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나케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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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르나케스 2세는 폰토스 왕국의 왕자로, 아버지 미트라다테스 6세에게 반역하여 자살하게 하고 보스포로스 왕국의 왕위를 얻었다. 이후 카이사르의 내전 시기에 폰토스 왕국의 옛 영토를 되찾기 위해 로마와 대립하며 젤라 전투에서 패배했다. 보스포루스 왕국으로 돌아가 세력을 회복하려 했으나 반란으로 사망했다. 그의 삶은 비발디의 오페라 '파르나체' 등 여러 문화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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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나케스 2세 | |
---|---|
기본 정보 | |
이름 | 파르나케스 2세 |
원어 이름 | Φαρνάκης |
칭호 | 폰토스 왕 |
칭호 | 보스포로스 왕 |
![]() | |
생애 | |
출생 | 기원전 97년경 |
사망 | 기원전 47년 |
사망 장소 | 크림 반도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미트리다테스 6세 |
어머니 | 라오디케 (미트리다테스 6세의 누이) |
배우자 | 알려진 바 없음 |
자녀 | 듀나미스 다리우스 아르사케스 |
통치 | |
폰토스 왕 즉위 | 기원전 63년 |
폰토스 왕 퇴위 | 기원전 47년 |
폰토스 왕 이전 | 미트리다테스 6세 |
폰토스 왕 이후 | 다리우스 |
보스포로스 왕 즉위 | 기원전 63년 |
보스포로스 왕 퇴위 | 기원전 47년 |
보스포로스 왕 이전 | 미트리다테스 1세 |
보스포로스 왕 이후 | 미트리다테스 2세 |
기타 정보 | |
왕조 | 미트리다테스 왕조 |
2. 아버지에 대한 반역
파르나케스 2세는 아버지 미트라다테스 6세가 로마의 장군 폼페이우스에게 패배하여 보스포로스 왕국으로 밀려난 기원전 63년경,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었다. 당시 로마와의 오랜 전쟁에 지쳐 새로운 원정을 꺼리던 폰토스의 군사들 역시 파르나케스의 반역에 동조하였다.[4] 결국 아들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판티카파이움으로 쫓겨난 미트라다테스 6세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5][6]
파르나케스는 아버지의 시신을 폼페이우스에게 보내며 항복의 뜻을 전했다. 폼페이우스는 파르나케스를 로마의 친구이자 동맹으로 인정하고 보스포로스 왕국의 통치권을 부여했지만,[5][6] 이는 미트라다테스 6세가 다스렸던 광대한 영토에 비하면 크게 축소된 것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반역을 통해 왕위를 얻었으나, 그 대가로 로마에 종속되고 영토 또한 줄어든 셈이다.
2. 1. 폰토스의 상황
파르나케스 2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의 아버지 미트라다테스 6세는 로마에 맞서 세 차례 전쟁을 벌였으나, 결국 폼페이우스에게 패배하여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기원전 63년, 미트라다테스 6세가 폰토스에서 쫓겨나 보스포로스 왕국으로 피신했을 때, 파르나케스는 이미 30세였다.당시 미트라다테스 6세는 스키티아와 다뉴브 강을 건너거나(카시우스 디오의 기록), 혹은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그리스를 통해 이탈리아를 침공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고 전해진다(플로루스의 기록).[2][3] 아피아노스 역시 이탈리아 침공 계획을 언급했지만 구체적인 경로는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이 대규모 원정 계획은 이미 로마와의 오랜 전쟁에 지친 병사들에게 큰 불안감을 주었다.[4] 이러한 상황 속에서 파나고리아의 카스토르를 비롯한 여러 도시와 흑해 동쪽 해안의 성들이 미트라다테스에게 반란을 일으켰고, 곧이어 파르나케스 2세 자신도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었다.[4]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파르나케스는 아버지에 대항하는 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되었으나 처형은 면했다. 아버지의 분노를 두려워한 파르나케스는 원정에 부담을 느끼던 병사들의 심리를 이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로마 탈영병들을 설득하고 다른 진영에도 사람을 보내 봉기를 유도했다. 결국 군대는 파르나케스를 왕으로 추대했고, 미트라다테스 6세는 도망쳤다. 아들에게 안전한 퇴로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미트라다테스는 독약을 마셔 자살을 시도했다. 평소 독에 대한 내성을 길러왔기에 독이 듣지 않자, 그는 부하 장교에게 자신을 죽이도록 명령하여 생을 마감했다. 파르나케스는 아버지의 시신을 방부 처리하여 폼페이우스에게 보내며 항복의 뜻을 전했고, 보스포로스 왕국의 통치권을 인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 폼페이우스는 파르나케스를 로마의 친구이자 동맹으로 인정하고, 미트라다테스에 대항하여 처음 반란을 일으킨 파나고리아를 제외한 보스포로스 왕국의 지배권을 부여했다.[5]
