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키신저
1. 개요
헨리 키신저는 독일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주한 유대인 출신 외교관으로, 리처드 닉슨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역임하며 미국의 외교 정책을 주도했다. 그는 현실주의 외교를 펼치며 데탕트 정책을 통해 미국과 소련 간의 긴장을 완화하고, 중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데 기여했다. 베트남 전쟁 종식에 기여한 공로로 197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퇴임 후에는 컨설턴트, 저술가로 활동하며 국제 문제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다. 그의 외교 정책은 긍정적, 부정적 평가가 공존하며, 2023년 10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출생 이름 | 하인츠 알프레드 키신저 |
|---|---|
| 출생일 | 1923년 5월 27일 |
| 출생지 | 독일 바이에른 주 퓌르트 |
| 사망일 | 2023년 11월 29일 |
| 사망지 | 미국 코네티컷주 켄트 |
| 안장 장소 | 알링턴 국립묘지 |
| 국적 | 독일 (1935년까지, 뉘른베르크법에 의해 박탈) 무국적 (1935년–1943년) 미국 (1943년부터) |
| 정당 | 공화당 |
| 배우자 | 안 플라이셔 (1949년 2월 6일 결혼, 1964년 이혼) 낸시 매기니스 (1974년 3월 30일 결혼) |
| 자녀 | 2명 |
| 직업 | 외교관 정치학자 정치인 |
| 학력 | 뉴욕 시립 대학 시티 칼리지 하버드 대학교 (문학사, 문학 석사, 박사) |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 소속 | 미국 육군 |
|---|---|
| 복무 기간 | 1943년–1946년 |
| 계급 | 병장 |
| 참전 전투 | 제2차 세계 대전 벌지 전투 |
| 부대 | 제84보병사단 제970방첩대 분견대 |
| 훈장 | 청동성훈장 |
| 직책 | 미국 국무장관 |
|---|---|
| 재임 기간 | 1973년 9월 22일 – 1977년 1월 20일 |
| 대통령 | 리처드 닉슨 제럴드 포드 |
| 전임 | 윌리엄 P. 로저스 |
| 후임 | 사이러스 밴스 |
| 직책 | 미국 국가안보보좌관 |
| 재임 기간 | 1969년 1월 20일 – 1975년 11월 3일 |
| 대통령 | 리처드 닉슨 제럴드 포드 |
| 전임 | 월트 로스토 |
| 후임 | 브렌트 스코크로프트 |
| 수상 | 노벨 평화상 (197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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퓌르트 출신 -
헤르베르트 에르하르트
헤르베르트 에르하르트는 독일의 전 축구 선수로서, FC 바이에른 뮌헨에서 DFB-포칼 우승을 경험하고 서독 국가대표팀으로 1954년 FIFA 월드컵 우승과 1958년 FIFA 월드컵 4강 진출을 이끄는 등 다양한 포지션에서 활약하며 독일 축구 역사에 기여했다. -
퓌르트 출신 -
슈테펜 바인홀트
슈테펜 바인홀트는 독일의 은퇴한 핸드볼 선수로, 2016년 리우 올림픽 동메달, 유럽 선수권 대회 금메달 2회, EHF 챔피언스리그 다수 우승 등 여러 대회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
제럴드 포드 행정부의 각료 -
도널드 럼즈펠드
도널드 럼즈펠드는 미국의 정치인이자 사업가로, 포드와 부시 행정부에서 국방장관을 역임하며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을 지휘했고, '알려진 알려진 것들'이라는 발언과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 포로 학대 사건 등으로 논란이 되기도 했다. -
제럴드 포드 행정부의 각료 -
넬슨 록펠러
넬슨 록펠러는 록펠러 가문의 일원이자 미국의 정치인, 사업가, 자선가, 미술품 수집가로서 부통령, 뉴욕 주지사, 보건·교육·복지부 차관을 역임했고 현대 미술관 운영에도 참여했다. -
냉전기의 외교관 -
조지 마셜
조지 마셜은 미국의 5성 장군이자 국무장관, 국방장관을 역임하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군 확장과 유럽 침공 작전을 지휘하여 연합군 승리에 기여하고, 전후 마셜 플랜을 통해 유럽 경제 재건과 냉전 시대 안정에 기여하여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으나, 진주만 공습 정보 실패와 맥아더 장군 해임 관련 논란도 있다. -
냉전기의 외교관 -
헨리 캐벗 로지 주니어
헨리 캐벗 로지 주니어는 매사추세츠주 상원의원,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 유엔 대사, 부통령 후보, 남베트남 대사 등을 역임한 미국의 저명한 정치인이자 외교관으로, 로지 가문의 배경과 하버드 대학교 출신이라는 점, 보수 공화당원이면서 국제주의적 성향을 지닌 것이 특징이다.
2. 생애
현실정치의 제안자인 키신저는 1969년과 1977년 사이에 미국 외교 정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미국과 소련 간의 긴장 완화로 이끈 데탕트 정책을 추진하였고, 중국과의 관계 개선 및 저우언라이 총리와의 회담(1972년)을 통해 새로운 전략적 반소, 중미 동맹을 형성하는데 기여하였다. 그는 베트남 전쟁 종전을 위한 노력으로 197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의 외교 정책은 반전 운동가와 반공주의자들 사이에서 논란의 대상이었지만, 20세기 후반의 가장 중요한 전략적 사상가로 널리 평가받았다. 2023년 11월 29일 노환으로 사망했다.
키신저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 육군에 복무하며 독일어 통역 및 게슈타포 체포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캠프 크로프트에서 기초 훈련을 받고 1943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제84 보병 사단에서 프리츠 크라머의 주선으로 군사 정보 부서에 배치되어 불지 작전 중 정보 임무에 자원했다. 1945년 4월 10일, 노이엥가메 강제 수용소의 분소인 한노버-알렘 강제 수용소 해방에 참여했다. 이후 방첩대(CIC) 특별 요원으로 게슈타포 장교 및 파괴자들을 추적하는 임무를 맡아 브론즈 스타 훈장을 받았다. 1945년 6월, 헤세주 베르크슈트라세 지역 벤스하임의 CIC 분견대 사령관이 되어 탈나치화 업무를 담당했다. 1946년, 캠프 킹의 유럽 사령부 정보학교에서 강의를 하도록 재배치되었고, 육군에서 제대 후 민간 직원으로서 이 역할을 계속 수행했다.
2.1. 초기 생애 및 교육
헨리 키신저는 1923년 5월 27일 바이마르 공화국 바이에른주 퓌르트에서 하인츠 알프레트 키싱거(Heinz Alfred Kissinger독일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유대인으로, 아버지 루이스 키신저는 교사였고 어머니 파울라 슈테른은 주부였다. 키신저의 증조부는 1817년 바이에른의 온천 도시인 바트 키싱겐에서 따온 "키신저"를 성으로 사용했다. 어린 시절 키신저는 슈포르트프로인 퓨르트의 유소년 팀에서 축구를 즐겼다.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키신저 가족의 삶은 큰 변화를 맞았다. 2022년 BBC 인터뷰에서 키신저는 당시 아홉 살이었던 자신이 히틀러의 집권 소식을 듣고 큰 전환점을 맞았다고 회상했다. 나치 통치 하에서 키신저와 그의 친구들은 히틀러 유겐트 갱들로부터 괴롭힘과 폭행을 당했다. 또한 나치의 반유대주의 법으로 인해 김나지움(Gymnasium)에 입학할 수 없었고, 아버지도 교직에서 해고되었다.
1938년, 키신저 가족은 나치의 박해를 피해 독일을 떠나 런던을 거쳐 미국 뉴욕에 정착했다. 키신저는 워싱턴하이츠의 유대인 공동체에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으며, 미국 문화에 빠르게 적응했지만 짙은 독일어 억양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낮에는 면도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조지 워싱턴 고등학교를 다녔다.
