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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케메네스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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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케메네스 제국은 기원전 6세기부터 기원전 4세기까지 존재했던 페르시아 제국으로, 페르시아인에 의해 건국되었다. 키루스 2세는 메디아를 멸망시키고 리디아, 신 바빌로니아를 정복하며 제국의 기틀을 마련했고, 캄비세스 2세는 이집트를 병합하여 고대 오리엔트 세계를 통일했다. 다리우스 1세는 영토를 확장하고 행정 구역을 정비했으며, 페르세폴리스를 건설했다. 아케메네스 제국은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을 겪었으나, 내부 분열과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침공으로 멸망했다. 아케메네스 제국은 법 체계, 사회 구조, 문화, 군사 등 다양한 측면에서 독특한 특징을 가졌으며, 폰투스 왕국 등 후대 페르시아 왕조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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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케메네스 제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지도
기본 정보
공식 명칭아케메네스 제국
일반 명칭페르시아
시대고전 고대
정치 체제군주제
존속 기간기원전 550년–기원전 330년
건국 사건페르시아 반란
멸망 사건마케도니아에 의해 멸망
이전 국가메디아 제국
엘람
신바빌로니아 제국
리디아
리키아
이집트 제26왕조
키레나이카
간다라
소그디아나
마사게타이
페르시스
다음 국가마케도니아 제국
이집트 제28왕조
키루스 대왕의 표준 (아케메네스 제국)
키루스 대왕의 표준
수도바빌론
파사르가다이 (키루스 대왕)
엑바타나 (의례용)
수사 (다리우스 대왕)
페르세폴리스 (의례용)
공용어고대 페르시아어
아람어
사용 언어아카드어
엘람어
그리스어
메디아어
종교조로아스터교 (공식)
메소포타미아 종교
유대교
베다 힌두교
이집트 종교
그리스 종교
통화다릭
시글로스
군주 칭호군주
군주키루스 2세 (기원전 559–530년)
캄비세스 2세 (기원전 530–522년)
바르디야 (또는 가우마타) (기원전 522년)
다리우스 1세 (기원전 522–486년)
크세르크세스 1세 (기원전 486–465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기원전 465–424년)
크세르크세스 2세 (기원전 424년)
소그디아누스 (기원전 424–423년)
다리우스 2세 (기원전 423–405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기원전 405–358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 (기원전 358–338년)
아르세스 (기원전 338–336년)
다리우스 3세 (기원전 336–330년)
면적5,500,000 km²
면적 측정 년도기원전 500년
인구1700만 명 ~ 3500만 명
언어 표기𐎧𐏁𐏂 (고대 페르시아어)
Xšāça (로마자 표기)
'제국' 또는 '왕국' (번역)
멸망 원인알렉산드로스 3세의 정복 전쟁으로 멸망
주요 사건
리디아 정복기원전 547년
바빌론 정복기원전 539년
인더스 계곡 정복기원전 535–518년
이집트 정복기원전 525년
유럽 스키타이 원정기원전 513년
그리스-페르시아 전쟁기원전 499–449년
바빌로니아 반란기원전 484년
코린토스 전쟁기원전 395–387년
총독들의 반란기원전 372–362년
이집트 재정복기원전 343년

2. 역사

아케메네스 왕조의 명칭은 왕조의 시조인 아케메네스에서 유래한다. 외국의 문헌에서는 고대 페르시아어 발음에 따른 '''하카마니슈 왕조''' 또는 고전 그리스어 발음에 따른 '''아카이메네스 왕조''' 중 하나를 사용하고 있다. 이 왕조의 군주는 칭호로 '''대왕, 만왕의 왕''' (xšāyaθiya vazraka, xšāyaθiyānāmpeo)이라고 칭했다. 단순히 '''페르시아 왕국''' 또는 '''페르시아 제국'''이라고 할 경우 이 왕조나 3세기에 흥한 사산 왕조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수도 페르세폴리스 유적


기원전 7세기 후반, 페르시아인의 지도자이자 하카마니쉬의 아들 테이스페스(차이슈피)는 쇠퇴해 가던 아시리아에 압도당한 엘람 왕국의 도시 안샨을 정복했다. 테이스페스의 후손들은 안샨을 지배한 일족과 페르시아에 남은 일족으로 두 갈래로 나뉘었다. 아시리아의 쇠퇴와 함께 메디아 왕 아스티아게스(아르슈티·와이가?)는 바빌로니아를 제외한 아시리아 북부 영토 전체를 정복했다. 이 시대의 페르시아는 메디아에 속국이었다.

