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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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이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는 16세기 말 스페인령 필리핀에서 활동한 인물로, 몰루카 제도 원정, 캄보디아 원정, 민다나오 원정 등에 참여했다. 그는 아버지 고메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의 몰루카 원정에서 부사령관을 맡았지만, 원정 중 중국인 노잡이들의 반란으로 아버지가 사망하고, 자신은 필리핀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총독 재임 기간 중 캄보디아 원정을 지휘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캄보디아 원정에서 돌아온 후 1603년 상글리 반란 당시 중국인 반란군에게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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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 | |
---|---|
인물 정보 | |
이름 | 루이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 |
원어 이름 | Luis Pérez Dasmariñas |
통치 정보 | |
군주 | 펠리페 2세 |
부왕 | 루이스 데 벨라스코, 살리나스 후작 |
부왕 | 가스파르 데 수니가, 몬테레이 백작 |
임기 시작 | 1593년 12월 3일 |
임기 종료 | 1596년 7월 14일 |
직위 | 제9대 필리핀 총독 |
후임 | 프란시스코 데 테요 데 구스만 |
전임 | 페드로 데 로하스 |
개인 정보 | |
국적 | 갈리시아인 |
시민권 | 스페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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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몰루카 원정과 선상 반란
1593년, 고메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는 몰루카 제도(말루쿠 제도)의 테르나테를 점령하기 위한 원정을 계획하고 실행했다. 고메스는 수년간 원정을 비밀리에 준비하다가 원정 직전에야 자신의 의도를 드러냈다. 그는 개인 자격으로 이 원정을 이끌었으며, 항해 전 아들 루이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에게 핀타도스에 함대 일부를 이끌고 먼저 가도록 하였다. 루이스는 총사령관 자격으로 원정의 부지휘관이 되었다.[3][4]
고메스는 마닐라의 군사 업무와 필리핀 제도 업무는 디에고 론키요에게, 일반 행정은 페드로 데 로하스에게 위임하였다. 루이스가 출발한 후, 고메스는 마닐라에 잠시 머물다가 마지막 준비를 하고 28개의 벤치가 장착된 갤리선을 무장한 후에 탑승하였다. 갤리선에는 급여를 받고 고용된 중국인 노잡이들이 타고 있었다. 안토니오 데 모르가에 의하면, 이들의 마음을 사기 위하여 고메스는 중국인들에게 사슬을 채우지 않게 하였으며, 심지어 중국인들의 무기 소지도 눈감아 주었다.[4]
함대는 갤리선, 갤리엇, 프리깃함, 소형 선박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돛만 200개에 이르렀고, 900명 이상의 스페인인들이 원정에 나섰다. 1593년 10월, 고메스는 카비테 항구에서 핀타도스로 가서 루이스가 이끌고 도착한 함대와 합류하고 나서 몰루카로 가려 하였다.
원정 첫 구간에서 두 번째 날, 고메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의 함대가 루손섬 해안을 벗어나 마닐라로부터 24레구아 떨어진 카카 섬에 도착했을 때, 중국인 노잡이들은 갤리선 점령 계획을 세우고 봉기를 일으켰다.[4]
2. 1. 원정 준비
고메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는 몰루카스의 테르나테 요새를 점령하기 위한 원정을 오랫동안 비밀리에 계획했으며, 준비가 거의 완료될 때까지 자신의 의도를 드러내지 않았다.[3] 그는 아들 루이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를 총사령관 직함으로 원정대의 부사령관으로 임명하고, 함대의 일부와 함께 핀타도스로 먼저 보냈다.[4]고메스 페레스는 마닐라와 필리핀 나머지 지역의 군사 업무를 디에고 론킬로에게, 민간 업무를 페드로 데 로하스에게 맡겼다. 그는 28개의 벤치가 있는 갤리선을 무장시키고, 급여를 주고 고용한 중국인 노잡이들을 태웠다. 안토니오 데 모르가에 따르면, 노잡이들의 호의를 얻기 위해 쇠사슬로 묶지 않고 특정 무기 소지를 눈감아 주었다.[4]
약 40명의 스페인인이 갤리선에 탑승했고, 갤리선은 몇 척의 프리깃과 작은 배들과 함께 항해했다. 전체 함대는 갤리선, 갤리옷, 프리깃, 비레이, 기타 선박을 포함하여 200척의 배로 구성되었다. 900명 이상의 스페인인이 원정에 참여했다.
