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도비쿠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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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도비쿠스 3세는 879년부터 882년까지 서프랑크 왕국의 왕으로, 아키텐 왕 말더듬이 루이의 장남이다. 그는 동생 카를로만 2세와 함께 왕위에 올랐으며, 네우스트리아를 상속받았다. 재위 기간 중 프로방스의 보소와 대립하고, 바이킹족과 전투를 벌여 소쿠르-앙-비메우 전투에서 승리했다. 882년 사냥 중 사고로 사망했으며, 후계자 없이 카를로만 2세가 단독 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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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도비쿠스 3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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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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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서프랑크 왕 |
재위 기간 | 879년 4월 10일 – 882년 8월 5일 |
대관식 | 879년 9월, 프랑스 |
선임자 | 루이 2세 |
후임자 | 카를로만 2세 |
공동 통치자 | 카를로만 2세 |
왕조 | |
가문 | 카롤링거 왕조 |
출생과 사망 | |
출생 | 863년/865년, 생드니 |
사망 | 882년 8월 5일 (18–19/16–17세), 생드니, 일드프랑스, 네우스트리아 |
매장지 | 생드니 대성당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루이 2세 |
어머니 | 아니스카르드 드 부르고뉴 |
2. 생애
루이 3세는 863년 또는 865년에 생드니에서 아키텐 왕 말더듬이 루이와 부르고뉴의 앙스가르드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었다. 부모가 비밀리에 결혼했고 앙스가르드가 나중에 샤를의 강요로 버려졌기 때문에 루이 3세의 적법성은 어린 시절에 크게 의문시되었다.
877년 할아버지 카롤루스 2세가 죽고 아버지 루도비쿠스 2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루도비쿠스 3세와 카를로마누스 2세 형제는 정식 왕자로 인정받았다. 878년 8월 7일 아버지 루도비쿠스 2세는 교황 요한네스 8세를 설득하여 안스가르데와의 이혼을 무효로 하고 두 아들을 적자로 인정받게 했다.
879년 아버지 루이 2세가 붕어하자, 동생 카를로만 2세와 함께 왕위에 즉위했다. 일부 귀족들은 루이 3세를 단독 왕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결국 루이 3세와 카를로만 2세가 함께 왕으로 선출되었다. 880년 3월 아미앵에서 아버지의 유산을 분할, 루이 3세는 네우스트리아를 상속했다.
880년 2월 서프랑크의 루도비쿠스 3세, 카를로마누스 2세와 동프랑크의 청년 루도비쿠스는 연합하여 왈롱의 샤를루아까지 내려온 바이킹을 상대로 교전하여 바이킹을 격퇴하고 5천 명의 바이킹을 사살하는데 성공한다.(→티에몽 전투(880년 2월)) 티에몽 전투 직후 서프랑크의 루도비쿠스 3세와 카를로만 2세 형제는 로타링기아의 영유권을 동프랑크의 청년 루도비쿠스에게 양도하는데 서명한다.
880년 9월 21일 또는 그해 3월 22일 이탈리아와 바이에른의 카를로만 3세가 죽자, 로트링겐의 영유권을 놓고 동프랑크 왕국 작센의 루도비쿠스 3세 청년왕이 870년 8월의 메르센 조약은 잘못된 조약이라며 로트링겐을 요구해왔다. 결국 그는 카를로마누스 2세 및 루도비쿠스 3세 청년왕와 함께 리베몽에서 조약 체결에 서명하였다. 바이킹족을 상대해야 했던 그는 되도록 전쟁을 피하려 했고, 서프랑크가 차지한 로트링겐의 영토는 독일의 루도비쿠스 3세 청년왕에게로 넘어갔다.
프로방스 공작 보소는 두 사람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고 프로방스 왕으로 선출되었다. 880년 여름, 루이 3세와 카를로만 2세는 보소에 대항하여 군대를 동원, 마콩과 보소 영지의 북부를 빼앗았다. 8월부터 11월까지 동프랑크 왕 카를 3세와 함께 비엔을 포위했지만 실패했다.
