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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마 피아첸차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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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르마 피아첸차 공국은 1545년 교황 바오로 3세에 의해 파르마와 피아첸차를 중심으로 설립되었다. 파르네세 가문의 통치, 스페인과 오스트리아 왕가의 지배, 나폴레옹의 점령과 마리 루이즈의 통치를 거쳐 1860년 사르데냐 왕국에 병합되어 이탈리아 왕국으로 통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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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마 피아첸차 공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파르마 공국 깃발
깃발 (1545–1731)
파르마 공국 깃발
깃발 (1851–1859)
파르네세 가문의 문장
파르네세 가문의 문장
부르봉-파르마 가문의 문장
부르봉-파르마 가문의 문장
공식 명칭
통칭파르마
표어신이시여, 저를 인도하소서!
로마자 표기Dirige me Domine!
공용어에밀리아-로마냐어
이탈리아어
라틴어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수도파르마
피아첸차
통화파르마 리라
현재 국가이탈리아
지도
1789년의 파르마-피아첸차 공국
파르마-피아첸차 공국 (1789년, 녹색)
1815년의 북부 이탈리아
1815년의 북부 이탈리아
정치
정치 체제절대 군주제
공국
군주 칭호공작
초대 공작피에르 루이지 파르네세
초대 공작 재임 기간1545년–1547년
마지막 공작로베르토 1세
마지막 공작 재임 기간1854년–1859년
역사
존속 기간1545년–1802년 (1808년)
존속 기간21814년–1859년
건국1545년 9월 16일
건국 사건교황 바오로 3세가 피에르 루이지 파르네세에게 공작 작위를 수여
주요 사건엑스라샤펠 조약
주요 사건 날짜1748년 4월 24일
합병프랑스에 할양, 아란후에스 조약 (1801년)
합병 날짜1801년 3월 21일
프랑스 합병프랑스에 의한 공식 합병
프랑스 합병 날짜1808년
복원빈 회의에 의해 복원
복원 날짜1814년 4월 11일
멸망중앙이탈리아 연합주에 할양
멸망 날짜1859년 12월 8일
이전 국가
이전 국가 1교황령
이전 국가 2타로
이전 국가 3구아스탈라 공국
이전 국가 4에트루리아 왕국
이후 국가
이후 국가 1타로
이후 국가 2에트루리아 왕국
이후 국가 3중앙이탈리아 연합주
인구
19세기 추정 인구501,000명

2. 역사

18세기 이탈리아의 파르마 공국 (붉은색)


16세기 파르마 시, 공국의 초기 단계


파르마 공국은 1545년 교황 바오로 3세(알레산드로 파르네세)가 밀라노 공국의 일부였던 포 강 남쪽 지역에 세운 국가이다. 이 지역은 1512년 교황령에 의해 정복되었으며, 파르마 시를 중심으로 바오로 3세의 사생아인 피에르 루이지 파르네세에게 봉토로 주어졌다.[2]

파르네세 가문 출신의 교황 바오로 3세가 아들 피에르 루이지 파르네세에게 교황령의 일부였던 파르마피아첸차를 나누어 세운 것이 시초이다. 1556년, 두 번째 공작인 오타비오 파르네세피아첸차 시를 하사받아 피아첸차 공작이 되었으며, 이후 이 국가는 '''파르마 및 피아첸차 공국'''(Ducato di Parma e Piacenzait)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파르네세 가문은 1731년 남성 혈통이 끊길 때까지 통치를 이어갔다.[1]

1731년 안토니오 파르네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그의 조카 엘리자베타 파르네세를 어머니로 둔 스페인 부르봉 왕가의 카를로스 왕자(후일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3세)가 잠시 공작위에 올랐다.

1733년부터의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 카를로스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령이었던 나폴리 왕국시칠리아 왕국을 얻는 대신, 파르마 공국을 합스부르크 가문에 양도했다. 그 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강화 조약인 1748년 아헨 조약에 의해, 다시 스페인 부르봉 가문의 카를로스 3세의 동생 필리포 디 보르보네에게 공작위가 넘어갔으며, '''필리프 공작'''은 부르봉파르마 가문의 시조가 되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프랑스에 침략당한 후, 1814년에는 나폴레옹의 아내이자 합스부르크 가문 황녀인 마리아 루이자 파르마 여공작에게 공작위가 넘어갔으며, 그녀가 사망한 1847년에 다시 공작위가 부르봉파르마 가문으로 돌아왔다.

1860년, 주민 투표에 의해 사르데냐 왕국으로의 병합이 결정되어 그대로 이탈리아 왕국으로 통일되었다.

