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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앙헬 칼데론 과르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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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파엘 앙헬 칼데론 과르디아는 코스타리카의 정치인으로, 1940년부터 1944년까지 대통령을 역임했다. 그는 산호세 시장, 국회의원을 거쳐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재임 기간 동안 최저임금제 도입, 코스타리카 대학교 설립, 사회보장 제도 도입 등 사회 개혁을 추진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국을 지원했으나, 독일계 주민 탄압으로 논란이 일었다. 1948년 대선 패배 후 혁명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여 망명했고, 이후 멕시코 대사를 지내다 사망했다. 그의 아들 라파엘 앙헬 칼데론 포우르니에르는 1990년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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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앙헬 칼데론 과르디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라파엘 앙헬 칼데론 과르디아
라파엘 앙헬 칼데론 과르디아
전체 이름라파엘 앙헬 델 소코로 칼데론 과르디아
출생일1900년 3월 8일
출생지코스타리카, 산호세
사망일1970년 6월 9일
사망지코스타리카, 산호세
서명
정치 경력
소속 정당국립공화당
배우자이본 클레이스 스펠더스 (1927년 결혼, 1945년 이혼), 로사리오 포우르니에르 모라 (1947년 결혼, 1970년 사망)
자녀라파엘 앙헬 주니어(1949년 출생), 알레한드라 칼데론 푸르니에르 (1954년–1979년), 마리아 칼데론 푸르니에르 (1960년 출생)
부모라파엘 칼데론 무뇨스, 아나 마리아 과르디아 모라
학력루뱅 가톨릭 대학교,
직업의사
대통령 재임
직함각하
직위코스타리카의 대통령
대수29대
임기 시작1940년 5월 8일
임기 종료1944년 5월 8일
전임자레온 코르테스 카스트로
후임자테오도로 피카도 미찰스키
의회 의원
직위코스타리카 공화국 국회 의원
임기 시작1958년 5월 1일
임기 종료1962년 4월 30일
전임자올데마르 차바리아 친치야
후임자호르헤 몬테로 카스트로
선거구산호세 (6번 사무실)
제헌 의회 의원
직위제헌 의회 의원
임기 시작1934년 5월 1일
임기 종료1940년 4월 30일
선거구산호세 주

2. 약력

1900년 3월 10일 산호세에서 태어나 벨기에 등에서 유학하며 의학을 공부했다.[19] 외과의사 자격을 취득한 후 코스타리카로 돌아와 활동했으며, 산호세 시장과 국회의원을 거치며 정치 경력을 쌓았다. 1934년 공화당 소속으로 의회 의원이 되었다.

1940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당초 보수적인 커피 재배 엘리트들의 지지를 받았으나, 취임 후에는 빈곤층의 열악한 상황 개선에 집중하며 이들과 거리를 두었다. 그의 정부는 최저임금을 포함한 노동법 제정, 국가 사회보장 연금 프로그램(CCSS) 창설, 국가 의료 프로그램 도입, 코스타리카 대학교 설립 등 코스타리카 복지 시스템의 기틀을 마련한 중요한 사회 개혁들을 단행했다.[10] 이러한 개혁은 가톨릭교회 내 진보 인사들과 공산당의 지지를 받기도 했으나, 기존 보수 세력의 강한 반발을 사며 사회적 갈등을 야기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미국과 협력하여 연합국 편에 참전했으며, 이 과정에서 국내 독일계 주민들의 자산을 몰수하고 일부를 투옥하여 이들의 반감을 샀다.

1948년 대통령 선거에 다시 출마했으나 오틸리오 울라테 블랑코에게 패배했다. 선거 결과에 불복한 칼데론 측과 의회의 선거 무효 선언은 결국 내전으로 이어졌고, 호세 피게레스 페레르가 이끄는 군대에 패배하여 니카라과를 거쳐 멕시코로 망명했다.[19]

1958년 코스타리카로 돌아와[19]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의원직을 수행하지는 않았고, 1962년 대통령 선거에 다시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1966년부터 1970년까지 멕시코 주재 코스타리카 대사를 지냈으며, 1970년 사망했다.

