쾰른 선제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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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쾰른 선제후국은 953년 쾰른 대주교가 세속적 권력을 얻으면서 시작되어,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선출하는 선제후 지위를 가졌다. 쾰른 대주교는 라인강 서안과 베스트팔렌 공국 등을 다스렸으며, 1288년 뵈링겐 전투 이후 쾰른 시의 자치권이 강화되면서 본으로 수도를 옮겼다. 16세기 종교 개혁의 영향으로 갈등을 겪었고, 1801년 프랑스에 점령된 후 1803년 멸망했다.
쾰른 대주교는 953년 브루노 1세 주교가 그의 형제인 오토 1세 황제에 의해 공작으로 임명되면서 세속 권력을 얻었고, 이는 쾰른 선제후국의 시작이었다. 쾰른 선제후국은 라인강 서안과 베스트팔리아 공국 등을 포함하는 영토로 확장되었다. 12세기 말, 쾰른 대주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선출하는 7명의 선제후 중 하나가 되었다. 1288년 보링겐 전투 이후 쾰른 시는 자치권을 얻었고, 1475년에는 대주교로부터 독립적인 자유 제국 도시가 되었다.[1] 1349년에는 흑사병의 희생양으로 유대인들이 화형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2]
쾰른은 953년부터 1457년까지 쾰른 대주교령의 수도였으나, 쾰른 시와 대주교 간의 관계는 항상 원만하지는 않았다. 1089년 쾰른 시와 대주교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여 대주교가 일시적으로 도시에서 도피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후 쾰른 시는 자립성 확립을 목표로 도시 인장을 제정했다. 쾰른 시민들은 대주교 선제후가 영민(쾰른 시민 포함)에게 중과세를 부과하고 고역을 강요했기 때문에 여러 차례 분쟁이 발생했고, 그때마다 시민들은 자치권 강화를 위해 움직였다.
쾰른 대주교는 12세기 말부터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선출하는 7명의 선제후 중 한 명이었다. 쾰른 대주교는 선제후이자 이탈리아의 대총감(Arch-chancellor)이기도 했는데, 이 직위는 1238년부터 기술적으로, 1263년부터 1803년까지 영구적으로 유지되었다.[1] 1198년, 로마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벨프가와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로마 왕위 다툼에 대해 라인강 유역의 네 명의 제후, 마인츠 대주교, 쾰른 대주교, 트리어 대주교, 라인궁중백의 찬동이 필수적이라고 선언하여, 쾰른 대주교는 사실상 선제후로 승격되었다. 1356년 황제 카를 4세가 금인칙서를 발포하여 대주교는 공식적으로 선제후로 승격되었다.
쾰른은 로마 시대부터 주교좌가 있었던 유서 깊은 도시였다. 953년 쾰른 대주교는 세속 권력을 얻어 쾰른 선제후국이 시작되었다. 12세기 말, 쾰른 대주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선출하는 7명의 선제후 중 한 명이 되었다.[1] 1475년에는 대주교로부터 독립적인 자유 제국 도시가 되었다.[1]
[1]
웹사이트
History of Cologne
http://www.newadvent[...]
2009-11-28
2. 역사
16세기에는 두 명의 쾰른 대주교가 개신교로 개종하면서 종교적 갈등이 발생했다. 헤르만 폰 비트는 개종 후 대주교직을 사임했지만, 게브하르트 트룩세스 폰 발트부르크는 대주교령을 세속화하려 시도했다. 이는 쾰른 전쟁으로 이어졌고, 바이에른의 에른스트가 새로운 대주교로 선출되면서 독일에서 반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 이후 쾰른 대주교령은 비텔스바흐 가문의 바이에른 지파가 계승하게 되었다.
1795년, 프랑스는 라인강 서안의 쾰른 선제후령 영토를 점령했고, 1801년에는 공식적으로 합병했다. 1803년 제국대표자회의 주요결의를 통해 대주교령의 나머지 영토도 세속화되어 다른 국가들에게 분할되었다.
