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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도비쿠스 3세 이우니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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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도비쿠스 3세 이우니오르는 동프랑크 왕국의 왕으로, 876년 부왕 루트비히 2세의 사망 후 프랑켄, 튀링겐, 작센을 상속받았다. 그는 서프랑크 왕국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리베몽 조약을 통해 로타링기아를 획득했으며, 형 카를만의 사망으로 바이에른을 차지하며 영토를 확장했다. 노르만족의 침략을 받기도 했으나, 882년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동생 카를 3세에 의해 동프랑크 왕국이 재통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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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도비쿠스 3세 이우니오르
기본 정보
작센의 루이 이우니오르
작센의 루이 이우니오르
통칭루트비히 3세
다른 이름루이 르 죄느
즉위876년 8월 28일
퇴위882년 1월 20일
이전 국왕루트비히 2세 (동프랑크 왕)
이후 국왕카를 3세
왕가카롤링거 가문
아버지루트비히 2세
어머니엠마 폰 알트도르프
출생일830년 또는 835년
사망일882년 1월 20일
사망 장소동프랑크 왕국, 프랑크푸르트
매장지로르슈 수도원
통치
동프랑크 왕국876년 8월 28일 – 882년 1월 20일
바이에른 왕국880년 3월 22일 – 882년 1월 20일
배우자
배우자리우트가르트 폰 작센
자녀
자녀휴고
루이
베른하르트
힐데가르트

2. 생애

876년 8월, 아버지 루트비히 2세가 사망하자, 형 카를만과 동생 카를 3세와 함께 아버지의 유산을 나누어 프랑켄, 튀링겐, 작센을 상속받았다.[6] 같은 해 서프랑크의 국왕 카를 2세가 제국의 통일을 목표로 아헨을 급습하고 쾰른을 거점으로 루트비히의 영토로 쳐들어왔으나[6], 루트비히 3세는 형제들과 연합하여 10월 8일 안데르나흐 전투에서 이를 성공적으로 격퇴했다.[7]

이후 879년 서프랑크 국왕 루이 2세 사망 후 벌어진 계승 분쟁에 개입하여 880년 리베몽 조약을 통해 서로렌 지역을 획득했다.[8] 또한 같은 해 형 카를만이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그의 영지였던 바이에른까지 상속받아[9] 왕국의 영토를 크게 넓혔다.

그러나 879년경부터 노르만인의 침략이 거세져 왕국은 어려움을 겪었다. 880년 에노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승리하기도 했으나, 이 과정에서 의형제인 작센 공작 브룬을 포함한 많은 가신을 잃는 등 피해도 컸다.[10]

882년 루트비히 3세는 남자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했으며, 그의 모든 영지는 동생 카를 3세에게 상속되어 동프랑크 왕국은 다시 하나로 통합되었다.

2. 1. 왕자 시절

루도비쿠스 3세는 830년 또는 835년에 바이에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루트비히 독일왕이었고, 어머니는 바이에른과 아르톨프의 공작 벨프 1세의 딸인 바이에른의 엠므였다. 형으로는 카를로만 3세가 있었고, 동생은 뚱보왕 카를 3세였다. 그의 이모이자 계조모는 바이에른의 유디트였다.[11]

청년 시절, 루도비쿠스는 858년862년에 아버지가 북방 슬라브계 민족인 오보트리스(Abodrites)를 정벌할 때 군사 훈련을 받고 참전했다.[4] 853년, 서프랑크의 카롤루스 2세에게 반기를 든 아키텐 귀족들이 도움을 요청하자, 아버지 루트비히 독일왕의 지시로 군대를 이끌고 아키텐으로 파견되어 피핀 2세를 지원했다. 당시 아키텐 귀족들은 카롤루스 2세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12]

