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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자 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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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플라자 합의는 1985년 미국, 프랑스, 독일, 일본, 영국의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들이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만나 달러 가치 하락과 엔화, 마르크화 가치 상승에 합의한 사건이다. 당시 미국은 무역 적자와 쌍둥이 적자 문제에 직면했고, 달러 강세는 이러한 문제를 심화시켰다. 합의 이후 달러 가치가 하락하면서 미국의 무역 적자 감소에 기여했지만, 일본 경제에는 엔고로 인한 불황을 초래했다. 이 합의는 일본의 자산 거품을 유발하고 장기적인 경제 침체, 즉 "잃어버린 10년"의 원인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2018년 미중 무역 전쟁 시기에 중국은 플라자 합의를 언급하며 위안화 절상 압력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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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자 합의
플라자 합의
1985년 플라자 합의. 미국 달러의 변동 가치를 관리하는 합의에 도달한 재무장관들의 회의 장소였던 뉴욕 시의 플라자 호텔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왼쪽부터 서독의 [[게르하르트 슈톨텐베르크]], 프랑스의 [[피에르 베레고부아]], 미국의 [[제임스 A. 베이커 3세]], 영국의 [[나이젤 로슨]], 일본의 [[다케시타 노보루]]
1985년 플라자 합의 참가자들
서명일1985년 9월 22일
당사국프랑스
서독
일본
영국
미국
서명자피에르 베레고부아 (프랑스)
게르하르트 슈톨텐베르크 (서독)
다케시타 노보루 (일본)
나이젤 로슨 (영국)
제임스 베이커 (미국)
언어영어
합의 내용
주요 목표미국 달러의 가치 하락
배경미국 경제의 위기
미국 무역 적자 심화
달러 강세로 인한 수출 경쟁력 약화
주요 선진국들의 경제 협력 필요성 증대
주요 내용미국 달러 가치 하락 유도
각국 중앙은행의 외환 시장 개입
미국 연준의 금리 정책 조정
합의 결과달러 가치 하락
일본 엔화 및 독일 마르크화 평가 절상
미국 무역 적자 개선
주요 국가 간 경제 정책 협력 강화
비판미국 경제의 근본적인 문제 해결 미흡
국제 외환 시장의 변동성 증가
일부 국가의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
관련 문서루브르 합의

2. 배경

1980년대 초, 로널드 레이건 미국 행정부는 이전 지미 카터 행정부로부터 이어진 높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엄격한 금융 긴축 정책을 시행했다. 이로 인해 금리가 두 자릿수에 달했고, 전 세계의 유동 자금이 미국으로 몰려들어 미 달러 가치가 상승했다. 동시에 미국의 수출은 감소하고 수입은 확대되어 무역 불균형이 발생했다.[33] 고금리 정책으로 민간 투자를 억제하여 인플레이션을 잡는 데는 성공했지만, 결과적으로 막대했던 무역 흑자가 줄어들었다. 이후 인플레이션이 진정되면서 경기 회복, 즉 무역 적자 심화를 막기 위한 금융 완화 논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금리가 하락하면 미국의 금융시장은 투자 매력을 잃고 달러 시장은 불안정해질 것으로 예상되었다. 1970년대 말의 달러 위기가 재발할 것을 우려한 선진국들은 협조적인 달러 안정화 또는 하락을 시도했고, 금리 인하를 통한 달러 평가 절하 대신 정치적 결정으로 플라자 합의가 이루어졌다.[33]

1980년부터 1985년 사이, 미국 달러는 당시 주요 경제 대국이었던 일본 엔, 독일 마르크, 프랑스 프랑, 영국 파운드에 대해 약 50% 평가 절상된 상태였다.[5] 폴 볼커 연방 준비 제도는 금리를 인상하여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 위기를 막았지만, 이는 미국 달러 가치를 높여 세계 시장에서 미국 산업계(특히 자동차 업계)의 경쟁력을 약화시켰다. 당시 미국은 대외 무역수지 불균형과 재정 적자에 시달리고 있었다.[34] 일본 자동차 때문에 일자리를 잃은 미국 노동자들이 일본 차량을 부수며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것이 레이건 정부의 유명한 '쌍둥이 적자'이다.

미국 정부는 국내총생산(GDP)의 3.5%에 달하는 경상수지 적자를 줄이고, 1980년대 초반의 급격한 경기 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해 달러 가치 하락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금융 산업계는 달러 강세로 수익을 얻고 있었고, 금리 인하를 통한 달러 평가 절하는 레이건 정부의 인플레이션 억제 계획과 상반되었기 때문에 금리 인하를 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산업계는 외국과의 경쟁에 맞서 자국 산업 보호를 요청하는 캠페인을 시작했고, IBM, 모토로라 등의 첨단 기술 기업, 곡물 수출업체, 자동차 제조업체, 캐터필라 같은 엔지니어링 업체들이 참여했다. 1985년까지 이 캠페인은 의회가 무역 보호법 통과를 고려할 정도로 많은 지지를 얻었다. 무역 규제 가능성이 가시화되면서 백악관은 해외 주요국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했고, 결국 플라자 합의를 이끌어냈다.

