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자퍼 셰리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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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자퍼 셰리프는 터키 출신의 사회 심리학자이다. 그는 사회 심리학 이론, 실험 방법론, 사회 문제 연구에 기여했으며, 24권의 저서와 60편 이상의 논문을 저술했다. 셰리프는 자동운동 효과 실험을 통해 사회적 규범이 개인의 지각에 미치는 영향을 밝혀냈고, 현실적 갈등 이론을 제시하여 집단 간 갈등의 원인을 설명했다. 또한 사회 심리학의 위기를 진단하고, 학문 간 소통을 통해 공유된 패러다임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셰리프는 미국 사회학회로부터 사회 심리학 기여를 인정받았으며, 1988년 8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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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퍼 셰리프 | |
---|---|
기본 정보 | |
이름 | 무자퍼 셰리프 |
출생일 | 1906년 7월 29일 |
출생지 | 외데미시, 아이든 주, 오스만 제국 |
사망일 | 1988년 10월 16일 |
사망지 | 페어뱅크스, 알래스카주, 미국 |
국적 | 튀르키예-미국 |
배우자 | 캐럴린 우드 (1945년 결혼) |
자녀 | 3명 |
학력 | |
모교 | 이스탄불 대학교 하버드 대학교 컬럼비아 대학교 |
학위 | 박사 |
박사 학위 논문 제목 | 지각에 있어서의 몇 가지 사회적 요인 연구 |
박사 학위 취득 년도 | 1935년 |
경력 | |
직장 | 가지 대학교 앙카라 대학교 DTCF 프린스턴 대학교 예일 대학교 오클라호마 대학교 펜실베이니아 주립 대학교 |
연구 분야 | |
분야 | 심리학 |
세부 분야 | 사회 심리학 |
주요 업적 | 집단 순응, 로버스 동굴 실험 |
수상 | |
수상 내역 | 구겐하임 재단 펠로우십 (1967년) 쿠르트 레빈 기념상 (1967년) |
2. 생애와 경력
무자퍼 셰리프(Muzafer Şerif Başoğlu)는 외데미쉬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이스탄불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7] 그는 이탈리아-터키 전쟁, 발칸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아르메니아인 추방 등 격동적인 시기를 겪으며 성장했다.[1] 터키 독립 전쟁 중에는 그리스군과 터키군의 점령을 경험하기도 했다.[1]
대공황 시기에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고, 1932년 베를린에서 볼프강 쾰러의 게슈탈트 심리학 강의를 들었다.[1] 이후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가드너 머피의 지도 하에 1935년 박사 학위를 받았다.[1]
터키로 돌아온 셰리프는 앙카라 대학교에서 자리를 얻고 터키 공산당(TKP)과 연을 맺었으나,[1] 1944년 정치적 갈등으로 잠시 구금되었다가 1945년 미국으로 영구 이주했다.[1]
1945년 캐롤린 우드와 결혼하여 여러 학술 서적과 교과서를 함께 저술했으며,[1] 1947년 헤들리 캔트릴과 《자아 몰입의 심리학》을 출간하여 사회적, 문화적 배경에 따른 가치와 신념의 차이를 설명하고, 개인주의적이고 경쟁적인 사회는 피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2]
1951년경 터키와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면서 무국적 상태가 되었고,[1][2][3] 연방 수사국의 공산주의 동조자 명단에 올라 심문을 받기도 했다.[1] 그는 앙카라 대학교에서 공식 해고되었는데, 이는 미국인 아내와의 결혼이 터키의 외국인 결혼 금지 정책을 위반했기 때문이었다.[1][2]
미국 사회학회에서 사회 심리학에 대한 기여로 쿨리-미드 상을 처음으로 수상했으며, 예일 대학교, 오클라호마 대학교, 펜실베이니아 주립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말년에 셰리프는 조울증 진단을 받고 자살을 시도하는 등 정신 질환으로 어려움을 겪었다.[1][2][3] 1988년 10월 16일 알래스카 페어뱅크스에서 8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교육 및 정치 참여
무자페르 셰리프(Muzafer Şerif Başoğlu)는 부유한 가정의 다섯 자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6년 동안 외데미쉬에서 초등학교를 다녔고, 1926년 이즈미르 국제 칼리지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1928년 이스탄불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7] 정치 토론에서 터키의 근대화를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했고,[1] 윌리엄 맥두걸이 제안한 목표 지향적 행동, 즉 호르미 심리학에 관심을 가졌다.셰리프는 이탈리아-터키 전쟁, 발칸 전쟁, 제1차 세계 대전과 아르메니아인 추방을 겪으며 성장했다.[1] 또한, 그가 칼리지를 다니는 동안 이즈미르는 터키 독립 전쟁 중 1918년부터 1924년까지 그리스군과 터키군의 점령을 받았다.[1]
셰리프는 대공황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그의 스승은 고든 올포트와 캐롤 프랫이었다. 그는 나치당의 부상기인 1932년 베를린을 방문하여 게슈탈트 심리학에 대한 볼프강 쾰러의 강의를 들었으며,[1] 이후 게슈탈트 원리를 새로운 사회적 지각 이론에 적용할 계획을 세웠다.