2. 1. 파르네세 가문 통치 시기 (1545년 ~ 1731년)

교황 바오로 3세의 사생아였던 피에르 루이지 파르네세가 아버지로부터 파르마피아첸차의 공작으로 임명되어 파르네세 가문의 통치가 시작되었다.[2] 그의 아들 오타비오 파르네세 시대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 페란테 곤차가와 대립하였다.

1556년, 오타비오 파르네세피아첸차 시를 하사받아 피아첸차 공작이 되었으며, 이후 이 국가는 '''파르마 및 피아첸차 공국'''(Ducato di Parma e Piacenzait)으로 알려지게 되었다.[1] 파르네세 가문은 1731년 남성 혈통이 끊길 때까지 통치를 이어갔다.[1]

오타비오 파르네세는 아버지 피에르 루이지 파르네세가 취했던 현명한 조치를 적용하고, 아버지보다 더 온건하게 지역 귀족을 달래는 방식으로 공국을 번영시키고, 백성의 호의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경제, 금융, 상업 교류, 문화 발전을 통해 공국을 통합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으며, 몇몇 봉토를 병합하여 영토를 확장했다. 1573년에는 새로운 수도의 인구가 26,000명으로 크게 증가했다.[3]

스페인 군대의 중요한 장군이었던 알레산드로 파르네세는 펠리페 2세의 강요로 그의 17세 아들 라누치오 1세 파르네세를 섭정으로 임명해야 했다. 펠리페 2세는 유능하고 용감한 장군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3] 알레산드로는 1592년 12월 3일 파르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아르케부스 탄환으로 인한 괴저로 사망했다. 그는 사망 1년 전에 가족의 권력을 확고히 하고, 도시 빈곤층을 중심으로 2,500명의 노동력에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 시타델 요새 건설을 명령했다.[3]

예술과 음악에 열정적이었던 라누치오 1세는 공작 궁정을 이탈리아 음악 예술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이 기간 동안 도시는 필로타 궁전, 두칼레 궁전, 파르네세 극장과 같은 독특한 기념물로 풍성해졌으며, 현대적인 법률이 통과되어 파르마는 생활 방식과 건축 모델 모두에서 탁월한 중심지가 되었고, 다른 중요한 유럽 수도와 같은 수준의 문화 수도로 격상되었다. 그의 통치는 그를 상대로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100명 이상의 파르마 시민을 공개 처형한 죄를 범했다.[4]

1628년 라누치오 1세가 사망하자 공국은 그의 16세 아들 오도아르도에게 넘어갔고, 오도아르도는 같은 해 10월 11일 피렌체에서 15세의 코시모 2세 데 메디치의 딸인 마르게리타 데 메디치와 결혼했다.[4][5]

이 시기는 공국에게 어려운 시기였다. 1630년 끔찍한 역병으로 인구가 줄어든 것 외에도, 새로운 공작은 6,000명의 보병을 유지했으며, 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백성에게 심각한 궁핍을 강요하고 은행가와 상인에게 빚을 졌다. 막대한 비용에도 불구하고 그의 첫 번째 원정은 실패했다. 피아첸차는 스페인 군대에 점령당했고, 그의 군대는 프란체스코 1세 데스테에 의해 파르마 영토에서 패배했으며, 오도아르도는 프랑스와의 동맹을 해체한 후 피아첸차를 철수한다는 내용의 스페인과의 평화 조약을 체결해야 했다.[6]

오도아르도는 1646년 9월 11일 피아첸차에서 34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공국은 그의 아들 라누치오 2세에게 넘어갔고, 2년 동안 섭정은 그의 아내 마르게리타 데 메디치와 그의 삼촌인 프란체스코 마리아 파르네세 추기경이 맡았다.[7]

1691년 파르마 공국은 신성 로마 제국 군대에 침략당했고, 여자와 아이들을 데리고 파르마에 도착한 4천 명의 군인에 의해 약탈당했다. 그들의 유지뿐만 아니라 강간, 학대, 폭력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라누치오 2세는 백성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궁정의 안일한 생활과 금고의 불균형은 정말 놀라웠고, 파르마 궁정에 회전하는 모든 인물들을 유지하기 위해 공작은 모든 것에 세금을 부과해야 했지만, 교회의 수입은 건드리지 않았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라누치오 2세는 귀중한 그림과 서적을 구입했고, 로마 저택에 보존된 가족 소장품의 대부분을 파르마로 옮겼으며, 1688년에는 새로운 두칼 극장이 개장했다.[7][8]

라누치오 2세에게는 그를 계승할 아들 오도아르도가 있었지만, 그는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하여 공국을 통치하지 못했다.[8] 그의 사망 3년 전, 대사 파비오 페르레티 백작의 중재로 오도아르도는 팔라티네 백작부인 도로테아 소피 폰 노이부르크와 결혼하여 알레산드로(8개월 만에 사망)와 엘리자베트 두 자녀를 두었다.[9]