플라자 합의를 통해 미국 달러 가치를 내리고 일본 엔화와 독일 마르크화 가치를 높이는 정책이 채택되었다.[35] 발표 다음 날, 달러 환율은 1달러당 235엔에서 약 20엔 하락했고, 1년 후에는 달러 가치가 거의 반으로 떨어져 120엔 대에 거래되었다.

1985년부터 1988년까지의 환율(일일). 플라자 합의 이후 수일 만에 급격한 엔고가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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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진행 과정

1980년대 초,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는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해 엄격한 금융 긴축 정책을 시행했다. 이로 인해 금리가 상승하여 전 세계 자금이 미국으로 몰려들었고, 달러 가치가 상승했다. 동시에 미국의 수출은 감소하고 수입은 증가하는 무역 불균형이 발생했다.[33] 인플레이션은 진정되었지만, 막대한 무역 흑자가 줄어드는 결과가 나타났다. 이후 인플레이션이 진정되자 경기 회복, 즉 무역 적자 심화를 막기 위해 금융 완화 논의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금리 하락은 미국 금융시장의 투자 매력을 떨어뜨리고 달러 시장을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었다. 1970년대 말 달러 위기의 재발을 우려한 선진국들은 협조적인 달러 안정화 또는 하락을 모색했고, 금리 인하를 통한 달러 평가절하 대신 정치적 결정인 플라자 합의를 이끌어냈다.[33]

일반적으로 환율은 시장의 안정성을 위해 점진적으로 유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특별한 경우에는 여러 국가가 협력하여 환율을 일정 수준까지 유도하는 협조적 개입을 하기도 한다. 협조적 개입은 자국 통화 안정을 위한 단독 개입과는 달리, 경제적 왜곡이나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여러 국가 간의 협의를 통해 이루어지며, 환율을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 있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다. 하지만 시장이 이미 예측하고 있는 경우에는 효과가 적을 수 있다.

협조적 개입은 환율 유도 목표를 미리 공개한다는 점에서 단독 개입과 차이가 있으며, 시장 참가자들의 심리적 매매를 유도할 수 있다. 플라자 합의 이후, 다케시타(竹下)의 "엔-달러 환율은 1달러=190엔이어도 괜찮다"는 발언은 엔고를 급격하게 진행시킨 사례로, 협조적 개입의 영향력을 보여준다. 플라자 합의 당시에는 큰 경제적 왜곡이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협조적 개입에 대해서는 경제 왜곡을 한꺼번에 해소하는 방법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의견과, 변동 환율제에서의 국제수지 조정 기능이 상실되었다는 의견이 대립한다.

3. 1. 합의 내용 (별도 소주제)

1980년부터 1985년 사이 미국 달러는 일본 엔, 독일 마르크, 프랑스 프랑, 영국 파운드에 대해 약 50% 평가절상되었다. 폴 볼커 연방 준비 제도는 금리를 인상해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 위기를 막았지만, 이는 미국 달러 가치를 높여 세계 시장에서 미국 산업계(특히 자동차업계)의 경쟁력을 약화시켰다. 당시 미국은 대외 무역수지 불균형과 재정적자에 시달리고 있었다.[34] 일본 자동차로 일자리를 잃은 미국 노동자들이 일본 차량을 부수며 시위를 하기도 하였다.

미국 정부는 달러 평가절하를 통해 국내총생산의 3.5%에 달하는 경상수지 적자를 감소시키고, 1980년대 초반의 경기침체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러나 금융산업계는 달러 강세로 이익을 얻었고, 금리인하를 통한 달러 평가절하는 로널드 레이건 정부의 인플레이션 억제 정책에 반했기 때문에 금리 인하는 거부했다.

이에 IBM, 모토로라 등 첨단 기술 기업, 곡물 수출업체, 자동차 제조업체, 캐터필라 같은 엔지니어링 업체 등 미국 산업계는 외국과의 경쟁에서 자국 산업 보호를 요청하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1985년까지 이 캠페인은 의회가 무역보호법 통과를 고려할 정도로 많은 지지를 얻었다. 무역 규제 가능성은 백악관이 해외 주요국들과 협상에 유리하게 작용하였고, 플라자 합의를 이끌어냈다.

플라자 합의에서 미국 달러화 가치를 내리고 일본 엔화와 독일 마르크화 가치를 높이는 정책을 채택했었다.[35] 발표 다음 날 달러 환율은 1달러=235엔에서 약 20엔 하락했고, 1년 후에는 달러 가치가 거의 반으로 떨어져 120엔 대에 거래되었다.

