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로랑 트뤼게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로랑 트뤼게는 프랑스 해군 제독으로, 프랑스 혁명 및 나폴레옹 시대를 거치며 활약했다. 귀족 출신임에도 공화주의 신념을 굳게 지켰으며, 프랑스 해군 장관을 역임하며 해군 개혁을 주도했다. 나폴레옹의 노예제 부활과 제국 수립에 반대하여 불이익을 받기도 했지만, 뛰어난 능력으로 인정받아 어려운 시기에도 중책을 맡았다. 부르봉 왕정복고 후 해군 군단장과 브레스트 함대 지휘관을 역임했으며, 7월 혁명 이후 해군 원수에 해당하는 그랜드 아미랄로 승진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752년 출생 - 주문모
    청나라 출신 가톨릭 신부 주문모는 1794년 조선에 잠입하여 선교 활동을 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하였으며, 초기 조선 천주교회 성장에 기여하여 2014년 시복되었다.
  • 1752년 출생 - 정조
    정조는 조선의 제22대 왕으로, 탕평책 계승, 규장각 설치, 장용영 설치, 신해통공 실시, 수원 화성 건설 등 다양한 개혁을 추진했으며, 47세에 사망하여 건릉에 안장되었다.
  • 프랑스의 군인 - 샤를 드골
    샤를 드골은 프랑스의 장군이자 정치가로서, 제2차 세계 대전 중 자유 프랑스 운동을 이끌고 전후 제5공화국 초대 대통령을 역임하며 프랑스 해방과 재건에 기여했으나, 독단적인 성격과 국수주의적 경향으로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 프랑스의 군인 - 루이 라자르 오슈
    루이 라자르 오슈는 프랑스 혁명 시기의 군인으로, 혁명 전쟁에서 활약하며 여러 전투에 참여했고, 반혁명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석방 후 군 사령관이 되었으나 29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 1839년 사망 - 김효주 (종교인)
    김효주 아녜스는 1816년 밤섬에서 태어나 언니 김효임 콜룸바와 함께 신앙 생활을 하다가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순교자이며,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 1839년 사망 - 페르난도 소르
    페르난도 소르는 스페인 출신의 기타리스트이자 작곡가로,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양식을 결합한 기타 음악과 교육용 연습곡집으로 유명하며 후대 기타리스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로랑 트뤼게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장바티스트 폴린 게랭의 트뤼게 초상화 (1832년)
장바티스트 폴린 게랭의 트뤼게 초상화 (1832년)
출생일1752년 1월 10일
출생지툴롱
사망일1839년 12월 26일
사망지툴롱
소속 국가프랑스 왕국
프랑스 제1공화국
프랑스 제1제국
부르봉 왕정
군 종류해군
복무 기간1765년 – 1804년; 1809년 – 1811년경; 1814년 – 1819년경
최종 계급해군 원수
주요 지휘
지휘브리그 타를르통
프리깃 핀
전열함 80문 토낭
주요 전투
주요 참전 전투/전쟁미국 독립 전쟁
생트뤼시 해전
체사피크 만 해전
세인트키츠 해전
생트 해전
프랑스 혁명 전쟁
칼리아리 공방전
훈장
훈장레지옹 도뇌르 멤버
국가 고문
성 루이 훈장 그랑크루아
콩트
프랑스 귀족
기타 정보
관련 인물에투알 개선문에 이름이 새겨져 있음

2. 생애

로랑 트뤼게는 귀족 출신으로 해군 지휘관의 아들이었다. 1765년 해군 근위대에 입대하여 ''이롱델'', ''프로방스'' 등 여러 함선에서 항해했다. 루이 15세에게 여러 상을 받았으며, 1773년 소위가 되었고, 1778년까지 8번의 원정에 참전했다.

미국 독립 전쟁 동안 ''아탈란테''와 ''엑토르''에서 복무하며 세인트루시아 해전에 참가했다. 1779년부터 중위로, 사바나 포위전에서 큰 부상을 입었음에도 데스탱의 생명을 구해 생 루이 훈장 기사 작위를 받았다. 이후 체사피크 해전, 세인트 키츠 해전, 생트 해전 등에 참전했다.

1784년부터 해군 소령으로 콘스탄티노플 주재 대사의 임무를 도왔고, 오스만 제국에 여러 기술을 가르쳤다. 브리그 ''타르턴''을 지휘하며 다르다넬스 해협수로를 재측량하고, 1787년에는 "해군 조약"(Traité de Marine)을 출판했다.