카시우스 디오의 기록은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그는 미트라다테스의 입지가 약해지자 측근들과 병사들 사이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고, 미트라다테스는 의심만으로 아들들을 포함한 여러 사람을 처벌했다고 전한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파르나케스가 로마로부터 왕위를 약속받을 것을 기대하며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파르나케스는 아버지를 체포하러 온 경비병들과 판티카파이움으로 진격하는 도중 마주친 아버지의 군대까지 설득하여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판티카파이움이 항복하자 파르나케스는 아버지를 처형했다고 디오는 기록한다 (디오는 미트라다테스가 독살 시도 실패 후 자신에게 다가온 병사들과 싸우다 죽었다고도 전한다). 이후 파르나케스는 아버지의 시신을 폼페이우스에게 보내고 항복했으며, 폼페이우스는 그에게 보스포로스 왕국을 하사하고 로마의 '친구이자 동맹'으로 인정했다.[6]
이와 대조적으로, 페스투스는 폼페이우스가 보스포로스와 콜키스에 아리스타르쿠스를 왕으로 세웠다고 기록하기도 했다.[7]
왕위를 확보한 파르나케스는 파나고리아와 보스포로스 인근 마을들을 포위 공격했다. 식량이 부족해진 파나고리아인들이 항전했으나 패배했다. 파르나케스는 그들을 해치지 않고 친구 관계를 맺은 뒤 인질을 받고 물러났다. 아피아노스는 이 사건이 파르나케스가 훗날 아나톨리아를 침공하기 오래 전에 일어난 일이라고 언급했다.[8] 결국 파르나케스는 아버지에게 반역하고 로마에 항복하는 대가로 왕위를 유지했지만, 그가 다스리게 된 왕국은 아버지 시대에 비해 훨씬 축소된 영토였다.
3. 카이사르와의 전쟁
기원전 49년 로마 공화정에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를 중심으로 한 로마 원로원 사이에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하자, 파르나케스 2세는 이를 기회로 삼았다. 그는 아버지 미트리다테스 6세 시절 폰토스 왕국의 영광을 되찾는다는 명분 아래 주변 지역을 침공하기 시작했다. 카시우스 디오에 따르면 파르나케스는 먼저 콜키스를 손쉽게 점령했으며, 갈라티아와 소(小) 아르메니아의 왕 데이오타루스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소아르메니아와 카파도키아 일부, 그리고 로마의 비티니아와 폰토스 속주에 속했던 옛 폰토스 영토의 도시들을 점령했다.[17] 그는 흑해 남부 연안의 주요 도시인 시노프와 아미수스 등을 함락시키고 약탈했으며, 아미수스에서는 군 복무 가능 연령의 남성들을 모두 살해하고 주민들을 노예로 팔거나 소년들을 거세하는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고 전해진다.[11]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에게 승리한 카이사르는 이집트로 향하면서 부관 도미티우스 칼비누스에게 3개 군단을 주어 소아시아에서 파르나케스를 견제하도록 했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이집트 내전에 휘말리자, 도미티우스 휘하의 2개 군단을 이집트로 보내도록 명령했다. 병력이 약화된 도미티우스는 데이오타루스와 카파도키아의 왕 아리오바르자네스 3세의 지원군을 더해 파르나케스에 맞섰으나, 기원전 47년 소아르메니아의 니코폴리스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파르나케스에게 패배하고 아시아 속주로 후퇴해야 했다.[20] 이 승리로 파르나케스는 소아시아 지역의 상당 부분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집트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카이사르는 기원전 47년 6월, 직접 군대를 이끌고 파르나케스를 상대하기 위해 소아시아로 신속하게 진격했다. 파르나케스는 카이사르의 빠른 진군 속도에 불안감을 느끼고 외교 교섭을 시도했으나,[17][11] 카이사르는 이를 기만으로 간주하고 협상을 거부하며 진군을 계속했다.
결국 양군은 젤라(현재 터키의 질레)에서 맞붙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카이사르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 신속하고 결정적인 승리를 로마에 알리며 남긴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베니, 비디, 비키la)라는 말은 매우 유명해졌다.[10]
젤라 전투에서 참패한 파르나케스는 소수의 병력과 함께 간신히 보스포로스로 도망쳤다. 그는 그곳에서 세력을 회복하려 했으나, 자신이 부재중일 때 킴메르 보스포루스의 관리를 맡겼던 부하 아산드로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파르나케스는 아산드로스와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결국 살해당함으로써 그의 야망과 함께 카이사르와의 전쟁도 막을 내렸다.