1985년 1월 17일, 제임스 베이커가 참석한 G5(Group of Five, 5개국 금융그룹) 회의에서 달러 가치 하락을 위한 소규모 통화 개입에 합의하고 실행되었다. 그 해 몇 달 동안 미국의 개입은 미미했지만, 독일 당국은 2월과 3월 외환시장에서 달러 매도에 대규모 개입했다. 4월 OECD 회의에서 미국은 국제 통화 개혁 문제에 대한 주요 산업국의 회의에 관심을 표명했고, 7월과 8월 G5 차관급 회의를 통해 플라자 회의 준비가 시작되었다. 1985년 9월 22일, 미국, 프랑스, 독일, 일본, 영국의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들은 뉴욕의 플라자 호텔에서 만나 "비달러 통화의 추가적인 점진적 절상이 바람직하다"는 발표에 합의하고, "필요할 경우 이를 촉진하기 위해 더욱 긴밀히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혔다.[4] 회의 내용이 공개된 다음 월요일, 달러는 다른 통화에 비해 4% 하락했다.

4. 영향

플라자 합의는 미국의 대외 무역 적자를 개선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초기에는 적자 개선이 더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미국 수출품의 가격 경쟁력이 높아져 다른 나라들과의 무역 적자는 줄어들었다.[10] 그러나 일본과의 무역 적자 문제는 구조적인 요인으로 인해 해결되지 못했다.[11]

플라자 합의 이후 엔화 가치가 급등하면서 일본은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는 장기 불황을 겪었다는 주장이 있다. 엔고로 인해 일본 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약화되면서 경제 성장이 둔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미국의 의도, 미일 무역 마찰, 인터넷 등 신기술 경쟁 심화와 같은 복합적인 요인에 의한 결과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반면, 대한민국은 플라자 합의 덕분에 1986년부터 1989년까지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하며 3저 호황을 누렸다. 엔화 강세로 일본과의 수출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했기 때문이다.

1987년 루브르 합의를 통해 달러 가치 하락을 억제하려 했으나, 이후 G7 국가 간의 통화 개입은 거의 없었다. 2018년 이후 미중 무역 전쟁이 심화되면서, 중국은 플라자 합의를 통해 미국에 굴복하여 경제 침체를 겪은 일본의 사례를 경계하며 미국의 압력에 대응하고 있다.[25][28]

4. 1. 무역 적자

플라자 합의 초기 2년 동안 미국의 무역 적자는 오히려 악화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수량 효과가 평가 효과를 능가할 정도로 탄력성이 높아지면서 적자가 개선되기 시작했다.[4] 평가절하로 인해 미국의 수출품은 다른 나라에 비해 가격 경쟁력을 갖게 되었고, 이는 다른 나라들이 더 많은 미국산 상품과 서비스를 구매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플라자 합의는 미국과 일본의 무역 적자를 줄이는 데는 실패했지만, 미국의 수출 경쟁력을 높여 다른 나라에 대한 미국의 적자를 줄였다.[10] 결과적으로 미국 의회는 보호무역주의 관련 법안 제정을 자제했다.[4]

1980년대 전반,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하의 미국에서는 이전 정권으로부터 이어받은 높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엄격한 금융 정책을 실시했다. 1980년에는 미 달러 금리가 20%에 달했고, 인플레이션율은 진정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후, 금융 정책의 영향으로 미 달러 가치가 급격히 상승하고, 동시에 일본의 계속되는 생산과 수출로 인해 미국은 수출 감소와 수입 확대로 인한 대규모 무역 적자를 겪게 되었다. 동시에 미국 경제는 활발한 내수에 힘입어 1984년에는 7.2%의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며 호황을 누렸다. 결과적으로 1980년대 미국은 인플레이션 문제를 해결하고 경제도 호황이었지만, 일본의 존재감 증대로 인한 미국의 대규모 국제수지 적자가 주목받게 되었다.

발표 다음 날인 1985년 9월 23일, 24시간 동안 달러/엔 환율은 1달러당 235엔에서 약 20엔 하락했고, 1년 후에는 150엔대로 거래되기 시작했다.[17]

4. 2. 일본 경제에 미친 영향

플라자 합의로 엔화 가치가 급격히 상승하면서, 일본에서는 '엔고 불황'이 올 것이라는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처음에는 일본은행이 기준금리를 내리지 않고 그대로 유지했다. 심지어 무담보 콜금리(은행 간 단기 자금 거래 금리)는 오히려 올랐다. 그러나 엔고로 인한 불황 우려가 현실이 되자, 결국 저금리 정책을 시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저금리 정책은 부동산과 주식 투기를 부추겨 거품 경제를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엔화 강세로 인해 일본 경제의 규모는 상대적으로 빠르게 커졌다. 미국 자산을 "반값 세일" 가격으로 사들이거나, 고부가가치 상품을 생산하고, 해외여행 붐이 일어나는 등 여러 현상이 나타났다. 일본인들은 이러한 상황을 일억총중류(모든 국민이 중산층)라는 개념으로 인식하기도 했다.

