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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조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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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온조왕은 백제의 시조로, 다양한 설화와 기록에 따라 출생과 가계에 대한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 동명성왕의 아들로, 북부여 우태의 아들이라는 설도 함께 기록되어 있다. 온조는 형 비류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와 한강 유역에 정착하여 십제를 건국하고, 이후 백제로 국호를 변경했다. 그는 재위 기간 동안 말갈, 낙랑 등 주변 세력과의 대외 관계를 맺고, 마한을 멸망시키며 영토를 확장했다. 또한, 백성들을 위무하고 농업을 장려하는 등 내치에도 힘썼으며, 28년에 사망하고 장남 다루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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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조왕
기본 정보
온조왕의 초상화
부여온조
다른 이름부여은조
작위어라하
직업백제 어라하
출생일기원전 38년 전후
출생지졸본부여 졸본
사망일28년 2월 (음력)
사망지백제 위례성
재위기원전 18년 ~ 28년 2월 (음력)
작위제1대 백제 국왕
매장지미상
배우자온조왕비
자녀다루왕
덕좌왕
부왕동명성왕
우태
모후소서노
형제자매유리명왕 (의붓형)
부여비류
전임자백제의 초대 국왕
후임자다루왕
호칭어라하
건길지
묘호미상
시호없음
법명없음
존호온조왕 어라하
묘소미상
능묘미상
거주지백제
국적백제
성별남성
가문부여
연호미상
왕조부여
고구려
백제
종교미상
소속백제
목록백제의 1대 국왕
백제 국왕
왕위 계승백제 국왕
즉위기원전 18년
전임자왕국 창건
후임자다루왕
왕가부여
왕조백제
한국 이름
한글온조 어라하
한자溫祚 於羅瑕
로마자 표기Onjo Eoraha
일본어 가나온조왕 (おんそおう)
일본어 가타카나온조왕 (オンジョワン)
일본어 로마자Onjo-wang

2. 탄생과 가계

온조왕의 탄생과 가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전해진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동명성왕(주몽)의 아들이라는 설과 북부여 우태의 아들이라는 설이 함께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는 《고전기(古典記)》를 인용하여 온조를 동명성왕의 셋째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동국통감》을 비롯한 대부분의 역사서는 온조를 동명성왕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다.

온조의 출생 연도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복 형인 유리명왕과 친형인 비류가 있으므로 적어도 기원전 36년 이후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에 인용된 내용을 바탕으로 온조왕의 가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구분내용
의붓아버지동명성왕(주몽) (기원전 58년~기원전 19년)
친아버지 (추정)우태 (생몰년 미상)
어머니소서노 (기원전 66년~기원전 6년)
비류 (? ~기원전 18년)
왕비미상
장남다루왕 (?~77년) - 제2대 국왕[22]
아들덕좌[23] - 모친 미상



한편, 온조의 어머니인 소서노동명성왕보다 8살이나 연상인 점[16]을 미루어 볼 때, 소서노가 주몽과 재혼했을 것이라는 《삼국사기》의 기록도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는다.

2. 1. 삼국사기의 기록

삼국사기》는 온조왕의 부모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을 전하고 있다. 대표적인 설은 고구려 동명성왕(주몽)의 아들이라는 설과 북부여 우태의 아들이라는 설이다.

온조왕의 출생 연도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복 형인 유리명왕과 친형인 비류가 있으므로 적어도 기원전 36년 이후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몽은 북부여에서 탈출하여 고구려를 세울 당시, 임신 중이었던 아내 예씨 부인과 헤어졌다가, 이후 졸본부여 왕의 둘째 딸인 소서노와 결혼하여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17] 기원전 19년 4월, 예씨 부인에게서 태어난 이복 형 유리(유리명왕)가 고구려로 오자, 주몽은 유리를 태자로 책봉하였다.[18] 유리가 왕이 되면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울 것이라 여긴 온조는 형, 어머니와 함께 남쪽으로 떠났다.[17]

북사》와 《수서》에는 동명성왕의 후손인 구태(句臺)가 인덕이 두터워 처음 나라를 세울 때, 한나라 요동 태수 공손도가 딸을 시집보냈고, 이후 동이(東夷)의 강국이 되었다고 전한다. 어느 기록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백제의 시조에 대해서는 적어도 세 가지 다른 계보가 전해지고 있으나, 모두 부여와 관련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또한, 후에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계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 시조를 동명성왕(주몽)으로 여겼다는 기록도 있다.

