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에른 왕위 계승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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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이에른 왕위 계승 전쟁은 1778년부터 1779년까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간에 벌어진 분쟁이다. 1777년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의 사망으로 비텔스바흐 가문이 단절되자, 오스트리아 황제 요제프 2세는 바이에른을 합병하려 했으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가 이를 반대하며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은 주로 소규모 전투와 대치로 이루어졌으며, 병사들이 감자를 캐 먹는 모습 때문에 '감자 전쟁'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1779년 테셴 조약으로 종결되었으며, 오스트리아는 인피어텔 지역을 얻고,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의 확장을 저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전쟁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간의 경쟁을 심화시켰으며, 독일 지역의 감자 재배를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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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70년대 신성 로마 제국 - 테셴 조약
테셴 조약은 1779년 테셴에서 바이에른 계승 전쟁을 종결짓고 바이에른 선제후국 계승, 오스트리아의 바이에른 영토 획득, 프로이센의 변경백령 합병 인정, 작센 선제후국에 대한 자금 원조 등을 규정했다.
바이에른 왕위 계승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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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개요 | |
일부 | 오스트리아-프로이센 경쟁 |
전역 | 해당 없음 |
![]() | |
날짜 | 1778년 7월 3일 – 1779년 5월 13일 |
장소 | 보헤미아 및 슐레지엔 |
결과 | 테셴 조약 |
영토 변경 | 바이에른의 이전 영토 경계 복원 오스트리아, 인피에르텔 유지 바이에른 왕위 계승, 가문의 팔츠 및 츠바이브뤼켄 분가에 확보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합스부르크 군주국 |
교전국 2 | |
지휘관 | |
지휘관 1 | 요제프 2세 프란츠 폰 라시 에른스트 폰 라우돈 |
지휘관 2 | 프리드리히 2세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 요한 요르크 |
병력 규모 | |
병력 1 | 180,000–190,000명 |
병력 2 | 160,000명 |
사상자 및 피해 | |
사상자 1 | 약 10,000명 (사망, 부상, 포로, 실종, 질병) |
사상자 2 | 약 10,000명 (사망, 부상, 포로, 실종, 질병) |
2. 역사적 배경
30년 전쟁과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이후 강대국으로 부상한 프로이센은 황제 카를 6세 사망 후 살리카법을 거스르며 실권 통치하는 마리아 테레지아에 맞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을 벌인 끝에 슐레지엔 확보에 성공하며 더욱 강성해져 갔다.[97][98] 이후 양측이 대치한 가운데 독일 지역 내에 불안은 계속 이어져 갔다.
1777년 12월,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가 사망하면서 바이에른계 비텔스바흐 가문은 단절되었다. 바이에른은 같은 비텔스바흐 가문의 팔츠 선제후 카를 4세 필리프 테오도르가 병합하여 계승하게 되었다.
신성 로마 황제 요제프 2세는 바이에른을 자국에 편입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제1차 폴란드 분할에 이은 영토 확장의 호기로 여기고, 카를 4세 테오도르에게 니더바이에른과 오버팔츠의 할양을 요구했다. 카를 4세 테오도르는 바이에른에 대한 통치 의욕이 없어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요제프 2세는 이듬해 1월, 재빨리 니더바이에른에 병력을 진주시켰다.
이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스트리아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 이 영토 할양에 강하게 반대하며 열강과 독일 제후들에게 지지를 구했다. 러시아, 영국은 대왕에게 동조했고, 독일 제후들 역시 대왕을 지지하며 요제프 2세를 비난했다. 요제프 2세는 타국에 대한 사전 교섭을 게을리하여, 기대했던 프랑스의 지지도 얻지 못하고 고립되었다. 요제프 2세는 일방적인 할양이 아닌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와의 교환을 제안했지만, 대왕은 거절했다. 협상은 결렬되었고, 개전으로 이어졌다.
