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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스터 주교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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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뮌스터 주교후국은 795년경 샤를마뉴에 의해 쾰른 대교구의 교구로 설립되었다. 12세기부터 세속적 권력이 성장하여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로 인정받았으며, 주교가 통치하는 독립적인 영토로 발전했다. 16세기 종교 개혁과 재세례파 운동으로 혼란을 겪었으며, 가톨릭 개혁을 통해 가톨릭교를 유지했다. 18세기에는 프랑스 혁명 전쟁의 영향을 받아 1803년 세속화되어 프로이센, 하노버, 올덴부르크 등으로 분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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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스터 주교후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통칭뮌스터
시대중세
유형주교후국
소속 국가신성 로마 제국
존립 시작1180년
존립 종료1802년
시작 사건작센 공국 붕괴로 생성
종료 사건독일 세속화로 프로이센 왕국에 합병
이전 국가작센 공국
안할트 가문의 문장 (고대)
안할트 가문의 문장 (고대)
계승 국가아렌베르크 공국
계승 국가올덴부르크 공국
계승 국가프로이센 왕국
계승 국가잘름 공국
뮌스터 주교후국 국기
국기 (1770년–1802년)
뮌스터 주교후국 문장
1560년 뮌스터 주교후국 위치
1560년 라인강 하류-베스트팔렌 관구 지도, 뮌스터 주교후국은 빨간색으로 강조됨
수도베스트팔렌 뮌스터
공용어저지 독일어
독일어
프리지아어
종교가톨릭교

2. 역사

샤를마뉴가 작센 전쟁을 끝내고 795년경 뮌스터 교구를 설립하면서 뮌스터 주교후국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초대 주교는 루드거였으며, 그는 프리지아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펼쳤다. '뮌스터'라는 지명은 루드거가 세운 수도원에서 유래했다.[2]

12세기부터 주교의 세속 권력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프리드리히 1세 황제의 지지를 받은 헤르만 2세 주교는 제국의 제후로 인정받았고, 1220년 프리드리히 2세는 주교를 제국의 제후로 공식 인정했다.[1] 이후 주교 선출은 대성당 참사회에서 담당하게 되었고, 주교의 권한은 신민 대표 기구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등 제한을 받았다.

뮌스터 주교후국은 페흐타 백작령(1252년), 클로펜부르크와 오이테 주변 지역(1403년), 아하우스 영지와 스트롬베르크 성(1406년), 빌데스하우젠(1429년, 1679년 네이메헌 조약으로 갱신) 등을 획득하며 영토를 확장했다.

16세기 종교 개혁 시기에 뮌스터에서는 루터교가 확산되었고, 프란츠 폰 발데크 주교는 재세례파에 대항해야 했다. 바이에른의 에른스트 주교는 반종교 개혁을 추진하여 예수회의 도움을 받았고, 크리스토프 베른하르트 폰 갈렌 주교는 교회 규율을 회복하고 학교 시스템을 구축했다.

18세기에는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7년 전쟁으로 뮌스터 주교후국이 피해를 입었다. 프란츠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퓌르스텐베르크의 노력으로 번영을 누렸지만,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 혁명군에게 점령당했다. 오스트리아의 안톤 빅토르 대공이 마지막 주교가 되었고, 1796년 프랑스 제1 공화국과 프로이센 간의 비밀 협정에 따라 뮌스터 주교후국은 프로이센에 대한 보상으로 선택되었다.

2. 1. 설립과 초기 발전 (8세기-12세기)

샤를마뉴는 작센 전쟁 말기인 795년경 뮌스터 교구를 설립했으며, 쾰른 대교구의 속주로 두었다. 샤를마뉴는 세 개의 큰 토지를 주었는데, 이 토지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나중에 도시가 된 지역 안에 있었다. 이들은 대성당 참사회가 소유한 브로크호프(Brockhof), 나중에 성 모리츠(St. Moritz)의 참사회에 속한 캄워데스호프(Kampwordeshof), 주교에게 속한 비스핑호프(Bispinghof)라고 불렸다.[1]

첫 번째 주교는 787년부터 5개의 프리지아 "백"(구역)에서 열성적인 선교사였던 루드거였다. ''미미게르나포드''가 새로운 구역의 중심지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루드거는 그곳에 정규 참사회원을 위한 수도원을 지었고, 그곳에서 뮌스터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 여기서 그는 789년에 프랑크 영토에서 의무화되었던 메츠의 성 크로데강의 규칙에 따라 그의 수도승들과 함께 살았다.[2]

뮌스터 교구의 영토는 서쪽, 남쪽, 북서쪽으로는 쾰른 교구와 위트레흐트 대교구, 동쪽과 북동쪽으로는 오스나브뤼크 교구와 경계를 이루었다. 또한 이 교구에는 영토의 대부분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 즉 하류 엠스에 있는 5개의 프리지아 백(Hugmerki, Hunusgau, Fivelgau, Federitgau, Emsgau)이 포함되었다.