플라자 합의는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 사이의 무역 적자를 줄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일본과의 무역 적자를 줄이는 데는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11] 이는 무역 조건과 같이 통화 정책에 영향을 받지 않는 구조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미국 제품은 수출 시장에서 경쟁력이 높아졌지만, 일본의 수입 제한 때문에 일본 시장에서는 성공하지 못했다.[11]

1987년, 루브르 합의를 통해 달러 가치 하락을 막기로 결정하면서, 상황은 반대로 흘러갔다. 1987년 루브르 합의 이후 클린턴 행정부 초기인 1992년부터 1995년 사이에는 달러 환율에 대한 다른 개입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 G7 국가들 간의 통화 개입은 거의 없었다. 유럽중앙은행(ECB)은 2000년 과도하게 평가절하된 유로를 지지했다. 일본은행은 2011년 도호쿠 대지진과 쓰나미 이후 엔화 강세를 완화하기 위해 미국 및 다른 국가들과 협력하여 마지막으로 개입했다.[4] 2013년 G7 회원국들은 외환 개입을 삼가기로 합의했다. 그 이후로 미국 행정부는 통화 조작(통화 부양책과 구분)에 대한 더 강력한 국제 정책을 요구해 왔다.[4]

플라자 합의는 일본이 국제 통화 시스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엔화 가치 상승은 일본 경제에 불황 압력을 가중시켰고, 일본 정부는 확장적 통화 및 재정 정책으로 대응했다.[10] 이러한 정책들은 1980년대 후반 일본 자산 가격 거품을 초래했다.[10]

일부에서는 플라자 합의가 거품 경제의 원인이며, 이 거품이 붕괴되면서 일본이 장기적인 디플레이션과 저성장 시대, 즉 "잃어버린 10년"으로 접어들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영향은 현재 일본에서도 크게 느껴지고 있다.[12] 그러나 제프리 프랭켈은 1985~86년 엔화 가치 상승과 1990년대 불황 사이에 환율이 더 이상 엔화 가치 상승을 압박하지 않았던 1987~89년 거품 시대가 있었다고 주장한다.[4] 독일 마르크화 가치 상승도 독일에서 경제 거품이나 불황으로 이어지지 않았다.[13][14] 경제학자 리처드 워너는 플라자 합의와 같은 외부 압력과 재무성의 공식 할인율 인하 정책은 일본은행이 거품을 초래한 조치를 설명하기에 불충분하다고 말한다.[15]

플라자 합의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잃어버린 10년에서 잃어버린 30년으로 이어지는 장기 경제 침체의 발단이 아니냐는 견해가 있다.

협조적 개입으로 인해 엔고가 진행된 결과, 물가와 임금은 마이너스로 떨어졌고, 무역에서는 농림수산물, 광공업 제품, 일본인 노동력 등 모든 일본산 제품이 상대적으로 경쟁력을 잃어, 그때까지의 경제 성장 리듬이 무너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일본에 불리한 이 합의가 이루어진 배경에는 일본의 GDP가 미국을 추월하여 세계 1위가 되는 것에 대한 미국의 우려, 그 이전부터 있었던 미일 무역 마찰, 미군이 주도한 신기술인 인터넷과 그 분야에서 일본과의 경쟁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미국 정부의 의도대로 일본 산업의 상징이었던 민생용 전자기기 등 일본의 많은 산업은 1985년을 기점으로 급격히 침체되어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22]

가토 고이치의 회상에 따르면, 플라자 합의 후 귀국 보고를 한 다케시타 노보루 재무상에게 미야자와 기이치는 “다케시타 씨, 당신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자기가 한 일을 알고 있습니까?”라며 맹비난했다. 안다케미야로 차기 총리를 다투던 시기였기 때문에, 미야자와는 통렬하게 비난을 받았다. “동료들 앞에서 라이벌 총리 후보를 그렇게까지 비난하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다. 그릇이 보였다. 저걸로 미야자와는 끝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플라자 합의의 무게를 유일하게 이해했기에 그는 그렇게 격렬한 말을 했을 것이다. 그 말은 정책가 미야자와를 상징하는 것이었고, 그 장면은 전후 일본 경제의 전환점이 되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24]

4. 3. 한국 경제에 미친 영향

플라자 합의로 1986년부터 1989년까지 대한민국은 경상수지 흑자를 보는 등 이익을 보았다. 일본과 수출 경쟁 품목이 많은 상황에서 엔화 가치가 상승하여 상대적으로 한국 제품 가격이 싸졌기 때문이다. 시기적으로도 유가 하락, 금리 인하, 1988년 서울 올림픽으로 인한 투자 확대 등이 동시에 맞물렸고, 이때의 호황을 저유가, 저금리, 원화 약세(저환율)가 맞물렸다고 해서 3저 호황이라고 한다.