2. 1. 프랑스, 독일의 정세 변화
프랑크 왕국이 분열되면서 탄생한 프랑스는 카페 왕조를 거쳐 부르봉 왕가로 이어지면서 왕의 직할 영지를 넓혀갔고, 점차 왕권을 강화해 나갔다. 백년 전쟁에서 승리한 샤를 7세는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럽 최초로 상비군을 양성하여 세습 봉건 귀족 세력을 억누르고 중앙집권을 강화했다.[88][89] 그의 아들 루이 11세 시대에 왕권은 더욱 강해졌고, 프랑스는 강대국으로 부상했다.[90]반면, 독일은 선제후 제도가 생기는 등 지방분권화가 가속화되었다. 합스부르크가 출신의 카를 5세는 1519년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하여 중앙집권 강화를 시도했지만,[91] 독일 군주들은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1517년)을 명분 삼아 황제 카를 5세의 권력 강화에 반대했다. 황제파(구교)와 반황제파(개신교)는 무력 충돌 끝에 아우크스부르크 화의(1555)를 통해 지역 통치자에게 종교 선택권을 부여하는 데 합의했다.[92]
그러나 이는 개인에게 종교 선택권이 없는 미봉책에 불과하여[93] 또 다른 불씨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지역 영주들이 정치권력과 종교권력까지 거머쥐게 되어 지방분권이 더욱 심화되었다. 신구교 간의 극심한 갈등 속에 이어지던 불안한 평화는 결국 30년 전쟁(1618~48)으로 이어졌고, 전쟁터가 된 독일은 국토가 황폐해지고 800만 명이 사망하는 참극을 빚었다.[94] 베스트팔렌 조약(1648)을 통해 종교 선택의 자유가 주어지기는 했으나, 독일 지역이 300여 개의 영방으로 분열되며 생긴 권력 공백 현상은 또 다른 불안을 야기했다.[95]
2. 2.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대두
30년 전쟁과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이후 프로이센은 강대국으로 부상했다.[96]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1748)과 7년 전쟁(1756-1763)을 통해 슐레지엔을 확보하며 오스트리아와 대등한 세력으로 성장했다.[97][98]2. 3.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문제
1713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는 자신의 딸들이 사망한 형인 요제프 1세의 딸들보다 우선하는 상속 순위를 확립했다. 그는 합스부르크 상속을 보호하기 위해 유럽의 군주들을 설득하여 국사 조칙을 받아들이게 했다. 이 합의에서 그들은 그의 적법한 딸들 중 누구라도 보헤미아 왕국, 헝가리, 크로아티아의 정당한 여왕이자 오스트리아의 대공비로 인정했다. 이는 장자 상속 전통에서 벗어난 것이었다.[2]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이전 3세기 동안 대부분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선출되었다. 카를 6세는 자신의 장녀인 마리아 테레지아를 로렌 공작 프랑수아 3세와 결혼시켰다. 프랑수아는 황제가 될 유망한 후보가 되기 위해 토스카나 대공국과 교환하여 프랑스 인접 지역인 로렌 공작령을 포기했다.[3] 서류상으로는 많은 국가 원수와 가장 중요하게는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 국가 통치자들이 국사 조칙과 프랑수아가 다음 황제가 될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받아들였다. 바이에른 선제후국과 작센 선제후국은 중요한 선거 표를 가지고 있었고 프랑수아의 선출을 방해하거나 심지어 막을 수 있었다.[4] 1740년에 카를 6세가 사망했을 때, 마리아 테레지아는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에서 자신의 가문의 권리를 위해 싸워야 했고, 그녀의 남편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는 데 경쟁에 직면했다.[3]