1933년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하버드에서 박사 과정을 다시 시작했지만, 나중에 컬럼비아 대학교로 옮겨 가드너 머피 밑에서 1935년 박사 학위를 받았다.[1] 셰리프는 터키로 돌아와 앙카라 대학교에서 자리를 얻었고, 터키 공산당(TKP)과 연을 맺었다.[1] 그는 저서에서 관료주의자들과 나치 지지자들을 비판했으며, 파시즘이 더욱 널리 퍼지게 되었다.[1] 1944년 앙카라 대학교에서 정치적 갈등이 발생한 후 다른 TKP 회원들과 함께 잠시 구금되었는데, 그는 공산주의자들의 편을 들었다. 1945년 영구적으로 미국으로 돌아갔다.[1]
2. 2. 초기 경력과 결혼
캐롤린 우드와 1945년에 결혼했으며, 이후 여러 해 동안 학술 서적(예: 셰리프 & 셰리프, 1953)과 교과서(셰리프 & 셰리프, 1969)를 함께 저술하며 생산적인 협업을 이어갔다. 이들 부부는 앤, 수, 조안 세 딸을 두었다.[1]1947년, 헤들리 캔트릴과 함께 쓴 첫 저서 《자아 몰입의 심리학》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셰리프는 소련과 미국 사회를 비교하며, 각 사회의 사회적, 문화적 배경에 따라 서로 다른 가치와 신념이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개인주의적이고 경쟁적이며 갈등을 겪는 사회는 피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2]
2. 3. 미국 생활
1945년 터키에서 구금된 후, 무자퍼 셰리프는 공산당과의 연루로 더 가혹하고 긴 처벌을 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미국으로 급히 돌아왔다.[1] 미국에서 보낸 첫 해 동안의 사회 학문적 환경은 셰리프의 마르크스주의적 견해를 지지했으며,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출판된 《자아 관여의 심리학》(1947)에 영감을 주었다.[2]1951년 무렵, 셰리프와 터키의 관계는 완전히 파탄 났다. 터키의 반공산주의 탄압으로 인해 그는 가까운 친구와 동료들과의 연락을 모두 잃었으며, 가족과의 관계도 줄어들었다.[1][2]
셰리프는 사회 심리학 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무국적 상태로 남았다.[1][2][3] 더 이상 터키에서 권리를 갖지 못했고, 미국 시민권도 부여받지 못했다.[1][2] 연방 수사국의 공산주의 동조자 명단에 올랐고, FBI의 심문을 받았으며, 이로 인해 그의 사회 정치적 견해에 대해 더욱 신중하게 되었다.[1]
앙카라 대학교에서 교수로 공식 해고되었으며, 미국에 거주하는 동안 터키 정부에 대한 급여 채무에 대한 법적 책임을 졌다.[1][2] 미국인 아내 캐롤린 우드와의 결혼은 터키인의 외국인과의 결혼을 금지하는 정책을 위반했기 때문에 그의 해고로 이어졌다.[1][2]
주로 심리학자로 인정받았지만, 미국 사회학회로부터 사회 심리학에 대한 기여로 쿨리-미드 상을 처음으로 수상했다. 그의 학문적 임명은 예일 대학교, 오클라호마 대학교, 펜실베이니아 주립 대학교에서 이루어졌다.