4. 4. 국제적 영향

플라자 합의는 서유럽 국가들에 대한 미국의 무역 적자를 줄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일본에 대해서는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16] 이는 일본의 구조적인 수입 제한 때문이었는데, 미국의 공산품은 수출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게 되었지만 일본 시장에서는 여전히 성공하기 어려웠다. 1987년 루브르 합의는 미국 달러의 지속적인 하락을 막기 위해 체결되었다.

1987년 루브르 합의 이후, 1992~95년 제1차 빌 클린턴 행정부 시기와 같이 달러 환율에 대한 다른 개입은 거의 없었다. 유럽중앙은행은 2000년에 유로화 가치가 지나치게 낮다고 판단하여 개입했고, 일본은행은 2011년 도호쿠 대지진과 쓰나미 이후 엔화 강세를 억제하기 위해 미국 등의 협조를 얻어 개입했다. 2013년 G7 회원국들은 외환 개입을 자제하기로 합의했다.[16]

플라자 합의는 일본의 GDP가 미국을 추월하여 세계 1위가 되는 것에 대한 미국의 우려, 미일 무역 마찰, 인터넷과 같은 신기술 분야에서의 경쟁 심화 등 여러 배경 속에서 이루어졌다. 미국 정부의 의도대로 일본의 민생용 전자기기 등 여러 산업은 1985년을 기점으로 급격히 쇠퇴했다.[22]

플라자 합의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曽根 康弘) 총리, 다케시타 노보루 재무상, 스미다 사토시 일본은행 총재 등에 의해 결정되었지만, 이는 일본이 미국의 요구를 전면적으로 수용한 타협책이라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가토 고이치의 회상에 따르면, 다케시타 노보루 재무상은 귀국 보고 후 미야자와 기이치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라며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24]

2018년부터 미중 무역 전쟁이 발생한 중국에서는 플라자 합의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25] 신화사는 "플라자 합의에서 미국에 굴복한 일본의 경제 침체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미국이 중국에 대해 환율 조작국 지정을 하는 것에 대해 경계했다.[28][29][30][31]

5. 루브르 합의

조셉 가뇽(Joseph E. Gagnon)은 플라자 합의의 결과가 실제 정책보다 정책 의도와 추가 달러 판매의 잠재적 위협에 대해 금융 시장에 전달된 메시지에 더 기인한다고 설명한다. 달러 가치 하락이 중단되기로 결정된 1987년 루브르 합의 이후 개입은 반대 방향으로 훨씬 더 두드러졌다.[1]

플라자 합의는 서유럽 국가들에 대한 미국의 무역 적자를 줄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대일 무역 적자를 줄이는 데는 크게 실패했다. 이 적자는 통화 정책, 특히 무역 조건에 둔감한 구조적 조건 때문이었다. 비록 일본의 구조적인 수입 제한 때문에 여전히 일본 국내 시장에서 성공할 수 없었지만, 미국의 공산품은 수출 시장에서 더 경쟁력을 갖게 되었다. 루브르 합의는 1987년 미국 달러의 지속적인 하락을 막기 위해 체결되었다.[2]

1987년 루브르 합의에 따라 1992~95년 제1차 빌 클린턴 행정부 때와 같은 달러 환율에 대한 다른 개입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후 통화 개입은 G7 중 거의 없었다. 유럽중앙은행은 2000년 당시 유로화를 과도하게 평가절하했다. 일본은행은 2011년 도호쿠 대지진과 쓰나미 이후 엔화 강세를 꺾기 위해 미국 등의 협조를 얻어 2011년 마지막으로 개입했다. 2013년 G7 회원국들은 외환 개입을 자제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미국 행정부는 환율조작(통화부양과 차별화)에 대해 보다 강력한 국제정책을 요구했다.[3]

6. 비판 및 평가

플라자 합의는 여러 가지 비판과 평가를 받는다. 우선, 미국과 서유럽 국가 간의 무역 적자는 줄였지만, 주요 목표였던 일본과의 무역 적자 완화에는 실패했다는 지적이 있다.[11] 이는 통화 정책에 영향을 받지 않는 구조적인 문제 때문이었다.[11] 미국의 제조업 제품은 수출 경쟁력을 얻었지만, 일본의 수입 제한으로 일본 시장 진출에는 어려움을 겪었다.[11]

