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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동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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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만동묘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지원한 명나라의 신종과 의종을 제사하기 위해 화양동서원 내에 설치된 사당이다. 1703년 송시열의 유지와 권상하의 주도로 건립되었으며, 조선이 청나라에 굴복한 이후에도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소중화 사상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공간이었다. 만동묘는 흥선대원군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고종 때 부활하는 등 부침을 겪었으며, 조선 후기 정치, 사상, 대외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사적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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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동묘
기본 정보
만동묘 건물
만동묘 사당 외장
만동묘 건물 내부
만동묘 사당 내장
유형사당
소재지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동길 188 (화양리)
좌표36.6686921° N, 127.8111139° E
제작 시기1704년
지정 연월일1978년 10월 27일
소유자괴산군 문화관광과
비고괴산 만동묘정비
상세 정보
한글만동묘
한자萬東廟
히라가나반토우뵤우
가타카나마ンドン뵤우
로마자 표기Mandongmyo

2. 화양동서원과 만동묘의 역사적 배경

1975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화양동 계곡은 원래 청주군 청천면 지역이며, 황양목이 많아 ‘황양동’(黃楊洞)으로 불렸다.[4] 그러다 효종 때 우암 송시열이 이곳으로 내려와 살면서 ‘화양동’으로 고쳐 불렀다.[4] 벼슬에서 물러난 송시열은 곧바로 이 화양동에 머물며 암서재(巖棲齋) 짓고서 글 읽으며 제자를 가르쳤다.[4] 송시열은 화양동 계곡의 기이하고 아름다운 아홉 곳에 이름을 붙이고 화양구곡이라 하였는데,[4] 조선시대 노론의 성지 가운데 성지였던 화양동서원과 만동묘가 있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 군사를 내준 신종을 제사를 지내는 곳인 만동묘는 화양동서원에 딸려있었다.[4] 조선 정부에서는 여기에 땅과 노비를 주었고, 영조 때는 만동묘를 증수했으며, 헌종 때는 관찰사가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4] 그 후 유생들의 소굴이 되어 그 폐단이 서원보다 더하였다.[4] 그리하여 흥선대원군은 만동묘를 철폐할 구실로 대보단을 세우고 지방과 편액[5] 기타 물건은 모두 대보단 경봉각[6]에 갖다 두었다.[4] 그 후 유생들이 만동묘를 재건할 것을 여러 차례 상소했으나 실패했는데, 대원군이 정계에서 물러나고 명성황후와 외척인 여흥 민씨 세력이 정권을 잡자 1874년 고종 11년 부활하였다.[4]

2. 1. 명나라 멸망과 조선의 인식 변화

2. 2. 송시열과 화양동

1975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화양동 계곡은 원래 청주군 청천면 지역이며, 황양목이 많아 ‘황양동’(黃楊洞)으로 불렸다.[4] 효종 때 우암 송시열은 벼슬에서 물러나 이곳으로 내려와 ‘화양동’으로 고쳐 불렀다. 송시열은 화양동에 암서재(巖棲齋)를 짓고 글을 읽으며 제자를 가르쳤다.[4] 송시열은 화양동 계곡의 기이하고 아름다운 아홉 곳에 이름을 붙이고 화양구곡이라 하였는데, 이곳은 조선시대 노론의 성지가 되었다.[4]

3. 화양동서원 건립과 만동묘 설치

1695년 숙종 21년에 이곳에 머물며 후진을 양성했던 송시열을 제향하기 위해 그의 문인인 권상하, 정호 등의 노론계 관료와 유생들이 함께 화양동서원을 세웠다. 나라 안 44개에 이르는 송시열 제향의 서원 가운데 대표적인 서원이 된 화양동 서원은 1696년에 사액을 받았다.[4] 화양동서원에 딸린 만동묘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군사를 내준 의종신종을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다. 조선 정부에서는 여기에 땅과 노비를 주었고, 영조 때는 만동묘를 증수했으며, 헌종 때는 관찰사가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3. 1. 화양동서원의 건립과 사액