기원전 550년, 키루스 2세(쿠루)는 메디아 왕국에 반란을 일으켜 멸망시켰다. 이란 고원을 장악한 키루스는 리디아, 엘람, 신 바빌로니아를 멸망시켰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키루스는 마사게타이족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기원전 525년, 캄비세스 2세이집트(이집트 제26왕조)를 병합하여 '''고대 오리엔트 세계를 통일'''했지만, 에티오피아 침략에는 실패했다. 캄비세스 사후 마구스 가우마타가 잠시 실권을 잡았지만, 다리우스 1세를 비롯한 페르시아 귀족들에게 타도되었다.

다리우스 1세는 영토를 북서 인도에서 마케도니아·트라키아까지 확장하고, 20개 주로 나누어 사트라프(총독, 태수)를 배치했다. 다리우스 1세와 크세르크세스 1세고대 그리스 정복을 시도했으나(페르시아 전쟁), 칼리아스 조약으로 강화했다.

페르시아는 막대한 부와 페르세폴리스 건설 등으로 번영을 누렸고,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그리스 세계에 간섭하며 그리스인들 간의 싸움을 부추겼다. 그러나 내정에서는 기원전 4세기 소아시아 사트라프들의 반란에 시달렸다.

기원전 404년 다리우스 2세 사후 왕위 계승 싸움이 일어났고, 크세노폰은 그리스 패잔병들의 탈출기를 『아나바시스』에 남겼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와 아르세스는 환관에게 암살되었고, 다리우스 3세가 추대되었으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패배하여 기원전 330년 멸망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 3세의 딸과 결혼하고 아케메네스 왕조의 통치 제도를 계승하려 했다.

전통적으로 다리우스 1세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방계로 여겨졌으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키루스 2세의 직계가 아니며, 다리우스 1세가 왕위를 찬탈했기 때문에 초대부터 직계 왕조가 아니었다는 것이 거의 명확해졌다.[213] 아케메네스 왕조의 계보 자체가 다리우스 1세의 왕위 찬탈을 정당화하기 위한 날조라는 설도 있다.[214]

2. 1. 초기

기원전 691년, 엘람 왕국이 아시리아에 패해 멸망한 뒤, 아케메네스 왕조의 시조인 테이스페스 왕자는 안샨 시를 점령하고, 부친 아케메네스의 이름을 딴 왕조를 세웠다. 테이스페스는 왕국을 확장시켰으나, 그의 사후 왕국은 둘로 나뉘었다.

키루스 1세는 페르시아인들을 통합했으며, 그의 아들 캄비세스 1세는 메디아 왕국의 공주 만다네와 혼인하여 페르시아와 메디아를 통합했다. 캄비세스의 장남 키루스 2세는 주변국들을 점령하며 아케메네스 왕조의 초석을 마련하였으므로, 그가 즉위한 기원전 559년부터를 아케메네스 왕조의 시작으로 본다.

2. 2. 팽창기

키루스 2세는 기원전 555년에 메디아 왕국을 점령하고, 기원전 545년에는 소아시아를 점령했으며, 기원전 539년에는 신바빌로니아 제국을 멸망시켰다.[212] 이후 기원전 529년 아랄해 연안의 자카르테스(Jaxartes) 유역 스키타이 정벌에 나섰으나 전쟁 중 사망했다.[212] 그의 아들 캄비세스 2세(Kambyses II)가 왕위를 계승하여 이집트를 정복하였으나,[212] 원정에서 돌아오던 중 기원전 522년에 사망했다.[212]

캄비세스 2세를 도와 이집트 원정에 참가했던 다리우스 1세(Darius Ⅰ)가 가우마타를 죽이고 반란을 진압한 뒤, 기원전 521년에 왕위에 올랐다.[212] 다리우스 1세와 그를 계승한 크세르크세스 1세(Xerxses Ⅰ)의 통치 기간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전성기였다.[212]

다리우스 1세크세르크세스 1세의 통치기에 아케메네스 왕조는 동쪽으로는 히파시스 강에서 서쪽으로는 리비아까지, 남쪽으로는 아라비아 반도에서 북쪽으로는 캅카스산맥아랄해까지 영토를 확장했다.[212] 정복민에 대해서는 관대했으며, 각 지방마다 ‘사트라프’로 불리는 총독을 파견하고 왕의 직속 관리들이 총독을 감찰하도록 했다.[212] 왕의 비문은 고대 페르시아어, 엘람어, 아카드어의 3개 언어로 작성되었으나, 행정문서와 외교문서에는 아람어가 사용되었다.[212] 파사르가다에, 페르세폴리스 등의 수도에서 건축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다리우스 1세의 정복 활동을 묘사한 비수툰(Biston) 부조 등 뛰어난 예술 작품과 세공품들이 제작되었다.[212]