881년 8월 3일 카를로마누스 2세와 함께 출정하여 아베빌 서쪽 10마일에 있는 소쿠르앙비우(Saucourt-en-Vimeu)에서 노르만족 병사 8천 명을 사살하는 성과를 올리며 격퇴하였다.
882년 8월 5일 루도비쿠스 3세는 생드니에서 투르 출신 게르몽(Germond) 후작의 딸을 말을 타고 추격하던 중, 게르몽 후작의 성 문 상인방에 이마를 부딪치면서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루도비쿠스 3세의 말은 그를 그대로 밟고 지나갔고, 루도비쿠스 3세의 머리는 그대로 골절되었다. 그에게는 후계자가 없었고, 카를로만 2세가 단독 왕이 되었다.
2. 1. 생애 초반

서프랑크 왕국의 국왕이자 프로방스와 아키텐의 왕인 루도비쿠스 2세 발부스와 그의 첫 부인인 부르고뉴 백작 아르뒤노 드 부르고뉴(Arduino de Borgundy)와 비셈베르가(Wisemberg)의 딸 안스가르드(Ansgarde)의 둘째 아들로, 862년, 863년 또는 865년에 태어났다. 카를로마누스 2세는 그의 친동생이었고, 유복자인 카롤루스 3세 심플렉스는 그의 이복 동생이었다.
루도비쿠스 3세는 할아버지 카롤루스 2세 칼부스의 통치 기간 중에 태어났으나, 레기노(Regino)에 의하면 할아버지 대머리왕 카를 2세는 안스가르드의 집안이 지위가 낮아 며느리로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카롤루스 2세는 루도비쿠스 2세와 안스가르드의 결혼을 반대했고, 루도비쿠스 2세와 안스가르드는 862년 12월 비밀리에 결혼하였다.
정확한 생일은 전하지 않지만 862년 12월 이후로, 863년 또는 865년 경에 태어난 루도비쿠스 3세는 비밀리에 양육되었다. 루도비쿠스 3세가 태어난 뒤 여동생 기셀라와 동생 카를로마누스 2세, 여동생 힐데가르트, 에르망가르트가 차례대로 태어났다. 875년 루도비쿠스 2세와 안스가르드의 동거가 발각되었고, 카롤루스 2세는 루도비쿠스 2세에게 안스가르드와의 이혼을 명령했다. 루도비쿠스 3세와 카를로마누스 2세 형제자매는 아키텐에서 내쳐졌다. 이후 루도비쿠스 2세는 프리울리 후작이자 파리 백작의 딸 아델라이드 드 프리울리와 결혼하게 된다.


877년 카롤루스 2세가 죽고 루도비쿠스 2세가 왕이 되면서 루도비쿠스 3세와 카를로마누스 2세 형제는 정식 왕자로 공인받았다. 878년 8월 7일 루도비쿠스 2세는 교황 요한네스 8세를 설득하여 안스가르데와의 이혼을 무효화시키고 두 아들을 적자로 공인받게 했다. 그러나 루도비쿠스 2세 역시 재위 2년만에 사망했다.
루도비쿠스 2세는 죽기 전, 왕국의 분열을 염려해 베른하르트 드 오베르뉴와 위그 드 아블, 보소 5세 등에게 아들 루도비쿠스 3세를 유일한 후계자로 지정하고 후일을 부탁하였다. 위드 드 아블은 구엘프 1세의 손자이자 파리 백작이자 아르겐가우후작 콘라트 1세의 아들로 카를 2세의 외사촌 동생이었으며, 프로방스의 보소 5세는 카를 2세의 후처 리첼다의 친정 남동생이었다.
