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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콜룸 4세 막 안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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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말 콜룸 4세 막 안리크는 1153년 12세의 나이로 스코틀랜드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즉위 직후 노르웨이의 침략과 북부 하이랜드 호족들의 반란에 직면했으며, 잉글랜드 왕 헨리 2세의 요구에 굴복하여 노섬벌랜드, 컴벌랜드, 웨스트모어랜드 3개 주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했다. 재위 기간 동안 갤러웨이의 반란을 진압하고 왕권을 강화했으며, 1165년 24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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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콜룸 4세 막 안리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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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1153년 5월 24일
퇴위1165년 12월 9일
대관식1153년 5월 27일
이전 통치자데이비드 1세
다음 통치자윌리엄 1세
왕가덩켈드 왕조
아버지헌팅던 백작 헨리
어머니에이다 드 와렌
출생일1141년 4월 23일 ~ 1141년 5월 24일 사이
출생지스코틀랜드
사망일1165년 12월 9일 (향년 24세)
사망지제드버러, 록스버그셔, 스코틀랜드
매장지던펌린 수도원
중세 게일어Máel Coluim mac Eanric
스코틀랜드 게일어Maol Chaluim mac Eanraig
별칭처녀왕
개인 정보
성별남성

2. 즉위 과정

데이비드 1세가 1153년 5월 24일 사망하자, 그의 손자 말 콜룸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아버지 헨리 백작이 이미 전년에 사망했기 때문이다.[34] 말 콜룸은 1153년 5월 27일, 12세의 어린 나이로 스코운에서 국왕으로 즉위했다.[6]

이 즉위식은 던칸 백작 주도하에 매우 서둘러 진행되었는데, 심지어 할아버지 데이비드 1세의 장례가 치러지기도 전이었다. 이는 당시 말 콜룸의 왕위에 도전할 수 있는 경쟁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왕위를 신속하게 확보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5] 말 콜룸의 섭정이자 즉위 과정을 관리했던 던칸 백작은 즉위식 다음 해인 1154년에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와 상속

데이비드 1세 (왼쪽)와 어린 말 콜룸 4세 (오른쪽)가 켈소 수도원에 보내는 헌장에 묘사되어 있다.


헨리 백작은 데이비드 1세 국왕의 아들이자 상속자였으나, 1140년대 내내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는 1152년 6월 12일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사망 장소는 잉글랜드 노섬브리아의 뉴캐슬어폰타인 또는 록스버그로 추정되는데, 이 지역들은 아버지 데이비드 1세가 헨리 1세 사망 후 잉글랜드가 약해진 틈을 타 스코틀랜드 영토로 편입시킨 곳이었다. 화이트쉽 침몰 사고로 아들을 잃어 후계자가 없던 잉글랜드 국왕과 달리, 스코틀랜드의 데이비드 1세에게는 손자들이 있었기에 왕위 계승에 문제가 없었다. 헨리 백작에게는 왕위를 이을 세 아들이 있었다.[4]

헨리 백작의 맏아들인 말 콜룸은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겨우 11세의 나이로 할아버지의 상속자가 되었다.[34]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말 콜룸은 할아버지의 명에 따라 던칸(파이프 모르메르)과 함께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왕국을 순회하며 후계자로서의 준비를 했다. 당시 던칸은 "총장"으로 불렸는데, 이는 데이비드 1세 사후 말 콜룸의 섭정이 될 예정이었음을 시사할 수 있다.[5]

이러한 준비는 시기적절했다. 데이비드 1세는 아들 헨리 백작이 사망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1153년 5월 24일 칼라일에서 세상을 떠났다. 말 콜룸은 할아버지가 사망한 지 불과 3일 뒤인 1153년 5월 27일, 12세의 나이로 스코운에서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즉위했다.[6] 어린 국왕의 섭정이 된 던칸은 데이비드 1세의 장례가 치러지기도 전에 서둘러 즉위식을 거행했다. 이는 당시 말 콜룸에게 왕위 경쟁자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던칸 자신도 즉위식 이듬해인 1154년에 사망했다.