그의 아들 라파엘 앙헬 칼데론 포르니에는 1990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17] 칼데론 과르디아는 코스타리카 현대사에서 중요한 사회 개혁을 이끈 인물이지만, 1948년 내전과 권력 유지 시도 등으로 인해 여전히 논쟁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18]

2. 1. 출생과 교육

1900년 3월 10일 산호세에서 태어났다.[19] 젊은 시절 코스타리카, 프랑스, 벨기에에서 공부했으며, 벨기에 유학 중 후에 코스타리카 최초의 여성 외교관이 된 벨기에 여성 Yvonne Clays Spoelders|이본 클레이스 스펠더스프랑스어와 결혼하였다. 벨기에에서 학업을 마친 후 의사이자 외과의사가 되었으며, 대통령직을 수행한 후에도 평생 대부분 의사로 활동했다.

2. 2. 정치 경력

1940년, 커피 농장주들의 높은 지지를 받아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19] 그는 취임 후에도 커피 농장주들을 위한 정책을 펼쳤다.

동시에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에도 힘썼는데, 대표적으로 최저임금를 도입하여 코스타리카의 열악한 근로 조건을 개선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코스타리카 대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코스타리카의 교육 및 보건 수준은 크게 향상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연합국 편에 서서 지원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독일계 주민들을 탄압하는 정책을 시행하기도 했다. 이는 많은 독일계 주민들이 그의 정치적 경쟁자인 호세 마리아 피게레스 페레르를 지지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1944년 임기를 마친 칼데론은 테오도로 피카도 미찰스키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지했다. 피카도는 당시 산나브리아 대주교와 전 공산당 지도자 마누엘 모라의 지지까지 얻어[14] 1944년 선거에서 승리했다. 비록 선거 과정에서 정부의 부정행위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으나,[15] 이는 당시 코스타리카 정치 상황에서 드문 일은 아니었다. 피카도가 압도적인 표 차이로 승리한 점을 고려하면, 부정행위 논란과 별개로 당선되었을 가능성도 있다.[15] 피카도 정부는 칼데론 시기보다 비교적 안정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칼데론과 그의 반대파는 헌법상 칼데론의 재출마가 가능해지는 1948년을 대비하고 있었다.[15]

1948년, 칼데론은 다시 대통령 선거에 도전했으나 오틸리오 울라테 블랑코에게 패배했다. 당시 피카도 정부의 부정선거 의혹 등으로 정치적 혼란이 커지자, 칼데론은 혁명에 가담했다. 하지만 혁명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는 니카라과로 망명해야 했다.[19]

1958년 코스타리카로 돌아온[19] 칼데론은 1962년 다시 대선에 도전했지만, 프란시스코 오를리치 볼마르시치에게 패배했다. 이후 1966년부터 멕시코 주재 코스타리카 대사로 활동하다 1970년에 사망했다.

그의 아들인 라파엘 앙헬 칼데론 포우르니에르 역시 정치인의 길을 걸어 1990년 대통령에 당선되어[20] 1994년까지 재임했다.

3. 대통령 재임 (1940-1944)

1940년, 라파엘 앙헬 칼데론 과르디아는 보수적인 커피 농장주들의 지지를 받아 코스타리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19][3] 당선 직후인 같은 해 3월에는 미국 워싱턴 D.C.에서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부부를 만나기도 했다.[2] 그러나 칼데론은 곧 기존 지지 세력이었던 보수적인 커피 재벌들과 거리를 두고, 코스타리카 사회의 빈곤 문제와 열악한 보건 환경 개선에 집중하는 정책 방향을 설정했다.[3] 이는 중앙아메리카 지도자로서는 이례적으로 사회 문제 해결에 국가적 관심을 집중시킨 것이었다.[4]

대통령으로서 칼데론은 노동자 권익 보호, 사회보장 시스템 구축, 교육 기회 확대 등 광범위한 사회 개혁을 추진했다. 이러한 개혁은 당시 코스타리카 빈곤층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19] 오늘날 코스타리카가 자랑하는 보편적 의료 및 사회보장 시스템, 높은 교육 수준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10]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칼데론은 노동조합, 가톨릭교회 내 진보적 인사(빅토르 사나브리아 대주교 등), 그리고 마누엘 모라가 이끄는 인민 전위당(공산당)과 같은 다양한 세력과 손을 잡았다.[13] 이러한 이례적인 연대는 코스타리카의 사회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강력한 동력이 되었다. 칼데론은 빈곤층 사이에서 폭넓은 지지를 얻었지만,[13] 그의 개혁 정책은 기득권을 위협받는다고 느낀 토지 소유주, 산업가, 군부, 보수적 교회 인사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혔고, 이는 코스타리카 사회의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14]

