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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네덜란드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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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네덜란드 전쟁은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가 네덜란드를 침공하면서 시작된 전쟁이다. 프랑스는 1660년대 삼국 동맹을 무너뜨리고 네덜란드를 고립시키려 했으며, 1672년 영국, 뮌스터, 쾰른과 동맹을 맺고 네덜란드를 침공했다. 전쟁 초기 프랑스는 승승장구하며 네덜란드 영토를 점령했으나, 네덜란드가 제방을 파괴하여 방어선을 구축하고 빌럼 3세를 총독으로 추대하면서 저항이 거세졌다. 이후 브란덴부르크, 신성 로마 제국, 스페인 등이 네덜란드를 지원하면서 전선이 확대되었고, 1674년 영국이 전쟁에서 이탈했다. 전쟁은 프랑슈콩테, 네덜란드, 독일 등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1678년 나이메헌 조약으로 종결되었다. 프랑스는 영토를 확장했지만, 네덜란드는 독립을 유지하고 윌리엄 3세를 통해 영국과의 관계를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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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네덜란드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분쟁 명칭프랑스-네덜란드 전쟁
다른 명칭네덜란드 전쟁
프랑스어: Guerre de Hollande
네덜란드어: Hollandse Oorlog
일부루이 14세의 전쟁
제3차 앵글로-네덜란드 전쟁
스카니아 전쟁
프랑스-스페인 전쟁
앵글로-프랑스 전쟁
날짜1672년 4월 6일 – 1678년 9월 17일
장소서유럽, 지중해, 대서양, 동인도 제도
결과나이메헌 조약 체결
영토 변화프랑스, 프랑슈콩테, 이프르, 모뵈주, 르카토캉브레지, 발랑시엔, 생토메르, 카셀을 스페인으로부터 획득; 프랑스, 샤를루아를 스페인에 양도
프랑스, 로렌, 프라이부르크, 켈을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획득; 프랑스, 필립스부르크를 신성 로마 제국에 양도
교전 세력
교전국 1
(1672–1674)
뮌스터 주교령 (1672–1674)
쾰른 (1672–1674)
스웨덴 제국 (1674년부터)
교전국 2
(1673년부터)
(1673년부터)
20px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1673년부터)
로렌 (1673년부터)
덴마크-노르웨이 (1674년부터)
(1678년)
지휘관
교전국 1 지휘관루이 14세
튀렌
콩데 대공
뤽상부르
드 크레키
숄베르크
장 2세 데스트레
아브라함 뒤케인
찰스 2세
요크 공작
루퍼트
칼 11세
칼 구스타프 브란겔
막시밀리안 하인리히
베른하르트 폰 갈렌
교전국 2 지휘관윌리엄 3세
요한 데 비트
미힐 데 라위터르
요한 마우리츠
라벤하우프트
아일바
코르넬리스 트롬프
레오폴트 1세
라이몬도 몬테쿠콜리
20px 프리드리히 빌헬름
샤를 4세
샤를 5세
카를로스 2세
마리아나 데 아우스트리아
빌라에르모사
산헤르만
크리스티안 5세
닐스 주엘
병력
교전국 1 병력253,000명 (최대)
30,000명
교전국 2 병력80,000명
132,350명 (연간 평균)}}
25,000명
20px 30,000명 (최대)
사상자
교전국 1 사상자120,000명 사망 또는 부상
교전국 2 사상자100,000명 사망 또는 부상
총 군사 사망자342,000명

2. 전투 전

네덜란드 독립 전쟁에서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는 에스파냐령 네덜란드를 침략했으나, 네덜란드가 잉글랜드스웨덴과 삼국 동맹을 체결하여 프랑스에 압력을 가했기 때문에 영유에 실패했다. 루이 14세는 이때 네덜란드의 행위를 불쾌하게 여기고 네덜란드 침공 의지를 드러냈다. 그러기 위해 삼국 동맹을 분열시키려 하고 잉글랜드에 접근했다.