2. 2. 주교후국의 성장 (12세기-16세기)

12세기에는 주교의 세속적 권력이 크게 성장했다. 1173년에는 도시 통치권이 주교와 대성당 참사회로 넘어갔다.[1] 텍클렌부르크 백작이 행사하던 영지 관할권은 텍클렌부르크 백작 루드비히 1세(1169–73) 주교에 의해 교구에 회복되었다. 헤르만 2세 주교는 프리드리히 1세 황제의 지지를 받았으며, 하인리히 사자공이 몰락하면서 주교의 주권에 대한 장애물이 사라지고 제국의 제후로 인정받았다. 1220년에는 프리드리히 2세 황제가 주교를 제국의 제후로 공식 인정했다.[1]

헤르만 2세는 황제가 직접 임명한 마지막 주교였다. 올덴부르크 백작 오토 1세 (1204–18) 주교 선출을 두고 분쟁이 발생하자, 오토 4세 황제는 이후 대성당 참사회만이 주교를 선출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쾰른 교구는 승인권을, 황제는 서임권을 유지했다. 주교의 세속 권력은 과세 등 중요한 문제에서 신민 대표 기구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13세기 초에는 대성당 참사회가, 이후 하위 귀족과 뮌스터 시가 대표 기구에 참여했다. 대성당 참사회는 주교 선출 전 협약을 통해 권한을 확대했다.

립페 백작 오토 2세 (1247–59) 주교 재임 기간 동안 교구의 세속 권력이 크게 증가했다. 뮌스터 시는 주교로부터 독립하려 했으나, 대성당 참사회와의 동맹에도 불구하고 성공하지 못했다. 1252년, 베히타-라벤스베르크의 유타 백작부인은 메펜을 뮌스터 주교에게 팔았다.

뮌스터 주교후국은 영토를 꾸준히 확장했다. 1252년 페흐타 백작령을 매입했고, 1403년에는 클로펜부르크와 오이테 주변 지역을, 1406년에는 아하우스 영지와 스트롬베르크 성 및 관할권을 획득했다. 1429년에는 브레멘 대주교령으로부터 빌데스하우젠을 담보로 얻었고, 1679년 네이메헌 조약으로 갱신되었다. 이 과정에서 페르디난트 2세 폰 퓌르스텐베르크 주교는 스웨덴 제국에 100000SRD의 차관을 제공했다.

11세기 초부터 주교들은 귀족 가문 출신이었고, 주교령은 주교 가문의 이익을 위해 관리되는 경우가 많았다. 뮌스터 교구 분쟁 (1450–57) 기간 동안 상황이 악화되었다. 모어스 헨리 2세 (1424–50) 주교의 독단적인 행동은 뮌스터 시의 반발을 샀다. 그의 사후 주교 선출을 둘러싸고 대성당 참사회 다수파와 뮌스터 시 및 참사회 소수파 간에 전쟁이 발발했다. 결국 협약을 통해 지머른의 팔라틴 백작 요한 2세 (1457–66)가 주교로 임명되었다.

2. 3. 종교 개혁과 갈등 (16세기-17세기)

1522년부터 1532년까지 뮌스터 주교후를 다스린 프리드리히 3세는 게으르고 세속적인 인물로, 그의 치하에서 루터교는 1524년 이후, 특히 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다음 주교인 프란츠 폰 발데크 (1532–1553)는 이러한 변화에 거의 반대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뮌스터, 민덴 주교후국, 오스나브뤼크 주교후국에서 종교 개혁을 지원하여 이 세 지역을 통합해 자신을 위한 세속적인 공국을 만들고자 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뮌스터 시의 재세례파에 대항해야 했지만, 신앙 회복을 위해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결국 슈말칼덴 동맹에 가담했다.

