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프탑 코리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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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프탑 코리안스는 19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 당시,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에서 한인들이 상점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총기로 무장하고 지붕에서 경계하던 모습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로드니 킹 사건에 대한 경찰의 무죄 평결과 그로 인한 폭동 발생 이후, 경찰의 보호를 받지 못한 한인들이 자경단을 조직하여 스스로를 보호하는 과정에서 이 용어가 사용되었다. 이 사건은 흑인-한국계 미국인 관계의 긴장, 총기 규제 논쟁, 그리고 미국 사회 내 인종 갈등 문제를 보여주는 사례로 언급되며, 최근에는 소셜 미디어 밈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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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프탑 코리안스 | |
|---|---|
| 사건 개요 | |
| 명칭 | 루프탑 코리안스 |
| 발생 시기 | 19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 |
| 원인 | 로드니 킹 사건 관련 경찰의 무죄 평결 인종 갈등 심화 |
| 주요 내용 | 폭동 당시 한인들이 자신들의 사업체를 지키기 위해 옥상에서 무장하고 방어한 사건 |
| 배경 | |
| 로드니 킹 사건 | 1991년 3월 3일, 흑인 로드니 킹이 백인 경찰에게 구타당한 사건 |
| 무죄 평결 | 1992년 4월 29일, 관련 경찰에게 무죄 평결이 내려지면서 로스앤젤레스 폭동 발생 |
| 한인 사회의 상황 | 로스앤젤레스 지역에서 상당수의 한인 자영업자들이 사업체를 운영 폭동으로 인해 많은 한인 사업체가 약탈 및 방화 피해를 입음 |
| 루프탑 코리안스의 등장 | |
| 자경단 조직 | 경찰력의 부재 속에서 한인들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자경단을 조직하고 무장함 |
| 옥상 방어 | 자신들의 사업체 옥상에 올라가 총기로 무장하고 약탈자들로부터 방어함 |
| 언론 보도 | 무장한 한인들의 모습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루프탑 코리안스"라는 용어가 널리 알려짐 |
| 반응 및 평가 | |
| 긍정적 평가 | 자신들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정당방위라는 평가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한인 사회의 단결력을 보여준 사례라는 평가 |
| 부정적 평가 | 과잉 대응이라는 비판 인종 갈등을 심화시켰다는 비판 |
| 사회적 영향 | 한인 사회의 정치적 위상 강화에 기여 미국 사회 내 인종 갈등 문제에 대한 논의를 촉발 |
| 관련 용어 | |
| 사이이구 (Sa-i-gu) | "4·29"를 의미하는 한국어 단어로, 로스앤젤레스 폭동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됨 |
| 코리아타운 | 로스앤젤레스의 한인 밀집 지역으로, 폭동 당시 큰 피해를 입음 |
| 기타 | |
| 교훈 | 소수 민족 공동체의 자구 노력의 중요성 사회적 불의에 대한 저항의 필요성 |
2. 배경
19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 이전부터 로스앤젤레스 내 한인 사회와 흑인 사회 사이에는 긴장이 존재했다. 일부에서는 한인 상점들이 지역 경제를 장악한다는 인식으로 인해 인종적 반감이 생겨났다고 본다.[3] 특히 1991년 한인 상점 주인이 흑인 소녀 라타샤 할린스를 총으로 살해한 사건과, 이후 가해자에게 내려진 가벼운 판결은 이러한 갈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4][5][6]
2. 1. 흑인-한인 갈등
한인과 흑인 커뮤니티 사이에는 긴장이 존재했다. 일부 한인에 따르면, 흑인 사회 일각에서는 한인들이 지역 상권을 장악하고 지역 사회의 부를 빼앗아간다는 인식이 있었으며, 이는 인종적 반감으로 이어지기도 했다.[3] 이러한 갈등의 대표적인 사례로 1991년 한인 편의점 주인인 두순자가 흑인 십대 소녀 라타샤 할린스를 총으로 쏴 살해한 사건이 있다.[4]두순자는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실제로는 집행유예로 감형되었다. 대신 5년의 보호관찰과 400시간의 사회봉사 명령을 받았고, 500USD의 배상금과 할린스의 장례 비용을 지불하게 되었다.[4][5] 이 판결은 매우 가벼운 처벌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며, 항소가 기각된 것이 19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는 분석도 있다.[6] 이 사건은 재미 한인 사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2. 2. 로드니 킹 사건과 1992년 LA 폭동
로드니 킹 사건 판결 이후, 로스앤젤레스 경찰은 폭동의 압도적인 규모로 인해 피해를 입은 많은 지역에 적절한 보호를 제공하지 못했다. 논란이 있지만, 경찰은 비벌리힐스와 웨스트할리우드를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하며 코리아타운을 사실상 고립시켰고, 다른 소수 민족 및 저소득층 지역 사회와 마찬가지로 코리아타운 커뮤니티가 스스로 상황을 해결하도록 내버려 두었다.[7] 이에 대응하여 많은 한인 사업주와 주민들은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직접 나섰다.[8]로스앤젤레스의 지역 한인 라디오 방송국들은 한인 사업주들을 돕기 위한 지원을 호소했고, 이에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자신의 총기를 가지고 코리아타운으로 모였다. 5번가와 웨스턴 애비뉴 교차로, 특히 캘리포니아 마켓(가주 마켓)이라는 한인 식료품점은 주요 충돌 지점이 되었다. 이 외에도 8번가와 옥스포드 애비뉴, 웨스턴 애비뉴와 3번가 등지에서도 총기로 무장한 한인들이 상점 등을 방어했다.[8] 당시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식료품점 지붕 위에 "산탄총과 자동 무기"를 든 여러 사람이 있었다고 보도했으며,[2][4] ''에보니''는 "소총과 권총"이 사용되었다고 언급했다.[9]