2. 2. 선상 반란과 고메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의 죽음
1593년 10월, 고메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 총독의 함대가 몰루카 제도 원정 중 루손섬 해안 앞 카카 섬에 도착했을 때, 중국인 노잡이들이 반란을 일으켰다.[4] 이들은 3일 동안 갤리선을 장악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새벽 직전, 중국인들은 경비병과 자고 있던 스페인인들을 공격하여 대부분 살해했다. 몇몇은 헤엄치거나 갤리선의 부속선을 타고 도망쳤다. 소란을 듣고 선실 밖으로 나온 고메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 총독은 문 밖에서 기다리던 중국인들에게 살해당했다.[4] 총독의 비서 후안 데 쿠에야르와 프란시스코회 신부 몬티야는 선실에 남아있어 살아남았고, 나중에 해안가에 풀려났다.
반란 이후 중국인들은 중국으로 향했으나, 코친차이나에 도착했다. 코친차이나 국왕은 갤리선에 실려 있던 대포 2문, 왕실 깃발, 보석, 화폐 등 귀중품을 모두 몰수했다. 중국인들은 흩어졌고 갤리선은 버려졌다. 일부는 말라카에서 체포되어 마닐라로 송환, 처형되었다.[4]
3. 필리핀 총독 선발과 부임
고메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는 필리핀 총독으로 부임할 당시, 국왕으로부터 사망 시 임시 후계자를 선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1] 그는 현지의 유력한 스페인인들에게 자신이 후임자가 될 것이라는 암시를 주었는데, 특히 아들 루이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와 에스테반 로드리게스 데 피게로아가 큰 기대를 가졌다.[1]
3. 1. 페드로 데 로하스의 임시 총독 선출
마닐라의 시민들과 군인들은 페드로 데 로하스를 임시 총독으로 선출했다.[1] 로하스는 갤리선 추적을 위해 함대를 파견했지만, 갤리선을 찾지 못했다.[1] 그는 핀타도스에 있는 루이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에게 마닐라로 귀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1]로하스는 총독의 후임자 지명 문서를 찾기 시작했지만, 수도원장이 로하스를 불신하여 문서를 없애버렸다.[1]
3. 2. 루이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의 총독 부임
고메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 총독이 사망한 후, 필리핀 총독 자리를 둘러싸고 혼란이 발생했다. 고메스는 생전에 국왕으로부터 임시 후계자를 지명할 권한을 받았고, 자신의 아들 루이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와 에스테반 로드리게스 데 피게로아 등에게 자신이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암시를 주었다.총독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마닐라의 시민과 군인들은 페드로 데 로하스를 임시 총독으로 선출했다. 로하스는 루이스에게 이 소식을 알리고 마닐라로 돌아올 것을 명령하는 한편, 고메스 총독의 후임자 지명 문서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로하스를 신뢰하지 않은 아우구스티노회 수도원장이 비밀리에 문서를 없애버렸다.