빌헬름 폰 케텔러(1553–1557) 주교는 가톨릭보다는 개신교에 더 가까운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을 구교회의 행정관으로 여기고 트리엔트 서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요구를 거부하고 1557년에 사임했다.

1574년부터 1585년까지 뮌스터 주교후를 다스린 요한 빌헬름 폰 클레베 주교는 1575년에 클레베 공국을 상속받아 결혼했고, 주교직을 포기했다. 그의 후계자를 두고 가톨릭과 개신교 세력 간에 긴 외교전이 벌어졌고, 그동안 주교후국은 클레베가 통치했다.

바이에른의 에른스트 (1585–1612)가 주교로 선출되면서 뮌스터 주교후국에서 가톨릭 교회의 유지가 보장되었다. 그는 반종교 개혁을 적극 추진하여 예수회를 초청해 도움을 받았고, 구교단의 수도원 설립을 장려했다.

1569년에는 뮌스터 관할 하에 있던 프리슬란트 지역의 서부 지역이 새로 설립된 흐로닝언 로마 가톨릭 교구와 데벤터 로마 가톨릭 교구로 이관되었고, 이들과 함께 개신교로 넘어갔다. 마찬가지로 벤트하임-슈타인푸르트 백작의 영지와 다른 요새 도시들도 주교의 관할에서 벗어났다.

크리스토프 베른하르트 폰 갈렌 (1650–1678)은 주교이자 세속 군주로서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오랜 포위 끝에 뮌스터 시가 자신의 주권을 인정하도록 강요했고, 외국 군대로부터 영토를 해방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스웨덴-브란덴부르크 전쟁에서 스웨덴 제국과의 브레멘-베르덴 원정에 참여하여 브레멘 대주교후국과 베르덴 주교후국의 일부를 획득하기도 했다. 그는 프랑스-네덜란드 전쟁에서 네덜란드 공화국을 공격했다. 그는 교회 규율을 회복하고 영토에 학교 시스템을 구축하는 등 가톨릭 개혁에도 힘썼다.

2. 3. 1. 뮌스터 재세례파 사건

프란츠 폰 발데크 주교(1532~1553)는 뮌스터 시의 재세례파에 대항해야 했지만, 신앙 회복을 위해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는 뮌스터, 민덴 주교후국, 오스나브뤼크 주교후국의 세 주교후국에서 종교 개혁을 지원하여 이 세 곳을 합쳐 자신을 위한 세속적인 공국을 만들 계획이었다.

2. 3. 2. 가톨릭 개혁

프란츠 폰 발데크 주교(1532–1553)는 뮌스터, 민덴 주교후국, 오스나브뤼크 주교후국에서 종교 개혁을 지원하여 이들을 합쳐 세속적인 공국을 만들 계획이었다.[1] 그는 뮌스터 시의 재세례파에 대항해야 했지만, 신앙 회복을 위해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결국 슈말칼덴 동맹에 가담했다.[1]

바이에른의 에른스트 (1585–1612)는 반종교 개혁을 적극 추진하여 예수회를 초청해 도움을 받았고, 구교단의 수도원 설립을 장려했다.[1] 비록 모든 손실을 복구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노력으로 뮌스터 주교후국에서 가톨릭 교회의 유지가 보장되었다.[1] 그는 프라이징 주교후국, 힐데스하임 주교후국, 리에주 주교후국의 주교이자 쾰른 선제후국의 대주교이기도 했다.[1]

크리스토프 베른하르트 폰 갈렌 (1650–1678) 주교는 교회 규율을 회복하고 영토에 학교 시스템을 구축하는 등 가톨릭 개혁에 힘썼다.[1]

