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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일본 무역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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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일본 무역 갈등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경제 성장과 미국의 무역 적자 심화 배경 속에서 섬유, 철강, 컬러 TV, 자동차, 반도체, 통신 등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발생한 무역 분쟁을 의미한다. 1980년대에는 환율 문제와 구조적 요인으로 갈등이 심화되었고, 플라자 합의와 미일 구조 협의를 거치며 일본은 시장 개방을 요구받았다. 1990년대 이후에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보호무역주의 정책으로 인해 재조명되기도 했다. 이러한 갈등은 일본 경제에 영향을 미쳤으며, 미중 무역 분쟁에 시사점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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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일본 무역 갈등
개요
주제미국과 일본 간의 무역 갈등
시작 시점1950년대
종료 시점현재 진행 중
배경
주요 원인경제 성장률 차이
무역 불균형
산업 정책 차이
주요 쟁점
섬유 산업일본의 저가 섬유 제품 수출로 인한 미국 섬유 산업의 피해
철강 산업일본의 철강 제품 수출 증가로 인한 미국 철강 산업의 경쟁력 약화
컬러 텔레비전일본 컬러 텔레비전의 미국 시장 점유율 확대
자동차 산업일본 자동차의 높은 품질과 가격 경쟁력으로 인한 미국 자동차 산업의 위기
반도체 산업일본 반도체의 급성장으로 인한 미국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 약화
농산물미국의 농산물 수출 제한에 대한 일본의 반발
주요 협상 및 합의
섬유 협정일본의 섬유 제품 수출량 제한 (1969년)
자율 규제 협정일본 자동차 회사의 미국 수출량 자율 규제 (1981년)
플라자 합의G5 국가 간의 환율 조정 합의 (1985년)
미일 반도체 협정미국 반도체의 일본 시장 점유율 확대 (1986년)
구조 협의양국 경제 구조 개혁에 대한 협의 (1989년)
영향
경제적 영향환율 변동
무역 정책 변화
산업 구조 조정
정치적 영향양국 관계 긴장
국제 무역 질서 변화
관련 용어
자유 무역국가 간의 무역 장벽을 최소화하는 무역 형태
보호 무역국내 산업 보호를 위해 무역 장벽을 사용하는 무역 정책
덤핑해외 시장에서 원가 이하로 판매하는 행위
관세수입품에 부과하는 세금
무역 수지수출액과 수입액의 차이
참고 자료
관련 서적Chalmers Johnson, MITI and the Japanese Miracle: The Growth of Industrial Policy, 1925-1975
Laura D'Andrea Tyson, Who's Bashing Whom?: Trade Conflict in High-Technology Industries
관련 논문Krugman, Paul R. "Is Free Trade Passé?" Journal of Economic Perspectives, vol. 1, no. 2, 1987, pp. 131–144.
Lawrence, Robert Z. "Imports Are to Blame: False Macroeconomic Diagnosis." Brookings Review, vol. 11, no. 1, 1993, pp. 26–31.

2. 배경

1965년 이후, 미국-일본 무역 수지가 역전되어 미국의 대일 무역이 상시 적자(일본에서 보면 흑자)가 되면서 문제가 일시에 터져 나왔다.[1]

1972년 미일 섬유 교섭에서 사토 에이사쿠 내각의 다나카 가쿠에이 통상대신이 양보하지 않자, 미국의 리처드 닉슨 행정부는 Trading with the Enemy Act|대적 통상법영어으로 수입 제한을 시사했고, 일본은 대미 수출 자율 규제를 받아들였다.[1] 1977년에는 철강, 컬러 텔레비전에서도 이 규제가 이어졌다.

1980년대에는 농산물(쌀, 쇠고기, 오렌지), 특히 일본차가 표적이 되었고, 1981년 일본 정부와 자동차 업계는 수출 자율 규제를 받아들였다.[2] 1982년에는 일본인으로 오인된 중국계 미국인 빈센트 친이 디트로이트에서 백인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아시아계 미국인 사회에서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큰 사회 문제로 번졌다.[3][4]

1985년 미국의 대일 무역 적자가 500억 달러에 달하면서 일본의 투자, 금융, 서비스 시장의 폐쇄성이 비판받았고, 미일 간 경제 전반에서 마찰이 발생하여 재팬 배싱이 일어났다. 이와 함께 "미일 하이테크 마찰"도 두드러졌다.

'''미일 하이테크 마찰'''은 반도체, 컴퓨터, 항공 우주 등 첨단 기술 분야에서 미일 간의 충돌적인 사건이 다발한 것을 가리킨다. 미국은 슈퍼 301조를 적용하거나 시사하여 일본 제품을 배척했다. 미일 슈퍼컴퓨터 무역 마찰로 일본전기나 후지쯔 등의 슈퍼컴퓨터를 배제했고, IBM 산업 스파이 사건으로 히타치 제작소, 미쓰비시 전기 직원이 체포되기도 했다. 후지쯔페어차일드 반도체 인수 시도는 미국 외국 투자 위원회(CFIUS)에 의해 저지되었다.[5] 항공 우주 분야에서는 미일 위성 조달 합의로 일본의 독자적인 인공위성 개발이 억제되었고, F-2 지원 전투기의 "공동 개발"이 강요되었으며, 미놀타-허니웰 특허 소송 등 지적 재산권 분쟁도 있었다.