1694년 12월 11일 라누치오 2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공국은 그의 16세 둘째 아들 프란체스코에게 넘어갔고, 그는 형의 미망인 도로테아와 결혼했다.[9]

프란체스코 파르네세의 통치는 파르네세 가문을 다시 주요 정치 세력의 중심에 올려놓았다. 재앙에 가까운 재정 상황을 물려받은 그는 이를 개선하기 위해 대부분의 하인, 음악가, 광대, 난쟁이를 해고하여 궁정의 불필요한 지출을 줄였다. 또한 공연, 궁정 행사 및 연회를 폐지했다. 그는 또한 파르마 대학교 및 콜레지오 데이 노빌리의 확장을 장려하여 공법, 역사, 언어 및 지리학 연구를 지원했다. 예술가, 작가, 음악가 및 극작가는 궁정의 보호를 받았다. 1712년에는 콜로르노 공작 궁전의 개축 공사가 시작되어 1730년에 완료되었다. 1714년에는 공국이 중요한 외교적 성공을 거두었는데, 프란체스코는 스페인 주재 대사 줄리오 알베로니의 도움으로 조카 엘리자베트를 그 해 초에 과부가 된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와 결혼시킬 수 있었다.

2. 2. 부르봉-파르마 가문, 합스부르크 가문, 프랑스 통치 시기 (1731년 ~ 1860년)

파르네세 가문의 통치는 1731년까지 지속되다가 부르봉 왕가의 카를로 1세에게 잠시 넘어갔다. 1735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와 그 장녀 마리아 테레지아의 통치를 거쳐 다시 부르봉 왕조로 넘어갔다. 1802년 프랑스 통령정부의 점령으로 일시적으로 몰락하였으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패배 이후 빈 회의에 따라 나폴레옹의 제2비이자 프란츠 1세의 장녀인 마리 루이즈의 통치(1814-1847)를 거쳐 부르봉 왕조로 넘어가 1860년 토스카나 대공국 등과 함께 "중부 이탈리아 연합"을 구성하였고, 곧 사르데냐 왕국에 합병되었다.

안토니오 파르네세 공작은 남성 상속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조카인 엘리자베타 파르네세가 파르네세 가문의 상속자로 선언되었다. 그녀는 1714년에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와 결혼했다. 1731년 안토니오 공작이 사망하자, 펠리페 5세는 1725년 빈 조약과 1729년 세비야 조약에 따라 그의 아내가 공국에 대해 갖는 권리를 주장하며, 스페인 부르봉 왕가를 위해 파르마와 피아첸차를 요구했다. 따라서 공작령은 엘리자베타와의 첫째 아들인 스페인의 카를로스에게 상속되었고, 그는 '''파르마 및 피아첸차 공작 카를로스 1세'''로 통치했다. 그는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날 때까지 4년 동안 영토를 통치했으며, 빈 조약 (1738년)에서 정해진 바에 따라 합스부르크 왕가에게 나폴리 왕국시칠리아 왕국을 대가로 두 공작령을 넘겨주었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1748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종결될 때까지 통치했으며, 종전 조약인 아헨 조약에 따라 공작령은 카를로스 1세의 남동생인 스페인의 필리프에게 부르봉 왕가로 반환되었다. '''필리프 공작'''은 부르봉-파르마 왕가의 시조가 되었고, 이웃한 구아스탈라 공국의 곤차카 가문 통치자들이 1746년에 사망함에 따라 확장된 '''파르마, 피아첸차 및 구아스탈라 공국'''(Ducato di Parma, Piacenza e Guastallait)을 통치했다.

1796년, 공작령은 나폴레옹 휘하의 프랑스군에 의해 점령되었고, 국가의 정치 상황은 극도로 혼란스러워졌다. 파르마 공작 페르디난트는 1801년 아란후에스 조약까지 프랑스 군정 총독 아래에서 왕위를 유지했는데, 이 조약에서 부르봉 왕가와 나폴레옹 사이의 일반적인 합의에 따라 공작령은 토스카나 대공국과 교환하여 프랑스에 양도되었지만, 공작은 1802년에 사망할 때까지 파르마에 머물렀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부르봉 왕가가 유럽 전쟁에 동맹으로 완전히 참여하는 것을 열망하여 공국의 미래에 대해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프랑스 법과 행정이 점진적으로 도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베리아 반도 전쟁 발발 이후 1808년에야 프랑스 제국으로의 공식적인 병합이 선언되었다. 공국은 타로 ''데파르트망''으로 개편되었다.