2. 1. 1. 고구려 동명성왕의 아들 설

삼국사기》에는 온조가 고구려 동명성왕의 아들이라는 기록과 함께, '일설에는 북부여 우태의 아들이라고도 한다'는 내용도 있다.[3]삼국유사》는 《고전기(古典記)》를 인용하여 온조를 동명성왕의 셋째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고,[4]동국통감》을 비롯한 대부분의 역사서는 온조를 동명성왕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다. 다른 설로는 온조가 어머니의 첫 번째 남편인 우태의 아들이라는 것이 있다.[5]

'''북부여왕 우태의 아들 설'''

《삼국사기》의 이설에 따르면, 북부여 왕 해부루왕의 손자 우태연타발의 딸 소서노와 혼인하여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 우태가 죽은 후 소서노는 과부가 되었다. 주몽(동명성왕)은 고구려 건국 과정에서 소서노의 내조를 많이 받았기 때문에 그녀를 왕비로 책봉하고, 비류와 온조를 친아들처럼 아꼈다.

《고기(古記)》에 따르면, 천제(天帝)가 흘승골성(訖升骨城)에 강림하여 도읍을 정하고 북부여를 건국하여 스스로 해모수(解慕漱)라 칭하고 해(解)를 성으로 삼았다. 이후 도읍을 동부여로 옮겼다. 그 후, 동명제(東明帝)가 북부여를 계승하여 졸본부여를 건국하였고, 곧 고구려의 시조가 되었다.[9]

2. 1. 2. 북부여 왕 우태의 아들 설

삼국사기》는 온조를 고구려 동명성왕의 아들로 기록하면서, '일설에는 북부여 우태의 아들이라고도 한다'라는 내용도 함께 기록하였다. 온조를 우태의 아들로 볼 경우, 출생 연도는 더욱더 추정하기 어렵다. 온조의 어머니인 소서노동명성왕보다 8살이나 연상인 점[16]을 고려하면, 소서노가 주몽과 재혼했을 것이라는 《삼국사기》의 기록도 설득력이 있다.

어떤 책에서는 백제의 시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백제의 시조는 비류왕이며, 그의 아버지는 우대(優台, 우태)라 하는데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다. 어머니의 이름은 소서노(召西奴, 소소노)라 하는데, 졸본부여 연타발의 딸이며, 처음에는 우대에게 시집가서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을 낳았다. 우대가 죽은 후 소서노는 졸본에서 홀로 살고 있었는데, 주몽이 고구려국을 세운 후 소서노를 불러들여 왕비로 삼았다.

2. 2. 중국 및 일본의 기록

중국과 일본의 역사 기록에는 백제의 기원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 '''중국 측 기록'''

북사》, 《수서: 동명성왕의 후손 구태대방군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전한의 요동태수 공손도가 딸을 구태에게 시집보내 백제가 강국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주서: 백제가 마한의 속국이자 부여의 별종이며, 구태대방군에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또한, 백제인들이 매년 4월에 시조 구태의 사당에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일본 측 기록'''

속일본기: 동명성왕을 십제(백제)의 먼 조상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하백의 딸이 태양의 정기에 감응하여 태어났다고 한다.
신찬성씨록》, 《일본서기: 십제(백제)의 시조를 도모로 기록하고 있다.
다카노노 니가사 묘지명: 백제 무령왕의 후손인 다카노노 니가사는 자신의 묘지명에 백제의 먼 조상인 도모왕하백의 딸이 태양의 정기에 감응해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기록하여, 백제가 동명성왕을 시조로 여겼음을 보여준다.[19]

이처럼 중국과 일본의 기록에는 백제의 시조에 대해 구태도모(동명) 두 가지 계통이 나타난다.

