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요제파 폰 바이에른 공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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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리아 요제파 폰 바이에른 공녀는 1739년 바이에른에서 태어나 신성 로마 황제 요제프 2세와 결혼했다. 그녀는 요제프 2세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의 압력으로 결혼했지만, 남편의 냉담한 태도와 외모에 대한 불만으로 고통받았다. 결혼 2년 만에 천연두로 사망했으며, 남편은 그녀의 죽음을 후회했다. 그녀는 1778-1779년 바이에른 왕위 계승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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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요제파 폰 바이에른 공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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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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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신성 로마 황후 |
배우자 | 요제프 2세 |
전체 이름 | 마리아 요제파 안토니아 발부르가 펠리치타스 레굴라 |
가문 | 비텔스바흐 가문 |
아버지 | 카를 7세 |
어머니 | 마리아 아말리아 폰 외스터라이히 |
출생일 | 1739년 3월 20일 |
출생지 | 뮌헨, 바이에른 |
사망일 | 1767년 5월 28일 |
사망지 | 쇤브룬 궁전, 빈, 오스트리아 |
매장지 | 임페리얼 크립트 |
결혼 | |
배우자 | 요제프 2세, 1765년 |
결혼 장소 | 쇤브룬 궁전 |
재위 | |
신성 로마 황후 | 1765년 8월 18일 – 1767년 5월 28일 |
2. 가족 및 초기 생애
마리아 요제파는 1739년 3월 20일 뮌헨 바이에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당시 바이에른 선제후였고 후에 신성 로마 황제가 되는 카를 알브레히트이며, 어머니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대공녀인 마리아 아말리아이다. 그녀는 부모의 일곱 번째이자 막내딸이었다.
외조부모는 신성 로마 황제 요제프 1세와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빌헬미나 아말리아였고, 친조부모는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의 딸인 테레자 쿠네군다 소비에스카였다. 마리아 요제파의 어머니 마리아 아말리아 대공녀는 그녀의 미래 시어머니가 될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와 사촌 관계였으며, 따라서 마리아 요제파는 미래의 남편이 될 요제프 2세와도 6촌 관계였다.
마리아 요제파의 어머니는 총 일곱 명의 자녀를 낳았으나, 성인으로 성장한 자녀는 네 명뿐이었다. 마리아 요제파의 형제자매로는 오빠인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와 두 언니, 작센 선제후비가 된 마리아 안토니아와 바덴-바덴 변경백 부인이 된 마리아 안나 요제파가 있었다.
3. 결혼과 통치
마리아 요제파는 1765년 1월 13일, 바이에른 뮌헨에서 사촌이자 로마 왕이었던 요제프와 대리 결혼을 했다. 요제프는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들이자 상속자였다. 마리아 요제파가 뮌헨을 떠나 빈에 도착했을 때, 남편이 될 요제프나 그를 맞이한 수행원들은 겉으로는 새 신부에 대해 불만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와 요제프는 1765년 1월 25일 빈의 쇤브룬 궁전에서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이 결혼은 요제프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가 후계자를 얻기 위해 강하게 추진한 정략결혼이었으며, 요제프는 첫 아내 파르마의 이사벨라를 잃은 슬픔 때문에 마지못해 결혼에 응했다.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않았고, 요제프는 마리아 요제파에게 냉담하게 대했다.
결혼한 지 약 7개월 후인 1765년 8월 18일, 시아버지인 프란츠 1세가 사망하면서 남편 요제프가 황제 자리에 올랐고, 마리아 요제파 또한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가 되었다. 그러나 제국의 실권과 빈 궁정에서의 영향력은 여전히 시어머니인 황태후 마리아 테레지아가 장악하고 있었다. 마리아 요제파를 유일하게 따뜻하게 대했던 시아버지 프란츠 1세가 사망한 후, 그녀는 궁정 내에서 실질적인 지지 기반을 잃었다. 결혼 생활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1767년, 마리아 요제파는 천연두에 걸렸다. 시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녀를 문병했지만, 남편 요제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결국 마리아 요제파는 1767년 5월 28일 천연두로 사망했다. 요제프는 그녀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신은 빈의 카푸친 황실 묘소에 안장되었다. 요제프는 이후 재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며, 이로 인해 합스부르크 왕가의 다음 후계자는 그의 동생인 토스카나 대공 레오폴트로 여겨지게 되었다.