로하스가 선출된 지 40일 후, 루이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와 로드리게스 데 피게로아가 마닐라에 도착했다. 루이스는 사라진 문서를 찾도록 지시했고, 결국 문서가 발견되었다. 문서에는 고메스가 자신의 아들 루이스를 후임자로 지명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에 마닐라 행정장관들은 로하스의 지명을 철회하고 루이스를 총독으로 임명했다. 루이스의 군대와 함대도 이를 지지했다. 결국 로하스는 40일 만에 사임하고 멕시코 시티의 알칼데(시장)로 승진했다. 안토니오 데 모르가는 필리핀 부총독으로 임명되어 1595년 6월 11일 카비테에 도착했다.[1]
4. 중국 관료와의 조우
함대 귀환 직후, 교역을 위한 것으로 보이는 많은 중국 선박들이 마닐라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많은 사람들을 데려온 반면 상품은 거의 없었다. 7명의 중국 관료들이 자신들의 직책을 표시하는 깃발을 가지고 나타났다. 병력 대부분이 몰루카 원정을 떠난 것을 듣고, 스페인인들은 중국에서 무방비 상태의 필리핀 제도를 정복하기 위하여 함대를 파견한 것이라고 의심하였다.[5]
그러나 도시는 이전에 비하여 방비력이 크게 증강되어 있는 것을 보자, 중국인들은 적대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이들은 원정에 대한 어떠한 동기도 보여주지 않은 채 귀환하였고 뚜렷한 동기를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5]
5. 캄보디아 원정
1594년, 시암의 캄보디아 침공 소식이 마닐라에 전해졌다. 캄보디아에 있던 스페인인과 포르투갈인들은 루이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에게 캄보디아 정복을 통해 아시아 내륙 진출을 제안했다. 이에 그는 1596년 소규모 함대를 캄보디아에 파견했으나, 이 원정은 1599년 캄보디아 주둔 스페인 군대가 몰살당하면서 실패로 끝났다.[1]
5. 1. 캄보디아 내 분쟁과 스페인의 개입
1594년, 시암 국왕이 캄보디아를 침략하여 점령하였다는 소식이 마닐라에 전해졌다. 캄보디아 국왕 랑가라(Langara)는 라오스로 도망갔다. 당시 캄보디아에 체류하던 스페인인과 포르투갈인들은 캄보디아 왕국을 쉽게 정복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스페인이 아시아 내륙으로 가는 발판을 확보할 수 있다고 루이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를 설득하였다.루이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는 대형선박(vessel) 한 척과 정크선(junk) 두 척에 120명의 스페인인 및 소수의 일본인과 필리핀인을 탑승시키고 파견할 것을 지시하였다. 1596년 초, 원정이 시작되었다.
주함은 정크선 두 척과 떨어져서 항해하였다. 정크선들이 캄보디아에 도착하였을 때는 캄보디아인들이 이미 시암인들을 몰아낸 상태였다. 반 시암 지도자 중 한 명인 아나카파란(Anacaparan)은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스페인인들은 기회라고 생각하였지만 주함이 오기 전까지는 행동을 취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럼에도, 정박 중인 중국 상인들과의 논쟁이 발생하였고, 스페인인들은 중국인들과 싸워서 일부를 살해하였다. 이는 새로운 캄보디아 국왕과의 대치로 이어졌지만, 스페인인들은 국왕을 물리친 후, 수도 대부분을 불살랐다.[1]
1597년, 주함이 캄보디아에 도착하였다. 루이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는 랑가라 국왕을 왕위에 복위시키라는 부하들의 간청을 거절하였고, 필리핀으로 돌아갔다.
