수많은 포로들을 사로잡았다.[24][25] 같은 해, 기오르기는 소아시아 동부의 셀주크 제국 지방 정권을 공격하여 드빈을 해방시켰다. 또한 딸 루스단을 동로마 황제 안드로니코스 1세 콤네누스의 아들 마누엘 콤네누스와 결혼시켜 왕가의 권위를 높였다.

3. 4. 1. 다비트 4세

246x246px
다비트 4세 치하 조지아 왕국의 영토


1088년, 대규모 지진으로 조지아에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다. 튀르크인들의 침략으로 민심이 악화되자, 기오르기 2세는 1089년 아들 다비트 4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퇴위했다.[15]

다비트 4세는 궁정 장관 콘디디의 기오르기와 함께 국가 재건에 착수했다. 군대를 재편성하여 유격전을 전개했고, 1089~1100년까지의 작전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 1099년 다비트 4세는 셀주크 술탄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을 거부했다. 튀르크인들이 물러가면서 조지아인들이 터전으로 돌아왔고, 경제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당시 말리크샤 1세 사후 셀주크 제국은 내분에 시달렸고, 제1차 십자군 원정으로 아랍권의 시선이 십자군 쪽으로 쏠린 국제 정세는 조지아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1118년까지 카헤티 왕 아그사르탄 2세 등 지역 통치자들이 다비트 4세의 군사 원정 앞에 굴복했다. 1110년 삼쉬빌데가 함락되었고, 1115년 루스타비를 공략하여 트빌리시를 고립시켰다.

1118~1120년 사이 쿠만인킵차크인들이 정착하면서 군사 개혁이 이루어졌다. 다비트 4세는 이들을 정규군으로 편입시켜 국경 방비를 맡겼는데, 이는 킵차크 칸의 딸 구란두크트와 결혼하여 동맹을 맺은 덕분이었다.

1120년 다비트 4세시르반과 카발라를 침공했고, 캅카스 동부와 남서부 셀주크 영토를 공격했다. 1121년 디드고리 전투에서 지하드를 선포하고 쳐들어온 토후국, 셀주크 제국 연합군에게 대승했다. 이후 트빌리시를 점령하고 수도로 선포하여 조지아 황금기의 시작을 알렸다.[15]

1123년 다비트 4세는 시르반샤를 공격하여 영토 절반을 빼앗고 드마니시를 해방시켰다. 1124년 데르벤트를 공략하고 헤레티 왕국을 복속시켰다. 시르반아니를 탈환하고 "아르메니아와 조지아의 왕"으로 칭했다. 캅카스 남부 전체가 조지아 왕국 영토가 되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젤라티 수도원의 오늘날 모습


다비트 4세는 조지아 교회 건설을 후원하고, 캅카스 북부와 교역로를 통제하여 영향력을 강화했다. 비잔티움 제국에 딸 카타를 시집보내 동맹 관계를 굳건히 했다.

다비트 4세겔라티 수도원을 설립했다. 그는 예술적으로 유능한 군주이기도 했다.[16] 다비트 4세는 또한 8개의 자유시 형식의 시편인 『회개의 찬가』를 작곡했다.[17]

3. 4. 2. 디미트리오스 1세

1156년, 기오르기 3세가 데메트레 1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기오르기 3세는 아버지보다 더 적극적이고 팽창주의적인 대외 정책을 펼쳤다. 즉위한 해에 기오르기 3세는 남부의 아흘라트 토후국을 상대로 선제공격을 감행하여 성공적으로 마무리했고, 그들의 영토를 습격하여 약탈을 자행하고 수많은 포로들을 사로잡았다.[24][25]

같은 해, 기오르기는 소아시아 동부의 셀주크 제국 지방 정권을 공격하여 드빈을 해방시켰다. 또한 딸 루스단을 동로마 황제 안드로니코스 1세 콤네누스의 아들 마누엘 콤네누스와 결혼시켜 왕가의 권위를 높였다.

3. 4. 3. 기오르기 3세

1156년, 데메트레 1세의 아들 기오르기 3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같은 해, 기오르기는 소아시아 동부의 셀주크 제국 지방 정권을 공격하여 드빈을 해방시켰다. 또한 딸 루스단을 동로마 황제 안드로니코스 1세 콤네누스의 아들 마누엘 콤네누스와 결혼시켜 왕가의 권위를 높였다.

타마르 여왕과 조지 3세 (베타니아 수도원 벽화 복원)

3. 5. 황금시대

타마르는 조지아 왕국 최초의 여왕으로, 즉위 초 유리 보골류브스키의 쿠데타를 진압하고 귀족을 숙청하여 왕권을 강화했다. 스스로를 "왕중왕"이라 칭하며 권위를 확고히 했다.

1190년대 초부터 조지아는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로 세력을 확장, 엘디귀즈 왕조, 시르반샤 등과 충돌했다. 1195년 샴키르 전투에서 다비트 소슬란은 아부 바크르를 격파, 시르반샤는 조지아의 봉신이 되었다.

기독교로 개종한 쿠르드족 형제 자카레와 이바네 음하르그르젤리는 아라라트 평원을 점령하고 아니를 탈환, 중앙 아르메니아 일대를 평정했다.

룸 술탄국 술레이만샤 2세의 위협에도 불구, 1203년 또는 1204년 바시아니 전투에서 다비트 소슬란은 승리했다.

1203~1205년 사이, 조지아는 드빈을 점령하고 카르스에르진잔 아미르들을 제압했다. 1206년 에르주룸 아미르가 복종을 거부하자, 아라스 강 주변 요새와 마을을 공략, 카르스아이유브 술탄국에 점령되었다.

1209년 조지아는 아이유브 술탄국에 도전, 아흘라트를 포위했으나 이바네 음하르그르젤리가 포로로 잡혀 30년 휴전을 맺고 반 호수 일대를 넘겨주었다.

자카레 음하르그르젤리의 아제르바이잔~페르시아 원정


1207년 다비트 소슬란 사후에도 확장은 계속되었다. 1209년 아르다빌아니를 습격, 12,000명 학살에 타마르는 자카레에게 응징을 명했다. 1210년 자카레는 나흐츠반을 지나 줄파, 마란드, 타브리즈 등을 거쳐 고르간까지 진군, 페르시아 북부까지 영향력을 넓혔다.

1204년 트라페준타 제국 건국에 알렉시오스 1세를 지원, 동맹국으로 만들었다.

발칸 반도와 근동 지역 중세 조지아 수도원 지도


타마르는 예루살렘 함락 이후 조지아를 중동 기독교인 수호자로 인식시키려 했다. 조지아 선교사들은 북캅카스에서 활동했고, 지중해 동부 연안에 수도원이 설립되었다. 살라흐 앗 딘 유수프에게 예루살렘 수도원 재산 반환을 요구, 성공했으며, 성십자가를 위해 비잔티움 황제보다 많은 액수를 제시했다.

자크 드 비트리는 조지아인을 "호전적이고 용감하며... 성 게오르기우스를 경외"한다고 기록했다.

이 시기 기독교, 세속주의, 비잔티움, 페르시아 양식이 혼합된 조지아 문화가 번영했다. 조지아는 비잔틴 서방과 동일시하며 왕권을 신에게서 받았다. 돔형 대성당, 비잔티움, 페르시아 양식이 혼합된 여왕 초상화가 대표적이다.

조지아는 이슬람과 무역하며 문화를 수용, 조지아어·아랍어 주화가 주조되었다. 1200년경 타마르 주화에는 비잔티움 상징물과 "메시아 대변자"라는 아랍어 글귀가 있었다. 기독교 도덕, 가부장 문화 속 세속 문학이 등장, 쇼타 루스타벨리의 《표범 가죽을 쓴 기사》가 절정이었다.

타마르 통치 아래 최대 영토와 영향권에 도달한 조지아 왕국


타마르 통치 말기, 조지아 국력은 절정에 달했다. 캅카스 산맥에서 에르주룸, 지기이에서 간자까지, 아르메니아 북부 및 중부 자카르 왕조, 시르반샤, 트라페준타 제국이 복속했다. 타마르는 "폰토스 해에서 흑해, 카스피 해에서 스페리와 데르벤트, 캅카스 전역에서 하자리아와 스키티아에 이르기까지" 모든 땅의 주인으로 칭송받았다.

