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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팬 배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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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재팬 배싱은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미국에서 일본을 비판하는 현상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당시 미국 경제의 어려움 속에서 일본의 경제 성장이 두드러지면서, 무역 불균형, 시장 개방 문제 등을 이유로 반일 감정이 고조되었다. 이는 일본 제품에 대한 제재, 일본 기업에 대한 비판, 심지어 폭력 사태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미국은 일본에 시장 개방을 요구했고, '플라자 합의'를 통해 환율 조정을 시도했으나, 미일 간의 갈등은 쉽게 해소되지 않았다. 이후 일본의 경제력 약화와 함께 '재팬 패싱'과 같은 용어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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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팬 배싱
개요
2019년 7월 20일 서울에서 열린 반일 집회에서 일본 제품 불매를 지지하는 시위대
"일본 제품 불매운동을 지지하는 시위대의 모습"
유형반감, 외국인 혐오증, 경제적 민족주의
대상일본, 일본인, 일본 문화
관련 용어혐한, 반일 감정, 국수주의
정의 및 특징
정의일본 또는 일본인에 대한 외국인 혐오증 또는 반감
특징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맥락에서 나타나는 반일 감정의 극단적인 형태
때로는 국수주의와 결합되어 나타남
역사적 배경
주요 원인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의 전쟁 범죄 (특히 난징 대학살, 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미흡한 대처
"영토 분쟁 (예: 독도)"
역사 교과서 문제 등 역사 왜곡 논란
발생 시기과거에는 주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최근에는 일본의 역사 수정주의 움직임과 경제적 갈등이 심화되면서 더욱 부각됨
표현 양상
정치적 표현정치인의 반일 발언 및 행동
일본 정부에 대한 항의 시위
국제 사회에서의 일본 비판
경제적 표현일본 제품 불매운동
일본과의 무역 분쟁
일본 기업에 대한 투자 기피
문화적 표현일본 문화 콘텐츠 (영화, 음악, 애니메이션 등) 소비 거부
일본어 학습 기피
일본 문화 행사에 대한 반대 시위
사회적 표현온라인 상에서의 혐일 감정 표출
일본인에 대한 차별 및 혐오 발언
일본 관련 시설에 대한 공격
논란 및 비판
과도한 일반화의 위험성모든 일본인 또는 일본 문화를 무조건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인종차별 또는 문화적 제국주의와 다를 바 없다는 비판 존재
감정적 대응의 문제점이성적인 비판이나 건설적인 대화보다는 감정적인 대응으로 흐를 경우,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갈등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지적
정치적 이용 가능성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반일 감정이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 존재
경제적 민족주의와의 연관성자국 경제 보호를 명분으로 반일 감정을 부추기는 것은 보호무역주의로 이어질 수 있다는 비판
각국의 재팬 배싱
대한민국일본의 한반도 지배 및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전쟁 범죄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
독도 문제, 역사 교과서 문제, 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 관련 갈등이 지속적으로 발생
일본 제품 불매운동이 주기적으로 발생
중국중일 전쟁 당시 일본군의 잔혹 행위에 대한 기억이 강하게 남아있음
"센카쿠 열도 (중국명: 댜오위다오) 영유권 분쟁"
일본의 역사 수정주의 움직임에 대한 반발
미국1980년대 일본의 경제적 부상에 대한 견제 심리에서 비롯
자동차, 반도체 등 주요 산업 분야에서 일본과의 경쟁 심화
대일 무역 적자 문제
유럽특정 산업 분야에서 일본 기업과의 경쟁 심화
일본의 폐쇄적인 시장 구조에 대한 불만
고래잡이 등 환경 문제에 대한 비판
같이 보기
관련 주제반일 감정
혐한
경제적 민족주의
국수주의
역사 수정주의
과거사 문제
영토 분쟁
문화적 제국주의

2. 역사적 배경

1970년대부터 1980년대에 걸쳐, 일본 경제는 급성장하여 미국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 시기 미국에서는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 즉 '재팬 배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70년대 미국은 인플레이션과 경기 침체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일본은 높은 경제 성장을 기록하며 대미 무역 흑자를 지속했다. 이로 인해 미국 내에서는 일본에 대한 반감이 커졌다. 1980년 로널드 레이건이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했지만, 미국 경제는 쉽게 회복되지 않았고 실업률은 10%에 육박했다. 반면 일본은 호황을 누리며 미국과의 무역 흑자를 확대했다.