5. 2. 캄보디아-스페인 전쟁
1599년, 말레이 지역 무슬림 상인들이 캄보디아에 파병된 스페인 군대와 싸워 몰살시키면서, 캄보디아-스페인 전쟁을 통한 캄보디아 정복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1] 캄보디아 원정은 스페인의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의 한계를 보여준다. 이러한 군사적 개입은 현지 주민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고, 장기적으로 스페인의 이익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6. 민다나오 원정
고메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 총독 재임 시절, 에스테반 로드리게스 데 피게로아는 사비를 들여 민다나오섬을 정복하고 자신과 후손이 섬을 통치할 권리를 얻는 계약을 맺었다. 이 계약은 스페인 본국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1]
6. 1. 로드리게스 데 피게로아의 원정과 죽음
1596년, 에스테반 로드리게스 데 피게로아는 214명의 스페인인과 필리핀인들을 이끌고 민다나오섬 원정을 시작했다.[1] 그는 갤리선, 갤리엇선, 프리깃함, 비레이선, 바랑가이선, 라피선 등을 이끌고 민다나오 강에 도착하여, 탄카판과 루마구안이라는 현지 정착지의 6000명과 합세하였다.[1]이들은 민다나오섬에서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추장이 머물고 있는 부하하옌으로 진격하였다. 부하하옌은 방비가 철저히 되어 있었다.[1] 도착 직후, 스페인인과 원주민 사이에 소규모 충돌이 발생하였는데, 이때 에스테반 로드리게스 데 피게로아는 선박에 있었지만 스페인인들의 전황이 악화되자 직접 지휘하기 위하여 약간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배에서 나왔다. 더 빨리 가기 위하여 투구를 쓰지 않은 상태에서 전장에 도착하기 전, 원주민 병사가 검으로 에스테반 로드리게스 데 피게로아의 머리를 내리쳤다.[1]
에스테반 로드리게스 데 피게로아는 주함으로 돌아갔지만 다음날 사망하였다.[1] 그의 민다나오 통치는 허무하게 끝이 났고, 스페인 병력은 후안 데 라 하라가 지휘하여 탄카판으로 가서 성채 하나와 무르시아라는 스페인 정착지를 건설하였다.[1]
6. 2. 후안 데 라 하라의 지휘와 무르시아 정착촌 건설
로드리게스 데 피게로아의 사망 이후, 스페인 병력은 후안 데 라 사라가 지휘하게 되었다. 이들은 민다나오섬의 탄카판으로 후퇴하여 요새와 무르시아라는 스페인 정착촌을 건설하였다. 민다나오 원정은 스페인이 필리핀 내 지배력을 확장하려는 시도였으나, 로드리게스 데 피게로아의 죽음으로 인해 큰 차질을 빚게 되었다.7. 총독 이임 이후
프란시스코 데 테요 데 구즈만이 새로운 총독으로 부임한 후, 루이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는 개인 자격으로 캄보디아 원정을 계속 추진했다. 그러나 그가 탄 배는 폭풍을 만나 중국 엘피냘에 표착하게 되었다. 엘피냘 인근 마카오의 포르투갈인들은 루이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를 공격했고, 결국 그는 캄보디아 원정을 포기하고 마닐라로 돌아와야 했다.[6]
7. 1. 상글리 반란과 죽음
프란시스코 데 테요 데 구즈만이 신임 총독으로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루이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는 캄보디아와 민다나오 원정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테요 데 구즈만은 스페인에서 파견되어 1596년 7월 14일 총독직을 인수받았다.[6]총독 임기가 끝난 후, 루이스는 개인 자격으로 캄보디아 원정을 떠났지만, 그가 탄 배가 태풍으로 항로를 벗어나 중국이 스페인인에게 허가한 항구 엘피냘에 표착했다. 이로 인해 엘피냘 근처 마카오에 주둔한 포르투갈인들은 자신들을 침공하는 것으로 오해하여 분노했다. 루이스는 캄보디아 원정을 중단하고 마닐라로 돌아왔다.[6]
1603년, 상글리 반란 때 중국인들에게 살해당했다.[6] 이 사건은 스페인 식민 통치에 대한 중국인들의 저항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참조
[1]
문서
Ibid.
[2]
문서
스페인 작명법에 따라 부성(父姓) 페레스 다스마리냐스, 모성(母姓) 파에스 데 소토마요르를 병기한다.
[3]
문서
벤치는 노를 젓는 선원들이 앉는 자리를 말한다. 벤치의 수에 따라 선박의 규모를 알 수 있다.
[4]
서적
Sucesos de las Islas Filipinas
[5]
논문
The massacre of 1603: Chinese Perception of the Spaniards in the Philippines
1988
[6]
서적
The inhabitants of the Philippines
S. Low, Marston and company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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