1213년 타마르는 기오르기 4세와 공동 통치 중 사망, 조지아 황금시대의 종말을 예고했다.

조지아 황금기11세기 말~13세기 조지아 왕국 전성기로, 문화가 꽃피고, 군사, 정치, 경제적으로 번영했다. 조지아 르네상스, 동방 르네상스라고 불린다.[66][67]

11~13세기 초 조지아는 바그라티온 왕조 통합으로 황금기를 맞았다. 왕들은 교회에 경제적 이점, 영지를 주어 지지받았다. 다비드 4세는 1103년 루이시-우르브니시 공의회로 미아피지즘을 규탄, 게오르기에게 권한을 부여했다. 교회는 귀족 가문과 동등한 권력을 가진 봉건 제도였다.

기독교는 조지아 문화 중심으로, 서예, 다성 음악, 클로이조네 에나멜 아이콘(카후리 3폭 제단화), "조지아 십자 돔 양식" 건축이 발전했다. 겔라티 수도원, 바그라티 대성당, 이칼토 수도원, 스베티츠호벨리 대성당이 대표적이다.

아토스의 에우티미우스, 아토스의 게오르기, 아르센 이칼토엘리, 에프렘 므치레가 대표적 기독교 인물이다. 겔라티 수도원 학원에서 이오아네 페트리치는 기독교, 아리스토텔레스 사상, 네오플라토니즘 사상을 종합하려 했다.

타마르 여왕 통치는 예술 발전을 이어갔다. 종교 주제는 세속 문학에 지배력을 잃기 시작, 쇼타 루스타벨리의 《표범 가죽의 기사》에서 절정에 달했다.

3. 5. 1. 타마르 여왕

몽골의 조지아 침입 및 쿠나니 전투


타마르는 기오르기 3세의 딸로, 조지아 역사상 최초의 여왕으로서 단독 통치하며 조지아 왕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녀는 왕국을 튀르크인으로부터 보호하고, 국내 긴장을 완화했으며, 첫 번째 남편인 유리 보골류프스키가 시도한 쿠데타도 진압했다. 또한, 사형고문 폐지 등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정책을 실시했다.[71]

타마르 여왕 시대, 왕국은 해외 수도원 건설을 추진했다. 사진은 아토스산의 이다.


타마르 여왕 시대의 주목할 만한 사건은 1204년 트라페존트 제국 건국이다. 그 해, 동로마 제국이 일시적으로 멸망하자, 여왕은 친척인 알렉시오스 1세와 그의 동생 다비드를 지원하여 제국을 건국했다.[72] 타마르 여왕의 칙령에 따른 역사가에 의하면, 트라페존트 지원의 목적은 안티오키아아토스산의 수도원에 대한 송금 약속을 어긴 알렉시오스 4세 앙겔로스에 대한 처벌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앙겔로스 왕조제4차 십자군의 침공으로 앞날이 불투명해지자 조지아의 남서쪽에 우호적인 국가를 세웠다는 설도 있다.[73][74]

타마르 여왕 시대 후반, 왕국은 성지에서 조지아 교회의 보호에 힘썼다.[75] 살라딘의 전기 작가에 따르면, 1187년 아이유브 왕조의 예루살렘 침공 이후, 타마르 여왕은 살라딘에게 사절을 보내 예루살렘에서 조지아 교회의 반환을 요청했다고 한다. 살라딘의 답변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여왕의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76] 또한, 살라딘에게 햇틴 전투에서 빼앗긴 성십자가를 200000 금화로 되사겠다는 제안을 했는데, 이는 동로마 황제가 제안한 금액보다 많았지만, 살라딘은 거절했다.[77]

라틴 예루살렘 총대주교인 자크 드 비트리는 당시 조지아 왕국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78]

3. 6. 황금시대의 종말

타마르 사후, 1213년에 왕위에 오른 기오르기 4세는 에르주룸, 나흐츠반, 아흘라트의 아미르들을 상대로 군사 원정을 감행하여 조공을 바치도록 강요하고, 아나톨리아이란에서 조지아의 패권을 재확인하는 등, 그의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황금 시대를 계속 이어가는 듯 했다. 그러나 1221~1222년 무렵, 수부타이제베가 이끄는 몽골 군대가 쳐들어와 쿠난 전투에서 조지아군을 크게 물리쳤고, 기오르기 4세는 이 전투에서 입은 상처가 악화되어 요절했다.[79] 귀족들과 교회는 기오르기 4세의 아들 다비트 7세의 어머니가 평민 출신인 것을 문제삼아 즉위에 반대했고, 기오르기 4세의 누이 루수단이 여왕으로 등극했다.

1225년, 호라즘 제국의 잘랄 웃 딘 밍부르누가 몽골 군대를 피해 아제르바이잔으로 피신, 타브리즈를 본거지로 삼고 호라즘 왕조의 잔여 병력을 규합한 뒤 루수단에게 복종을 요구했다. 조지아가 이를 거부하자, 잘랄 웃 딘은 곧바로 군대를 이끌고 조지아 동부를 휩쓸었다. 1225년 가르니 전투에서 조지아군은 패배했고, 아르메니아는 속수무책으로 함락되었다. 이듬해 호라즘 군대가 트빌리시를 점령,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자 루수단은 쿠타이시로 도망쳐 요새를 넘겨주고 공물을 바치는 조건으로 공격 중단을 요청, 잘랄 웃 딘은 이를 수용했다. 이후 반란 진압을 위해 이란으로 이동했다가, 조지아 왕국과 연합한 무슬림 아미르들의 반발에 직면하여 1228년 볼니시 전투에서 조지아군을 다시 격파했다.

1230년, 루수단은 트빌리시로 귀환했으나, 초르마칸이 이끄는 몽골 군대가 영토 확장 및 정치적 복속을 목적으로 조지아를 침공했다. 조지아군은 몽골에 대항할 힘이 없었다. 1235년, 몽골군은 간자 주민들을 학살하고 샴코르를 함락, 약탈했다. 루수단은 트빌리시를 불태우고 서부로 피신했다. 몽골군은 로리 베르드, 카얀, 뒤마니스, 삼쉬빌데를 점령하고 조지아 영내 요새를 파괴했다. 아바그 음하르그르젤리 등 귀족들이 항복, 조지아 동부 전역이 몽골에 지배당했다. 몽골군은 리키 산맥을 넘어 조지아 서부를 공격하지는 않았다.

1239년, 루수단은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게 몽골군의 만행을 설명하며 구원을 요청하고,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통일에 찬성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교황은 선교사 파견만 제안하고 도움을 주지 않았다. 몽골 군대는 아니카르스 등 아르메니아 일대를 초토화시켰다. 루수단은 바투 칸에게 사절을 보내 항복 협상을 진행했다.

–'''1239년 조지아-몽골 조약'''–

1. 조지아 귀족들에게 몽골 귀족들과 동등한 지위 보장.
2. 조지아는 (시르반샤 같은) 이슬람 봉신국들을 상실하지만, (아르메니아 같은) 기독교 봉신국들은 유지.
3. 조지아 왕국은 매년 50,000개의 금화( 약 250kg)와 추가 공물을 바친다.
4. 조지아 군대는 몽골 호위군(케식)에 편입.
5. 루수단의 아들을 조지아 왕으로 인정.



1245년, 몽골 침공 당시 조지아 왕국의 지도.

3. 6. 1. 호라즘 제국과 몽골의 침략

몽골의 루스 침공과 같은 시기에, 몽골군 일부는 남하하여 조지아를 침공했다. 타마르 여왕의 아들인 George IV of Georgia|기오르기 4세영어는 즉시 제5차 십자군 지원을 중단하고 전국적인 저항을 시작했다. 그러나 조지아는 몽골의 군사력에 대항할 수 없었고, 기오르기 4세는 초기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1222년 3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79]

몽골의 지배에도 불구하고 조지아 문화의 발전은 계속되었다. 이미지는 우비사 수도원의 프레스코화이다.