플라자 합의는 일본이 국제 통화 시스템 관리의 주요 행위자로 부상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엔화 가치 상승은 일본 경제에 불황 압력을 가중시켰고, 일본 정부는 확장적 통화 및 재정 정책으로 대응했다.[10] 이러한 정책들은 1980년대 후반 일본 자산 가격 거품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기도 한다.[10] 거품 붕괴 이후 일본은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는 장기 침체기를 겪었고, 그 영향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12]

다만, 제프리 프랭켈은 엔화 가치 상승과 1990년대 불황 사이에 환율 압박이 없었던 1987~89년 거품 시대가 있었다고 지적한다.[4] 또한, 독일 마르크화 가치 상승은 독일에서 경제 거품이나 불황을 초래하지 않았다.[13][14] 리처드 워너는 플라자 합의와 재무성의 할인율 인하 정책만으로는 일본은행의 거품 유발 조치를 설명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15]

각국의 무역 변화


일각에서는 플라자 합의가 일본 장기 경제 침체의 발단이라는 견해도 있다. 엔고로 물가와 임금이 하락하고, 일본산 제품의 경쟁력이 약화되어 경제 성장이 둔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의 GDP가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는 우려, 미일 무역 마찰, 인터넷 등 신기술 분야에서 일본과의 경쟁에 대한 미국의 우려가 작용한 결과였다. 실제로 1985년을 기점으로 일본의 여러 산업이 침체되었다.[22]

플라자 합의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 다케시타 노보루 재무상, 스미다 사토시 일본은행 총재 등이 결정했지만, 미국의 요구를 전면 수용한 타협책이라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가토 고이치의 회상에 따르면, 미야자와 기이치는 다케시타 노보루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며 맹비난했다고 한다.[24]

2018년 미중 무역 전쟁 이후, 중국에서는 플라자 합의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25] 후쿠다 야스오 전 총리와 이와타 카즈마사 전 일본은행 부총재 등은 위안화 절상 요구에 응하지 말라고 조언했고,[26][27] 중국 관영 언론 신화사는 "플라자 합의에서 미국에 굴복한 일본의 경제 침체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28]

6. 1. 협조적 개입의 효과 (별도 소주제)

조셉 가뇽(Joseph E. Gagnon)은 플라자 합의의 결과가 실제 정책보다는 정책 의도와 추가적인 달러 매각의 잠재적 위협에 대해 금융 시장에 전달된 메시지에 더 기인한다고 설명한다.[11] 달러 가치 하락이 중단되기로 결정된 1987년 루브르 합의 이후 개입은 반대 방향으로 훨씬 더 두드러졌다.

플라자 합의는 서유럽 국가들에 대한 미국의 무역 적자를 줄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대일 무역 적자를 줄이는 데는 크게 실패했다.[11] 이 적자는 통화 정책, 특히 무역 조건에 둔감한 구조적 조건 때문이었다. 비록 일본의 구조적인 수입 제한 때문에 여전히 일본 국내 시장에서 성공할 수 없었지만, 미국의 공산품은 수출 시장에서 더 경쟁력을 갖게 되었다.[11] 루브르 합의는 1987년 미국 달러의 지속적인 하락을 막기 위해 체결되었다.

1987년 루브르 합의 이후 1992~95년 제1차 빌 클린턴 행정부 때와 같은 달러 환율에 대한 다른 개입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후 통화 개입은 G7 중 거의 없었다. 유럽중앙은행은 2000년 당시 유로화를 과도하게 평가절하했다. 일본은행은 2011년 도호쿠 대지진과 쓰나미 이후 엔화 강세를 꺾기 위해 미국 등의 협조를 얻어 2011년 마지막으로 개입했다.[4] 2013년 G7 회원국들은 외환 개입을 자제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미국 행정부는 환율조작(통화부양과 차별화)에 대해 보다 강력한 국제정책을 요구했다.[4]

일반적으로 환율 등을 유도할 경우에는 소프트 랜딩(soft landing)으로 유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실물 경제에 대한 급격한 충격을 피하고, 투기적인 자금의 유출입을 방지함으로써 시장의 안정성을 확보하고, 동시에 시장 수급에 기반한 자유롭고 유연한 거래에 의해 자율적으로 국제수지가 조정되는 것이 기대된다.

