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나발로나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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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나발로나 1세는 1828년부터 1861년까지 마다가스카르를 통치한 이메리나 왕국의 최초 여성 통치자이다. 그녀는 라다마 1세의 뒤를 이어 즉위했으며, 통치 기간 동안 유럽 열강의 영향력으로부터 마다가스카르의 정치적, 문화적 주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영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기독교 선교 활동을 제한하는 등 자립 정책을 추진했으며, 정복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고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했다. 그러나 가혹한 통치와 강제 노동, 신벌 재판 등을 통해 많은 인명 피해를 발생시켰다. 그녀의 사후, 아들 라다마 2세가 왕위를 계승했으며, 라나발로나 1세에 대한 평가는 전통주의와 외세 배척, 잔혹한 통치 등 엇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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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나발로나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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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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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 마다가스카르의 여왕 |
재위 | 1828년 8월 11일 – 1861년 8월 16일 |
대관식 | 1829년 8월 12일 |
다른 작위 | 해당 없음 |
전임자 | 라다마 1세 |
후임자 | 라다마 2세 |
섭정 | 안드리아미하자 라이니하로 라이니보니나히트리니오니 |
섭정 유형 | 총리 |
배우자 | 라다마 1세 라이니하로 |
자녀 | 라다마 2세 |
전체 이름 | 라나발로나 1세 (Ranavalo-Manjaka I) 라마보 |
아버지 | 안드리안트살라만자카 왕자 (Andriantsalamanjaka, 안드리안아발론트살라마라고도 불림) |
어머니 | 라보도난드리안톰포 공주 |
출생일 | 1778년 |
출생지 | 메리나 왕국 암바토마노이나 |
사망일 | 1861년 8월 16일 |
사망지 | 메리나 왕국, 안타나나리보, 만자카미아다나 |
매장일 | 1861년 / 1893년 (재매장) |
매장지 | 암보히망가 / 안타나나리보 로바의 여왕의 무덤 (재매장) |
왕조 | |
왕가 | 해당 없음 |
2. 초기 생애와 즉위 과정
라마보 공주는 1778년 안타나나리보에서 동쪽으로 약 16km 떨어진 암바토마노이나의 왕궁에서 태어났다.[1][2] 그녀의 부모는 안드리안찰라마냐카 왕자와 라보도난드리아톰포 공주였다.[3] 어린 시절, 라마보의 아버지는 안드리안자피가 안드리안나포이니메리나 왕(1787–1810)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알렸다. 안드리안나포이니메리나는 이전에 안드리안자피를 암보히만가 왕궁에서 쫓아낸 적이 있었다. 안드리안나포이니메리나는 목숨을 구명받은 대가로 라마보를 자신의 아들 라다마 왕자와 약혼시키고, 라다마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또한 이 결혼으로 태어날 아이는 라다마 다음으로 왕위 계승 서열 1순위가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5]
라나발로나 1세의 33년 통치는 이메리나 왕국의 국내 권력을 강화하고 마다가스카르의 정치적, 문화적 주권을 보존하려는 노력으로 특징지어진다. 통치 초기에 여왕은 영국과의 우호 조약을 종료하고 런던 선교 협회의 선교 활동에 대한 제한을 강화하는 등 마다가스카르를 유럽 열강의 관할에서 멀어지게 하기 위한 점진적인 조치를 취했다.[36] 1835년에는 마다가스카르인들 사이에서 기독교 신앙을 금지했고, 1년 안에 거의 모든 외국인이 그녀의 영토를 떠났다.[36]