3. 1. 젤라 전투
기원전 49년 로마 공화정에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사이에 내전이 발발하자, 파르나케스 2세는 아버지 미트리다테스 6세 시절의 영광을 재현하고 폰토스 왕국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자 군사를 일으켰다. 그는 흑해 남부의 주요 도시 시노프를 점령하고 카파도키아를 침공하는 등 세력을 확장했다.카이사르는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에게 승리한 후, 부관 도미티우스 칼비누스에게 3개 군단을 주어 소아시아로 보내 파르나케스를 견제하게 했다. 그러나 카이사르 본인이 이집트의 내전에 휘말리면서 도미티우스 칼비누스 휘하의 2개 군단을 알렉산드리아로 차출해야 했다. 군사력이 약화된 도미티우스 칼비누스는 파르나케스에게 패배하여 시리아로 후퇴했고, 파르나케스는 소아시아 지역의 상당 부분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집트 문제를 해결한 카이사르는 기원전 47년 6월, 직접 군대를 이끌고 파르나케스를 상대하기 위해 소아시아로 진격했다. 파르나케스는 처음에는 외교 교섭을 통해 시간을 벌려 했으나, 카이사르는 그의 의도를 간파하고 협상을 거부하며 진군 속도를 높였다. 역사가 카시우스 디오에 따르면, 파르나케스는 카이사르의 신속한 진격에 불안감을 느껴 자신이 폼페이우스와 동맹을 맺은 적이 없음을 강조하며 휴전을 제안했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이를 의심하면서도 평화를 원하는 척하며 기습 공격의 기회를 노렸다고 전해진다.[17] 아피아누스는 카이사르가 약 200 스타디아(약 3km) 거리까지 접근하자 파르나케스가 금관과 자신의 딸과의 혼인을 제안하는 사절을 보냈다고 기록했다. 카이사르는 군대 앞에서 사절과 대화하다가 파르나케스의 진영에 이르러 "이 살해범(파르나케스가 아버지를 배신한 것을 의미)에게 즉각적인 복수를 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외치며 전투를 시작했다고 한다.[11]
결국 양군은 젤라(현재 터키의 질레)에서 격돌했다. 카이사르의 기록에 따르면, 파르나케스는 아버지 미트리다테스 6세가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당시 로마군을 상대로 사용했던 젤라 근처 언덕의 요새화된 진영을 수리하여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카이사르는 밤중에 기습적으로 군대를 이동시켜 파르나케스의 진영과 가까우면서도 전략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신속하게 방어 진지 구축을 시작했다. 이를 본 파르나케스는 카이사르 군대가 아직 진지를 완성하지 못했다고 판단하고, 가파른 계곡을 넘어 언덕 위로 성급하게 공격을 감행했다. 이는 매우 무모한 결정이었으며, 예상치 못한 공격에 카이사르 군대는 잠시 혼란에 빠졌다. 특히 파르나케스의 낫이 달린 전차는 초반에 로마군 대열에 혼란을 야기했으나, 로마 보병들의 집중적인 투창 공격에 의해 곧 무력화되었다. 이후 벌어진 백병전에서 카이사르의 노련한 제6군단을 포함한 로마군은 압도적인 전투력을 발휘하여 파르나케스 군대를 격파했다. 로마군은 적을 언덕 아래로 밀어내고 적 진영까지 점령했으며, 파르나케스 군대는 대부분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다.[20]
플루타르코스는 카이사르가 3개 군단으로 파르나케스 군대를 전멸시키고 폰토스에서 몰아냈다고 기록했으며,[10] 수에토니우스는 카이사르가 "도착한 지 5일 만에, 그리고 적을 발견한 지 4시간 만에 단 한 번의 전투로" 파르나케스를 격파했다고 전투의 신속성을 강조했다.[18] 프론티누스는 카이사르가 언덕 위에 진형을 갖추고 투창 공격 후 빠르게 후퇴하는 전술을 사용하여 쉽게 승리했다고 설명했다.[19]
젤라 전투는 카이사르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고, 파르나케스는 소수의 병력과 함께 간신히 보스포로스로 도망쳤다. 카이사르는 이 극적인 승리를 로마에 있는 친구 아만티우스에게 알리면서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베니, 비디, 비키la)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10] 이는 전투의 신속함과 결정적인 승리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수에토니우스와 아피아누스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종종 폼페이우스가 파르나케스와 같은 비교적 약한 적들을 상대로 거둔 승리로 과분한 명성을 얻었다고 평가하며, 자신의 손쉬운 승리와 대비시켰다고 한다.[18][11]
파르나케스는 보스포로스로 돌아가 세력을 회복하려 했으나, 그의 부하였던 아산드로스가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이어진 전투에서 패배하고 살해당했다.