기오르기 4세의 여동생인 루스단이 왕위를 계승했지만, 그녀에게는 국정 경험이 없었고, 국가 자체도 유목민을 몰아낼 만큼 강하지 않았다. 1236년, 출르마군이 이끄는 몽골군이 다시 조지아를 침공하자, 루스단은 조지아 서부로 피신해야 했다. 동부에서 저항을 계속하던 귀족들은 완전히 멸망했고, 남은 귀족들은 몽골에 복속하여 공물을 바쳤다. 몽골군은 스라미 산맥을 넘지 않았기 때문에 조지아 서부의 피해는 적었고, 루스단은 위기를 벗어났다. 이후 루스단은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실패했고, 1243년에 몽골에 복속했다.[79]

한편, 루수단은 기오르기 4세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다비트 7세가 왕위를 갈망할 것을 두려워하여 사위인 룸 셀주크 술탄 케이휘스레브 2세의 궁정에 그를 보내 억류하게 하고, 자신의 아들 다비트 나린을 카라코룸의 몽골 궁정으로 보내 공식적인 후계자로 인정받게 했다. 그러나 그녀가 1245년에 사망한 뒤에도 다비트 나린은 돌아오지 않았고, 귀족들은 2년 더 기다려봤지만 여전히 돌아오지 않자 그가 사망했다고 여기고 1247년 다비트 7세를 조지아로 불러들인 뒤 왕으로 즉위시켰다. 하지만 사실 생존해 있었던 다비트 나린은 지지자들을 끌어모아 다비트 7세에게 반기를 들었다. 나린의 지지자들은 전통적인 조지아 왕실법에 따라 왕권은 나린에게 속하며, 사생아인 다비트 7세는 왕이 될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다비트 7세의 지지자들은 이에 맞서 기오르기 4세는 다비트 7세를 왕으로 세울 의사가 있었다며 선왕의 유지를 이어받은 것뿐이라고 주장했다.[79]

다비트 나린의 프레스코식 초상화. 그는 오늘날 몽골의 압제에 대해 저항했던 민족의 영웅으로서 조지아에서 추앙받고 있다.


분쟁이 좀처럼 끝나지 않자 양측 모두 몽골에 분쟁을 해결해달라고 호소했다. 몽골의 계승법은 적법한 자녀와 사생아에 차이를 두지 않았으므로, 귀위크 칸은 이에 의거하여 두 사람이 조지아를 동시에 다스리되 나이 많은 사람이 더 높은 권위를 가지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리하여 다비트 나린과 다비트 7세는 1247년부터 1259년까지 조지아를 공동 통치했다. 그러나 다비트 나린은 과중한 공물 납부와 몽골의 지나친 내정 간섭으로 국가가 황폐해지는 사실에 분노하여, 1259년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일 칸국의 훌라구 칸은 휘하 장군인 아르군 아카에게 대군을 맡겨 그를 토벌하게 했다. 그러자 다비트 나린은 적군과 정면으로 맞붙어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조지아 서부로 후퇴하여 쿠타이시 일대를 요새화했다. 아르군 아카는 동부 조지아를 장악한 뒤 서부 일대마저 공략하려 했지만, 산악 지대에서 농성하고 있는 그를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79]

1261년, 조지아 동부를 다스리던 다비트 7세가 맘루크 정벌을 위해 군대를 제공하라는 훌라구의 명령을 거부하고 반기를 들었다가 일 칸국의 대대적인 침략을 받자 그에게 망명했다. 비록 1년 뒤에 다비트 7세가 다시 몽골의 종주권을 받아들이고 조지아 동부로 돌아갔지만, 다비트 나린은 계속 몽골의 지배를 거부하고 서부 조지아 일대를 독자적으로 통치했다. 이리하여 조지아는 몽골의 지배에 순응하는 다비트 7세의 동부 조지아 왕국과, 몽골의 지배에 대항하는 다비트 나린의 서부 조지아 왕국으로 분열되었다.[79]

3. 6. 2. 왕국의 분열

1311년 당시 조지아 지도. 서부와 동부로 분열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다비트 나린은 일 칸국의 위협에 맞서 주변 국가들과의 유대를 강화하고자 했다. 1264~1265년 사이에는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그들과 우호 관계를 맺었으며, 동시에 일 칸국과 대립하던 북부의 킵차크 칸국과도 친선 관계를 맺었다. 또한 그는 일 칸국 내부의 갈등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려고 시도했다. 1269년, 그는 바라크과 함께 아바카 칸에 대항했던 테구데르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 하지만 테구데르의 군대가 조지아의 주권을 위협하자, 그는 일 칸국 장군 시라문 노얀의 편을 들어 데구데르를 격퇴했다. 그러나 아바카 칸은 그가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던 자들을 도와주었던 것을 용서하지 않고, 1270년대에 다비트 나린을 징벌하고자 원정군을 두 차례 파견했다. 그는 이에 맞서 험준한 산악 지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해 몽골군에 상당한 피해를 안겼고, 결국 몽골군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철수했다.[1]

1282년 4월, 다비트 나린은 트라페준타 제국 황제 요안니스 2세가 부재한 틈을 타서 그 수도 트라페준타로 쳐들어가 도시를 포위했지만 공략에 실패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마누일 1세의 딸이자 요안니스 2세의 이복 여동생인 테오도라를 후원하여 제위를 찬탈하게 했다. 그러나 요안니스 2세가 1285년 트라페준타로 돌아온 뒤 테오도라를 축출하면서, 트라페준타 제국을 속국으로 삼으려던 그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1]

한편 동부에서는 다비트 7세가 1270년에 사망한 뒤 아들 디미트리오스 2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일 칸들에게 충성을 다했고, 일 칸국의 원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전공을 수차례 세웠다. 1288년, 디미트리오스 2세는 아르군 칸의 명령에 따라 카스피해 연안의 데르벤트 일대에서 봉기한 반란군 토벌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그런데 얼마 후 일 칸국의 권신 부카가 반역을 꾀했다가 발각당해 일가족이 처형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부카의 아들이 그의 딸과 결혼했기에, 아르군 칸은 디미트리오스 2세도 역모에 가담했을 거라 의심하고 소환 명령을 내렸다. 조지아 총대주교와 귀족들이 소환에 응하지 말라고 권유했지만, 그는 몽골군이 조지아를 침략할 것을 우려해 이를 받아들였다. 그는 아르군 칸 앞에 도착한 직후 체포되었고, 1289년 3월 12일 모바칸에서 참수되었다. 사후 그의 유해는 조지아로 이송된 뒤 므츠헤타에 묻혔으며, 조지아 정교회는 그를 순교자로 여기고 성인으로 시성했다.[1]

아르군 칸은 디미트리오스 2세를 참수한 뒤 다비트 나린의 동의를 얻어 나린의 차남 바크탕 2세를 동부 조지아의 왕으로 세웠다. 그러나 바크탕 2세는 재위 3년만인 1292년에 사망했고, 디미트리오스 2세의 아들 다비트 8세가 새 왕으로 등극했다. 그는 일 칸의 신임을 얻고자 왕국의 수도인 트빌리시보다 일 칸국의 수도인 타브리즈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1297년, 일 칸국에서 내전이 벌어졌다. 그는 바이두 칸을 지지했지만, 가잔 칸이 바이두 칸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다. 이후 가잔 칸이 트빌리시에 머물고 있던 그에게 소환령을 내렸지만, 다비트 8세는 아버지가 소환에 응했다가 어찌 되었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가잔 칸은 진노하여 대군을 일으켜 동부 조지아 일대를 무자비하게 황폐화시켰고, 몽골군의 지원을 받은 오세티야인들은 시다 카르틀리 지방을 공격하여 리아흐비 강의 계곡 일대를 정복했다. 이에 다비트는 므티울레티 산맥에 숨은 뒤, 자신을 추격하는 몽골 대군을 상대로 치카레에서 필사적인 유격전을 전개하여 이들을 격퇴했다.[1]

