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나발로나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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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나발로나 3세는 1883년부터 1897년까지 마다가스카르를 통치한 마지막 군주이다. 어린 시절 개인 교육을 받고 개신교 세례를 받은 그녀는 1883년 라나발로나 2세의 뒤를 이어 여왕이 되었다. 통치 기간 동안 프랑스와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프랑코-호바 전쟁에서 패배하여 1895년 프랑스에 항복했다. 이후 추방되어 레위니옹과 알제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1917년 알제에서 사망했다. 그녀는 마다가스카르의 독립과 주권을 위해 노력한 인물로 기억되며, 유품이 반환되어 복원된 여왕 궁전에 전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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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나발로나 3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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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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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마다가스카르의 여왕 |
통치 기간 | 1883년 7월 30일 – 1897년 2월 28일 |
대관식 | 1883년 11월 22일 |
본명 | 라나발로나 3세 (라나발로 만자카 3세) 라자핀드라헤티 (라자피) |
선임자 | 라나발로나 2세 |
계승자 | 왕정 폐지 마리루이즈 (호바 왕조의 수장으로서) |
섭정 | 라이닐라이아리보니 라이니치ም바자피 라산지 |
섭정 유형 | 총리 |
배우자 | 라트리모 라이닐라이아리보니 |
왕조 | 호바 |
아버지 | 안드리안치미아나트라 |
어머니 | 라케타카 공주 |
출생명 | 라자핀드라헤티 |
출생일 | 1861년 11월 22일 |
출생지 | 메리나 왕국 만자카자피 암파리베 |
사망일 | 1917년 5월 23일 |
사망지 | 프랑스령 알제리 알제 |
매장일 | 1917년 (원래) 1938년; 2007년 (이장) |
매장지 | 알제 생-외젠 묘지 (원래) 안타나나리보의 로바 암보히망가 (이장) |
종교 | 개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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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린 시절
라나발로나 3세는 1883년 7월 13일 라나발로나 2세의 사망으로 마다가스카르의 여왕이 되었다.[36] 1883년 11월 22일 안타나나리보 마하마시나에서 "신의 은총과 국민의 뜻에 따라 마다가스카르의 여왕이자 국가의 법률 수호자 폐하 라나발로나 3세"라는 칭호를 받으며 대관식이 거행되었다.[7] 라나발로나 3세는 대관식에 군인 대신 수도 학교의 남학생 500명과 여학생 400명을 동원하여 전통을 깼다. 이들은 각각 군복과 흰색 옷을 입고 창을 이용한 군사 훈련을 선보였다.[37]
라나발로나 3세는 1861년 11월 22일 안타나나리보 외곽 만자카자피 구역의 암파리베에서 안드리안치미아나트라와 라케타카 공주의 딸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라자핀드라헤티였다.[2] 라나발로나 2세의 조카이자 안드리안암포이니메리나 왕의 증손녀였던 라자핀드라헤티는 마다가스카르 왕국의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3] 어린 시절 라자핀드라헤티의 양육은 집안의 노예가 맡았다.[4]