2. 2. 즉위식



데이비드 1세 국왕의 아들이자 후계자였던 헨리 백작은 1140년대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고, 1152년 6월 12일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망 장소는 잉글랜드 노섬브리아의 뉴캐슬어폰타인 또는 록스버그로 추정되는데, 이 지역들은 헨리 1세 사후 잉글랜드의 혼란기를 틈타 데이비드 1세와 헨리 백작이 스코틀랜드 영토로 편입시킨 곳이었다. 화이트쉽 침몰 사고로 적자 아들을 잃어 후계자 문제에 직면했던 잉글랜드 왕가와 달리, 스코틀랜드의 데이비드 1세에게는 헨리 백작이 남긴 세 아들이 있었기에 왕위 계승에 대한 불안은 상대적으로 적었다.[4]

헨리 백작의 장남인 말 콜룸은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겨우 11세였지만, 할아버지 데이비드 1세의 지시에 따라 던칸 백작(파이프 모르메르)과 함께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왕국을 순회하며 후계자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당시 던칸 백작은 '총장'으로 불렸는데, 이는 데이비드 1세 사후 말 콜룸의 섭정 역할을 맡을 인물로 여겨졌음을 시사한다.[5] 이러한 준비는 데이비드 1세가 1153년 5월 24일 칼라일에서 아들보다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사망하면서 시기적절했음이 증명되었다.

할아버지 데이비드 1세가 사망한 지 불과 사흘 뒤인 1153년 5월 27일, 12세의 말 콜룸은 스코운에서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즉위했다.[6] 던칸 백작은 데이비드 1세의 장례가 치러지기도 전에 서둘러 즉위식을 진행했는데, 이는 말 콜룸의 왕위에 도전할 경쟁자들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둔 조치로 보인다. 던칸 백작 자신도 즉위식 이듬해인 1154년에 사망했다.

3. 통치 기간

1153년, 할아버지 데이비드 1세가 사망하자, 11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34] 즉위 초에는 왕위 계승 경쟁자들의 위협과 노르웨이의 침공, 잉글랜드의 헨리 2세 등 주변 세력과의 긴장 관계에 놓였다.

잉글랜드와의 관계에서는 1157년 헨리 2세에게 노섬벌랜드, 컴벌랜드, Westmorland|웨스트모어랜드eng 3개 주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고 헌팅던 백작령을 받았다.[1][12] 1159년에는 헨리 2세의 프랑스 툴루즈 백작령 원정에 참여하여 기사 작위를 받았다.[14] 이러한 대(對)잉글랜드 정책은 스코틀랜드 내부 귀족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말콤 4세의 은화 페니(Museum on the Mound)


내부적으로는 1160년 퍼스에서 귀족들의 반란 시도가 있었으나[15] 큰 충돌 없이 해결되었고[17], 이후 갤러웨이와 모레이에서 일어난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며 왕권을 강화했다.[17][20] 1164년에는 오랜 경쟁자였던 아르길의 왕 소머레드가 렌프루를 공격했으나 전투 중 사망했다.[21]

1160년 콩스탕스 드 팡티에브르와의 혼담이 있었으나 성사되지 않았다. 말 콜룸 4세는 1165년 23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했으며, 자녀가 없어 동생 윌리엄 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38]

3. 1. 내부 반란과 왕권 강화

1153년 11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말 콜룸 4세는 즉위 초부터 내외부의 여러 도전에 직면했다. 왕위 계승 경쟁자들이 있었고[7][8], 아르길의 소머레드, 갤러웨이의 퍼거스 오브 갤러웨이, 잉글랜드의 헨리 2세 등 강력한 이웃 세력의 위협과 노르웨이왕 외스테인 2세의 침공도 겪었다.[37] 초기 반란 시도가 있었으나[9][10] 큰 위협이 되지는 못했고, 말콤은 마엘 콜룸 맥헤스와의 화해 등을 통해 안정을 도모했다.[11]

그러나 잉글랜드 헨리 2세에게 1157년 북부 3개 주(노섬벌랜드, 컴벌랜드, 웨스트모어랜드)를 반환하고[37], 1159년에는 헨리 2세의 프랑스 툴루즈 백작령 원정에 참여하는 등[37] 잉글랜드에 대한 유화책은 일부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반발을 샀다.