한편,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칼데론은 코스타리카를 연합국 편에 서서 참전시켰고 미국과 협력했다. 이 과정에서 국내 독일계 주민에 대한 강경책을 시행하기도 했다.[19]

칼데론 과르디아는 이전 정치인들과 달리 사회 대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동원했으며,[13] 때로는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개혁 프로그램을 관철하려는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14]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추진된 정책들과 그 방식은 코스타리카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3. 1. 주요 정책 및 업적

1940년 보수적인 커피 농장주들의 지지를 받아 코스타리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19][3] 취임 직후 이들과 거리를 두고 빈곤층 문제 해결에 집중했다. 이는 중앙아메리카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빈곤과 사회 문제에 주목한 사례였다.[4] 그는 취임 연설에서 국가의 사회, 문화, 경제 발전을 위한 정부 계획을 밝혔으며,[5] 특히 과나카스테(Guanacaste)나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United Fruit Company)가 방치한 대서양 지역 등 저개발 지역에 대한 관심을 약속했다.[6] 또한 능력에 따른 공정한 세금 제도 개편,[7] 농촌 신용 활성화, 국립은행을 통한 토지 분배 및 저렴한 주택 프로그램 시행,[8] 그리고 현대적인 사회보장 제도 도입을 공약했다.[9]

대통령 재임 중 칼데론은 노동자 보호를 위한 중요한 조치들을 단행했다. 최저임금 제도를 포함한 노동법을 제정하여 당시 열악했던 코스타리카 노동자들의 근로 조건을 개선하는 데 기여했다.[19] 또한 국가 사회보장 연금 프로그램인 CCSS(Caja Costarricense de Seguro Social)를 설립하고 국가 의료 프로그램을 도입했으며,[10] 코스타리카 대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발전에도 힘썼다.[19] 이러한 노력 덕분에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코스타리카의 교육 및 건강 수준은 크게 향상되었으며,[19] 오늘날 코스타리카가 보편적 의료 시스템, 높은 교육 수준, 사회보장 시스템으로 유명한 것은 칼데론 시대의 정책에 기반한 것이다.[10]

경제 및 사회 정책으로는 경제 다양화를 위한 신산업법 제정, 토지 소유권 취득을 용이하게 한 토지법(일명 기생충법), 그리고 빈곤 아동에게 무료 신발을 배포하는 프로그램 등을 추진했다.[11] 이러한 정책들은 사회 지향적인 국가 경제의 기틀을 마련하고 가장 취약한 계층의 필요를 직접적으로 해결하려는 목적을 가졌다.[12]

칼데론은 자신의 개혁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노동 조직, 진보적인 가톨릭교회 인사(예: 빅토르 사나브리아 대주교), 그리고 마누엘 모라가 이끄는 인민 전위당(공산당)과 같은 예상 밖의 세력들과 강력한 동맹을 맺었다.[13] 이 연대는 코스타리카의 노동법, 보건 및 교육 시스템, 경제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빈곤층으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지만,[13] 그의 개혁은 기존 엘리트 세력의 기득권에 도전했기 때문에 토지 소유주, 산업가, 군 지도자, 보수적인 교회 인사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고 이는 사회적 양극화를 심화시켰다.[14]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시에는 연합국 편에 서서 참전하고 미국과 협력했다. 전쟁 중 그의 정부는 코스타리카 내 독일계 주민들을 탄압하여 투옥하고 그들의 자산(대규모 커피 농장, 은행 등)을 몰수했다.[19] 이는 강력한 독일계 커뮤니티의 반감을 샀으며, 이들 중 다수는 훗날 칼데론의 정치적 라이벌인 호세 피게레스 페레르를 지지하게 되었다.