1985년 플라자 합의로 엔고가 강요되었으나, 일본의 무역 흑자는 1986년 - 1988년에 오히려 증가했다.[6] 1986년 마에카와 보고서에서 일본은 미국의 요구에 따라 10년간 430조 엔의 공공 투자를 약속했고,[7] 같은 해 미일 반도체 협정이 체결되어 일본 반도체 산업은 미국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8]

1987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일본의 덤핑을 이유로 일본산 개인용 컴퓨터와 컬러 텔레비전 등에 100% 제재 관세를 부과했다.[9][10]

1989년 이후 미일 구조 협의와 1994년 이후 연례 개혁 요구서가 이어졌지만, 1990년대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제 성장으로 미중 무역 마찰이 주목받으면서 재팬 패싱 현상이 나타났다. 1996년 이후 미국에서 일본에 대한 호감도는 회복되었다.[11]

2018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대중, 대일 무역 적자를 문제 삼아[12][13] 통상확대법 231조를 적용, 철강과 알루미늄 수입 제한을 발동했다.[16]

일본과 중국은 미국의 보호주의에 우려를 표하며 경제 협력을 강화했고,[17][18][19] 아베 신조 총리는 중국과 "신시대 3원칙"을 내세우며 협력에 합의했다.[20] 그러나 2019년 중국이 미국과 미중 무역 전쟁으로 대립하자, 일본은 미일 무역 협상을 통해 미일 무역 협정을 체결, 미국산 농산물 시장 개방을 수용하고 미국의 대일 추가 관세를 보류시켰다.[22] 이 협정은 2020년 1월 발효되었다.[23]

2. 1. 미국의 무역 적자 심화

1965년 이후, 미국-일본 무역 수지가 역전되어 미국의 대일 무역 적자가 상시화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1] 1972년 미일 섬유 교섭에서 일본이 양보하지 않자, 미국의 리처드 닉슨 행정부는 Trading with the Enemy Act|대적 통상법영어으로 수입 제한을 시사했고, 일본은 대미 수출 자율 규제를 수용했다.[1] 1977년에는 철강, 컬러 텔레비전에서도 이 규제가 이어졌다.

1980년대에는 농산물(쌀, 쇠고기, 오렌지), 특히 일본차가 표적이 되었고, 1981년 일본 정부와 자동차 업계는 수출 자율 규제를 받아들였다.[2] 1982년에는 일본인으로 오인된 중국계 미국인 빈센트 친이 디트로이트에서 백인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아시아계 미국인 사회에서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큰 사회 문제로 번졌다.[3][4]

1985년 미국의 대일 무역 적자가 500억 달러에 달하면서, 일본의 투자, 금융, 서비스 시장의 폐쇄성이 비판받았고, 미일 간 경제 전반에서 마찰이 발생하여 재팬 배싱이 일어났다. 이와 연동되어 "하이테크 마찰"도 두드러졌다.

1985년 플라자 합의를 통해 엔고가 강요되었지만, 일본의 무역 흑자는 오히려 1986년 - 1988년에 걸쳐 증가했다.[6] 1986년 4월 마에카와 보고서에서는 미국의 요구에 따라 10년 동안 430조 엔의 공공 투자를 약속했다.[7] 같은 해 7월에는 미일 반도체 협정이 체결되어 일본의 반도체 산업이 미국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8]

1987년 4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일본의 덤핑을 이유로 일본산 개인용 컴퓨터와 컬러 텔레비전 등에 100%의 제재 관세를 부과했다.[9][10]

3. 산업별 분쟁

1965년 이후, 미국-일본 무역 수지가 역전되어 미국의 대일 무역 적자가 지속되면서(일본의 흑자) 양국 간 무역 갈등이 본격화되었다.[1]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섬유, 철강, 컬러 텔레비전, 자동차 등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분쟁이 발생했다.

리처드 닉슨 행정부는 미일 섬유 교섭에서 일본이 양보하지 않자 대적 통상법으로 수입 제한을 시사하며 압박했고, 일본은 결국 대미 수출 자율 규제를 수용했다.[1] 1977년에는 철강, 컬러 텔레비전에도 이러한 규제가 이어졌다.