이에 남서부 갤러웨이를 중심으로 반란이 일어났으나, 말 콜룸 4세는 1160년부터 1164년까지 이어진 군사 작전을 통해 이를 성공적으로 진압했다. 그는 노르만인 귀족들의 도움을 받아 갤러웨이를 왕권 아래 병합하며 호족 세력을 제압하고 왕권을 강화했다.[38]

3. 1. 1. 초기 반란 (1153년)

1153년 조부 데이비드 1세가 사망하자, 전년에 이미 사망한 아버지 헨리를 대신하여 11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34]

어린 왕의 즉위는 여러 도전을 불러왔다. 내부적으로는 왕위 계승 경쟁자들이 존재했다. 오르크니가 사가는 윌리엄 피츠 덩컨의 아들이 "모든 스코틀랜드인이 왕으로 원했던" 인물이라고 전하지만[7], 그가 실제로 왕위를 주장했다는 증거는 없으며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8] 알렉산더 1세의 사생아인 말 콜룸 맥 알락산다르는 투옥되어 있었지만, 그의 아들들은 자유로운 상태로 왕위 계승에 도전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도널 맥 유일렘 역시 모레이 지방에서 지지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외부적으로도 위협이 존재했다. 아르길의 왕 소머레드, 갤러웨이의 영주 퍼거스 오브 갤러웨이, 잉글랜드의 헨리 2세 등이 새로운 왕의 통치에 위협적인 존재였다. 오크니 백작 로그날드 칼리 콜손은 당시 순례 중이었으나, 그의 사후 해럴드 매더슨이 권력을 잡아 또 다른 위협이 되었다. 또한 즉위 직후 노르웨이왕 외스테인 2세가 북동부의 애버딘을 공격하기도 했다.[37]

말콤 4세에 대한 첫 공개적인 반란은 1153년 11월, 말 콜룸 맥 알락산다르의 아들들이 일으켰다. 이들은 이웃한 아르길의 소머레드의 지원을 받았다.[9] 그러나 소머레드가 아일스의 구드레드 올라프손과의 전쟁(1156년까지 지속) 및 멘테스 백작 길 크리스트와의 코왈 지역 분쟁 등 다른 문제에 직면하면서[9] 반란에 대한 지원은 곧 중단되었고 위협은 빠르게 가라앉았다. 왕국의 중심부에서도 반란에 동조한 세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연대기 기록에 따르면 두 명의 공모자 중 한 명은 1154년 2월 결투 재판에서 사망했다.[10]

1157년, 말콤 왕은 마엘 콜룸 맥헤스와 화해하고 그를 로스 백작령에 임명하며 초기 혼란을 수습해 나갔다.[11]

3. 1. 2. 갤러웨이 병합 (1160년-1164년)

1157년, 잉글랜드의 헨리 2세의 요구에 따라 노섬벌랜드, 컴벌랜드, 웨스트모어랜드 3개 주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고, 1159년에는 헨리 2세의 프랑스 툴루즈 백작령 원정에 동생 윌리엄(훗날 윌리엄 1세)과 함께 참여하여 기사 작위를 받는 등, 말 콜룸 4세의 잉글랜드에 대한 태도는 일부 스코틀랜드 귀족들에게 굴욕적으로 받아들여졌다.[37]

이에 반발한 귀족들은 남서부의 갤러웨이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성장한 말 콜룸 4세는 이 반란에 맞서 1160년부터 1164년까지 군사 작전을 펼쳤다. 그는 조부 데이비드 1세가 등용한 노르만인 귀족들을 동원하여 북부 지역의 반란 세력을 토벌하고, 갤러웨이 지역을 왕권 아래 병합하며 호족들을 성공적으로 제압했다.[38]

3. 2. 잉글랜드와의 관계

말 콜룸 4세는 스코틀랜드의 왕위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할아버지 데이비드 1세와 아버지 헨리 막 다비드가 잉글랜드 내전 시기에 획득한 노섬브리아 백작령과 컴브리아 등의 영지를 상속받았다. 이는 잉글랜드 왕실의 봉토였기에, 잉글랜드의 새로운 왕 헨리 2세와의 관계 설정이 중요한 과제였다.[1]

헨리 2세는 즉위 후 데이비드 1세가 차지했던 잉글랜드 북부 영토의 반환을 요구했다. 말 콜룸 4세는 처음에는 경의 표명을 미루었으나, 결국 1157년 더비셔(Derbyshire)의 페버릴 성(Peveril Castle)과 체스터에서 헨리 2세에게 경의를 표했다.[1] 이 과정에서 헨리 2세는 말 콜룸 4세가 상속받은 컴브리아와 그의 동생 윌리엄이 물려받은 노섬브리아 백작령의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고, 대신 헌팅던 백작령을 하사하며 이에 대한 경의를 받았다.[12] 이로써 스코틀랜드는 노섬벌랜드, 컴벌랜드, Westmorland|웨스트모어랜드eng 3개 주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게 되었다.[37]

이후 1159년에는 헨리 2세의 프랑스 툴루즈 백작령 원정에 동행하여 기사 작위를 받기도 했으나,[14] 이러한 일련의 대(對)잉글랜드 정책은 스코틀랜드 내에서 굴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져 귀족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특히 영지를 잃은 동생 윌리엄은 헨리 2세에게 깊은 원한을 품게 되었다.