키신저는 뉴욕 시립대학교에서 회계학을 전공하며 학업을 이어갔으나, 1943년 미국 육군에 징집되어 학업이 중단되었다. 그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스파탄버그에 있는 캠프 크로프트에서 군사 훈련을 받았고, 1943년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이후 독일어 통역관으로 복무하며 전직 게슈타포들을 체포하는 데 능력을 발휘했다.
1950년 키신저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았으며, 1952년과 1954년에 각각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박사 논문 제목은 〈복원된 세계: 메테르니히, 로버트 스튜어트와 평화의 문제들 1812~22〉였다.
2.2. 학문적 경력
1947년 귀국하여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했다. 1950년 정치학 학사 학위를 최우등으로 취득하고 졸업하였다. 필 베타 카파(Phi Beta Kappa) 회원이였으며, 애덤스 하우스에 거주하며 윌리엄 얀델 엘리엇(William Yandell Elliott) 교수 아래서 수학했다. 그의 졸업 논문은 "역사의 의미: 슈펭글러, 토인비 그리고 칸트(Kant)에 대한 성찰"이라는 제목으로 4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었고, 하버드 대학교의 당시 학부 논문 분량 제한(35,000단어)을 넘어섰다. 1951년과 1954년에 각각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2년,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생이던 그는 심리전 위원회(Psychological Strategy Board) 소장의 자문관으로 활동했으며, 잡지 Confluence를 창간했다.
키신저의 박사 학위 논문 제목은 "평화, 정당성, 그리고 균형 (캐슬리(Castlereagh)와 메테르니히의 외교술 연구)"이었다. 키신저는 박사 학위 논문에서 처음으로 "정당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는데, 그는 이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여기서 사용되는 정당성은 정의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실용적인 합의의 본질과 외교 정책의 허용 가능한 목표와 방법에 대한 국제적인 합의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의 논문은 하버드 정부학과 학생에게 전쟁 방지와 세계 평화 수립을 위한 모든 수단이나 조치를 다룬 법적, 정치적, 역사적, 경제적, 사회적 또는 민족적 접근 방식에서 최고의 논문에 수여되는 찰스 서머너 상(Senator Charles Sumner)을 수상했다. 이 논문은 1957년 세계의 회복: 메테르니히, 캐슬리 그리고 1812~1822년 평화 문제로 출판되었다.
키신저는 하버드 대학교 정부학과 교수로 남아 1951년부터 1971년까지 하버드 국제 세미나(Harvard International Seminar) 소장을 역임했다. 1955년 국가안보회의의 작전조정위원회(Operations Coordinating Board) 자문관이었다. 1955년과 1956년에는 국제관계위원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에서 핵무기와 외교 정책에 대한 연구 책임자를 역임했다. 그는 이듬해 핵무기와 외교 정책을 발표했다. 같은 해 그는 나폴레옹 이후 유럽의 세력 균형 정치에 대한 연구인 세계의 회복(A World Restored)을 출판했다.
1956년부터 1958년까지 키신저는 록펠러 형제 기금(Rockefeller Brothers Fund)의 특별 연구 프로젝트(Special Studies Project) 이사로 일했다. 그는 1958년부터 1971년까지 하버드 국방 연구 프로그램(Harvard Defense Studies Program) 소장을 역임했다. 1958년 로버트 R. 보위(Robert R. Bowie)와 함께 국제문제센터(Center for International Affairs)를 공동 설립하여 부소장을 역임했다. 학계 밖에서 그는 작전 연구소(Operations Research Office), 군비 통제 및 군축 기구(Arms Control and Disarmament Agency), 미국 국무부(Department of State), RAND Corporation(RAND Corporation)를 포함한 여러 정부 기관과 싱크탱크의 자문관으로 활동했다.
3. 정치 경력
현실정치 제안자인 키신저는 1969년부터 1977년까지 미국 외교 정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미국과 소련 간의 긴장을 완화시킨 데탕트 정책을 추진했고, 중국의 "개방"과 새로운 전략적 반소, 중미 동맹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72년 저우언라이 총리와의 회담을 통해 이를 체결했다. 그는 베트남 전쟁을 끝내는 데 노력하여 197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그의 외교 정책은 반전 운동가와 반공주의자들 사이에서 그를 적으로 만들었지만, 20세기 후반의 가장 중요한 전략적 사상가로 널리 알려졌다.
키신저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 아래에서 1969년부터 1973년까지 국가안보보좌관을, 1973년부터 1977년까지 국무장관을 역임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이 1974년에 사임한 후에도 제럴드 포드 대통령 아래에서 국무장관으로 계속 재직하였다. 닉슨 아래에서 국가안보보좌관으로서 키신저는 소련과의 데탕트 정책을 추진하여 두 초강대국 간의 긴장 완화를 추구하였다. 이 전략의 일환으로 그는 소련 공산당 서기장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와 전략 무기 제한 협상 및 탄도탄 요격 미사일 조약을 협상하였다. 미-소 데탕트 시기는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까지 이어졌다.
1970년, 키신저는 린든 B. 존슨 행정부의 파나마 운하에 대한 미국 통제권 유지 공약을 뒤집고, 닉슨에게 미국 국방부의 입장을 지지할 것을 권고했다. 이후 국제적 압력에 직면하여 입장을 바꾸어, 파나마 운하 문제에 대한 과거의 강경한 입장이 라틴 아메리카와의 관계에 걸림돌이 되고 소련이 지지할 만한 국제적 좌절을 야기할 수 있다고 보았다. 1973년, 미국과 라틴 아메리카 간의 "새로운 대화"를 촉구했고, 1974년에는 파나마의 군사 지도자 오마르 토리호스와 만나 파나마 운하의 파나마 이양을 위한 8가지 운영 원칙에 대한 합의를 파나마 외무장관 후안 안토니오 택과 맺었다. 이는 미국 의회의 분노를 샀지만, 궁극적으로 1977년 미-파나마 조약의 기틀을 마련했다.
키신저는 1961년 이후 단절된 미국-쿠바 관계 정상화를 지지했으나, 곧 케네디의 정책을 따르는 것으로 마음을 바꾸었다. 앙골라와 모잠비크 독립 투쟁에 쿠바 혁명군이 개입한 후, 쿠바가 군대를 철수하지 않는 한 관계 정상화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고, 쿠바는 이를 거부했다.
3.1. 닉슨 행정부 (1969-1974)
현실정치 제안자인 헨리 키신저는 1969년부터 1977년까지 미국 외교 정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미국과 소련 간의 긴장을 완화시킨 데탕트 정책을 추진했고, 중국의 "개방"과 새로운 전략적 반소, 중미 동맹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72년 저우언라이 총리와의 회담을 통해 이를 체결했다. 그는 베트남 전쟁을 끝내는 데 노력하여 197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닉슨 아래에서 키신저는 1969년부터 1973년까지 국가안보보좌관을, 1973년부터 1977년까지 국무장관을 역임하였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이 1974년에 사임한 후에도 제럴드 포드 대통령 아래에서 국무장관으로 계속 재직하였다.
닉슨 아래에서 국가안보보좌관으로서 키신저는 소련과의 데탕트 정책을 추진하여 두 초강대국 간의 긴장 완화를 추구하였다. 이 전략의 일환으로 그는 소련 공산당 서기장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와 전략 무기 제한 협상 및 탄도탄 요격 미사일 조약을 협상하였다. 미-소 데탕트 시기는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까지 이어졌다.
1968년 닉슨은 "명예로운 평화"를 달성하고 베트남 전쟁을 끝내겠다는 공약으로 당선되었다. 취임 후 그는 베트남 공화국 육군의 전투 역할을 확대하면서 베트콩 (남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과 베트남 인민군을 상대로 남베트남을 단독으로 방어할 수 있도록 미군을 점진적으로 철수시키는 "베트남화" 정책을 시행하였다. 동시에 닉슨의 후원으로 키신저는 남베트남을 공격한 베트남 인민군과 베트콩을 목표로 캄보디아에 대한 미국의 폭격을 확대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69년~1970년의 폭격 작전은 처음에는 비밀이었으나, 1970년 미군과 남베트남군에 의한 캄보디아 침공이 알려지면서 미국, 특히 대학 캠퍼스에서 대규모 반전 시위를 촉발시켰다.