라마보는 왕족 부인들 중 높은 지위에 있었지만, 라다마의 총애를 받지 못했고 아이도 낳지 못했다. 1810년 안드리안나포이니메리나가 사망하자 라다마는 왕위를 계승하고, 잠재적 경쟁자인 라마보 친척들을 처형하는 왕실 관례를 따랐다. 이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는 악화되었을 수 있다.[5] 사랑 없는 결혼 생활에서 라마보는 데이비드 그리피스 등 선교사들과 어울려 럼주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라마보와 그리피스는 30년 동안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4]
1828년 7월 27일 라다마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현지 관습에 따르면 라다마의 맏누이의 맏아들 라코토베가 정당한 상속자였다. 라코토베는 런던 선교회가 안타나나리보에 설립한 학교의 첫 학생이었다. 라다마는 라코토베의 계승에 찬성하는 두 측근과 함께 사망했으나, 그들은 왕의 경쟁자를 고발하는 데 연루되어 보복을 두려워하여 며칠 동안 보고를 망설였다. 라다마 사후, 그의 가족은 왕위 계승에 이해 관계가 있었다.[5][6] 이 기간 동안 고위 군 장교 안드리아맘바가 진실을 알아내고, 안드리아미하자, 라이니조하리, 라발론찰라마 등 다른 장교들과 협력하여 라마보의 왕위 주장을 지지했다.[7]
이 장교들은 라마보와 그녀의 친구를 안전한 곳에 숨기고, 판사 및 ''삼피''(왕실 우상) 관리자 등 영향력 있는 권력 중개인들의 지지를 확보했다. 그 후 군대를 집결시켰다.[5][6] 1828년 8월 11일, 라마보는 라다마의 명령을 구실로 자신의 후계자임을 선언했고, 즉각적인 저항은 없었다. 라마보는 '라나발로나'라는 왕명을 얻고, 라코토베와 그의 가족 등 정치적 경쟁자들을 체계적으로 처형하는 왕실 관습을 따랐다.[5] 그녀의 대관식은 1829년 6월 12일에 거행되었다.[8] 라나발로나 1세는 남편의 뒤를 이어 1540년 건국 이후 이메리나 왕국의 최초 여성 통치자가 되었다.
3. 통치
대부분의 외국과의 무역 관계를 종료하면서, 여왕은 자립 정책을 추구했고, 이는 돈이나 물품으로 세금을 납부하는 대신 강제 노동을 제공하는 오래된 전통인 '코르베'(fanompoana)의 빈번한 사용을 통해 가능해졌다. 라나발로나는 섬 전체로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전임자인 라다마 1세가 수행한 팽창 전쟁을 계속했으며, 그녀의 뜻에 반대하는 행동을 한 것으로 판단되는 사람들에게 엄격한 처벌을 가했다.
3. 1. 정치
라나발로나 1세는 남편 라다마 1세의 정책을 이어받아 새로운 기술과 외국의 지식을 받아들이고 산업화를 지원했으며, 군대를 전문화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두 군주 모두 외국인에 대해 복합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기존 질서에 혼란을 주는 변화를 막기 위해 외국인의 활동을 규제하면서도, 그들의 전문 지식을 활용하기 위해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또한 두 군주 모두 프랑스 본토보다 더 큰 섬 전체의 외딴 지역까지 통치할 수 있도록 메리나 왕국의 정치 관료제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다.[53]
라나발로나 1세는 귀족 출신 조언자들의 도움을 받아 통치하는 전통을 따랐다. 여왕의 가장 강력한 대신들은 동시에 그녀의 남편이기도 했다.
전통적으로 메리나 군주는 정책을 발표하고 군주와 대중 간의 관계를 재확인하기 위해 공공 모임에서 ''카바리''(웅변)를 발표했다. 그러나 라나발로나 1세는 공공 연설과 정치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에, 선교사에게 교육받은 궁정 서기에게 받아쓰게 한 편지를 통해 부하들에게 지시하고 알리는 것을 선호했다. 그녀는 때때로 카바리를 통해 대중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파드로아나''(새해맞이 의식), 왕실 우상에 대한 공물, 관습적인 행사에서 ''보디온드리''와 ''자카 쇠고기''를 바치는 등 ''하시나''(조상 축복)를 부여하는 메리나 군주의 전통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라나발로나 1세는 이러한 전통 의례에 변화를 주어 복잡성과 상징성을 높여 더 큰 의미를 부여했다.[53]