2. 3.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초기 단계의 사건들을 보여주는 지도


고대 키릭스(기원전 5세기)에 묘사된 그리스 호플리트와 페르시아 전사의 전투 장면


기원전 499년 이오니아 반란은 소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페르시아 지배에 대한 군사 반란으로, 기원전 493년까지 지속되었다. 이 반란은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이 페르시아가 임명한 폭군 통치에 불만을 품고, 밀레투스의 두 폭군 히스타이오스와 아리스타고라스의 행동이 주요 원인이었다. 기원전 499년, 밀레투스의 폭군 아리스타고라스는 자신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페르시아 사트라프 아르타페르네스와 함께 낙소스 정복을 위한 원정을 시작했으나 실패했다. 아리스타고라스는 곧 다가올 자신의 축출을 감지하고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1세에 대한 반란을 선동했다.

페르시아는 저항하는 서해안 도시들을 함락시키고, 기원전 493년 이오니아에 평화 협정을 강요했다. 이오니아 반란은 그리스와 아케메네스 제국 사이의 최초의 주요 분쟁이며,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첫 번째 단계이다. 소아시아는 페르시아에 다시 복속되었지만, 다리우스 1세는 아테네와 에레트리아에 대한 처벌을 결심했다.[61] 그는 그리스의 정치적 상황이 제국의 안정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여 그리스 정복을 계획했다. 첫 번째 원정은 발칸 반도의 영토를 제국에 복속시키는 것이었다.[62] 기원전 492년, 페르시아 장군 마르도니우스는 트라키아를 재정복하고 마케도니아를 종속국으로 만들었다.[62] 그러나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군은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군에 패배했고, 다리우스 1세는 사망했다.[63]

아케메네스 왕이 호플리트와 싸우는 모습, 킴메리아 보스포루스 인장과 인장 보관함.


다리우스 1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는 그리스 정복을 위해 대규모 침략을 조직했다. 기원전 480년 봄, 그의 군대는 북쪽에서 그리스에 진입하여 마케도니아와 테살리아를 거쳐 테르모필라이에서 그리스 부대에 의해 저지되었다. 아르테미시움에서 동시에 일어난 해전은 폭풍으로 인해 결정적인 결과를 내지 못했다. 그리스군은 테르모필라이 패배 소식을 듣고 후퇴했고, 페르시아는 아르테미시움과 에게 해를 장악했다.

테르모필라이 전투 승리 후, 크세르크세스는 아테네를 약탈하고 코린토스 지협과 사로니코스 만에서 그리스군을 만날 준비를 했다. 기원전 480년, 그리스군은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 함대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크세르크세스는 사르디스로 후퇴했다.[64] 마르도니우스가 이끄는 육군은 아테네를 재탈환했지만, 기원전 479년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격파되었다. 미칼레에서 페르시아의 패배는 소아시아 그리스 도시들의 반란을 일으켰고, 페르시아는 유럽 영토를 잃었으며, 마케도니아는 독립했다.[51]

2. 4. 쇠퇴기

크세르크세스 1세가 기원전 465년 후궁들의 음모로 암살당한 후, 후궁의 폐해는 점차 제국의 힘을 소모시켰다.[24]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기원전 424년 사망)는 크세르크세스 1세를 계승하여 통치하였는데, 이때부터 왕족 내부에 파벌이 형성되면서 제국이 분열되기 시작했다.[24] 그의 뒤를 이은 크세르크세스 2세는 소그드인에 의해 암살당했으며, 후계자 다리우스 2세 역시 그 정통성이 명확하지 않았다.[24] 이들의 통치기간에는 반란과 내분이 끊이지 않았고, 그리스 도시국가인 스파르타아테네 간의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년~기원전 404년)이 장기간 지속되었다.[24] 이 전쟁에서 페르시아는 처음엔 아테네와 협력했으나, 후에는 스파르타와 가까워졌다.[24] 결국 기원전 404년 페르시아의 지원과 스파르타의 막강한 병력으로 아테네는 몰락했다.[24]

다리우스 2세의 장남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재위 중 스파르타와 전쟁을 벌여 에게해의 지배권을 장악했다.[24] 그러나 기원전 405년 이집트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나, 적절히 대응하지 못해 이집트가 독립하는 계기가 되었다.[24] 기원전 359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계략, 술수, 하렘의 음모와 살인 속에서 즉위했다.[24] 그는 기원전 358년에 아나톨리아의 반란을 진압하고, 기원전 343년에 이집트를 다시 정복했다.[24] 또한 즉위 직후 내분의 원인이 되어온 많은 인척들을 척결했으나, 그 자신도 환관 바고아스에게 살해되었다.[24] 이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증손자이자 전 사트라프였던 다리우스 3세가 왕위를 계승했다.[24]