2. 4. 말년과 정신 질환
셰리프는 조울증 진단을 받고 자살을 시도하는 등 정신 질환으로 어려움을 겪었다.[1][2][3] 1982년 아내가 사망한 이후 셰리프의 정신 건강은 악화되었다.[2] 당시 셰리프와 함께 살고 있던 그의 딸 수에 따르면, 셰리프는 치명적인 심장마비로 쓰러지기 전까지 기분이 좋았다고 한다. 그는 1988년 10월 16일 알래스카 페어뱅크스에서 8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 심리학에 대한 기여
무자퍼 셰리프는 사회 심리학 이론, 현장 및 실험 방법론, 그리고 사회 문제에 대한 연구 적용에 기여했다. 그는 60편 이상의 논문과 24권의 책을 저술했으며, 대부분의 연구는 아내인 캐롤린 우드 셰리프와 함께 진행했다.
3. 1. 자동운동 효과 실험
셰리프의 자동운동 효과 실험은 인간이 어떻게 정신적 평가 규범을 만들어내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연구이다. 이 실험은 완전히 어두운 방에서 벽에 작은 점의 빛을 비추면 잠시 후 그 점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을 이용한다. 이는 움직임에 대한 "준거 틀"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1]실험에서 세 명의 참가자가 어두운 방에 들어가 빛을 보고, 빛의 점이 얼마나 멀리 움직이는지 추정하도록 요청받는다. 참가자들은 소리 내어 추정치를 말하고, 반복적인 시도를 통해 각 그룹은 하나의 추정치로 수렴한다. 어떤 그룹은 높은 추정치로, 어떤 그룹은 낮은 추정치로, 어떤 그룹은 그 중간값으로 수렴했다. 여기서 중요한 발견은 각 그룹이 토론이나 유도 없이 자연스럽게 자신들만의 지각에 대한 "사회 규범"을 형성했다는 것이다.[1]
일주일 후, 참가자들을 개별적으로 다시 초청하여 어두운 방에서 혼자 검사를 받게 했을 때, 그들은 원래 그룹에서 합의했던 추정치를 그대로 재현했다. 셰리프는 이를 통해 그룹의 영향력이 강압적인 것이 아니라 정보 제공적이었음을 보여준다고 해석했다. 즉, 참가자들이 그룹의 구성원이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개별적으로도 계속해서 동일하게 지각했기 때문에, 원래 그룹의 세상을 보는 방식을 내면화했다고 결론 내렸다.[1]
자동운동 효과 현상은 전적으로 개인의 지각 시스템의 산물이기 때문에, 이 연구는 사회가 어떻게 개인의 내면에 영향을 미쳐 신체적, 심리적 감각을 이해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로 평가받는다.[1]
3. 2. 현실적 갈등 이론과 강도 동굴 실험
현실적 갈등 이론은 집단 간 갈등, 부정적인 편견, 고정관념이 집단 간의 원하는 자원 획득을 위한 실제 경쟁의 결과로 나타난다고 설명한다.[4] 이 이론은 1954년 강도 동굴 실험을 통해 부분적으로 뒷받침되었다.1954년 실험에서는 학업 성취도가 우수하고 지능이 평균 이상이며, 개신교 신자이고 양친 가정 출신의 백인 5학년 11세 소년 22명이 선발되었다. 이들은 오클라호마 주에 있는 강도 동굴 주립 공원의 외딴 여름 캠프에 보내졌다. 1953년 뉴욕 주 미들 그로브에서 진행된 실험은 참가자 선정 기준에 부합하지 않아 중단되었다.[4]
연구자들은 참가자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서로 멀리 떨어진 오두막에 배정했다. 첫 번째 단계에서 각 그룹은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한 채 하이킹, 수영 등 활동을 함께하며 유대감을 형성했다. 이들은 각 그룹의 이름을 이글스(The Eagles)와 래틀러스(The Rattlers)로 정하고 셔츠와 깃발에 새겼다.[4]