879년 4월 10일 루도비쿠스 2세 사후, 고즐린 수도원장 위그, 베른하르트 드 오베르뉴나 보소 5세 등 몇몇 귀족들은 그가 살아있는 연장자 아들이므로, 루도비쿠스 3세에게 왕위를 한 명에게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일각에서는 카를로마누스 2세를 지지했다. 이로 인해 논쟁이 있었지만, 879년 9월 루도비쿠스와 카를로마누스는 공동 왕으로 지정되었다. 루도비쿠스 2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이미 로렌 지역을 확보했던 동프랑크 왕국의 루도비쿠스 3세 청년왕이 쳐들어왔고, 루도비쿠스 3세와 카를로마누스 2세는 동프랑크의 루도비쿠스 청년왕을 격퇴하였다. 루도비쿠스 2세가 일찍 사망하면서 귀족들이 그의 두 아들 중 누구를 국왕으로 선출하느냐를 놓고 논쟁을 벌이다가, 서프랑크는 국왕을 선출하는 방법이 정착되었다. 이로서 국왕 및 차기 왕위 계승자는 국왕을 선출하는 귀족, 제후들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들의 법적 지위에 논란이 있었지만 두 사람은 왕국을 공동으로 통치하는 것을 승인받았다.
2. 2. 즉위와 분할 통치
877년 할아버지 카롤루스 2세가 죽고 아버지 루도비쿠스 2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루도비쿠스 3세와 카를로마누스 2세 형제는 정식 왕자로 인정받았다. 878년 8월 7일 아버지 루도비쿠스 2세는 교황 요한네스 8세를 설득하여 안스가르데와의 이혼을 무효로 하고 두 아들을 적자로 인정받게 했다. 그러나 아버지 루도비쿠스 2세 역시 재위 2년 만에 사망했다.아버지 루도비쿠스 2세는 죽기 전, 왕국 분열을 염려해 베른하르트 드 오베르뉴와 위그 드 아블, 보소 5세 등에게 아들 루도비쿠스 3세를 유일한 후계자로 지정하고 후일을 부탁하였다. 879년 4월 10일 아버지 루도비쿠스 2세 사후, 고즐린 수도원장 위그, 베른하르트 드 오베르뉴나 보소 5세 등 몇몇 귀족들은 그가 살아있는 연장자 아들이므로, 루도비쿠스 3세에게 왕위를 한 명에게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일각에서는 카를로마누스 2세를 지지했다. 이로 인해 논쟁이 있었지만, 879년 9월 루도비쿠스와 카를로마누스는 공동 왕으로 지정되었다. 서프랑크는 국왕을 선출하는 방법이 정착되었고, 국왕 및 차기 왕위 계승자는 국왕을 선출하는 귀족, 제후들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즉위 초 루도비쿠스 3세와 카를로마누스 2세는 안스가르드가 루도비쿠스 2세의 정비이고 첫 아내임을 확정했다. 동시에 루도비쿠스 3세와 카를로마누스 2세 형제와 어머니 안스가르데는 루도비쿠스 2세의 계비인 아델라이드 드 프리울리가 간통했다고 비난했다. 당시 임신 중이었던 아델라이드 드 프리울리는 왕궁에서 쫓겨났다. 동시에 루도비쿠스 3세와 카를로마누스 2세는 랭스 대주교 힝크마르를 통해 어머니 안스가르드가 루도비쿠스 2세의 정실 부인임을 대내외에 선포하고 875년의 이혼은 잘못된 조치라고 번복하였다. 정통성 문제를 정리한 후 루도비쿠스 3세는 페리에르에서 기름부음 의식을 받고,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880년 2월 서프랑크의 루도비쿠스 3세, 카를로마누스 3세와 동프랑크의 청년 루도비쿠스는 연합하여 왈롱의 샤를루아까지 내려온 바이킹을 상대로 교전하였다. 여기서 서프랑크의 루도비쿠스 3세와 카를로마누스, 동프랑크의 청년 루도비쿠스 3세 연합군은 바이킹을 격퇴하고 5천 명의 바이킹을 사살하는데 성공한다.(→티에몽 전투(880년 2월)) 티에몽 전투 직후 서프랑크의 루도비쿠스 3세와 카를로만 2세 형제는 로타링기아의 영유권을 동프랑크의 청년 루도비쿠스에게 양도하는데 서명한다.
880년 5월 아미엥에서 루도비쿠스 3세는 동생 카를로마누스 2세와 아버지의 영토를 나누어 가졌고, 공동으로 통치했는데 루도비쿠스 3세는 북쪽의 영토인 네우스트리아와 일드프랑스를 받았다. 카를로마누스 2세는 아키텐, 셉티마니아, 부르고뉴, 프로방스를 차지했다. 루도비쿠스 3세와 카를로마누스 2세는 로트링겐(로렌)은 공동 영역으로 남겨두었는데, 귀족들의 도움을 얻어 로트링겐의 상속권을 주장하는 위그를 물리쳤다.