2. 4. 18세기와 프랑스 혁명 전쟁

클레멘스 아우구스트 폰 바이에른 주교(1719–1761)는 쾰른 선제후이자 파더보른 주교후국, 힐데스하임 주교후국, 오스나브뤼크 주교후국의 주교를 겸임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뮌스터 주교후국은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7년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그의 후계자인 쾨니히세크-로텐펠스의 막시밀리안 프리드리히 (1761–1784) 역시 쾰른 선제후를 겸임하였으며, 뮌스터 행정은 주로 젊은 대성당 사제인 프란츠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퓌르스텐베르크에게 맡겨졌다. 폰 퓌르스텐베르크의 통치 기간 동안 뮌스터 주교후국은 유례없는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보조 주교 선거에서 폰 퓌르스텐베르크는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 프란츠에게 패배했고, 막시밀리안 프란츠는 뮌스터와 쾰른 두 교구를 모두 계승했다(1784–1801).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 프란츠는 프랑스 혁명군이 도착하자 1794년 에서 도망쳤고, 혁명군은 라인강 좌안에 위치한 뮌스터 주교후국의 영토를 영구 점령했다. 막시밀리안 프란츠는 뮌스터의 명목상 주교였지만, 남은 생애를 비엔나에서 보냈다. 그가 죽자 조카인 오스트리아의 안톤 빅토르 대공이 그 뒤를 이어 마지막 쾰른 선제후이자 뮌스터 주교가 되었다. 1796년 8월 5일 프랑스 제1 공화국과 프로이센 사이의 비밀 협정에 따라 뮌스터 주교후국은 프랑스에 빼앗긴 라인강 좌안 영토에 대한 프로이센의 보상으로 선택되었다.

2. 5. 세속화와 이후 (19세기-현재)

1803년 제국 대표단 결의안(Reichsdeputationshauptschluss)에 따라 뮌스터 주교후국(약 31만 명 거주)은 세속화되어 여러 부분으로 분할되었다. 동부의 더 큰 부분은 프로이센에 할당되어 1803년 3월에 점령되었다. 올덴부르크 공국(Oldenburg)은 북부 지역(페히타, 클로펜부르크)을 획득했다. 나머지 지역은 라인강 서쪽 영토의 이전 통치자들이었던 아렌베르크, 로오즈-코르스바렘, 잘름 공국(Salm), 크로이 가문(Croÿ)에게 보상으로 주어졌다. 이후 몇 년 안에 모든 지역이 프랑스령이 되었다.

1815년 프로이센은 남부 지역(오버슈티프트)을, 하노버 왕국은 북부 지역(니더슈티프트)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올덴부르크 대공국(Oldenburg)은 획득한 영토를 유지했다.

3. 뮌스터의 주교 및 주교후 목록

뮌스터의 주교 및 주교후
이름재임 시작재임 종료
루트거805년809년
게르프리트809년839년
알트프리트839년849년
리우트베르트849년871년
베르톨트872년875년
볼프헬름875년900년
니드하르트900년922년
룸홀트922년941년
힐드볼트942년967년
도도967년993년
스비트거993년1011년
디트리히 1세1011년1022년
발베크의 지크프리트1022년1032년
헤르만 1세1032년1042년
루드베르트1042년1063년
프리드리히 1세1064년1084년
에르포1084년1097년
홀테의 부르카르트1098년1118년
빈첸부르크의 디트리히 2세1118년1127년
에크베르트1127년1132년
스테우즐링겐의 베르너1132년1151년
아레의 프리드리히 2세1152년1168년
비프라의 루트비히 1세1169년1173년
카첸엘른보겐의 헤르만 2세1173년1202년
올덴부르크의 오토 1세1203년1218년
이제르베르크의 디트리히1219년1226년
홀테의 루돌프1226년1247년
립페의 오토 2세1247년1259년
홀테의 빌헬름 1세1259년1260년
마르크의 게르하르트1261년1272년
디스트의 에버하르트1275년1301년
리트베르크의 오토 3세1301년1306년
베르크의 콘라트 1세1306년1310년
헤세의 루트비히 2세1310년1357년
마르크의 아돌프 3세1357년1363년
비르네부르크의 요한 1세1363년1364년
베벨링크호벤의 플로렌스1364년1378년
포텐슈타인의 포토1379년1382년 10월 11일
뤼딩하우젠의 하이드라이히 볼프1382년1392년 4월 9일
호야의 오토 4세1392년 4월 11일1424년 10월 3일
모어스의 하인리히 2세1424년 10월 31일1450년 6월 2일
모어스의 발람1450년 7월 15일1456년 10월 3일
호야의 에리히 1세1450년 7월 15일1457년 10월 23일
팔츠-짐머른의 요한1457년 4월 9일1466년 2월
슈바르츠부르크의 하인리히 3세1466년 12월 7일1496년 12월 24일
리트베르크의 콘라트 2세1497년1508년 2월 9일
작센-라우엔부르크의 에리히 2세1508년 2월 24일1522년 10월 20일
비드의 프리드리히 3세1522년 11월 6일1532년 3월 22일
브라운슈바이크-그루벤하겐의 에리히1532년 3월 26일1532년 5월 14일
프란츠 폰 발데크1532년 6월 1일1553년 7월 15일
케텔러의 빌헬름1553년 7월 21일1557년 12월 2일
라스펠트의 베른하르트1557년 12월 4일1566년 10월 25일
호야의 요한 2세1566년 10월 28일1574년 4월 5일
율리히-클레베-베르크의 요한 빌헬름1574년 4월 28일1585년 5월 8일
바이에른의 에른스트1585년 5월 18일1612년 1월 17일
바이에른의 페르디난트 1세1612년 4월 12일1650년 9월 13일
베른하르트 폰 갈렌1650년 11월 4일1678년 9월 19일
퓌르스텐베르크의 페르디난트 2세1678년 11월 1일1683년 6월 26일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헨리1683년 9월 11일1688년 6월 3일
플레텐베르크의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1688년 7월 29일1706년 5월 5일
프란츠 아놀트 폰 볼프-메테르니히 추 그라흐트1706년 8월 30일1718년 12월 25일
바이에른의 클레멘스 아우구스트 1세1719년 3월 26일1761년 2월 6일
쾨니히세크-로텐펠스의 막시밀리안 프리드리히1761년 4월 7일1784년 4월 15일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 프란츠 대공1784년 4월 15일1801년 7월 27일
오스트리아의 안톤 빅토르 대공1801년 9월 9일1803년 2월 25일