3. 백제 건국 과정

고구려에서 주몽(동명성왕)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온 비류온조는 한산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려 했으나, 형제간에 의견이 갈렸다.

온조한강 유역의 위례성을 도읍으로 정하고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로 지었다. 비류미추홀로 이주하였으나, 그곳의 땅은 습하고 물이 짜서 살기 어려웠다. 비류위례성 백성들이 편안히 사는 모습을 보고 후회하며 죽었고, 온조비류의 신하와 백성을 받아들여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로 고쳤다.[17]

 溫祚始至 帶方, 百姓樂從, 遂定國號曰百濟. 其祖與高句麗同出夫餘, 故以夫餘爲氏.| 온조가 처음 올 때 백성이 즐겨 따라왔기 때문에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로 고쳤다. 온조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扶餘)로 하였다.중국어

: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제1, 시조 온조왕

고려 무신정권기의 승려 각훈은 《해동고승전》에서 《기로기(耆老記)》를 인용하여 비류온조가 힘을 합쳐 나라를 세웠다고 기록했다. 충렬왕 때 승려 이승휴는 《제왕운기》에서 형인 비류[20]가 나라를 세웠으나 5개월 만에 죽었다고 기록했다.

한편, 백제 시조에 대한 다른 설에 따르면, 시조는 비류왕이며, 아버지는 우태(優台),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이다. 소서노는 졸본부여 연타발(延陀勃)의 딸로, 우태에게 시집가 비류온조를 낳았다. 우태 사후 소서노졸본에서 홀로 살았는데,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고 소서노를 왕비로 삼았다. 그러나 주몽이 부여에서 낳은 아들 해유류(유리명왕)가 태자가 되자, 비류온조와 함께 고구려를 떠나 패수(대동강)·대수(한강)를 건너 미추홀에 정착하였다.

북사(北史)》와 《수서(隋書)》에는 동명왕의 후손 구태(句臺)가 한나라 요동 태수 공손도(公孫度)의 사위가 되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고 전한다.

3. 1. 삼국사기의 기록

기원전 18년, 온조왕은 한강 유역의 위례성을 도읍으로 정하고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로 지었다. 비류는 온조와 뜻이 맞지 않아 미추홀로 갔으나, 그곳의 땅은 습하고 물이 짜서 살기 어려웠다. 비류는 위례성 백성들이 편안히 사는 모습을 보고 후회하며 죽었고,[17] 온조는 비류의 신하와 백성을 받아들여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로 고쳤다.

 溫祚始至 帶方, 百姓樂從, 遂定國號曰百濟. 其祖與高句麗同出夫餘, 故以夫餘爲氏.| 온조가 처음 올 때 백성이 즐겨 따라왔기 때문에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로 고쳤다. 온조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扶餘)로 하였다.중국어

: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제1, 시조 온조왕

동명성왕은 유리, 비류, 온조 세 아들을 두었다. 동부여에서 태어난 유리가 고구려로 와 왕위를 잇게 되자, 비류와 온조는 남쪽으로 내려가 각자 나라를 세웠다.[6] 비류가 죽은 후 백성들은 온조에게 합류했고, 온조는 나라 이름을 백제로 바꾸었다. 이후 백제의 수도는 북쪽의 말갈과 동쪽의 낙랑 때문에 하북 위례성에서 남쪽으로 옮겨졌다.[6] 이 두 수도는 모두 오늘날 서울 지역에 있었다.