3. 2. 대외 관계 및 군사
라나발로나 1세는 즉위 초, 영국과의 우호 조약을 종료하고 런던 선교 협회의 활동을 제한하며 유럽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조치를 취했다. 1835년에는 마다가스카르인들의 기독교 신앙을 금지했고, 대부분의 외국인들이 마다가스카르를 떠났다.[36]
대부분의 외국과의 무역 관계를 종료한 라나발로나 1세는 '코르베'(fanompoana)라는 강제 노동 전통을 활용하여 자립 정책을 추구했다. 또한, 주변 왕국을 정복하는 전쟁을 계속하며 엄격한 처벌을 가했다. 이러한 군사 작전과 강제 노동, 가혹한 정의 집행으로 인해 마다가스카르 인구는 크게 감소했다.[10]
라나발로나 1세는 주변 왕국을 복속시키기 위해 군사적 침략을 계속했다. 이로 인해 경제 성장과 인구 성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2만에서 3만 명으로 추정되는 상비군을 유지했으며,[18] 이 군대를 통해 주변 지역에 가혹한 처벌을 가하고, 주민들을 노예로 끌고 와 재산을 약탈했다. 1820년에서 1853년 사이에 약 100만 명의 노예가 유입되었으며, 이는 안타나나리보 주민의 3분의 2를 차지했다.[19]
마다가스카르 역사가에 따르면, 라나발로나 1세와 이전 통치자의 군사 작전으로 인해 약 6만 명의 비메리나인이 사망했다. 또한, 초토화 작전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기근으로 사망했다.[10] 메리나 군인들의 사망자 수도 많았는데, 1820년에서 1853년까지 16만 명으로 추정된다. 저지대에 주둔한 군인 중 25~50%가 매년 말라리아와 같은 질병으로 사망했다. 연평균 4,500명의 군인이 사망하여 이메리나의 인구 감소에 큰 영향을 미쳤다.[10]
라나발로나 1세는 ''tangena''(탕게나)라는 나무 열매에서 추출한 독을 이용한 신성 재판을 통해 질서를 유지했다. 피고는 독과 함께 세 조각의 닭 껍질을 먹어야 했으며, 모두 토해내면 무죄, 그렇지 않으면 유죄로 판결했다.[20] 주민들은 탕게나 재판을 일종의 천상의 정의로 여겼다.[10] 절도, 기독교, 마법 등 다양한 범죄 혐의에 대해 탕게나 재판이 의무화되었으며, 평균적으로 재판을 받은 사람들의 20~50%가 사망했다. 1820년대에는 연간 약 1,000명이 사망했고, 1828년에서 1861년 사이에는 연간 약 3,000명이 사망했다. 1838년에는 이메리나 인구의 약 20%가 탕게나 재판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1863년에 금지되었지만, 이후에도 은밀하게 또는 공개적으로 시행되었다.[10]
라나발로나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프랑스와 영국은 마다가스카르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경쟁했다.[40] 라나발로나 1세는 외세의 영향력을 제한하기 위해 자립 정책을 추구했다.[41]
즉위 직후, 라나발로나 1세는 라다마 1세와 영국 사절 간의 조약을 무효화하고, 국제 노예 무역 중단을 조건으로 영국으로부터 받던 지원금을 거부했다. 이로 인해 현대 무기 공급이 중단되어 외세와 지역 저항 세력에 취약해졌다.[43] 1829년 프랑스 함대의 공격을 받았지만, 여왕의 군대는 프랑스 군을 격퇴했다.[42]
1832년, 라나발로나 1세는 난파된 프랑스인 장 라보르드에게서 대포, 머스킷총, 화약 제조 기술을 얻게 되었다. 라나발로나 1세는 그에게 노동력과 재료를 제공하여 현대식 무기 공장을 설립하도록 지원했고, 이를 통해 유럽에 대한 무기 의존도를 줄일 수 있었다.[43]
3. 3. 종교 정책
라다마 1세는 1818년 런던 선교 협회(LMS)가 토아마시나에 설립한 마다가스카르 최초의 정규 학교를 방문한 후, 기독교 장인 선교사들을 수도로 초청했다. 1820년 12월부터 LMS 선교사들은 안타나나리보에 작업장을 설립하고 공립 학교 네트워크를 개발하여 마다가스카르어 성경 구절을 사용하여 문해력과 함께 산수 및 영어를 가르쳤다.[22] 그러나 라다마는 마다가스카르인들이 세례를 받거나 기독교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금지했다.[23]