라자핀드라헤티는 학교에 다닐 나이가 되자 이모인 라나발로나 2세의 보호를 받으며 런던 선교 협회(LMS) 교사로부터 개인 교육을 받았다.[2] 성경 공부, 학습, 독서를 좋아하고 선생님들과 좋은 관계를 맺었던 그녀는 부지런하고 호기심 많은 아이로 묘사되었다.[4] 암바토나캉가 회중 학교, 여자 고등학교, LMS 여자 중앙 학교에서 청소년기 교육을 계속 받았으며, 1874년 4월 5일 암보히망가에서 개신교 세례를 받았다.[2] 선생님들은 그녀를 항상 뛰어난 학생 중 한 명으로 묘사했다.[4]
젊은 시절 라자핀드라헤티는 안드리나(귀족) 출신 라트리모(라트리모아리보니)와 결혼했다. 그러나 라트리모는 1883년 5월 8일 22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라자핀드라헤티는 젊은 과부가 되었다.[5] 라이닐라이아리보니 총리가 정치적인 이유로 라트리모를 독살했을 수도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라이닐라이아리보니의 형 라이니보니나히트리니오니 총리가 주도한 1863년 귀족 혁명은 안드리나의 절대 통치를 안드리나 군주와 호바(자유민) 총리 간 권력 공유 입헌 군주제로 대체했다. 이러한 권력 분점은 총리와 여왕 간의 정치적 결혼으로 굳어질 예정이었다. 라나발로나 2세가 죽음에 가까워지고 후계자 물색이 시작되자, 라이닐라이아리보니는 유력한 후계자인 라자핀드라헤티와 결혼하여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 라트리모를 독살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5]
3. 재위
라나발로나 3세는 이전 여왕들처럼 총리 라이닐라이아리보니와 정략결혼을 했다. 총리가 대부분의 실권을 행사했고, 여왕은 대중 연설이나 공공건물 개관식 참석 등 상징적인 역할에 머물렀다.[9] 여왕은 여가 시간에 연날리기, 로또(실내 게임), 뜨개질, 바느질 등을 즐겼으며,[38] 프랑스 의류를 선호하고 프랑스 마술사를 초청하는 등 프랑스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10]
3. 1. 프랑코-호바 전쟁
라나발로나 3세는 마다가스카르의 통치자로서 19세기 초부터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진행되어 온 외교 분쟁에 관여했다. 프랑스와 마다가스카르 간의 긴장은 라나발로나 즉위 3년 전부터 심화되었고, 즉위 몇 달 전부터 공격이 격화되었다. 1883년 2월 북서부 해안이 포격당했고, 5월에는 프랑스가 마하장가를 점령했으며, 6월에는 투아마시나를 포격하고 점령했다. 1883년 여름 라나발로나 3세 즉위 당시 북부 해안을 따라 공격이 계속되었다. 프랑스의 적대 행위 직후, 총리 라이닐라이아리보니는 앵글로-줄루 전쟁에서 나탈 기마 경찰로 전투 경험을 쌓은 영국인 디그비 윌로비를 고용하여 군사 문제를 감독하고 여왕의 군대를 훈련시켜 프랑스의 침공으로부터 섬을 방어하고자 했다.[3]
이 기간 동안 마다가스카르는 프랑스와 협상을 시도했지만, 양측 모두 주요 쟁점에 양보할 의사가 없어 실패했다. 2년의 교착 상태 끝에 1885년 12월, 프랑스는 안타나나리보에 최후통첩을 보냈는데, 내용은 프랑스의 마다가스카르 북동부 지역 영유권 인정, 사칼라바에 대한 프랑스 보호령 인정, 프랑스 재산 원칙 인정, 배상금 지불이었다. 이 평화 조약은 1886년 1월 라나발로나와 라이닐라이아리보니, 그리고 2개월 후 프랑스 정부 대표에 의해 비준되었다.[11]
비준 전, 여왕과 총리는 "외교 관계"가 프랑스 레지던트에 의해 통제되고, 디에고-수아레즈 만에 "시설"을 언급하는 주요 조항에 대해 설명을 요구했다. 두 프랑스 협상가인 파트리모니오 장관과 미오 제독은 조약에 부록으로 첨부된 설명을 제공했고, 마다가스카르 통치자들은 조약이 자국 주권을 충분히 보호한다고 판단하여 승인했다. 그러나 공식 조약은 부록 없이 파리에서 출판되었다. 부록이 런던에서 출판되자 프랑스는 법적 효력이 없다고 부인했다. 프랑스는 마다가스카르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섬에 대한 보호령을 선포했다.[3]
