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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트리다테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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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트리다테스 3세는 고대 이란의 태양신 미트라에서 유래된 이름을 가진 인물로, 파르티아 제국의 왕이었다. 그는 아버지 프라아테스 3세를 동생 오로데스 2세와 함께 살해하고 왕위를 계승했지만, 권력 다툼으로 인해 로마로 망명했다. 로마의 지원을 받아 유프라테스 강까지 진군했으나, 로마의 철수 후 메소포타미아를 정복하고 셀레우키아에서 잠시 왕위를 회복했다. 그러나 오로데스 2세의 군대에 의해 패배하여 기원전 54년에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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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트리다테스 3세
기본 정보
미트리다테스 4세의 주화
칭호위대한 왕
왕중왕
아르사케스
로마자 표기Mihrdāt
통치
작위파르티아 제국의 왕
통치 기간기원전 57년 – 기원전 54년
선임자프라아테스 3세
후임자오로데스 2세
왕조
왕조아르사케스 왕조
개인 정보
아버지프라아테스 3세
종교조로아스터교
사망일기원전 54년

2. 어원

'미트리다테스'는 고대 이란의 태양신인 미트라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미트라에게서 주어진"을 의미하는 이란어 이름 '미흐르다트'의 그리스어 표기이다.[1] 이 이름은 고대 이란어 ''Miθra-dāta-''에서 파생되었다.[2]

3. 생애

프라아테스 3세의 아들인 미트리다테스 3세는 동생 오로데스 2세와 함께 아버지를 살해했다.[1] 이후 왕위를 두고 형제간의 갈등이 벌어졌다. 화폐학적 증거에 따르면 미트리다테스 3세가 왕위를 계승한 것으로 보이나, 귀족들의 미움을 받아 파르티아 원로원에 의해 추방되고 오로데스 2세가 왕위에 올랐다.[3][4]

미트리다테스 3세는 로마의 아울루스 가비니우스에게 의탁하여 영토 회복을 위한 지원을 요청했다. 가비니우스는 이를 승낙하고 유프라테스 강까지 진군했으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가 더 큰 금액으로 복위 지원을 요청하자 이집트로 방향을 틀었다.[3][4]

결국 미트리다테스 3세는 단독으로 파르티아를 되찾기 위해 바빌론과 수도 셀레우키아를 정복하고 화폐를 주조했다. 그 화폐에는 운명의 여신 튀케가 승리의 종려나무 잎을 들고 새 통치자를 환영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수레나스가 이끄는 오로데스 2세의 군대가 셀레우키아를 탈환했고, 바빌론은 장기간의 포위로 기아 상태에 빠져 항복했다. 미트리다테스 3세는 혈육을 믿고 오로데스 2세에게 항복했지만, 오로데스 2세는 그를 적으로 간주하여 처형했다. 오로데스 2세는 미트리다테스 3세가 발행한 화폐를 모두 몰수하여 다시 주조하고, 셀레우키아가 굴복하여 무릎을 꿇고 오로데스 2세가 오른손을 내밀어 일으켜주는 도안을 새겨 넣었다.[3][4]

3. 1. 초기 생애와 왕위 계승

프라아테스 3세의 아들인 미트리다테스 4세는 아버지의 통치 기간 동안 미디아 지역의 지배자였다.[1] 기원전 57년, 미트리다테스 4세는 동생 오로데스와 함께 아버지를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1] 그러나 두 형제는 곧 불화하게 되었고, 오로데스는 수렌 가문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1]

귀족들에게 미움을 받던 미트리다테스 3세는 파르티아 원로원에 의해 추방되었고, 오로데스 2세가 그 자리에 앉혀졌다.[3][4]

3. 2. 오로데스 2세와의 권력 투쟁

프라아테스 3세의 아들인 미트리다테스 4세는 오로데스 2세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를 살해했다.[1] 그러나 두 형제는 곧 불화하게 되었고, 오로데스는 수렌 가문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1] 그들은 서로에 대한 우위를 나타내기 위해 모두 왕중왕 칭호를 사용했다.

이로 인해 칭호의 의미가 바뀌었다. 원래 다른 왕국에 대한 정치적 지배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던 이 칭호는 왕족 내에서 권력과 정통성의 상징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미트리다테스 4세는 파르티아에서 로마 시리아로 도망쳐야 했다. 그는 시리아의 로마 총독이자 총독인 아울루스 가비니우스에게 피신했다. 그 후 미트리다테스 4세는 가비니우스의 지원을 받아 파르티아를 침공하기 위해 돌아왔다. 로마 총독은 미트리다테스 4세와 함께 유프라테스 강까지 진군했지만, 다른 통치자인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이집트의 왕좌에 복위시키기 위해 돌아섰다.

로마의 지원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미트리다테스 4세는 메소포타미아로 진격하여 바빌로니아를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오로데스를 몰아내고 기원전 55년 왕위를 잠시 회복하여 기원전 54년까지 셀레우키아에서 동전을 주조했다.

그러나 미트리다테스 4세는 오로데스의 장군인 수레나에 의해 셀레우키아에서 포위되었고, 오랜 저항 끝에 오로데스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했다. 미트리다테스 4세는 이후 기원전 54년에 오로데스에 의해 처형되었다.[3][4]

3. 3. 로마와의 관계와 파르티아 침공

미트리다테스 4세는 로마 시리아로 도망쳐 시리아의 로마 총독이자 집정관인 아울루스 가비니우스에게 피신했다.[1] 이후 가비니우스의 지원을 받아 파르티아를 침공하기 위해 돌아왔다. 로마 총독은 미트리다테스 4세와 함께 유프라테스 강까지 진군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이집트의 왕좌에 복위시키기 위해 돌아섰다.[1]

로마의 지원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미트리다테스 4세는 메소포타미아로 진격하여 바빌로니아를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오로데스를 몰아내고 기원전 55년 왕위를 잠시 회복하여 기원전 54년까지 셀레우키아에서 동전을 주조했다.[1]

미트리다테스 3세는 로마의 장군 아울루스 가비니우스에게 잃어버린 영토 회복에 대한 원조를 요청했고, 가비니우스는 이를 승낙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 역시 가비니우스에게 복위를 위한 원조를 요청했고, 더 큰 금액을 제공했기 때문에 가비니우스는 이집트로 방향을 전환했다. 미트리다테스 3세는 기원전 55년까지 가비니우스에 종군했지만, 결국 포기하고 단독으로 파르티아를 되찾기 위해 바빌론과 수도 셀레우키아를 정복하고, 그곳에서 화폐를 주조했다.[3][4]

3. 4. 최후

오로데스 2세의 장군 수레나는 셀레우키아에서 미트리다테스 4세를 포위했고, 오랜 저항 끝에 미트리다테스 4세는 오로데스 군대와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했다.[1] 이후 미트리다테스 4세는 기원전 54년에 오로데스 2세에게 처형되었다.[1]

오로데스 2세는 미트리다테스 3세가 발행한 화폐를 모두 몰수하여 다시 주조했고, 셀레우키아가 굴복하며 무릎을 꿇고 오로데스 2세가 오른손을 내밀어 일으켜주는 도안을 새겨 넣었다.[3][4]

참조

[1] 인용
[2] 인용
[3] 서적
[4]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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