1973년 키신저는 북베트남 외교 대표 레득토와 함께 베트남 전쟁을 종식시키고 미군 철수를 협상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키신저는 상을 받았지만, 레득토는 평화 협정이 이행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상을 거부하였다. 반전 시위로 인한 혼란을 우려하여 키신저는 직접 상을 받지 않았다. 대신 노르웨이 주재 미국 대사 토머스 R. 번이 그를 대신하여 상을 받았다. 1975년 북베트남의 승리(사이공 함락)까지 전쟁은 베트남에서 계속되었다.
키신저는 1969년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일을 시작했을 때 중국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으며,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한 주요 원동력은 닉슨이었다. 닉슨과 마찬가지로 키신저는 중국과의 관계가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벗어나고 소련과의 대결에서 장기적인 전략적 이익을 얻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키신저는 1971년 7월과 10월에 중국을 두 차례 방문하여(첫 번째 방문은 비밀리에 이루어짐) 당시 중국 외교 정책을 담당했던 주은래 총리와 회담했다. 베이징 방문 당시 주요 쟁점은 대만이었는데, 주은래는 미국이 대만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정당한 일부임을 인정하고, 미군을 대만에서 철수시키고, 국민당 정권에 대한 군사 지원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키신저는 베트남 전쟁이 끝나면 미군의 3분의 2를 철수시키고, 중미 관계가 개선됨에 따라 나머지를 철수시키겠다고 약속하며 이에 양보했다.
키신저의 방문은 닉슨, 주은래, 중국 공산당 주석 마오쩌둥 간의 획기적인 1972년 정상회담과 두 나라 간의 관계 정상화의 길을 열었다. 이는 23년간의 외교적 고립과 상호 적대 관계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 결과 중국과 미국 간에 암묵적인 반소련 동맹이 형성되었다. 키신저의 외교는 양측 간의 경제 및 문화 교류와 중국과 미국 수도에 "연락사무소" 설립으로 이어졌지만, 중국과의 관계 완전 정상화는 1979년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69년 취임했을 때 키신저는 미국과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정전 협정을 체결하고 남베트남에서 군대를 철수하는 협상 전략을 선호했으며, 남베트남 정부와 베트콩이 연립 정부에 합의하는 데 동의했다. 키신저는 남베트남을 그 자체로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았지만, 미국을 세계 강국으로 유지하기 위해 남베트남을 지원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믿었고, 남베트남이 너무 빨리 버려진다면 미국의 어떤 동맹국도 미국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1969년 초, 키신저는 캄보디아 폭격인 메뉴 작전 계획에 반대했는데, 닉슨이 외교적 후폭풍에 대한 계획 없이 경솔하게 행동하고 있다고 우려했지만, 1969년 3월 16일 닉슨은 다음 날 폭격이 시작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대통령이 결심한 것을 알고 나서 그는 더욱 지지하게 되었다. 키신저는 캄보디아에서 남베트남으로의 침투를 방해하기 위해 캄보디아 폭격과 1970년 캄보디아 침공 및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주 목표물에 대한 광범위한 폭격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72년 8월 1일 키신저는 파리에서 다시 레득토를 만났고, 처음으로 타협할 의향이 있는 듯 보였으며, 정전의 정치적, 군사적 조건은 별도로 처리될 수 있다고 말했고, 그의 정부가 더 이상 응우옌반티에우의 전복을 전제 조건으로 하지 않을 의향이 있음을 암시했다. 1972년 10월 8일 저녁 파리에서 키신저와 레득토의 비밀 회담에서 회담의 결정적인 돌파구가 마련되었다. 레득토는 미국이 모든 군대를 베트남에서 철수하는 대가로 베트남 민주 공화국에 있는 모든 포로를 석방하는 휴전에 대한 "매우 현실적이고 매우 간단한 제안"으로 시작했다. 키신저는 레득토의 제안을 최선의 거래로 받아들였다.
1973년 1월 8일 키신저와 레득토는 파리에서 다시 만났고 다음 날 합의에 도달했는데, 주요 내용은 10월에 닉슨이 거부한 것과 본질적으로 동일했으며 미국에 대한 미용상의 양보만 있었다. 티우는 다시 한번 평화 협정을 거부했지만, 닉슨의 최후 통첩을 받고 마지못해 평화 협정을 받아들였다. 1973년 1월 27일 키신저와 레득토는 3월까지 모든 미군을 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하는 대가로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모든 미군 포로를 석방하는 평화 협정에 서명했다. 레득토와 함께 키신저는 전년 1월에 체결된 파리 평화협정에 담긴 휴전 협상에 대한 공로로 1973년 12월 10일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1974년 여름까지 미국 대사관은 남베트남군의 사기가 위험할 정도로 낮아졌고 남베트남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불확실하다고 보고했다. 1974년 8월 미국 의회는 남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원조를 연간 7억 달러로 제한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1974년 11월 키신저는 레오니드 브레즈네프에게 베트남 민주 공화국에 대한 소련의 군사 원조를 중단하도록 설득했다. 같은 달 그는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에게 베트남 민주 공화국에 대한 중국의 군사 원조를 중단하도록 설득하기도 했다.
닉슨은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에서 파키스탄 독재자 야히아 칸을 지지했다. 키신저는 "죽어가는 벵골인"을 위해 "피를 흘리는" 사람들을 비웃었고, 동파키스탄 주재 미국 총영사 아처 K. 블러드와 그의 참모 20명이 보낸 첫 번째 전보를 무시했다. 이 전보에는 미국 동맹국인 서파키스탄이 블러드의 말을 빌리자면 벵골 지식인, 동파키스탄 독립 지지자들, 힌두교 소수 민족을 겨냥한 "선택적 대량학살"을 자행하고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3.2. 포드 행정부 (1974-1977)
1970년, 키신저는 린든 B. 존슨 행정부의 파나마 운하에 대한 미국 통제권 유지 공약을 뒤집고, 닉슨에게 미국 국방부의 입장을 지지할 것을 권고했다. 이후 국제적 압력에 직면하여 입장을 바꾸어, 파나마 운하 문제에 대한 과거의 강경한 입장이 라틴 아메리카와의 관계에 걸림돌이 되고 소련이 지지할 만한 국제적 좌절을 야기할 수 있다고 보았다. 1973년, 미국과 라틴 아메리카 간의 "새로운 대화"를 촉구했고, 1974년에는 파나마의 군사 지도자 오마르 토리호스와 만나 파나마 운하의 파나마 이양을 위한 8가지 운영 원칙에 대한 합의를 파나마 외무장관 후안 안토니오 택과 맺었다. 이는 미국 의회의 분노를 샀지만, 궁극적으로 1977년 미-파나마 조약의 기틀을 마련했다.
키신저는 1961년 이후 단절된 미국-쿠바 관계 정상화를 지지했으나(모든 미-쿠바 무역은 1962년 2월, 미국의 압력으로 쿠바가 미주 기구에서 제명된 지 몇 주 후에 차단되었다), 곧 케네디의 정책을 따르는 것으로 마음을 바꾸었다. 앙골라와 모잠비크 독립 투쟁에 쿠바 혁명군이 개입한 후, 쿠바가 군대를 철수하지 않는 한 관계 정상화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고, 쿠바는 이를 거부했다.
1973년, 키신저는 대통령 보좌관직을 유지한 채 국무장관에 취임하여 포드 행정부 퇴진까지 외교 정책 전반을 장악했다. 1974년, 포드 대통령 취임과 함께 보좌관직에서 물러났지만, 외교 정책에 어두운 대통령을 대신하여 보좌관 시절 부하였던 브렌트 스코크로프트 국가안보 문제 담당 대통령 보좌관과 Helmut Sonnenfeldt영어 국무부 참사관 등 측근들을 활용하여 포드 행정부에서도 데탕트 정책을 계속 주도했다. 한편, 닉슨 행정부 시대부터 추진되어 온 데탕트 정책에 비판적이며 더욱 엄격한 대소련 인식을 가진 도널드 럼즈펠드(대통령 수석 보좌관·국방장관 역임) 등과는 내각 내에서 대립했다.