4. 몰락과 죽음
기원전 47년 젤라 전투에서 카이사르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하면서[12] (이는 카이사르의 유명한 보고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로 알려져 있다), 파르나케스 2세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패배 후 파르나케스는 기병 1,000명을 이끌고 시노페로 도망쳤다. 당시 직접 추격할 여유가 없었던 카이사르는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를 보내 파르나케스를 상대하게 했다. 결국 파르나케스는 시노페를 도미티우스에게 넘겨주었다. 도미티우스는 파르나케스가 기병들과 함께 떠나는 것을 허락했지만, 그의 군마들은 모두 죽여 군사력을 약화시켰다.[12]
이후 파르나케스는 자신의 왕국인 킴메리아 보스포로스로 돌아가, 그사이 왕위를 찬탈한 아산데르로부터 왕좌를 되찾으려 했다. 그는 스키타이인과 사르마티아인으로 군대를 재건하여 테오도시아와 수도 판티카파이움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아산데르는 즉시 반격에 나섰고, 이어진 전투에서 파르나케스는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군마 부족과 그의 군대가 도보 전투에 익숙하지 않았던 점이 패배의 주요 원인이었다. 파르나케스 2세는 이 전투 중에 사망했거나,[12] 혹은 크림 반도에서 찬탈자 아산데르에게 살해되었다고 전해진다.
파르나케스 2세는 사망 당시 50세였으며, 킴메리아 보스포로스의 왕으로 15년간 재위했다.[12] 역사가 스트라보은 아산데르가 파르나케스의 죽음 이후 보스포로스를 차지했다고 기록했다.[21] 한편, 카이사르는 파르나케스에게 잔혹함을 보인 아산데르를 응징하고자, 갈라티아의 테트라르키 직위와 왕의 칭호를 페르가몬의 미트리다테스에게 수여하고, 그가 아산데르를 상대로 전쟁을 벌여 킴메리아 보스포로스를 정복하도록 허락했다.[17] 이 미트리다테스는 이후 보스포루스의 미트리다테스 1세가 되었다.
5. 유산 및 평가
파르나케스 2세의 통치 기간(기원전 55년~기원전 50년)에 발행된 금화와 은화가 남아있다.[22] 한 예시로 앞면에는 파르나케스 2세의 초상이, 뒷면에는 반신상이며 사자발 의자에 앉아 삼각대 위에 월계수 가지를 든 아폴론이 묘사되어 있다. 아폴론의 왼쪽 팔꿈치는 옆에 있는 키타라에 기대고 있다. 아폴론 위와 그 사이에 그의 왕실 칭호가 그리스어로 새겨져 있는데, 이는 ΒΑΣΙΛΕΩΣ ΒΑΣΙΛΕΩΝ ΜΕΓΑΛΟΥ ΦΑΡΝΑΚΟΥel로 '대왕 파르나케스, 왕 중의 왕'을 의미한다.
기원전 1세기 초, 미트리다테스 6세는 사르마티아 부족과 동맹을 맺었고,[23] 아마도 이 동맹을 통해 파르나케스 2세는 (아마도 기원전 77년 이후)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사르마티아 귀족 여성과 결혼했다.[24] 그녀는 공주이거나, 사르마티아 통치 군주의 친족이거나, 영향력 있는 귀족일 가능성이 있다. 그의 사르마티아 출신 아내는 파르나케스 2세에게 아들 다리우스, 딸 디나미스, 그리고 아들 아르사케스를 낳았다. 파르나케스 2세가 자녀에게 붙인 이름은 그의 페르시아 및 그리스 유산과 조상을 나타낸다. 그의 아들들은 로마의 삼두정치 일원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 의해 그의 사후 한동안 폰토스 왕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딸 디나미스와 그녀의 가족은 그의 뒤를 이어 보스포루스 왕국을 통치했으며, 파르나케스 2세는 딸 디나미스를 통해 후손들이 보스포루스 왕국을 계속 다스리게 되었다.
5. 1. 문화적 영향
파르나케스 2세는 이탈리아어식 발음인 "파르나체"라는 이름으로 18세기의 오페라 세리아에 등장한다. 18세기 대본 작가 안토니오 마리아 루키니는 파르나케스 2세의 일생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바탕으로 한 대본을 만들었으며, 이 대본은 1727년 안토니오 비발디에 의해 오페라 《파르나체》(Farnace|파르나체ita)라는 제목으로 처음 작곡되었다. 이 작품은 재공연 횟수를 고려할 때, 비발디의 가장 성공적인 오페라 중 하나로 여겨진다. 이후 요제프 미슬리베체크도 루키니의 대본을 사용하여 1767년 《파르나체》를 작곡했다. 또한, 파르나케스 2세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오페라 《폰토의 왕 미트리다테》(1770년)의 주요 등장인물이기도 하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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