바이에른 선제후이자 공작 카를 알베르트는 요제프 1세의 사위로서 합스부르크 왕조의 독일 영토를 주장했으며, 더욱이 카를 6세의 정당한 황위 계승자를 자처했다. 여성이 상속할 것이라면 그의 가문이 우선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아내인 마리아 아말리아는 요제프 1세의 딸이었다. 카를 6세와 그의 전임자인 요제프 1세는 모두 아들 없이 사망했다. 바이에른의 카를 알베르트는 정당한 상속이 젊은 동생 카를 6세의 딸이 아니라 요제프의 딸에게 넘어가야 한다고 제안했다.[5] 다른 이유로, 프로이센, 프랑스, 스페인, 그리고 폴란드-작센 군주국은 바이에른의 카를의 합스부르크 영토와 황제 지위에 대한 주장을 지지했으며 국사 조칙을 파기했다.[6]
바이에른의 카를 알베르트는 무력으로 황제 지위를 얻기 위해 군사적 지원이 필요했고, 이는 님펜부르크 조약(1741년 7월)을 통해 확보했다. 그 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동안 그는 프라하를 성공적으로 점령하여 그곳에서 보헤미아 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오버 오스트리아를 침공하여 빈을 점령할 계획이었지만, 외교적 필요에 의해 그의 계획이 복잡해졌다. 그의 프랑스 동맹국들은 병력을 보헤미아로 돌렸고, 그곳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스트리아와 바이에른의 혼란을 이용하여 실레시아를 합병했다.[7]
카를 알베르트의 군사적 선택은 프랑스와 함께 사라졌다. 그는 새로운 계획을 채택하여 황제 선거를 방해했다. 그는 프리드리히의 선거 투표를 대가로 클라츠 백작령을 낮은 가격으로 프로이센에 팔았다. 카를의 형제인 바이에른의 클레멘스 아우구스트, 쾰른 선제후국의 대주교이자 선제후는 황제 선거에서 그를 지지했으며 1742년 2월 12일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전통적인 의식으로 그를 직접 즉위시켰다. 다음 날, 새로운 카를 7세의 바이에른 수도인 뮌헨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군대에 의해 약탈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항복했다. 그 후 몇 주 동안 그녀의 군대는 카를의 영토 대부분을 점령하고 바이에른을 점령했으며 그를 그의 조상 땅과 보헤미아에서 쫓아냈다.[7]
카를 7세는 황제로 재위하는 3년 동안 대부분 프랑크푸르트에서 거주했으며 마리아 테레지아는 보헤미아와 헝가리에서 자신의 유산을 위해 프로이센과 싸웠다. 프리드리히는 카를을 위해 보헤미아를 확보할 수 없었지만 오스트리아 군대를 바이에른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짧은 재위 기간의 마지막 3개월 동안 통풍으로 고통받던 카를은 뮌헨에서 살았고, 1745년 1월에 사망했다. 그의 아들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막스 요제프로 알려짐)는 그의 아버지의 선제후 지위를 물려받았지만 그의 황제 야망은 물려받지 못했다. 퓌센 평화 조약(1745년 4월 22일)을 통해 막스 요제프는 다가오는 황제 선거에서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인 로렌의 프랑수아에게 투표할 것을 약속했다. 그는 또한 국사 조칙을 인정했다. 그 대가로 그는 자신의 가문의 선거 지위와 영토를 되찾았다.[8]
3. 바이에른 계승 문제
1777년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가 사망하면서 바이에른계 비텔스바흐 가문이 단절되자, 같은 비텔스바흐 가문의 팔츠 선제후 카를 4세 필리프 테오도르가 바이에른을 상속받았다.
신성 로마 황제 요제프 2세는 오스트리아의 바이에른 병합을 위해 이 상황에 개입했다. 요제프 2세는 제1차 폴란드 분할에 이은 영토 확장의 기회로 여기고, 카를 4세 테오도르에게 니더바이에른과 오버팔츠를 포함한 바이에른 선제후령의 할양을 요구했다. 카를 4세 테오도르는 이를 받아들였고, 요제프 2세는 이듬해 1월 니더바이에른에 병력을 진주시켰다.
이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스트리아의 세력 확장을 우려하여 강하게 반대하며, 러시아, 영국 및 독일 제후들의 지지를 얻었다. 반면 요제프 2세는 프랑스의 지지를 얻지 못해 고립되었다. 요제프 2세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와의 교환을 제안했지만, 프리드리히 대왕은 거절했고, 결국 협상은 결렬되어 전쟁으로 이어졌다.