미국은 일본 시장의 특수성을 비관세 장벽으로 간주하고, 엔화 약세를 문제 삼으며 '교활한 일본'이라는 비판을 제기했다. 1982년에는 빈센트 친 살해 사건이 발생하며 반일 감정이 고조되었다.[3]

미국 정부는 일본에 시장 개방과 수입 확대를 요구했고, 일본은 수출 자율 규제, 농산물 수입 확대, 관세 인하 등을 약속했다. 그러나 미국 업계는 일본을 덤핑으로 제소하며 대일 감정은 개선되지 않았다. 1985년 플라자 합의로 달러 약세가 유도되었지만, 미국의 대일 수출은 크게 늘지 않았다.

미국은 일본의 무역 장벽을 비판하며 금융, 관세, 소프트웨어 등 여러 분야에서 압박을 가했다. 일본은 타협안을 제시했지만, 미국은 이를 불충분한 양보로 여겼다. 일본은 미국 제품의 경쟁력 부족을 문제 삼았지만, 미국은 일본의 불공정 무역 관행을 비판하며 갈등이 심화되었다.

1985년 이후 미국의 경기는 개선되었지만, 일본의 호황은 더욱 두드러졌다. 미국에서는 대일 적자가 지속되면서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이어졌다. 1987년에는 미국 정부가 일본산 개인용 컴퓨터컬러 텔레비전에 100%의 제재 관세를 부과했다.[4][5]

미국 의회에서는 보복 조치가 심의되었고, 1987년 도시바 코콤 사건을 계기로 일본 제품 불매 운동이 벌어졌다. 1988년에는 1974년 통상법이 개정되어 미국은 일본의 불공정 무역 관행에 대한 제재를 강화했다.

결국 미국의 대일 무역 적자 요구는 1980년대 말에 완화되었지만, 재팬 배싱으로 인한 차별 감정은 디트로이트 등 일부 지역에 남아 있었다.[6][7]

2. 1. 1970년대: 일본 경제의 부상과 미국의 위기

1970년대 미국 경제가 인플레이션과 경기 침체로 어려움을 겪는 동안 일본은 세계 2위의 GDP를 기록하며 경제 성장을 지속했고, 대미 무역은 10년 이상 흑자를 유지했다. 일반적으로 이 시기의 엔화는 실력 이상으로 저평가되었다고 여겨졌고, 이로 인해 미국 내 대일 감정은 악화되었다.

세계 수출을 계속 늘리는 일본에 대해 미국 측 무역 관계자들은 통상산업성을 "노토리어스 미티(Notorious MITI, 악명 높은 통상성)"라고 표현했고, 『일본은 넘버원』이라는 서적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등 "놀라운 성공을 거듭하는 일본 경제"에 대한 관심이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갈리며 높아졌다.

1980년 미국 대통령이 카터에서 레이건으로 교체되었지만, 제너럴 모터스가 생산 규모를 대폭 줄이고 구조 조정을 하는 등[2] 미국 경제의 빠른 개선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실업률은 일시적으로 10%에 육박했다.

대미 무역에서 막대한 흑자를 계속 확대하는 일본은 호황을 누렸고, 1960년대부터 대일 적자를 지속하는 미국은 불황에 빠졌으며, 미국의 자동차 회사들은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에 걸쳐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러한 대비는 미국인들의 대일 감정을 악화시켰고, 미국에서는 일본 시장의 특수성을 비관세 장벽으로 간주하고, 극단적인 엔화 약세를 문제 삼아 "교활한 일본"으로 보는 논의가 지지를 얻게 되었다. 반일 감정이 고조되면서 1982년에는 중국계 미국인 기술자 빈센트 친이 일본인으로 오해받아 3명의 백인에게 구타당해 살해당하는 사건도 일어났다.[3]

2. 2. 1980년대: 재팬 배싱의 심화

1970년대 미국 경제가 인플레이션과 경기 침체로 어려움을 겪는 동안 일본은 세계 2위의 GDP를 기록하며 경제 성장을 지속했고, 대미 무역은 10년 이상 흑자를 유지했다. 일반적으로 이 시기의 엔화는 실력 이상으로 저평가되었다고 여겨졌고, 이로 인해 미국 내 대일 감정은 악화되었다.