프랑스 혁명 전쟁 시기에는 1792년 소장으로 승진하여 지중해 프랑스 해군을 지휘했다. 앙-피에르, 마르키 드 몽테스키우-페장사크 군대를 지원하며 니스 등을 포격했고, 프랑스의 사르데냐 원정에 참여했으나 칼리아리 포격은 실패했다. 코르시카에서 나폴레옹 가문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1793년 해임되었다가 테르미도르 9일에 석방되었다.

1795년 프랑스 총재정부의 해군 장관을 역임하며 해군을 재건하고, 1796년 프랑스의 아일랜드 침공 계획을 제출했으나 실패했다. 식민지의 노예제 폐지령 준수를 위해 노력했다. 새로운 해군 전술집 편찬을 주도했다. 1797년 스페인 주재 프랑스 대사로 임명되었으나, 탈레랑에 의해 정치 무대에서 제거되었다.

나폴레옹 집권 후 국사원에 임명되었고, 전쟁 재개 후 브레스트 함대 지휘를 맡았으나, 제국 수립에 반대하여 5년간 불명예를 겪었다. 1809년 복귀하여 로슈포르 함대 지휘관, 네덜란드 왕국 해군 최고 사령관을 역임했다.

프랑스 왕정복고 시기 루이 18세에 의해 해군으로 복귀하여 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랜드 크로스 기사 작위를 받았다. 백일천하 동안 나폴레옹에게 협력하지 않았고, 왕정복고 후 브레스트 함대 지휘권을 받고 생 루이 훈장 그랜드 크로스 기사, 백작 작위, 프랑스 귀족 작위를 받았다.

2. 1. 혁명 이전

귀족 출신인 로랑 드 트뤼게는 해군 지휘관의 아들로, 1765년 해군 근위대에 입대했다. 그는 ''이롱델'', ''프로방스'', ''아탈란테'', ''플레야드'' 및 ''시메르''에서 순차적으로 항해했다. 그는 루이 15세가 최고의 근위대에게 수여하는 여러 상을 수상했다. 1773년 소위가 되었고, 영국과의 전쟁이 선포된 1778년 7월까지 이미 8번의 원정에 참전했다.

미국 독립 전쟁 동안, 그는 프리깃함 ''아탈란테''와 샤를 엑토르 휘하의 함선 ''엑토르''에서 복무했으며, 세인트루시아 해전에 참가했다. 1779년부터 중위로, 사바나 포위전에서 그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데스탱의 생명을 구했으며, 그 공로로 생 루이 훈장 기사 작위를 받았다.

''랑그독''과 ''시토아옌''에서 그는 체사피크 해전, 세인트 키츠 해전 및 생트 해전에 뤼크 위르뱅와 프랑수아 조제프 폴 드 그라스의 함대 일원으로 참전했다.

1784년부터 해군 소령으로, 그는 콘스탄티노플 주재 대사인 M. 쇼아젤-구피에의 임무에 협력했으며, 오스만 제국에게 요새 건설, 포병, 야금술, 해군 건축 등의 기술을 가르치는 임무를 맡았다. 트뤼게는 브리그 ''타르턴''을 지휘했으며, 1785년과 1786년에 이 배를 이용하여 다르다넬스 해협수로를 재측량하고, 1787년에는 콘스탄티노플에서 "해군 조약"(Traité de Marine)을 출판했다.

2. 2. 프랑스 혁명 전쟁

1789년 프랑스로 돌아온 트뤼게는 1790년 브레스트에서 프리깃함을 지휘했다. 1792년 1월 1일 해군 대령으로 임명되었고, 그해 7월 소장으로 승진하여 기함 ''토낭''에서 지중해 프랑스 해군을 지휘했다. 그는 앙-피에르, 마르키 드 몽테스키우-페장사크 군대의 사보이 공국 점령을 지원하며 니스, 빌프랑슈, 오네글리아를 포격했다. 프랑스의 사르데냐 원정에 참여하여 칼리아리 포격을 시도했으나, 하선한 프랑스 군대의 반란으로 실패했다.

코르시카에서 트뤼게는 보나파르트 가문의 환영을 받았고, 나폴레옹의 누이 엘리사 보나파르트와 연애를 시작하여, 보나파르트 가문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1793년 3월 툴롱으로 돌아온 그는 파리에서 해상 형법 제정을 이끌었으나, 이는 해군 기지에서 많은 불만을 야기했다. 그해 5월 31일 해임되었고, 용의자 법 공포 당시 투옥되었다가 9 테르미도르 (7월 27일)에 석방되었다.