854년, 루도비쿠스는 아키텐 귀족들의 초청과 아버지, 그리고 사촌인 카를 대주교의 권유로 다시 군대를 이끌고 갈리아로 진군했다. 그는 대머리왕 카를을 공격하는 한편, 바이킹 족이 정착한 서프랑크의 리모주와 루아르 계곡(Loire Valley)를 파괴하고 푸아티에, 앙굴렘, 페리괴(Perigueux), 리모주, 클레르몽, 부르주 등을 점령했다. 또한 수도원에 갇혀 있던 피핀 2세와 그의 동생 샤를을 탈출시키는 데 성공했다. 서프랑크의 카롤루스 2세는 루도비쿠스를 회유하기 위해 아키텐 왕위를 제안했으나, 그는 이를 거절했다. 루도비쿠스는 854년까지 아키텐에 머물다가 855년 동프랑크의 바이에른으로 돌아왔다.[13]

동프랑크로 돌아온 루도비쿠스는 점차 아버지로부터 독립적인 행보를 보이며 동프랑크 귀족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그는 아달라르 백작의 딸과 약혼했으며, 865년에는 동생 카를과 함께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오래가지 못하고 그해 말 부자 간의 화해로 끝났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루트비히 독일왕은 남은 영토를 아들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했다. 형 카를로만은 이미 864년 바이에른의 부왕으로 임명된 상태였고, 루도비쿠스는 작센, 튀링겐, 프랑코니아를, 동생 카를은 알레만니아와 레티아를 받게 되었다.

869년, 루도비쿠스는 아샤펜부르크에서 작센의 리우돌프 공작의 딸인 리우트가르트와 결혼했다. 리우트가르트는 의지가 강하고 정치적 야심이 있는 인물로, 남편 루도비쿠스가 더 큰 목표를 추구하도록 격려했다. 이 결혼은 다시 아버지와의 관계에 긴장을 불러일으켰고, 루도비쿠스는 871년873년에 또다시 반란을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아버지와 화해했다.

2. 2. 튀링겐 공작과 반란

왕비 작센의 리우트가르트 (12세기 작)


루도비쿠스는 점차 동프랑크의 귀족들과 긴밀한 유대 관계를 형성하며 아버지 독일인 루트비히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아버지의 허락 없이 네우스트리아 백작 아달하르트(Adalhard)의 딸과 약혼했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결혼은 무산되었고 약혼녀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

864년 아버지로부터 작센과 튀링겐의 상속권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865년 루도비쿠스는 동생 카를 3세와 함께 아버지 독일인 루트비히에 대항하는 반란에 가담했다. 이들은 프랑크푸르트와 프랑코니아를 차지하고 작센과 튀링겐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하지만 반란은 오래가지 못했고, 그해 말 루도비쿠스와 카를은 아버지와 화해했다. 이 과정에서 독일인 루트비히는 남은 영토를 세 아들에게 분할할 수밖에 없었다. 카를만이 바이에른을 받은 데 이어, 루도비쿠스는 작센, 튀링겐, 프랑코니아를, 카를 3세는 알레만니아라이티아를 받기로 했다. 프랑크푸르트 지역은 삼형제가 공동으로 관리하기로 합의했다. 같은 해 10월 서프랑크 왕국의 카를 2세가 쾰른에서 루도비쿠스와 아버지 독일인 루트비히의 화해를 주선하기도 했다.

869년 11월 24일, 루도비쿠스는 작센의 유력 가문인 리우돌핑 가문 출신으로, 작센과 이스트팔리아(Eastphalia)의 공작 리우돌프의 딸 작센의 리우트가르트와 프랑코니아의 아샤펜부르크에서 결혼했다. 리우돌프는 훗날 독일의 군주가 되는 하인리히 1세의 할아버지이자 오토 1세의 증조부이다. 왕비 리우트가르트는 강한 의지와 정치적 야망을 가진 인물로, 남편 루도비쿠스의 정치적 야심을 부추기고 자신의 목표 달성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이후에도 루도비쿠스와 아버지 사이의 긴장은 계속되었다. 870년에는 메르센 조약 이전 로타르 2세의 영지였으나 서프랑크 왕국에 넘어갔던 마스트리흐트 일대를 점령했다. 871년873년에도 루도비쿠스는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켰으나, 그때마다 극적으로 화해했다. 872년에는 형제들과 함께 유산으로 정해진 영지의 상속권을 다시 한번 확인받았다.