그러나 특별한 경우, 여러 국가 간에 환율을 일정 수준까지 유도하도록 시장 개입을 협력하여 수행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협조적 개입이라고 한다. 협조적 개입은 자국 통화의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행해지는 자국 통화에 대한 개입, 즉 단독 개입과는 그 목적에서 크게 다르다. 단독 개입은 급격한 환율 변동이 있을 때, 이로 인해 실물 경제에 대한 악영향이 우려되기 때문에 이를 안정시키는 목적으로 행해지는 것이며, 환율을 일정 방향으로 유도하는 목적으로 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에 비해 협조적 개입은 어떤 종류의 경제적 왜곡·불균형이 있고, 그것에 의해 여러 국가의 이익이 종합적으로 나쁘다고 판단될 때 해당 국가 간에 협의하여 행하는 것이며, 환율을 인위적으로 한쪽 방향으로 조작할 만큼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협조적 개입을 하더라도 시장이 이를 예측하여 이미 반영하고 있는 경우가 있으며, 서프라이즈(surprise) 효과가 적어 큰 영향을 주지 않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협조적 개입이 특수한 것으로 여겨지는 이유로는, 환율 유도 목표를 미리 공개하는 점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단독 개입이 유도 목표를 공개하지 않는 것과 대조적이며, 이 때문에 시장 참가자의 심리적 매매를 유도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플라자 합의 이후, 다케시타(竹下)가 "엔-달러 환율은 1달러=190엔이어도 괜찮다"고 성명한 것을 계기로 엔고가 급격히 진행된 것 등에서도 시장 참가자의 심리를 유도하는 협조적 개입은 큰 영향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협조적 개입이 실시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며, 플라자 합의가 이루어졌던 당시에는 큰 경제적 왜곡이 인식되고 있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성격상, 협조적 개입에 대해서는 소프트 랜딩이 매우 어렵다는 의견과, 한편으로는 경제의 왜곡을 한꺼번에 해소하는 방법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립한다. 하지만 변동 환율제에서의 국제수지 조정 기능은 금융 정책이 경제 조정을 담당하는 현대에는 거의 상실되어 있다. 이는 금융 정책으로 물가 변동을 억제하는 한 거시경제 균형의 대외 불균형이 조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7. 관련 인물


  • Paul Volcker|폴 볼커영어 : 미국의 연방준비제도 의장으로, 긴축 통화정책을 펼쳐 장기 금리 상승과 달러 가치 상승을 유발했다.[4]
  • Ronald Reagan|로널드 레이건영어 : 미국 대통령으로, 확장적 재정 정책을 통해 달러 가치 상승에 기여했다.[4]
  • Donald Regan|도널드 리건영어 : 미국의 재무장관으로, 강력한 달러를 지지하며 통화 개입에 반대했다.[4]
  • Beryl Sprinkel|베릴 스프린켈영어 : 미국의 통화 담당 차관으로, 도널드 리건과 함께 자유 시장 개념을 지지하며 통화 개입에 반대했다.[4]
  • James Baker|제임스 베이커영어 : 1985년 1월에 미국의 새로운 재무장관이 되었다.[4]
  • Richard Darman|리처드 다만영어 : 제임스 베이커의 보좌관으로 재무부 차관이 되었다.[4]
  • David Mulford|데이비드 멀포드영어 : 새로운 국제 담당 차관보로 합류했다.[4]
  • 中曽根 康弘|나카소네 야스히로일본어 : 플라자 합의 당시 일본 총리.[23]
  • 竹下 登|다케시타 노보루일본어 : 플라자 합의 당시 일본 재무상.[23]
  • 澄田 智|스미다 사토시일본어 : 플라자 합의 당시 일본은행 총재.[23]
  • 加藤 紘一|가토 고이치일본어 : 자유민주당 소속 정치인. 그의 회고에 따르면, 플라자 합의 후 귀국 보고를 한 다케시타 노보루 재무상에게 미야자와 기이치는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며 맹비난했다고 한다.[24]
  • 宮澤 喜一|미야자와 기이치일본어 : 플라자 합의 당시 대장상으로, 다케시타 노보루의 귀국 보고에 맹렬히 비난했다.[24]
  • 行天 豊雄|교텐 도요일본어 : 일본의 대장성 재무관이었다.
  • 山口 光秀|야마구치 미쓰히데일본어 : 일본의 정치인.
  • C. Fred Bergsten|프레드 버그스텐영어 : 경제학자이자 정책 자문가. 1971년 닉슨 쇼크와 1985년 플라자 합의의 시나리오 작성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32]
  • 福田 康夫|후쿠다 야스오일본어 : 일본의 전 총리로, 중국에게 미국의 위안화 절상 압력에 응하지 않도록 조언했다.[26][27]
  • 岩田 一政|이와타 가즈마사일본어 : 플라자 합의 당시 관료였으며, 전 일본은행 부총재. 후쿠다 야스오와 마찬가지로 중국에 조언했다.[26][27]

8. 여담

플라자 합의로 1986년부터 1989년까지 대한민국은 경상수지 흑자를 보는 등 이익을 보았다. 일본과 수출 경쟁 품목이 많은 상황에서 엔화 가치가 상승하여 상대적으로 한국 제품 가격이 싸졌기 때문이다. 시기적으로도 유가 하락, 금리 인하, 1988 서울 올림픽으로 인한 투자 확대 등이 동시에 맞물렸는데, 이때의 호황을 저유가, 저금리, 저환율이 맞물렸다고 해서 3저 호황이라고 한다.