1975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화양동 계곡은 원래 청주군 청천면 지역이며, 황양목이 많아 ‘황양동’(黃楊洞)으로 불렸다. 그러다 효종 때 우암 송시열이 이곳으로 내려와 살면서 ‘화양동’으로 고쳐 불렀다. 벼슬에서 물러난 송시열은 곧바로 이 화양동에 머물며 암서재(巖棲齋) 짓고서 글 읽으며 제자를 가르쳤다. 송시열은 화양동 계곡의 기이하고 아름다운 아홉 곳에 이름을 붙이고 화양구곡이라 하였는데, 조선시대 노론의 성지 가운데 성지였던 화양동서원과 만동묘가 있다.[4] 1695년 숙종 21년에 송시열을 제향하기 위해 그의 문인인 권상하, 정호 등의 노론계 관료와 유생들이 함께 화양동서원을 세웠다. 1696년 사액을 받으면서, 화양동서원은 나라 안 44개에 이르는 송시열 제향의 서원 가운데 대표적인 서원이 되었다.[4]

3. 2. 만동묘 설치와 의미

1703년(숙종 29년), 송시열의 유지와 그의 제자 권상하의 주도로 화양동서원 내에 만동묘가 설치되었다.[4] 만동묘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지원한 명나라 신종(만력제)과 의종(숭정제)을 제사하는 곳이었다.[2]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선 것은 조선 양반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조선은 청나라를 '오랑캐'로 여겨 멸시했고,[2] 병자호란의 굴욕적인 결과로 삼전도에서 인조가 홍타이지에게 항복한 후, 이러한 인식은 더욱 강화되었다. 조선은 중화 문명이 청나라에 의해 소멸되었다고 보고, 명나라가 멸망함으로서, 조선만이 유일한 중화 문명의 정통 계승자라는 소중화 사상을 갖게 되었다.[2]

이러한 배경에서 송시열은 명나라의 "재조지은(再造之恩,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은혜)"[2]을 기리기 위해 권상하에게 만동묘 건립을 부탁하였다. 1703년 화양리(현재의 괴산군청천면)에 세워진 '''만동사'''(만동사한국어)는 처음에는 사적인 시설이었으나, 이후 조선 조정의 지원을 받으며 만동묘로 불리게 되었다.[2] 만동묘 건립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조선이 중화 문명의 정통 계승자임을 대내외에 천명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녔다.[2]

1704년 서울에는 만력제를 모시는 대보단(황단)이 설치되었고, 1749년에는 홍무제숭정제도 합사되었다.[2]

4. 만동묘의 부침과 조선의 정체성

4. 1. 만동묘 훼철과 대보단

4. 2. 만동묘 부활과 의미

5. 결론

화양동서원과 만동묘는 조선 후기 정치, 사상, 대외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사적 유적이다. 특히 만동묘는 조선이 청나라의 압력 속에서도 명나라에 대한 의리와 '소중화' 의식을 지키려 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소이다. 조선은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굴욕적인 삼전도의 맹약을 맺었지만, 중화 문명의 정통 계승자는 조선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1703년 송시열의 부탁을 받은 권상하화양리(현재의 괴산군청천면)에 만동사를 세워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명나라 만력제숭정제를 모셨다. 만동사는 후에 조선 조정의 원조를 받아 만동묘로 불리게 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괴산 화양구곡(華陽九曲)과 만동묘(萬東廟) http://www.goesantim[...] 2022-07-16
[2] 웹사이트 朝鮮儒教思想から見た韓国の対日観 ―日韓相互不理解の淵源を探る― https://ippjapan.org[...] 平和政策研究所 2019-09-18
[3] 문서 화양동
[4] 웹사이트 화양동 구곡에 얽힌 내력 http://hc.go2home.kr[...] 2012-06-28
[5] 문서 紙榜, 扁額
[6] 문서 大報壇 敬奉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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