어린 시절 루도비쿠스는 858년862년 동쪽의 아보드리트족을 상대로 한 군사 작전에 참여했으며,[4] 854년에는 아키텐 귀족들의 요청으로 군대를 이끌고 갈리아로 진군하여 리모주까지 갔다가 돌아온 경험도 있었다. 이러한 경험들은 그가 점차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아버지에게 도전하는 배경이 되었다.

2. 3. 작센의 국왕

영토를 요구하는 세 아들과 루트비히 독일인왕


876년 8월 28일, 아버지 루트비히 독일인왕이 사망하자, 루트비히 3세는 그해 11월의 영토 분할을 통해 작센, 튀링겐, 동 로트링겐, 그리고 메르센 조약으로 추가된 영토를 상속받았다. 또한 동프랑크 전체의 국왕(la) 칭호도 물려받았다.[6] 아버지 루트비히 2세가 870년 메르센 조약으로 획득한 동부 로타링기아도 이때 넘겨받았다. 루트비히 3세는 자신이 아버지의 진정한 상속자임을 강조하기 위해 876년 아버지의 장례를 자신의 영토인 로르쉬 수도원에서 거행했으며, 아버지의 유능한 참모였던 마인츠 대주교 리우트베르트를 계속 기용했다.

즉위 초반부터 루트비히 3세는 바이킹의 침입에 적극적으로 맞섰고, 영지 내 귀족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형식적으로는 동프랑크 전체의 국왕이었으나, 실제로는 형제들(카를만, 카를 3세)과 각자의 영지를 독립적으로 통치했다. 그러나 형제들은 서로 전쟁을 벌이지 않고 협력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루트비히 3세는 주로 라인란트에 머물렀으며, 작센이나 동부 변경 지역 방문은 가급적 피했다.

880년 무렵 프랑크 왕국의 지도, 연두색 지역이 루트비히 3세의 영토


왕위에 오르자마자 루트비히 3세는 삼촌인 서프랑크의 카를 2세의 위협에 직면했다. 카를 2세는 이전부터 황제 자리를 노리며 세력을 확장했고, 루트비히 독일인왕이 사망하자 동 로타링기아를 합병하고 라인강까지 진출하려 했다.[14] 876년 가을, 카를 2세는 아헨을 급습하고 쾰른을 거점으로 삼아 루트비히 3세의 영지로 쳐들어왔다.[6] 루트비히 3세는 형제들과 연합하여 876년 10월 8일 안더나흐 전투에서 카를 2세의 군대를 격파했다.[7] 이 전투에서 루트비히 3세는 군사들에게 흰 옷을 입혀 밤중에 망령 군대처럼 보이게 하는 기지를 발휘했고, 이에 놀란 서프랑크 군대는 혼란에 빠져 후퇴했다. 이후 루트비히 3세는 카를 2세와 담판하여 프랑켄작센에서의 군대 소집권을 넘겨주는 대신 전쟁을 종결시켰고, 카를 2세는 전리품과 선물을 받고 서프랑크로 돌아갔다.[14]

877년, 루트비히 3세는 왕비 리우트가르트의 명의로 교회에 재산을 기증했다. 같은 해 말, 형제들과 동부 로타링기아 분할 문제를 논의했는데, 당시 뇌졸중 등으로 병세가 위중했던 형 카를만이 로타링기아에 대한 권리를 포기했다. 이에 따라 878년 10월 알자스에서 루트비히 3세는 동생 카를 3세와 로타링기아를 나누어 가졌다.

879년 서프랑크 국왕 루이 2세가 사망하자, 루트비히 3세는 서프랑크의 계승 분쟁에 개입하여 880년 리베몽 조약을 통해 서부 로렌 지역을 획득했다.[8] 또한 880년에 형 카를만이 적자 없이 사망함에 따라 그의 영지였던 바이에른까지 상속받아[9]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그러나 879년경부터 노르만인의 침략이 다시 거세졌다. 880년 에노의 티메온 근처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당시 루트비히 3세는 병석에 있었다. 코블렌츠트리어 등이 노르만인에게 약탈당했으며, 이들과의 전투에서 의형제인 작센 공작 브룬을 비롯한 많은 가신들이 전사했다.[10]

882년, 루트비히 3세는 남자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의 모든 영지는 동생 카를 3세에게 상속되었고, 동프랑크는 다시 통일되었다.

