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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잘루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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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인잘루트 전투는 1260년 9월 3일 팔레스타인 갈릴리 지역의 아인잘루트에서 맘루크 술탄국 군대와 몽골 제국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몽골 제국의 서방 확장이 한계에 부딪히는 계기가 되었으며, 무슬림이 몽골군을 상대로 거둔 첫 번째 대규모 승리로 평가받는다. 맘루크군은 몽골군의 전략을 간파하고, 지형을 활용한 매복과 게릴라 전술을 통해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의 결과로 맘루크 술탄국은 시리아를 장악하고 중동 지역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했으며, 몽골 제국은 내부 분열과 주변 세력과의 갈등으로 인해 더 이상의 대규모 원정을 추진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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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잘루트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아인잘루트 전투 작전도, 1260년
아인잘루트 전투 작전도, 1260년. 최종적으로 아인잘루트에서 만나게 되는 양측 군대의 이동 경로를 보여준다.
분쟁몽골의 레반트 침공(Mongol invasions of the Levant)
날짜1260년 9월 3일 (히즈라력 658년 라마단 26일)
장소마아얀 하로데(Ma'ayan Harod) (히브리어) 또는 아인잘루트(아랍어), 이스라엘, 이즈르엘 계곡 근처
결과맘루크 술탄국의 승리
영토몽골은 레반트에서 철수하고 점령지를 맘루크 술탄국에 양도함
교전 세력
교전국 1맘루크 술탄국
아이유브 왕조 에미르국 (케라크 및 하마)
교전국 2일 칸국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
지휘관 및 지도자
맘루크무자파르 쿠투즈
바이바르스
하마의 알-만수르
일 칸국키트부카
병력
맘루크 군대경기병 및 기마 궁수, 중기병, 보병
몽골 군대몽골 창기병 및 기마 궁수
병력 규모 (맘루크)15,000–20,000명
병력 규모 (몽골)10,000–20,000명
피해
맘루크알 수 없음
몽골높음
관련 전투 목록

2. 배경

1251년 몽케 칸이 몽골의 대칸으로 즉위하면서, 그의 할아버지 칭기즈 칸의 세계 제국 건설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몽케 칸은 서방 정복 임무를 그의 동생 훌라구에게 맡겼다.[9] 군대를 소집하는데 5년이 걸렸고, 훌라구는 1256년에야 침략을 시작할 준비를 마쳤다. 훌라구는 페르시아를 거점으로 남쪽으로 진격하며, 저항하는 세력은 철저히 파괴하고 항복하는 세력은 관대하게 대우하는 전략을 펼쳤다.[9]

훌라구의 군대는 아제르바이잔을 거쳐 1260년 시리아 북부 알레포를 점령했다. 몽골군에는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과 안티오크 공국 등 기독교 세력도 합류했다. 바그다드가 함락될 당시 몽골군은 다양한 종교와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당시 이슬람 세계는 아이유브 왕조가 이집트, 레바논-시리아, 이라크 등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십자군 원정으로 인해 국력이 소모된 상태였다. 1250년 5월 2일, 아이유브 술탄국의 마지막 술탄이 암살당하고 맘루크들이 카이로에서 정권을 잡으면서 맘루크 술탄국이 성립되었다.

훌라구는 다마스쿠스의 아이유브 왕조를 멸망시킨 후, 팔레스타인을 통해 이집트로 남진하여 맘루크 술탄국과 대결할 계획이었다. 1260년, 훌라구는 카이로의 쿠투즈에게 항복을 요구하는 사절을 보냈으나, 쿠투즈는 사절을 처형하고 그들의 머리를 바브 즈웨일라에 걸어 응수했다.[9]

몽골의 중동 맘루크 공격 당시, 대부분의 맘루크는 킵차크인이었으며, 킵차크 칸국의 킵차크인 공급은 맘루크 군대를 보충하고 그들이 몽골군을 격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10]

2. 1. 몽골 제국의 서아시아 원정

몽케 칸이 1251년 몽골 제국의 대칸으로 즉위하면서, 몽골은 세계 정복을 위한 대대적인 원정을 시작했다.[9] 몽케 칸은 그의 동생 훌라구에게 서아시아 지역 정복을 맡겼고, 훌라구는 1256년부터 본격적인 원정을 개시했다.[9] 훌라구의 군대는 페르시아를 거쳐 남진하면서, 아바스 왕조의 바그다드를 함락(1258년)시키는 등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었다.[9] (바그다드 전투 참조) 몽골군은 점령 지역의 주민들에게 항복을 권유하고, 저항하는 세력은 철저히 파괴하는 전략을 사용했다.[9]

몽골군은 아제르바이잔 방면으로 진격하여 1260년 시리아 북부의 알레포를 점령했다. 몽골군에는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인과 안티오크 공국 등 기독교 세력도 합류하여, 바그다드 함락 당시에는 다양한 종교와 민족으로 구성된 군대가 되었다.