4. 정치와 사회

12세기부터 뮌스터 주교의 세속적 권력이 크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1173년에는 도시 통치권이 주교와 대성당 참사회로 넘어갔다.[1] 루드비히 1세 주교는 텍클렌부르크 백작이 행사하던 영지 관할권을 회복시켰다. 헤르만 2세 주교는 프리드리히 1세의 지지자였으며, 하인리히 사자공이 몰락하면서 주교의 완전한 주권을 가로막는 마지막 장애물이 사라졌다. 프리드리히 2세는 1220년 이젠베르크-알테나의 디트리히 3세 주교 재임 기간에 주교를 제국의 제후로 공식 인정했다.

오토 4세 황제는 올덴부르크 백작 오토 1세 주교 선출에 대한 분쟁 이후, 대성당 참사회만이 주교를 선출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쾰른 교구는 승인권을, 황제는 서임권을 가졌다. 주교의 세속적 권위는 과세 등 중요한 문제에서 신민 대표 기구의 동의를 받아야 했다. 13세기 초, 대성당 참사회를 시작으로 하위 귀족, 뮌스터 시가 대표 기구에 참여했다. 대성당 참사회는 선출 전 주교와의 협약을 통해 권한을 확대했다.

립페 백작 오토 2세 주교 재임 기간(1247~1259) 동안 교구의 세속적 권력이 크게 증가했고, 1252년에는 메펜을 획득했다. 뮌스터 시는 주교로부터 독립하려 했으나, 대성당 참사회와의 동맹에도 불구하고 실패했다.

11세기 초부터 주교들은 대부분 귀족 가문 출신이었고, 주교령은 종종 가문의 이익을 위해 관리되었다. 뮌스터 교구 분쟁 (1450–57) 기간 동안, 모어스 헨리 2세 주교의 독단적인 행동은 뮌스터 시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사후 대성당 참사회 다수는 모어스의 발람을, 뮌스터 시와 참사회 소수는 호야의 에릭을 지지하며 분쟁이 발생했다. 교황이 발람의 선출을 확정했음에도 전쟁이 발발했고, 발람은 뮌스터 시를 점령하지 못했다. 1457년 발람의 죽음 이후, 호야의 에릭이 평생 수입을 받고, 뮌스터 시의 특권이 확정되는 협약이 체결되었으며, 양측은 교황이 임명한 지머른의 팔라틴 백작 요한 2세를 새 주교로 인정했다.

5. 한국과의 관계

뮌스터 주교후국과 한국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뮌스터 지역 출신 선교사들의 한국 활동이나 뮌스터 대학교와 한국 대학 간의 교류는 간접적인 관련성을 보여준다. 특히, 독일의 통일과 분단 극복 경험은 분단 상황에 있는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참조

[1] 간행물 Münster http://www.newadvent[...] Robert Appleton Company 1911
[2] 웹사이트 St Ludger of Münster (742–809) https://www.catholic[...] 2012-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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