라나발로나 1세 즉위 후 초기에는 기독교에 대한 국가 통제가 완화되었다. 1828년에야 LMS 선교사들이 수입한 인쇄기가 가동되었고, 수천 권의 찬송가 및 기타 자료가 인쇄되었다.[24] 신약 성경 번역은 통치 2년 만에 완료되었고, 1829년과 1830년 사이에 3,000부가 인쇄되어 배포되었다.[25] 1835년에는 구약 성경 번역이 완료되어 첫 번째 사본이 인쇄되었다.[21]
1831년 라나발로나 1세는 마다가스카르인들이 교회 예배에 참석하고 성례전을 거행하며 세례를 받는 것을 허가했다.[26] 1년 안에 수백 명의 마다가스카르인들이 세례를 받았다.[27] 그러나 주요 종교, 정치, 사회 지도자들의 개종은 기독교의 정치적, 문화적 영향에 대한 경계를 불러일으켰다.[30]
1835년 2월 26일 카바리 연설에서 라나발로나 여왕은 신하들 사이에서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금지했다. 그녀는 담화에서 새로운 종교가 금지되고 그것을 행하는 것이 사형에 해당하는 자신의 백성과 종교의 자유와 양심을 허용한 외국인을 구별했다.[35]
이후 성경을 소지하거나, 회중으로 예배를 드리거나, 기독교 신념을 고백한 사람들은 벌금, 투옥, 신벌재판 등의 처벌을 받았다.[37][38] 기독교인들의 처형과 고문에 대한 섬뜩한 이야기가 선교사들을 통해 보고되었다.[11] 안도할로 대성당은 초기 마다가스카르 기독교 순교자들을 기념하기 위해 건설되었다.[39] 라나발로나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종교적인 이유로 처형된 마다가스카르 시민의 정확한 숫자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3. 4. 랑베르 헌장과 쿠데타 시도
라다마 2세 즉위 전인 1855년, 프랑스인 조세프-프랑수아 랑베르는 라다마와 랑베르 헌장이라는 불평등 조약을 체결했다. 이 헌장은 랑베르와 그의 사업 동료들에게 마다가스카르 섬의 많은 상품과 천연 자원을 먼저 개발할 권리를 주었지만, 라다마 2세가 즉위해야 효력이 발생했다.[44] 영국 측 기록에 따르면, 랑베르는 라다마 2세에게 프랑스어로 쓰인 문서를 서명하도록 설득했는데, 라다마 2세는 프랑스어를 잘 알지 못했다. 랑베르는 문서를 구두로 번역하면서 여왕의 정책이 백성들에게 가하는 과도한 압력에 대한 내용만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라다마는 프랑스의 압력에 마지못해 서명했지만, 이 편지에는 프랑스 군사 개입을 요청하는 내용이 담겨 있어 마다가스카르가 프랑스에 지배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44]
라다마는 이 사실을 영국 외교관에게 알렸고, 영국은 프랑스의 음모에 협력하지 않았다.[44] 랑베르는 라다마를 왕위에 앉히고 조약을 발효시키기 위해 독자적으로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 1857년 5월, 랑베르는 오스트리아의 여행가 이다 파이퍼와 함께 라나발로나의 궁정을 방문했는데, 파이퍼는 자신도 모르게 음모에 가담하게 되었다.[46] 파이퍼에 따르면, 라다마와 랑베르는 6월 20일에 여왕을 폐위시키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라이닐리아리보니가 라다마에게 충성하는 군인들을 확보하지 못해 쿠데타는 실패했다.[46] 영국 측 기록에 따르면, 라다마 자신이 여왕에게 쿠데타 계획을 밀고했으며, 이는 공모자들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책략이었다.[44] 음모가 발각된 후, 유럽인들은 궁궐 부지에 갇혔고, 7월 말에 추방 명령을 받았다.[46]
4. 후계 및 사망
여왕은 아들 라다마 2세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라이니마하로와 보수파는 그의 진보적인 성향을 알고 대신 여왕의 조카 람보아살라마가 권력을 잡아 그들과 그들의 정치적 의제에 대한 충성을 유지하도록 하려 했다.[47] 여왕 사후 당시 공동 총리이자 육군 참령이었던 진보적인 형제 라이니보니나히트리니오니와 라이닐리아리보니는 라다마의 계승을 지지했으며, 특히 왕세자의 왕위 계승에 대한 군대의 지지를 확보하는 데 있어 람보아살라마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라나발로나가 죽음을 앞두고 라다마는 자신의 계승이 무난히 이루어지도록 조치를 취해 안타나나리보 로바에 있는 자신의 거처를 수백 명의 병사로 포위하고 람보아살라마의 가족 중 한 명을 로바로 보내 그에게 새 국왕에게 공개적으로 충성을 맹세하게 하여 굴복시켰다.[48]