1670년에 잉글랜드 국왕 찰스 2세와 루이 14세 사이에 도버의 밀약이 성립되었고, 같은 해 로렌 공국을 점령하여 샤를 4세를 추방하고, 1671년까지 신성 로마 제국 제후 대부분과 동맹 및 중립 관계를 맺고, 스웨덴과도 1672년에 프랑스-스웨덴 동맹을 체결하여 네덜란드를 포위했다. 그리고 같은 해 3월에 잉글랜드가 네덜란드에 선전포고하여 제3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을 시작하자 프랑스도 4월에 선전포고하고, 분쟁 중인 네덜란드를 침공했다.[4]

3. 전투의 경과

프랑스의 공세는 1672년 5월 4일, 콩데 휘하의 보조군이 세당에서 출발하여 뫼즈강 우안을 따라 북쪽으로 진군하면서 시작되었다.[1] 다음 날, 루이 14세는 튀렌 공작 휘하 5만 명의 주력군을 사열하기 위해 샤를루아에 도착했다.[2] 5월 17일, 튀렌은 마스트리흐트 남쪽 바로 아래 비즈(Visé)에서 콩데와 합류했다. 콩데의 지원을 받은 루이 14세는 즉시 요새를 포위하고 싶어했지만, 튀렌은 네덜란드가 다른 지역을 증원할 시간을 주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설득했다.[2] 튀렌은 마스트리흐트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피하고, 통에렌, 마제이크, 발켄뷔르흐의 외곽 지역을 점령하여 마스트리흐트 증원을 막았다.[1]

1672년 프랑스 침공 및 점령 당시 네덜란드(네덜란드 공화국과 스페인령)와 주변 지역 지도


마스트리흐트를 방어하기 위해 1만 명의 병력을 남겨두고, 프랑스군 나머지는 뫼즈강을 건너 뮌스터와 쾰른 선제후국(Electorate of Cologne) 군대(뤼크셈부르크가 이끌었음)의 지원을 받으며 라인강을 따라 진격했다. 라인강 도하를 방어하기 위한 네덜란드의 요새들은 병력과 장비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6월 5일까지 프랑스군은 라인베르크(Rheinberg), 오르소이, 뷔릭을 저항 없이 점령했다. 베젤(Wesel)은 시민들이 지휘관들을 학살하겠다고 위협하자 항복했고, 6월 9일에는 레스가 항복했다.[3] 프랑스군 주력은 엠머리히(Emmerich am Rhein)에서 라인강을 건넜다.

육지 상황과 달리, 바다에서는 네덜란드에게 유리했다. 6월 7일, 미힐 더 라위터르는 사우스월드(Southwold)에서 보급을 받던 영불 연합 함대를 공격했다. 솔베이 해전은 네덜란드가 해안 해역 지배권을 유지하고 무역로를 확보하며, 젤란트(Zeeland) 상륙 가능성을 끝냈다.

6월 초, 네덜란드군은 아이셀 강 방어선에 대한 프랑스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병력은 2만 명에 불과했고, 건조한 봄으로 인해 여러 지점에서 강을 건널 수 있었다. 6월 12일 톨후이스 전투에서 네덜란드 기병대는 프랑스군 증원부대에 압도당했다. 루이 14세는 엘터베르크에서 전투를 직접 관찰했고, 콩데는 손목에 총상을 입었다. 프랑스에서는 이 전투가 큰 승리로 기념되었고, '라인 강 통과(Passage du Rhin)'를 그린 그림들은 이 다리 건너기를 주제로 하고 있다.[4]

톨후이스 전투(''Passage du Rhin'')


빌럼 3세는 아이셀 강에서 철수했다. 튀렌은 헤이르데르란트 주를 점령했고, 뤼크상부르 공 등도 오퍼아이셀 주에 침입하면서 네덜란드는 점령 위기에 처했다. 6월 하순에는 위트레흐트 주도 프랑스군에 넘어갔다. 6월 14일, 빌럼은 약 8천 명의 잔여 야전군을 이끌고 위트레흐트에 도착했으나 시민들은 입성을 거부했다.[5] 결국 유트레흐트 의회는 약탈을 피하기 위해 성문 열쇠를 넘겨주었다. 6월 18일, 빌럼은 군대를 철수시켰다. 6월 19일, 프랑스군은 나르던 요새를 점령했다.[5]