훌라구는 다마스쿠스의 아이유브 왕조를 멸망시킨 후, 예루살렘 왕국을 거쳐 맘루크 술탄국으로 남진하여 주요 이슬람 세력과 대결하려 하였다.[9]

2. 2. 중동 지역의 정세 변화

당시 중동 지역은 아이유브 왕조가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 등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십자군 원정 등으로 인해 국력이 약화된 상태였다.[9] 1250년, 이집트에서는 아이유브 왕조의 마지막 술탄이 암살당하고 맘루크들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맘루크 술탄국이 성립되었다.[9] 맘루크 술탄국은 이집트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시리아 지역으로 진출하려는 몽골군과 대립하게 되었다.

1251년 몽케 칸이 대칸이 되자 그는 즉시 그의 할아버지 칭기즈 칸의 세계 제국 건설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 했다. 서방 국가들을 정복하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그는 그의 형제이자 칭기즈 칸의 또 다른 손자인 훌라구를 선택했다.[9] 군대를 소집하는 데 5년이 걸렸고, 훌라구는 1256년이 되어서야 침략을 시작할 준비를 마쳤다. 페르시아에 있는 몽골 기지에서 작전을 수행한 훌라구는 남쪽으로 진격했다. 몽케는 저항 없이 항복하는 자들에게는 좋은 대우를,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파멸을 명했다. 그런 식으로 훌라구와 그의 군대는 당시 가장 강력하고 오래된 왕조들을 정복했다.

몽골의 중동 맘루크 공격 당시, 대부분의 맘루크는 킵차크인이었으며, 킵차크 칸국의 킵차크인 공급은 맘루크 군대를 보충하고 그들이 몽골군을 격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10]

1260년, 훌라구는 카이로쿠투즈에게 항복을 요구하는 서한과 함께 사절을 보냈다. 그러나 쿠투즈는 사절들을 죽이고 그들의 머리를 바브 즈웨일라에 걸어 답했다.[9]

2. 3. 몽골군의 시리아 침공과 맘루크 술탄국의 대응

1260년, 훌라구카이로쿠투즈에게 항복을 요구하는 사절을 보냈으나, 쿠투즈는 몽골 사신을 처형하고 그들의 머리를 카이로의 문 중 하나인 밥 주웨일라에 효시하였다.[9]

몽케 칸의 사망으로 훌라구가 몽골 본토로 귀환하면서, 시리아 지역에는 나이만족 출신이며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였던 장군 키트부카가 이끄는 소규모 병력(1~2만 명)만이 남게 되었다.[12] 훌라구는 그렇게 큰 군대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병력의 대부분을 이끌고 철수했다고 한다.[14]

이 소식을 접한 맘루크 술탄 쿠투즈는 즉시 카이로에 대규모 군대를 소집하고 팔레스타인을 침공했다.[15] 쿠투즈는 몽골군에 의해 다마스쿠스와 빌라드 아시-샴 대부분을 잃고 이슬람을 지키고자 했던 바이바르스와 동맹을 맺었다.[23]

한편, 아크레에 거점을 둔 예루살렘 왕국의 잔존 세력인 십자군은 프랑코-몽골 동맹을 맺으려 했으나 교황 알렉산데르 4세가 금지했다.[23] 시돈의 줄리앙이 키트부카의 손자를 죽게 한 사건으로 몽골과 십자군 간의 긴장이 고조되자, 키트부카는 시돈을 약탈했다. 십자군은 몽골군과 맘루크 술탄국 사이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며, 맘루크 군대의 통과를 허용했다.[16]

3. 전투 경과

1260년 9월 3일, 맘루크 술탄국 군대와 키트부카가 이끄는 몽골군팔레스타인 갈릴리 지역의 아인잘루트에서 격돌했다. 맘루크군은 몽골군의 전략에 대처하기 위해 특별히 준비되었으며, 대부분 투르크계, 체르케스계 민족 출신으로 스텝 전술에 익숙했다.

두 군대는 아인 잘루트에서 만났고, 맘루크군은 거짓 퇴각으로 몽골군을 격파하였다. 쿠투즈는 전력을 보존하기 위해 근처 계곡에 숨어있던 기병들과 함께 성공적인 반격을 이끌었고, 몽골군은 퇴각했으며, 키트부카는 체포되어 사형당했다. 맘루크 술탄국의 중장기병들은 접근전에서 몽골군을 확실하게 제압하는 데 성공하였다.