당시 대한민국은 남성에게 30개월의 의무 군 복무를 시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한인 이민자들이 총기 사용 경험이 있었다는 점은 주목할 부분이다.[10]
이러한 '루프탑 코리안'들의 행동은 미국 사회에서 총기 규제와 자경단 활동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동시에 어려운 상황 속에서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려 했던 한인들의 용기와 기민함에 대한 찬사를 받기도 했다.[15] 그러나 비극적인 사건도 발생했다. 3번가 근처 상점을 보호하던 중 한국계 미국인 에드워드 송 리가 다른 한인이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또한 라틴계 주민 헥터 카스트로 역시 폭동 중 코리아타운에서 총에 맞아 사망했는데, 당시 한인 상인들과 폭도들 양측 모두 총격전을 벌였기 때문에 당국은 누가 그를 살해했는지 특정하지 못했다.[11]
폭동 기간 동안 경찰은 "전술 경계령" 상태에 있었으며, 시민들의 지원 요청에 거의 응답하지 못했다. 조지 H.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이 폭동진압법을 발동하여 미국 육군과 캘리포니아 주 방위군 등 연방 병력 15,000명을 투입한 후에야 비로소 질서가 회복되었다. 병력 투입 이후 혼란은 빠르게 진정되었다.[12]
3. 사건 전개
로드니 킹 사건 판결 이후 발생한 로스앤젤레스 폭동 당시, 로스앤젤레스 경찰은 폭동의 규모에 압도되어 많은 지역에 치안 공백 상태를 초래했다. 특히 경찰은 비벌리힐스와 웨스트할리우드 같은 부유층 지역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하면서, 코리아타운을 포함한 소수 민족 및 저소득층 지역 사회는 사실상 보호받지 못하고 방치되었다.[7]
이러한 경찰력 부재 상황에서, 많은 한인 사업주와 주민들은 스스로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직접 나섰다.[8] 지역 한인 라디오 방송국들은 위험에 처한 한인 사회를 돕기 위해 자원봉사자들의 참여를 호소했으며, 이에 많은 한인들이 자신의 총기를 가지고 코리아타운으로 모여들었다. 5번가와 웨스턴 애비뉴 교차로의 '가주 마켓'(캘리포니아 마켓)을 비롯한 여러 주요 지점에서 총기로 무장한 한인들이 방어선을 구축하고 폭도들에 맞섰다.[8]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들은 산탄총, 자동 무기, 소총, 권총 등 다양한 총기를 사용했다.[2][4][9] 당시 대한민국의 의무 군 복무 제도로 인해 많은 한인 이민자들이 총기 사용 및 군사 훈련 경험이 있었다는 점은 이들의 자경 활동에 영향을 미쳤다.[10]
'루프탑 코리안'으로 알려진 이들의 자발적인 무장 및 방어 활동은 이후 미국 사회에서 총기 규제와 자경단 활동의 정당성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동시에 극한 상황 속에서 공동체를 지키려 했던 용기와 기민함에 대한 찬사를 받기도 했다.[15] 하지만 이 과정에서 안타까운 인명 피해도 발생했다. 한인 청년 에드워드 송 리가 동료의 오인 사격으로 사망했고, 라틴계 주민 헥터 카스트로 역시 총격으로 목숨을 잃었으나 정확한 가해자는 밝혀지지 않았다.[11]
폭동 기간 동안 LA 경찰은 사실상 제 기능을 하지 못했으며, 시민들의 구조 요청에 제대로 응답하지 않았다. 혼란은 조지 H.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이 반란 진압법을 발동하여 연방군 병력 15,000명을 투입한 후에야 비로소 진정되기 시작했고, 군대 투입 이후 질서는 빠르게 회복되었다.[12]
3. 1. 한인 라디오 방송의 역할
로드니 킹 사건 판결 이후 발생한 로스앤젤레스 폭동 당시, 로스앤젤레스 경찰은 폭동의 규모에 압도되어 많은 지역에 치안을 제공하지 못했다. 특히 경찰은 비벌리힐스와 웨스트할리우드 같은 부유한 지역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하면서, 상대적으로 코리아타운을 포함한 다른 소수 민족 및 저소득층 지역 사회는 보호받지 못하는 상황에 놓였다.[7] 이러한 경찰력 공백 속에서 한인 사회는 스스로를 지켜야 했다.[8]이때 로스앤젤레스 지역의 한인 라디오 방송국들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 방송국은 코리아타운 내 한인 사업주들을 돕기 위한 긴급 호소를 방송으로 내보냈고, 이에 많은 한인 자원봉사자들이 호응했다. 방송을 들은 자원봉사자들은 각자 소유한 총기를 가지고 코리아타운으로 모여들어 방어에 나섰다. 특히 5번가와 웨스턴 애비뉴 교차로에 위치한 '가주 마켓'(캘리포니아 마켓)은 한인들의 주요 방어 거점이자 격렬한 충돌 지점 중 하나였다. 이 외에도 8번가와 옥스포드, 웨스턴과 3번가 등 여러 지역에서 총기로 무장한 한인들이 상점과 지역사회를 지키기 위해 나섰다.[8] 당시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가주 마켓 지붕 위에 "산탄총과 자동 무기"를 든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고 보도했으며,[2][4] ''에보니'' 잡지 역시 "소총과 권총"이 사용되었다고 언급했다.[9]
3. 2. 무장 자경 활동