이 시기, 키신저 밑에서 미국 국가안보회의는 「[https://pdf.usaid.gov/pdf_docs/PCAAB500.pdf]국가안보 과제 각서 200 (National Security Study Memorandum 200)」, 소위 ‘키신저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보고서는 개발도상국의 인구 폭발이 현지 정권의 기반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미국의 안보 우려가 될 수 있으므로, 미국 정부에 개발도상국에 대한 인구 억제 관련 의학적 및 정치적 개발 원조를 실시할 것을 제안했다. 이 문서는 1989년 백악관에 의해 기밀 해제되었다.
1976년, 키신저는 아프리카 남부에 세력을 확장하는 소련과 쿠바를 견제하기 위해, 방관적인 입장이었던 로디지아 문제(로디지아 분쟁)에 갑자기 개입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4월 27일에는 로디지아의 이웃 국가인 잠비아를 방문하여 로디지아의 이안 스미스 정권에 흑인 다수 통치로 이행하도록 압력을 가하여 결과적으로 백인 독재 체제를 종식시키는 계기 중 하나를 만들었다.
4. 외교 정책 및 주요 업적
현실정치 제안자인 키신저는 1969년과 1977년 사이에 미국 외교 정책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미국과 소련 간의 긴장 완화를 이끈 데탕트 정책을 추진했고, 중국의 "개방"과 새로운 전략의 반소, 중미 동맹 형성에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베트남 전쟁을 끝내는 데 노력하였고, 그 공로로 197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닉슨 아래에서 키신저는 1969년부터 1973년까지 국가안보보좌관을, 1973년부터 1977년까지 국무장관을 역임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이 1974년에 사임한 후에도 제럴드 포드 대통령 아래에서 국무장관으로 계속 일했다.
키신저는 소련과의 데탕트 정책을 추진하여 두 초강대국 간의 긴장을 완화하려 했다. 이 전략의 일환으로 그는 소련 공산당 서기장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와 전략 무기 제한 협상 및 탄도탄 요격 미사일 조약을 협상했다.
1973년 욤키푸르 전쟁 당시 키신저는 시리아와 이집트 군대에 의한 이스라엘 기습 공격으로 시작된 전쟁을 끝내기 위한 협상을 진행했다. 미국의 지원으로 이스라엘은 초반 전투에서 잃었던 영토를 되찾았고, 골란고원을 포함한 아랍 측으로부터 새로운 영토를 추가로 얻었다. 전쟁 후 키신저는 이스라엘에 압력을 가해 새로 점령한 일부 지역을 아랍 측에 양도하도록 하여 지속적인 이집트-이스라엘 평화의 첫 단계에 기여했다.
키신저는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에서 파키스탄 독재자 야히아 칸을 지지했으며, 인도 총리 인디라 간디를 비판하는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켰다. 그는 나중에 이 발언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1973년 키신저는 소련의 박해받는 유대인 문제에 대해 소련에 압력을 가하는 것이 미국의 외교 정책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4.1. 데탕트와 미·소 관계
닉슨 행정부에서 키신저는 소련과의 데탕트 정책을 추진하여 양국 간 긴장 완화를 모색했다. 그는 소련 공산당 서기장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와 전략 무기 제한 협상 (SALT I) 및 탄도탄 요격 미사일 조약을 체결했다. 1974년 11월, 키신저는 브레즈네프에게 북한에 대한 소련의 군사 원조 중단을 설득하기도 했다.
4.2.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
닉슨과 키신저는 소련에 전략적 압박을 가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키신저는 1971년 7월과 10월, 당시 중국 외교 정책을 담당했던 저우언라이와 회담하기 위해 두 차례 비밀리에 중국을 방문했다. 이는 양국 관계 정상화는 물론, 1972년 닉슨, 저우언라이, 마오쩌둥 간의 획기적인 정상 회담으로 이어져 23년간의 외교적 고립과 상호 적대감을 끝냈다. 그 결과 중-미 간의 암묵적, 전략적 반소 동맹이 형성되었다. 오늘날 키신저는 중국 지도자들에게 "중국 인민의 오랜 친구"로 기억되기도 한다. 키신저의 외교는 양국 간 경제 및 문화 교류와 양국 수도에 연락 사무소 설립으로 이어졌지만, 중국과의 완전한 관계 정상화는 1979년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키신저는 1969년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일하기 시작했을 때 중국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으며,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한 주요 원동력은 닉슨이었다. 닉슨과 마찬가지로 키신저는 중국과의 관계가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벗어나고 소련과의 대결에서 장기적인 전략적 이익을 얻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1971년 7월과 10월, 키신저는 중국을 두 차례 방문하여(첫 번째 방문은 비밀리에 이루어짐) 당시 중국 외교 정책을 담당했던 저우언라이 총리와 회담했다. 베이징 방문 당시 주요 쟁점은 대만 문제였는데, 저우언라이는 미국이 대만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정당한 일부임을 인정하고, 미군을 대만에서 철수시키고, 국민당 정권에 대한 군사 지원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키신저는 베트남 전쟁이 끝나면 미군의 3분의 2를 철수시키고, 중미 관계가 개선됨에 따라 나머지를 철수시키겠다고 약속하며 이에 양보했다.
1971년 10월 키신저가 중국을 두 번째로 방문했을 때, 어느 중국 정부가 유엔에서 대표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다시 제기되었다. 미국은 동맹을 저버리는 것으로 비춰지는 것을 우려하여 양측 중국 정부가 모두 유엔 회원국이 되는 타협안을 추진하려 했지만, 키신저는 이를 "본질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후퇴 작전"이라고 불렀다. 당시 미국 유엔 대사였던 조지 H. W. 부시가 "두 개의 중국" 공식을 위해 로비를 하는 동안, 키신저는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윌리엄 P. 로저스가 준비 중이던 연설에서 대만에 대한 긍정적인 언급을 삭제했는데, 이는 그가 대만이 유엔에서 퇴출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키신저는 베이징 두 번째 방문에서 저우언라이에게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62%가 대만이 유엔 회원국으로 남기를 원한다고 말하며, 미국 여론을 불쾌하게 하지 않도록 "두 개의 중국" 타협안을 고려해 줄 것을 요청했다. 저우언라이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의 합법 정부이며 타협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키신저는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동맹이었던 장제스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을 수 없다고 말했다. 키신저는 닉슨에게 부시가 너무 유약하고 세련되지 못해 유엔에서 미국을 제대로 대표할 수 없다고 말했고, 유엔 총회가 대만을 퇴출하고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중국 자리를 중화인민공화국에 주는 결의안을 채택했을 때 분노하지 않았다.
키신저의 방문은 닉슨, 저우언라이, 그리고 중국 공산당 주석 마오쩌둥 간의 획기적인 1972년 정상회담과 두 나라 간의 관계 정상화의 길을 열었다. 이는 23년간의 외교적 고립과 상호 적대 관계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 결과, 중국과 미국 간에 암묵적인 반소련 동맹이 형성되었다. 키신저의 외교는 양측 간의 경제 및 문화 교류와 중국과 미국 수도에 "연락사무소" 설립으로 이어졌지만, 중국과의 관계 완전 정상화는 1979년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4.3. 베트남 전쟁 종식
현실정치 제안자인 키신저는 1969년과 1977년 사이에 미국 외교 정책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베트남 전쟁을 끝내는 데 노력하였고, 그 공로로 197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1968년 닉슨은 "명예의 평화"를 성취하고 베트남 전쟁을 끝내겠다는 공약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베트남 공화국 육군의 전투 역할을 확장하는 동안 베트콩 혹은 남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과 베트남 인민군을 상대로 남베트남을 단독으로 방어할 수 있을 때까지 서서히 미군을 철수하는 "베트남화" 정책을 시행하였다. 동시에 키신저는 남베트남에 습격을 시작한 베트남 인민군과 베트콩을 목표로 캄보디아에 미국의 폭격을 확장시키는 주요 역할을 하였다. 1969년~70년 폭격 캠페인은 시초적으로 비밀이었고, 1970년 미군과 남베트남군에 의한 캄보디아 침입이 알려졌을 때 미국, 특히 대학 캠퍼스들에서 중요한 반전 시위들에 불을 붙였다.
