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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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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권상하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로, 송시열의 수제자이자 기호학파의 지도자였다. 1660년 진사가 된 후 송시열, 송준길을 사사하며 학문을 연마했고, 송시열 사후 노론의 2대 당수가 되었다. 그는 이이와 성혼의 학통을 잇는 기호학파를 이끌며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을 지지했으며, 스승의 유언에 따라 만동묘를 건립하여 명나라의 만력제와 숭정제를 기렸다. 또한, 인물성 편재 문제를 둘러싸고 제자 한원진의 학설을 지지하면서 기호학파가 호론과 낙론으로 분열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저서로 『한수재집』 등이 있으며, 사후 문순의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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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권상하의 초상
한글권상하
한자權尙夏
로마자 표기Gwon Sangha
수암(遂菴), 한수재(寒水齋)
치도(致道)
시호문순(文純)
관직
좌의정 임명 시작1717년 11월 6일
좌의정 임명 종료1720년 3월 14일
좌의정 이전이이명
좌의정 이후이거명
우의정 임명 시작1717년 6월 20일
우의정 임명 종료1717년 11월 6일
우의정 이전이이명
우의정 이후조태채
생애
출생1641년
사망1721년 9월 2일
학문
학문 분야성리학
관련 학파노론

2. 생애

1689년(숙종 15년) 기사환국으로 송시열이 다시 제주도로 소환되자, 송시열의 마지막 길에 동행했다. 같은 해 송시열이 정읍에서 죽음을 맞이했을 때, 스승의 의복과 책을 유품으로 받아 노론의 2대 당수가 되었다. 그는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만동묘를 청주에 세워 명나라신종·의종을 모셨으며, 송시열의 뜻을 받들어 대보단을 세웠다. 숙종의 총애를 받아 우의정·좌의정 등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임했다. 이이성혼을 개조로 하여 김장생김집으로부터 송시열에게 계승된 기호학파의 지도자로서, 이이가 주장하는 "기발리승일도설"을 지지했다.

그는 평생 스승 송시열의 정적인 허목윤휴를 적으로 여겼다. 한원진과 이간이 인물성 편재 문제를 논의하는 가운데, 그는 한원진의 학설을 지지함으로써, 논쟁이 더욱 확대되어 기호학파는 분열되었다.

글씨와 전각에도 능했으며, 사후 충주의 누암서원, 청풍의 황강서원, 정읍의 고암서원, 성주의 노강서원, 보은의 산앙사, 예산의 집성사, 송화의 영당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으로 『한수재집』·『삼서집의』 등이 있다.[3]

2. 1. 생애 초반

1660년(현종 1년) 19세에 진사가 되었지만, 송시열·송준길을 스승으로 하여 성리학에 전념하였으며, 송시열의 고제자이자 후계자가 되었다.[3] 1675년(숙종 1년) 스승 송시열이 1659년(효종 10년)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로 덕원부에 유배되자[3], 남인이 집권했을 때, 충청북도청풍의 산 속에서 학문에 정진하며 제자들에게 유학을 가르치고, 주자의 서적을 번역하고 교정했다.

동생 권상유는 송시열과 송준길에게 배우던 중 두 사람의 죽음을 보았고, 그 후 권상하에게 성리학을 배웠다.

1686년(숙종 12년) 10월에 한수재를 건설하고, 11월에는 열락재를 지어 성리학을 강학했다.[3]

2. 1. 1. 수학과 초기 활동

사헌부 집의를 지낸 권격(權格)의 아들이자 한성부 출신으로, 권상명, 권상유(權尙游)의 형이다. 일찍부터 남다른 재능을 보였으며, 유계,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을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을 배웠는데, 특히 송시열의 수제자가 되었다.[4] 유계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송시열송준길의 문하에도 출입하여 수학하였다.

송시열의 제자였던 동생 권상유는 훗날 권상하의 문하에서도 수학하게 된다.

1660년(현종 1년) 19세에 진사가 되었지만, 송시열·송준길을 스승으로 하여 성리학에 전념하였으며, 송시열의 제자이자 후계자가 되었다. 1675년(숙종 1년) 스승 송시열이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로 덕원부에 유배되고[3], 남인이 집권했을 때, 충청북도청풍의 산 속에서 학문에 정진하며 제자들에게 유학을 가르치고, 주자의 서적을 번역하고 교정했다.

동생 권상유는 송시열과 송준길에게 배우던 중 두 사람의 죽음을 맞이했고, 그 후 권상하에게 성리학을 배웠다.