1299년, 가잔 칸은 다비트 8세를 조지아 왕으로 더 이상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그의 동생 기오르기 5세를 새 왕으로 세웠다. 하지만 그는 여러 원정들을 이끌면서 조지아군을 이끌 수 있는 성숙한 왕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결국 1302년에 기오르기 5세를 폐위시킨 후 다비트 8세의 또 다른 형제인 바크탕 3세를 다시 새로운 조지아 왕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그는 북부 산악지대에 자리를 잡고 계속 항전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1299~1301년 사이, 그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몽골 군대가 수 차례 파견되었으나, 다비트 8세는 산악 부족의 지원에 힘입어 이들을 재차 격파했다. 이에 일 칸국은 협상을 제의하며 가잔 칸의 진영을 방문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와 같은 최후를 맞이할 생각이 일절 없었기에 다시 이를 거부했다.[1]

1304년, 다비트 8세는 트빌리시를 잠시 공략했으나, 곧 몽골 군대의 지원을 받은 바크탕 3세에게 격퇴되어 다시 산악 지대로 후퇴했다. 이후에도 그곳에서 끈질기게 저항한 끝에, 다비트 8세는 동부 조지아의 대부분을 자신의 세력권으로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일 칸국은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판단하고, 1308년 바크탕 3세가 죽자 그를 조지아 왕으로 인정했다. 그 대신 다비트 8세는 자신의 아들 기오르기 6세를 인질로 보내야 했다. 한편, 그는 일 칸국의 전통적 경쟁 국가였던 맘루크 왕조와 우호 관계를 이어갔으며, 1305년에는 비잔티움 제국의 중재에 힘입어 예루살렘의 십자가 수도원을 조지아 정교회로 복귀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1311년, 다비트 8세가 사망한 후 기오르기 6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급사하고 말았다.[1]

게오르기 5세의 통치 시대(1299년~1302년, 1314년~1346년)에는 몽골의 침략에서 회복하여 다시 번영하는 듯했지만, 1386년부터 1403년까지 8차례에 걸친 티무르의 침공은 왕국에 큰 타격을 입혔다. 결국 왕국은 1490년에 붕괴되어, 이메레티 왕국 (서조지아), 카헤티 왕국 (동조지아), 카르틀리 왕국 (조지아 중부에서 동부에 걸쳐)으로 분열되었고, 바그라티오니 왕조의 분가인 왕족들이 각각 왕위에 올랐다. 왕국의 나머지 영토는 5개의 공국으로 나뉘었고, 조지아 귀족들이 공으로 즉위했다.[1]

3. 6. 3. 계속되는 몽골의 위협

"훌륭한 자" 기오르기 5세의 초상화. 그는 70년간 분열되었던 왕국을 통합하고 중흥기를 가져온 명군이었다.


1313년 왕위에 오른 '''기오르기 5세'''는 종주국이었던 일 칸국과 화목하게 지내고자 노력했다. 1319년에는 일 칸국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칸의 신임을 얻었고, 아미르 추판으로부터 조공을 직접 받을 권리를 얻었다.[79]

기오르기 5세 치하 조지아 왕국의 영토. 이전 전성기 시절의 상당 부분 영토를 회복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오세티아인과 알란인들을 캅카스 산맥 이북으로 몰아냈고,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 귀족들을 처형하며 왕권을 강화했다. 1330년에는 서부 조지아로 진군하여 쿠타이시를 함락하고, 여러 귀족들로부터 복종을 받아냈다. 1334년에는 삼츠헤를 다시 조지아로 편입시켜 통일을 완수했다.[79]

1335년 흑사병으로 아부 사이드 칸이 사망하고 일 칸국이 분열되자, 기오르기 5세는 몽골에 대한 조공을 중단하고 몽골 군대를 추방했다. 이후 여러 차례 몽골의 침입을 격퇴하며 주권을 회복했다.[79]

3. 6. 4. 재통합과 일시적인 중흥기



1334년, 잘라이르 왕조의 셰이크 하산이 아부 사익드에 의해 조지아 총독으로 임명되었다.[48] 젊고 무능한 정치가 아부 사익드 칸은 국가 쇠퇴를 막을 수 없었다. 1335년 그의 사망 후 국가는 완전한 혼란에 빠졌고, 사실상 일칸국은 여러 이웃 국가로 분열되었다. 조지 5세는 이러한 상황을 잘 이용하여 몽골에 조공을 바치는 것을 중단하고 그들의 군대를 축출했으며, 국가의 이전 강력함과 그리스도교 문화를 성공적으로 회복했다.[49]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아니를 포함한 아르메니아 땅은 조지아 왕국의 일부였다.[50]

1330년대에 조지는 오르한 1세가 이끄는 오스만 부족민들의 진격으로부터 남서부 주 클라르제티를 확보했다. 1341년 그는 이웃 트라페존트 제국의 권력 투쟁에 개입하여 안나 아나쿠툴루를 지지했는데, 그녀는 라즈인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지만 1년 후 처형당했다. 그는 또한 조지아의 이웃 국가인 쉬르반에 대한 성공적인 원정을 조직했다.[51]

조지아 통일의 회복, 몽골 지배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국가 질서의 확립은 국가 경제의 부흥에 기여했다. 조지아의 도시들에서는 상업과 수공업 생산이 크게 발전했고, 중동과 북부 도시들뿐만 아니라 유럽, 특히 북부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과도 무역 및 경제 관계가 회복되었다.[52]

조지 5세는 프랑스의 필립 6세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는데, 이는 그들 사이의 서신으로 입증된다. 조지 5세는 프랑스 왕에게 시리아-팔레스타인의 "성지" 해방에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3만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있다고 썼다.[53]

중세 조지아에서 널리 사용된 예루살렘 십자는 – 현대 조지아 국기의 영감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 조지 5세의 통치 시대에 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54]

3. 6. 5. 티무르의 침공과 왕국의 혼란

몽골 제국이 붕괴하고 여러 후계 국가들이 나타나면서 혼란이 가중되던 14세기 후반, 차가타이 칸국 출신의 티무르가 등장했다. 그는 칭기즈 칸의 먼 후손이자 튀르크-몽골 전통을 계승한 군벌로, 몽골 제국의 재건을 목표로 주변 지역을 원정했다. 그의 제국은 중앙아시아에서 아나톨리아 반도까지 확장되었는데, 이는 킵차크 칸국의 칸이자 티무르의 경쟁자인 토크타미쉬와의 전쟁과 관련이 있었다.

티무르 두상 복원도


바그라트 5세가 토크타미쉬와 맺은 동맹은 조지아 왕국을 티무르 제국과의 길고 무자비한 전쟁으로 이끌었다. 티무르가 캅카스에 처음 등장한 것은 1385년경으로, 킵차크 칸국이 캅카스를 통해 북부 이란을 침공한 것에 대한 대응이었다. 티무르는 제국의 서쪽 국경과 토크타미쉬의 칸국 사이에 위치한 변경 국가들에 대한 전면적인 침공으로 보복했다. 티무르의 공격 가능성을 알아차린 바그라트 5세는 트빌리시와 그 주변을 요새화했다.

1386년 초, 티무르는 카르스에르주룸을 공략하고 조지아가 장악한 캅카스 서남부를 넘보았다. 그는 조지아 동부에 습격대를 파견하여 국경 지대의 조지아군에게 혼란을 준 뒤, 지하드를 선포하고 대군을 동원하여 북부 아르메니아를 함락시켰다. 티무르의 위세에 두려움을 느낀 삼츠헤 공작 베카 2세는 저항 없이 항복했다. 하지만 바그라트 5세는 트빌리시 요새에서 농성을 계속했다.