3. 1.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의 단절
1777년 12월,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바이에른계 비텔스바흐 가문이 단절되었다.[99] 이에 따라 같은 비텔스바흐 가문의 팔츠 선제후 카를 4세 필리프 테오도르가 바이에른을 상속받게 되었다.[99]3. 2. 요제프 2세의 개입
신성 로마 황제 요제프 2세는 오스트리아가 바이에른을 자국에 편입하려는 오랜 야망을 실현하고자 했다.[17] 요제프 2세는 제1차 폴란드 분할에 이은 영토 확장의 호기로 여기고, 카를 4세 테오도르에게 니더바이에른과 오버팔츠를 포함한 바이에른 선제후령의 할양을 요구했다.[19] 카를 4세 테오도르는 바이에른 통치에 대한 의욕이 없어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요제프 2세는 이듬해 1월, 재빨리 니더바이에른에 병력을 진주시켰다.[26]이에 맹렬히 항의한 것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이었다. 그는 오스트리아가 이전의 세력을 회복할 것을 우려하여 영토 할양에 강하게 반대하며 열강과 독일 제후들에게 지지를 구했다. 러시아와 영국은 프리드리히 2세에게 동조했고, 독일 제후들 역시 그를 지지하며 요제프 2세를 비난했다. 요제프 2세는 타국에 대한 사전 교섭을 게을리하여, 기대했던 프랑스의 지지도 얻지 못하고 고립되었다. 요제프 2세는 일방적인 할양이 아닌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와의 교환을 제안했지만, 프리드리히 2세는 거절했다. 협상은 결렬되었고, 개전으로 이어졌다.[24]
3. 3. 관련 인물들
초상화 | 이름 | 역할 및 주요 행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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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를 4세 테오도어 | 팔츠 선제후이자 바이에른 선제후국의 상속자. 볼테르를 초청하는 등 예술과 계몽주의 사상에 관심을 가졌다.[12] 그러나 토머스 칼라일은 그를 "연극과 사생아에 빠진 딜레탕트"라고 묘사했고,[13] 베르젠 백작은 스스로 통치하지 못하고 주변에 의존한다고 평가했다.[14] 여러 사생아를 두었고 더 많은 영토를 원했다.[15][16] |
![]() | 요제프 2세 |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대공. 합스부르크-로렌 왕가의 영향력 확대를 추구, 바이에른 합병을 원했다.[17] 막스 요제프의 여동생과 결혼했으나 후사 없이 사망, 저 바이에른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18] 카를 테오도어와 비밀 협정을 맺어 바이에른 일부 양도 대가로 분쟁 없는 계승을 약속했다.[19] |
![]() | 카를 2세 아우구스트 | 카를 테오도어의 추정 상속인. 바이에른 선제후국의 분할에 반대했다.[20][21] 요제프 2세의 여동생에게 구혼했으나 거절당했다.[23] 작센의 마리아 아말리아 (1757–1831)와 결혼, 장모와 처남의 지지를 받았다.[21] |
-- | 프리드리히 2세 | 프로이센 국왕. 오스트리아 확장을 견제, 카를 2세 아우구스트를 지원했다.[24] |
-- | 예카테리나 2세 | 러시아 여제. 분쟁 중재를 제안, 프로이센에 우호적 입장을 취했다.[30] |
]] | 샤를 그라비에 드 베르젠 | 프랑스 외무부 장관. 오스트리아에 대한 적대감을 가졌고,[24] 프랑스가 오스트리아를 지원하지 않도록 했다. |
4. 전쟁의 경과
1777년 12월,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임마누엘이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99] 신성 로마 황제 요제프 2세는 카를 테오도어를 압박하여 니더바이에른과 민델하임을 오스트리아에 양도하는 협정에 서명하게 했다. 이에 프로이센은 작센 선제후국과 함께 오스트리아와 동군연합이었던 보헤미아 왕국을 침략하면서 1778년 7월에 전쟁이 시작되었다.[99]