1973년 키신저는 북베트남 외교 대표 레득토와 더불어 베트남 전쟁을 끝내고 미군 철수를 협상한 업적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키신저는 상을 받아들였으나 레득토는 거부하여 평화 협정은 구현되지 않았음을 주장하였다. 반전 항의로부터 혼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키신저는 상을 직접 수령하지 않았다. 그 대신 상은 노르웨이 주재 미국 대사 토머스 R. 번에 의하여 그를 대표하여 받아들여졌다. 1975년 북베트남의 승리(사이공 함락)까지 전쟁은 베트남에서 지속되었다.
논란이 많았던 1973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선정 내막이 50년 만에 밝혀졌다고 영국 가디언이 2023년 1월 11일 보도했다. 당시 노벨평화상 수상자 선정 내막은 50년 동안 기밀로 유지되다 그 기한이 끝난 올해 1월 1일 정보 공개 요청에 따라 공개됐다.
오슬로 국제평화연구소(PRIO) 연구교수 스타인 토네손은 공개된 문서를 검토한 뒤 "당시 노벨위원회가 그처럼 잘못된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고 말했다.
공개된 문서에 따르면 1973년 키신저와 토가 평화협정(1973년 1월 27일)에 서명한 지 이틀 뒤인 그해 1월 29일 노르웨이 역사학자로 당시 오슬로대 교수였던 욘 산네스가 두 사람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지명했다. 산네스 교수는 노벨위원회에 보낸 편지에서 "두 사람을 평화상 후보로 선정함으로써 베트남과 미국 간 무력 충돌을 종식시킬 협상의 의미를 기릴 수 있다고 본다."고 밝혔다. 그는 또 "파리 평화협상이 실제로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앞으로 남은 시간에 달려 있음을 잘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토네손 교수는 산네스 교수의 후보 지명 편지와 두 후보자에 대한 보고서에 대해, "당시 노벨위원회는 평화협정이 지켜지지 않을 것임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공개된 문서 가운데는 토가 하노이에서 오슬로로 보낸 전보 원문과, 사이공 함락 뒤 키신저가 평화상 반납의 뜻을 전하기 위해 미국에서 노벨위원회에 보낸 통지문도 있다.
토는 "파리 평화협정이 실현돼 남베트남에서 총격이 멈추고 평화가 실현됐을 때 노벨평화상 수상을 고려할 것"이라고 밝혔고, 키신저는 "우리가 협상을 통해 실현하려 했던 평화가 무력에 의해 무너졌다."고 말했다.
4.4. 중동 외교
키신저는 1973년 시리아와 이집트 군대에 의한 이스라엘 기습 공격으로 시작된 욤키푸르 전쟁 종결 협상에 참여했다. 미국은 이스라엘 지원을 위해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군사 공수를 실시, 군사적 패배 위기에서 구출했다. 석유 수출국 기구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1974년 3월까지 대미 석유 금수 조치를 단행했다. 미국의 지원으로 이스라엘은 골란고원 등 시리아 동부와 수에즈 운하 서안 지구에 새로운 영토를 확보했다.
전쟁 후 키신저는 이스라엘에 압력을 가해 점령지 일부를 아랍 측에 양도하게 했고, 이는 이집트-이스라엘 평화의 첫 단계가 되었다. 이집트는 친소련 노선에서 벗어나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1978년 지미 카터 대통령의 중재로 캠프데이비드 협정이 체결, 이스라엘은 시나이반도를 반환하고 이집트는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며 적대 관계를 종식했다.
1973년 9월, 닉슨은 윌리엄 P. 로저스 국무장관을 해임하고 키신저를 임명했다. 키신저는 베트남전 종전을 위한 파리 평화 회담에 몰두하여 이집트-사우디 동맹의 중요성을 간과했다고 인정했다. 1972년 5월,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은 소련 고문단을 추방하며 미국에 관계 개선 신호를 보냈으나, 키신저의 비밀 회담 제안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73년 3월, 사다트는 다시 소련과 군사 협력을 강화했다.
키신저는 골다 메이어 이스라엘 총리에게 전쟁 후 손실 장비 보충을 약속했지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제242호에 따른 평화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초기 무기 공급을 지연시켰다. 메이어는 850 상당의 무기 및 장비 지원을 요청했으나, 닉슨은 약 2 상당의 물자를 보냈다. 무기 수송 작전은 사우디아라비아 파이살 국왕을 격분시켜 1973년 10월 20일 대미 석유 수출 전면 금수 조치(1973년 석유 위기)를 초래했고, 다른 아랍 산유국들도 이에 동참했다.
1973년 11월 7일, 키신저는 리야드에서 파이살 국왕을 만나 아랍-이스라엘 분쟁에서 "공정한" 태도를 약속하며 석유 금수 조치 해제를 요청했으나, 파이살은 거부했다. 1974년 3월 19일, 사다트가 미국의 입장 변화를 확인하고 키신저가 사우디에 무기 판매를 약속한 후에야 파이살은 석유 금수 조치를 해제했다.
키신저는 이스라엘이 점령지 일부를 아랍 국가에 할양하도록 압력을 가해 이스라엘-이집트 간 최초의 비공격 조약 체결에 기여했다. 1973~1974년, 텔아비브, 카이로, 다마스쿠스를 오가는 "셔틀 외교"를 통해 휴전을 영구 평화로 발전시키려 노력했다. 하페즈 알아사드와의 첫 회담은 6시간 30분 동안 지속되어 언론은 그가 납치되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키신저는 회고록에서 아사드가 협상에서 최대한의 양보를 얻어내기 위해 완강하고 대담하게 행동했다고 묘사했다. 이스라엘 정치인들은 완고하다고 평가했지만, 사다트와는 좋은 관계를 맺고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키신저의 노력으로 1974년 1월 시나이 I, 1975년 9월 시나이 II 등 두 차례의 이집트-이스라엘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키신저는 욤 키푸르 전쟁 이후 평화 협상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최소화하고 아랍-이스라엘 분쟁의 국제적 영향을 완화하기 위해 프랑스와 영국 등 중동 지역 전 유럽 식민지 열강들을 배제했다. 조르주 퐁피두 프랑스 대통령은 미국의 패권적 지배 야욕을 우려했다.
4.5. 기타 외교 정책
리처드 닉슨 대통령 아래에서 헨리 키신저는 1969년부터 1973년까지 국가안보보좌관을, 1973년부터 1977년까지 국무장관을 역임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이 1974년에 사임한 후에도 제럴드 포드 대통령 아래에서 국무장관으로 계속 일했다.
닉슨 아래에서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재직하면서 키신저는 소련과의 데탕트 정책을 추진하여 두 초강대국 간의 긴장을 완화하려 했다. 이 전략의 일환으로 그는 소련 공산당 서기장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와 전략 무기 제한 협상 및 탄도탄 요격 미사일 조약을 협상했다. 미-소 데탕트는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전까지 지속되었다.
1973년 욤키푸르 전쟁 당시 키신저는 시리아와 이집트 군대에 의한 이스라엘 기습 공격으로 시작된 전쟁을 끝내기 위한 협상을 진행했다. 미국의 지원으로 이스라엘은 초반 전투에서 잃었던 영토를 되찾았고, 골란고원을 포함한 아랍 측으로부터 새로운 영토를 추가로 얻었다.