로드니 킹 사건 판결 이후, 로스앤젤레스 경찰(LAPD)은 폭동의 규모에 압도되어 피해 지역 대부분에 제대로 된 보호를 제공하지 못했다. 특히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경찰은 비벌리힐스와 웨스트할리우드 같은 부유한 지역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하면서 코리아타운을 사실상 고립시켰고, 다른 소수 민족 및 저소득층 지역 사회와 함께 방치하는 결과를 낳았다.[7] 이러한 상황에 직면한 많은 한인 사업주와 주민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8]로스앤젤레스의 한인 라디오 방송국들은 위험에 처한 한인 상점들을 돕기 위해 긴급히 도움을 요청했고, 이에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자신의 총기를 가지고 코리아타운으로 모여들었다. 특히 5번가와 웨스턴 애비뉴 교차로에 위치한 '가주 마켓'(캘리포니아 마켓)은 한인들의 주요 방어 거점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외에도 8번가와 옥스포드 애비뉴, 웨스턴 애비뉴와 3번가 등 코리아타운 곳곳에서 총기로 무장한 한인들이 상점과 지역사회를 지키기 위해 방어선을 구축했다.[8] 당시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식료품점 지붕 등에서 "산탄총과 자동 무기"[2][4]를 든 여러 사람이 있었다고 보도했고, ''에보니'' 잡지는 "소총과 권총"[9]의 사용을 언급했다.
당시 대한민국은 남성에 대해 30개월의 의무 군 복무 제도를 시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한인 이민자들이 총기를 다루는 데 익숙하고 군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이들의 자경 활동에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10]
'루프탑 코리안'으로 상징되는 이들의 무장 자경 활동은 이후 총기 규제와 자경단 활동의 정당성에 대한 사회적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동시에 극한 상황 속에서 공동체를 지키려 했던 용기와 기민함에 대한 찬사를 받기도 했다.[15] 하지만 안타까운 희생도 발생했다. 3번가 근처에서 상점을 지키던 중 한인 청년 에드워드 송 리가 동료 한인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하는 오인 사격 사건이 발생했다. 또한 라틴계 주민 헥터 카스트로 역시 폭동 중 코리아타운에서 총에 맞아 사망했는데, 당시 상인들과 폭도들 양측 모두 총격전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정확히 누가 쏜 총에 맞았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11]
폭동 기간 동안 로스앤젤레스 경찰은 사실상 "전술 경계령" 상태에 머무르며 시민들의 구조 요청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했다. 혼란은 조지 H.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이 반란 진압법을 발동하여 연방군 병력 15,000명을 투입한 후에야 비로소 진정되기 시작했다. 군대가 투입되자 질서는 거의 즉각적으로 회복되었다.[12]
3. 3. 진압
로드니 킹 사건 판결 이후, 로스앤젤레스 경찰은 폭동의 압도적인 규모 앞에 속수무책이었고, 많은 피해 지역에 제대로 된 보호를 제공하지 못했다.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경찰은 부유층 지역인 비벌리힐스와 웨스트할리우드를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하면서 코리아타운을 사실상 고립시켰다. 이는 다른 소수 민족 및 저소득층 지역 사회와 마찬가지로 코리아타운 커뮤니티가 스스로 위험에 맞서도록 방치한 결과를 낳았다.[7]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많은 한인 상점 주인과 주민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직접 나섰다.[8]로스앤젤레스의 지역 한인 라디오 방송들은 한인 상점들을 돕기 위한 지원을 호소했고, 이에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개인 총기를 가지고 모여들었다. 특히 5번가와 웨스턴 애비뉴 교차로에 위치한 '가주 마켓'(캘리포니아 마켓)은 한인들의 주요 방어 거점이자 격렬한 충돌 지점이 되었다. 이 외에도 8번가와 옥스포드, 웨스턴과 3번가 등 여러 곳에서 총기로 무장한 시민들이 상점을 지켰다.[8] 당시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가주 마켓 지붕 위에 "산탄총과 자동 무기"를 든 여러 명의 한인이 있었다고 보도했으며,[2][4] ''에보니'' 잡지는 "소총과 권총"이 사용되었다고 언급했다.[9]
당시 대한민국은 남성에게 30개월의 의무 군 복무를 부과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한인 이민자들이 총기 사용에 익숙했다는 점이 주목받기도 했다.[10]
이러한 '루프탑 코리안'의 자위적 행동은 미국 사회 내에서 총기 규제와 자경단 활동의 정당성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동시에 극한 상황 속에서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려 했던 한인들의 용기와 기민함에 대한 찬사를 받기도 했다.[15] 안타깝게도 이 과정에서 인명 피해도 발생했다. 3번가 근처 상점을 지키던 중 한국계 미국인 에드워드 송 리가 동료의 오인 사격으로 사망했으며, 라틴계 주민 헥터 카스트로 역시 코리아타운에서 총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당시 상인들과 폭도들 양측 모두 총격전을 벌였기 때문에 당국은 카스트로를 누가 살해했는지 특정하지 못했다.[11]
폭동 기간 동안 LA 경찰은 "전술 경계령" 상태를 유지하며 사실상 방관적인 태도를 보였고, 시민들의 구조 요청에 거의 응답하지 않았다. 상황은 조지 H.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이 반란 진압법을 발동하여 연방군 병력 15,000명을 투입한 후에야 비로소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다. 연방군 투입 이후 로스앤젤레스의 질서는 빠르게 회복되었다.[12]