기원전 13년기원전 8년, 말갈이 북쪽에서 침입했으나, 온조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물리쳤다. 기원전 5년, 온조는 한강 남쪽의 하남 위례성으로 수도를 옮기고, 마한 왕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6]

당시 온조는 마한과 진한을 정복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기원전 7년에 전쟁 준비를 마치고, 기원전 8년에 공격을 시작했다. 그는 숲에서 사냥을 한다는 핑계로 군대를 국경 너머로 은밀히 이동시켜, 두 성채를 제외한 마한 지역을 정복했다.[6][7] 항복한 마한 백성들에게는 자비를 베풀었으나, 마한 왕은 자결하고 온조에게 백성들을 잘 부탁한다는 편지를 남겼다. 온조는 마한 왕의 유언을 존중했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백제가 마한의 목지국을 정복한 것은 3세기 중반 이후의 일로, 이는 후대의 사건을 건국 설화에 포함시킨 것으로 보인다.

백제는 영토를 크게 넓혔고, 매년 여러 성채를 건설했다. 16년까지 8년간 평화가 이어졌으나, 마한 장수가 반란을 일으켰다. 온조는 직접 5,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진압했다. 22년에는 말갈이 다시 침입했으나, 온조와 그의 군대에 의해 격퇴되었다.[6][7]

백제 시조는 온조왕이다. 주몽(동명성왕)이 북부여에서 졸본부여로 피신했을 때, 부여 왕은 주몽을 사위로 삼았다. 주몽은 왕위를 이어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아들이 비류, 둘째가 온조였다. 주몽이 북부여에서 낳은 아들이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오간, 마려 등 열 명의 신하와 백성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한산(漢山)에서 비류는 해변에 정착하려 했으나, 신하들은 "강 남쪽 땅은 천혜의 요새"라며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할 것을 주장했다. 비류는 미추홀(彌鄒忽)로 갔고, 온조는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십제(十弟)라 했다. 이는 전한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의 일이다. 비류는 미추홀의 환경이 좋지 않자 위례로 돌아와 백성들이 평안히 사는 모습을 보고 후회하며 죽었다. 이후 백성들이 따르자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로 고쳤다. 백제와 고구려부여에서 나왔으므로 부여(夫餘) 성을 사용했다.

다른 설에 따르면, 시조는 비류왕이며, 아버지는 우태(優台),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이다. 소서노는 우태와 결혼해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 우태 사후 소서노는 졸본에서 살았는데,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고 소서노를 왕비로 맞이했다. 주몽은 소서노의 도움에 감사하며 비류 등을 친자식처럼 대했다. 그러나 주몽이 부여에서 낳은 유류(遊留)가 태자가 되자, 비류는 온조와 함께 패수(浿水)와 대수(大水)를 건너 미추홀에 정착했다.

북사(北史)》와 《수서(隋書)》에는 동명왕의 후손 구태(句臺)가 한나라 요동(遼東) 태수 공손도(公孫度)의 사위가 되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고 전한다.