오라녜 공 빌럼이 네덜란드 수계를 시찰함


분열된 홀란트 주는 평화 조건을 요구하기 위해 사절단을 파견했다.[5] 프랑스 국왕에게 총독령과 천만 길더가 제안되었으나, 더 가혹한 조건들이 제시되었다. 프랑스는 한 달 만에 36개의 요새를 점령하여 조직적 및 물류적 역량에 부담이 가해졌다.[5]

침략군이 점령한 36개의 요새


루이는 찰스 2세에게 빌럼 3세를 홀란드 잔여 국가의 군주로 만들 것을 약속했다. 6월, 네덜란드는 패배한 것처럼 보였다. 암스테르담 증권시장이 붕괴되었고 국제 신용은 사라졌다. 프랑스의 영토 확장에 대한 우려는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황제 레오폴트 1세 및 스페인의 샤를 2세의 지원을 가져왔다.[6] 루이 14세는 프랑스 국경 주변에서 소모전에 휘말리게 되었다. 8월, 튀렌은 네덜란드에 대한 공세를 끝내고 독일로 진군했다.

야곱 더 보스가 그린 코에보르던의 기습 공격과 네덜란드군의 탈환


1672년 말, 네덜란드군은 코에보르던을 탈환하고[7] 드렌터 주를 해방시켜 동맹군은 10개의 네덜란드 주 가운데 3개만을 점령하게 되었다.

1673년 마스트리흐트 공성전 당시 루이 14세


1673년 프랑스의 주요 목표는 마스트리흐트 점령이었으며, 이 도시는 6월 30일에 항복했다.[6] 8월, 네덜란드, 스페인, 신성 로마 제국은 프랑스 반대 동맹을 맺었고, 10월에는 샤를 4세가 가입했다.[6] 빌럼 3세는 나르던을 탈환했다. 11월, 네덜란드-스페인 연합군은 을 점령했다. 프랑스군은 네덜란드에서 철수해야 했다.

1673년 8월 텍셀 해전에서 네덜란드 함대가 영국-프랑스 연합 함대를 격파


1674년 2월 웨스트민스터 조약으로 영국과 네덜란드는 평화를 맺었다.[6]

세네프 전투(1674년); 격렬했으나 결정적이지 못한 전투


1674년 봄, 프랑스는 프랑슈콩테를 점령했다. 세네프 전투에서 양측 모두 승리했지만, 엄청난 사상자는 루이 14세의 위치전을 선호하게 했다.[6]

튀렌(1675년 잘츠바흐 전투에서 전사)


1674년 6월, 튀렌은 라인강을 건너 신스하임 전투에서 제국군을 격파했다.[7] 10월 4일 엔츠하임 전투는 교착 상태에 이르렀다. 튀렌은 1675년 1월 5일 튀르크하임 전투에서 승리하여 알자스를 확보했다. 라인란트에서 제국군 작전 지휘는 라이몬도 몬테쿠콜리에게 넘어갔다. 7월 27일 잘츠바흐 전투에서 튀렌은 사망했다.[7]

시칠리아에서는 프랑스가 1674년 메시나(Messina) 도시의 반란을 지원했다. 영국과의 평화협정 이후, 네덜란드 함대는 공격적인 작전에 투입되었다. 코르넬리스 트롬프 제독이 이끄는 네덜란드 함대는 프랑스 해안을 따라 작전을 펼쳤다.

3. 1. 네덜란드의 위기

루이 14세와 튀렌 공작의 군대는 5월에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샤를루아에 집결했고, 콩데 공 루이 2세도 남쪽 스당에서 대기했다. 뮌스터 주교, 쾰른 대주교와 뤼크상부르 공 프랑수아 앙리 드 몽모랑시의 군대도 네덜란드 동쪽에서 침공을 노리고 있었다. 루이 14세와 튀렌의 군대, 그리고 콩데 공은 동쪽으로 진격하여 리에주 주교령을 지나 마스트리흐트 근교에서 합류했다. 마스트리흐트에 일부 군대를 남겨 포위시킨 후 북상하여 라인강 좌안의 도시들을 함락시키며 네덜란드에 접근했다.