2. 3. 대외 관계
879년 아버지 루이 2세가 사망하자 카를로마누스 2세와 함께 왕위에 올랐다. 일부 귀족들은 루도비쿠스 3세를 단독 왕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결국 루도비쿠스 3세와 카를로마누스 2세가 함께 왕으로 선출되었다. 880년 3월 아미앵에서 아버지의 유산을 분할 상속받아 루도비쿠스 3세는 네우스트리아를 차지했다.881년 바이킹 족이 쳐들어오자, 881년 8월 3일 카를로마누스 2세와 함께 출정하여 아베빌 서쪽 10마일에 있는 사우코 앙 비우(Saucourt-en-Vimeu)에서 노르만족 병사 8천 명을 사살하는 성과를 올리며 격퇴하였다.

비엔나와 프로방스의 보소가 부르고뉴의 왕으로 칭하며 동맹을 깨자, 880년 8월 카를 3세의 군대와 연합하여 마콘을 쳐들어가 빈에서 공성전을 벌였으나 마콘만을 획득하고 실패했다. 882년 여름에 오툉 백작 리샤르의 도움으로 비엔나를 겨우 탈환하고, 보소의 아내 이르밍가르트와 그의 아들 루도비쿠스 3세 카에쿠스를 사로잡았다.
2. 3. 1. 동프랑크 왕국과의 관계
880년 2월 서프랑크의 루도비쿠스 3세, 카를로마누스 2세와 동프랑크의 청년 루도비쿠스는 연합하여 왈롱의 샤를루아까지 내려온 바이킹을 상대로 교전하였다. 여기서 서프랑크의 루도비쿠스 3세와 카를로마누스, 동프랑크의 청년 루도비쿠스 3세 연합군은 바이킹을 격퇴하고 5천 명의 바이킹을 사살하는데 성공한다.(→티에몽 전투(880년 2월)) 티에몽 전투 직후 서프랑크의 루도비쿠스 3세와 카를로만 2세 형제는 로타링기아의 영유권을 동프랑크의 청년 루도비쿠스에게 양도하는데 서명한다.880년 9월 21일 또는 그해 3월 22일 이탈리아와 바이에른의 카를로만 3세가 죽자, 로트링겐의 영유권을 놓고 동프랑크 왕국 작센의 루도비쿠스 3세 청년왕이 870년 8월의 메르센 조약은 잘못된 조약이니 불법이라며, 그에게 로트링겐을 요구해왔다. 작센의 루트비히와 갈등하던 중, 결국 그는 카를로마누스 2세 및 루도비쿠스 3세 청년왕와 함께 리베몽에서 조약 체결에 서명하였다. 루도비쿠스 청년왕은 카롤루스 2세 칼부스가 로렌 영토를 불법으로 점유했고, 메르센 조약이 잘못 체결된 조약이라며 반환을 강요했다. 바이킹족을 상대해야 했던 그는 되도록 전쟁을 피하려 했고, 이에 따라 서프랑크가 차지한 로트링겐의 영토는 독일의 루도비쿠스 3세 청년왕에게로 넘어갔다.
루도비쿠스 3세가 879년에 왕위에 오른 직후부터 침략이 시작되었는데, 동프랑크 왕 루트비히 3세가 이끄는 서프랑크의 반란 귀족과 영주들이 877년부터 시작된 전쟁을 계속했다. 루도비쿠스와 카를로만은 880년에 리베몽 조약을 맺어 동프랑크에게 로타링기아의 서부를 할양하고 당사자들을 안심시켰다.