전쟁 후 키신저는 이스라엘에 압력을 가해 새로 점령한 일부 지역을 아랍 측에 양도하도록 하여 지속적인 이집트-이스라엘 평화의 첫 단계에 기여했다. 이 움직임은 1950년대 이후 경색되었던 미국-이집트 관계를 개선시켰고, 이집트는 친소련적 입장에서 벗어나 미국과 긴밀한 협력 관계로 들어섰다. 1978년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이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중재하면서 평화가 확정되었고, 이스라엘은 시나이반도를 반환하는 대가로 이집트는 이스라엘 국가를 인정하고 적대 행위를 종식하기로 합의했다.
키신저는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에서 파키스탄 독재자 야히아 칸을 지지했다. 그는 인도 총리 인디라 간디를 "년"이자 "마녀"라고 묘사하는 등 인도에 대한 비판적인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켰다. 그는 나중에 이 발언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1973년 키신저는 소련의 박해받는 유대인 문제에 대해 소련에 압력을 가하는 것이 미국의 외교 정책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1973년 3월 1일 이스라엘 총리 골다 메이어와의 회담 직후 닉슨과의 대화에서 키신저는 "소련 유대인의 이민은 미국 외교 정책의 목표가 아니며, 소련이 유대인들을 가스실에 집어넣는다 해도 그것은 미국의 문제가 아니다. 인도주의적 관심사일지도 모르지만."라고 말했다.
5. 퇴임 이후 활동
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소속 지미 카터 후보가 제럴드 포드를 꺾고 당선되면서 키신저는 공직에서 물러났다. 카터는 선거 운동 기간 동안 키신저가 미국의 외교 관계를 "혼자서" 관리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1980년 대선에서는 로널드 레이건 공화당 후보가 카터를 꺾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 키신저는 미국 정부에서 상대적으로 소수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공화당과 레이건 행정부를 장악한 보수주의자들은 닉슨의 데탕트 정책을 소련에 대한 현명하지 못한 적응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키신저는 정책 그룹에 참여하고 정치적 조언, 연설, 저술 활동을 지속했으며, 미국의 방송망에 외교 정책 시사 해설자로 가끔 출연했다.
2002년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키신저에게 9·11 테러를 조사하는 9/11 위원회 의장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의회 민주당원들은 키신저가 비밀주의를 옹호하고 국민의 알 권리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민주당의 지속적인 압박으로 인해 키신저는 자신의 고객들과의 이해 상충을 이유로 2002년 12월 13일 위원장직에서 물러났다.
2006년 워싱턴 포스트의 조사 기자 밥 우드워드는 키신저가 부시 대통령과 딕 체니 부통령과 정기적으로 만나 이라크 전쟁에 대한 조언을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우드워드와의 인터뷰에서 키신저는 2005년 8월 12일 워싱턴 포스트 기고문에서 "반란에 대한 승리는 의미있는 출구전략일 뿐이다."라고 쓴 것과 같은 조언을 했다고 확인했다.
키신저는 자문 회사 키신저 조합을 소유하고 있으며,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 백악관 수석을 지낸 마크 맥라티와 키신저-맥라티 조합의 파트너이기도 하다. 그는 걸프스트림 에어로스페이스와 시카고에 본사를 둔 신문 단체 홀링거 인터내셔널을 포함한 다양한 이사회의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1998년 키신저는 고향인 독일 퓌르트의 명예 시민이 되었다. 그는 축구 팀 SpVgg 그로이터 퓌르트의 평생 후원자이자 현재 명예 회원이기도 하다. 2001년부터 2005년까지 그는 윌리엄 앤드 메리 칼리지의 총장을 지냈다. 1995년부터 2001년까지 인도네시아 파푸아주에서 중요한 채굴 및 밀링 작업을 하는 다국적 구리 및 금 생산 회사 프리포트 맥모란의 이사회에 참여했다. 2000년 2월 당시 인도네시아 대통령 압두라만 와힛은 키신저를 정치 고문으로 임명했다. 그는 또한 미국-아제르바이잔 상공 회의소의 명예 고문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1977년, 키신저는 포드 행정부 퇴임과 함께 국무장관직에서 물러났다.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교수직 제안을 받았지만, 학생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취임을 포기했다. 이후 조지타운 대학교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에 초빙되어 재직 중 잇달아 정권 시절 회고록을 발표하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1980년에는 『키신저 비록(キッシンジャー秘録)』으로 미국 전국도서상을 수상했다.
1982년, 국제 컨설팅 회사인 키신저 어소시에이츠(キッシンジャー・アソシエーツ)를 설립하여 사장에 취임하고, 주로 중국과 비즈니스를 하는 기업들을 대상으로 컨설팅 업무를 시작하여 큰 재산을 모았다. 이 회사에는 조지 H. W. 부시 행정부에서 미국 국무부 부장관을 지낸 로렌스 이글버거(후에 국무장관)와 국가안보보좌관을 역임한 브렌트 스코크로프트 등이 참여했다. 또한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미국 재무장관에 취임한 티머시 가이트너도 한때 이 회사에 재직했다.
“현대 외교의 사전”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으며, 공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수십 년 동안 여러 세대의 지도자들로부터 의견을 계속해서 구해왔다. 외교 정책 및 안보 포럼에도 모습을 드러냈으며, 저서는 21권에 달한다.
2000년대에는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조언자로 활동했다. 부시는 키신저와 정기적으로 회담을 가졌으며, 정권 밖에서 가장 신뢰하는 외교 고문이었다. 키신저는 부시 행정부 하에서 이루어진 이라크 전쟁도 기본적으로 지지했다.
2007년 1월 4일에는 조지 슐츠, 윌리엄 페리, 샘 넌 등과 함께 “핵무기 없는 세계로(A World Free of Nuclear Weapons)”라는 제목의 논문을 월스트리트 저널에 발표했다. 해당 논문은 이란, 북한 등이 핵 개발을 시도하고 국제 테러리스트 단체의 핵 보유 가능성까지 존재하는 현대에 핵무기가 과거와 같은 억제 효과를 가지지 못한다며 미국이 핵무기 폐지를 주장해야 한다고 호소하여 주목을 받았다.
2009년 4월 20일, 오카야마 대학에서 특별 강연회를 실시했다. 이 모습은 나중에 오카야마 방송에서도 방영되었다. 2011년 11월 11일 저녁에는 총리 관저를 방문하여 노다 요시히코 수상과 회담하고, TPP 협상 참가 방침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는 트럼프의 말에 따르면 “정계에 입문하기 훨씬 전부터의 친구”인 오랜 인연이 있으며, 대통령 취임 전후로 트럼프는 키신저에게 조언을 구해왔다. 키신저 어소시에이츠에 소속되었던 캐슬린 맥퍼랜드 국가안보회의 부보좌관과 CSIS에서 동료였던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의 발탁은 키신저의 추천이었다고 알려진다. 이러한 것들로 미루어 볼 때 비공식적인 외교 고문 역할을 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2016년 12월에는 중국을 방문하여 시진핑 국가주석(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과 베이징에서 회담하고, 시점상 트럼프 신 행정부의 대중 외교 정책을 전달한 것으로 여겨진다. 2017년 5월 10일에는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에서 보도진과 만나 트럼프가 “키신저 씨와 논의할 수 있어서 영광이다”라고 언급했다. 같은 해 7월에는 틸러슨 국무장관에게 “미국과 중국이 북한 정권 붕괴를 위해 주한미군 철수를 사전 합의하면 좋다”고 제안했다고 알려졌으며, 같은 해 8월에는 월스트리트 저널에서 “북한 문제는 오로지 미국과 중국이 해결해야 한다”는 기고를 했다. 같은 해 10월 10일에는 트럼프가 한·중·일 3개국에 대한 첫 아시아 순방을 앞두고 키신저와 회담에서 “키신저 씨를 존경한다”고 말했다.