3. 2. 1. 헨리 2세와의 관계

페버릴 성(Peveril Castle) in 더비셔(Derbyshire), 1157년 맬컴 4세가 헨리 2세에게 경의를 표한 곳


맬컴 4세는 스코틀랜드의 왕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스티븐과 마틸다 여제 사이의 내전 기간 동안 획득했던 노섬브리아 백작령을 상속받았다. 그는 이 노섬브리아 백작령을 동생 윌리엄에게 주었으며, 자신은 컴브리아를 소유했다. 컴브리아, 노섬브리아, 그리고 헌팅던 백작령 등은 잉글랜드 왕실에 속한 봉토였다.

잉글랜드의 새로운 왕 헨리 2세는 데이비드 1세가 차지했던 잉글랜드 북부 영토의 반환을 요구했다. 맬컴 4세는 헨리 2세의 요구에 따라, 자신의 잉글랜드 내 영지에 대한 경의 표명을 미루다가 1157년 더비셔(Derbyshire)의 페버릴 성(Peveril Castle)과 이후 체스터에서 헨리 2세에게 경의를 표했다.[1] 이 과정에서 헨리 2세는 맬컴이 컴브리아를, 윌리엄이 노섬브리아를 계속 보유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헨리 2세는 맬컴에게 헌팅던 백작령을 하사했고, 맬컴은 이에 대해 경의를 표했다.[12] 결과적으로 맬컴 4세는 1157년에 노섬벌랜드, 컴벌랜드, 웨스트모어랜드(Westmorland) 3개 주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고 헌팅던 백작령을 받는 데 동의해야 했다.

1158년, 맬컴과 헨리는 칼라일(Carlisle)에서 다시 만났으나, "그들은 좋은 친구가 되지 못한 채 돌아갔고, 스코틀랜드 왕은 아직 기사가 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13] 이듬해인 1159년, 맬컴은 헨리 2세를 따라 프랑스로 가서 툴루즈 공성전에 참여했고, 그곳에서 기사 작위를 받았다. 이 행동이 스코틀랜드 왕으로서의 행동인지, 아니면 잉글랜드의 봉신인 헌팅던 백작으로서의 행동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스코틀랜드 내부에서는 비판적인 시각이 존재했다.[14][37] 특히 동생 윌리엄은 헨리 2세의 압력으로 영지를 몰수당한 것에 원한을 품고 잃어버린 영토 회복에 집념을 불태우게 되었다.

맬컴 4세의 이러한 대(對)잉글랜드 정책은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반발을 샀고, 이는 이후 갤러웨이(Galloway) 등지에서 발생한 반란의 한 원인이 되었다.

3. 2. 2. 영토 상실 (1157년)



말 콜룸 4세스코틀랜드의 왕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 헨리 막 다비드와 할아버지 데이비드 1세가 잉글랜드의 스티븐과 마틸다 여제 사이의 내전(무정부 시대) 동안 획득한 노섬브리아 백작령을 상속받았다. 말 콜룸은 노섬브리아를 동생 윌리엄에게 주었고, 컴브리아는 자신이 소유했다. 컴브리아는 노섬브리아, 헌팅던 백작령, 그리고 나중에 체스터 백작령처럼 잉글랜드 왕실의 봉토였다.

잉글랜드의 헨리 2세는 데이비드 1세가 차지했던 잉글랜드 북부 영토의 반환을 요구했다. 말 콜룸은 헨리 2세의 왕국 내 자신의 영지에 대해 헨리 2세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을 미루었으나, 결국 1157년 더비셔의 페버릴 성과 이후 체스터에서 경의를 표했다.[1] 그러나 헨리 2세는 말 콜룸이 컴브리아를, 윌리엄이 노섬브리아를 계속 소유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말 콜룸에게 헌팅던 백작령을 하사했고, 말 콜룸은 이에 대해 경의를 표했다.[12] 이로써 말 콜룸 4세는 1157년에 헌팅던 백작령과 교환하여 노섬벌랜드, 컴벌랜드, Westmorland|웨스트모어랜드영어 3개 주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게 되었다.[37] 이는 스코틀랜드 입장에서 상당한 영토 손실이었다.