아인 잘루트 전투는 폭발하는 대포(아랍어로 모이드파)가 사용된 최초의 전투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맘루크군은 이 대포를 사용하여 몽골군의 말과 기병을 공포에 질리게 하고 부대를 혼란에 빠뜨렸다.[18]

3. 1. 양측 군대의 전력

훌라구의 귀환으로 몽골군은 소수 병력만 남아 있었으며, 키트부카가 지휘하는 1~2만 명 정도였다. 이들은 조지아 왕국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의 병사 약 500명을 포함하고 있었다.[18] 맘루크 군대는 몽골군보다 수적으로 우세했으며, 쿠투즈바이바르스가 이끄는 주력 부대로 구성되었다. 맘루크 군대는 몽골군에 대항하기 위해 특별히 준비되었고, 대부분 투르크, 체르케스 계 민족 출신으로 몽골의 전술에도 익숙했다.

1810년 맘루크 술탄국의 맘루크 기병


맘루크군은 지형을 잘 알고 있었고, 쿠투즈는 이를 활용하여 바이바르스 휘하의 병력으로 몽골군을 유인하고 주력 부대를 고지대에 숨겼다. 바이바르스는 게릴라 전술을 사용하여 몽골군을 도발했고, 몽골군이 공격해 오자 후퇴하는 척하며 몽골군을 고지대로 유인했다. 몽골군이 고지대에 도착하자 맘루크군은 매복 공격을 시작했고, 몽골군은 사방에서 포위되었다. 몽골군은 탈출하기 위해 격렬하게 싸웠지만, 결국 맘루크군에게 패배했다. 키트부카는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혀 처형되었다.

3. 2. 전투의 전개 과정

1260년 9월 3일, 맘루크군과 몽골군은 아인 잘루트에서 만났으며 양측 군대는 약 2만 명 정도였다.[18] 맘루크군은 지형을 잘 알고 있었고, 쿠투즈는 이를 활용하여 바이바르스 휘하의 소수 병력으로 몽골군을 유인하고 주력 부대를 고지대에 숨기는 전략을 사용했다.

두 군대는 여러 시간 동안 전투를 벌였다. 바이바르스는 게릴라 전술을 사용하여 몽골군을 도발하고 주력 부대를 온전히 유지했다. 몽골군이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을 때, 바이바르스와 그의 부하들은 거짓으로 후퇴하여 몽골군을 매복 지점으로 유인했다. 몽골 지도자 키트부카는 도주하는 맘루크군을 쫓아 모든 병력을 이끌고 진격했다. 몽골군이 고지대에 도착하자 맘루크군은 매복에서 나와 화살을 쏘고 기병 공격을 시작하여 몽골군을 사방에서 포위했다.[18]

몽골군은 탈출하기 위해 격렬하게 싸웠다. 쿠투즈는 맘루크 군대의 좌익이 몽골군에 의해 거의 파괴될 뻔하자, 자신의 투구를 던지고 "오, 이슬람이여! 오, 알라여, 당신의 종 쿠투즈에게 이 몽골군에 대한 승리를 허락하소서"라고 외치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몽골군은 베이트 셰안 부근으로 밀려났지만, 재정비하여 반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투는 맘루크군 쪽으로 기울었고, 결국 몽골군은 후퇴했다. 키트부카는 남아있던 거의 모든 몽골군과 함께 전사했다.

아인 잘루트 전투는 폭발하는 대포(아랍어로 모이드파)가 사용된 최초의 전투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맘루크군은 이 대포를 사용하여 몽골군의 말과 기병들을 공포에 질리게 하고 부대를 혼란에 빠뜨렸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선봉대 1만 명 남짓의 몽골군에 대해 수적으로 우위에 있었던 맘루크군은 전군을 투입하는 것을 피하고, 바이바르스 지휘하의 선봉대만 몽골군 앞에 나섰다. 몽골군은 맘루크군에 돌격하여 단숨에 승패를 결정하려 했고, 후퇴를 시작한 바이바르스 부대를 추격했지만, 기다리고 있던 맘루크군 본대는 키트부카의 군을 포위하여 공격해 궤멸시켰다. 몽골군 사령관 키트부카는 포로로 잡혀 처형되었다.

3. 3. 전투의 특징

1260년 9월 3일, 맘루크 술탄국몽골 제국 양군은 아인잘루트에서 격돌했다. 맘루크군은 거짓 퇴각 전략을 사용했고, 대부분의 병력이 몽골군의 공격에 압도되었지만, 쿠투즈는 근처 계곡에 숨어있던 기병들과 함께 성공적인 반격을 이끌었다. 몽골군은 퇴각했고, 키트부카는 체포되어 사형당했다.[18] 특히 맘루크 술탄국의 중장기병들은 접근전에서 몽골군을 확실하게 제압하였다.

아인 잘루트 전투는 폭발하는 대포(아랍어로 모이드파)가 사용된 최초의 전투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맘루크군은 이 대포를 사용하여 몽골군의 말과 기병들을 공포에 질리게 하고 부대를 혼란에 빠뜨렸다. 이 대포의 폭발성 화약 구성은 후에 14세기 아라비아 군사 요람에서 묘사되었다.