그러나 다리우스 3세(기원전 336년 즉위)는 마케도니아알렉산드로스 3세와의 전투에서 잇따라 패배했다.[24] 기원전 330년 4월, 수도인 페르세폴리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수중에 떨어졌으며, 같은 해 여름 다리우스 3세는 피난길에서 베수스에게 살해되었다.[24]

2. 5. 멸망

알렉산드로스 대왕(알렉산드로스 3세)은 기원전 334년 그라니쿠스에서, 기원전 333년 이수스에서, 마지막으로 기원전 331년 가우가멜라에서 페르시아 군대를 격파했다.[90] 그 후 그는 수사페르세폴리스로 진군하여 기원전 330년 초에 항복을 받아냈다.[90] 페르세폴리스에서 알렉산드로스는 북쪽으로 파사르가다이로 향했고, 그곳에서 ''키로파이디아''에서 들어본 적이 있는 키루스를 방문했다.[90]

기원전 1세기 폼페이 모자이크(나폴리 국립고고학박물관 소장)에 묘사된 이수스 전투. 왼쪽 말을 탄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오른쪽 전차에 탄 다리우스 3세


알렉산드로스의 페르시아 침공으로 인한 혼란 속에서 키루스의 무덤은 침입당했고 대부분의 귀중품은 약탈당했다. 알렉산드로스가 무덤에 도착했을 때 그는 그곳이 훼손된 방식에 경악했고 마고이들을 심문하고 재판에 회부했다.[87][88] 어떤 기록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가 마고이들을 재판에 회부한 것은 키루스의 무덤에 대한 염려를 보이는 것보다는 그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려는 시도였다.[89] 어찌되었든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아리스토불루스에게 무덤의 상태를 개선하고 내부를 복원하여 키루스에 대한 존경심을 보이도록 명령했다.[87] 그곳에서 그는 엑바타나로 향했는데, 다리우스 3세가 그곳에 피신해 있었다.[90]

다리우스 3세는 그의 박트리아 총독이자 친척인 베수스에게 포로로 잡혔다. 알렉산드로스가 다가오자 베수스는 그의 부하들에게 다리우스 3세를 살해하도록 명령했고, 알렉산드로스를 지연시키기 위해 다리우스의 시신을 길에 남겨둔 채 중앙아시아로 후퇴하기 전에 자신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로 선포하고 다리우스의 후계자로 선언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의 시신을 페르세폴리스로 옮겨 명예로운 장례식을 치렀다.[91] 베수스는 이후 그의 세력을 결집하여 알렉산드로스에 대항할 군대를 만들었다. 베수스가 제국의 동쪽에서 그의 동맹국들과 완전히 결합하기 전에,[91] 알렉산드로스는 베수스가 권력을 장악할 위험을 우려하여 그를 찾아내 그의 통제하에 있는 페르시아 법정에서 재판에 회부하고 "잔혹하고 야만적인 방식"으로 처형하도록 명령했다.[92]

3. 통치

아케메네스 왕조의 군주는 "대왕, 만왕의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이 왕조는 시조인 아케메네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외국 문헌에서는 고대 페르시아어 발음에 따라 '하카마니슈 왕조' 또는 고전 그리스어 발음에 따라 '아카이메네스 왕조'라고도 불린다.

키루스 2세사트라프 제도를 통해 지역 자치를 허용하는 방식으로 제국을 다스렸다. 각 지역은 '사트라프'(총독)가 통치했고, '장군'과 '국무장관'이 각각 군사와 행정을 담당하며 중앙 정부에 직접 보고했다.

다리우스 대왕은 각 지역의 생산력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는 제도를 정비했다. 예를 들어 바빌론은 가장 많은 세금을 냈고, 이집트는 '곡창지대'로 불리며 곡물을 제공했다.[111] 또한 '다타'(dāta)라는 보편적인 법 체계를 성문화하고 페르세폴리스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했다.[115][116]

제국의 법 체계는 각 지역의 관습법과 제국 전체에 적용되는 페르시아 법이 공존했다. 왕실 재판관은 왕에게 법률과 관습에 대해 조언했고, 각 주에서는 사트라프가 최고 재판권을 가졌다. 다리우스 1세는 조세 제도를 개혁하고 화폐와 도량형을 통일했다.[2]