1980년대에는 농산물(쌀, 쇠고기, 오렌지), 특히 일본차가 미국의 주요 압박 대상이 되었고, 일본은 수출 자율 규제를 받아들였다.[2] 1982년에는 일본인으로 오인된 중국계 미국인 빈센트 친이 디트로이트에서 백인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아시아계 미국인 사회 전체가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큰 사회 문제로 번졌다.[3][4]

1980년대에는 반도체, 컴퓨터, 항공 우주 등 첨단 기술 분야에서 미국과 일본 간의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했는데, 이를 '''미일 하이테크 마찰'''이라고 한다. 미국은 슈퍼 301조를 적용하거나 적용할 것을 시사하며 일본 제품을 배척했다. 미일 슈퍼컴퓨터 무역 마찰로 일본전기, 후지쯔 등의 슈퍼컴퓨터를 배제했고, IBM 산업 스파이 사건으로 히타치 제작소, 미쓰비시 전기의 직원을 체포하는 등 양국 간 감정을 악화시키는 사건들이 발생했다. 후지쯔가 페어차일드 반도체 인수를 시도했을 때 미국 외국 투자 위원회(CFIUS)에 의해 저지되기도 했다.[5] 항공 우주 분야에서는 미일 위성 조달 합의에 의한 일본 독자적인 인공 위성 개발 억제, F-2 지원 전투기의 "공동 개발" 강요 (F-2 (항공기)#미 의회에 의한 외압 참조) 등이 있었고, 그 외에도 미놀타-허니웰 특허 소송 등의 지적 재산권을 둘러싼 분쟁 등이 있었다.

1986년 미일 반도체 협정은 "일본 정부는 일본산 반도체의 수출을 스스로 규제하고, 일본 국내 사용자에게는 외국산(주로 미국산) 반도체의 사용을 장려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 미국에 유리했다. 당시 세계 시장 점유율 1위였던 일본의 반도체 산업은 미국의 철저한 감시를 받게 되었고, 결국 붕괴되었다.[8]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일본의 덤핑을 이유로 일본산 개인용 컴퓨터와 컬러 텔레비전 등에 100%의 제재 관세를 부과하는 이례적인 조치를 취했다.[9][10]

3. 1. 섬유 분쟁 (1957-1972)

미국의 보호무역주의자들이 처음 주목한 일본 상품은 섬유 상품이었다. 1957년부터 일본산 섬유 상품 수입을 둘러싼 무역 갈등은 1960년대에 심화되었다. 미국의 통상 압력에 일본은 오키나와 반환 문제에서 미국의 양보를 조건으로 섬유 산업에서 양보할 의사를 보였고, 미국이 이에 동의하면서 1972년에 '''미일섬유협정'''과 '''오키나와 반환'''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이 협정으로 일본은 섬유 상품의 대미 수출을 '''자율규제'''하였고, 태평양 전쟁 이후 미국의 점령지였던 오키나와를 반환받았다.[37] 이 섬유 마찰은 미일 무역 전쟁의 시작을 알렸다.

1965년 이후, 미국-일본 무역 수지가 역전되어 미국의 대일 무역 적자가 지속되면서(일본의 흑자) 문제가 본격화되었다.

1972년 미일 섬유 교섭에서 당시 사토 에이사쿠 내각의 통상대신이었던 다나카 가쿠에이가 양보하지 않자, 미국의 리처드 닉슨 행정부는 대적 통상법(Trading with the Enemy Act)에 따른 수입 제한을 시사했고, 일본은 결국 대미 수출 자율 규제를 수용했다.[1]

3. 2. 철강 분쟁 (1976-1978)

1970년대 일본 철강산업의 급성장으로 일본은 철강 수출국이 된 반면, 미국은 철강 수입국이 되었다. 미국의 대일 철강 무역수지 적자가 심화되자 미국은 일본에 통상 압력을 가했고, 일본은 이에 굴복하여 대미 철강 수출을 '''자율규제'''했다. 1976년, 미국과 일본은 특별 철강 수입 할당량 한도 계약을 체결했고, 1978년 미국 정부는 트리거 가격 제도[38]를 도입했다.

3. 3. 컬러 TV 분쟁 (1976-1977)

1970년대 일본산 컬러TV는 미국 수입 컬러TV의 약 90%를 차지하며 미국 시장의 30% 이상을 점유했다.[1] 이로 인해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가 심화되고 미국 컬러TV 제조업체들이 어려움을 겪자, 1977년 미국 정부는 일본에 통상 압력을 가했다.[1] 결국 일본은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미국 컬러 TV 수출을 자율적으로 규제하게 되었다.[1]

1972년 미일 섬유 교섭에서 일본이 양보하지 않자, 리처드 닉슨 행정부는 대적 통상법(Trading with the Enemy Act)으로 수입 제한을 시사하며 일본을 압박했고, 일본은 결국 대미 수출 자율 규제를 수용했다.[1] 1977년에는 철강, 컬러 텔레비전에도 이러한 규제가 이어졌다.[1]

1987년 4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일본의 덤핑을 이유로 일본산 개인용 컴퓨터와 컬러 텔레비전 등에 100%의 제재 관세를 부과하는 이례적인 조치를 취했다.[9][10]

3. 4. 자동차 분쟁 (1979-1981)

1980년대 일본 자동차 생산량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상승했지만, 미국 자동차 생산량은 감소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일본에 통상 압력을 가했고, 일본은 1981년 미일 자동차 및 부품 무역에 관한 협정에 서명하여 일본산 자동차의 대미 수출을 '''자율규제'''했다.[39]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차가 미국의 주요 압박 대상이 되었고, 1981년 일본 정부와 자동차 업계는 수출 자율 규제를 받아들였다.[2] 1982년에는 일본인으로 오인된 중국계 미국인 빈센트 친이 디트로이트에서 백인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아시아계 미국인 사회 전체가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큰 사회 문제로 번졌다.[3][4]