이 사건에 대한 국제적 반응은 다양했으며, 국가적 이익에 영향을 받았다. 영국은 프랑스의 보복을 우려하여 마다가스카르 주권 방어를 주저했다. 이후 영국과 마다가스카르 간 공식 교신은 프랑스 레지던트를 통해 이루어졌지만, 라나발로나와 궁정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반면 미국과 독일은 여왕 정부와 직접 교류를 계속했다. 이러한 불일치로 인해 조약의 한 측면에 대한 재해석이 강요되었고, 여왕의 내정 권한은 유지되었다.[3]
1886년, 여왕은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에게 실크 ''아코토파하나'' 천, 상아 핀, 직조 바구니를 선물하며 마다가스카르 주권 보존을 위한 미국의 지원을 요청했다.[39] 그러나 미국은 마다가스카르 독립을 지지할 군사적, 외교적 능력이나 의지가 없었다. 라나발로나는 1887년 12월 12일 프랑스에 추가 양보를 허용하는 조약에 서명했다.[3]
마다가스카르를 보호령으로 삼으려는 프랑스의 주장은 1890년 영불 협약에서 영국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12] 1890년부터 1894년까지 프랑스는 조약에 의해 설정된 영토권을 적극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프랑스의 토지 소유권 주장은 라나발로나와 라이닐라이아리보니에게 마다가스카르 주권에 대한 부당한 침해로 인식되었다. 샤를르 르 미르 드 빌레르가 여왕과 총리를 설득하기 위해 파견되었으나, 합의에 도달하지 못할 경우 전쟁을 통해 섬을 점령하려는 의도였다. 프랑스의 제안은 거부되었고, 1894년 11월 프랑스와 마다가스카르 간 외교 관계가 단절되었다.[3]
외교 관계 종료 후, 프랑스는 1894년 12월 투아마시나 항구를 포격, 점령하고, 다음 달 마하장가를 점령, 섬 내부로 가는 도로를 건설하며 진격을 시작했다.[12] 주요 원정군은 5월에 도착했다. 15,000명의 프랑스 병사 중 6,000명 이상이 질병으로 사망하여[13] 알제리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프랑스 식민지에서 증원군이 필요했다. 부대는 1895년 9월 수도에 도착했다.[12] 3일 동안 마다가스카르군은 프랑스군을 막았지만, 프랑스군이 안타나나리보의 로바 궁전 단지를 포격하자 라나발로나는 왕국 통치권을 프랑스에 넘겨주었다.[13]
4. 프랑스 식민 통치
1896년 1월 1일, 프랑스는 마다가스카르를 공식적으로 병합했다.[36] 라나발로나 3세는 여왕으로서 명목상의 지위는 유지했지만, 모든 실질적인 권한은 프랑스에게 넘어갔다. 같은 해 8월, 프랑스는 마다가스카르를 식민지로 선포하고, 라이닐라이아리보니 총리를 알제로 추방했다.
프랑스의 통치에 저항하는 메날람바 반란이 일어났지만, 1897년에 진압되었다.
5. 추방과 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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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2월 27일, 조제프 갈리에니는 라나발로나 3세를 마다가스카르에서 추방하고 다음 날 공식적으로 군주제를 폐지했다.[18] 프랑스 관리들은 새벽 1시 30분에 여왕에게 궁을 떠나라고 명령했고, 여왕은 700~800명의 호위병과 운반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가마에 실려 안타나나리보를 떠났다. 레위니옹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동부 항구 투아마시나로 이동하는 며칠 동안 라나발로나가 술을 많이 마셨다고 한다.[14] 3월 6일, 투아마시나에서 라나발로나는 여동생 라센드라노로와 고모 라마신드라자, 프랑스 군인의 사생아를 임신한 지 9개월 된 14세 조카 라자피난드리라만이트라가 곧 도착할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19]
알제에 있는 여왕의 별장에는 하인과 프랑스인 여자 시중이 제공되었는데, 이 시중은 그녀를 감시하고 여왕이 집에서 손님을 접대할 때마다 함께했다. 프랑스 정부는 처음에 마다가스카르 식민지 예산에서 연간 25,000 프랑의 연금을 지급했다. 여왕의 재산은 거의 모두 식민 당국에 의해 압수되었지만, 보석을 포함한 일부 개인 소지품은 보관할 수 있었다. 초기 연금은 넉넉하지 않아 식민 정부가 여러 번 연금 인상을 요구할 정도였다. 라나발로나는 하인에게 현금을 위해 보석을 팔도록 지시했지만, 이 계획은 프랑스 식민 당국에 의해 발각되어 하인은 해고되고 마다가스카르로 돌려보내졌다.[14]