4. 영향 및 논란
19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 당시 한인들의 자경 활동이었던 루프탑 코리안은 미국 사회 내에서 다양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시민의 총기 소유권 문제와 인종 갈등 문제 등이 주요 쟁점으로 떠올랐다.
4. 1. 총기 규제 논쟁
루프탑 코리안은 총기 소유 옹호자들에 의해 시민의 총기 소유 가치와 "스스로의 첫 번째 대응자"가 되는 것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인용되었다.[13]4. 2. 인종 갈등 문제
루프탑 코리안은 최근 소셜 미디어 밈의 소재가 되면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 특히 2014년 퍼거슨 사태 당시 흑인 커뮤니티와의 관계,[14]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운동의 등장, 그리고 아시아 혐오 멈춰라 운동을 둘러싼 논의와 맞물려 인종적 긴장을 다시금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10][15] 이는 루프탑 코리안 현상이 과거의 사건을 넘어 현대 미국 사회의 복잡한 인종 문제를 성찰하게 하는 소재로 여전히 유효함을 보여준다.참조
[1]
웹사이트
The Real, Tragic Story Behind That 'Roof Korean' Meme You May Have Seen
https://www.huffpost[...]
2023-05-10
[2]
웹사이트
KING CASE AFTERMATH: A CITY IN CRISIS : Looters, Merchants Put Koreatown Under the Gun : Violence: Lacking confidence in the police, employees and others armed themselves to protect mini-mall.
https://www.latimes.[...]
2023-05-10
[3]
웹사이트
Communities work to build understanding 25 years after LA riots
https://www.nbcnews.[...]
2024-08-2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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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rty years after it burned, Koreatown has transformed. But scars re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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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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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an American Dreams: The Emergence of an American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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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mapping Koreatown: Folklore, Narrative and the Los Angeles Rio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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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search.eb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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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were the Roof Koreans/Rooftop Koreans? The Crazy meme from 1992
https://www.youngp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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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ths during the L.A. rio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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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Rooftop Koreans Knew, You Are Your Own First Responder
https://www.thetru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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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The Police Abandoned Them, These Korean Business Owners Took Up Arms During The LA Riots
https://allthatsinte[...]
2023-05-11
[15]
간행물
Kung Flu and Roof Koreans: Asian/Americans as the Hated Other and Proxies of Hating in the White Imaginary
20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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