2. 1. 고대와 중세
쾰른은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Germania Inferior) 주의 고대 로마 도시인 콜로니아 아그리피나(Colonia Agrippina)였으며, 로마 시대부터 주교좌가 있었다. 313년, 밀라노 칙령에 따라 쾰른에 주교좌가 설치되었다. 953년 쾰른 대주교는 처음으로 주목할 만한 세속적 권력을 얻었는데, 브루노 1세 주교가 그의 형제인 오토 1세 황제에 의해 공작으로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오토 1세는 브루노와 그의 후임 주교들에게 세속 군주의 특권을 부여했고, 이것이 쾰른 선제후국의 시작이었다. 쾰른 선제후국은 대주교령의 세속적 영지로 형성되었고, 라인강 서안을 따라 율리히 동쪽의 영토와 라인강 건너편 베르크와 마르크 너머에 있는 베스트팔리아 공국을 포함하게 되었다.
1198년, 로마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라인강 유역의 네 명의 제후, 마인츠 대주교, 쾰른 대주교, 트리어 대주교, 라인궁중백의 찬동이 로마 왕 선출에 필수적이라고 선언하여, 쾰른 대주교는 사실상 선제후로 승격되었다.[1] 1356년 황제 카를 4세가 금인칙서를 발포하여 대주교는 공식적으로 선제후로 승격되었다. 12세기 말까지 쾰른 대주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7명의 선제후 중 한 명이었다. 쾰른 대주교는 선제후이자 이탈리아의 대총감이었는데, 기술적으로는 1238년부터, 영구적으로는 1263년부터 1803년까지였다.
보링겐 전투(1288년)에서 대주교는 도시의 병사들에게 사로잡혀 도시에 거의 완전한 자치권을 부여해야 했다. 결국 대주교는 도시 정부와의 관할권 분쟁을 피하기 위해 본으로 이사했다. 1457년 쾰른 시는 제국자유도시가 되었고, 대주교 선제후의 새로운 수도는 본이 되었다.[1]
중세와 근대 초기 쾰른의 경제 구조는 도시의 주요 항구, 교통 중심지로서의 위치, 그리고 다른 한자 도시의 상인들과 유대 관계를 맺은 기업가적 상인들을 기반으로 했다.[5] 주요 무역 도시들이 뤼벡의 지도 아래 한자 동맹에 모이면서 발트해의 장거리 무역이 성장했다.[4] 1388년에는 쾰른 대학교가 설립되었다.
2. 2. 근세
16세기 동안 두 명의 쾰른 대주교가 프로테스탄티즘으로 개종했다.[1] 헤르만 폰 비트는 개종하면서 대주교직을 사임했지만, 1582년 칼뱅주의로 개종한 게브하르트 트룩세스 폰 발트부르크는 대주교령을 세속화하려고 시도했다.[1] 그가 다음 해 2월 결혼하고 영토를 포기하지 않자 경쟁 대주교이자 선제후인 바이에른의 에른스트가 선출되었다.[1] 그 뒤를 이은 쾰른 전쟁에서 교황은 이탈리아와 스페인 용병들에게 자금을 지원했고, 가톨릭 바이에른도 에른스트를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한 반면, 프로테스탄트 네덜란드는 폰 발트부르크를 지원했다.[1] 이 전쟁은 선제후국의 경제를 파괴했고, 많은 마을과 도시가 포위되어 파괴되었다.[1] 1583년 11월부터 12월까지의 고데스베르크 공성전은 고데스베르크 성의 파괴와 대부분의 주민 학살로 끝났다.[1] 여러 차례의 포위 공격 후, 폰 발트부르크는 주교직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고 아내와 함께 스트라스부르로 은퇴했다.[1] 에른스트가 대주교가 되었는데, 이는 독일에서 반종교개혁의 첫 번째 주요 성공이었다.[1] 에른스트의 지휘 아래 예수회는 선제후국에서 가톨릭의 재도입을 감독했다.
30년 전쟁 (1618년~1648년)에서 쾰른 대주교령은 가톨릭 측에 참전했으나, 프로테스탄트 측에 참전했던 프랑스 왕국에 영토를 침략당해 그 지위가 위협받았다. 30년 전쟁 후, 북독일의 여러 제후들이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하면서 대주교 선제후로서의 영향력은 점차 약해졌다.
1583년부터 1761년까지 대주교령은 비텔스바흐가의 바이에른 지파 차남 상속령(secundogeniture)이었다.[1] 이 시기의 대주교는 대개 뮌스터 주교구 (그리고 종종 리에주 주교구)를 보유했기 때문에 북서 독일의 가장 중요한 군주 중 한 명이었다.[1]
18세기 초에는 여러 차례 프랑스 왕국의 침략과 점령을 받았다.