2. 3. 2. 프로방스 보소와의 갈등
880년 5월 아미앵에서 루도비쿠스 3세는 동생 카를로마누스 2세와 아버지의 영토를 나누어 가졌다. 루도비쿠스 3세는 북쪽의 네우스트리아와 일드프랑스를, 카를로마누스 2세는 아키텐, 셉티마니아, 부르고뉴, 프로방스를 차지했다. 루도비쿠스 3세와 카를로마누스 2세는 로트링겐(로렌)을 공동 영역으로 남겨두었는데, 귀족들의 도움을 얻어 로트링겐의 상속권을 주장하는 위그를 물리쳤다.[1] 그러나 프로방스와 하부르고뉴 귀족들은 카를로마누스 2세를 인정하지 않고 보소 5세를 군주로 추대했다. 카를로마누스 2세는 루도비쿠스 3세 및 삼촌 카롤루스 3세 크라수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루도비쿠스 3세는 곧 출병하였다.[1]879년 아버지 루이 2세가 붕어하자, 루도비쿠스 3세는 동생 카를로만 2세와 함께 왕위에 즉위했다. 몇몇 귀족들은 루이 3세를 단독 왕으로 옹립하려 했지만, 결국 루이 3세와 카를로만 2세가 함께 왕으로 선출되었다.
루이 3세 즉위 당시, 왕국 분할에 대한 찬반 의견이 갈렸다. 결국, 880년 3월 아미앵에서 루이와 카를로만은 아미앵 조약을 맺고, 루이는 네우스트리아를, 카를로만은 아키타니아를 차지했다. 이 결과, 샤를 2세의 가신이자 비엔 백작인 보소는 두 형제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고 프로방스 왕을 칭했다.
비엔나와 프로방스의 보소는 두 형제와의 동맹을 깨고 부르고뉴의 왕으로 칭했고, 형제는 함께 이에 대항하여 싸웠다. 880년 8월, 두 형제는 삼촌인 뚱보황제 카를의 군대와 연합하여 마콘을 공격하고, 8월부터 11월까지 빈에서 공성전을 벌였으나 마콘만을 획득하고 실패했다.
880년 여름, 루도비쿠스와 카를로만은 보소와 전쟁을 벌였다. 초반에는 마콘과 프로방스 북부를 점령하며 순조롭게 시작했지만, 카를 3세의 증원에도 불구하고 880년 8월부터 11월까지 비엔 포위는 실패했고, 많은 사상자로 인해 전쟁을 지속할 수 없어 루도비쿠스는 패배했다.
프로방스 공작 보소는 두 사람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고 프로방스 왕으로 선출되었다. 880년 여름, 루이 3세와 카를로만 2세는 보소에 대항하여 군대를 동원, 마콩과 보소 영지의 북부를 빼앗았다. 8월부터 11월까지 동프랑크 왕 카를 3세와 함께 비엔을 포위했지만 실패했다.
2. 4. 바이킹과의 전투
881년 여름 바이킹 족이 서프랑크 왕국으로 쳐들어왔다. 이들은 880년 2월부터 캉브레 주변을 악탈하다가 11월 12일 캉브레 근처 티메온 전투에서 동프랑크의 청년왕 루트비히에게 크게 패하고 돌아갔다가, 다시 보복차원에서 서프랑크 왕국으로 진로를 바꿔서 쳐들어왔다. 881년 8월 3일 동생 카를로마누스 2세와 함께 직접 출정, 아베빌 서쪽 10마일에 있는 사우코 앙 비우(Saucourt-en-Vimeu)에서 노르만족을 격퇴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전투에서 노르만족 병사 8천명을 사살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노르만족은 우회하여 솜강 근처 아브빌 지역과 강 둑을 따라서 루아르를 습격하였다.882년, 루도비쿠스 3세는 동생 카를로마누스 2세와 함께 바이킹 해적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 때의 전투는 게르만 구전문학으로 칭송되었다. 루이 3세와 카를로마누스 2세의 연합 협공으로 이 전쟁에서 8천 명의 바이킹을 몰살시키는 전과를 얻었다.
880년 중반경 프랑크 왕국에 대한 바이킹의 습격이 급증하여 빠르게 큰 도전 과제로 바뀌었다. 동쪽의 티메온 전투에서 바이킹이 패배한 후, 약탈자들은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880년 11월과 881년 7월 사이에 코르트레이크, 아라스, 캉브레, 아미앵, 코르비를 점령했다.