세계 수출을 계속 늘리는 일본에 대해 미국 측에서는 무역 관계자들이 통상산업성을 "노토리어스 미티(Notorious MITI, 악명 높은 통상성)"라고 표현하거나 『일본은 넘버원』이라는 서적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등 "놀라운 성공을 거듭하는 일본 경제"에 대한 관심이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갈리며 높아졌다.

1980년 미국 대통령이 카터에서 레이건으로 교체되었지만, 전반적으로 미국의 대형 자동차 회사 제너럴 모터스가 생산 규모를 대폭 줄이고 구조 조정을 하는 등[2] 미국 경제의 빠른 개선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실업률은 일시적으로 10%에 육박했다.

대미 무역에서 막대한 흑자를 계속 확대하는 일본은 호황을 누렸고, 1960년대부터 대일 적자를 지속하는 미국은 불황에 빠졌으며, 미국의 자동차 회사들은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에 걸쳐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러한 대비는 미국인들의 대일 감정을 악화시켰고, 미국에서는 일본 시장의 특수성을 비관세 장벽으로 간주하고, 극단적인 엔화 약세를 문제 삼아 "교활한 일본"으로 보는 논의가 지지를 얻게 되었다. 반일 감정이 고조되면서 1982년에는 중국계 미국인 기술자 빈센트 친이 일본인으로 오해받아 3명의 백인에게 구타당해 살해당하는 사건도 일어났다[3]

불황과 반일 여론의 고조, 각 업계의 압력을 배경으로 미국 연방 정부는 일본 정부에 시장 개방, 수입 확대를 강력하게 요구했고, 미국의 수출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일본 측의 환율, 업계 관행, 관세를 차례로 문제 삼았다. 일본 측은 이에 대해 1970년대에 이어 수출의 자율 규제를 약속하거나, 농산물 수입 확대를 약속하거나, 관세 인하를 약속하는 등 반복적으로 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려 했지만, 시장 점유율을 일본 제품에 빼앗긴 미국 업계 단체는 잇따라 일본을 덤핑 등의 법령 위반으로 제소했고, 대일 감정은 개선되지 않았다.

미국의 경상 수지가 적자가 되자, 일본이 불공정한 무역 장벽을 구축하고 있다는 비판이 1984년에도 다시 강력해졌고, 일본은 미국의 대일 감정 악화를 완화하는 동시에 자국 산업도 보호하고자, 엔화 약세 시정 및 수입 확대를 약속하고 시장 개방을 위한 규제 완화를 약속했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1985년에는 선진국 정상 회의의 재무 장관·중앙 은행 총재 회의에서 환율을 달러 약세로 유도하는 플라자 합의가 실시되었고, 달러/엔 환율은 대폭적인 달러 약세로 전환되었지만, 이로 인해 미국 측의 대일 수출은 기대만큼 늘어나지 않았다.

미국의 대일 적자는 계속 확대되었고, 미국 내에서는 더욱 일본의 무역 장벽에 대한 비판이 거세졌다. 미국은 일본이 금융, 관세 등 세제, 소프트웨어 등 많은 분야에서 수많은 장벽을 구축하고 있다고 강력하게 압박했고, 일본 측은 그때마다 미국 측에 타협안을 제시했지만 미국 측은 형식적인 불충분한 양보로 보고, 미일 간의 인식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다.

이 시기의 미국으로부터 "일본은 자유 무역을 내세우는 경제 대국이면서 실제로는 보호주의적으로 행동하며 자국 시장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고 있다"라는 이중적인 비판, 속셈과 겉치레를 구분하여 사용한다는 비판에 대해 일본 측도 납득하지 못했고, 메이드 인 USA가 선택받지 못하는 것은 일본 측의 발전에 의해 일본 제품이 미국 제품의 질을 전체적으로 능가하게 되었고, 소비자에게 조악한 미국 제품을 선택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라는 시각이 강했다. 일본 측에서는 미국 측의 요구에 대해, 생산성이 낮은 미국 산업의 문제를 제쳐두고 국력의 차이를 배경으로 일본에 억지를 부리고 있다고 이해했으며, 터무니없는 강매라고 여겼지만, 내수 확대를 반복적으로 약속했다.