두 번째 단계에서는 두 그룹 간의 경쟁이 시작되었다. 연구자들은 상품을 걸고 4일간의 경쟁을 설정했고, 두 그룹 사이에서 편견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놀림이나 비난과 같은 언어적 표현이었지만, 경쟁이 심화되면서 깃발을 불태우거나 오두막을 약탈하는 등 직접적인 행동으로 이어졌다. 두 그룹은 서로에게 너무 공격적이어서 통제 불능 상태가 되었고, 연구자들은 물리적으로 분리해야 했다.[4]
연구자들은 이틀간의 냉각 기간 후 소년들에게 각 그룹의 특징을 나열하게 했다. 소년들은 자신의 그룹은 긍정적으로, 다른 그룹은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연구자들은 집단 간 편견을 줄이기 위해 노력했으나, 단순한 접촉 증가는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켰다. 그러나 "초월적인 목표", 즉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그룹들이 함께 일하도록 하는 것은 집단 간 편견과 긴장을 완화시키는 효과를 보였다.[4]
하지만 최근 1954년 실험과 중단된 1953년 실험에 대한 재조사가 이루어지면서, 과학자들이 어린이 참가자들을 조작하고 자극했으며 셰리프의 확증 편향 가능성이 제기되었다.[4]
3. 3. 사회 심리학의 위기
셰리프는 1977년 펜실베이니아 주립 대학교에 재직하면서 사회 심리학의 문제점과 해결책을 제시하는 논문을 발표했다.[5]셰리프는 사회 심리학 분야에서 연구의 양적 팽창은 이루어지고 있으나, 질적 저하는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발표 당시 사회 심리학 분야에서 "왕겨"(의미 없는 연구)와 "밀"(의미 있고 유용한 연구)의 비율의 불균형을 지적하며, 해리 트라이안디스와 같은 사회 심리학자들도 이를 인지하고 있다고 언급했다.[5]
셰리프는 소규모 그룹 연구 및 태도 변화 연구에 치중된 경향을 비판했다. 1954년 7월 소시오메트리에 게재된 소규모 그룹 연구는 584건이었으나, 1972년 3월에는 2021건으로 증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들이 서로를 기반으로 구축되지 않아 변수, 작업, 척도가 일관되지 않을 때 공통 기반에서 논쟁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또한 사회 심리학이 집단의 특성보다는 "부조화, 태도, [그리고] 귀인"과 같은 내적 상태에 초점을 맞추면서 더욱 개별주의적으로 변해왔다고 비판했다.[5]
셰리프는 집단의 현상을 대인 반응으로 축소하고 상황적 요소를 고려에서 제외한 환원주의와 비역사주의를 비난했다. 그는 사회 심리학이 본질적으로 규범적인 연구(사회 문화적 관점)와 비교적 방법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태도와 태도 변화가 중요하기 때문에 실제 세계의 맥락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5]
셰리프는 "출판하거나 사라지거나"라는 문화가 만연하여, 연구자들이 훌륭한 과학을 위해서가 아니라 경력을 위해 논문을 출판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압박은 연구자들이 공유된 패러다임에 함께 협력하기보다는 심리학 내에서, 그리고 사회 과학 분야의 다른 분야에서도 "자급자족적인 성"에 있게 하여, 이 분야의 방향성을 잃게 한다고 주장했다.