네덜란드는 프랑스군에 대비하여 아이셀 강 좌안, 헤이르데르란트 주와 오퍼아이셀 주의 경계 지역에 빌럼 3세가 방어에 나섰다. 그러나 6월, 콩데 공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라인강을 따라 진격하여 아이셀 강 남쪽 국경에 있는 니더라인 강과 마스 강의 분기점을 노리고 라인강을 도하하여 방어군을 격파하고 네덜란드에 침공했다. 남쪽에서 포위된 것을 알게 된 빌럼 3세는 아이셀 강에서 철수했다. 콩데 공은 라인강에서 부상을 입었기 때문에 튀렌이 지휘를 맡아 헤이르데르란트 주를 점령했다. 뤼크상부르 공 등도 오퍼아이셀 주에 침입하면서 네덜란드는 점령 위기에 처했다.

6월 하순에는 위트레흐트 주도 프랑스군의 손에 넘어갔다. 네덜란드 정부는 제방을 파괴하여 홀란트 주를 치수 방어선으로 덮어 방어를 강화했다. 민중은 무능한 공화정부에 대한 분노로 빌럼 3세네덜란드 총독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7월에 빌럼 3세는 민중의 지지로 네덜란드 총독으로 선출되었다. 공화정부에 대한 비난은 멈추지 않았고, 지도자 코르넬리스 드 비트와 요한 드 비트 형제가 민중에게 학살당했으며, 그 자리를 빌럼 3세가 이어받아 네덜란드의 지도자가 되었다.

6월에 공화정부가 프랑스군에 항복 사절을 보냈지만, 광범위한 영토 축소와 프랑스에 대한 종속을 강요하는 조건에 민중이 분노하여 협상은 결렬되었다. 7월에 찰스 2세는 심복인 버킹엄 공 조지 빌리어스, 얼링턴 백작 헨리 베넷, 핼리팩스 자작 조지 사빌을 빌럼 3세에게 파견하여 영국과 프랑스 간의 조기 강화를 요청했지만, 역시 네덜란드의 영토 할양과 종속이 조건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협상도 실패로 끝났다.[5]

3. 2. 전선의 확대

빌럼 3세는 반격에 나서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1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등 다른 독일 제후들과 스페인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 포위망을 형성했다.[6] 스스로도 적극적으로 출격하여 위트레흐트주의 프랑스군과 교전하고, 네덜란드에서 남하하여 샤를루아를 공격하기도 했다.[6] 모두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후방이 불안해진 프랑스는 튀렌을 독일로, 부상이 회복된 콩데 공을 로렌으로 돌렸기 때문에 네덜란드는 다소 회복되었다.[6] 그러나 위트레흐트 주에는 뤽상부르가 남아 있었고, 위기적인 상황은 변함없었다.[6]

1673년, 프랑스군은 보방의 지휘 아래 마스트리흐트를 함락시켰다.[6] 잉글랜드도 프랑스에서 파견된 장군 프레데릭 쇤베르 지휘하의 군대를 네덜란드에 침공시킬 생각으로 대기하고 있었다.[6] 그러나 잉글랜드는 1672년 솔베이 해전에서 네덜란드 해군 제독 미힐 데 로이터에게 패배했고, 1673년에도 텍셀 해전에서 패배하여 네덜란드에 침공하지 못하고 계속 실패했다.[6] 잉글랜드 본국에서도 찰스 2세가 반프랑스 의회로부터 참전을 비난받아 전쟁 지속은 불가능해졌고, 네덜란드 침공군은 해산되어 쇤베르는 대륙으로 돌아갔으며, 네덜란드의 부담은 줄어들었다.[6] 잉글랜드 함대에 대응하기 위해 마스 강 하구로 이동한 빌럼 3세는 침공의 기회가 없어졌다고 보고 북상하여, 뤽상부르의 군대를 무시하고 위트레흐트 주 북부의 나르던을 점령하여 위트레흐트 주를 위협했다.[6]