1814년, 이 공국들은 나폴레옹의 합스부르크 출신 아내인 마리아 루이자(이탈리아어로 마리아-루이기아로 불림)에게 주어졌으며, 그녀는 평생 동안 이 공국들을 통치했다. 1847년 그녀의 사후, 공국은 작은 루카 공국을 통치하고 있던 부르봉-파르마 가문에게 반환되었다. 구아스탈라는 모데나와 레조 공국에 할양되었다. 부르봉 왕가는 1859년까지 통치했지만, 프랑스와 사르데냐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프랑스에서는 오스트리아 전쟁, 이탈리아에서는 제2차 독립 전쟁이라고 불림)에서 승리한 후 일어난 혁명으로 축출되었다. 이는 이탈리아에서 1848년과 1859년 두 차례의 연속적인 봉기로 통치 군주가 성공적으로 축출된 유일한 사례였다. 이러한 현상의 배경에는 이탈리아 통일에 대한 열망과 마리 루이즈의 덜 반동적인 통치 이후 부르봉 왕가에 대한 강한 혐오감이 있었다.

1859년 12월, 파르마와 피아첸차 공국은 토스카나 대공국 및 모데나 공국과 통합되어 이탈리아 중부 연합 주를 형성했다. 1860년 3월 국민투표 이후, 이 연합 주는 1861년에 국호를 변경하여 이탈리아 왕국이 된 사르데냐 왕국 (1720–1861)에 병합되었다.

2. 3. 이탈리아 통일과 공국의 종말 (1860년)

1859년 12월, 파르마와 피아첸차 공국은 토스카나 대공국모데나 공국과 통합되어 이탈리아 중부 연합 주를 형성했다.[1] 1860년 3월 국민투표를 통해 이 연합 주는 사르데냐 왕국에 병합되었고,[1] 사르데냐 왕국은 1861년에 국호를 변경하여 이탈리아 왕국이 되었다.[1]

3. 군주

파르마 피아첸차 공국에는 공작 작위를 가지고 나라를 다스린 군주가 있었다. 또한 공작 부인들은 남편의 지위를 통해 공작 부인으로 불렸다. 파르마 공국은 1731년부터 1735년까지 안토니오 파르네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한 후 그의 조카인 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가 파르마를 상속받을 때까지 여성 파르마 공작이 통치하기도 했다. 카를로스 1세는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날 때까지 파르마를 통치했고, 그 후 나폴리 왕국시칠리아 왕국을 대가로 파르마를 카를 6세에게 양도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1748년 아헨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파르마를 통치했고, 파르마는 다시 부르봉 가문에게 돌아갔다. 파르마 공국은 1802년부터 1814년까지 프랑스 제1제국에 합병되었다가 마리 루이즈 여공작의 통치하에 다시 독립했지만, 1847년 그녀가 사망하면서 다시 부르봉 가문이 통치하게 되었다. 1859년 파르마 공국은 사르데냐 왕국에 합병되었고, 1861년 사르데냐 왕국이 이탈리아 왕국으로 통일되면서 파르마 공국은 소멸했다.

4. 역사적 국기와 문장


참조

[1] 웹사이트 Duchy of Parma and Piacenza {{!}} historical duchy, Italy https://www.britanni[...] 2020-11-02
[2] 웹사이트 Parma e Piacenza, ducato di nell'Enciclopedia Treccani https://www.treccani[...] 2021-08-05
[3] 웹사이트 FARNESE, Ottavio in "Dizionario Biografico" https://www.treccani[...] 2022-07-12
[4] 웹사이트 Alessandro Farnese principe e poi duca di Parma e Piacenza nell'Enciclopedia Treccani https://www.treccani[...] 2022-07-12
[5] 웹사이트 ODOARDO Farnese, duca di Parma e di Piacenza in "Dizionario Biografico" https://www.treccani[...] 2022-07-12
[6] 웹사이트 La famiglia Farnese - la storia dei Duchi di Parma e Piacenza https://www.parmawel[...] 2022-07-12
[7] 웹사이트 RANUCCIO II Farnese, duca di Parma e Piacenza in "Dizionario Biografico" https://www.treccani[...] 2022-07-12
[8] 웹사이트 FARNESE, Odoardo in "Dizionario Biografico" https://www.treccani[...] 2022-07-12
[9] 웹사이트 FARNESE, Odoardo, detto Odoardo II in "Enciclopedia Italiana" https://www.treccani[...] 2022-07-12
[10] 웹사이트 FRANCESCO Farnese, duca di Parma e Piacenza in "Dizionario Biografico" https://www.treccani[...] 2022-07-12
[11] 웹사이트 Francesco Farnese https://www.histouri[...] 2022-07-12
[12] 웹인용 Duchy of Parma and Piacenza {{!}} historical duchy, Italy https://www.britanni[...] 2020-11-02
[13] 웹인용 Parma e Piacenza, ducato di nell'Enciclopedia Treccani https://www.treccani[...] 2021-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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