3. 5. 반도체 분쟁 (1986-1996)

1980년대 미국과 일본의 갈등은 반도체 산업에서 다시 한번 발생했다. 일본의 메모리 반도체 산업은 빠르게 성장하여 미국의 메모리 반도체 산업을 추월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미국은 미래 첨단 산업의 핵심인 반도체 패권을 일본에 넘겨주지 않기 위해 일본에 통상 압력을 가했고, 결국 일본은 1986년 미일반도체협정에 서명하게 되었다.[42][43] 이후 일본의 반도체 산업은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고 쇠퇴하게 된다.[44]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반도체 부품과 그 제품인 컴퓨터, 항공 우주 등 첨단 기술 분야에서 미국과 일본 간의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했는데 이를 '''미일 하이테크 마찰'''이라고 한다. 미국은 슈퍼 301조를 적용하거나 적용할 것을 시사하며 일본 제품을 배척했다. 미일 슈퍼컴퓨터 무역 마찰로 일본전기, 후지쯔 등의 슈퍼컴퓨터를 배제했고, IBM 산업 스파이 사건으로 히타치 제작소, 미쓰비시 전기의 직원을 체포하는 등 양국 간 감정을 악화시키는 사건들이 발생했다. 후지쯔가 페어차일드 반도체 인수를 시도했을 때 미국 외국 투자 위원회(CFIUS)에 의해 저지되기도 했다.[5]

1986년 7월에는 미일 반도체 협정(제1차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은 "일본 정부는 일본산 반도체의 수출을 스스로 규제하고, 일본 국내 사용자에게는 외국산(주로 미국산) 반도체의 사용을 장려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 미국에 유리했다. 당시 세계 시장 점유율 1위였던 일본의 반도체 산업은 미국의 철저한 감시를 받게 되었고, 결국 붕괴되었다.[8]

1987년 4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일본의 덤핑을 이유로 일본산 개인용 컴퓨터와 컬러 텔레비전 등에 이례적인 100%의 제재 관세를 부과했다.[9][10]

3. 6. 통신 분쟁 (1985-1986)

1985년, 미국은 일본의 전기통신산업에도 압력을 가했다. 결국 일본은 굴복하여 일본 기업의 내수 시장 독점을 보장하던 전기통신사업법을 개정하고 전기통신시장을 개방했으며, 비관세 무역 장벽 역시 상당 부분 철폐했다.[40][41] 또한 국영기업인 NTT를 민영화하여 전기통신산업에 대한 정부의 지배력을 약화시켰다.

4. 환율 및 구조 문제

1965년 이후, 미국-일본 무역 수지가 역전되어 미국의 대일 무역이 상시 적자를 기록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1972년 미일 섬유 교섭에서 일본이 양보하지 않자, 미국의 리처드 닉슨 행정부는 대적 통상법으로 수입 제한을 시사했고, 일본은 대미 수출 자율 규제를 받아들였다.[1] 1977년에는 철강, 컬러 텔레비전에서도 이 규제가 이어졌다.

1980년대에는 농산물(쌀, 쇠고기, 오렌지), 특히 일본차가 표적이 되었고, 1981년 일본 정부와 자동차 업계는 수출 자율 규제를 받아들였다.[2] 1982년에는 일본인으로 오인된 중국계 미국인 빈센트 친이 디트로이트에서 백인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사회 문제로 번졌다.[3][4]

1985년 미국의 대일 무역 적자가 500억 달러에 달하자, 일본의 투자, 금융, 서비스 시장의 폐쇄성이 비판받으며 거의 모든 분야에서 마찰이 발생했고, 재팬 배싱이 일어났다. 같은 해 플라자 합의를 통해 엔고가 강요되었으나, 일본의 무역 흑자는 줄어들지 않았다.

1986년 4월 마에카와 보고서에서 미국 요구에 따라 10년간 430조 규모의 공공 투자·인프라스트럭처 투자를 중심으로 한 재정 지출 확대, 민간 투자를 확대하기 위한 규제 완화 추진 등을 약속·실시했다.[7] 같은 해 7월에는 미일 반도체 협정이 체결되어 일본 반도체 산업이 감시받고 붕괴되었다.[8]

1987년 4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일본의 덤핑을 이유로 일본산 개인용 컴퓨터와 컬러 텔레비전 등에 100%의 제재 관세를 부과했다.[9][10]

1989년부터 미일 구조 협의가 실시되었고, 1994년 이후 연례 개혁 요구서가 발간되었다.