클라이드 헨드릭은 동료들에게 사회 심리학 분야의 "위기"에 대해 질문했고, 연구자들은 다음과 같은 주제에 대한 논쟁을 벌였다.[5]
- 과학 대 역사
- 환경 대 사회 심리학
- 현장 대 실험 연구
- 거대 이론 대 소규모 운영 이론 대 이 분야가 잘하고 있다는 믿음
셰리프는 위기가 스스로를 재생산하여 "자급자족적인 성"에 있는 연구자들이 사회 심리학 교과서를 집필하지만, 공유된 패러다임에 대한 학생들을 교육하기보다는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입장을 배제한다고 언급했다(그러한 패러다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셰리프는 주장한다). 셰리프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학과 역사를 모두 활용하는 학문 간의 소통을 지지했다. 이는 일반적으로 공유되는 패러다임을 만들고, "성"에서 사람들을 제거하고 "무질서한 파벌 투성이 부족"을 해산하여 과학의 더 큰 이익을 위해 도움을 줄 것이라고 주장했다.[5]
셰리프는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사회 시스템의 구조와 기능에 대한 "생각할 수 없는" 질문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심리학자들이 사회적 질문을 회피하는 것은 시력을 연구하면서 빛의 물리학을 피하는 것과 같다고 비판했다. 또한 심리학이 자연 과학의 반열에 합류하려면, 문화 간 비교를 통해 방법의 타당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5]
4. 사회학에 대한 기여
사회 판단 이론은 아이디어에 대한 평가와 인식이 현재의 태도와 어떻게 일치하는지 검토하는 이론이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제시되면 현재의 신념과 대조하여 평가된다. 무자퍼 셰리프는 사람들이 자신의 아이디어에 대한 인식의 폭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다른 사람들의 관점과 상반될 수 있다는 것을 연구했다. 그 결과, 그는 수용, 거부, 비개입의 세 가지 형태의 폭을 설명했다. 수용의 폭은 개인이 수용 가능하다고 인식하는 다양한 아이디어를, 거부의 폭은 개인이 동의하지 않는 다양한 아이디어를, 비개입의 폭은 상당하거나 동의하지 않는 아이디어를 탐구한다.
또한, 자아 개입은 사회 판단 이론에서 중요한 개념이다. 문제에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는 개인은 광범위한 비개입의 폭을 가진다. 반대로 아이디어와 반대 아이디어에 대한 거부의 폭은 높은 자아 개입을 초래한다.
셰리프는 사람들의 폭에서 대비와 동화 또한 탐구했다. 대비는 개인이 실제로 고려해야 하는 것보다 거부의 폭 내에서 관점과 신념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설명하며, 동화는 개인이 실제로 그래야 하는 것보다 수용의 폭 내에서 관점과 신념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설명한다. 부메랑 효과는 메시지가 전달하는 내용과 반대 방향으로 신념과 태도가 변하는 현상으로, 사람들은 메시지에 설득되기보다는 아이디어의 메시지로부터 멀어진다.[6]
5. 저서 및 편집 활동
셰리프는 심리학 분야에서 24권의 책과 60편 이상의 저널 논문 및 챕터를 저술하거나 공동 저술하여 큰 영향을 미쳤다.[8] 앙카라 대학교에서 사회적 판단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며, 여러 심리학 작품들을 터키어로 번역하는 데 기여했다.[8] 프린스턴 대학교와 예일 대학교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면서 칼 호블랜드와 함께 태도의 앵커링 효과를 연구하여 1961년 ''사회적 판단''이라는 책을 출간했다.[10]
오클라호마 대학교에서는 집단 관계 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하며 태도, 집단, 지각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12권의 저서와 43편의 논문을 발표했다.[11] 특히, 캐롤린 셰리프 등과 공동 저술한 『집단 간 갈등과 협력: 로버스 동굴 실험』은 1954년 처음 배포된 후 1988년 웨슬리안 대학교 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13]
5. 1. 1937–1944
경력 동안 셰리프는 심리학 분야에서 여전히 영향력 있는 24권의 책과 60편 이상의 저널 논문 및 챕터를 저술하고 공동 저술했다. 그는 앙카라 대학교에 작은 연구실을 설립했는데, 그 연구실은 사회적 판단에 관한 것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학생들과 함께 많은 심리학 작품들을 터키어로 번역했다. 번역된 작품에는 1937년의 스탠퍼드-비네 검사, E. G. 보링의 ''실험 심리학사''의 일부, 로버트 S. 우드워스의 ''현대 심리학 학파'' 등이 포함되었지만, 이에 국한되지는 않았다.[8]5. 2. 1945–1947