1686년(숙종 12년) 10월에 한수재를 건설하고, 11월에는 열락재를 지어 성리학을 강학했다.[3]

2. 1. 2. 예송 논쟁과 성균관 수학

1660년(현종 1년) 진사(進士)가 되어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부모의 상을 당한 뒤 예송 논쟁과 남인-서인 간의 갈등을 피해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부모의 3년상을 마친 뒤 송시열을 따라 화양(華陽)에서 사서(四書), 계몽(啓蒙), 계사(繫辭), 홍범(洪範) 내편(內篇)을 강론하였다.

그 뒤 성균관 유생으로 수학 중 1668년 스승 송시열남인(南人) 좌의정 허적(許積), 남인 거두 윤휴, 외척 김석주 등과의 불화로 우의정을 사직하자 스승 송시열의 상소를 받지 말고 유임시킬 것을 청원하는 상소를 올렸다.

2. 2. 학문 연구와 후학 교육

1660년(현종 1년) 19세에 진사가 되었지만, 송시열·송준길을 스승으로 하여 성리학에 전념하였으며, 송시열의 제자이자 후계자가 되었다. 동생 권상유는 송시열과 송준길에게 배우던 중 두 사람의 죽음을 맞이했고, 그 후 권상하에게 성리학을 배웠다.

1675년(숙종 1년) 스승 송시열이 장렬왕후의 복상 문제로 덕원부에 유배되자[3], 충청북도 청풍의 산 속에서 학문에 정진하며 제자들에게 유학을 가르치고, 주자의 서적을 번역하고 교정했다.

그는 평생 스승 송시열의 정적인 허목윤휴를 적으로 여겼다. 한원진과 이간이 인물성 편재 문제를 논의하는 가운데, 그는 한원진의 학설을 지지함으로써, 논쟁이 확대되어 기호학파가 분열되었다.

글씨와 전각에도 능했으며, 사후 충주의 누암서원, 청풍의 황강서원, 정읍의 고암서원, 성주의 노강서원, 보은의 산앙사, 예산의 집성사, 송화의 영당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으로 『한수재집』·『삼서집의』 등이 있다.

2. 2. 1. 은거 생활과 학문 연구, 후학 양성

1674년(숙종 즉위) 스승 송시열장렬왕후의 상복 문제로 삭탈관직당하고 덕원에 유배되고,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자 관계 진출을 단념하고 충청북도 청풍의 산중에 은거하여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후 청풍의 산중에서 학문에 힘쓰며 제자들을 모아 유학을 강론하는 한편 정호주희의 서적을 교정, 번역 보급하였다. 스승 송시열의 영향을 받아 여성들에게도 사자소학과 사서삼경의 한글번역본을 인쇄하여 보급하였다.[3]

송시열의 제자들 가운데는 민정중, 민시중, 김수항, 민유중, 김창협, 김익훈, 송규렴, 윤증 등 저명한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나, 권상하는 윤증이 송시열과 결별한 이후 스승의 학문과 학통을 계승하여 훗날 '사문지적전(師門之嫡傳)'으로 불릴 정도로 송시열의 수제자가 되었다.

송시열의 문하에서 함께 배운 윤증이 회니문제와 윤선거의 제사에 윤휴의 조문을 받아들인 일로 송시열과 사이가 벌어졌을 때도 그와 교류하였으나, 윤선거의 묘비문 문제로 윤증과 송시열이 갈라서자 윤증과 절교를 선언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윤증을 적으로 여기고 그와 그의 추종자들을 공격하였다.[3]

1686년(숙종 12년) 10월에 한수재를 건설하고, 11월에는 열락재를 지어 성리학을 강학했다.[3] 1689년 (숙종 15년) 기사환국으로 송시열이 다시 제주도에 소환되자, 송시열의 마지막 길에 동행했다. 같은 해 송시열이 정읍에서 죽음을 맞이했을 때, 스승의 의복과 책을 유품으로 받아, 그는 노론의 2대 당수가 되었다. 그는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만동묘를 청주에 세워 신종·의종을 모셨으며, 송시열의 뜻을 받들어 대보단을 세웠다.