3. 1. 개요

키루스 2세는 파사르가다이, 바빌론, 수사, 에크바타나의 네 개의 수도에서 통치하는 다중 국가 제국으로 아케메네스 제국을 건설하였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사트라프 제도라는 형태로 특정 수준의 지역 자치를 허용하였다. 사트라피아는 일반적으로 지리적 기반으로 조직된 행정 단위였다. '사트라프'(총독)는 지역을 통치하는 총독이었고, '장군'은 군대 모집을 감독하고 질서를 유지했으며, '국무장관'은 공식 기록을 보관하였다. 장군과 국무장관은 사트라프와 중앙 정부 모두에게 직접 보고하였다. 시대에 따라 20개에서 30개의 사트라피아가 있었다.[108][109][110]

다리우스 대왕은 각 도(satrapy)의 생산성과 경제적 잠재력에 따라 세금 제도를 정비하고 지속 가능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어, 바빌론은 가장 많은 양의 세금을 부과받았는데, 놀랍게도 다양한 상품(1,000 탈렌트의 은과 군대의 4개월치 식량)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인도는 이미 금으로 유명했고, 이집트는 풍부한 곡물로 알려져 있었다. 이집트는 페르시아 제국의 곡창지대였고(나중에는 로마 제국의 곡창지대가 됨), 700탈렌트의 은 외에 120,000단위의 곡물을 제공해야 했다. 이것은 지배받는 백성들에게만 부과된 세금이었다.[111]

다리우스 대왕 치세의 다른 업적으로는 '다타'(dāta)(후대 이란 법의 기초가 된 보편적인 법 체계)의 성문화와 페르세폴리스에 새로운 수도 건설이 있다.[115][116]

아케메네스 제국의 행정구역은 다음과 같다.


3. 2. 행정 구역

키루스 2세는 아케메네스 제국을 파사르가다이, 바빌론, 수사, 에크바타나의 네 개의 수도에서 통치하는 다중 국가 제국으로 건설하였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사트라프 제도라는 형태로 특정 수준의 지역 자치를 허용하였다. 사트라피아는 일반적으로 지리적 기반으로 조직된 행정 단위였다. '사트라프'(총독)는 지역을 통치하는 총독이었고, '장군'은 군대 모집을 감독하고 질서를 유지했으며, '국무장관'은 공식 기록을 보관하였다. 장군과 국무장관은 사트라프와 중앙 정부 모두에게 직접 보고하였다. 시대에 따라 20개에서 30개의 사트라피아가 있었다.[55][56][57][58][59][60]

아케메네스 제국의 주요 행정 구역(사트라피) 목록은 다음과 같다.



기원전 512~511년경 마케도니아 왕 암민타스 1세가 페르시아에 항복한 이후로 마케도니아인과 페르시아인은 더 이상 낯선 사이가 아니었다. 마케도니아의 정복은 다리우스 1세 (기원전 521~486년)가 기원전 513년 대대적인 준비 끝에 시작한 페르시아 군사 작전의 일부였다. 다리우스의 군대는 여러 트라키아 부족흑해 유럽 연안 지역의 거의 모든 지역, 즉 오늘날 불가리아, 루마니아, 우크라이나, 러시아의 일부 지역을 정복하고 소아시아로 돌아왔다.[51][52] 페르시아의 침략은 간접적으로 마케도니아의 부상으로 이어졌고, 페르시아는 발칸 반도에 일부 공통 관심사를 가지고 있었다. 페르시아의 지원으로 마케도니아는 파이오니아인과 그리스인과 같은 일부 발칸 부족을 희생하여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마케도니아는 "기꺼이 협조적인 유용한 페르시아 동맹국"이었다. 마케도니아 병사들은 크세르크세스 1세 (크세르크세스 대왕으로도 알려짐)의 군대에서 아테네와 스파르타와 싸웠다.[51]

3. 3. 법 체계

제국의 법 체계에는 각 지역 거주민족의 관습법과 제국 전체를 포괄하는 페르시아 법 등 2가지가 공존했다. 왕실재판관은 법률과 관습에 대해 왕에게 조언했다. 각 주에서는 사트라프가 최고재판권을 가지고 있었다. 다리우스 1세는 조세제도를 개혁하여 각 주에서 생산력에 따라 할당된 세액을 매년 금이나 은으로 지불하게 했다. 그리고 정확한 세액계산을 위해 화폐와 도량형을 통일했다.[2]

4. 사회

아케메네스 제국의 사회는 전사 및 귀족, 사제, 농민 및 유목민의 세 계급으로 구성된 봉건제적 질서 위에 부족제적 구조가 놓여 있었다. "왕 중 왕"이라는 칭호는 중앙 권력이 피라미드식 권력 구조를 통해 제국을 지배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회 권력 구조는 지배 권력의 요구와 피지배 민족들의 정치적 이상의 영향을 받아 변화했지만, 후대까지 페르시아 문화의 이상형으로 존중되었다.[61]