1985년이 되자 미국의 경기 역시 눈에 띄게 개선되었지만, 일본의 호황은 그 이상으로 두드러졌고 (버블 경제) 미국에서는 20년 동안 막대한 대일 적자가 지속되는 데다 GDP 대비 경상 수지 적자가 사상 최고를 기록하면서, 대일본 심리에 뚜렷하게 완화되는 부분은 없었다. 이 시기에는 할리우드 영화에서도 일본 측이 일본 때리기라고 받아들이는 묘사가 드물지 않았고, 1985년부터 제작이 시작된 워너 영화에서도 등장인물이 일본산 전자 제품을 험담하는 대사가 보인다. 1987년 4월에는 미국 정부가 일본의 덤핑을 이유로 일본산 개인용 컴퓨터컬러 텔레비전 등에 이례적으로 100%의 제재 관세를 부과했다[4][5]

미국 의회에서는 보복 조치가 심의되었고, 1987년에는 도시바 코콤 사건을 계기로 일본 제품을 의원이 파괴하는 퍼포먼스도 주목을 받았다. 도시바 코콤 사건이 미국에서 큰 반응을 불러일으킨 것도 당시의 대일 감정 악화 때문이라고 한다. 1988년에는 미국 측이 불공정하다고 간주한 일본 측의 관행에 강력한 제재를 가할 수 있도록 1974년 통상법의 개정도 이루어졌다.

결국, 미국에서 일본에 대한 흑자를 줄이라는 요구는 1980년대 말에 완화되었지만, 버블 붕괴까지 이어졌다.

제너럴 모터스의 기업 도시인 디트로이트에서는 공장 노동자들이 아시아계에 대해 비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등, 재팬 배싱을 발단으로 한 차별 감정이 깊이 남아 있다[6][7]

2. 3. 1987년 도시바-코콤 사건과 미국의 대일 제재 강화

동시바 기계 코콤 위반 사건 참고.

1987년에 동시바 기계가 소련 기술 기계 수입 공단과의 거래에서 대공산권 수출 통제 위원회(약칭 '코콤'. 1994년 해산) 협정을 위반한 사실이 드러났다. 거액의 대일 적자에 대한 불만이 계속되던 중 발생한 이 사건으로, 백악관 앞에서 미국 의회 의원들이 동시바의 라디오 카세트나 텔레비전 수상기망치로 부수는 퍼포먼스를 벌이는 사태까지 발생했다.[1]

3. 주요 사례

1980년대 미국에서는 미일 무역 마찰이 심화되면서 반일 감정이 고조되었다. 1982년에는 중국계 미국인 기술자 빈센트 친이 일본인으로 오해받아 백인들에게 구타당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3] 이는 당시의 격렬했던 재팬 배싱 분위기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도시바 코콤 사건을 계기로 미국 의원들이 일본 제품을 파괴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4][5] 이는 미국 사회에 팽배했던 반일 감정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제너럴 모터스의 기업 도시인 디트로이트에서는 공장 노동자들이 아시아계에 대해 비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등, 재팬 배싱을 발단으로 한 차별 감정이 깊이 남아 있다.[6][7]

이후 일본의 경제력이 쇠퇴하자, "재팬 패싱"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기도 했다. 1998년 빌 클린턴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일본을 방문하지 않고 귀국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8][9]

3. 1. 미일 무역 마찰

1970년대 미국 경제가 인플레이션과 경기 침체로 어려움을 겪는 동안 일본은 세계 2위의 GDP를 기록하며 경제 성장을 지속했고, 대미 무역은 10년 이상 흑자를 유지했다. 일반적으로 이 시기의 엔화는 실력 이상으로 저평가되었다고 여겨졌고, 이로 인해 미국 내 대일 감정은 악화되었다.[2]

세계 수출을 계속 늘리는 일본에 대해 미국 측에서는 무역 관계자들이 통상산업성을 "노토리어스 미티(Notorious MITI, 악명 높은 통상성)"라고 표현하거나 『일본은 넘버원』이라는 서적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등 "놀라운 성공을 거듭하는 일본 경제"에 대한 관심이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갈리며 높아졌다.

1980년 미국 대통령이 카터에서 레이건으로 교체되었지만, 제너럴 모터스가 생산 규모를 대폭 줄이고 구조 조정을 하는 등[2] 미국 경제의 빠른 개선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실업률은 일시적으로 10%에 육박했다.