어느 기록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연도사건
기원전 18년봄 5월, 동명왕의 궁궐이 세워짐.
기원전 17년봄 1월, 왕이 군사 정비와 양식 비축을 명함. 3월, 을음(乙音)을 우장군(右將軍)으로 삼음.
기원전 16년가을 9월, 모헤의 침입을 왕이 정예병으로 격퇴. 겨울 10월, 벼락과 복숭아, 자두꽃 개화.
기원전 15년봄과 여름에 가뭄, 기근, 전염병 발생. 가을 8월, 낙랑(樂浪)에 사신 파견.
기원전 14년겨울 10월, 왕이 북쪽 지역 순시 중 신령스러운 사슴 획득.
기원전 13년가을 7월 마지막 날(辛未晦), 일식.
기원전 11년봄 2월, 모헤 3천 명이 위례성 포위, 식량 부족으로 퇴각. 왕이 추격하여 500명 이상 살상. 가을 7월, 마수성(麻需城) 축조, 병산(丙山)에 성벽 축조. 낙랑 태수의 항의에 요충지 건설은 통상적인 일이라 답하여 평화 관계 파기.
기원전 9년가을 9월, 왕이 사냥하여 얻은 신령스러운 사슴을 마한(馬韓)에 보냄. 겨울 10월, 모헤의 침입을 곤미수(昆彌水) 강가에서 격퇴, 청복산(靑福山)에 주둔. 왕이 봉현(鳳?)에서 지원하여 격퇴.
기원전 8년여름 4월, 낙랑이 모헤를 시켜 병산 성벽 공격, 100명 이상 살상. 가을 7월, 독산(禿山)과 구천(九川)에 쌍성 축조, 낙랑 가는 길 차단.
기원전 6년봄 2월, 왕궁에서 노파가 남자로 변하고 호랑이 다섯 마리가 성에 침입. 왕모 61세로 사망. 여름 5월, 왕이 천도 결심, 한강 남쪽을 도읍으로 결정. 가을 7월, 취한산(鷲?) 기슭에 성벽 쌓고 위례성 가구 이전. 8월, 마한에 천도 알리고 국경 확정. 9월, 성 축조.
기원전 5년봄 1월, 천도. 2월, 왕이 마을 순시, 농업 장려. 가을 7월, 한강 북서쪽에 성 쌓고 한성(漢城) 백성 이주.
기원전 4년봄 1월, 검소한 새 궁궐 건축. 왕모 추모.
기원전 1년겨울 10월, 모헤의 매복 공격을 칠중하(七?)에서 격퇴. 11월, 우두산(牛頭山) 성 공격 시도, 큰 눈으로 회군.
서기 1년봄 2월, 왕이 큰 제단에서 하늘에 제사. 기이한 새 다섯 마리 비행.
서기 3년가을 8월, 석두성(石?)과 고복성(古?) 축조. 9월, 왕이 보병과 기병 1천 명으로 요동(遼東) 여산현(?)에서 모헤 격퇴. 포로는 장교들에게 분배.
서기 5년가을 7월, 웅천(雄川) 성벽 축조. 마한 왕의 항의에 성벽 철거.
서기 6년봄 2월, 궁궐 우물 범람, 한성 민가에서 머리 하나 몸통 둘 송아지 출생. 점쟁이의 길조 해석에 왕이 진한(辰韓)과 마한 병합 결심.
서기 7년가을 7월, 왕이 마한 병합 결심. 겨울 10월, 마한 침공. 원산(圓山)과 금현성(金?)만 함락 실패.
서기 8년여름 4월, 두 성 함락. 백성들은 한산 북쪽으로 이주. 마한 멸망. 가을 7월, 대두산성(大頭山) 축조.
서기 9년봄 2월, 왕자 다루(多婁)를 태자로 삼고 군사 담당. 여름 4월, 서리 피해.
서기 12년봄 1월, 가구를 북쪽과 남쪽으로 나눔. 여름 4월, 우박. 5월, 지진. 6월, 지진.
서기 14년봄, 여름 가뭄, 백성 기근, 도적 성행. 왕이 백성 위로. 가을 8월, 동, 서 지역 설치.
서기 15년겨울 10월, 마한 노장(老將) 주근(朱?)의 우곡성(牛谷) 반란, 왕이 직접 진압, 주근 자결.
서기 17년가을 7월, 당정성(唐井) 축조, 대두산성 백성 이주. 8월, 읍약산(?)과 금현성 수리, 고사부리성(古沙?) 축조.
서기 18년봄 3월, 큰 우박. 여름 4월, 가뭄, 6월까지 지속. 한강 동북쪽 마을 기근, 1천 호 이상 고구려로 이탈. 패수와 대수 사이 무인지경.
서기 19년봄 2월, 왕이 백성 위로 순시. 3월, 농사와 양잠 장려, 민원 처리. 겨울 10월, 하늘에 제사.
서기 22년가을 9월, 모헤의 설천(?) 성 공격. 겨울 11월, 부현성(夫?) 재공격, 100명 이상 살상, 약탈. 왕이 정예 기병 200명으로 격퇴.
서기 24년봄 1월, 을음 사망, 가뢰(加?)를 우장군으로 임명. 2월, 한강 동북쪽 15세 이상 남자 위례성 수리 동원.
서기 25년가을 8월, 왕이 아산(牙山)에서 5일간 사냥. 9월, 기러기 100마리 이상 왕궁에 모임. 점쟁이의 길조 해석. 겨울 10월, 옥저(沃沮) 구파해(仇波解) 등 20가구 부양(扶?)에 항복, 한산 서쪽 거주.
서기 27년봄, 여름 가뭄. 겨울 10월, 지진.
서기 28년봄 2월, 온조왕 사망.