양측의 전력은 비슷하여 대치가 이어졌고, 국제적인 관심도 받지 못해 동맹이나 우방국의 지원을 받기 어려웠다. 영국은 7년 전쟁 승리 후 식민지 경영에 집중하며 미국 독립 전쟁 중이었고,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 혼인 동맹을 맺었으나[100] 7년 전쟁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미국을 지원하고 있어 오스트리아를 지원할 여력이 없었다.[104]
프로이센은 16만 명, 오스트리아는 18만 명의 군사를 동원했으나,[101][104] 소규모 전투만 있었을 뿐 양측 모두 전면전을 꺼려 제대로 된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대치와 소강상태가 지속되다가 전쟁 발발 10개월 만인 1779년 5월 13일, 양측은 러시아의 중재로 테셴 조약을 맺고 전쟁을 종결했다.[99]
1778년 4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보헤미아 국경 근처에 8만 명의 병력을 배치하고 침공 준비를 마쳤다.[31] 그의 동생 프로이센의 하인리히는 작센에 7만 5천~10만 명의 군대를 편성했다.[31] 7월 초, 프로이센 장군 요한 야콥 폰 분슈가 보헤미아로 진입했으나, 프리드리히 요제프 폰 나우엔도르프 백작이 이끄는 소규모 부대에게 격퇴당했다.[35] 며칠 후, 프리드리히 2세는 나호트를 점령했지만 더 이상 진격하지 않았다. 합스부르크 군대는 엘베 강 고지에 방어선을 구축했고, 프란츠 모리츠 폰 라시 백작이 지휘를 맡았다.[37] 오스트리아군은 600문의 포병으로 방어선을 강화했다.[39] 에른스트 기데온 폰 라우돈 남작이 지휘하는 오스트리아군 일부는 작센과 루사티아에서 보헤미아로 들어오는 통로를 지켰으나, 하인리히 공자는 라우돈의 병력을 우회하여 보헤미아로 진입했다.[40]
전쟁은 주로 소규모 습격과 반격으로 이루어졌으며, 병사들은 식량 조달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42][43] 나우엔도르프는 여러 차례 기습 작전을 성공시켜 마리아 테레지아 군사 훈장을 받기도 했다.[55] 다고베르트 지그문트 폰 부름저와 프란츠 레베네르 대령 등 오스트리아군 지휘관들도 프로이센군을 상대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다.[47][50][51][53]
마리아 테레지아는 비밀리에 베를린에 사절을 보내 휴전을 제안하고, 예카테리나 2세에게 중재를 요청했다. 요제프는 어머니의 행동에 격노했지만, 결국 협상이 진행되어 테셴 조약으로 전쟁이 종결되었다.
4. 1. 프로이센의 개입과 외교적 노력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오스트리아의 세력 확장을 우려하여 바이에른 영토 할양에 강력히 반대했다. 프리드리히 2세의 총리 카를 빌헬름 핀크 폰 핀켄슈타인 백작은 오스트리아가 바이에른을 획득하면 신성 로마 제국 내 권력 균형이 바뀌어 프로이센의 영향력이 줄어들 것이라고 보았다.[24]프로이센은 슐레지엔 전쟁과 7년 전쟁을 통해 강대국으로 부상했고, 프리드리히 2세는 유럽 열강들로부터 군사적, 외교적 역량에 대한 존경을 얻었다.[31] 프로이센의 지위와 영토를 보호하기 위해 핀크와 프리드리히는 작센 선제후국과 동맹을 맺고, 츠바이브뤼켄의 카를 2세 아우구스트 공작의 권리를 옹호하려는 명분을 내세웠다.[24]
프리드리히 2세는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에게 지지를 구했다. 예카테리나 2세는 또 다른 비용이 많이 드는 유럽 분쟁에 관여하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전쟁의 전리품을 수습할 의향은 있었다.[30] 영국은 미국 독립 전쟁에 휩싸여 있었지만, 프로이센 군대는 7년 전쟁에서 회복되었기에 프리드리히는 영국의 직접적인 도움은 필요로 하지 않았다.[29]
신성 로마 황제 요제프 2세는 프랑스의 지지를 얻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프랑스는 미국 독립 전쟁에 집중하고 있었고, 외교 혁명 이후에도 베르사유 궁전과 프랑스 전반에는 강한 반오스트리아 정서가 존재했다.[24] 프랑스 외무부 장관 베르겐 백작은 오스트리아에 대한 뿌리 깊은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고, 1778년까지 오스트리아에 대한 프랑스의 즉각적인 군사적 의무를 면제하는 데 성공했다.[24] 결국 요제프 2세는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다.