2017년 6월 29일, 러시아를 방문하여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회담했다. 그 직후 백악관은 같은 해 7월에 미·러 정상 회담을 개최할 것이라고 발표했기 때문에 러시아 언론은 키신저가 조정 역할을 맡았다는 견해를 보였다. 2016년 2월에도 푸틴의 초청으로 러시아를 방문했다.
2019년 11월, 국가안보회의에서 “인공지능(AI)이 인간의 의식을 초월해 갈 것이라고 확신한다”며 인공지능에 대한 분석을 했다. 특히 군사, 지정학, 외교에서의 활용은 AI가 전쟁과 전략의 본질을 바꾸는 것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분쟁이나 전장에서 AI의 판단으로 공격을 하는 ‘전쟁 게임’이 정말로 신뢰할 수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며 우려를 표명했다. 키신저는 인공지능에 대해 구글 전 이사인 에릭 슈밋와 함께 공저를 냈다.
2020년 1월 15일, 미중 무역 전쟁 타개를 위해 체결된 미·중 경제무역협정 서명식에는 마찬가지로 중국과 관계가 깊은 샌즈 회장 겸 CEO 셸던 애덜슨과 블랙스톤 그룹 CEO 스티븐 슈워츠먼 등과 함께 참석했다.
2020년 4월 3일, 코로나19 발생에 대해 “COVID-19이 종식되어도 세계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곳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며 “(불지 전투 때처럼) 특정인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무작위로 파괴적인 위협을 느낄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또한 “인간의 건강에 대한 위기는 일시적인 것이 될 것이지만, 정치적, 경제적 격변은 수 세대에 걸쳐 계속될 가능성이 있다”고 하며, 세계 무역과 자유로운 이동에 의존하는 이 시대에 시대착오적인 ‘장벽의 시대’가 되살아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2020년 11월 25일, 트럼프 행정부의 크리스토퍼 C. 밀러 국방부 장관 대행은 국방부 자문 기관인 국방정책위원회에서 키신저 등 11명의 위원을 해임했으며, 같은 해 12월 15일에는 대중 강경파인 마이클 필즈베리를 새로운 위원장으로 하는 인사 개편을 했다.
2021년 3월, 리처드 닉슨 재단이 주최한 세미나에 참석하여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조 바이든 대통령에게 아브라함 협정 등 이란과 관련하여 이스라엘의 방위를 강화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중동 정책을 계승할 것을 제안했다.
2022년 5월 23일, 스위스 동부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 연차총회(다보스 회의)에 온라인으로 참가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앞으로 2개월 이내에 평화 협상을 진행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히면서 “이상적으로는 분할 선을 전쟁 이전 상태로 되돌려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러시아가 중국과의 영구적인 동맹 관계로 몰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같은 달 31일, 조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 일간지 뉴욕타임스에 기고하여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속하는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 대해 “미국은 그(푸틴)의 축출을 모색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이 전쟁은 궁극적으로 외교적 해결책밖에 길이 없다”고도 말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평화 실현을 위해 푸틴에게도 일정한 배려를 보였다.
2022년 5월 23일 바이든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여 미일 정상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백악관이 의도하지 않은 “대만 유사시에 대만 방위에 군사적으로 개입할 의사가 있다”는 발언을 한 사태에 대해 키신저는 “대만을 미·중 협상 카드로 해서는 안 된다”고 미 CNBC 인터뷰에서 답했다.
2022년 7월 11일, 일본 나라현에서 8일 발생한 아베 신조 총격 사건 보도를 알고 뉴욕의 일본 총영사관에 마련된 조문소에 조문을 왔다. 그때 “미·일 관계는 매우 굳건하고 중요한 것이며, 그것은 아베 씨의 노력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또 아시아 체제의 기둥으로서 불가결한 일본을 건설했다. 그를 알게 되어 영광이었다”고 말을 남겼다.
2022년 10월 26일, 일본을 방문한 키신저는 기시다 후미오 수상과 30분 정도 면담했다. 면담 내용에 대해 마쓰노 히로카즈 관방장관은 “국제 정세에 대해 일반적인 의견 교환을 했다”고 설명했다. 방일 이유로는 이때 JP모건이 주최하는 “The International Council”이 도쿄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2023년 7월 19일, 중국을 방문하여 베이징에서 리창푸 국무위원 겸 국방부장과 회담했다. 미중 관계가 악화되는 가운데 키신저는 “미국과 중국은 서로 오해를 없애고 대립을 피해야 한다”고 말하며 “양국 군이 대화를 강화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후 21일에는 시진핑과 회담했다.
2023년 11월 29일, 코네티컷주 자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100세.
6. 평가 및 논란
현실정치 제안자인 헨리 키신저는 1969년부터 1977년까지 미국 외교 정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소련과의 긴장 완화([[데탕트]] 정책)를 이끌었고,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 개선([[저우언라이]] 총리와의 회담) 및 베트남 전쟁 종식에 기여하여 197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2023년 11월 29일 노환으로 사망했다.
닉슨 행정부 시절, 키신저는 워터게이트 사건에 연루되지 않아 "깨끗한 남자"라는 평판을 얻었다. 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지미 카터는 키신저가 미국 외교 관계를 "혼자서" 관리한다고 비판했다. 2002년 9·11 테러 조사 위원회 의장으로 임명되었으나, 고객과의 이해 상충 문제로 사임했다. 워싱턴 포스트의 밥 우드워드는 키신저가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딕 체니 부통령에게 이라크 전쟁에 대한 조언을 제공했다고 보도했다.
키신저의 외교는 현실주의에 기반을 두었다. 이는 이데올로기 대신 미국의 실질적인 국가 이익을 외교 중심에 두고, 세계적인 세력 균형을 고려하여 국제 질서를 미국이 받아들일 수 있는 안정적인 형태로 이끄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러한 국제 질서의 배경에는 키신저가 연구하고 그 안정성을 높이 평가했던 [[빈 회의|빈 체제]]가 하나의 모델로 존재했다.
키신저는 데탕트 정책을 통해 미국, 소련, 중화인민공화국 간의 세력 균형을 재편성했다. 소련의 핵전력을 인정하고, 중국을 새로운 행위자로 편입시켜 "미·중·소 삼각 관계"를 구축했다.
키신저는 독특한 외모, 화려한 언행, "닌자 외교"라 불리는 신출귀몰한 외교 방식으로 주목받았다. 1972년에는 "만약 키신저가 지금 죽으면 닉슨이 미국 대통령이 된다"는 농담이 유행할 정도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닉슨의 역할을 더 크게 보는 연구도 등장하고 있다.
6.1. 부정적 평가
키신저는 냉철한 현실주의자로서 군사 개입이나 비밀 공작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았다. 특히, 베트남 전쟁 당시 캄보디아 침공·폭격, 1973년 칠레 쿠데타 관여, 인도네시아에 의한 동티모르 점령을 주도하거나 지지한 점은 크리스토퍼 히친스와 시모어 허쉬 등에 의해 "반인도 범죄", "전쟁 범죄"로 규탄받았다.
1973년 노벨 평화상 수상은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1973년 키신저와 레득토가 평화협정 (1973년 1월 27일)에 서명한 지 이틀 뒤인 그해 1월 29일 노르웨이 역사학자 욘 산네스가 두 사람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지명했다. 당시 노벨위원회는 평화협정이 지켜지지 않을 것임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레득토는 파리 평화협정이 실현되지 않았다며 수상을 거부했고, 키신저는 사이공 함락 뒤 평화상 반납의 뜻을 전했다.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에서 닉슨은 파키스탄 독재자 야히아 칸을 지지했다. 키신저는 동파키스탄 주재 미국 총영사 아처 K. 블러드가 보낸, 서파키스탄이 벵골 지식인, 동파키스탄 독립 지지자들, 힌두교 소수 민족을 겨냥한 "선택적 대량학살"을 자행하고 있다는 블러드 전보를 무시했다.