루이 3세와 그의 형제는 881년 8월 3일 소코르-앙-비메(Saucourt-en-Vimeu)에서 바이킹을 기습하여 그들을 급습했다. 풀다 연대기에 따르면, 매우 격렬하고 피비린내 나는 공격으로 서 프랑크 군대는 9,000명에 달하는 약탈자를 살해하고 중요하고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16세에 불과했던 루이는 프랑크 왕국의 국민들로부터 널리 칭송을 받았다. 동 프랑키아에서는 고대 고지 독일어 시인 ''루트비히리트''(Ludwigslied)가 전투에서의 루이의 영웅심, 경건함, 평정을 찬양했으며, 서 프랑키아에서는 몇 백 년 후에 전투에서 영감을 얻어 쓰인 샹송 드 제스트인 ''고르몽 에 이젬바르''(Gormond et Isembart)가 쓰여졌다.
881년, 루이 3세는 소쿠르-앙-비메우(Saucourt-en-Vimeu)에서 노르만족을 격파했다.[1]
2. 5. 죽음
882년 8월 5일 루도비쿠스 3세는 네우스트리아 파리시 근처 생드니에서 후계자 없이 죽었고 그의 영토는 동생인 카를로마누스 2세에게 넘어갔다.[1] 그는 파리시 근처 생드니에서 자신이 사랑하던 투르 출신 게르몽(Germond) 후작의 딸을 말을 타고 추격하던 중, 게르몽 후작의 성 문 상인방에 이마를 부딪치면서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1] 그리고 루도비쿠스 3세의 말은 그를 그대로 밟고 지나갔고, 루도비쿠스 3세의 머리는 그대로 골절되었다.[1]루이 3세는 882년 8월 5일, 약 17세의 나이로 생드니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1] 전설에 따르면 그는 말[린텔]에 머리를 부딪혀 심하게 떨어져 두개골이 부러졌다. 루이 3세는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형제 카를로만 2세가 서프랑크 왕국의 유일한 왕이 되었고, 젊은 왕은 생드니 대성당의 왕실 묘소에 묻혔다.
루이의 죽음은 바이킹에 대한 서프랑크의 전쟁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으며, 소쿠르 전투에서 그의 엄청난 승리에도 불구하고, 그의 형제이자 후계자는 그의 성공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884년에 사망했다.[1] 그러나 그의 죽음은 서프랑크 왕국을 하나의 통치자 아래로 통합했으며 그의 통치는 이후 프랑크족의 통일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1]
3. 유산
루도비쿠스 3세의 시신은 생 드니 수도원 1층 성소의 피핀 3세의 석관 위에 안치되었다. 루도비쿠스 3세의 사망으로 카를로마누스 2세가 네우스트리아와 일드프랑스를 병합하고 서프랑크 왕국의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 그 뒤 5년 후 동생 카를로마누스 2세 역시 사망하여 그의 시신은 루도비쿠스 3세의 왼편에 안치되었고, 왼편 아래에는 피핀 3세의 왕비 랑의 베르트라다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다.
루이 3세는 882년 8월 5일, 약 17세의 나이로 생드니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말[린텔]에 머리를 부딪혀 심하게 떨어져 두개골이 부러졌다고 한다. 루이 3세는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형제 카를로만 2세가 서프랑크 왕국의 유일한 왕이 되었고, 젊은 왕은 생드니 대성당의 왕실 묘소에 묻혔다.
루이 3세의 죽음은 바이킹에 대한 서프랑크의 전쟁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으며, 소쿠르 전투에서 그의 엄청난 승리에도 불구하고, 그의 형제이자 후계자는 그의 성공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884년에 사망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서프랑크 왕국을 하나의 통치자 아래로 통합했으며 그의 통치는 이후 프랑크족의 통일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참조
[1]
간행물
statue (gisant) : Louis III, roi de France
https://www.pop.cult[...]
French Ministry of Culture
[2]
웹사이트
Louis III {{!}} Carolingian Dynasty, West Francia, Aquitaine {{!}} Britannica
https://www.britanni[...]
2024-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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