3. 2.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칼데론 과르디아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코스타리카연합국 편에 서서 참전시켰으며, 미국과 협력하였다. 전쟁 중 그의 정부는 코스타리카 내 독일계 주민들을 대상으로 탄압 정책을 시행했다. 많은 독일계 코스타리카인들이 투옥되었고, 대규모 커피 농장과 은행 사업체를 포함한 그들의 자산이 몰수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국내 독일계 사회의 강한 반감을 샀으며, 이후 많은 독일계 가정과 그 후손들이 칼데론의 정치적 라이벌인 호세 피게레스 페레르(José Figueres Ferrer)를 지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4. 퇴임 이후

1944년 임기를 마친 칼데론 과르디아는 자신의 후임으로 테오도로 피카도 미찰스키를 지지했으며, 피카도는 선거에서 승리했다.[14][15] 피카도 정권 하에서도 칼데론은 여전히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며 1948년 대선을 준비했다.[15]

1948년, 칼데론은 다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오틸리오 울라테 블랑코에게 패배했다.[19] 그러나 선거 결과에 대한 논란과 칼데론 측의 선거 무효 주장은 정치적 혼란을 야기했고, 이는 결국 호세 피게레스 페레르가 주도한 1948년 코스타리카 내전으로 이어졌다.[16] 내전에서 칼데론 측은 패배했고, 그는 니카라과를 거쳐 멕시코로 망명하여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다시 의사로 일했다.[19][17]

1958년 코스타리카로 돌아올 수 있게 된 칼데론은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실제 의정 활동은 하지 않았다.[19][17] 1962년 다시 대통령 선거에 도전했지만 프란시스코 오를리치 볼마르시치에게 패배했다.[19] 이후 1966년부터 1970년까지 멕시코 주재 코스타리카 대사로 임명되어 활동했으며,[19][17] 1970년 산호세에서 사망했다.[19]

그의 아들 라파엘 앙헬 칼데론 포우르니에르는 1990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코스타리카 대통령에 당선되어 1994년까지 재임했다.[20][17] 칼데론 과르디아는 코스타리카 역사상 중요한 사회 개혁을 이끌었지만, 1948년 선거 결과 불복과 내전 패배, 이후 권력 회복 시도의 실패 등으로 인해 여전히 논란이 많은 인물로 평가받는다.[18] 특히 내전에서 승리한 피게레스 측이 그를 '혁명의 영웅'으로 부각하면서 칼데론의 역사적 이미지는 더욱 복잡하게 남아있다.[18]

4. 1. 1948년 코스타리카 내전

1944년, 라파엘 앙헬 칼데론 과르디아는 자신의 후임으로 테오도로 피카도 미찰스키를 지지했고, 피카도는 산나브리아 대주교와 전 공산당 지도자 마누엘 모라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14] 당시 코스타리카에서는 흔한 일이었지만, 이 선거 과정에서도 정부의 부정행위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피카도는 칼데론보다 더 온건하고 화합을 추구하는 통치를 펼쳤으나, 칼데론과 그의 반대 세력 모두 1948년의 정치적 충돌을 예견하고 준비하고 있었다. 헌법상 칼데론은 1948년에 다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수 있었다.[15]

1948년 대통령 선거에 칼데론은 다시 출마했다. 선거 결과, 오틸리오 울라테 블랑코가 약 1만 표 차이로 승리했으나, 당시 코스타리카 사회의 극심한 분열과 칼데론 정당의 의회 선거 득표율을 고려할 때 이 결과는 의심스럽다는 평가가 있었다. 선거위원회는 울라테의 승리를 선포했지만, 칼데론의 정당이 다수를 차지한 의회는 선거 결과를 무효로 하고 재선거를 결정했다.

역사가 몰리나와 르우쿠는 저서 "투표함 채우기: 사기, 선거 개혁, 그리고 코스타리카의 민주화"에서 당시 공화당(칼데론 측)과 국민연합당(PUN, 울라테 측) 지도부가 내전을 피하고자 훌리오 세사르 오바레스 박사를 2년간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하고 이후 새로운 선거를 치르기로 합의했다고 밝힌다. 그러나 이 합의안을 호세 피게레스 페레르가 거부하고 군사 행동을 선택하면서 내전으로 이어졌다.[16]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였던 호세 피게레스 페레르는 1948년 피카도 정부에 대항하여 봉기했다. 내전 중 피카도 정부군은, 울라테가 칼데론 시대의 사회 개혁을 후퇴시킬 것이라 우려한 공산주의자들의 지원을 받았다. 약 2,000명의 사망자를 낸 치열한 내전 끝에 피게레스가 이끄는 군대가 승리했다.