몽골군은 조지아 왕국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 병사들을 포함하여 진격했다. 맘루크군은 지형을 잘 알고 있었고, 쿠투즈는 이를 활용하여 바이버스 휘하의 적은 병력으로 몽골군을 유인했다.

두 군대는 여러 시간 동안 전투를 벌였고, 바이버스는 게릴라 전술을 사용하여 몽골군을 도발하고 주력 부대를 온전하게 유지했다. 몽골군이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을 때, 바이버스와 그의 부하들은 마지막 후퇴를 가장하여 몽골군을 매복 공격 지점으로 유인했다. 몽골 지도자 키트부카는 도주하는 맘루크군을 추격하기로 결정했고, 몽골군이 고지대에 도착하자 맘루크군은 화살을 쏘고 기병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몽골군은 사방에서 포위되었다.[18]

몽골군은 탈출하기 위해 격렬하게 싸웠지만, 쿠투즈는 자신의 군대를 독려하며 전장으로 돌진했다. 몽골군은 베이트 셰안 부근으로 도망갔지만, 재정비하여 반격했다. 그러나 전투는 맘루크군 쪽으로 기울었고, 몽골군은 후퇴했다. 키트부카는 전사했다.

전장은 갈릴리의 구릉 지대였으며, 작은 강이 흐르고 있어 아랍어로 아인 자루트(골리앗의 샘)라고 불렸다.

맘루크 왕조군은 전군을 투입하는 것을 피하고, 바이바르스 지휘하의 선봉대만이 몽골군 앞에 나섰다. 몽골군은 맘루크 왕조군에 돌격하여 후퇴를 시작한 바이바르스 부대를 추격했지만, 맘루크 왕조군 본대는 키트부카의 군을 포위하여 공격해 궤멸시켰다.

몽골군 사령관 키트부카는 처형되거나 난전 중에 전사했다. 맘루크 왕조군은 다마스쿠스, 알레포를 해방하고 시리아를 몽골 제국으로부터 탈환했다.

4. 전투의 영향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승리한 바이바르스쿠투즈를 살해하고 스스로 술탄이 되었다. 이후 맘루크 술탄국은 1291년 팔레스타인의 마지막 십자군 국가를 멸망시켰다.[20] 몽골군은 아인 잘루트 전투 1년 후, 제1차 홈스 전투에서 패배하며 팔레스타인에서 완전히 추방되었다.

훌라구킵차크 칸국의 베르케가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아바스 칼리프를 파괴하는 것에 경악하여, 아인 잘루트 전투의 패배에 대한 복수를 위해 맘루크 술탄국에 전력을 다하지 못했다. 라시드 앗 딘은 베르케가 몽케 칸에게 훌라구를 비난하는 메시지를 보냈다고 기록했다.[21] 맘루크는 베르케를 통해 정보를 얻어 훌라구와 그의 칸국으로부터 나라를 보호했다.

쿠빌라이가 대칸으로 선정된 후, 훌라구는 1262년 맘루크를 공격하려 했으나, 베르케의 급습으로 실패했다. 1263년 카프카스 산맥 북부 침략 시도 역시 패배로 끝났다. 이는 몽골 간의 최초 내전이자, 통합 제국의 종말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훌라구는 1265년 사망했고, 아바카가 칸위를 계승했다.

훌라구 이후 칸들도 시리아와 레바논 탈환을 시도했으나, 1303년 샤크하브 전투에서 맘루크 술탄국에 패배했다. 맘루크 술탄국은 오스만 제국 셀림 1세 때까지 약 250년간 중동을 지배했다.[22]

4. 1. 맘루크 술탄국의 승리와 시리아 탈환

아인잘루트 전투에서의 승리 후, 맘루크 술탄국 군대는 시리아를 북상하여 몽골군 잔당과 시리아에 재침입한 부대를 격파하며 시리아 거의 전역을 평정했다.[19] 맘루크군은 5일 만에 다마스쿠스를 점령했고, 한 달 만에 알레포를 점령했다.

그러나 알레포를 회복한 시점에서 바이바르스와 총사령관 쿠투즈의 대립이 재연되었다. 바이바르스는 알레포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이 지역에서 자립할 것을 꾀했지만, 쿠투즈는 바이바르스가 독립하여 자신의 지위를 위협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이를 거부했다. 이 때문에 카이로로 돌아가는 도중에 바이바르스가 쿠데타를 일으켜 쿠투즈를 살해하고,[20] 새로운 맘루크 술탄국의 술탄이 되었다.

바이바르스는 몽골의 침공을 물리친 영웅으로서 카이로에 개선하여 이집트·시리아의 왕으로서 확고한 지위를 구축했다. 그 후에도 매년 벌어진 몽골과의 전쟁에서 연전연승을 거듭한 바이바르스는 중앙아시아에서 온 이방인인 맘루크들을 안정 정권의 주체로 만드는 데 성공하여, 사실상의 맘루크 왕조의 시조가 된다. 현지 아이유브 왕조의 아미르들은 맘루크 술탄에게 충성을 맹세한 후 호мс에서 6,000명의 또 다른 몽골군을 격파했으며,[21] 이는 시리아로의 첫 번째 몽골 원정을 종식시켰다.