페르세폴리스에서 발견된 기록에 따르면, 왕족 여성의 계급은 왕의 어머니가 가장 높았고, 왕비, 왕의 딸, 왕의 첩, 그리고 다른 궁정 여성들이 그 뒤를 이었다.[188] 왕은 보통 왕족이나 중요한 페르시아 귀족 여성과 결혼했으며, 왕족은 친척과 결혼하는 것이 허용되었다.[188] 왕의 첩은 주로 노예, 포로, 외국 공주였으며, 외국인 첩과의 자녀는 왕위 계승권이 없었다.[188]

왕족 및 귀족 여성들은 광대한 토지와 작업장을 소유, 관리하고 많은 하인과 전문 노동자를 고용했으며,[191] 공개적으로 활동하고,[192] 남편과 함께 여행하고,[192] 사냥[193] 및 연회에 참석했다.[194]

4. 1. 사회 구조

사회 조직은 일반적으로 전사 및 귀족, 사제, 농민 및 유목민의 세 계급으로 이루어진 봉건제적 질서 위에 부족제적 구조가 횡적으로 놓인 형태였다. "왕 중 왕"이라는 칭호는 중앙 권력이 피라미드식 권력 구조를 통해 제국을 지배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회 권력 구조는 지배 권력의 요구와 피지배 민족들의 정치적 이상의 영향을 받아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후대까지 페르시아 문화의 이상형으로 존중되었다.[61]

4. 2. 여성의 지위

아케메네스 제국에서 여성의 지위는 그들이 속한 문화와 지역에 따라 달랐다. 페르시아 여성의 실제 지위는 페르세폴리스 요새 정제(PFT)를 통해 가장 잘 알 수 있는데,[188] 여기에는 왕족 여성부터 페르세폴리스에서 식량을 배급받는 여성 노동자까지 다양한 여성들이 묘사되어 있다.

페르시아 궁정에서 왕족 여성의 계급은 왕의 어머니가 가장 높았고, 왕비, 왕의 딸, 왕의 첩, 그리고 다른 궁정 여성들이 그 뒤를 이었다.[188] 왕은 보통 왕족이나 중요한 페르시아 귀족 여성과 결혼했으며, 왕족은 친척과 결혼하는 것이 허용되었지만, 이복형제보다 가까운 친족 간의 결혼 증거는 없다.[188] 왕의 첩은 주로 노예, 포로, 외국 공주였으며, 왕은 외국인 첩과는 결혼하지 않았고 그들의 자녀는 왕위 계승권이 없었다.[188]

그리스 자료는 왕이 하렘에 수백 명의 첩을 두었다고 주장하지만, 페르시아 궁정에 하렘이 있었다거나 여성을 남성과 격리했다는 고고학적 증거는 없다.[188] 왕족 여성들은 왕과 함께 아침, 저녁 식사를 하고 여행에 동행했으며,[188] 왕실 사냥과 연회에도 참여했을 수 있다.[188] 헤로도토스는 마케도니아 궁정의 페르시아 사절들이 연회에 여성이 참석할 것을 요구했는데, 이는 페르시아에서 여성이 연회에 참여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라고 한다.[188] 왕비는 왕의 접견에 참석했을 수 있으며,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적어도 여성 신청인에 대해서는 자신의 접견을 가졌다고 한다.[188] 궁정의 왕족 및 귀족 여성들은 남녀 직원을 동반하여 여행하고, 재산, 토지, 사업을 소유 및 관리했다.[188] 페르시아 여성들은 얼굴이나 머리카락을 가리지 않는 긴 드레스와 베일을 착용했으며, 베일은 머리 뒤쪽 목덜미에 장식으로 늘어뜨렸다.[188]

왕족과 귀족 여성들은 승마와 궁술 등 격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교육을 받았다.[189][190] 이들은 광대한 토지와 작업장을 소유, 관리하고 많은 하인과 전문 노동자를 고용했다.[191] 또한 공개적으로 나타나[192] 남편과 함께 여행하고,[192] 사냥에 참여하고[193] 연회에 참석했기 때문에[194] 남성과 격리되어 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195]

아케메네스 제국에서 여성이 군주섭정으로 통치한 적은 없지만, 아토사나 파리사티스와 같은 일부 왕비는 국가 일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행정이나 종교 의식에서 여성이 공무원으로 고용된 증거는 없지만, 페르세폴리스에서 남성과 함께 일하는 여성 노동자가 많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있다.[188] 여성은 ''arraššara pašabena''라는 직함으로 노동력의 지도자로 고용되어 남성 노동자보다 높은 급여를 받기도 했다.[188] 여성 노동자는 남성보다 급여가 적었지만, 기술 분야의 자격을 갖춘 노동자는 성별에 관계없이 동일한 임금을 받았다.[188]

5. 문화

아케메네스 왕조는 다민족 국가로서, 다양한 문화가 융합된 사회였다. 이 때문에 페르시아 고유의 문화, 특히 아케메네스 시대의 특징을 명확히 구분하기는 어렵다.