독일에서는 튀렌이 분전하여 1월에 프리드리히 빌헬름을 전쟁에서 이탈시켰지만, 5월에 레오폴트 1세가 참전하여, 그의 부하 라이몬도 몬테쿠콜리가 이끄는 군대를 독일로 보냈다.[6] 빌럼 3세도 호응하여 8월에 신성 로마 제국과 스페인과 동맹을 체결하고, 9월에 네덜란드에서 독일로 진격하여 튀렌의 추격을 따돌린 몬테쿠콜리와 합류하여, 11월에 쾰른 선제후령의 수도 을 함락시켜 라인 강 연안의 제후들을 네덜란드 쪽으로 끌어들였다.[6] 네덜란드의 프랑스군도 이 상황으로 인해 철수했고, 12월에 네덜란드로 돌아온 빌럼 3세는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상황은 호전되었다.[6]

1674년이 되자, 2월에 잉글랜드와 네덜란드가 화목하여 잉글랜드가 이탈하고, 5월에 뮌스터 주교, 쾰른 선제후와도 화목했으며, 제후들도 참전을 표명했고, 7월에는 프리드리히 빌헬름도 복귀하여 원군을 파견했다.[6] 프랑스군도 네덜란드에서 철수했기 때문에 빌럼 3세의 명성은 높아졌다.[6]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은 3월부터 6월에 걸쳐 프랑슈콩테를 제압했고, 8월에 콩데 공은 동맹군을 이끈 빌럼 3세를 스네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6] 이후 전장은 네덜란드와 독일로 옮겨지게 된다.[6]

3. 3. 독일·네덜란드 전역

1674년 6월, 튀렌은 7,000명의 병력으로 라인강을 건너 진스하임 전투에서 아에네아스 드 카프라라가 이끄는 제국군을 격파했으나, 그 지연으로 알렉산더 폰 부르논빌이 샤를 4세와 합류할 수 있었다. 증원군을 받은 튀렌은 네카어 강을 건너기 시작하여 제국군의 후퇴를 강요했다. 부르논빌은 알자스 공격 기지인 스트라스부르로 행군했지만, 프리드리히 빌헬름 휘하 2만 명의 군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면서 지연되었다. 이를 막기 위해 튀렌은 야간 행군을 통해 제국군을 기습하여 10월 4일 엔츠하임 전투에서 교착 상태에 이르렀다. 당시 관례였던 대로 부르논빌은 봄까지 작전을 중단했지만, 튀렌은 1675년 1월 5일 튀르크하임 전투에서 승리하여 알자스를 확보하고 제국군의 침략을 막았다.

라인란트에서 제국군 작전 지휘는 라이몬도 몬테쿠콜리에게 넘어갔다. 그는 2만 5천 명의 병력으로 필립스부르크에서 라인강을 건너 프랑스군을 북쪽으로 유인한 다음 되돌아오기를 바랐지만, 튀렌은 속지 않았고, 대신 몬테쿠콜리가 보급을 받는 것을 막기 위해 스트라스부르 근처의 강을 봉쇄했다. 7월 중순까지 양쪽 군대 모두 식량이 부족해졌고 튀렌은 후퇴하는 제국군을 전투에 끌어들이려고 했다. 1675년 7월 27일 잘츠바흐 전투에서 그는 적의 위치를 정찰하는 중에 빗나간 대포알에 맞아 사망했다.[7] 그의 죽음으로 사기가 저하된 프랑스군은 몇몇 결정적인 충돌 후 후퇴하여 알자스로 돌아갔다. 그들은 스트라스부르에서 라인 강을 건너 하게나우를 포위한 몬테쿠콜리에게 추격당했고, 다른 제국군은 콘체르 브뤼케 전투에서 크레키를 격파하고 트리어를 탈환했다. 콩데는 플랑드르에서 지휘권을 맡기 위해 파견되어 몬테쿠콜리를 라인 강 너머로 후퇴하게 했지만, 건강 악화로 12월에 은퇴해야 했고 크레키가 그를 대신했다.

1675년, 루이 14세는 많은 전비를 모금하고 스웨덴의 참전을 촉구했다. 그러나 스웨덴의 독일 침공은 독일 제후들의 반감을 샀고, 최전선에 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네덜란드와 동맹을 맺었다. 북독일에서 벌어진 스웨덴-브란덴부르크 전쟁은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승리로 끝났다.