1386년, 티무르는 조지아 북부로 진군하여 수십 개의 마을을 파괴하고 많은 도시들을 함락시킨 뒤, 트리아레티와 사바라티아 일대를 황폐화시키고 수많은 포로를 사로잡았다. 그는 트빌리시 요새를 공격했지만, 강력한 저항과 험준한 지형으로 인해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에 티무르는 요새로 향하는 진입로를 차단하여 내부 병력을 굶주리게 하고, 구원군을 봉쇄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귀족들은 도주했고, 국왕의 충실한 측근들만이 남았다. 1386년 11월 21일, 대포 등 화약 무기의 공격으로 성벽이 무너지고 티무르 군대가 트빌리시로 진입했다. 바그라트 5세는 수비 병력을 이끌고 돌진했으나, 티무르는 구원군을 물리치고 다음날 트빌리시를 점령, 수도원들을 파괴하고 시민들을 학살했다. 바그라트 5세는 생포되어 아내 안나, 차남 다비트와 함께 티무르에게 끌려갔다. 이후 그는 포로 신분으로 티무르의 원정에 따라가면서 그의 나라가 파괴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티무르는 카라바흐에서 겨울을 보낸 뒤, 부하를 파견하여 복종하지 않는 조지아 도시들을 파괴하게 했다.

트빌리시는 황폐화되었고, 카르틀리 남부는 파괴되었으며, 므츠헤타의 정교회 수도원들이 약탈당했다. 이슬람으로 개종을 거부한 사제, 수녀, 주민들은 교회에 갇혀 산 채로 불태워졌다. 티무르 군대는 카헤티에서도 같은 만행을 저질렀다. 조지아 대부분을 파괴한 뒤 귀환한 티무르의 부하는 바그라트 5세에게 개종하지 않으면 죽이고 파괴를 재개하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그는 백성을 구하기 위해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다만 장남 기오르기 7세는 이메레티에서 잔여 병력을 규합하여 티무르에 대항했다.

바그라트 5세는 다비트 4세가 착용했던 외투를 포함한 선물을 티무르에게 바쳤고, 티무르는 그와 안나 왕비, 다비트 왕자를 조지아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그는 돌아오자마자 이슬람 개종을 취소했다. 티무르는 1387년 부하에게 12,000명의 병력을 주어 조지아를 공격하게 했으나, 기오르기 7세가 이끄는 조지아군의 매복 공격으로 섬멸되었다. 티무르는 대군을 이끌고 트빌리시 일대에서 파괴를 자행했지만, 본국에서 반란이 일어나 조지아를 떠나야 했다.

한편, 바그라트 5세에 의해 이메레티의 에리스타비로 임명되었던 알렉산드레 1세는 1387년에 독립을 선언하고 자신을 이메레티의 왕으로 칭했다. 하지만 쿠타이시는 기오르기 7세의 수중에 남았고, 밍그렐리아, 구리야, 압하지야, 스바네티의 공작은 알렉산드레 1세의 합류를 거부했다.

알렉산드레 1세는 이메레티 전역을 장악했지만 1389년 사망하고, 기오르기 1세가 뒤를 이었다. 1392년, 기오르기 1세는 바메크 1세와 맞붙었으나 참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기오르기 7세는 이메레티를 공략해 조지아 왕국과 재결합했다. 콘스탄틴 2세와 디미트리오스는 캅카스 북부로 피신했다.

기오르기 7세 즉위 당시 조지아 왕국의 영역. 트빌리시를 포함한 대부분의 영토가 티무르 제국에게 넘어갔다.


1393년, 바그라트 5세는 사망했다. 조지아인들은 그의 죽음에 안타까워하며 "대왕(დიდი)"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기오르기 7세는 즉위하자마자 티무르의 공세에 시달렸다. 티무르는 1394년 봄에 캅카스 남부를 침입, 4명의 지휘관에게 40,000명의 군대를 주어 조지아 왕국을 공격하게 했다. 그들은 삼츠헤, 코르스, 콜라, 아할치케를 파괴했으나, 조지아인들의 저항에 후퇴했다.

그해 가을, 티무르는 트리알테티와 카르틀리 남부를 거쳐 아라그비 계곡으로 쳐들어와 모든 것을 파괴하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그의 목적은 조지아 잔존 세력 섬멸과 토크타미시 칸의 침공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다리알 협곡을 점령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지아인들이 산악 지대로 후퇴하여 항전하면서 전황이 지지부진해졌다. 티무르는 평야 지대를 황폐화시켰으나, 토크타미시가 캅카스 동부로 쳐들어오자 이동했다. 티무르는 토크타미시로부터 승리하기 위해 캅카스 국경의 소국들을 제압해야 했다.

티무르는 1399년 겨울 10만 정예병력으로 조지아 국경을 돌파, 쿠라 강을 건너 카헤티와 헤레티를 기습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조지아인들은 산악 지대로 피신했고, 조지아 장군 키미샤는 회피 작전으로 적의 공격을 지연시켰다. 티무르 군대는 교회와 수도원을 약탈, 방화하고 주민들을 노예로 끌고 가거나 죽였다.

티무르는 1400년 봄과 여름에 다시 조지아를 침공, 카르틀리 남부에서 기오르기 7세의 조지아군을 격파하고 약 60,000명을 노예로 끌고 갔다. 전쟁의 간접 피해인 기아와 전염병으로 대다수 조지아 주민들이 사망했다. 티무르는 조지아를 정복하려 했으나, 유격전을 전개하는 조지아군에 고전했다. 오스만 제국바예지드 1세와의 전쟁이 임박하자, 티무르는 조지아와 휴전하고 물러났다.

1402년 앙카라 전투에서 오스만군을 상대로 승리하고 바예지드 1세를 사로잡은 티무르는, 조지아 왕이 직접 찾아와 축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1403년과 1404년에 다시 조지아를 공격했다. 700개 이상의 마을과 기념물이 파괴되었다. 1404년, 기오르기 7세는 티무르 제국을 종주국으로 인정하고 조공을 바치기로 했다. 대신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고 자치권을 얻었다.

티무르의 침공으로 조지아 왕국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콘스탄틴 2세가 1396년 이메레티로 돌아와 왕을 자칭했다. 하지만 그는 1401년 마미아 2세에게 패배하여 전사했다. 기오르기 7세는 이메레티를 탈환하고 알렉산드레 1세의 아들 디미트리오스를 남부 카르틀리의 솜히티로 유배했다. 티무르가 1405년에 병사하자, 기오르기 7세는 나흐츠반간자를 정복하고 아니, 에르주룸, 타브리즈를 공략하여 왕국의 국경을 일시적으로 확장했다.

조지아의 정치, 군사적 쇠퇴의 원인 중 하나는 흑사병이었다. 1346년 오스만 부족민에 대항하여 (남서부 조지아)에서 군사 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조지(George the Brilliant)의 군인들에 의해 유입되었다.[55] 이는 왕국의 통합성, 군사력, 물류 능력을 약화시켰다.

게오르기 5세 통치 시대(1299년~1302년, 1314년~1346년)에는 몽골의 침략에서 회복하여 번영했지만, 1386년부터 1403년까지 8차례에 걸친 티무르의 침공은 왕국에 큰 타격을 입혔다. 왕국은 1490년에 붕괴되어, 이메레티 왕국, 카헤티 왕국, 카르틀리 왕국으로 분열되었고, 바그라티오니 왕조의 분가 왕족들이 왕위에 올랐다. 나머지 영토는 5개의 공국으로 나뉘었고, 조지아 귀족들이 공으로 즉위했다.