3. 1. 자녀 문제와 갈등
마리아 요제파와 요제프 2세의 결혼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이 결혼은 아들이 왕위를 이을 후계자를 낳기를 원했던 시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의 압력으로 성사되었다. 요제프는 첫 번째 아내 파르마의 이사벨라를 깊이 사랑했으며, 그녀가 죽은 후 재혼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요제프는 마리아 요제파의 외모에 대해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냈다. 그는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스물다섯 살이고, 천연두를 앓은 적이 없지만... 체형은 작고 통통하며 매력이 전혀 없다. 얼굴은 얼룩과 뾰루지로 덮여 있고, 이는 끔찍하다."라고 묘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우니츠 공작은 바이에른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이 결혼을 추진했다.
결혼 초, 요제프는 새 아내와 공통점이 없다고 인정하면서도, 그녀의 성품에 대해서는 "흠 잡을 데 없는 여자"이며 자신을 사랑한다고 평가했다. 그는 그녀의 좋은 점을 인정하지만 사랑할 수 없어 고통스럽다고 토로하며, 다정한 남편이 될 수는 없어도 친구로서 배려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요제프는 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내에게 완전한 냉담함을 넘어선 태도를 보였다. 그녀의 적들조차 마리아 요제파가 상냥하고 순종적이며 친절하다고 인정했지만, 이해력이 부족하고 교양이 부족하다는 평가도 있었다.[2]
요제프의 차가운 태도는 궁정 내에서도 알려졌다. 그의 여동생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내가 그의 아내였고 그렇게 학대받았다면, 쇤브룬궁 나무에 목을 맸을 것"이라고 쓸 정도였다. 마리아 요제파는 남편을 열렬히 사랑했지만, 그의 무관심과 냉대에 깊은 상처를 받았다. 온순하고 소심했던 그녀는 자신의 열등감을 의식하며 남편 앞에서 떨고 창백해지곤 했다.[3] 유일하게 그녀를 감싸주었던 시아버지 프란츠 1세가 결혼 직후 사망하면서, 궁정 내에서 그녀를 지지해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프란츠 1세 사후 마리아 요제파는 제국의 황후가 되었으나, 실질적인 권력은 여전히 시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있었다.
두 사람의 짧은 결혼 생활 동안 자녀는 없었다. 결혼 2년 동안 마리아 요제파의 건강 상태 변화로 임신에 대한 추측이 있었으나, 요제프는 동생 레오폴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황후[마리아 요제파]는 약간의 부기도 없이 임신했을 수 있다.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고, 독신 남편으로서 내가 누리는 행복한 삶으로 위안을 받는다."라며 회의적이고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다른 편지에서 "나는 거의 독신으로 살고 있고... 아내를 식탁에서만 보고 침대에서만 그녀를 만난다."라고 쓰기도 했다. 이러한 부부 관계의 어려움은 주변에도 영향을 미쳐, 마리아 요제파의 가정부인이 더 이상 상황을 견딜 수 없다며 사임하는 일도 있었다. 젊은 황후가 하인들에게 자신의 어려움을 토로하면서 상황이 더욱 악화된 것으로 보인다.
4. 죽음
1767년 5월 28일, 결혼한 지 2년 만에 마리아 요제파는 천연두에 걸려 사망했다. 이는 그녀의 남편 요제프 2세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이사벨라와 같은 병이었다. 젊은 황후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궁정은 슬픔에 잠겼다.
마리아 요제파가 병상에 있을 때, 남편 요제프 2세는 그녀를 찾아가지 않았으나, 시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며느리를 문병했다. 이 과정에서 마리아 테레지아 역시 천연두에 감염되었지만 다행히 회복할 수 있었다.