2. 4. 로렌 분할과 바이킹과의 전투

876년 아버지 루트비히 게르만인이 사망하자 프랑켄, 튀링겐, 작센을 상속받았다.[6] 같은 해, 서프랑크의 대머리왕 카를이 로타링기아 동부를 차지하려 하자, 루도비쿠스 3세는 10월 8일 안데르나흐 전투에서 카를의 군대를 격파하여 이를 저지했다.[7] 이 전투에서 동프랑크 군대는 단결력과 전술에서 우위를 보였으며, 젊은 왕은 병사들에게 흰 옷을 입혀 유령 군대처럼 보이게 했다고 전해진다.

877년 10월, 대머리왕 카를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루이 2세 말더듬이왕이 서프랑크 왕위를 계승하자, 루도비쿠스 3세는 그와 리에주 근처 푀렌(Fourons)에서 만나 푀렌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은 870년 메르센 조약에서 합의된 로타링기아 분할 상태를 재확인하고 서로의 영토를 존중하기로 약속한 것이었다.

그러나 879년 4월 루이 2세 말더듬이왕이 사망하자 상황이 변했다. 조슬랭 수도원장(Joscelin)을 비롯한 서프랑크 일부 귀족들이 루도비쿠스 3세에게 서프랑크 왕위 계승을 제안했고, 아내 리우트가르트의 권유도 더해져 그는 서프랑크를 침공했다. 베르됭까지 진격했으나, 루이 2세의 아들들인 루이 3세와 샤를로망 형제가 로타링기아 서부 영토 일부를 할양하는 조건으로 퇴각했다.

880년 2월, 리베몽 조약이 체결되어 루도비쿠스 3세는 로타링기아 서부 지역을 공식적으로 획득했다.[8] 이 조약으로 확정된 동프랑크와 서프랑크의 국경은 이후 14세기까지 유지되었다. 한편, 879년 형 카를만이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880년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루도비쿠스 3세는 바이에른까지 상속받아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9]

879년 여름부터 바이킹(노르드인)의 침공이 격화되어 프랑크 왕국 깊숙이 침투해 약탈을 자행했다. 루도비쿠스 3세의 왕국 역시 큰 피해를 입었다. 880년 2월, 루도비쿠스 3세는 에노 주의 티메온(Thimeon, 현재 샤를루아 근처)에서 바이킹 군대를 만나 티메온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그의 서자 위그(Hugh)가 스켈트강변에서 전사했다.[10]

루도비쿠스 3세는 네이메헌을 점령하고 있던 바이킹을 몰아내기도 했으나, 같은 시기 그의 매형이자 작센 공작인 브루노(Bruno)가 지휘하던 작센 군대는 함부르크 근처에서 바이킹에게 대패하여 브루노를 포함한 많은 작센 귀족과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10] 티메온 전투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바이킹의 위협은 계속되었으며, 루도비쿠스 3세가 병석에 있을 때 코블렌츠트리어 같은 도시들이 약탈당하기도 했다.[10]

2. 5. 생애 후반

876년 8월, 아버지 루트비히 2세가 사망하자, 형 카를만, 동생 카를 3세와 함께 아버지의 유산을 나누어 프랑켄, 튀링겐, 작센을 상속받았다.[6] 같은 해 9월, 서프랑크의 국왕 카를 2세가 제국 통일을 목표로 아헨을 급습하고 쾰른을 거점으로 루트비히의 영토로 쳐들어왔다.[6] 그러나 루트비히는 형제들과 연합군을 구성하여 10월 8일 안데르나흐 전투에서 카를 2세의 군대를 격파했다.[7]

879년 서프랑크 국왕 루이 2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들 루이 3세와 샤를로망 2세 사이의 계승 분쟁에 개입하였다. 같은 해 가을에는 아들 루트비히가 레겐스부르크 성의 난간에서 떨어져 사망하는 개인적인 비극을 겪었다.