대미 무역에서 막대한 흑자를 계속 확대하는 일본은 호황을 누렸고, 1960년대부터 대일 적자를 지속하는 미국은 불황에 빠졌으며, 미국의 자동차 회사들은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에 걸쳐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러한 대비는 미국인들의 대일 감정을 악화시켰고, 미국에서는 일본 시장의 특수성을 비관세 장벽으로 간주하고, 극단적인 엔화 약세를 문제 삼아 "교활한 일본"으로 보는 논의가 지지를 얻게 되었다. 반일 감정이 고조되면서 1982년에는 중국계 미국인 기술자 빈센트 친이 일본인으로 오해받아 3명의 백인에게 구타당해 살해당하는 사건도 일어났다.[3]

불황과 반일 여론의 고조, 각 업계의 압력을 배경으로 미국 연방 정부는 일본 정부에 시장 개방, 수입 확대를 강력하게 요구했고, 미국의 수출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일본 측의 환율, 업계 관행, 관세를 차례로 문제 삼았다. 일본 측은 이에 대해 수출의 자율 규제를 약속하거나, 농산물 수입 확대를 약속하거나, 관세 인하를 약속하는 등 반복적으로 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려 했지만, 시장 점유율을 일본 제품에 빼앗긴 미국 업계 단체는 잇따라 일본을 덤핑 등의 법령 위반으로 제소했고, 대일 감정은 개선되지 않았다.

미국의 경상 수지가 적자가 되자, 일본이 불공정한 무역 장벽을 구축하고 있다는 비판이 1984년에도 다시 강력해졌고, 일본은 미국의 대일 감정 악화를 완화하는 동시에 자국 산업도 보호하고자, 엔화 약세 시정 및 수입 확대를 약속하고 시장 개방을 위한 규제 완화를 약속했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1985년에는 선진국 정상 회의의 재무 장관·중앙 은행 총재 회의에서 환율을 달러 약세로 유도하는 플라자 합의가 실시되었고, 달러/엔 환율은 대폭적인 달러 약세로 전환되었지만, 이로 인해 미국 측의 대일 수출은 기대만큼 늘어나지 않았다.

미국의 대일 적자는 계속 확대되었고, 미국 내에서는 더욱 일본의 무역 장벽에 대한 비판이 거세졌다. 미국은 일본이 금융, 관세 등 세제, 소프트웨어 등 많은 분야에서 수많은 장벽을 구축하고 있다고 강력하게 압박했고, 일본 측은 그때마다 미국 측에 타협안을 제시했지만 미국 측은 형식적인 불충분한 양보로 보고, 미일 간의 인식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다.

이 시기의 미국으로부터 "일본은 자유 무역을 내세우는 경제 대국이면서 실제로는 보호주의적으로 행동하며 자국 시장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고 있다"라는 이중적인 비판에 대해 일본 측도 납득하지 못했고, 메이드 인 USA가 선택받지 못하는 것은 일본 제품이 미국 제품의 질을 전체적으로 능가하게 되었고, 소비자에게 조악한 미국 제품을 선택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라는 시각이 강했다. 일본 측에서는 미국 측의 요구에 대해, 생산성이 낮은 미국 산업의 문제를 제쳐두고 국력의 차이를 배경으로 일본에 억지를 부리고 있다고 이해했으며, 터무니없는 강매라고 여겼지만, 내수 확대를 반복적으로 약속했다.

1985년이 되자 미국의 경기 역시 눈에 띄게 개선되었지만, 일본의 호황은 그 이상으로 두드러졌고 (버블 경제) 미국에서는 20년 동안 막대한 대일 적자가 지속되는 데다 GDP 대비 경상 수지 적자가 사상 최고를 기록하면서, 대일본 심리에 뚜렷하게 완화되는 부분은 없었다. 이 시기에는 할리우드 영화에서도 일본 측이 일본 때리기라고 받아들이는 묘사가 드물지 않았고, 1985년부터 제작이 시작된 워너 영화에서도 등장인물이 일본산 전자 제품을 험담하는 대사가 보인다. 1987년 4월에는 미국 정부가 일본의 덤핑을 이유로 일본산 개인용 컴퓨터컬러 텔레비전 등에 이례적으로 100%의 제재 관세를 부과했다.[4][5]

미국 의회에서는 보복 조치가 심의되었고, 1987년에는 도시바 코콤 사건을 계기로 일본 제품을 의원이 파괴하는 퍼포먼스도 주목을 받았다. 도시바 코콤 사건이 미국에서 큰 반응을 불러일으킨 것도 당시의 대일 감정 악화 때문이라고 한다. 1988년에는 미국 측이 불공정하다고 간주한 일본 측의 관행에 강력한 제재를 가할 수 있도록 1974년 통상법의 개정도 이루어졌다.