라나발로나는 알제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곧 알제 엘리트들 사이에서 사교 활동을 즐겼다. 정기적으로 파티, 외출, 문화 행사에 초대되었고 종종 그녀만의 행사를 주최했다.[24] 그러나 향수는 항상 존재했고, 마다가스카르를 방문할 수 없다는 사실은 우울함과 지루함을 안겨주었다. 마음을 정리하고 기분을 고양시키기 위해 종종 시골, 해변, 또는 마을을 혼자서 오랫동안 산책하기도 했다.[25]
여왕은 프랑스 본토, 특히 파리를 방문하고 싶어했고 여행 허가를 반복해서 요청했다. 1901년 5월, 마침내 프랑스 방문 허가를 처음으로 받아 샹젤리제와 샤를 드 골 광장 근처 파리 16구에 있는 작은 아파트로 이사했으며, 도시의 주요 명소를 방문하고 수많은 리셉션, 무도회, 쇼 및 기타 행사에 초대되었다. 사교계에서 정중하고 존경받으며 환영받았고 값비싼 드레스를 포함한 많은 선물을 받았다. 베르사유 궁전을 방문하고 파리 시청에서 공식적으로 환영받았으며, 보르도에서 3주간의 휴가를 보냈다. 8월 초 마르세유에서 알제리행 배를 타기 전 아르카숑 해변을 방문했다.[26] 파리 언론은 그녀의 방문을 자세히 보도했고, 여왕의 운명에 대한 동정과 더 큰 연금을 제공하거나 레지옹 도뇌르를 받은 사람으로서 존경을 주지 못한 프랑스 정부에 대한 비난을 표했다.[26]
이후 라나발로나는 12년 동안 프랑스를 여섯 번 더 방문했다. 잦은 방문과 좋은 평판은 그녀를 많은 프랑스 시민들의 사회적 쟁점으로 만들었다. 방문은 일반적으로 많은 언론의 홍보와 함께 이루어졌고, 프랑스 대중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아져 1916년 ''쁘띠 뵈르'' 비스킷 상자에 등장하기도 했다.[27] 1903년 9월 두 번째 프랑스 방문에서는 빅쉬르세르와 오리악을 방문했고, 시민들의 압력으로 연금이 37,000프랑으로 인상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로 프랑스 방문은 끝났다. 알제리에서 그녀와 가족은 알제 중심부에 있는 개혁교회 건물에서 매주 열리는 개신교 예배에 정기적으로 참석했다.[28] 전쟁이 시작된 후, 알제리 국제 적십자 위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기여했다.[26]
5. 1. 레위니옹 섬
1897년 3월, 라나발로나 3세는 가족들과 함께 레위니옹 섬 푸앵트데갈레 항구에 "라 페루즈"호를 타고 도착했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은 마다가스카르 점령 작전으로 인한 프랑스인 사망에 대해 분노하며 여왕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이후 일행은 생드니의 호텔 드 유럽으로 이동했다. 망명 생활의 정서적, 육체적 고통으로 인해 라자피난드리라만트라는 호텔 도착 직후 진통을 시작, 여자아이를 출산했지만 5일 후 사망했다. 아이는 마리루이즈로 명명되었고, 라나발로나 3세의 양녀가 되었다.[20]한 달 뒤, 라나발로나 3세 일행은 생드니의 "아르세날 거리"와 "레파 거리" 모퉁이에 위치한 마담 드 빌렌트루아 소유의 집으로 이사했다. 이 집은 커다란 정원 벽과 마다가스카르 전통 가옥을 연상시키는 뾰족한 지붕과 베란다를 갖추고 있었다. 왕실에는 비서 두 명, 요리사, 하녀, 라나발로나 3세를 위한 하인 세 명, 그리고 이모와 여동생을 위한 하인 몇 명이 더 있었다. 여왕의 개인 목사는 자유롭게 왕실을 방문할 수 있었다.[21]
5. 2. 알제리
1899년, 프랑스 당국은 라나발로나 3세를 알제리로 이송했다. 프랑스 당국은 마다가스카르와 여왕의 근접성이 마다가스카르 반군에게 용기를 줄 수 있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알제에 도착한 라나발로나는 무스타파 쉬페리외르 지역의 빌라로 이송되었는데, 파리로 가기를 희망했던 여왕은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37]알제에서 여왕은 프랑스인 여자 시중의 감시를 받았으며, 프랑스 정부로부터 연금을 받았다. 초기 연금은 넉넉하지 않았지만, 이후 프랑스 식민 당국의 노력으로 여러 차례 인상되었다.[14]