참조

[1] 웹사이트 Economy: Announcement of [G5] Finance Ministers & Central Bank Governors (the Plaza Agreement) https://www.margaret[...] Margaret Thatcher Foundation 2018-12-03
[2] 웹사이트 Announcement the Ministers of Finance and Central Bank Governors of France, Germany, Japan, the United Kingdom, and the United States (Plaza Accord) http://www.g8.utoron[...] University of Toronto 2018-12-03
[3] 서적 Managing the Dollar: From the Plaza to the Louvre https://books.google[...] Institute for International Economics
[4] 웹사이트 The Plaza Accord, 30 Years Later https://www.nber.org[...] 2021-05-29
[5] 학술지 Channels for Narrowing the US Current Account Deficit and Implications for Other Economies OECD Publishing 2004-05-18
[6] 뉴스 Plotting sterling's latest lurch - just how low did it go? https://web.archive.[...] 2019-09-03
[7] 서적 Global Political Economy Oxford University Press
[8] 서적 Dollar Politics: Exchange Rate Policymaking in the United States Institute for International Economics
[9] 웹사이트 How Petrodollars Affect the U.S. Dollar https://www.investop[...] 2020-04-21
[10] 웹사이트 Plaza Accord https://www.investop[...] 2019-08-22
[11] 서적 International Monetary Cooperation: Lessons from the Plaza Accord after Thirty Years 2016
[12] 뉴스 China seeks to learn from mistakes of 1985 Plaza Accord https://www.japantim[...] 2006-09-09
[13] 웹사이트 Did the Plaza Accord 'conspiracy' doom Japan, and is China next? https://www.ejinsigh[...] Hong Kong Economic Journal
[14] 웹사이트 A U.S.-China 'Plaza Accord'? https://www.japantim[...] 2018-09-11
[15] 학술지 Monetary Policy Implementation in Japan: What They Say versus What They Do
[16] 웹사이트 Fed of St. Louis HP http://www.research.[...]
[17] 웹사이트 為替の日次データ(1970年~1989年) http://www.federalre[...] 연방준비제도이사회 2009-01-25
[18] 뉴스 通貨攻防円から元へ 日本経済新聞 2005-09-06
[19] 학술지 日本銀行の金融政策(1984年~1989年)--プラザ合意と「バブル」の生成 https://hdl.handle.n[...] 明治大学社会科学研究所
[20] PDF 最近における短期金融市場の動向について http://www3.boj.or.j[...] 일본은행
[21] PDF わが国の均衡実質金利 http://www.esri.go.j[...]
[22] 뉴스 予測できた「地デジ特需」終了 テレビ巨額投資の謎 https://www.nikkei.c[...] 日本経済新聞
[23] 웹사이트 Favorable Views of Japan, China Keep Climbing https://news.gallup.[...] 2018-03-06
[24] 서적 テロルの真犯人
[25] 뉴스 【中国観察】中国が学ぶ日米貿易摩擦の教訓 「人民元版・プラザ合意」警戒 https://www.sankei.c[...] 산케이 디지털 2019-08-16
[26] 웹사이트 「中国は日本から教訓を得るべき」、福田元首相の発言が中国で反響 https://www.recordch[...] Record China 2018-04-10
[27] 뉴스 通貨高求める米圧力で日本の経験中国に伝授-岩田元日銀副総裁 https://www.bloomber[...] 블룸버그 2018-04-11
[28] 뉴스 プラザ合意で苦しんだ日本に学べー米国との協議巡り中国メディア主張 https://www.bloomber[...] 블룸버그 2018-08-17
[29] 웹사이트 米、為替介入に相殺関税検討 人民元安誘導をけん制 https://www.nikkei.c[...] 2019-05-24
[30] 웹사이트 米、通貨安誘導する国々に相殺関税へ-商務省が発表 https://www.bloomber[...] 2019-05-24
[31] 뉴스 米、中国を為替操作国に指定 圧力を強化 https://www.nikkei.c[...] 2019-08-06
[32] 뉴스 提唱者が見る「G2」 米中摩擦、多国間で解消 ピーターソン国際経済研究所所長フレッド・バーグステン氏 連携で経済効率化 https://www.nikkei.c[...] 日本経済新聞 2010-06-07
[33] 뉴스인용 G5 결의 https://www.joongang[...] 1985-09-30
[34] 일반
[35] 뉴스인용 서방5국 재무장관회담 달러화가치 끌어내리기로 합의 https://www.mk.co.kr[...] 1985-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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