880년 2월, 루트비히 3세는 서프랑크의 루이 3세, 샤를로망 2세와 연합하여 왈롱샤를루아까지 침입한 바이킹과 맞섰다. 이 티에몽 전투에서 연합군은 바이킹을 격퇴하고 5천 명을 사살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으나, 루트비히 3세는 이 전투에서 자신의 서자였던 위그를 잃었다.[15] 같은 달, 루트비히 3세는 서프랑크의 루이 3세, 샤를로망 형제와 리베몽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을 통해 루트비히 3세가 점령했던 서로렌 지역이 동프랑크 왕국 영토로 공식 편입되었고, 동생 카를 3세가 로타링기아 전체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면서 루트비히 3세는 로타링기아 전역을 차지하게 되었다.[8] 리베몽 조약으로 결정된 독일프랑스 사이의 국경은 14세기까지 유지되었다.

루트비히 3세는 자신의 영지 내에서 아버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통치했다. 그는 왕실의 이익을 귀족들의 이익과 조화시키려 노력했으며, 왕권을 중심으로 처가인 작센의 리우돌핑 가문을 포함한 유력 가문들을 결속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는 주로 라인란트에 머물렀으며, 작센이나 동쪽 국경 지역 방문은 드물었다.

880년 뇌졸중중풍으로 고생하던 형 카를만이 사망하자, 루트비히 3세는 그의 영지였던 바이에른을 물려받았다.[9] 이로써 그의 왕국은 더욱 광대해졌다. 루트비히 3세는 형 카를만의 서자이자 자신의 조카인 카린티아의 아르눌프를 잠재적 경쟁자로 여겨 제거하려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바이에른은 두 번 방문했지만, 대부분의 통치는 카린티아의 아르눌프 공작에게 맡겨두었다.

그러나 879년경부터 시작된 노르만인의 침략은 계속되었다. 880년 에노 주의 티메온 근처에서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루트비히 3세가 병석에 있는 동안 코블렌츠트리어 등이 약탈당했으며, 노르만과의 전투에서 의형제인 작센 공작 브룬을 비롯한 많은 가신들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10]

루트비히 3세는 작센 공작 오토의 딸 리우트가르트와 결혼하여 아들 루트비히와 베른하르트를 두었으나 모두 일찍 사망했고, 기대를 걸었던 서자 위그마저 880년 전사하면서 후계자가 없는 상황에 처했다. 881년 겨울, 루트비히 3세는 갑자기 열병으로 쓰러졌고, 882년 1월 20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사망했다. 남자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영토를 포함한 동프랑크 왕국 전체는 동생 카를 3세에게 상속되어 다시 통일되었다.

3. 사후

881년 병을 얻은 루도비쿠스 3세는 882년 1월 20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아버지 독일인 루트비히와 이복 형제인 서자 위그가 안치된 로르슈 수도원Lorsch Abbeyeng에 함께 묻혔다.

루도비쿠스 3세에게는 아들 루이(877년–879년)가 있었으나 일찍 사망하여 남자 후계자가 없었다. 따라서 그의 사후 작센, 로렌, 바이에른의 영지는 모두 동생이자 당시 슈바벤알레만니아를 다스리던 카를 3세에게 넘어갔다. 이로써 동프랑크 왕국 전체가 카를 3세 아래 다시 통합되었다. 루도비쿠스 3세에게는 아달라르의 딸 또는 이전의 첩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 위그(855/60년 – 880년 2월)도 있었으나,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다.

부인인 리우트가르트는 882년경 슈바벤 공작 부르하르트 1세 폰 슈바벤과 재혼했으나 885년 사망하여 아샤펜부르크에 안장되었다. 딸 힐데가르트(878년–895년)는 바이에른주 킴제(Chiemseedeu)의 킴제 수도원 수녀가 되었다. 그녀는 895년 바이에른의 유력자 엥겔데오와 함께 사촌인 황제 아르눌프 왕에 대한 반역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풀다 연대기''에 따르면, 이 일로 힐데가르트는 모든 공적 명예를 박탈당하고 호수 변의 섬에 유폐되었다가 킴제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그녀는 아르눌프 사후인 899년에 명예를 회복했다.