온조의 아버지는 추모(동명성왕) 또는 주몽(고구려의 시조)이다. 북부여에서 탈출하여 졸본부여(요령성본계시환인만족자치현)에 이르렀다. 부여왕은 주몽을 사위로 삼았다. 주몽은 왕위를 이어 두 아들(비류(沸流)와 온조)을 낳았다. 주몽이 부여에서 낳은 아들(고구려 제2대 유리왕)이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우간, 마리 등 10명의 신하와 백성을 이끌고 남쪽으로 갔다. 한산(경기도광주시)에서 비류는 해변에 살고 싶어 했으나, 10명의 신하는 위례성(경기도화성시)이 도읍으로 적합하다고 간했다. 비류는 미추홀(인천광역시)에 나라를 세웠고, 온조는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10명의 신하의 도움을 받아 국호를 “십제”라고 하였다. 이는 전한 홍가 3년(기원전 18년)의 일이다. 비류는 미추홀의 환경이 좋지 않자 위례성에 귀순하고 백성을 받아들였으므로, 국호를 “백제”로 고쳤다. 계보가 부여에 이어지므로 씨족의 이름을 부여라고 하였다.

백제 시조에 대한 다른 설에 따르면, 시조는 비류왕이며, 아버지는 우태(優台, 우테),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 소소노)이다. 소서노는 졸본부여 연타발(延陀勃, 연타발)의 딸이며, 우태에게 시집가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 우태 사후 소서노는 졸본에서 홀로 살았는데,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고 소서노를 왕비로 삼았다. 주몽은 소서노의 공을 생각해 비류 등을 친자식처럼 대우했다. 그러나 주몽이 부여에서 낳은 아들 해유류(유리명왕)가 태자가 되자, 비류는 온조와 함께 고구려를 떠나 패수( 대동강)·대수( 한강)를 건너 미추홀에 정착하였다.

3. 2. 제왕운기와 해동고승전의 기록

고려 무신정권기의 승려인 각훈의 《해동고승전》에는 《기로기(耆老記)》의 내용을 인용하여 비류와 온조가 힘을 합쳐 나라를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6] 충렬왕 때의 승려인 이승휴의 《제왕운기》에는 형인 비류[20]가 나라를 세워 왕이 되었으나 5개월 만에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4. 치세

온조왕은 기원전 16년부터 22년까지 말갈로부터 7회에 걸쳐 침략을 받았으나 모두 격퇴하였다. 특히 기원전 1년에는 말갈 추장 소무를 사로잡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서기 8년부터 서기 9년에는 마한을 기습 공격하여 멸망시켰고, 서기 16년 마한의 옛 장수가 반란을 일으키자 직접 토벌하여 진압하였다.

기원전 15년 낙랑군과 국교를 맺었으나, 기원전 11년 국방을 위한 성곽 축조 문제로 관계가 악화되었다. 기원전 5년에는 수도를 한수 남쪽으로 옮기고 한수의 북서쪽에 성곽을 쌓았다. 기원전 2년에는 낙랑의 침공으로 위례성이 불타는 피해를 입기도 했다.

온조왕 대 백제의 영역은 북쪽으로는 패수, 동쪽으로는 주양, 서쪽으로는 황해에 이르렀다. 재위 46년 만인 28년 2월에 사망하였으며, 『삼국사기』에는 , 시호, 매장지에 대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다.

4. 1. 대외 관계

온조왕 대의 대외 관계는 크게 말갈, 낙랑, 마한과의 관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기원전 14년(온조왕 5년)에는 북쪽 국경을 순찰하고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건국 초부터 동북쪽에 접한 말갈에 대한 방어 의식이 강하여 성곽을 쌓고 이에 대비하였다. 기원전 15년(온조왕 4년)에 낙랑군에 사자를 보내 국교를 열었으나, 방비를 위한 성곽을 쌓은 것을 꾸짖음을 받고, 기원전 11년(온조왕 8년) 7월에는 화친이 깨졌다.