2. 2. 2. 송시열의 임종

1689년(숙종 15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스승 송시열이 다시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국문을 받으러 상륙하자, 권상하는 송시열의 다른 문도들을 이끌고 광양으로 내려가 그를 맞이하였다. 이후 스승 송시열한성부로 가는 길을 도보로 동행하였다. 그러나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게 되자, 권상하는 그곳까지 가서 스승인 송시열에게 눈물로 이별을 고하고, 스승의 의복과 책을 선물로 물려받았으며, 그의 유지를 계승하였다.[3]

송시열이 사사되기 직전, 광양에서부터 정읍까지 육로로 도보수행하던 권상하가 들어가 결별 인사를 하자 송시열은 그의 손을 잡고 존주대의를 실천하고 도를 밝힐 것과 항상 '곧을 직(直)'을 행실의 사표로 삼아야 된다고 유언하였다.

송시열은 권상하에게 남긴 결별 편지에서 ‘곧을 직(直)’ 자의 의의에 대해 거듭 설명하고 누누이 강조하며 유도(儒道)의 맥을 이으라는 유언을 남겼다.

2. 2. 3. 갑술환국 이후

1689년(숙종 15년) 기사환국으로 송시열제주도로 유배될 때 동행하였다. 같은 해 송시열이 정읍에서 사사되었을 때, 스승의 의복과 책을 유품으로 받아 노론의 2대 당수가 되었다. 그는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만동묘를 청주에 세워 명나라신종·의종을 모셨으며, 송시열의 뜻을 받들어 대보단을 세웠다.[3] 1694년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몰락하였으나 관직을 사퇴하고 낙향,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했다.

1701년 희빈 장씨의 취선당 저주 사건으로 무고의 옥이 발생하여 남인이 완전히 몰락하였으나, 그는 출사하지 않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2. 3. 소론과의 갈등

권상하는 스승 송시열을 공격한 회니시비의 주인공이자 동문인 윤증에게 적대적이었다.[6] 1715년 윤선거유계의 공저인 《가례원류》의 저작권을 둘러싸고 윤선거의 아들 윤증과 유계의 손자 유상기 사이에 저작자 논쟁이 일어났다. 이때 권상하는 서문을 써주면서 유계의 저술이라고 밝혀 소론의 영수 윤증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그러자 권상하는 윤증이 스승을 배신하였다며 그를 공격하였다.

회니시비 이후 윤증을 공격했고 부정적으로 평가하던 권상하는 가례원류 사건을 계기로 윤증과 원수가 되었다.

그 뒤 권상하는 송시열의 비문을 작성하면서 송시열이 화를 당한 것은 "윤증이 (사사로운 마음으로) 윤휴, 허목의 무리와 함께 조작한 것”이라는 내용을 비문에 기록하였다. 이로 인해 소론계 유생 유규 등 8백여 명의 성균관 소론계 유생들과 사간원대사간 이관명, 홍문관수찬 어유구[5]소론측으로부터 비문을 수정하라는 항의를 받았으나, 권상하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2. 3. 1. 회니시비와 가례원류 논쟁

그는 특히 스승을 공격한 회니시비의 주인공인 동문 윤증에게 적대적이었다.[6] 1715년 《가례원류》의 저작권을 둘러싸고 윤선거유계의 공저였으나 윤선거의 아들 윤증과 유계의 손자 유상기 사이에 각자 자신의 조상이 단독으로 쓴 책이라며 저작자 논쟁을 일으키자, 그는 서문을 써주면서 유계의 저술이라고 밝혀 소론의 영수 윤증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그러자 그는 윤증이 스승을 배신하였다며 그를 공격하였다.

회니시비 이후 윤증을 공격했고 부정적으로 평가하던 권상하는 가례원류 사건 이후로 윤증과 원수가 된다.

그 뒤 송시열의 비문을 찬하면서 송시열이 화를 당한 것은 "윤증이 (사사로운 마음으로) 윤휴, 허목의 무리와 함께 조작한 것”이라는 내용을 비문에 기록하여 소론계 유생 유규 등 8백여 명의 성균관 소론계 유생들에게 비판을 받고 사간원대사간 이관명, 홍문관수찬 어유구[5]소론측으로부터 비문을 수정하라는 항의를 당하였으나 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715년에는 윤선거와 유계의 공저인 가례원류의 저작권을 둘러싸고 윤선거와 유계의 후손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자, 권상하는 그 서문에서 유계의 저술이라고만 하여 소론의 영수 윤증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이어 스승 송시열의 묘비명을 지을 때 송시열이 화를 당한 것은 장희빈 소생 원자 책봉을 반대해서가 아니라 “윤증윤휴, 허목의 무리와 함께 조작한 것”이라 주장하며 이를 그대로 송시열의 비문에 기록하여 소론계 유생 유규 등 8백여 명과 소론사간원대사간 이관명, 홍문관수찬 어유구소론이 반발, 소론측으로부터 비문을 수정하라는 항의를 받기도 하였다.