피게레스는 군사적 승리로 권력을 장악했지만, 이후 군대를 해산하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코스타리카 현대 민주주의의 기틀을 마련한 뒤 평화적으로 권력을 이양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이후 자신의 해방국민당 소속으로 두 차례 더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코스타리카의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반면, 내전에서 패배한 칼데론은 니카라과를 거쳐 멕시코로 망명하여 의사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1958년 코스타리카로 돌아와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의원직을 수행하지는 않았다. 1962년 다시 대통령 선거에 도전했지만 프란시스코 오를리치 볼마르시치에게 패배했다. 이후 1966년부터 1970년까지 멕시코 주재 코스타리카 대사를 지내다가 1970년에 사망했다.

칼데론 과르디아는 코스타리카 역사에서 여전히 논란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다. 그가 추진했던 중요한 사회 개혁에도 불구하고, 1948년 선거 결과에 불복하고 의회를 통해 결과를 뒤집으려 한 점, 그리고 내전 패배 이후 1962년에 다시 권력을 잡으려 시도한 점 등은 그의 정치적 명성에 큰 흠집을 남겼다.[18] 특히 내전에서 승리한 피게레스 측이 피게레스를 '혁명의 영웅'으로 부각하면서, 칼데론은 주로 피게레스의 주요 정적으로서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조되는 경향이 있다.

4. 2. 망명과 귀국

1948년, 라파엘 앙헬 칼데론 과르디아는 다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오틸리오 울라테 블랑코에게 약 1만 표 차이로 패배했다. 그러나 당시 코스타리카 사회의 극심한 양극화와 칼데론 정당의 의회 득표율을 고려할 때 이 결과는 의심스러웠고, 선거위원회는 울라테의 승리를 선포했다. 이에 칼데론의 정당이 장악한 의회는 선거 무효를 선언하고 재선거를 결정했다.[16]

이러한 정치적 혼란 속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호세 피게레스 페레르는 당시 테오도로 피카도 미찰스키 정부에 대항하여 봉기를 일으켰다. 칼데론 시대의 사회 법안을 지키려는 공산주의자들이 피카도 정부군을 지원했으나, 약 2,000명의 사망자를 낸 내전 끝에 피게레스 군대가 승리했다.[17] 피게레스는 권력을 장악한 후 군대를 폐지하고 현대 코스타리카 민주주의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이후 권력을 이양했다. 그는 훗날 코스타리카의 국민 영웅으로 추앙받게 된다.

내전 패배 후 칼데론은 처음 니카라과로 망명했고, 이후 멕시코로 거처를 옮겨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다시 의사로 일했다.[19][17] 1958년 코스타리카로 귀국이 허용된 후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실제 의정 활동은 하지 않았다.[19][17] 1962년 대통령 선거에 다시 출마했지만 프란시스코 오를리치 볼마르시치에게 패배했다.[19] 이후 1966년부터 1970년 사망할 때까지 멕시코 주재 코스타리카 대사로 활동했다.[19][17]

칼데론 과르디아는 오늘날 코스타리카 역사상 가장 논란이 많은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가 이룬 중요한 사회 개혁에도 불구하고, 1948년 선거 결과 불복 논란과 이후 권력 회복 시도의 실패는 그의 정치적 명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18]

4. 3. 재선 도전과 사망

1944년 임기를 마치고 물러난 칼데론은 1948년 다시 대통령 선거에 도전했다.[19] 당시 상대 후보였던 오틸리오 울라테 블랑코가 약 1만 표 차이로 승리했으나, 선거 결과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었다. 당시 코스타리카 사회는 극심하게 양극화되어 있었고, 칼데론의 정당이 의회 선거에서는 울라테의 정당보다 더 많은 표를 얻었기 때문에, 대통령 선거에서의 패배는 쉽게 납득하기 어려웠다. 결국 선거위원회는 울라테의 승리를 선포했지만, 칼데론의 정당이 장악한 의회는 선거 무효를 선언하고 재선거를 결정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호세 피게레스 페레르는 당시 테오도로 피카도 미찰스키 정부에 대한 쿠데타를 일으켰다. 피카도 정부는 공산주의자들의 지원을 받았는데, 이들은 울라테가 칼데론 시대에 마련된 사회 개혁 법안들을 위협할 것이라고 보았다. 약 2,000명의 사망자를 낸 1948년 내전 끝에 피게레스가 승리하여 권력을 장악했다. 피게레스는 군대를 해산하고 현대적인 민주주의의 틀을 마련한 후 권력을 이양했으며, 이후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두 차례 더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로 인해 피게레스는 코스타리카의 국민 영웅으로 추앙받게 되었고, 상대적으로 칼데론의 이미지는 그의 중요한 사회 개혁 업적에도 불구하고 퇴색되었다.