3. 6. 6. 끝나지 않은 위협, 튀르크멘인들의 침공

티무르의 파괴적인 침입 이후 조지아 왕국은 새로운 위협에 직면했다. 1405년 티무르가 죽자 그의 제국은 종말을 맞이했는데, 이는 공포와 피로만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카라 코윤루를 포함한 튀르크멘인들은 샤 루흐에게 반기를 들었다. 카라 코윤루의 통치자 카라 유수프는 샤 루흐를 격파하고 바그다드를 점령하여 중동의 새로운 지배 세력으로 떠올랐다. 이들은 조지아를 공격하여 조지아의 기오르기 7세를 전사시켰다.[57]

조지아의 콘스탄티누스 1세는 튀르크멘의 침략을 우려하여 시르반의 이브라힘 1세와 동맹을 맺고 찰라간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하고 포로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포로로 잡혀 있음에도 당당하게 행동하여 카라 유수프를 분노하게 했고, 결국 그와 그의 이복형제 다비드, 300명의 조지아 귀족들이 처형되었다.[57]

조지아의 알렉산드레 1세는 쇠퇴해가는 왕국을 복원하려 노력했지만, 튀르크멘 부족들의 끊임없는 침입에 직면해야 했다. 1431년, 알렉산드레 1세는 튀르크멘으로부터 로리를 탈환하여 국경을 안정시켰다. 1434/5년경, 그는 아르메니아 왕자 베슈켄 2세 오르벨리안에게 슈니크의 카라 코윤루를 공격하도록 부추겼고, 승리하자 로리를 봉토로 하사했다. 1440년, 알렉산드레 1세는 카라 코윤루의 자한 샤에게 조공을 거부했다. 이에 자한 샤는 2만 명의 군대로 조지아를 침공하여 삼슈빌데를 파괴하고 수도 트빌리시를 약탈한 후, 수천 명의 기독교인을 학살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한 뒤 타브리즈로 돌아갔다. 1444년, 자한 샤는 다시 조지아를 침공했고, 조지아의 바크탕 4세는 아할치헤에서 그와 맞섰으나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자한 샤는 타브리즈로 돌아갔다.

외세와 내분의 결과, 통일된 조지아 왕국은 1466년 이후 여러 정치 단위로 분할되었다. 카라 코윤루는 아크 코윤루에 의해 멸망했고, 아크 코윤루는 조지아의 분열을 이용했다. 조지아는 우준 하산에게 1466년, 1472년, 그리고 1476-7년경에 공격받았다. 조지아의 바그라트 6세는 트빌리시를 넘겨주는 대가로 침략자들과 평화 협정을 맺어야 했다. 우준 하산이 죽은 후(1478년) 조지아인들은 수도를 회복할 수 있었다. 1488년 겨울, 할릴 베이가 이끄는 아크 코윤루 튀르크멘이 트빌리시를 공격하여 1489년 2월에 점령했다. 이메레티의 알렉산드레 2세는 이 틈을 타 이메레티를 장악했다. 조지아의 콘스탄티누스 2세는 아크 코윤루를 격퇴했지만, 조지아는 큰 손실을 입었다. 사파비 왕조이스마일 1세는 1502년 조지아와 동맹을 맺고 아크 코윤루를 격파하여 그들의 침입을 종식시켰다.

3. 6. 7. 조지아-사파비 동맹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조지아-사파비 동맹'에 대한 내용이 명시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따라서 해당 섹션에는 관련 내용을 작성할 수 없다.

3. 7. 망국의 길

1469년, 아크 코윤루라는 튀르크멘족 연맹이 카라 코윤루를 대체했다. 아크 코윤루의 통치자 우준 하산은 1456년 조지아를 처음 침공하여 솜키티를 파괴하고 오르베티 요새를 함락시켰다. 이후에도 아크 코윤루는 1466년, 1472년, 1476~1477년에 걸쳐 조지아 왕국을 침입하여 약탈과 파괴를 일삼았다.

1460년 카프카스 지역 지도


1490년 카프카스 지역 지도

3. 7. 1. 십자군 결성 실패

1452년, 교황 니콜라오 5세는 "이교도" 오스만 제국에게 빼앗긴 콘스탄티노플을 되찾기 위해 십자군 원정을 계획했지만, 1455년 그가 사망하면서 무산되는 듯했다. 1456년, 새로운 교황 갈리스토 3세의 외교 대사인 루도비코 다 볼로냐가 조지아에 도착하여 로마에 보낼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는 조지아 주민들의 신앙심과 왕족 간 내전으로 인한 심각한 상황을 강조했다. 이후 교황청은 조지아 왕국에 유럽 파견 사절단을 요청했고, 기오르기 8세는 이를 수락했다.[1]

1459년 9월, 갈리스토 3세의 후계자 비오 2세는 니콜라오 5세의 계획을 이어받아 오스만에 대항하는 새로운 십자군 원정을 선포했다. 그해 11월부터 기오르기 8세, 쿠바르쿠바레 2세, 비오 2세, 베네치아 도제 파스콸레 말리피에로,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3세 사이에 정기적인 연락이 시작되었다.[1]

기오르기 8세는 교황의 십자군 참여 요청에 즉각 동의하며, 조지아 본토에서 40,000명, 트라페준타 제국에서 30,000명, 아르메니아에서 20,000명, 삼츠헤에서 20,000명, 밍그렐리아에서 10,000명 등 총 12만 명의 대군과 항구 도시들에서 30척의 배, 오스만 제국에 적대적인 우준 하산의 제한된 병력, 구리아의 다른 분견대들이 함께 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비오 2세는 이에 고무되어 그를 "페르시아의 왕"으로 칭하며 유럽 전역에 사절을 보내 조지아와 함께 오스만 제국을 몰아낼 것을 호소했다.[1]

그러나 샤를 7세루이 11세프랑스 왕국, 프리드리히 3세신성 로마 제국 등 대부분의 서방 기독교 국가들은 십자군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결국 교황과 기오르기 8세의 계획은 실패했고, 조지아 사절단은 유럽을 떠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1]

3. 7. 2. 트라페준타 제국의 멸망

아폴로니오 디 지오반니 디 토마소의 트라페준타 공방전을 묘사한 그림. 실제로는 트라페준타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 그려졌다.


조지아 왕국 서남부에 인접해 있던 트라페준타 제국은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비잔티움 제국의 마지막 보루였으며, 1204년 건국 당시 타마르가 알렉시오스 1세를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등 조지아 왕국의 가장 든든하고 긴밀한 동맹국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러한 동맹 관계는 콘스탄티노플을 무너뜨린 메흐메트 2세의 정복욕을 자극했다. 1460년 9월 14일, 조지아 사절단이 유럽에 있는 사이, 메흐메트 2세가 이끄는 오스만군이 트라페준타를 포위 공격했다. 이에 앞서 메흐메트 2세는 조지아에 사절단을 보냈는데, 사절단 대표 오스트로비카의 콘스탄틴은 "만약 조지아군이 트라페준타에 단 한 명의 지원 병력이라도 파견한다면, 술탄께서는 친히 조지아를 침공하실 것"이라고 위협했다. 트라페준타 제국의 마지막 황제 다비드 메가스 콤네노스는 조지아의 구원을 기대했으나, 기오르기 8세는 메흐메트 2세의 침공을 두려워하여 돕지 않았다.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가 콘스탄티노플을 수복한 지 정확히 200년이 지난 1461년 8월 15일, 트라페준타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항복하면서 비잔티움 문명의 마지막 잔재는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트라페준타 황실은 대거 처형되었지만, 다비드의 아내인 엘리니 칸타쿠제노스 등 일부 인사들은 조지아 왕국으로 망명했다.

3. 7. 3. 내부 통합의 붕괴

기오르기 8세의 외교 정책 실패가 계속되면서, 조지아 내부의 결속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1462년, 이메레티의 통치자 바그라트 6세는 삼츠헤 공작 쿠바르쿠바레 2세와 비밀리에 반란을 모의했다. 기오르기 8세의 친척이었던 바그라트 6세는 조지아 서부의 여러 귀족들을 포섭하여 반란의 규모를 키웠다.

바그라트 6세는 밍그렐리아의 리파리트 1세, 구리아의 마미아 가문, 압하지야 및 스바네티의 공작들과 "중앙 정부의 간섭으로부터 해방"을 약속하며 동맹을 맺었다. 반란군은 조지아 서부를 장악하고 이메레티의 여러 요새를 점령했다. 1463년, 기오르기 8세는 리키 산맥을 넘어 이메레티를 공격했으나, 치코리 전투에서 반란군에게 크게 패배했다.

전투에서 패배한 기오르기 8세는 카르틀리로 후퇴하여 자신에게 충성하지 않은 귀족들을 처벌했다. 한편, 바그라트 6세는 쿠타이시를 점령하고 이메레티의 왕 바그라트 2세로 즉위했다. 이는 조지아 왕국의 붕괴를 알리는 신호탄이었으며, 이후 조지아는 단일 국가로 통합되지 못했다.