이처럼 북방·동북방의 국방의 관점에서, 기원전 5년(온조왕 14년)에는 수도를 한수의 남쪽으로 옮겼고, 한수의 북서쪽에 성곽을 쌓았다. 기원전 2년(온조왕 17년)에는 낙랑군의 침공을 받아 옛 수도인 위례성이 불타 없어졌다.

온조왕의 일대를 통틀어 그 영역은 북쪽은 패수(청천강), 동쪽은 주양(강원도춘천시), 서쪽은 황해에 이르렀다(남쪽은 미상).

4. 1. 1. 말갈 및 낙랑과의 전쟁

기원전 17년(온조왕 2년), 온조왕은 말갈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무기를 수선하고 양식을 비축하는 등 방어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듬해 9월에 말갈이 북쪽 국경을 침범하자 날쌘 병사를 이끌고 공격하여 크게 이겼다.[17]

기원전 11년(온조왕 8년) 2월, 말갈군 3천 명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포위하였다. 열흘 후 군량미 부족으로 말갈군이 회군할 때 추격하여 대부현에서 크게 이기고 500여 명을 사로잡았다. 같은 해 7월, 마수성을 쌓고 목책을 설치한 일로 낙랑과 갈등하였는데, 낙랑 태수가 성과 목책을 허물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온조왕은 '요새를 만들어 나라를 지키는 일은 당연한 일'이라며 거절하였다. 이 일로 낙랑과 백제의 관계는 악화되었다.[17]

기원전 9년(온조왕 10년) 10월, 말갈이 북쪽 국경을 침범하여 곤미천에서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온조왕이 직접 정예기병 100명을 이끌고 병사들을 구원하니 말갈군이 곧 물러났다. 다음 해인 기원전 8년(온조왕 11년)에는 낙랑이 말갈을 시켜 백제를 습격하였다. 말갈군은 병산의 목책을 부수고 노략질하였다. 이에 백제는 독산과 구천에 목책을 설치하여 낙랑과의 통로를 차단하였다.[17]

기원전 2년(온조왕 17년), 낙랑이 위례성에 쳐들어와 불을 질렀다. 다음 해인 기원전 1년(온조왕 16년) 10월에는 말갈이 습격하자 병사들을 거느리고 칠중하에서 물리쳤다. 다음 달인 11월, 이를 설욕하기 위해 말갈의 우두산성을 공격하려고 출병하였으나 폭설로 인해 회군하였다.[17]

22년(온조왕 40년) 9월, 말갈이 술천성을 공격하였고, 11월에는 부현성을 습격하여 백성 100명을 죽이고 노략질하자 기병 200명을 보내 물리쳤다.[6]

4. 1. 2. 마한과의 관계

연맹왕국인 마한은 본래 백제와 우호적인 관계였다. 온조왕은 사냥터에서 잡은 신록(神鹿)을 마한에 보내기도 하였고, 도읍을 옮길 때에는 마한에 통보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6년(온조왕 24년), 백제가 웅천에 목책을 세우자 마한 왕이 사신을 보내 책망하였다. 마한 왕은 온조왕이 처음에 남쪽으로 건너왔을 때 동북쪽 1백 리의 땅을 주어 편안하게 살게 하였는데, 나라가 튼튼해지자 성을 쌓고 목책을 세운다며 온조왕을 비난하였다. 이에 온조왕은 부끄러워하며 목책을 헐어버렸다.[6]

7년(온조왕 25년), 온조왕은 진한마한을 합병할 마음을 품고, 8년(온조왕 26년) 7월에 마한을 습격하였다. 이때 원산(圓山)과 금현(錦峴) 두 성이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다. 다음 해인 9년(온조왕 27년) 4월, 원산과 금현 두 성이 항복함으로써 마침내 마한을 멸망시켰다.[17] 16년(온조왕 34년)에는 마한의 옛 장수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온조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진압하였다.[6]