1973년 칠레 쿠데타 당시, 키신저는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군사 정권의 정치적 탄압을 묵인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1976년 산티아고에서 열린 회담에서 키신저가 아르헨티나 군사 정권에 좌익 게릴라와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비밀 탄압에 대한 "청신호"를 켰다는 내용이 폭로되기도 했다.
1974년 키프로스 사태 당시, 키신저는 그리스 군사 정권의 쿠데타와 터키의 키프로스 침공을 방관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뉴욕 타임즈는 키신저와 국무부가 그리스 군사 정권의 키프로스 쿠데타를 미리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키신저는 욤 키푸르 전쟁 이후 평화 협상에서 프랑스와 영국을 배제하고, 소련의 영향력을 최소화하는 데 집중했다. 이는 프랑스의 조르주 퐁피두 대통령으로부터 미국이 중동 지역을 지배하려는 야망을 드러낸 것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키신저는 1970년대 브라질이 브라질 군사 독재 하에서 핵무기 프로그램을 추진하는 것을 묵인하는 데 찬성했다.
7. 저서
* Nuclear Weapons and Foreign Policy영어, (1957년)
* A World Restored: Metternich, Castlereagh and the Problems of Peace, 1812-22영어, (1957년)
* The Necessity for Choice: Prospects of American Foreign Policy영어, (1961년)
* The Troubled Partnership: A Reappraisal of the Atlantic Alliance영어, (1965년)
* American Foreign Policy영어, (1969년)
* White House Years영어, (1979년)
* For the Record: Selected Statements 1977-1980영어, (1981년)
* Years of Upheaval영어, (1982년)
* Observations: Selected Speeches and Essays, 1982-1984영어, (1985년)
* Diplomacy영어, (1994년)
* Years of Renewal영어, (1999년)
* Does America Need a Foreign Policy?: Toward a Diplomacy for the 21st Century영어, (2001년)
* Ending the Vietnam War: A History of America's Involvement in and Extrication from the Vietnam War영어, (2003년)
* Crisis: the Anatomy of Two Major Foreign Policy Crises영어, (2003년)
* On China영어, (2011년)
* World order: reflections on the character of nations and the course of history영어, (2014년)
* Leadership: Six Studies in World Strategy영어, (2022년)
8. 기타
헨리 키신저는 하인츠 알프레트 키싱거(Heinz Alfred Kissinger독일어)라는 이름으로 독일 바이에른주 퓌르트에서 유대인 부모 루이스 키싱거와 파울라 슈테른 사이에서 태어났다. 1938년 아돌프 히틀러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그의 가족은 미국으로 이주하여 뉴욕에 정착하였다. 1943년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스파탄버그에 있는 캠프 크로프트에서 군사 훈련을 받는 동안 키신저는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그는 어퍼 맨해튼의 워싱턴하이츠에 있는 고등학교를 다녔으나 자신의 독일 사투리를 잃지 않았다. 키신저는 밤에 조지 워싱턴 고등학교를 다니고 낮에는 아르바이트를 하였다. 1943년 뉴욕 시티 칼리지에 수학하던 중 미국 육군에 징병되어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 있는 클렘슨 칼리지에서 훈련을 받고 대적 첩보 활동 970 연대를 위한 독일어 통역관이 되었다. 키신저는 전쟁 직후의 독일에서 전직 게슈타포들을 찾아 체포하는 데 자신의 능력으로 전설적이었다.
1950년 키신저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1952년과 1954년에 각각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박사 논문은 〈복원된 세계: 메테르니히, 로버트 스튜어트와 평화의 문제들 1812~22〉라는 제목이었다.
첫 부인 아넬리스 플라이셔와 사이에 2명의 자녀 엘리자베스와 데이비드를 두었다. 그는 두 번째 부인 낸시와 함께 코네티컷주 켄트에 거주하였다. 그는 컨설팅 펌 키신저 협회의 우두머리를 지냈다.
키신저는 자문 회사 키신저 조합을 소유하고 빌 클린턴 대통령에게 백악관 수석을 지냈던 마크 맥라티와 키신저-맥라티 조합에서 파트너이다. 그는 또한 걸프스트림 에어로스페이스와 시카고에 본사를 둔 신문 단체 홀링거 인터내셔널을 포함한 각종 이사회에서 활동한다.
1998년 키신저는 자신의 고향 독일 퓌르트의 명예 시민이 되었다. 그는 축구 팀 SpVgg 그로이터 퓌르트의 평생 후원자로 지내왔고 현재 명예 회원이다.
2001년부터 2005년까지 윌리엄 앤드 메리 칼리지의 총장을 지냈다.
1995년부터 2001년까지 인도네시아의 파푸아주에서 중요한 채굴과 밀링 작업과 함께 다국적 구리와 금의 생산회사 프리포트 맥모란의 이사회에 참여하였다. 2000년 2월 당시 인도네시아의 대통령 압두라만 와힛은 키신저를 정치적 조언자로 임명하였다. 그는 또한 미국-아제르바이잔 상공 회의소에 명예 조언자로 지내기도 한다.
케네디와 존슨 행정부가 에스타두 노보 정권에 대해 비우호적인 태도를 보인 것과는 달리(특히 포르투갈의 식민지를 지키기 위해 반식민지 반란에 맞서 포르투갈 식민 전쟁을 수행하려는 시도와 관련하여), 키신저가 장관을 맡았던 미 국무부는 포르투갈에 대해 더욱 화해적인 태도를 취했다. 1971년 닉슨 행정부는 미국 의회 흑인 의원 모임과 상원 의원 일부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아조레스 제도에 있는 미군 기지 임대를 성공적으로 갱신했다. 키신저는 비공개적으로는 아프리카에 대한 포르투갈의 퇴행적인 외교 정책이라고 여기며 포르투갈을 경멸했지만, 공개적으로는 욤 키푸르 전쟁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보급을 위해 아조레스 제도 라제스의 군사 기지를 사용하는 데 동의한 포르투갈에 감사를 표했다. 1974년 극우 포르투갈 정권이 붕괴된 후, 키신저는 새 정부의 서두른 식민지 해체 계획이 앙골라의 MPLA와 같은 급진적 세력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했다. 그는 또한 새 포르투갈 정부에 포르투갈 공산당이 포함된 것이 이탈리아와 같은 다른 NATO 회원국의 공산당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했다.
9. 사망
Henry Kissinger영어는 2023년 11월 29일 노환으로 사망했다. 그는 1969년과 1977년 사이에 미국의 외교 정책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소련과의 긴장을 완화한 데탕트 정책을 추진했고, 1972년 저우언라이 총리와의 회담을 통해 중국과의 관계 개선 및 새로운 전략적 반소, 중미 동맹 형성에 기여했다. 또한 베트남 전쟁 종전에 기여한 공로로 197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의 외교 정책은 반전 운동가와 반공주의자들 사이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는 20세기 후반의 가장 중요한 전략적 사상가 중 한 명으로 널리 알려졌다.
한편, 포르투갈의 식민지 해체 과정에서 1975년 독립을 선언한 옛 포르투갈 식민지 동티모르에 대한 미국의 관심이 높아졌다. 인도네시아 대통령 수하르토는 동티모르를 인도네시아의 일부로 간주했다. 1975년 12월, 수하르토는 자카르타에서 키신저와 포드 대통령을 만나 침공 계획을 논의했다. 포드와 키신저는 미국과 인도네시아의 관계가 굳건히 유지될 것이며, 제안된 병합에 반대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들은 다만 "빨리" 끝내기를 원했고, 워싱턴으로 돌아간 후에 작전을 시작할 것을 제안했다. 이에 수하르토는 작전을 하루 연기했다. 결국 12월 7일, 인도네시아군은 동티모르를 침공했다. 미국은 인도네시아에 대한 무기 판매를 지속했고, 수하르토는 병합 계획을 강행했다. 벤 키어넌에 따르면, 이 침공과 점령으로 1975년부터 1981년까지 티모르 주민 약 4분의 1이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