아인 잘루트 전투의 결과, 시리아는 맘루크 술탄국의 영토가 되었고, 그 후에도 일 칸국과 맘루크 술탄국 사이에서 이 지역을 둘러싸고 오랫동안 대립이 이어졌지만 교착 상태에 빠졌다. 양국의 각축은 킵차크 칸국, 동로마 제국, 서유럽 국가들을 끌어들였고, 13세기 후반을 통해 격렬한 외교전이 벌어졌다.

4. 2. 몽골 제국의 분열과 일 칸국의 성립

몽골 제국에서는 몽케 칸의 사망 이후, 쿠빌라이와 아리크부케 사이에 제위 계승 분쟁이 발생했다.[21] 훌라구는 이란 지역에 머무르며 일 칸국을 세우고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다.[19]

아인 잘루트 전투 이전에 훌라구는 아제르바이잔타브리즈에서 쿠빌라이와 아리크부케가 카안의 자리를 두고 내분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란·이라크 지역을 세력권으로 하여 자립했다. 훌라구의 자손에 의해 세습되는 이란에서의 몽골 정권을 일 칸국이라고 부른다.

일 칸국은 맘루크 술탄국과 시리아 지역을 둘러싸고 대립했으나, 몽골 제국 내부의 분쟁으로 인해 적극적인 군사 행동을 취하지 못했다. 아인 잘루트 전투의 결과, 시리아는 맘루크 왕조의 영토가 되었고, 그 후에도 일 칸국과 맘루크 왕조 사이에서 이 지역을 둘러싸고 오랫동안 대립이 이어졌지만 교착 상태에 빠졌다. 양국의 각축은 킵차크 칸국, 동로마 제국, 서유럽 국가들을 끌어들였고, 13세기 후반을 통해 격렬한 외교전이 벌어졌다.

4. 3. 중동 지역의 정세 변화와 맘루크 술탄국의 지배

아인잘루트 전투의 결과, 시리아는 맘루크 술탄국의 영토가 되었고, 이후 250여 년간 중동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20] 맘루크 술탄국과 일 칸국의 대립은 킵차크 칸국, 동로마 제국, 서유럽 국가들까지 연루된 복잡한 외교 관계로 이어졌다.[19]

아인잘루트 전투 이후, 맘루크 왕조 군대는 시리아를 북상하여 몽골군의 잔당과 시리아에 재침입한 부대를 격파하며 시리아 거의 전역을 평정했다. 그러나 알레포를 회복했을 때, 이전 전투의 공로자인 바이바르스와 총사령관 쿠투즈의 대립이 다시 불거졌다. 바이바르스는 알레포 총독으로 임명되어 이 지역에서 자립할 야망을 품었지만, 쿠투즈는 바이바르스가 독립하여 자신의 지위를 위협할 것을 두려워하여 이를 거부했다. 이 때문에 카이로로 돌아가는 도중에 바이바르스가 쿠데타를 일으켜 쿠투즈를 살해하고 새로운 맘루크 왕조의 술탄이 되었다.

바이바르스는 몽골의 침공을 물리친 영웅으로서 카이로에 개선하여 이집트·시리아의 왕으로서 확고한 지위를 구축했다. 그 후에도 매년 벌어진 몽골과의 전쟁에서 연전연승을 거듭한 바이바르스는 중앙아시아에서 온 이방인인 맘루크들을 안정된 정권의 주체로 만드는 데 성공하여, 사실상 맘루크 왕조의 시조가 되었다.

한편, 아인잘루트 전투 전에 귀환을 시작한 몽골 제국의 훌라구는 아제르바이잔의 타브리즈에서 형인 쿠빌라이와 동생인 아릭부케가 카안의 자리를 두고 내분을 시작했다는 것을 알고 이 지역에 머물러 이란·이라크를 세력권으로 자립했다. 이후 훌라구의 자손에 의해 세습되는 이란의 몽골 정권을 일 칸국이라고 부른다.

훌라구 이후의 다른 칸들도 시리아, 레바논 탈환을 위한 시도를 계속하였고 많은 전투를 벌였다. 1303년 맘루크는 몽골과 샤크하브 전투에서 최후의 전투를 벌여 몽골을 패퇴시켰다. 맘루크 술탄왕조는 오스만 제국셀림 1세 때까지 약 250년간 중동을 지배했고, 오스만 제국이 맘루크 왕조를 멸망시켰다.