결국, 미국에서 일본에 대한 흑자를 줄이라는 요구는 1980년대 말에 완화되었지만, 버블 붕괴까지 이어졌다.

제너럴 모터스의 기업 도시인 디트로이트에서는 공장 노동자들이 아시아계에 대해 비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등, 재팬 배싱을 발단으로 한 차별 감정이 깊이 남아 있다.[6][7]

그 후 일본의 경제력이 쇠퇴하자, 이를 비꼬아 "재팬 패싱" 등으로 불리게 되었다.[8] 1998년 빌 클린턴 대통령이 방중했을 때, 일본에 들르지 않고 귀국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9]

3. 2. 미일 슈퍼컴퓨터 무역 마찰

미일 무역 마찰, 미일 슈퍼컴퓨터 무역 마찰, IBM 산업 스파이 사건

3. 3. IBM 산업 스파이 사건

IBM industrial espionage incident영어은 미일 무역 마찰의 대표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이다. 이 사건은 미국 기업 IBM의 산업 스파이 활동과 관련된 것으로, 일본 기업들의 기술 정보를 빼내려 한 혐의로 여러 명이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당시 미국일본 간의 첨예한 무역 갈등을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미일 슈퍼컴퓨터 무역 마찰과도 연관되어 있다.

3. 4. 포경 문제

일본의 상업 포경은 환경 보호 단체에 의해 비난받았다. 다양한 환경 보호 단체와 동물 애호 단체, 그리고 이들 단체가 옹호하는 환경 로비스트가 포경 비판 캠페인을 실시했다. 게다가 경제 마찰 문제까지 불거지면서, 이 상황에 편승한 자동차 산업 단체와 농산물 생산자 등을 끌어들여 대규모 반일 캠페인이 곳곳에서 개최되었다. 이 중에는 일장기를 불태우거나, 일본산 승용차를 망치로 부수는 등의 과격한 퍼포먼스가 행해졌다.[10]

이러한 압력 속에서 일본은 상업 포경을 사실상 무기한 중단했고, 2018년에 국제 포경 위원회를 탈퇴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3. 5. 슈퍼 301조

미국 의회는 재팬 배싱의 유행 속에서 수입 관세 대폭 인상을 무기로 한 슈퍼 301조를 가결하여 일본에 시장 개방을 요구했다. 일본 측은 쇠고기 및 감귤류 관세 축소를 불가피하게 되었다.[1]

하지만 동시에 호주, 캐나다, 중국 등도 대일 수출을 확대했기 때문에 미국의 식량 생산자가 기대한 만큼 대일 무역이 증대되지 않았고, 미국 이외의 국가와 일본의 식량 시장을 분배하는 결과로 끝났다.[1] 또한 일본에 수입되는 자동차에 대한 엄격한 규제도 완화되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일본에 유럽 자동차의 수입 확대를 가져오는 결과가 되었다.[1]

4. 비판과 영향

1970년대 미국 경제가 인플레이션과 경기 침체로 어려움을 겪는 동안, 일본은 경제 성장을 지속하며 대미 무역에서 흑자를 기록했다. 이로 인해 미국 내에서는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커졌다. 1980년대 미국 경제가 개선되지 않고 실업률이 높아지면서, 일본에 대한 반감이 더욱 심화되었다.

미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 시장 개방과 수입 확대를 요구했고, 일본은 이에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미국 업계의 불만은 가라앉지 않았다. 미국의 경상 수지 적자가 계속되자, 일본의 무역 장벽에 대한 비판은 더욱 거세졌다. 미국은 일본이 금융, 관세 등 여러 분야에서 장벽을 구축하고 있다고 압박했고, 일본은 타협안을 제시했지만, 미일 간의 인식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다.

미국은 "일본이 자유 무역을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보호주의적으로 행동한다"고 비판했지만, 일본은 "미국 제품이 일본 제품보다 품질이 떨어지기 때문에 선택받지 못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일본은 미국의 요구가 억지라고 생각했지만, 내수 확대를 약속하며 갈등을 완화하려 했다.