4. 1. 플라자 합의 (1985)

1985년, 미국, 일본, 서독, 프랑스, 영국의 서방 5개국 재무장관(G5)은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회의를 열어 외환 시장에 5개국 정부가 공동 개입하여 주요 통화에 대한 환율을 조작하였다. 이는 일본의 엔화와 서독의 마르크화를 고평가시켜 미국의 막대한 무역 적자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조약은 플라자 호텔에서 서명되었기 때문에 '''플라자 합의'''라고도 한다.[1]

플라자 합의는 일본의 통화 약세를 문제 삼아 엔고를 강요하였으나, 이후에도 일본의 무역 흑자·경상 흑자는 줄어들기는커녕 1986년 - 1988년에 걸쳐 1985년에 비해 증가했다.[6]

4. 2. 미일 구조 협의 (1989-1994)

1980년대 후반, 미국은 지속적인 대일 무역수지 적자의 원인이 일본 특유의 저축투자 경향, 내수 시장의 폐쇄성 등 구조적인 요인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미일 간 무역 마찰의 초점은 구조적인 요인으로 바뀌었다.

1989년, 미국은 슈퍼 301조를 발동했다. 같은 해에 미국과 일본은 일본이 내수 시장을 외국에 개방하는 "구조 무역 장벽 계약"에 서명했다.

1993년 7월, 도쿄에서 미국은 일본이 시장을 더 개방하고 특정 수량 지표로 시장 개방 정도를 측정할 것을 요구했으나, 일본은 규제된 무역을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1994년, 미국은 일본에 대한 무역 제재를 위해 슈퍼 301조를 다시 발동했다. 그 결과 일본은 제재 마감 시한 전인 1994년 5월 무역 마찰을 해소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조치를 통해 일본 내수시장을 개혁하고 외국에 시장을 개방하기로 합의했다.[45][46][47][48][49][50][51]

  • 10년간 630조 규모의 공공투자
  • 반독점법 지도 지침 작성
  • 총리실 직속 수입위원회 설치
  • 특허심사기간 단축
  • 수입 수속 기간 단축
  • 외국 자본의 대일 투자 규제 완화

5. 1990년대 이후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농산물(쌀, 쇠고기, 오렌지), 특히 일본차가 미국의 무역 제재 표적이 되었다.[2] 1981년 일본 정부와 자동차 업계는 수출 자율 규제를 받아들였다.[2] 1982년에는 일본인으로 오인된 중국계 미국인 빈센트 친이 디트로이트에서 백인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아시아계 미국인 사회 전체가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큰 사회 문제로 번지기도 했다.[3][4]

1985년 미국의 대일 무역 적자가 500억 달러에 달하면서, 일본의 투자, 금융, 서비스 시장의 폐쇄성이 비판받았다. 사실상 미일 간 경제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마찰이 생겨 재팬 배싱이 일어났다. 이와 연동되어, "하이테크 마찰"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미일 하이테크 마찰'''은 반도체 부품과 그 제품인 컴퓨터, 항공 우주 등 첨단 기술 분야에서 미일 간의 충돌적인 사건이 다발한 것을 가리킨다. 미국은 슈퍼 301조를 적용하여 일본 제품을 배척했다. 미일 슈퍼컴퓨터 무역 마찰로 일본전기, 후지쯔 등의 슈퍼컴퓨터를 배제했고, IBM 산업 스파이 사건으로 히타치 제작소, 미쓰비시 전기의 직원을 체포하는 등 양측의 감정을 거스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페어차일드 반도체 인수가 미국 외국 투자 위원회(CFIUS)에 의해 저지되기도 했다.[5] 항공 우주 분야에서는 미일 위성 조달 합의에 의한 일본 독자적인 인공 위성 개발 억제, F-2 지원 전투기의 "공동 개발" 강요(F-2 (항공기)#미 의회에 의한 외압 참조) 등이 있었다. 그 외에도 미놀타-허니웰 특허 소송 등의 지적 재산권 분쟁도 있었다.

1985년, 플라자 합의로 엔고가 강요되었지만, 일본의 무역 흑자·경상 흑자는 오히려 1986년 - 1988년에 걸쳐 증가했다.[6]

1986년 4월 마에카와 보고서에서는 미국의 요구에 부응하여 10년 동안 430조 엔의 공공 투자·인프라스트럭처 투자를 중심으로 한 재정 지출 확대, 민간 투자를 확대하기 위한 규제 완화 추진 등을 약속·실시했다.[7] 같은 해 7월에는 미일 반도체 협정(제1차 협정)이 체결되어, 일본 정부는 일본산 반도체의 수출을 스스로 규제하고, 일본 국내 사용자에게는 미국산 반도체의 활용을 장려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8] 이로 인해 당시 세계 시장 점유율 1위였던 일본의 반도체 산업은 미국으로부터 철저하게 감시받고 붕괴되었다.[8]

1987년 4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일본의 덤핑을 이유로 일본산 개인용 컴퓨터와 컬러 텔레비전 등에 100%의 제재 관세를 부과했다.[9][10]

1989년 이후 미일 구조 협의가 실시되었고, 1994년 이후 연례 개혁 요구서가 발간되었다.