2. 3. 멸망
1795년 이후 라인강 서안의 쾰른 선제후령 영토는 프랑스에 의해 점령되었고 1801년 공식적으로 합병되었다. 쾰른은 로어 데파르트망의 일부였고, 본은 라인-모젤 데파르트망의 일부였다.[1] 1803년 제국대표자회의 주요결의는 대주교령의 나머지 부분을 세속화하여 베스트팔리아 공국을 헤센-다름슈타트 방백령에, 베스트 레클링하우젠을 아렌베르크 공작에게 주었다.
간신히 존속하고 있던 쾰른 대주교령도 1803년 2월 25일, 제국대표자회의 주요결의에 의해 속국화[1] 및 세속화[3] 결정이 내려지면서 소멸하였다.
소멸 후, 영토는 프로이센, 헤센-다름슈타트, 나사우 공국 등으로 분할되었고, 제국 자유 도시 쾰른과 수도 본은 프로이센 왕국에 병합되었다. 나사우 공국에 병합된 영토는 1866년 공국이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제국 편에 참전했으나 패배하여 전 영토가 프로이센 왕국에 병합되었다.[5]
3. 수도
1288년 뵈링겐 전투에서 대주교가 패배하면서 쾰른 시는 대주교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대주교는 쾰른 시에서 추방되었고, 거점 도시를 본과 브륄로 옮겨야 했다. 그러나 1457년 쾰른이 황제의 자유 도시가 될 때까지 형식적으로는 쾰른이 수도였다.
1475년 쾰른 시가 황제의 자유 도시가 되면서 대주교는 공식적으로 수도를 본으로 옮겼다.[1]
4. 제국 내 지위
1457년 쾰른 시는 제국자유도시가 되었고, 대주교 선제후의 새로운 수도는 본이 되었다.[1] 15세기 마인츠 선제후가 담당하게 될 때까지, 선출된 국왕에게 황제관을 씌우는 것은 쾰른 대주교 선제후의 직무였다. 또한 쾰른 대주교 선제후는 제국의 구성국 중 하나인 이탈리아 왕국의 대서기관장이었지만, 시대가 지남에 따라 그 관직은 형식적인 것이 되었다.
1500년 쾰른 대주교 선제후령은 제국관구 중 하나인 쾰른 관구(Kurrheinischer Reichskreis)를 구성하는 영방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쾰른 관구를 구성하는 10개 영방 중 4개 영방(쾰른 대주교 선제후령 포함)이 선제후령이었기 때문에 다른 6개 영방은 발언권이 없었다. 따라서 쾰른 관구는 제국 유일의 "선제후 관구"가 되었다.
쾰른 관구를 구성했던 영방들은 다음과 같다:쾰른 관구 구성 영방
5. 문화와 종교
중세 시대 쾰른은 종교적으로 매우 중요한 도시였다. 쾰른 대성당은 쾰른 대교구의 중심지였으며, 쾰른 대학교는 1388년에 설립되어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쾰른 대학교의 전신인 대주교좌 부속학교와 쾰른 대주교구 부속 신학교는 독일 신비주의 사상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6세기에 종교 개혁이 일어나면서 쾰른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두 명의 쾰른 대주교가 개신교(프로테스탄티즘)로 개종하면서 종교적 갈등이 발생했다.[5] 특히 게브하르트 트룩세스 폰 발트부르크 대주교는 칼뱅주의로 개종하고 대주교령을 세속화하려 했으나, 쾰른 전쟁에서 패배하고 스트라스부르로 은퇴했다. 이후 예수회가 쾰른 선제후국에서 가톨릭을 재도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5]
쾰른은 중세와 근대 초기, 한자 동맹의 주요 도시로서 경제적으로 번영했다. 쾰른의 경제는 주요 항구, 교통 중심지로서의 위치, 그리고 다른 한자 동맹 도시 상인들과의 관계를 기반으로 발전했다.[5] 그러나 1583년부터 시작된 쾰른 전쟁은 선제후국의 경제를 파괴했고, 많은 마을과 도시가 포위되어 파괴되었다.
참조
[2]
서적
Liber Chronicarum Mundi
[3]
서적
The Growth of the Medieval City: From Late Antiquity to the Early Fourteenth Century
1997
[4]
서적
Economic and Social History of Europe in the Later Middle Ages (1300–1530)
1931
[5]
서적
Family, Commerce, and Religion in London and Cologne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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