1861년 8월 16일, 라나발로나는 안타나나리보 로바의 만자카미아디아나 궁전에서 잠을 자다가 사망했다.[48] 1만 2천 마리의 제부가 희생되어 그 고기가 국민들에게 배분되었고, 공식적인 애도 기간은 9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그녀의 시신은 은으로 만든 관에 안치되어 암보히망가 왕족 도시에 있는 묘소에 안장되었다. 장례식 동안, 행사에 사용하기 위해 준비된 근처 화약통에 불꽃이 튀어 폭발과 화재가 발생하여 많은 구경꾼이 사망하고 행사가 열린 단지 난자카나 구역의 역사적인 왕실 거처 3채가 파괴되었다.[49] 1897년, 프랑스 식민 당국은 암보히망가의 신성성을 해제하기 위해 여왕의 시신과 다른 메리나 군주의 유해를 발굴하여 안타나나리보 로바의 묘소로 옮겼다. 그녀의 유골은 라소헤리나 여왕의 묘소에 안치되었다.[50] 그녀의 아들 라코토 왕자는 라다마 2세로 왕위를 계승했다.[51]
5. 유산 및 평가
라나발로나 1세의 전통주의 정책은 아들 라다마 2세의 통치 하에서 급격히 바뀌었다. 라다마가 기독교로 공공연히 개종한 후 이메리나 전역에서 "정신 지배"의 유행이 발생했고, 이는 라나발로나 1세의 분노한 영혼 탓으로 널리 여겨졌다.[52]
여왕의 외국인 동시대인들은 그녀의 정책을 강력히 비난했으며, 이를 폭군이나 심지어 미친 여자의 행동으로 간주했는데, 이러한 특징은 1970년대까지 서양 역사 문헌에 남아 있었다.[53][55] 라나발로나 1세는 전통적으로 잔혹하고 외국인 혐오적인 폭군으로 묘사되었지만, 최근의 역사적 분석에서는 그녀를 자신의 왕국에 대한 외국 점령을 용납하지 않은 초기 전통주의자이자 민족주의자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54][55]
오늘날 마다가스카르에서, 중앙 고원 지대의 말라가시인들은 라나발로나 1세에 대해 복잡하고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대부분은 현재 말라가시 역사 교과서에서 라나발로나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에 따라 그녀의 통치를 비난한다. 이러한 견해는 말라가시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가장 흔하다. 다른 사람들은 말라가시 전통과 독립을 지키려는 그녀의 노력을 존경한다. 그녀의 국내 정책에 대한 감정과 관계없이, 대다수는 그녀를 말라가시 역사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로 여기고 유럽 열강과의 긴장 속에서 통치자로서 그녀의 강인함을 칭찬한다.[55]
마다가스카르 역사가 귄 캠벨은 유럽의 인격 모독 시도에 반대하며, 라나발로나 1세의 경제 및 군사 정책은 유럽 제국주의 지배로부터 마다가스카르를 보호하기 위한 합리적인 접근 방식이었다고 주장했다.[56]
라나발로나와 그녀의 궁정에 대한 허구적 이야기는 조지 맥도널드 프레이저의 소설 ''플래시만의 여인''에 등장한다. 주인공인 해리 파제트 플래시먼이라는 군인 겸 비밀 요원은 라나발로나의 군사 고문이자 연인이 된다.[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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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Writing Ideology: Ranavalona, the Ancestral Bureaucrat
[54]
서적
Sharp (2002), p. 44
[55]
간행물
Perceptions of Ranavalona I: A Malagasy Historic Figure as a Thematic Symbol of Malagasy Attitudes Toward History
2002-05
[56]
간행물
Ranavalona I of Madagascar: African Jezebel or Patriot?
2023-11-01
[57]
서적
MacDonald Fraser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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