아케메네스 제국에서는 쐐기문자를 음소문자로 발전시킨 고대 페르시아 쐐기문자가 발명되었다. 공용어로는 고대 페르시아어와 표준화된 아람어인 Imperial Aramaic(제국 아람어) 또는 Official Aramaic(공용 아람어)가 사용되었다. 엘람어아카드어(바빌로니아 방언) 기록도 남아 있다. 왕족들 사이에서는 조로아스터교 또는 그와 유사한 종교가 널리 믿어졌다.

기원전 518년 다리우스 1세는 수도를 페르세폴리스로 옮기고 새로운 궁성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 궁성은 크세르크세스 1세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에 의해 거의 반세기 만에 완성되었다. 13m 높이에 가로 500m, 세로 300m 넓이의 터에 세워진 이 궁성은 제국 내 여러 영토에서 온 건축 자재와 인력을 총동원하여 완성되었다. 다리우스 황제는 레바논의 삼목, 에티오피아상아, 이오니아의 장식, 이집트의 은과 흑단 등 다양한 자재와 각 지역의 석공을 동원하여 수사의 왕궁을 지었다고 자랑했다.

아케메네스 시대의 건축, 특히 페르세폴리스 궁전은 조형미와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며 제국의 기능과 페르시아적 포용성을 보여준다. 건축 전체는 항상 페르시아적 고유미를 풍기게 한 점이 특이하며, 금 가공업에서도 이러한 특성이 돋보인다. 메디아 왕국에서 발달된 금 가공 기술은 후에 페르시아의 전통으로 계승되었다. 다리우스 1세와 크세르크세스 1세에 이르러 완성된 페르세폴리스 궁성 등 건축물은 고대 문명 세계의 가장 훌륭한 예술 작품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아케메네스 제국 시대의 예술은 프리즈(frieze) 부조, 금속 세공, 궁전 장식, 유약 벽돌 조적, 뛰어난 장인 기술(석공, 목공 등) 및 정원 조경을 포함한다. 특히 금 세공 기술은 메디아인들에게서 유래하여 페르시아에 전해진 전통이다.[198] 옥서스 보물과 같은 유물이 이를 잘 보여준다. 페르시아인들은 제국 전역에서 다양한 스타일과 기술을 가진 예술가들을 등용했지만, 단순히 스타일을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독특한 새로운 페르시아 스타일을 종합적으로 만들어냈다.[198]

페르세폴리스 유적

5. 1. 언어

페르시아인들은 본래 고대 페르시아어를 사용했으나 이 언어는 문자가 없었고 다리우스가 왕위에 올라 자신의 통치 초기의 업적을 기록한 비석을 세울 때 문자를 만들도록 명령하여 처음 문자가 만들어졌다.[21] 고대 페르시아어는 실무언어로 사용하지 않았고 엘람어가 파르스 지역과 엘람 지역의 행정언어로 사용된 것 같다. 그리고 아람어가 행정기구에 더불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조로아스터교의 종교적 언어인 아베스타어도 사용되었다.

크세르크세스 1세가 암살된 후 그의 장남이자 살아남은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엘람어는 정부의 공식 언어가 아니게 되었고, 아람어의 중요성이 커졌다.

키루스 2세와 다리우스 1세 통치 기간 동안, 그리고 정부의 중심지가 여전히 엘람수사에 있었던 동안, 관청의 언어는 엘람어였다. 이는 주로 제국의 일상 기능에 대한 세부 사항을 보여주는 페르세폴리스 요새 및 국고 정제에서 확인된다.[166] 왕들의 거대한 암벽 비문에서 엘람어 텍스트는 항상 아카드어(바빌로니아 방언)와 고대 페르시아어 비문과 함께 표기되며, 이러한 경우 엘람어 텍스트는 고대 페르시아어 텍스트의 번역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엘람어가 수사의 수도 정부에서 사용되었지만, 제국 전역의 표준 정부 언어는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엘람어의 사용은 기원전 458년 이후로는 확인되지 않는다.[167]