프린스턴 대학교에 미국 국무부 연구원으로 합류하여, 해들리 캔트릴과 함께 1947년에 《자아 개입의 심리학》(The Psychology of Ego-Involvements)을 공동 집필했다.[9]5. 3. 1947–1949
셰리프는 1947년부터 1949년까지 예일 대학교에서 록펠러 재단 연구 펠로우로 재직했다.[10] 이 기간 동안 칼 호블랜드와 함께 태도의 앵커링 효과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으며, 이는 여러 편의 논문과 1961년 ''사회적 판단: 커뮤니케이션 및 태도 변화에서의 동화 및 대비 효과''라는 책 출간으로 이어졌다.[10]5. 4. 1949–1966
1949년, 셰리프는 오클라호마 대학교로 이주하여 1952년에 설립한 집단 관계 연구소의 교수이자 연구 교수 및 소장으로 활동했다. 이 시기는 그의 학문적 절정기로, 태도, 자연 집단 및 실험적으로 만들어진 집단의 속성, 지각, 심리물리적 척도의 앵커링 효과, 판단, 자기 기능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12권의 저서와 43편의 연구 논문 및 챕터를 출판했다.[11]셰리프는 오클라호마에서 여러 세미나를 개최했으며, 이후 이 세미나에서 발표된 논문을 바탕으로 5권의 책을 저술했다. 잘 알려진 저서로는 부인 캐롤린 셰리프와 공동 저술한 『조화와 긴장의 집단』, 칼 호블랜드와 공동 저술한 『사회적 판단』, 캐롤린 셰리프와 공동 저술한 『준거 집단: 청소년의 동조와 일탈에 대한 탐구』, 캐롤린 셰리프와 R. 네버갈과 공동 저술한 『태도와 태도 변화: 사회적 판단-관여 접근법』, 『공통의 딜레마: 집단 간 갈등과 협력의 사회 심리학』, 그리고 캐롤린 셰리프와 함께 쓴 사회 심리학 교과서의 대폭 개정판인 『사회 심리학 개요』가 있다.[12]
심리학 분야에서 많은 저서와 연구를 수행했지만, 오클라호마에서 16년간 머무는 동안 가장 잘 알려진 연구는 O. J. 하비, B. J. 화이트, W. R. 후드, C. W. 셰리프와 공동으로 저술한 『집단 간 갈등과 협력: 로버스 동굴 실험』이다. 이 연구는 1954년 기술 보고서로 처음 배포되었지만, 1961년 오클라호마 대학교 서점의 저작권 없이 재판되었다. 1988년에는 웨슬리안 대학교 출판사에서 처음 출판되었다.[13]
참조
[1]
간행물
The unknown muzafer sherif
https://www.proquest[...]
The Psychologist
2014
[2]
논문
A variation on forced migration: Wilhelm peters (prussia via britain to turkey) and muzafer sherif (turkey to the united states)
2016
[3]
논문
Muzafer sherif (1906–1988)
1989
[4]
서적
The Lost Boys: Inside Muzafer Sherif's Robbers Cave Experiment
2019
[5]
논문
Crisis in social psychology: Some remarks towards breaking through the crisis
1977
[6]
서적
Social judgment : assimilation and contrast effects in communication and attitude change
Greenwood Press
1980
[7]
학술지
Muzafer Sherif (1906–1988).
1989
[8]
학술지
Muzafer Sherif (1906–1988).
1989
[9]
학술지
Muzafer Sherif (1906–1988).
1989
[10]
학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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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Muzafer Sherif (1906–1988).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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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Muzafer Sherif (1906–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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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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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Muzafer Sherif (1906–1988).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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