5. 1. 재팬 패싱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군사적, 정치적으로 부상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급격한 경제 성장에 따른 미중 무역 마찰이 미국 측의 주목 대상이 되면서, 재팬 패싱 현상이 나타났다. 일본의 버블 붕괴에 따라, 1996년 이후 미국에서의 일본에 대한 호감도는 중립에서 1991년까지의 압도적인 호감도로 돌아갔다.[11]

5. 2. 2010년대 이후 미중 무역 갈등과 재조명

2018년 3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초부터 일본과 중국에 대한 무역 적자를 문제 삼았다.[12][13] 그는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나 다른 훌륭한 친구들은 '미국을 잘 속여왔다'며 비웃고 있다. 그런 시대는 끝났다"고 말했다.[14][15] 트럼프 행정부는 통상확대법 231조의 국방 조항을 일본, 중국 등 각국에 적용하여 안전 보장을 이유로 36년 만에 철강과 알루미늄 수입 제한을 발동했다.[16]

2018년 4월, 일본과 중국은 8년 만에 중일 경제 고위급 대화와 각료 회담을 개최하여 미국의 수입 제한과 보호주의에 대한 우려를 공유했다.[17][18][19] 같은 해 10월, 아베 총리는 일본 총리로서는 7년 만에 단독으로 중국을 방문하여 "경쟁에서 협조로", "서로 파트너로서 위협이 되지 않는다", "자유롭고 공정한 무역 체제의 발전"이라는 중일 신시대 3원칙을 내세우며 다양한 중일 경제 협력에 합의했다.[20] BBC 등에서는 미국과의 무역 마찰이 중일 관계를 가깝게 했다고 평가했다.[21]

그러나 2019년, 중국이 미국과 미중 무역 전쟁으로 불리는 관세 공방으로 대립을 심화시키자, 일본은 미일 무역 협상에서 미국산 농산물에 대한 시장 개방을 수용하는 미일 무역 협정에 2019년 9월 25일에 양국 정상이 합의하여 미국은 대일 추가 관세를 보류하게 되었다.[22] 미일 무역 협정은 2019년 10월 7일에 정식 서명되었고, 양국의 국내 절차를 거쳐 2020년 1월에 발효되었다.[23]

6. 평가 및 영향

헨리 키신저 밑에서 일했던 Richard V. Allen|리처드 V. 앨런영어은 1972년 하와이 미일 정상 회담에서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키신저가 섬유 이야기는 하지 않고 안보 이야기만 했으며, P3C와 E-2C를 팔았다고 회고했다.[28]

6. 1. 미중 무역 분쟁에 주는 시사점

경제학자인 고미야 류타로 등이 주장한 '''IS 균형론'''은 경상 수지가 저축 투자 균형과 같다는 점에 착안하여, 상대국의 경상 수지를 줄이기 위해 "국내 투자(정부 투자)를 늘려야 한다"고 요구하는 방식이다.[24] 투자 저축 균형론은 재정 적자, 투자를 늘리고 저축을 줄이라는 미국의 요구를 뒷받침했다.[25]

노구치 아키라는 "당시 미국 정부는 '무역 흑자'라는 글자만 보고 무역 적자를 '손실'로 여겨 '무역 흑자 줄이기'라는 무의미한 요구를 일본에 했다"고 지적했다.[26]

밀턴 프리드먼은 "미국이 일본의 경제 운영에 이러쿵저러쿵 간섭해서는 안 된다. 또한 일본도 미국의 경제 운영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 어느 쪽도 자신의 문제에 전념해야 한다"고 지적했다.[27]

미국이 중국의 무역 흑자와 중국의 지적 재산권 문제를 이유로 중국의 하이테크 제품에 슈퍼 301조 적용 및 미중 철강 수입 제한에 나섰을 때, 일본의 후쿠다 야스오 전 총리, 플라자 합의 당시 관료였던 전 일본은행 부총재 이와타 가즈마사 등이 1980년대 미일 무역 마찰과 매우 유사하다고 주장하며 중국에 조언을 한 점이 주목받았다.[29][30] 중국에서는 국영 미디어 신화사가 일본의 경험을 배우도록 촉구하는 등 미일 무역 마찰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31][32][33] 월스트리트 저널은 과거 일본에 철강 자율 수출 규제를 받아들이게 한 장본인이자 미국이 1980년대 일본에 대해 시행한 반도체 및 자동차 수입 규제를 중국에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34] 로버트 라이트하이저의 미국 무역 대표부 재기용 등 당시 미일 무역 마찰과의 유사성을 인정하면서도, 중국이 보복 움직임을 보인 점 등 다른 점도 지적했다.[35]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미국에 대한 중국의 GDP 비율이 1980년대 일본보다 높다는 점, 안보에서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점 등을 미중 무역 마찰과의 차이점으로 꼽았다.[36]