2. 3. 2. 송시열 묘비명 사건

그는 스승을 공격한 회니시비의 주인공이자 동문인 윤증에게 적대적이었다. 1715년 《가례원류》의 저작권을 둘러싸고 윤선거유계의 공저였으나 윤선거의 아들 윤증과 유계의 손자 유상기 사이에 각자 자신의 조상이 단독으로 쓴 책이라며 저작자 논쟁을 일으키자, 그는 서문을 써주면서 유계의 저술이라고 밝혔다. 그러자 그는 윤증이 스승을 배신하였다며 소론의 영수 윤증을 맹비난하였다.

회니시비 이후 윤증을 공격했고 부정적으로 평가하던 권상하는 가례원류 사건 이후로 윤증과 원수가 된다.

그 뒤 송시열의 비문을 찬하면서 송시열이 화를 당한 것은 "윤증이 (사사로운 마음으로) 윤휴, 허목의 무리와 함께 조작한 것”이라는 내용을 비문에 기록하여 소론계 유생 유규 등 8백여 명의 성균관 소론계 유생들에게 비판을 받고 사간원대사간 이관명, 홍문관수찬 어유구[5]소론측으로부터 비문을 수정하라는 항의를 당하였으나 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2. 4. 생애 후반

1660년(현종 1년) 19세에 진사가 되었지만, 송시열·송준길을 스승으로 하여 성리학에 전념하였으며, 송시열의 제자이자 후계자가 되었다. 1675년(숙종 1년) 스승 송시열이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로 덕원부에 유배되고[3], 남인이 권력을 잡았을 때, 충청북도 청풍의 산 속에서 학문에 정진하며 제자들에게 유학을 가르치고, 주자의 서적을 번역하고 교정했다.

동생 권상유는 송시열과 송준길에게 배우던 중 두 사람의 죽음을 보았고, 그 후 권상하에게 성리학을 배웠다.

1686년(숙종 12년) 10월에 한수재를 짓고, 11월에는 열락재를 지어 성리학을 가르쳤다[3] . 1689년 (숙종 15년) 기사환국으로 송시열이 다시 제주도에 소환될 때, 송시열의 마지막 길을 함께 했다. 같은 해 송시열이 정읍에서 처형되었을 때, 스승의 의복과 책을 유품으로 받아 노론의 2대 당수가 되었다. 그는 평생 송시열의 정적인 허목윤휴를 적으로 여겼다. 한원진과 이간이 인물성 편재 문제를 논의할 때, 한원진의 학설을 지지하여 논쟁이 확대되었고 기호학파는 결국 분열되었다.

글씨와 전각에도 능했으며, 사후 충주의 누암서원, 청풍의 황강서원, 정읍의 고암서원, 성주의 노강서원, 보은의 산앙사, 예산의 집성사, 송화의 영당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으로 『한수재집』·『삼서집의』 등이 있다.

2. 4. 1. 송시열의 계승자

송시열의 제자들 중에는 민정중, 민시중, 김수항, 민유중, 김창협, 김익훈, 송규렴, 윤증 등 저명한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나, 권상하는 윤증이 송시열과 결별한 이후 스승의 학문과 학통을 계승하여 훗날 '사문지적전(師門之嫡傳)'으로 불릴 정도로 송시열의 수제자가 되었다.[3] 이와 같은 학파적인 위치로 인하여 정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송시열이 사사되기 직전, 권상하는 광양에서부터 정읍까지 육로로 도보수행하여 스승을 뵈러 갔다. 송시열은 그의 손을 잡고 존주대의를 실천하고 도를 밝힐 것과 항상 '곧을 직'을 행실의 사표로 삼아야 된다고 유언하였다. 또한 송시열은 그에게 결별을 고하는 편지를 남겼는데 여기에서 ‘곧을 직(直)’ 자의 의의에 대해 거듭 설명, 누누이 강조하며 유도(儒道)의 맥을 이으라는 유언을 그에게 남겨주었다.

그 뒤 권상하는 송시열의 상에 3년복을 입고 3년상을 마쳤다. 이후 권상하는 백호 윤휴와 명재 윤증을 이단이라며 공격하였고, 송시열의 유언을 받들어 청주만동묘(萬東廟)를 세워 명나라의 신종, 의종 등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3] 그는 만동묘에 명나라 신종(神宗)을 제향하여 임진왜란 때 파병을 한 것을 추모하였고, 명나라 의종(毅宗) 숭정제를 추가 배향하였다. 또한 숙종의 특명을 받고 명나라임진왜란 파병을 감사하는 대보단(大報壇)을 세워 명나라 장병들의 넋을 기렸다.