5. 역사적 의의

아인잘루트 전투는 맘루크 왕조 측 역사가들이 남긴 아랍어 사료에서 현대의 역사 연구에 이르기까지, 무슬림(이슬람교도)이 몽골 제국군과 정면으로 충돌하여 처음으로 이를 격파한 전투로 매우 유명하다. 그러나 호라즘 제국의 잘랄 웃딘의 군단이 시기 쿠투크가 이끄는 3만 기 이상을 격파한 아프가니스탄의 파르완 전투가 있었기에 엄밀히 말하면 "처음"은 아니다.[1]

집사 등 몽골 제국 측 페르시아어 사료에서는 이 전투를 전초전 혹은 국지전으로 취급한다. 몽골 측 입장에서는, 이 전투에 참가한 몽골 제국군은 훌레구의 귀환에 따라 시리아에 남겨진 일부 부대였기 때문이다. 다른 몽골 제국군이 패퇴한 전투는 대부분 훗날 몽골 측의 반격으로 패주, 토멸되었지만, 아인잘루트 전투 이후 몽골 측의 정세 변화로 시리아 탈환 기회를 잃고, 결과적으로 이 지역이 맘루크 왕조의 통치하에 놓이게 된 것이 확정되었기에 이 전투가 인상적이다.[1]

일 칸국에서는 1260년 이후 훌레구, 아바카 등이 조치 울루스와 아제르바이잔 지방에서, 차카타이 울루스와 호라산 지방에서의 국경 분쟁에 몰두하여, 바이바르스의 잦은 시리아 국경 지역 침공에 대한 대책이 늦어졌다. 역대 군주들도 가잔 칸 등 시리아 지역에 몇 차례 원정군을 파견했지만, 대개 군의 규모는 3만 전후였으며 알레포 이남 지역 정복은 거의 실패했다. 쿠빌라이와 아릭부케의 제위 계승 전쟁 이후에도 몽골 제국에서는 왕가 간의 분쟁이 계속되어, 제국의 총력을 기울인 군사 행동이 불가능해진 것도 몽골 측에게 시리아에서의 영토 침략 기회가 사라진 근본적인 요인이었다.[1]

결론적으로, 아인잘루트 전투가 있던 1260년에 서방에서의 몽골 제국의 확장이 정지된 것은 확실하며, 그 의미에서 상징적인 전투였다.[1]

5. 1. 몽골 제국의 확장 한계

아인잘루트 전투는 몽골 제국의 팽창이 서쪽으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한계를 맞이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많은 학자와 대중 역사학자들은 이 전투를 몽골의 진군이 처음으로 주요한 패배를 겪고 영구적으로 중단된 획기적인 사건으로 평가한다.[23][24]

이 전투 이후, 몽골 제국은 시리아 탈환의 기회를 잃고, 결과적으로 이 지역이 맘루크 왕조의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일 칸국의 훌레구, 아바카 등은 조치 울루스와 아제르바이잔 지방에서, 차카타이 울루스와 호라산 지방에서의 국경 분쟁에 몰두하여, 바이바르스의 잦은 시리아 국경 지역 침공에 대한 대책이 늦어졌다. 가잔 칸 등 역대 군주들이 시리아 지역에 몇 차례 원정군을 파견했지만, 알레포 이남 지역 정복은 거의 실패했다.

몽골 제국 제위 계승 전쟁 이후에도 몽골 제국에서는 왕가 간의 분쟁이 장기화되어, 제국의 총력을 기울인 군사 행동이 불가능해진 것도 몽골 측에게 시리아에서의 영토 침략 기회가 사라진 근본적인 요인이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몽골의 패배는 1257 사마라스 화산 폭발 이후 단기적인 기후 이상에 부분적으로 기인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1260년 여름, 더 따뜻하고 건조한 상태로 돌아가면서 지역의 수용 능력이 감소하여 맘루크의 승리에 기여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29]

결론적으로, 1260년 아인잘루트 전투는 서방에서의 몽골 제국의 확장이 정지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전투였다.

5. 2. 맘루크 술탄국의 부상과 중동 지역의 패권

아인잘루트 전투는 맘루크 왕조 측 역사가들이 남긴 아랍어 사료에서 현대의 역사 연구에 이르기까지, 무슬림(이슬람교도)이 몽골 제국군과 정면으로 충돌하여 처음으로 이를 격파한 전투로 매우 유명하다. 그러나 호라즘 제국의 잘랄 웃딘이 시기 쿠투크가 이끄는 몽골군을 격파한 파르완 전투가 이미 있었기에 엄밀히 말하면 "처음"은 아니다.[1]

집사 등 몽골 제국 측 페르시아어 사료에서는, 이 전투를 전초전 혹은 국지전으로 취급한다. 몽골 측 입장에서는, 이 전투에 참가한 몽골 제국군은 훌레구의 귀환에 따라 시리아에 남겨진 일부 부대였기 때문이다. 다른 몽골 제국군이 패배한 전투는 대부분 훗날 몽골 측의 반격으로 패주, 토멸되었지만, 아인잘루트 전투 이후 몽골 측의 정세 변화로 시리아 탈환 기회를 잃고, 결과적으로 이 지역이 맘루크 왕조의 통치하에 놓이게 된 것이 확정되었기에 이 전투가 인상적이다.[1]