쿠바르쿠바레 2세는 아할치케에서 독자적인 화폐를 주조하고 자신의 칭호에 "왕Mepe"을 추가하며 독립을 시도했다. 기오르기 8세는 복수를 위해 삼츠헤를 공격했으나, 우준 하산이 카르틀리를 공격하여 회군해야 했다. 기오르기 8세는 하산에게 패배했고, 아크 코윤루 군대는 조지아 동부를 황폐화시켰다. 이로 인해 기오르기 8세의 지방 통제력은 약화되었고, 동부의 시르반, 아란, 모바칸 등이 떨어져 나갔다. 쿠바르쿠바레 2세는 바그라트 6세의 지원을 받아 영토를 회복하고 기오르기 8세에게 협력했던 귀족들을 처벌했다.

1465년, 기오르기 8세는 암살 시도를 겪었으나, 보좌관 이오탐 제드구니제가 대신 사망했다. 기오르기 8세는 아라그비 공국과 동맹을 맺고 삼츠헤를 다시 공격했으나, 파라바니 호수 전투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삼츠헤군에게 사로잡혀 아할치케에서 1년간 감옥 생활을 했다.

3. 8. 멸망

조지아 왕국은 중앙 정부의 통치력 감소로 인해 내부 상황이 악화되었다. 1466년, 바그라트 6세는 군대를 이끌고 수도 트빌리시에 입성하여 기오르기 8세를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삼츠헤의 쿠바르쿠바레 2세는 바그라트 6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하여 기오르기 8세와 협상하여 그를 석방했다.

석방된 기오르기 8세는 카르틀리 탈환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카헤티로 이동하여, 1466년 말 "카헤티의 왕 기오르기 1세"로 즉위했다. 한편, 콘스탄틴 2세는 카르틀리에서 바그라트 6세에게 대항했다.

1467년, 바그라트 6세와 기오르기 8세는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고 콘스탄틴 2세를 축출했다. 기오르기 8세는 1476년 사망했고, 그의 아들 알렉산드레 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바그라트 6세는 콘스탄틴 2세와 평화 협정을 맺었으나, 아크 코윤루의 우준 하산이 조지아를 침공하여 1477년 수도 트빌리시를 함락시켰다. 바그라트 6세는 공물을 바치는 조건으로 평화를 구걸해야 했다.

1478년 바그라트 6세가 사망하고 알렉산드레 2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서부 조지아 공작들의 반대로 대관식이 취소되었다. 콘스탄틴 2세는 트빌리시를 점령하고 중앙 조지아를 장악했으며, 알렉산드레 2세는 쿠타이시로 피신했다. 이후 이메레티 귀족들이 콘스탄틴 2세에게 협력하여 쿠타이시를 함락시켰고, 알렉산드레 2세는 산악 지대로 피신하여 유격전을 전개했다.

1489년, 알렉산드레 2세는 밍그렐리아 공작 리파리트 2세와 평화 협약을 맺고 산악 부족 연합군과 함께 반격하여 쿠타이시를 재탈환했다. 콘스탄틴 2세는 왕실 평의회를 소집했으나, 귀족들은 왕권 강화를 우려하여 조지아 왕국의 공식 해체를 결의했다.

결국 콘스탄틴 2세는 1491년에 삼츠헤, 이메레티, 카헤티와 평화 협정을 체결하여 조지아 왕국은 공식적으로 멸망했다. 조지아 왕국의 멸망 이후 이메레티, 카헤티, 카르틀리 왕국과 삼츠헤 공국이 등장하여 19세기까지 존속하다가 러시아 제국에 합병되었다.

분열된 조지아 왕국의 지도


3. 8. 1. 절정으로 치닫는 내부 분열



3. 8. 2. 교회의 분열

통일 군주제의 붕괴는 종교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쿠바르쿠바레 2세와 음제차부크 치하의 삼츠헤는 조지아 정교회로부터 분리하려고 노력했다. 남부 조지아 지역에서 정교회가 약화되면서 메스케티인들이 점차 이슬람교로 개종하게 되었다.

서부 조지아에서는 다른 양상이 나타났다. 이 지역의 가톨릭교도들은 이 시기에 그들의 영적 관할권을 이메레티 너머 구리아, 밍그렐리아, 스바네티, 압하지야에까지 확장시켰다. 이러한 상황은 19세기 조지아가 러시아 제국에 합병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3. 8. 3. 끝나지 않는 갈등

1483년, 콘스탄틴 2세는 삼츠헤와의 전쟁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고 수도 트빌리시로 철수했다. 1484년 콘스탄틴 2세의 핵심 지지자이자 이메레티의 권력자였던 밍그렐리아 공작 바메크 2세가 사망했다. 알렉산드레 2세는 이것을 기회로 여기고 산악 지대에서 내려와 쿠타이시를 손쉽게 탈환하고 밍그렐리아와 구리아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을 장악한 뒤, 스스로를 "이베리아의 왕"으로 칭했다. 그러자 콘스탄틴 2세는 1485년 이메레티를 재차 침공했으나, 치코리 전투에서 로르트키피나제 가문의 군대에게 패배했다. 1486년 아크 코윤루의 통치자 야쿠브 베그가 드마니시와 크베시를 공격하자, 콘스탄틴 2세는 카르틀리로 철수했다.

1487년, 밍그렐리아 공작 라파리트 2세는 콘스탄틴 2세에게 이메레티 원정을 권고했다. 콘스탄틴 2세는 카르틀리 군대와 밍그렐리아 군대, 그리고 자신에게 동조하는 몇몇 이베리아 귀족들의 군대를 동원하여 이메레티를 침공했다. 알렉산드레 2세는 쿠타이시를 포기하고 요새에서 농성했다. 적군이 요새를 포위하자, 그는 아들을 거기에 남기고 이메레티 북부의 산악 지대로 피신했다. 이후 콘스탄틴 2세는 요새를 함락시킨 뒤 이메레티에 대한 자신의 지배권을 공고히 하려 했으나, 1488년 야쿠브 베그의 휘하 아크 코윤루 장군 수피 칼릴 베그 모우실루가 조지아를 침공했다. 그는 알렉산드레 2세가 다시 이메레티를 장악할 것을 우려하여 회군을 거부하고 2명의 장군을 보내 자신을 대신하여 튀르크멘인들을 격퇴하도록 했다. 그러자 야쿠브가 직접 나서 군대를 이끌고 조지아군을 전부 격파한 뒤 트빌리시를 포위했다. 결국 콘스탄틴 2세는 철수해야 했다.[1]