7. 관련 인물


  • 다나카 가쿠에이: 미일 섬유 교섭 당시 사토 에이사쿠 내각의 통상대신으로, 미국의 리처드 닉슨 행정부가 Trading with the Enemy Act영어로 수입 제한을 시사했음에도 양보하지 않아 일본이 대미 수출 자율 규제를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다.[1]
  • 리처드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으로, 다나카 가쿠에이에게 Trading with the Enemy Act영어로 수입 제한을 시사하여 일본이 대미 수출 자율 규제를 받아들이게 했다.[1]
  • 빈센트 친: 일본인으로 오인된 중국계 미국인으로, 1982년 디트로이트에서 백인에게 살해당했다. 이 사건은 아시아계 미국인 전체가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큰 사회 문제로 번졌다.[3][4]
  •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으로, 1987년 일본의 덤핑을 이유로 일본산 개인용 컴퓨터와 컬러 텔레비전에 이례적인 100%의 제재 관세를 부과했다.[9][10]
  • 아마야 나오히로: 통상산업성의 두 번째 통상심의관 시절 자동차 수출 자율 규제 틀에 관여했다.
  • 구로다 마코토: 통상산업성 통상정책국장 및 통상심의관 당시 무역 갈등에 관여했다.
  • 고다마 고지: 통상산업성 기계정보산업국 차장 시절 미국산 반도체 수입 점유율 20% 확보에 관여했다.
  • 구로다 나오키: 통상산업성 기계정보산업국 자동차과장 당시 자동차 수출 자율 규제 틀에 관여했다.
  • 테시마 레이시: MOSS 협의 등에 관여했던 시대의 외무성 외무심의관이었다.
  • 다나카 히토시, 야부나카 미소지: 모두 외무성 북미 제2과장 시절 무역 갈등에 관여했다.
  • 테라무라 노부유키: 미일 금융 협의 이후 1992년 대장성 은행국장 당시 호송선단 방식의 재편에 관여했다.