프로이센의 또 다른 동맹국인 작센은 카를 아우구스트와 연합하여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 대비하고 2만 명의 병력을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29]
4. 2. 군사적 대치와 '감자 전쟁'
1778년 7월, 프로이센군은 보헤미아 왕국을 침공하여 쾨니히그레츠에서 오스트리아군을 포위했지만, 양측 모두 전면전을 피하면서 대치 상황이 이어졌다.[99] 프로이센은 16만 명, 오스트리아는 18만 명의 군사를 동원했으나,[101][104] 소규모 접전과 기습이 빈번하게 발생했을 뿐, 대규모 전투는 거의 없었다.[102]양측 군대는 서로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감자밭을 뒤지는 데 주력했다.[105] 당시 독일 지역에서는 감자 재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106] 양측 군인들은 서로 마주쳐도 총을 쏘기보다는 감자밭으로 달려가 감자를 더 많이 캐려고 경쟁하곤 했다.[105][107][85][108] 이러한 일화로 인해 이 전쟁은 '감자 전쟁(Kartoffelkrieg)'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105][107][85][108]
전쟁은 주로 소규모 습격과 반격으로 이루어졌으며, 병사들은 식량 조달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42][43] 예를 들어, 프리드리히 요제프 폰 나우엔도르프 백작은 여러 차례 기습 작전을 성공시켜 마리아 테레지아 군사 훈장을 받기도 했다.[55]
다고베르트 지그문트 폰 부름저와 프란츠 레베네르 대령 등 오스트리아군 지휘관들도 프로이센군을 상대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다.[47][50][51][53]
4. 3. 평화 협상
테셴 조약(1779년 5월)에서 마리아 테레지아는 찰스 테오도르에게 바이에른 저지방을 반환했지만, 인강 유역에 있는 2200km2의 좁은 땅인 이른바 인피어텔을 유지했다. 그녀와 요제프는 작은 영토에 120,000명의 주민이 있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31] 작센은 개입에 대한 역할로 주요 교전국으로부터 의 재정적 보상을 받았다.[56][57]바이에른 왕위 계승 전쟁은 프리드리히와 마리아 테레지아 모두에게 마지막 전쟁이었고, 그들의 통치는 서로를 상대로 한 전쟁으로 시작하고 끝났다.[58]
황태후 마리아 테레지아는 원래 이 전쟁에 반대했으며, 요제프에게 알리지 않고 독단적으로 대왕에게 평화를 제안했다. 대왕도 이에 대체로 동의했고, 이렇게 황제의 눈을 피해 평화 협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협상은 난항을 겪었다. 요제프는 자신을 무시하고 평화 제안을 한 어머니에게 격렬하게 항의했고, 자신의 퇴위도 암시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끈기 있게 요제프를 설득하는 한편, 어떻게든 황제의 체면을 유지하는 내용의 조약을 체결하려 했지만, 대왕 역시 쉽게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협상은 10개월에 걸쳐 겨우 마무리되었고, 1779년 5월 테셴 조약이 체결되어 전쟁은 종결되었다.
5. 테셴 조약과 전쟁의 결과
테셴 조약(1779년 5월)에서 마리아 테레지아는 카를 테오도어에게 바이에른 저지방을 반환했지만, 인 강 유역에 있는 2200km2의 좁은 땅인 인피어텔을 유지했다. 그녀와 요제프 2세는 이 작은 영토에 120,000명의 주민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31] 작센은 개입에 대한 대가로 주요 교전국으로부터 6백만 굴덴의 재정적 보상을 받았다.[56][57]
바이에른 왕위 계승 전쟁은 프리드리히와 마리아 테레지아 모두에게 마지막 전쟁이었으며, 그들의 통치는 서로를 상대로 한 전쟁으로 시작하고 끝났다.[58] 양측은 7년 전쟁 때보다 3~4배나 큰 군대를 배치했지만,[58] 어느 군주도 가용 군사력을 전부 사용하지 않아 전투가 거의 없는 전쟁으로 주목받았다.[57]
19세기 초 사상자 추정치는 수만 명이 기아와 관련 질병으로 사망했음을 시사한다.[64] 칼라일은 약 1만 명의 프로이센군과 1만 명의 오스트리아군 사망자를 추정했다.[59] 미하엘 호헤딩거는 총 사상자를 약 3만 명으로 평가했고,[60] 로버트 칸은 사망의 주요 원인이 콜레라와 이질이라고 제안했다.[61] 가스통 보다르는 오스트리아 장군 5명, 12,000명 이상의 군인, 74명의 장교가 질병으로 사망했다고 언급했다. 소규모 교전에서 9명의 장교와 265명의 병사가 사망하고, 4명의 장교와 123명의 병사가 부상을 입었다. 62명의 장교와 2,802명의 병사가 포로로 잡혔고, 137명의 병사가 실종되었다. 3,000명 이상의 제국 군인이 탈영했으며, 26명의 장교와 372명의 병사가 장애로 해고되었다. 프로이센 측에서는 장군 1명이 사망하고, 87명의 장교와 3,364명의 병사가 사망, 부상 또는 포로로 잡혔다. 보다르는 전반적으로 전투력의 10% 손실을 추정했다.[62] 민간인 사상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기아와 질병으로 고통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벨슈베르트와 그 주변 마을이 화재로 파괴되기도 했다.[63]