요제프 2세는 아내의 사망 소식을 듣고 나서야 측근들에게 그녀에게 보였던 냉담함에 대해 후회하는 듯한 말을 남겼다. 그는 처제인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토니아 여공작에게 마리아 요제파가 "여러 면에서 존경받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비엔나의 황실 묘소에 안장된 아내의 장례식에는 끝내 참석하지 않았다.[4] 요제프 2세는 이후 다시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실제로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이로 인해 합스부르크 왕가의 다음 황위 계승자는 동생인 토스카나 대공 레오폴트로 정해졌다.
사랑받지 못했던 황후 마리아 요제파는 죽은 뒤에도 남편의 정치적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1778년부터 1779년까지 요제프 2세는 바이에른 영토의 상당 부분을 요구했는데, 그 근거 중 하나로 바이에른 출신인 마리아 요제파와의 결혼을 내세웠다. 이 영토 분쟁은 결국 바이에른 왕위 계승 전쟁으로 이어졌고, 전쟁 끝에 합스부르크 군주국은 인피어텔 지역만을 얻는 데 그쳤다.[5]
5. 가계도
마리아 요제파는 1739년 3월 20일 뮌헨 바이에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카를 알브레히트 바이에른 선제후이며, 어머니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대공녀인 마리아 아말리아이다. 마리아 요제파는 카를 알브레히트와 마리아 아말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일곱 자녀 중 막내였다.
외조부모는 신성 로마 황제 요제프 1세와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빌헬미나 아말리아이며, 친조부모는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의 딸인 테레자 쿠네군다 소비에스카이다.
마리아 요제파의 어머니 마리아 아말리아 대공녀는 그녀의 시어머니가 될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와 사촌 관계였다. 따라서 마리아 요제파는 남편이 될 요제프와도 사촌 관계였다.
마리아 요제파에게는 성인으로 성장한 세 명의 형제자매가 있었다. 오빠는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3세이며, 여동생으로는 마리아 안토니아, 작센 선제후비와 마리아 안나 요제파, 바덴-바덴 변경백 부인가 있다.
세대 | 번호 | 이름 |
---|---|---|
본인 | 1 | 바이에른의 마리아 요제파 |
부모 | 2 | 카를 7세 |
3 | 마리아 아말리아 | |
조부모 | 4 |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 |
5 | 테레사 쿠네군데 소비에스카 | |
6 | 요제프 1세 | |
7 |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빌헬미나 아말리아 | |
증조부모 | 8 | 페르디난트 마리아 |
9 | 사보이의 앙리에트 아델라이드 | |
10 | 얀 3세 소비에스키 | |
11 | 마리 카지미르 루이즈 드 라 그랑주 다르키엥 | |
12 | 레오폴트 1세 | |
13 | 팔츠-노이부르크의 엘레오노레 마그달레네 | |
14 | 요한 프리드리히 | |
15 | 팔라티네이트의 베네딕타 헨리에타 |
참조
[1]
웹사이트
Private Tutor
http://www.infopleas[...]
Infoplease.com
2012-09-16
[2]
서적
Memoirs of the courts of Berlin, Dresden, Warsaw, and Vienna, in the years 1777, 1778, and 1779, Volume 2
A. Strahan, for T. Cadell jun. and W. Davies
[3]
서적
History of the House of Austria,: from the foundation of the Monarchy by Rhodolph of Hapsburgh, to the death of Leopold the Second, 1218 to 1792, Volume 2
Luke Hansard and Sons
[4]
서적
Ungeliebte Königin
Piper
[5]
서적
Die Töchter Maria Theresias
Heyne
[6]
서적
Genealogie ascendante jusqu'au quatrieme degre inclusivement de tous les Rois et Princes de maisons souveraines de l'Europe actuellement vivans
https://books.google[...]
Frederic Guillaume Birnsti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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