이 결정으로 인해 3개 주의 영주였던 동생 윌리엄은 헨리 2세의 압력으로 영지를 몰수당한 것에 원한을 품고 훗날 영토 탈환에 집념을 보이게 된다.[37]

3. 2. 3. 툴루즈 원정 참여 (1159년)

1158년 칼라일(Carlisle)에서 헨리 2세와 두 번째 만남을 가졌으나, 양측의 관계는 개선되지 않았고 말 콜룸 4세는 기사 작위를 받지 못했다.[13] 이듬해인 1159년, 말 콜룸 4세는 헨리 2세의 프랑스 툴루즈 백작령 원정에 동행하여 툴루즈 공성전에 참여했다.[37] 그는 이 원정에서 마침내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14] 동생인 윌리엄도 함께 기사가 되었다.

그러나 말 콜룸 4세가 잉글랜드 왕의 원정에 참여한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이것이 스코틀랜드 왕으로서의 주체적인 행동인지, 아니면 잉글랜드 왕에게 봉신 서약을 한 헌팅던 백작으로서 의무를 다한 것인지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기록은 이를 "기사다운 무기를 갈망하는 사람의 행동"으로 보면서도, "스코틀랜드에서 더 용납할 수 있게 만들지는 못했다"고 평가했다.[14] 이는 말 콜룸 4세가 헨리 2세의 압력에 굴복하여 노섬벌랜드, 컴벌랜드, Westmorland|웨스트모어랜드영어 3개 주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한 것에 대한 불만과 더불어,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그의 잉글랜드에 대한 굴욕적인 태도에 반발하는 배경이 되었다.

4. 사망과 후계

말 콜룸 4세는 1165년 12월 9일, 제드버러에서 2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이른 죽음은 뼈의 비대와 변형을 일으키는 만성 질환인 파제트병 때문일 수 있다는 추측이 있다.[23]

그가 살았던 시대의 사람들은 말 콜룸이 훌륭한 왕이 될 자질을 가졌다고 보았지만, 후대의 기록가들은 다소 다른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1165년 직후 쓰인 ''얼스터 연대기''는 그를 "헨리의 아들인 말 콜룸 켄 모어, 스코틀랜드의 고왕은, 동쪽 바다에 사는 가이딜인 중 자선, 환대, 경건함에 있어 최고의 기독교인이 사망했다"고 칭찬했다.[24] 윌리엄 오브 뉴버그 역시 그의 저서 ''Historia Rerum Anglicarum''에서 말 콜룸을 "스코틀랜드의 가장 기독교적인 왕"으로 높이 평가했다.[25]

하지만 모든 평가가 긍정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Gesta Annalia''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말 콜룸은] 왕국의 관리뿐만 아니라 통치에도 완전히 소홀했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일반 백성들에게 매우 미움을 받았고, 그의 형제 중 맏이인 윌리엄은 항상 잉글랜드인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그들의 영원한 적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의 재산인 노섬브리아 백작령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왕의 뜻에 반하여 왕국의 전체 감시자로 임명되었다."[26]

말 콜룸에게는 정식 후계자가 없었다. 카푸아의 헨리 공자의 딸과 약혼했다는 전설이 있지만, 자녀가 없었기에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의 어머니가 브르타뉴 공작 코난 3세의 딸 콘스탄스와의 결혼을 추진했으나, 말 콜룸은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사망했다.[27]

결국 말 콜룸 4세는 독신으로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왕위는 동생인 윌리엄 1세가 계승했다.[38]

5. 평가

(내용 없음)

5. 1. 당대와 후대의 평가

말 콜룸 4세는 1165년 12월 9일, 제드버러에서 24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이른 죽음은 파제트병(뼈의 비대와 변형을 유발하는 만성 질환)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추측이 있다.[23]

동시대 사람들은 말 콜룸이 훌륭한 왕이 될 자질을 갖추었다고 평가했지만, 후대의 기록가들은 다소 다른 시각을 보이기도 했다. 1165년 직후에 쓰인 ''얼스터 연대기''는 말 콜룸을 긍정적으로 묘사했다.

:헨리의 아들인 말 콜룸 켄 모어, 스코틀랜드의 고왕은, 동쪽 바다에 사는 가이딜인 중 자선, 환대, 경건함에 있어 최고의 기독교인이 사망했다.[24]

윌리엄 오브 뉴버그 역시 그의 저서 ''Historia Rerum Anglicarum''에서 말 콜룸을 "스코틀랜드의 가장 기독교적인 왕"이라고 높이 평가했다.[25]

그러나 모든 평가가 긍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Gesta Annalia''는 말 콜룸의 통치에 대해 비판적인 기록을 남겼다.