참조

[1] 서적 "〈証言そのとき〉国策とともに5 織機買い上げ損失補う" 朝日新聞 2012-06-04
[2] 뉴스 日米自動車摩擦 1970年代から繰り返す歴史 https://www.nikkei.c[...] 2018-09-07
[3] 웹사이트 An American Hate Crime: The Murder of Vincent Chin http://www.tolerance[...] Southern Poverty Law Center 2002-06-14
[4] 웹사이트 Yellowworld.org: Remembering Vincent Chin http://yellowworld.o[...] 2018-04-16
[5] 웹사이트 The Fairchild Deal : Trade War: When Chips Were Down http://articles.lati[...] 1987-11-30
[6] 서적 日本経済を学ぶ 筑摩書房 2005
[7] 서적 日本の経済-歴史・現状・論点 中央公論新社 2007
[8] 뉴스 遠藤誉「日本の半導体はなぜ沈んでしまったのか?」 https://news.yahoo.c[...] Yahoo! JAPANニュース 2018-12-24
[9] 웹사이트 「米中貿易&ハイテク戦争」はどうなる? 「日米半導体摩擦」を振り返る https://www.sangyo-t[...] 電子デバイス産業新聞 2018-10-12
[10] 웹사이트 【米中貿易戦争】土壇場で中国が強硬に出た2つの理由——中国側は持久戦の構え https://www.business[...] ビジネスインサイダー 2019-05-15
[11] 웹사이트 Favorable Views of Japan, China Keep Climbing https://news.gallup.[...] 2018-03-06
[12] 뉴스 Here's Donald Trump's Presidential Announcement Speech http://time.com/3923[...] 2015-06-16
[13] 뉴스 トランプ氏、日本に2回言及 中国やメキシコと並列で https://www.nikkei.c[...] 2017-01-12
[14] 뉴스 安倍首相は「出し抜いて笑み」=トランプ氏、対日貿易に不満 https://web.archive.[...] 時事通信 2018-03-23
[15] 뉴스 Misreading Trump: Ally Japan Is Spurned on Tariff Exemptions https://www.nytimes.[...] ニューヨーク・タイムズ 2018-04-06
[16] 뉴스 米鉄鋼輸入制限が発動 日本も対象、EUなど猶予 https://www.nikkei.c[...] 日本経済新聞 2018-04-06
[17] 뉴스 サービス業で協力確認、日中閣僚会合 保護主義への対応も議論 https://www.nikkei.c[...] 日本経済新聞 2018-04-16
[18] 뉴스 第4回中日ハイレベル経済対話が東京で開催 http://j.people.com.[...] 人民網 2018-04-17
[19] 뉴스 日中財政担当相会談 財政当局の協力確認 https://mainichi.jp/[...] 毎日新聞 2018-04-16
[20] 뉴스 日中新時代へ3原則 首脳会談「競争から協調」 https://www.nikkei.c[...] 日本経済新聞 2018-10-26
[21] 뉴스 日中首脳会談で意外な新しい友情 米国との貿易摩擦で接近やむなく https://www.bbc.com/[...] 英国放送協会 2018-10-26
[22] 웹사이트 日米共同声明 https://www.cas.go.j[...] 2019-09-25
[23] 뉴스 日米貿易協定・日米デジタル貿易協定の効力発生のための通告 https://www.mofa.go.[...] 外務省 2019-12-10
[24] 뉴스 高橋洋一「ニュースの深層」 「経常収支赤字で日本経済が危ない」は俗説!マスコミ報道に騙されるな https://gendai.media[...] 現代ビジネス 2014-02-17
[25] 서적 日本の経済-歴史・現状・論点 中央公論新社 2007
[26] 서적 ゼロからわかる経済の基礎 講談社 2002
[27] 뉴스 ミルトン・フリードマン 「世界の機会拡大について語ろう」 〜「グローバルビジネス」1994年1月1日号掲載 https://diamond.jp/a[...] ダイヤモンド・オンライン 2011-08-01
[28] 서적 消えた21億円を追え ロッキード事件 40年目のスクープ 朝日新聞出版
[29] 웹사이트 「中国は日本から教訓を得るべき」、福田元首相の発言が中国で反響 https://www.recordch[...] Record China 2018-04-10
[30] 뉴스 通貨高求める米圧力で日本の経験中国に伝授-岩田元日銀副総裁 https://www.bloomber[...] ブルームバーグ 2018-04-11
[31] 뉴스 プラザ合意で苦しんだ日本に学べー米国との協議巡り中国メディア主張 https://www.bloomber[...] ブルームバーグ 2018-08-17
[32] 뉴스 【中国観察】中国が学ぶ日米貿易摩擦の教訓 「人民元版・プラザ合意」警戒 https://www.sankei.c[...] 産経ニュース 2019-08-16
[33] 뉴스 米中貿易戦争に備え「日米貿易摩擦」を教科書にする中国 日本の元首相も「相似点」を指摘 https://www.sankei.c[...] 産経ニュース 2018-05-04
[34] 뉴스 Trump Taps China Critic Lighthizer for U.S. Trade Representative https://www.bloomber[...] ブルームバーグ 2017-01-02
[35] 뉴스 米中貿易紛争、80年代の日米摩擦と同じではない http://jp.wsj.com/ar[...] ウォール・ストリート・ジャーナル 2018-04-11
[36] 뉴스 米中貿易戦争で日米貿易摩擦に言及、「中国の底力は当時の日本より強大」と中国メディア https://www.recordch[...] Record China 2018-04-16
[37] 문서 이를 두고 일본에서는 '실을 팔아서, 밧줄(나와)을 샀다'라는 말이 나오기도 하였다. 실이란 섬유를 의미하며 나와란 밧줄을 의미하는 일본어이다. 오키나와와의 발음의 유사성을 이용한 언어유희이다.
[38] 문서 트리거 가격제도란 정해진 가격보다 낮은 가격에 상품이 수입되면 자동적으로 반덤핑 관세 및 수입제한 조치가 가해지는 일종의 수입 제한 조치이다.
[39] 문서 이후 일본은 자동차 생산기지를 미국에 건설하여 관세를 회피하였다.
[40] 문서 일본전신전화
[41] 문서 협정이 체결될 당시 세계 시가총액 1위 기업이었다.
[42] 문서 '''미일반도체협정(1차)'''은 1986년부터 1991까지 효력이 있었으며 '''미일반도체협정(2차)'''은 효력을 5년간 갱신하여 1991년부터 1996년까지 효력이 발생하였다.
[43] 문서 일본의 반도체 기업의 [[덤핑|정부보조금을 바탕으로한 저가 공세]] 금지, 일본의 메모리 반도체칩 내수시장의 최소 20%를 외국기업이 점유하도록 강제하는 것, 외국 반도체 기업의 대일본 직접투자 허용 등등의 일본에게 매우 불리한 내용이 담긴 불평등조약이었다.
[44] 문서 이로 인해 한국의 메모리 반도체 산업이 가장 많은 반사이익을 누렸다. 한국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세계 메모리반도체 시장을 평정하였고 2018년 기준 한국의 시가총액 1, 2위의 기업으로 성장하여 한국경제를 떠받치는 양대기둥이 되었다.
[45] 문서 당초에는 일본 경제의 10%인 430조엔이었으나 나중에 추가로 200조엔이 더 들어간다.
[46] 문서 일본의 국가부채는 1994년부터 2004년까지 GDP 대비 84.2%에서 173.8%까지 급등한다. 또한, 이때의 구조적인 조정으로 인해 일본의 국가부채가 꾸준히 증가한다.
[47] 문서 일본의 미래먹거리 확보를 위한 첨단미래산업이 아닌 비생산적인 '''공공부분'''에 투자를 하도록 미국이 강요하였다. 이는 4가지 부정적인 효과를 낳았는데 첫째,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공공부분에 630조엔이나 되는 돈이 낭비하여 막대한 정부부채를 만들었다. 둘째, 630조엔 규모의 투자로 인해 일본의 자산가치가 증가하여 엔화 강세가 되어 수출 경쟁력이 떨어졌다. 셋째, [[기회비용|630조엔을 이상한 곳에 쓰는 바람]]에 일본의 미래산업의 경쟁력이 약화되었다. 넷째, 첫째와 같은 이유로 초고속 인터넷망과 같은 최첨단 IT 기간시설이 아니라 쓸모없는 항만이나 도로정비사업 같은 곳에 돈을 쓰는 바람에 디지털시대 일본인들의 생활수준이 낮아졌다.
[48] 문서 외국기업을 배제한 일본 유통기업 간의 유착관계를 파괴하여 폐쇄적인 일본 내수시장을 개방하기 위한 것이다.
[49] 문서 일본이 더 많은 외국산 상품을 수입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50] 문서 기존의 5년에서 2년으로 단축
[51] 문서 24시간 이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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