망명 생활 초기에 라나발로나는 알제 엘리트들과 교류하며 사교 활동을 즐겼다. 정기적으로 파티, 외출, 문화 행사에 초대되었고, 직접 행사를 주최하기도 했다.[24] 그러나 향수병은 늘 여왕을 따라다녔고, 마다가스카르를 방문할 수 없다는 사실에 우울해하며 종종 홀로 산책을 했다고 한다.[25]
라나발로나는 프랑스 본토, 특히 파리를 방문하기를 원했고, 반복적으로 여행 허가를 요청했다. 1901년 5월, 마침내 첫 프랑스 방문 허가를 얻어 파리의 샹젤리제 근처 아파트에 머물며 여러 명소와 행사에 참여했다. 프랑스 대중들은 여왕을 따뜻하게 맞이했고, 언론은 여왕의 방문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프랑스 정부의 처우를 비판하기도 했다.[26]

이후 라나발로나는 12년 동안 여섯 번 더 프랑스를 방문했다. 잦은 방문과 좋은 평판으로 프랑스 시민들에게 널리 알려졌으며, 1916년에는 '쁘띠 뵈르' 비스킷 상자에 등장할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27] 1903년 방문에서는 시민들의 압력으로 연금이 인상되기도 했다.[26]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로 프랑스 방문은 중단되었지만, 알제리에서 국제 적십자 위원회 활동에 참여하며 전쟁에 기여하고자 했다.[26]
6. 죽음
라나발로나 3세는 1910년과 1912년에 마다가스카르로 돌아가고 싶다고 요청했지만, 식민지 당국은 자금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결국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1917년 5월 23일 알제리의 별장에서 색전증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25] 5월 25일 알제 생-에젠 묘지에 묻혔으며, 장례식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25]
1925년 6월, 알제리 총독은 마다가스카르 총독에게 편지를 보내 묘지 관리가 소홀함을 지적하며, 프랑스 정부의 명예를 위해 묘지 관리를 촉구했지만 두 번 거절당했다.[14] 1938년 11월, 유해는 마다가스카르 안타나나리보 로바에 있는 라소헤리나 여왕의 묘에 다시 안치되었다.[7] 1995년 11월 6일 밤, 화재로 왕실 묘지가 크게 훼손되었지만, 람바로 감싸인 라나발로나 3세의 유해는 구할 수 있었다. 이후 유해는 암보히망가의 왕실 묘에 다시 안치되었다.[29]
7. 유산
라나발로나 3세는 마다가스카르의 독립과 주권을 위해 노력한 마지막 군주로 기억된다. 1910년과 1912년 두 차례에 걸쳐 마다가스카르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하고, 1917년 알제리에서 색전증으로 사망하여 생-에젠 묘지에 묻혔다.[25] 1938년 11월, 유해는 마다가스카르 안타나나리보 로바에 있는 라소헤리나 여왕의 묘에 재안치되었다.[7] 1995년 화재로 왕실 묘지가 손상되었으나, 람바로 감싸인 라나발로나 3세의 유해는 구출되어 암보히망가의 왕실 묘에 다시 안치되었다.[29]
2020년, 서리주 길드포드의 다락방에서 발견된 라나발로나 3세의 유품이 경매에 부쳐졌고, 마다가스카르 정부가 이를 구입하여 반환되었다. 이 유물들은 복원된 여왕 궁전에 전시될 예정이다.[31][32][33]
라나발로나 3세의 삶은 제국주의 침략에 맞선 투쟁의 상징으로, 특히 한국인들에게 깊은 공감과 연대의식을 불러일으킨다. 마다가스카르 작가 장-조제프 라베아리벨로는 프랑코-호바 전쟁에 관한 역사 소설 ''라브 오부 루즈''(L'Aube rouge)에서 라나발로나 3세를 주로 다루었다.[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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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EREFBarrier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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