그러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마한 멸망 후 113년이 지난 122년, 고구려태조대왕마한, 예맥과 함께 요동을 침입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온조왕에 의해 마한이 멸망했다는 기록과 상충된다. 《삼국사기》를 집필한 김부식 조차 주석을 남겨 의문을 제기하였다.[21]

최근 연구에 따르면 백제는 3세기 중반 이후에야 마한의 목지국을 정복했으며, 이는 후대의 사건을 건국 시기에 관한 글로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4. 2. 내치

기원전 18년(온조왕 원년), 아버지 동명성왕의 사당을 세웠으며 기원전 2년에는 어머니 소서노의 사당을 세웠다.[17]

기원전 6년(온조왕 13년), 위례성의 민가를 옮겼으며 다음해인 기원전 5년(온조왕 14년) 정월에 천도하였다. 온조왕은 부락을 순시하면서 백성들을 위로하고 농사를 권장하였으며, 한강 서북쪽에 성을 쌓고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였다.[17]

10년(온조왕 28년) 2월, 맏아들 다루를 태자로 삼고 중앙과 지방의 병무를 맡겼다.[17]

15년(온조왕 33년), 가뭄이 극심하여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을 지경에 이르고, 도적이 크게 일어나자 온조왕은 이를 안정시켰다. 19년(온조왕 37년)에는 한수 동북 마을에 흉년이 들자, 1천여 호의 백성들이 고구려로 도망갔다. 나라의 상황이 악화되자 20년(온조왕 38년), 온조왕은 나라 곳곳을 순시하여 백성들을 살피며 위로하였다. 사자를 보내 백성들에게 농업과 양잠을 권장하였으며, 제단을 쌓아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냈다.[17]

25년(온조왕 43년), 남옥저의 구파해(仇頗解) 등 20여 가족이 귀순하였다.[17]

5. 최후

28년에 사망하였다.[17] 온조는 재위 46년째 되던 해에 사망하였다. 그는 그의 장남인 다루에게 왕위를 계승하였다. 온조는 678년 동안 31명의 군주가 통치하는 강력한 왕조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6.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의붓아버지동명성왕기원전 58년~기원전 19년
친아버지우태생몰년 미상
어머니소서노기원전 66년~기원전 6년
비류? ~ 기원전 18년
왕비미상
장남다루왕?~77년, 제2대 국왕[22]
아들덕좌모친 미상[23]


참조

[1] 서적 Samguk Yusa: Legends and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of Ancient Korea Silk Pagoda 2006
[2] 서적 State Formation in Korea: Emerging Elites Routledge 2013
[3] 서적 The Rough Guide to Seoul Penguin 2011
[4] 서적 Land and Life: A Historical Geographical Exploration of Korea Jain Publishing Company 2005
[5] 간행물 Samguk sagi
[6] 서적 A History of Korea: From "Land of the Morning Calm" to States in Conflict Indiana University Press 2012
[7] 서적 Historical Origins of Korean Politics 2005
[8] 웹사이트 http://contents.nahf[...]
[9] 웹사이트 삼국유사, 삼국사기 https://terms.naver.[...]
[10] 서적 삼국유사
[11] 간행물 삼국사기
[12] 간행물 해동고승전
[13] 간행물 고구려 건국 신화 및 온조왕과 유리왕의 관계
[14] 간행물 신찬성씨록 좌경제번
[15] 기타 의붓형
[16] 간행물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제1 시조 온조왕 기원전 6년
[17] 간행물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제1 시조 온조왕
[18] 간행물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 제1 시조 동명성왕 기원전 19년
[19] 뉴스 [시론] 日王발언과 한.일 관계 https://news.naver.c[...]
[20] 간행물 제왕운기
[21] 간행물 삼국사기 권15 고구려본기 제3 태조대왕
[22] 간행물 삼국유사 왕력편
[23] 간행물 신찬성씨록 좌경제번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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