일 칸국에서는 1260년 이후 훌레구, 아바카 등이 조치 울루스와 아제르바이잔 지방에서, 차카타이 울루스와 호라산 지방에서의 국경 분쟁에 몰두하여, 바이바르스에 의한 잦은 시리아 국경 지역 침공에 대한 대책이 늦어졌다. 가잔 칸 등 역대 군주들이 시리아 지역에 몇 차례 원정군을 파견했지만, 알레포 이남 지역 정복은 거의 실패했다. 쿠빌라이와 아릭부케의 제위 계승 전쟁 이후에도 몽골 제국에서는 왕가 간의 분쟁이 장기화되어, 제국의 총력을 기울인 군사 행동이 불가능해진 것도 몽골 측에게 시리아에서의 영토 침략 기회가 사라진 근본적인 요인이었다.[1]

결과적으로, 아인잘루트 전투가 있던 1260년에 서방에서의 몽골 제국의 확장이 정지된 것은 확실하며, 그 의미에서 상징적인 전투였다.[1]

5. 3. 한국사와의 비교 및 교훈

아인잘루트 전투는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워 승리한 사례로서, 한국사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고려 시대의 대몽 항쟁은 몽골 제국의 침략에 맞서 끈질기게 저항한 대표적인 사례이며, 아인잘루트 전투와 비교될 수 있다. 아인잘루트 전투는 강대국의 침략에 맞서 자주성을 지키고, 민족의 생존을 위해 싸운 맘루크 술탄국의 노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오늘날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5. 4. 현대의 재조명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 세 개 여단 중 하나는 이 전투를 기려 "아인잘루트"로 명명되었다.[30] 1970년 7월, 야세르 아라파트는 이 역사적 전투와 현대적 상황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31]

우리 민족이 적을 물리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닐 것입니다. 몽골인들이 와서 아바스 칼리파조를 쓸어버렸고, 그들은 우리의 땅 아인잘루트로 왔습니다. - 오늘날 우리가 시온주의자들과 싸우고 있는 바로 그 지역에서 - 그리고 그들은 아인잘루트에서 패배했습니다.|우리 민족이 적을 물리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닐 것입니다. 몽골인들이 와서 아바스 칼리파조를 쓸어버렸고, 그들은 우리의 땅 아인잘루트로 왔습니다. - 오늘날 우리가 시온주의자들과 싸우고 있는 바로 그 지역에서 - 그리고 그들은 아인잘루트에서 패배했습니다.ar

6. 추가 정보



6. 1. 폭발하는 대포(모이드파) 사용 논란

아인 잘루트 전투는 폭발하는 대포(아랍어로 모이드파)가 사용된 최초의 전투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23][24] 이 대포는 몽골의 말과 기병들을 놀라게 하고 몽골군의 부대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맘루크 이집트인들이 사용했다. 이 대포의 폭발성 화약 구성은 나중에 14세기 아라비아 군사 문서에서 묘사되었다.

아흐마드 유세프 알-하산에 따르면, 14세기 아랍 군사 논문들은 수(手)포가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맘루크 측에 의해 몽골 군대를 위협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이는 수포가 사용된 가장 초기의 전투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그 대포에 사용된 화약의 성분도 그 매뉴얼에 제시되었다.[25][26]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수포가 14세기까지 중동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다른 역사학자들과 모순된다.[27][28] 다비드 아얄론, 이크티다르 알람 칸, 조지프 니덤, 토니오 안드라데, 가보르 아고스톤과 같은 다른 역사학자들은 하산의 주장을 반박한다. 칸은 몽골인이 이슬람 세계에 화약을 처음 도입했다고 주장하며, 대포가 1370년대에 맘루크 이집트에 도달했다고 믿는다. 니덤에 따르면, 불창이나 원시적인 총이 13세기 말과 14세기 초에 무슬림에게 알려졌다. 그러나 1342년부터 1352년까지의 문헌 자료에 나오는 "미드파"라는 용어는 실제 수포나 보병포임을 증명할 수 없으며, 이슬람 세계에서 금속제 통 대포에 대한 동시대 기록은 1365년까지 나타나지 않는다. 니덤은 또한 "미드파"라는 용어가 원래 형태에서는 나프타 발사기(화염 방사기)의 튜브나 실린더를 지칭하며, 이후 화약 발명 이후에는 불창의 튜브를 의미하고, 결국에는 수포와 대포의 실린더에 적용되었다고 결론짓는다. 마찬가지로, 안드라데는 중동 자료에서 대포의 문헌상 등장을 1360년대로 본다.