19세기에 이르러 로르슈 수도원에 있던 루도비쿠스 3세와 서자 위그의 석관은 행방이 묘연해졌다.

4. 가계


  • '''부왕''' : 독일왕 루트비히(Ludwig II, 806년? - 876년), 동프랑크의 왕(843년~876년), 바이에른의 왕(817년~875년)
  • '''모후''' : 엠마 드 바이에른(Emma de Bavaria, 802년 - 876년)
  • * '''형''' : 바이에른의 카를만(Karlmann, 830년 - 880년), 바이에른의 공작(876년~880년), 이탈리아의 왕(877년~880년)
  • * '''남동생''' : 카를 3세(Karl III, 839년 - 888년), 뚱보왕(der Dicke). 동프랑크의 왕, 이탈리아의 왕, 서프랑크의 왕, 신성로마황제(881년~888년)
  • * '''여동생''' : 이르멘가르트(Irmangard), 이탈리아의 루트비히 2세(신성로마황제)와 결혼
  • * '''여동생''' : 기셀라(Gisela of Franks), 슈바벤의 베르크톨드(Berchtold) 또는 베르톨(Berthold, 841년 - 912년?)과 결혼

  • '''왕후''' : 작센의 리우트가르트(Liutgard von Sachsen, 840년/845년 - 885년 11월 30일), 작센 공작 리우돌프의 딸.
  • * '''아들''' : 루트비히(Ludwig, 876년 - 879년 11월), 프랑크푸르트 왕궁의 창문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 * '''딸''' : 힐데가르트 (Hildegard, 875년/878년/881년 - 900년 이후), 프라우엔킴제(Frauenchiemsee) 수도원의 수녀가 되었다.
  • * '''사위''' : 안길데오(Engildeo)
  • * '''딸''' : 리우트가르트(Liutgard)
  • * '''아들''' : 베른하르트(Bernhard)

  • '''첩''' : 이름 미상
  • * '''서자''' : 위그(Hugh 또는 Hugo, 850년/855년/860년경 - 880년 2월)
  • * '''서자''' : 아달하르트(Adalhard)

  • '''장인''' : 리우돌프(Liudolf, ? - 866년), 작센 공작
  • '''장모''' : 빌룽의 오다(Oda von Billung, 805년? - 913년)

5. 기타

서프랑크의 대머리왕 카를은 자신의 아들 루이 2세에게 855년 동프랑크의 왕이라는 직책을 부여하고는 호시탐탐 동프랑크 왕국의 영토를 노리고 있었다.

877년 서프랑크의 대머리왕 카를이 그의 영토에 침략했을 때, 루도비쿠스 3세 이우니오르는 군사들에게 모두 흰 옷을 입히거나 흰 천을 준비하여 유령 집단처럼 보이게 했다. 또한 밤에는 약간의 불을 밝혀서 유령과 비슷하게 행동하도록 했다. 야밤에 기습 공격을 하려던 서프랑크의 군사들은 동프랑크 군대를 귀신으로 보고 놀라서 달아났다.

참조

[1] 서적 Lehrbuch der allgemeinen Geschichte https://books.google[...]
[2] 서적 Illustrated hand-book to Germany https://books.google[...]
[3] 문서 Louis the Pious and Louis the German would be Louis I and Louis II, respectively, in this numbering. If counted as "Louis III of Germany," he should not be confused with Louis III, Holy Roman Emperor, or Louis the Child.
[4] 문서 Reuter, 72.
[5] 문서 As "prefect of the marches." Bowlus, 569.
[6] 문서 成瀬他、p.91
[7] 문서 瀬原、p.52-53
[8] 문서 瀬原、p.54
[9] 문서 Reuter, p.336
[10] 문서 成瀬他、p.97
[11] 문서 따라서 배다른 삼촌 서프랑크의 대머리왕 카를 2세는 모계쪽으로 치면 이종사촌형에 해당된다.
[12] 서적 The Frankish Kingdoms under the Carolingians Longman.
[13] 서적 Germany in the Early Middle Ages C. 800-1056 Routledge.
[14] 서적 이야기 독일사 청아출판사
[15] 서적 The Carolingians and the Written Word Cambridge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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