내전에서 패배한 칼데론은 처음에는 니카라과로, 이후 멕시코로 망명하여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다시 의사로 일했다.[19] 1958년, 칼데론은 코스타리카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고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실제 의정 활동은 하지 않았다.[19] 그는 1962년 대통령 선거에 다시 도전했지만 프란시스코 오를리치 볼마르시치에게 패배했다. 이후 1966년부터 1970년까지 멕시코 주재 코스타리카 대사로 임명되어 활동했으며, 1970년 산호세에서 사망했다.[19]

그의 아들 라파엘 앙헬 칼데론 포우르니에르는 1990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코스타리카 대통령에 당선되어 1994년까지 재임했다.[20][17] 딸 알레한드라(Alejandra)는 좌익 정치 운동가였으나 1979년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막내딸 마리아 델 로사리오(Maria del Rosario)는 작가이자 교육자가 되었다. 칼데론의 두 번째 부인 로사리오 포르니에 모라(Rosario Fournier Mora)는 1999년 사망했다.[17]

칼데론 과르디아는 코스타리카 역사상 가장 논란이 많은 인물 중 하나로 남아있다. 그의 사회 개혁은 코스타리카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1948년 선거 무효 시도와 이후 권력 회복 실패는 그의 명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특히 내전에서 승리한 피게레스 지지자들이 피게레스를 "혁명의 영웅"으로 묘사하는 피게레스 중심의 역사 해석이 강해지면서 칼데론에 대한 평가는 더욱 복잡해졌다.[18]

5. 가족 관계

첫 번째 부인은 코스타리카 최초의 여성 외교관이 된 이본 클레이스 스펠더스(Yvonne Clays Spoelderses)였으나 이후 이혼하였다. 이후 니카라과에서 로사리오 포우르니에르 모라(Rosario Fournier Moraes)와 재혼하였다. 로사리오와의 사이에서 다음과 같은 세 자녀를 두었다.


  • 라파엘 앙헬 (Rafael Ángel)
  • 알레한드라 (Alejandra)
  • 마리아 델 로사리오 (María del Rosario)

6. 평가와 유산

라파엘 앙헬 칼데론 과르디아는 코스타리카 역사상 가장 논란이 많은 인물 중 한 명으로 남아 있다. 그의 사회 개혁이 코스타리카 사회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음에도 불구하고[18], 1948년 대통령 선거 결과를 뒤집으려 한 시도와 이어진 코스타리카 내전에서의 패배는 그의 정치적 명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내전에서 승리하여 이후 코스타리카 민주주의의 기틀을 닦고 국민 영웅으로 추앙받는 호세 피게레스 페레르와 대비되면서 칼데론의 이미지는 상대적으로 퇴색되었다.[18] 내전 패배 후 칼데론은 니카라과를 거쳐 멕시코로 망명하여 의사로 활동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1958년 코스타리카로 돌아와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실제 활동은 하지 않았고, 1962년 대통령 선거에 다시 도전했지만 패배했다. 이후 멕시코 대사(1966~1970)를 지내다 1970년에 사망했다.[17]

그의 정치적 유산은 자녀들에게 이어졌다. 아들 라파엘 안헬 칼데론 포르니에는 아버지와는 다른 우익 노선을 표방하며 새로운 정당을 창당했고, 1990년 코스타리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딸 알레한드라는 좌익 정치 운동가로 활동했으나 1979년 교통사고로 사망했으며, 다른 딸 마리아 델 로사리오는 작가이자 교육자가 되었다.[17]

칼데론 과르디아는 중요한 사회 개혁을 추진했으나, 권력 유지를 위한 비민주적 시도와 내전 패배라는 어두운 그림자를 함께 가진 복합적인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6. 1. 부정적 평가

1948년, 라파엘 앙헬 칼데론 과르디아는 다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오틸리오 울라테 블랑코가 약 1만 표 차이로 승리했으나, 당시 코스타리카 사회의 극심한 양극화와 칼데론 정당의 의회 다수 의석 확보 상황을 고려할 때 이 결과는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선거위원회가 울라테의 승리를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칼데론의 정당이 장악한 의회는 선거 무효를 선언하고 재선거를 결정했다.