6. 2. 전투 관련 인물


  • '''쿠투즈''': 맘루크 술탄국의 술탄으로, 아인잘루트 전투를 승리로 이끈 지도자이다. 훌라구가 보낸 항복 요구 사절을 죽이고 그 머리를 카이로의 성문인 바브 즈웨일라에 걸었다.[9] 몽골군과의 전투에서 맘루크 군대의 좌익이 밀리자 투구를 벗어던지고 "오, 이슬람이여!"를 외치며 병사들을 독려하여 승리했다.[18] 전투 후 바이바르스에게 암살당했다.[20]
  • '''바이바르스''': 맘루크 술탄국의 장군으로,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선봉대를 이끌고 기만 전술을 펼치며 몽골군을 유인하는 역할을 했다.[18] 쿠투즈와 동맹을 맺고 전투에 참전했으며, 전투의 전반적인 전략을 세웠다고 전해진다.[23] 쿠투즈 사후 술탄이 되었다.[20]
  • '''키트부카''':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신자인 나이만 출신 몽골 제국의 장군으로,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몽골군을 지휘했다.[12] 바이바르스의 유인 전술에 속아 맘루크군의 매복에 걸려 패배하고 사로잡혀 처형당했다.[18]
  • '''훌라구''': 몽골 제국의 장군으로, 칭기즈 칸의 손자이자 몽케 칸의 동생이다. 서아시아 원정을 이끌며 바그다드를 함락시키는 등 전과를 올렸다.[9] 몽케 칸의 사망으로 본국으로 귀환하면서, 아인 잘루트 전투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14]

6. 3. 전투 관련 지명

עין חרוד|ʿEin Harodhe라고도 알려진 아인 잘루트는 전투가 벌어진 장소이며, 팔레스타인 갈릴리 지역에 위치한다. 갈릴리는 아인 잘루트가 위치한 지역으로, 이스라엘 북부에 위치한다. 다마스쿠스시리아의 수도로, 아인 잘루트 전투 이후 맘루크 술탄국이 탈환한 도시이다.

참조

[1] 웹사이트 Battle of Ayn Jalut | Summary | Britannica https://www.britanni[...] 2023-08-27
[2] 서적 The Mongol Warlords: Genghis Khan, Kublai Khan, Hülägü, Tamerlane Firebird books
[3] 서적 Unknown
[4] 서적 —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8. — Vol. 5: The Saljuq and Mongol Periods. — P. 351. — 778 p.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0-10-17
[5] 문서 Unknown
[6] 논문 Ayn Jālūt: Mamlūk Success or Mongol Failure?
[7] 서적 Mongol Armies And Indian Campaigns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8] 서적 Unknown
[9] 서적 Kublai Khan: From Xanadu to Superpower Bantam
[10] 학술지 The Kipchak Connection: The Ilkhans, the Mamluks and Ayn Jalut https://www.jstor.or[...] 2000-00-00
[11] 서적 Crusading and warfare in the Middle Ages : realities and representations Ashgate Publishing Limited
[12] 서적 The Empire of the Steppes: A History of Central Asia https://archive.org/[...] Rutgers University Press
[13] 서적 Unknown
[14] 문서 An Unknown Letter of Hulagu, Il-khan of Persia, to King Louis IX of France
[15] 서적 The Collins Encyclopedia of Military History Unknown
[16] 서적 Unknown
[17] 서적 Unknown
[18] 서적 The Mongol Art of War
[19] 서적 Unknown
[20] 문서 Unknown
[21] 문서 Unknown
[22] 서적 Mongols and Mamluks: The Mamluk-Ilkhanid War, 1260–1281 Cambridge University Press
[23] 웹사이트 Saudi Aramco World : History's Hinge: 'Ain Jalut http://www.saudiaram[...] 2019-06-00
[24] 서적 Genghis Khan and the Making of the Modern World Crown
[25] 웹사이트 Transfer of Islamic Technology to the West Part III: Technology Transfer in the Chemical Industries; Transmission of Practical Chemistry https://history-scie[...] 2016-11-20
[26] 웹사이트 Gunpowder Composition for Rockets and Cannon in Arabic Military Treatises In Thirteenth and Fourteenth Centuries http://www.history-s[...] 2016-11-20
[27] 서적 Warfare in Early Modern Europe 1450–1660 Routledge
[28] 학술지 Gunpowder and Firearms: Warfare in Medieval India Oxford University Press
[29] 학술지 Climate and environmental context of the Mongol invasion of Syria and defeat at ‘Ayn Jālūt (1258–1260 CE) https://www.erdkunde[...] 2021-09-21
[30] 서적 The Palestinians and the Middle East conflict: an international conference held at the Institute of Middle Eastern Studies, University of Haifa, April 1976 https://books.google[...] Turtledove Pub.
[31] 서적 International Documents on Palestine https://books.google[...] Institute for Palestine Studies
[32] 문서 Ayn Jal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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