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마려는 고구려 동명성왕의 셋째 아들 온조와 함께 남하하여 백제 건국에 기여한 인물이다. 온조의 형 비류와 함께 정착지를 찾아 한강 유역의 위례성에 도읍을 정할 것을 주장했고, 십제 건국 후 좌보 벼슬을 받았다. 백제 초기 정치 체제 확립에 기여했으며, 십제공신 중 한 명으로 장흥 마씨와 목천 마씨의 시조이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마려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마려 |
한글 | 마려 |
한자 | 馬黎 |
가타카나 | 마 료 |
히라가나 | ば れい |
로마자 표기 | Ma Ryeo |
로마자 표기 (매큔-라이샤워식) | Ma Ryŏ |
인물 정보 | |
직책 | 백제의 좌보 |
군주 | 백제 온조왕 |
군주 칭호 | 국왕 |
출생일 | 미상 |
출생지 | 미상 |
사망일 | 미상 |
사망지 | 미상 |
매장지 | 미상 |
국적 | 고구려 → 백제 |
본관 | 미상 |
경력 | 미상 |
성별 | 남성 |
부모 | 미상 |
형제 | 미상 |
배우자 | 미상 |
자녀 | 미상 |
직업 | 미상 |
별명 | 미상 |
서훈 | 미상 |
웹사이트 | 미상 |
2. 생애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찾아와 주몽이 그를 태자로 삼았다.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여 오간, 마려 등 10명의 신하들과 남쪽으로 떠났는데, 따르는 백성이 많았다. 이들은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살 만한 땅을 찾아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거처를 정하려고 하자, 마려는 "이 하남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이 둘러있고,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로 가로막혀 있으니, 얻기 어려운 요새와 같습니다.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하고 건의하였다. 그러나 비류는 이 건의를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살았다.[2]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 없었다. 그는 위례성으로 와서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편안히 지내는 것을 보고 후회하다가 죽었고, 비류를 따르던 백성들은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2]
기원전 18년, 온조왕은 하남(河南)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십제(十濟)를 건국하였다. 마려는 백제 건국 후 온조를 보좌하였으며, 온조왕은 백제 개국공신(開國功臣)인 마려에게 좌보(左輔) 벼슬을 내렸다.[2] 백성들이 온조를 즐겨 따랐기 때문에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로 고쳤다.[2]
2. 1. 백제 건국 이전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찾아와서 주몽이 그를 태자로 삼았다.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여 오간, 마려 등 10명의 신하들과 남쪽으로 떠났는데 따르는 백성이 많았다. 드디어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살 만한 땅을 찾아보았다.비류가 바닷가에 거처를 정하려고 하자, 마려 등 10명의 신하가 말하기를 "이 하남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이 둘러있고,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로 가로막혀 있으니 얻기 어려운 요새라 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그러나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살았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기가 많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가 없었다. 위례성으로 와서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편안히 지내는 것을 보고는 후회하다가 죽었다. 비류의 백성들은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2]
2. 2. 백제 건국
기원전 18년 온조왕은 하남(河南)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십제(十濟)를 건국하였다. 마려는 백제 건국 후 온조를 보좌하였으며, 온조왕은 백제 개국공신(開國功臣) 마려에게 좌보(左輔) 벼슬을 내렸다.[2]백성들이 온조를 즐겨 따랐기 때문에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로 고쳤다.[2]
2. 3. 비류와의 갈등
마려 등 10명의 신하는 비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2]原文|원문중국어: "이 하남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이 둘러있고,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로 가로막혀 있으니 얻기 어려운 요새라 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비류는 이 말을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살았다.[2]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 없었다.[2] 위례성으로 와서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편안히 지내는 것을 보고 후회하다가 죽었고, 비류를 따르던 백성들은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2]
3. 십제공신
백제 건국에 공을 세운 십제공신 10인 중 삼국사기에 기록된 인물은 마려와 오간뿐이고, 나머지는 족보 등에 기록되어 있다.
4. 문화유산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합정리에 있는 백제문화단지에는 백제 시대 귀족의 집들을 재현해 놓은 생활문화마을이 있다. 생활문화마을 위에 자리잡은 위례성은 한성 백제(기원전 18년 ~ 서기 475년)의 도읍을 재현해 놓은 공간으로, 위례궁, 고상가옥, 개국공신 마려의 집 등 당시 백제의 건축과 생활상을 볼 수 있도록 조성되어 있다.[3]
참조
[1]
서적
삼국유사 2 기이 2 남부여 전백제
[2]
백과사전
《삼국사기》(三國史記) 제23권 백제본기 제1(卷第二十三 百濟本紀 第一)
https://terms.naver.[...]
[3]
뉴스
부여 백제문화단지
http://news.mk.co.kr[...]
매일경제
2011-09-27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