1985년 플라자 합의를 통해 달러 약세가 유도되었지만, 미국의 대일 수출은 크게 늘지 않았다. 1987년에는 미국 정부가 일본산 개인용 컴퓨터컬러 텔레비전 등에 100%의 제재 관세를 부과하는 등[4][5] 양국 간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미국 의회에서는 도시바 코콤 사건을 계기로 일본 제품을 파괴하는 퍼포먼스가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미국에서 일본에 대한 흑자를 줄이라는 요구는 1980년대 말에 완화되었지만, 버블 경제 붕괴까지 이어졌다. 제너럴 모터스의 기업 도시인 디트로이트에서는 아시아계에 대한 차별 감정이 남아있기도 하다.[6][7]

4. 1. 일본 내 반발

이시하라 신타로를 필두로 하는 반미 보수 세력은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불평만 한다"며 비판했다.[11]

미국 출신 실업가 빌 토튼(2006년 일본으로 귀화)은 이러한 일련의 재팬 배싱을 '패자의 시끄러움'이라고 단정하며, 동명의 (부제) 저서를 출간했다. 또한 그는 재팬 배싱뿐만 아니라, 일본 정부의 미국 추종 정책에 대해서도 이후 저서[12]에서 엄격하게 비판하고 있다.

4. 2. 재팬 패싱

일본의 경제력이 쇠퇴하면서 '재팬 배싱' 대신 이를 비꼬는 '재팬 패싱'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8] 1998년 빌 클린턴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일본을 거치지 않고 귀국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9]

5. 관련 작품


  • 시스템 소프트에서 1992년 3월 27일에 발매한 정치 시뮬레이션 소프트웨어 "재팬 배싱"은 미국 측 담당자가 되어 일본 측에 불합리한 요구를 받아들이게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 터커 (영화)는 종전 직후 시대를 묘사하고 있어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제작 당시 문제화되었던 미일 무역 마찰이 영향을 미쳤다고 여겨진다. 특히 "장래에 미국인이 (국내 신규 진출 제조업체에 대한 불관용이나 신기술 도입이 진행되지 않는 경직된 미국 자동차 기업을 외면하고) 자동차를 패전국(일본, 독일, 이탈리아)에서 사는 것이 당연하게 될 위험성이 있다"는 인상적인 대사가 있다.
  • 간호는 1986년에 제작된 론 하워드 감독, 마이클 키튼 주연의 코미디 영화이다. 주요 테마는 일본 제조업체의 미국 진출이지만, 미일 무역 마찰도 시나리오 배경에 있다.
  • 로보캅 3에서는 "로보캅"을 개발한 기업이 일본 기업에 인수되었다는 설정이 등장한다.
  • 다이 하드 시리즈 1편에는 "일계 기업 나카토미 상사"라는 설정이 나오는데, 이는 이 시대의 일본관을 배경으로 한다.
  • 파이널 파이트는 1989년 아케이드 게임으로, 보너스 스테이지에서 파괴하는 차에 "JAPAN"이라고 쓰인 번호판이 붙어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ジャパンバッシングとは? 意味や使い方 - コトバンク https://kotobank.jp/[...]
[2] 문서 アメリカの自動車産業は1970年代から、低価格・低燃費の日本車の輸入により、打撃を被っていた。
[3] 문서 ビンセント・チン殺害事件
[4] 웹사이트 「米中貿易&ハイテク戦争」はどうなる? 「日米半導体摩擦」を振り返る https://www.sangyo-t[...] 電子デバイス産業新聞 2018-10-12
[5] 웹사이트 【米中貿易戦争】土壇場で中国が強硬に出た2つの理由——中国側は持久戦の構え https://www.business[...] ビジネスインサイダー 2019-05-15
[6] 문서 デトロイト大都市圏における日本人の歴史も参照。
[7] 뉴스 アメリカで広がる都市間格差 将来の日本も?|NHK NEWS WEB https://web.archive.[...]
[8] 웹사이트 「なぜ日本企業は世界を制覇できたのか? 」「なぜ今、世界に通用しなくなったのか?」 をちゃんと考えてみた|bellFace 中島一明 https://note.com/kaz[...]
[9] 웹사이트 ジャパン・パッシング|証券用語解説集|野村證券 https://www.nomura.c[...]
[10] 서적 鯨捕りよ、語れ! 아트デイズ 2007
[11] 서적 「NO」と言える日本 광문사 1989
[12] 서적 日本は悪くない―アメリカの日本叩きは「敗者の喧噪」だ 고마서방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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