참조

[1] 웹사이트 Heraldica - რუკები http://heraldry.ge/?[...] 2019-12-05
[2] 웹사이트 Zwölf Königswappen, aus: Grünenberg, Konrad: Grünenberg, Konrad:Das Wappenbuch Conrads von Grünenberg, Ritters und Bürgers zu Constanz - BSB Cgm 145 ( um 1480) - Digitalisiertes Buch aus dem urheberrechtsfreien Bestand der Bayerischen Staatsbibliothek München [Deutschland] 2007-2021 Bildähnlichkeitssuche https://bildsuche.di[...] 2019-09-11
[3] 웹사이트 Oldest Georgian Arms http://heraldika.ge/[...] State Council of Heraldry 2014
[4] 서적 Encyclopedia of Greece and the Hellenic Tradition https://books.google[...] Taylor & Francis
[5] 서적 Languages and Cultures of Eastern Christianity https://books.google[...] Taylor & Francis
[6] 서적 Edge of Empires: A History of Georgia Reaktion Books
[7] 문서 At the beginning of the 13th century, according to the most likely estimates, the population of the realm, which in those days was almost equal in size to England and Wales, was 5000000-8000000. Of these, 1800000 lived in the area of modem Georgia (Jaoshvili 1984: 50).
[8] 서적 Searches for an imaginary kingdom: The legend of the kingdom of Prester John Cambridge University Press
[9] 서적 The Security of the Caspian Sea Region; Counsel in the Caucasus: Professionalization and Law in Georgia; The Making of the Georgian Nation; Armenia, Azerbaijan, and Georgia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Springer; Indiana University Press; DIANE Publishing 2019-08-29
[10] 백과사전 Georgia, Georgians, until 1300 https://referencewor[...] Brill Online 2021-01-30
[11] 서적 The Blackwell Companion to Eastern Christianity https://books.google[...] John Wiley & Sons 2012-05-11
[12] 서적 The Georgians, Ancient Peoples and Places https://books.google[...]
[13] 서적 Circassian History https://books.google[...]
[14] 서적 Studies in Christian Caucasian History Georgetown University Press
[15] 서적 k'art'veli eris istoria (The History of the Georgian Nation) Tbilisi State University Press
[16] 서적 Byzantine Mosaics, Volume 7 Ekdotike Athenon
[17] 서적 Reader's Encyclopedia of Eastern European Literature HarperCollins
[18]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Georgia Rowman & Littlefield
[19] 서적 Türkiye tarihi Cilt I AKDTYKTTK Yayınları
[20]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Georgia Rowman & Littlefield
[21] 서적 Georgia and the Islamic world of the Near East in the first third of the XII-XIII centuries
[22] 서적 Azərbaycan Atabəylər dövləti (1136-1225-ci illər) Şərq-Qərb
[23] 서적 საქართველოს ისტორიის ნარკვევები
[24] 서적 Bittersweet Europe: Albanian and Georgian Discourses on Europe, 1878–2008 https://books.google[...] Berghahn Books 2019-08-29
[25] 서적 Soviet Historiography of Philosophy: Istoriko-Filosofskaja Nauka https://books.google[...] Springer Science & Business Media 2019-08-29
[26] 서적 The Dragon in Medieval East Christian and Islamic Art https://books.google[...] Koninklijke Brill NV
[27] 서적 Georgia in the XI–XII Centuries https://books.google[...] Ganatleba Publishers
[28] 서적 Georgia in the XI–XII Centuries https://books.google[...] Ganatleba Publishers
[29] 서적 From Saladin to the Mongols: The Ayyubids of Damascus, 1193–1260 https://books.google[...]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30] 웹사이트 Atābākan-e Adārbāyĵān http://www.iranicaon[...] 2006-06-26
[31] 서적 Georgia in the XI–XII Centuries
[32] 서적 The Dragon in Medieval East Christian and Islamic Art
[33] 서적 (multiple sources)
[34] 서적 Georgia in the XI–XII Centuries
[35] 서적 From Saladin to the Mongols: The Ayyubids of Damascus, 1193–1260
[36] 논문
[37] 논문
[38] 문서 Tamar's paternal aunt was the Comnenoi's grandmother on their father's side, as it has been conjectured by Cyril Toumanoff(1940).
[39] 서적 Byzance et les Arabes, Tome I: La Dynastie d'Amorium (820–867) https://books.google[...] Éditions de l'Institut de Philologie et d'Histoire Orientales 2021-09-10
[40] 서적 Tamta's World: The Life and Encounters of a Medieval Noblewoman from the Middle East to Mongolia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7
[41] 서적 Conflict and Conquest in the Islamic World: A Historical Encyclopedia, Volume 1 https://books.google[...] ABC-CLIO 2019-08-29
[42] 서적 Encyclopaedia Iranica, Volume 2, Parts 5-8 https://books.google[...] Routledge & Kegan Paul 2019-08-29
[43] 서적 Histoire de la Géorgie depuis l'Antiquité jusqu'au XIXe siècle https://archive.org/[...] imprimerie de l'Académie Impériale des sciences 1858
[44] 서적 Iran https://books.google[...] Bradt Travel Guides 2019-08-29
[45] 논문 Georgians and Greeks in Jerusalem (1099–1310)
[46] 서적 The Lives and Legends of the Georgian Saints Allen & Unwin
[47] 서적 Encyclopedia of Mongolia and the Mongol Empire
[48] 서적 Ta'rfkh-i Shaikh Uwais (History of Shaikh Uwais)
[49] 서적 The History of the Georgian Nation
[50] 논문 Die persische Inschrift an der Mauer der Manucehr-Moschee zu Ani
[51] 서적 Georgia in the XIV century
[52] 서적 The History of the Georgian Nation
[53] 서적 European sources of Georgian history
[54] 서적 History of the Georgian Heraldry Parlamentis utskebani
[55] 서적 Encyclopedia of the Peoples of Asia and Oceania https://books.google[...] Infobase Publishing 2019-08-29
[56] 서적 The Making of the Georgian Nation Indiana University Press
[57] 논문 The Fifteenth-Century Bagratids and the Institution of Collegial Sovereignty in Georgia
[58] 논문
[59] 서적 The Making of the Georgian Nation Indiana University Press
[60] 서적 Armenia and Georgia Cambridge University Press
[61] 웹사이트 グルジア5都市による姉妹都市提携の希望 https://www.mofa.go.[...] 駐日グルジア大使館 2011-09
[62] 서적 The Security of the Caspian Sea Region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63] 서적 Counsel in the Caucasus: Professionalization and Law in Georgia https://books.google[...] Springer 2013
[64] 서적 The Making of the Georgian Nation https://books.google[...] Indiana University Press 1994
[65] 서적 Armenia, Azerbaijan, and Georgia DIANE Publishing
[66] 서적 Bittersweet Europe: Albanian and Georgian Discourses on Europe, 1878-2008 https://books.google[...] Berghahn Books 2013
[67] 서적 Soviet Historiography of Philosophy: Istoriko-Filosofskaja Nauka https://books.google[...] Springer Science & Business Media 2013
[68] 서적 k'art'veli eris istoria (The History of the Georgian Nation) Tbilisi State University Press
[69] 서적 Studies in Christian Caucasian history Georgetown University Press
[70] 서적 Davit II HarperCollins
[71] 서적 Lives of the Georgian Saints St. Herman of Alaska Brotherhood 2006
[72] 문서 アレクシオスとダヴィドの母はタマル女王の妹にあたる。二人ともグルジアで育てられた。
[73] 서적 1998
[74] 서적 1935
[75] 서적 Royal Imagery in Medieval Georgia Penn State Press 1998
[76] 서적 Georgians and Greeks in Jerusalem (1099–1310) Ciggaar & Herman 1996
[77] 서적 Royal Imagery in Medieval Georgia Penn State Press 1998
[78] 서적 The Lives and Legends of the Georgian Saints Allen & Unwin 1976
[79] 서적 History of the Georgian Heraldry Parlamentis utskebani 1997
[80] 서적 Georgia Country Study Guide Volume 1 Strategic Information and Developments https://books.google[...] Lulu.com 2012
[81] 서적 Encyclopedia of the Peoples of Asia and Oceania https://books.google[...] Infobase Publishing 2010
[82] 웹사이트 Heraldica - რუკები http://heraldry.ge/?[...] 2019-12-05
[83] 웹사이트 Zwölf Königswappen , aus: Grünenberg, Konrad: Grünenberg, Konrad:Das Wappenbuch Conrads von Grünenberg, Ritters und Bürgers zu Constanz - BSB Cgm 145 ( um 1480) - Digitalisiertes Buch aus dem urheberrechtsfreien Bestand der Bayerischen Staatsbibliothek München [Deutschland] 2007-2021 Bildähnlichkeitssuche https://bildsuche.di[...] 2019-09-11
[84] 웹사이트 Oldest Georgian Arms http://heraldika.ge/[...] State Council of Heraldry 2014
[85] 서적 GEORGIAN COINS IN THE COLLECTION OF THE NATIONAL MUSEUM-NÁPRSTEK MUSEUM IN PRAGUE http://www.nm.cz/pub[...] 2013
[86] 서적 Armenia, Azerbaijan, and Georgia https://books.google[...] DIANE Publishing 1996
[87] 백과사전 Georgia, Georgians, until 1300 https://referencewor[...] 2020
[88] 서적 The Blackwell Companion to Eastern Christianity John Wiley & Sons 2007
[89] 서적 Circassian History https://books.google[...]
[90] 서적 Studies in Christian Caucasian History Georgetown University Press 1967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