:[말 콜룸은] 왕국의 관리뿐만 아니라 통치에도 완전히 소홀했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일반 백성들에게 매우 미움을 받았고, 그의 형제 중 맏이인 윌리엄은 항상 잉글랜드인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그들의 영원한 적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의 재산인 노섬브리아 백작령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왕의 뜻에 반하여 왕국의 전체 감시자로 임명되었다.[26]

말 콜룸은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 카푸아의 헨리 공자의 딸과 약혼했다는 전설이 전해지지만,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의 어머니는 브르타뉴 공작 코난 3세의 딸 콘스탄스와의 결혼을 추진했으나, 말 콜룸이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사망하면서 무산되었다.[27] 그렇다고 해서 말 콜룸에게 첩이나 정부가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자료 부족으로 인해 스코틀랜드-노르만 시대 개혁의 정확한 시기를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말 콜룸은 그의 할아버지와 삼촌들이 시작한 개혁을 이어간 것으로 평가받는다. 크레일, 던펌린, 에든버러, 포파, 라나크, 린리스고셰리프 제도는 말 콜룸 재위 기간에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로디언 지역의 치안 판사 직위 역시 이 시기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28]

종교적인 면에서도 말 콜룸은 활동을 보였다. 그는 쿠파 앵거스에 시토회 수도원을 세웠다. 왕실의 이러한 대륙 수도회 후원 경향은 다른 영주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1161년까지 갤러웨이의 소울시트에 프레몽트레 수도회 수도원이 설립되기도 했다.[29]

6. 가상의 묘사

말 콜룸 4세는 다음과 같은 역사 소설에 등장한다.


  • 나이젤 트랜터의 소설 《아일랜드의 군주》(1983)는 서머레드를 주인공으로 다룬다. 서머레드는 아일랜드의 군주로, 소설은 그의 군 경력, 권력 상승 과정, 스코틀랜드의 데이비드 1세에 대한 충성 서약, 그리고 말 콜룸 4세에 대한 반란 지지 등을 묘사하며 그의 죽음으로 마무리된다.
  • 나이젤 트랜터의 소설 《멧돼지 태피스트리》(1993)는 말 콜룸 4세의 궁정 사냥꾼 휴 드 스윈턴을 주인공으로 한다. 휴는 처음에는 스코틀랜드 시골을 위협하는 멧돼지 사냥꾼으로 고용되었으나, 이후 갤러웨이의 퍼거스와의 갈등에서 왕의 군대를 위한 정찰병으로 활동한다. 말 콜룸 4세는 그에게 '스코틀랜드 최초의 진정한 병원'으로 불리는 사우트라 아일 설립 임무를 맡긴다.

참조

[1] 서적 Malcolm IV (1141–1165)
[2] 서적 p. 61
[3] 서적 Malcolm the son of Duncan is known as Malcolm III, but still better perhaps by his characteristic name of Canmore, said to come from the Celtic "Cenn Mór", meaning "great chief"". It has also been argued recently that the real "Malcolm Canmore" was his great-grandson [[Malcolm IV of Scotland]], who is given this name in the contemporary notice of his death.
[4] 서적 David I
[5] 서적 David I
[6] 서적
[7] 서적 Orkneyinga Saga
[8] 서적 David I
[9] 서적 Kingdom of the Isles
[10] 서적 Outlaws
[11] 서적 Outlaws
[12] 서적
[13] 서적 SAEC
[14] 서적
[15] 서적 Gesta Annalia
[16] 서적
[17] 서적 Gesta Annalia
[18] 서적 Outlaws
[19] 서적 SAEC
[20] 서적 Gesta Annalia
[21] 서적 Kingdom of the Isles
[22] 서적 Histoire des rois et des ducs de Bretagne 1828
[23] 서적
[24] 서적 Annals of Ulster 1165
[25] 서적 SAEC
[26] 서적 Gesta Annalia
[27] 서적 The Canmores
[28] 서적
[29] 서적
[30] 웹사이트 "Lord of the Isles", description from the bookjacket http://cunninghamh.t[...]
[31] 웹사이트 "Lord of the Isles",customer reviews https://www.amazon.c[...]
[32] 웹사이트 "Tranter first edition books, publication timeline", part IV http://CunninghamH.t[...]
[33] 웹사이트 "Tapestry of the Boar", summary https://web.archive.[...] 2011-05-21
[34] 서적
[35] 서적
[36] 서적
[37] 서적
[38]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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