2. 4. 2. 최후

1717년 아들 권욱이 죽었다. 1721년(경종 1년) 경종 즉위 초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리고 나가지 않았다. 글씨에 뛰어났으며 간결하고 힘이 넘쳤다. 문집에 《한수재집(寒水齋集)》, 《삼서집의(三書輯疑)》 등이 있다. 그해 8월 29일에 향년 80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관학(館學)의 유생(儒生)들이 모두 신위(神位)를 모신 곳으로 달려가 곡(哭)하였고 상복(喪服)을 입은 문인(門人)들이 수백 명이나 되었다. 시호는 문순이다.

3. 사상

권상하는 이이-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학통을 계승하였으며, 그의 문인들에 의해 호락논변(湖洛論辨)이라는 학술 토론 문화를 일으켰다. 당쟁기 이후 학문과 독서를 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려 노력했다. 조광조, 백인걸, 이이, 성혼, 송익필, 김장생, 김집을 거쳐 송시열로 계승된 기호서인학파(畿湖西人學派)의 종장으로, 이황의 학설을 비판하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였다.

3. 1. 이기론과 심성론

그는 16세기에 정립된 이황이이의 이론 중 이이-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학통을 계승하고, 그의 문인들에 의해 전개되는 이른바 호락논변(湖洛論辨)이라는 학술토론 문화를 일으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당쟁기 이후 사회적으로 학문과 독서를 하는 분위기를 만들려 노력했다. 그는 조광조백인걸을 거쳐 이이(李珥)와 성혼으로 계승된 학파와 송익필로부터 시작되는 학파에서 김장생, 김집을 거쳐 송시열에게로 계승된 기호서인학파(畿湖西人學派)의 종장이었으며, 이황의 학설을 비판하고 이이성혼의 학설 중에서는 이이가 주장하는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채택하여 정론이라 선언하고 이를 지지하였다.

3. 2. 인물성 상이론

그는 16세기에 정립된 이황이이의 이론 중 이이-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학통을 계승하고, 그의 문인들에 의해 전개되는 이른바 호락논변(湖洛論辨)이라는 학술토론 문화를 일으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당쟁기 이후 사회적으로 학문과 독서를 하는 분위기를 만들려 노력했다. 그는 이이가 주장하는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채택하여 정론이라 선언하고 이를 지지하였다.[1]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의 동이논쟁(同異論爭)인 호락논변이 제자 이간과 한원진 사이에 제기되자 그는 한원진의 편을 들었는데, '인성이 물성과 다른 것은 기(氣)의 국(局)때문이며, 인리(人理)가 곧 물리(物理)인 것은 이(理)의 통(通)때문이다.'라고 한 이이의 이통기국(理通氣局)설을 들어 한원진의 상이론(相異論)에 동조하였다. 인성·물성 상이론의 발상은 후천적인 기질의 다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본성을 동물성으로부터 분별하고 보호하려는 데 있었다.[1]

그는 인성과 물성은 서로 상이한 것이며 인성이 물성을 통제해야 된다고 확신하였다. 인성과 물성의 상이론을 주장한 배경에는 본성을 후천적인 것, 즉 기질의 다름에 따라 달리할 수 있는 것임을 주장하여 동물성으로부터 분별, 보호하려는 데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본성의 문제를 물성과 관련하여 이해하려는 태도는 인성론이 자연물에까지 확대된 형이상학적 전개로서, 이황, 이이 이후 다시 이와 기에 대한 규정, 연구를 이끌어냈다.[1]

본성의 문제를 물성과 관련하여 이해하려는 태도는 인성론이 자연물에까지 확대된 형이상학적 전개로서, 이황·이이 이래 조선 성리학의 이론적 발전상을 보여준다. 또한 17세기 이후 성리학이 예학(禮學)에 의해 구체적인 사회 규범으로써 경직되어가는 학문 풍토에서 인성·물성 상이론의 제기는 예학적 학문 이론을 활성화하고 심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17세기 이후 성리학이 교조적인 예학(禮學)에 의하여 개혁성이나 예학으로서의 본래 취지를 상실한 채 사회규범으로서 경직되어가는 학문풍토에서, 인성·물성 상이론의 제기는 예학적 학문이론을 활성화하고 심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는 평가도 있다.[1]