프랑스는 네덜란드군과 제국군의 분단을 꾀하고 네덜란드를 흐르는 뫼즈강 유역의 평정을 노렸다. 콩데 공과 그의 아들 앙리 3세가 이 역할을 맡았고, 프랑스 장군 프랑수아 드 크레키가 이끄는 별동대가 5월 상류의 디낭을 빼앗고, 앙귈렘 공이 6월 림뷔르흐를 함락시켰기 때문에 마스트리흐트에서 디낭까지의 유역은 프랑스군에 점령되었다.

독일 전선은 그 이상 진전되지 않았지만, 콩데 공과 몬테쿠콜리는 이 해를 끝으로 은퇴했다. 프랑스는 네덜란드와 독일 제후들과 그 후에도 전투를 계속했지만, 카셀 전투, 생드니 전투의 승리, 프랑슈콩테 등 일부 영토 획득을 제외하고는 전황이 호전되지 않았다. 뤽상부르에 의한 네덜란드 여러 도시 탈환, 콩데 공을 대신하여 라인강 방면을 담당하게 된 크레키가 샤를 5세로부터 알자스를 방어한 것 외에는 진전이 없었다. 1677년, 잉글랜드 왕 찰스 2세의 동생 제임스 2세의 딸 메리 2세와 빌헬름 3세의 결혼으로 프랑스의 네덜란드 침공 실패는 결정적이 되었다.[1]

4. 종결

1678년부터 1679년에 걸쳐 네덜란드 나이메헌에서 교전국들은 나이메헌 조약을 맺고 강화했다.[1] 루이 14세는 네덜란드 병합을 포기하는 대신 플랑드르의 도시 콩데(Condé), 발랑시엔(Valenciennes), 부샹(Bouchain), 캉브레(Cambrai), 에르(Aire), 생토메르(Saint-Omer), 이프르(Ypres) 및 프랑슈콩테 등을 얻었다.[2] 네덜란드는 총독 빌럼 3세의 지휘 아래 네덜란드 영토 전역의 탈환에 성공하고, 이후 잉글랜드와의 관계를 중시하게 된다. 1688년의 명예혁명에서 빌럼 3세가 잉글랜드 국왕 윌리엄 3세로 즉위한 것도 프랑스에 대한 대응책의 일환이었다.

루이 14세는 스웨덴과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사이에서는 프랑스의 위세를 어느 정도 과시하는 데 성공했다. 1679년 생제르맹에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로부터 점령지 포메른(Pommern)을 스웨덴에 반환하게 했다. 또한 퐁텐블로에서 스코네 전쟁의 강화 조약 중재를 수행하는 등 프랑스의 위신을 유지했다. 그러나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대선제후”라고 불리게 되었다.[3]

전후에도 루이 14세는 영토 확장을 도모하여 1679년부터 1683년에 걸쳐 동부 국경 지대의 과거 영토를 조사하고, 프랑스 영토로 간주한 땅을 군사 점령 및 병합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이는 네덜란드에서의 주장과 같이 당사자 간의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프랑스의 권리를 주장하는 강압적인 방식이었지만, 1683년까지 룩셈부르크스트라스부르를 병합하고, 나이메헌 조약에 의한 영토 확장과 베르사유 궁전의 이전과 함께 루이 14세의 통치는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여러 나라의 경계심을 자극하여 대동맹 전쟁의 발발로 이어졌다.

참조

[1] 웹사이트 The Wars of Louis XIV in Treaties (Part V): The Peace of Nijmegen (1678–1679) http://opil.ouplaw.c[...] 2018-12-30
[2] 논문 Treaty of Peace between France and Spain, signed at Nimeguen, 17 September 1678 https://opil.ouplaw.[...] 2018-12-31
[3] 서적 A History of Spain Palgrave 2009
[4] 문서 林、P56 - P62、森田、P260 - P261、長谷川、P134 - P137、友清、P115 - P133。
[5] 문서 林、P62 - P66、友清、P136 - P157。
[6] 문서 林、P66 - P69、友清、P178 - P197。
[7] 문서 林、P69 - P72、森田、P261 - P263、長谷川、P137 - P139、友清、P198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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