1795년 부제독으로 승진한 트뤼게는 1795년 11월부터 1797년 7월까지 프랑스 총재정부의 해군 장관을 역임했다. 해군 장관 재임 기간 동안 프랑스 항구와 해군 무기고의 규율과 질서를 회복하고, 혁명으로 해임된 전직 장교들을 복귀시켰다. 호슈 장군의 요청으로 모라르 드 갈이 지휘하는 1796년 프랑스의 아일랜드 침공 계획을 총재정부에 제출했지만,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그는 세르세 지휘하에 인도양으로 프리깃함 부대를 파견했다.

트뤼게는 식민지의 1794년 노예제 폐지령 준수를 위해 노력했고, 파리 근처 흑인 및 혼혈 어린이들을 위한 칼레지 창설을 지원했다. 이 칼레지에는 투생 루베르튀르의 아들들이 다녔으나, 1802년 데크레에 의해 폐쇄되었다.

트뤼게는 공화력 5년에 채택될 새로운 해군 전술집 편찬을 주도했다. 1769년 모음집의 방어적 개념에서 벗어나, 각 함대에 경공격 전대를 두는 관행을 공식화했다. 이 모음집은 이후 트뤼게의 영향을 받은 공화력 9년 모음집으로 완성되었다.

프뤼크티도르 쿠데타 5년 (1797년 9월 4일)을 앞둔 장관 개편 때 조르주-르네 플레빌 드 펠레로 교체되었고, 스페인 주재 프랑스 대사로 임명되었다. 임무 종료 후 프랑스로 늦게 돌아왔다는 이유로 정치 무대에서 제거되었으나, 실제로는 탈레랑 외무장관이 트뤼게의 횡령 반대에 대한 복수로 제거한 것이었다. 네덜란드에서 9개월간 망명 생활을 한 후, 이집트에서 돌아온 나폴레옹은 트뤼게에게 다시 해군 장관직을 제안했지만, 트뤼게는 거절하고 1801년 9월 20일 국사원에 임명되었다.

2. 3. 제1제정

전쟁이 다시 시작되자 나폴레옹은 트뤼게에게 브레스트 함대의 조직과 지휘를 맡겼다. 트뤼게의 기함은 ''알렉상드르''였고, 이후 ''방죄르''로 바뀌었다. 1804년, 육군과 마찬가지로 모든 함대가 나폴레옹에게 황제 대관을 요구하는 "자발적인" 청원에 서명했지만, 트뤼게는 제국 수립에 반대하는 공개적인 입장을 편지로 밝혔다. 이로 인해 트뤼게는 5년간 불명예를 겪었고, 모든 직함과 레지옹 도뇌르 회원 자격을 잃었다.

1809년, 나폴레옹은 바스크 로드 해전에서 영국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후 트뤼게를 로슈포르의 프랑스 함대 지휘관으로 복귀시켰다. 이듬해 나폴레옹은 그를 네덜란드 왕국 해군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외국 침략으로 쫓겨난 트뤼게는 제국 말기에 자신의 직위를 떠난 최초의 인물 중 한 명이었다.

2. 4. 부르봉 왕정복고

트뤼게 제독은 루이 18세에 의해 해군으로 복귀하여 해군 군단의 수장이 되었고, 레지옹 도뇌르 훈장의 그랜드 크로스 기사 작위를 받기 위해 파리로 돌아왔다. 백일천하 동안 그는 나폴레옹으로부터 어떠한 지휘권이나 특혜도 받지 못했다. 프랑스 왕정복고 당시 그는 브레스트 함대의 전반적인 지휘권을 받았고, 다가오는 외국 점령군으로부터 도시의 무기고를 안전하게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그는 생 루이 훈장의 그랜드 크로스 기사, 백작 작위, 그리고 프랑스 귀족 작위(1819년 5월 5일)를 받으며 왕으로부터 보상을 받았다.

3. 업적 및 평가

트뤼게는 귀족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세대에서 가장 유능한 프랑스 해군 장교 중 한 명으로 공화주의 신념을 굳게 지켰다. 그는 유능한 장관이었으며, 공포정치의 과도한 행위 이후 해군에 약간의 질서를 회복시켰다. 반면에 그는 아일랜드 원정 실패에 대한 책임의 일부를 져야 했다. 나폴레옹이 프랑스 식민지에서 노예 제도를 부활시키고 제국을 건설하는 것에 반대한, 그와 같이 중요한 책임을 맡은 사람은 드물었다. 그의 용감한 입장은 나폴레옹과의 관계를 복잡하고 종종 격동하게 만들었지만, 나폴레옹은 그를 자신의 더 나은 제독 중 한 명으로 여겼으며 어려운 상황에서 그에게 기밀 임무를 맡겼다. 그는 개선문에 묘사되어 있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