3. 3. 만동묘 설립과 존화양이 사상

송시열은 1689년 제주로 유배를 가면서 수암 권상하에게 화양동에 만동묘를 세울 것을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다.[7] 그 편지에서 만동묘에서 명나라 신종의종을 제사지내는 이유를 밝혔다. 임진왜란조선을 도와준 신종에게는 멸망하는 나라를 지켜준 은혜에 보답하는 의리(義理)를 다하는 것이요, 의종에게는 나라가 망하면 국왕이 죽음으로써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정도(正道)를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하였다.[7]

권상하는 송시열의 유지를 받들어 만동묘를 세웠고, 만동묘는 화양서원으로 발전했다. 이는 세도정치 이전까지 집권 노론의 인재 양성의 산실이었으며, 흥선대원군의 집권 이후 폐쇄되었다. 흥선대원군만동묘에 놀러 갔다가 엄숙한 곳에서 예의를 갖추지 않아 고지기에게 구타를 당했고, 이에 원한을 품고 서원 철폐까지 하게 된 것이다.

4. 저작


  • 《한수재집》
  • 《삼서집의》
  • 〈기백이태연표〉
  • 〈형참권극화표〉
  • 〈부사과이숙표〉

5. 가족 관계

관계이름출생사망
조부권성원(權聖源)1602년1662년
조모진주 강씨
부친권격(權格)1620년1671년
외조부이초로(李楚老)1603년1678년
외조모밀양 변씨
모친함평 이씨1622년?
여동생권계강(權季姜)1657년?
남동생권상명(勸尙明)1652년1684년
남동생권상유1656년1724년
여동생권차강(權次姜)1663년?
부인전주 이씨
아들권욱(權煜)1658년1717년
손자권양성(權養性)1675년1746년
손자권정성(權定性)
손녀이사휘(李思輝)의 처
손녀안동 권씨1687년1723년


6. 평가

그는 송시열의 죽음을 순교로 해석했다. 그는 송시열윤증, 윤휴, 허목의 무리에 의해서 희생당한 것이라고 반복해서 말했다. 송시열 자신은 자신의 사약을 순교로 해석했고, 유배생활을 정도를 걷는 자에 대한 사도의 탄압으로 여겼다. 송시열의 사후 그의 제자였던 권상하 역시 송시열의 죽음을 순교로 해석하였다.

그는 "윤증이 (사사로운 마음으로) 윤휴, 허목의 무리와 함께 조작한 것"이라며 윤증허목, 윤휴가 술수를 꾸며 송시열을 죽게 했다고 굳게 확신하였다. 그는 이를 자신이 지은 송시열의 묘비명에도 기록하였다.

비록 성균관 문묘에는 종사되지 못하였으나 우암 송시열의 학통을 계승한 정통으로 평가되었다.

7. 기타

영남에 사당이 마련된 몇 안 되는 송시열학파의 인물이기도 하다.

예송 이후 송시열윤휴를 적휴(賊鑴), 참적(斬賊), 허목을 독물(毒物), 독극물, 흉목(凶穆)이라고 불렀다. 이는 송시열의 수제자인 권상하에게도 계승되어, 권상하는 윤휴를 지칭할 때마다 항상 적휴, 참적, 허목을 지칭할 때는 독물, 독극물, 흉목이라 불렀다. 권상하는 공문서와 다른 사람의 묘지명, 묘갈명, 신도비문 등에서도 윤휴를 항상 적휴, 참적, 허목을 독물, 독극물, 흉목이라 불렀다.

그의 동생이자 제자인 권상유성리학을 비판한 윤휴박세당을 옹호하기도 했다.

참조

[1] 논문 율곡학의 확산과 심화2; 조선 후기 노론 학맥의 분화와 그 세계관 -18세기 호락학파의 형성과 현실인식을 중심으로- https://papersearch.[...] 2011
[2] 논문 Yi Gan's Inclination Toward The Learning Of The Mind-Heart In The 18th Century: A Comparison With Wang Yangming's Mind-Heart Philosophy https://doi.org/10.1[...] 2020-06-01
[3] 뉴스 한강을 걷다 한수재 짓고 황강에 은거한 권상하 http://news.khan.co.[...]
[4] 문서 송시열의 문하들 중에 그가 송시열의 학문적 적장자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5] 문서 경종의 장인이다.
[6] 웹사이트 화양서원(華陽書院)과 만동묘(萬東廟) http://www.cjmuseum.[...]
[7] 웹사이트 화양서원과 만동묘 http://www.cj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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