전쟁으로 프로이센은 의 비용을 치렀고,[64] 오스트리아는 연간 수입 의 국가에서 을 지출했다.[65] 요제프 2세는 전쟁을 "끔찍한 일... 많은 무고한 사람들의 파멸"이라고 묘사했다.[66]
이후 프리드리히 대왕과 요제프 2세는 평화를 유지하면서도 서로를 의식한 외교전을 계속했다. 요제프 2세는 예카테리나 2세와 오스만 제국 관련 전략에 합의하여 러시아의 협조를 얻은 후, 바이에른과 네덜란드의 영토 교환을 제안했다. 러시아는 이를 승인했지만, 프리드리히 대왕의 강력한 항의로 예카테리나 2세는 동의를 철회했다. 프랑스 또한 프로이센의 승인 없이는 영토 교환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하여, 요제프 2세의 바이에른 병합 계획은 실패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제국 제후들과 제후 동맹을 맺어 요제프 2세에 대한 대항 자세를 강화했다. 이대로 진행되었다면 다시 전쟁이 일어날 뻔했지만, 프랑스에서 혁명이 임박하면서 양국의 외교 전략은 전환되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대왕과 요제프 2세 모두 이 상황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5. 1. 테셴 조약의 내용
결국 오스트리아는 인 강 남쪽에 약간의 영토(인 지구)를 얻는 것으로 요제프 2세의 최소한의 체면을 유지했다. 프리드리히 대왕도 오스트리아의 확대를 막을 수 있었기에 만족했다. 또한 이 조약에서 프로이센은 호엔촐레른 가의 분가가 다스리는 바이로이트와 안스바흐 두 변경백령을 장래 병합하는 것에 대해 승인받았다.5. 2. 전쟁의 영향
바이에른 왕위 계승 전쟁은 사실상 승패 없이 무승부로 종결되었지만, 이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양국 관계와 독일 지역에 여러 영향을 미쳤다.전쟁 이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경쟁 관계는 19세기까지 이어졌다. 프로이센은 소독일주의를, 오스트리아는 대독일주의를 주장하며 대립했다. 이러한 경쟁 구도는 훗날 독일 통일 과정에 큰 영향을 주었다.[83]
전쟁의 또 다른 영향 중 하나는 감자 재배의 확산이었다. 양측 군인들은 부족한 식량을 보충하기 위해 감자를 확보하려 경쟁했고, 이 과정에서 감자의 유용성이 널리 알려졌다.[106] 전쟁 이후 독일 지역에서 감자 재배가 확대되었고, 감자는 독일인의 주식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104]

테셴 조약으로 오스트리아는 인피어텔 지역을 확보했지만,[31] 바이에른 전체를 합병하려던 당초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의 확장을 저지하고 독일 내에서의 입지를 강화했다.[82] 반면, 요제프 2세는 국제적인 고립과 권위 손상을 겪었다.[66]
전쟁터가 된 보헤미아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두 차례의 전쟁(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7년 전쟁)에 이어 또다시 전쟁터가 되면서, 양군 합쳐 40만 명에 가까운 병사들이 1년 가까이 주둔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보헤미아 주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었고, 전쟁 종결 후에도 정세 불안이 지속되었다.[63]
외교적으로 고립된 오스트리아는 러시아 및 프랑스와의 관계 재구축에 힘썼다. 프로이센은 프리드리히 대왕의 주도로 군주 동맹을 결성하여 오스트리아에 대항했다.[77]
이후에도 프리드리히 대왕과 요제프 2세는 평화를 유지하면서 외교전을 계속했다. 요제프 2세는 바이에른과 네덜란드의 영토 교환을 다시 제안했지만, 프로이센의 반대로 무산되었다.[74]
바이에른 왕위 계승 전쟁은 구시대적인 마지막 유럽 전쟁으로 평가받기도 하지만, 동원된 군대의 규모는 이전 시대보다 훨씬 컸다.[68] 이는 이후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에서 나타날 대규모 전쟁의 전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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