이에 반발한 카리스마 넘치는 호세 피게레스 페레르는 1948년 피카도 정부(칼데론의 영향력 하에 있던)에 대한 쿠데타를 일으켰다. 내전 과정에서 피카도 정부군은 울라테가 칼데론 시대의 사회 개혁을 위협한다고 판단한 공산주의자들의 지원을 받았다. 약 2,000명의 사망자를 낸 내전 끝에 피게레스가 승리하여 권력을 장악했다. 피게레스는 군대를 해산하고 현대 민주주의의 틀을 마련한 후 권력을 이양했으며, 이후 두 차례 민주적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어 오늘날까지 코스타리카의 국민 영웅으로 평가받는다. 반면, 내전에서 패배한 칼데론은 니카라과를 거쳐 멕시코로 망명하여 의사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1958년 코스타리카로 돌아온 칼데론은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실제 의정 활동은 하지 않았고, 1962년 대통령 선거에 다시 도전했지만 패배했다. 이후 멕시코 대사(1966~1970)를 지내다 1970년에 사망했다.[17]

칼데론 과르디아는 코스타리카 역사상 가장 논란이 많은 인물 중 하나로 남아 있다. 특히 내전 승리 후 피게리스주의자들이 피게레스를 "혁명의 영웅"으로 묘사하는 과정에서 칼데론은 주요 반대자로 부각되었다. 그의 사회 개혁이 코스타리카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1948년 의회의 선거 무효 선언과 이후 권력 회복 시도의 실패는 그의 정치적 명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18]

참조

[1] 웹사이트 El Tribunal Supremo de Elecciones: Presidentes de la República de Costa Rica http://www.tse.go.cr[...]
[2] 웹사이트 March 25th, 1940 http://www.fdrlibrar[...]
[3] 서적 Coffee and Power Harvard University Press 1997
[4] 서적 Crisis in Costa Rica: The 1948 Revolution Institute of Latin American Studies - University of Texas Publishing 1971
[5] 서적 Crisis in Costa Rica: The 1948 Revolution Institute of Latin American Studies - University of Texas Publishing 1971
[6] 서적 Crisis in Costa Rica: The 1948 Revolution Institute of Latin American Studies - University of Texas Publishing 1971
[7] 서적 Crisis in Costa Rica: The 1948 Revolution Institute of Latin American Studies - University of Texas Publishing 1971
[8] 서적 Crisis in Costa Rica: The 1948 Revolution Institute of Latin American Studies - University of Texas Publishing 1971
[9] 논문 The Presidency of Calderón Guardia http://reachian.goog[...] University of Florida 2004
[10] 서적 Crisis in Costa Rica: The 1948 Revolution Institute of Latin American Studies - University of Texas Publishing 1971
[11] 서적 Crisis in Costa Rica: The 1948 Revolution Institute of Latin American Studies - University of Texas Publishing 1971
[12] 서적 Crisis in Costa Rica: The 1948 Revolution Institute of Latin American Studies - University of Texas Publishing 1971
[13] 서적 Crisis in Costa Rica: The 1948 Revolution Institute of Latin American Studies - University of Texas Publishing 1971
[14] 서적 Crisis in Costa Rica University of Texas Press 1971
[15] 서적 Crisis in Costa Rica University of Texas Press 1971
[16] 서적 Stuffing the Ballot Box: Fraud Electoral Reform, And Democratization in Costa Rica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2
[17] 웹사이트 Noticias de deportes en Costa Rica http://wvw.nacion.co[...]
[18] 논문 The Presidency of Calderón Guardia http://reachian.goog[...] University of Florida 2004
[19] 웹인용 Beneméritos de la Patria: Rafael Ángel Calderón Guardia http://www.asamblea.[...] 2012-08-15
[20] 뉴스 코스타리카 大統領 野후보 칼데론當選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90-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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