메소포타미아 정복 이후, 해당 지역에서 사용된 아람어는 "다양한 사람들과 언어를 가진 광대한 제국의 여러 지역 간의 서면 의사소통 수단"으로 채택되었다. 현대 학문이 "공용 아람어" 또는 "제국 아람어"라고 부르는 단일 공용어의 사용은 아케메네스 제국이 오랫동안 광대한 제국을 유지하는 데 놀라운 성공에 크게 기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68] 1955년 리처드 프라이는 제국 아람어를 "공용어"로 분류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며, 어떤 특정 언어에도 그러한 지위를 명시적이고 명확하게 부여한 칙령이 남아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169] 프라이는 제국 아람어를 아케메네스 제국의 ''공용어''로 재분류하여 아케메네스 제국에서 아람어의 사용이 일반적으로 생각했던 것보다 더 광범위했음을 시사한다. 제국 멸망 수세기 후에도 아람 문자와—표의 문자로서—아람어 어휘는 파흘라위 문자 체계의 필수적인 특징으로 남게 된다.[170]

고대 페르시아어는 일부 인장과 예술품에도 나타나지만, 그 언어는 주로 서이란의 아케메네스 비문에서 확인되므로, 고대 페르시아어가 그 지역의 공통 언어였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통치 시대에는 비문의 문법과 철자가 너무 "불완전"하여[171] 그 텍스트를 작성한 서기관들이 이미 그 언어를 상당히 잊어버리고 오래된 비문에 의존하여 대부분 그대로 재현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172]

필요에 따라 아케메네스 행정 서신은 그리스어로 작성되어 널리 사용되는 관료적 언어가 되었다.[9]

5. 2. 종교

고대 페르시아인들은 브라만교와 유사한 다신교를 믿으며 가축 헌납, 불의 숭상 및 알코올기가 있는 하오마 나무 즙 마시기 등을 행했다. 그러다가 기원전 600년경 이란고원의 북동쪽에 페르시아의 예언자 겸 스승인 자라투스트라가 나타났다. 그는 위선(Druj:악의 우두머리)을 배척하고 진실과 정의를 역설했다. 그의 신은 아후라 마즈다조로아스터교의 상징이자 창조주였다. 조로아스터교는 일신교일지라도 세계를 선과 악으로 나누었고, 둘 다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투쟁을 벌인다고 보았다. 더구나 그는 낭비적인 가축 헌납을 중단시키고 대신 진리의 상징으로 불을 사용하여 고대 페르시아인의 관행을 개조했다. 단지 하오마 나무 즙 마시기는 일부 제한적으로 허용되었다.[183][184]

조로아스터교의 추종자들과 고대 이란 종교의 추종자들 사이에 갈등이 노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타협과 조화로 이를 극복했고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2세의 통치 중에는 조로아스터력이 채택되었으며, 또 고대 이란의 신 미트라와 여신 아나히타아후라 마즈다와 같이 왕실에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의미로 볼 때 아케메네스의 왕들은 조로아스터교도였지만, 이 종교는 자라투스트라가 본래 의도했던 조로아스터교는 아니었고 매우 변해 있었다. 그 후 사산 왕조 시대의 조로아스터교는 더욱 변모하여 일반 대중의 관행과 아케메네스 왕조의 종교 관행 및 예언자 조로아스터의 순수한 가르침의 혼합물이 되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다리우스 2세 통치 기간 동안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 [페르시아인들은] 신들의 형상도, 사원도, 제단도 없으며, 그것들을 사용하는 것을 어리석음의 표시로 여긴다. 나는 이것이 그들이 그리스인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신들이 인간과 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페르시아인들이 "태양과 달, 땅, 불, 물, 그리고 바람에게" 희생을 바친다고 주장한다. 이것들은 그들에게 고대부터 전해져 내려온 유일한 신들의 숭배이다. 후대에 그들은 아라비아인과 아시리아인으로부터 빌린 우라니아를 숭배하기 시작했다. 밀리타는 아시리아인들이 이 여신을 부르는 이름이며, 페르시아인들은 이 여신을 아나히타라고 불렀다.

바빌로니아 학자이자 사제인 베로수스는 –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통치 후 70년 이상이 지난 후에 기록했지만 – 황제가 처음으로 신들의 숭배 조각상을 만들어 제국 주요 도시들의 사원에 안치했다고 기록한다.[186] 베로수스는 또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가 그 형상들을 세울 때까지 페르시아인들은 신들의 형상을 알지 못했다는 헤로도토스의 말을 뒷받침한다. 희생 방법에 대해 헤로도토스는 "그들은 제단을 세우거나, 불을 피우거나, 술을 붓지 않는다"고 덧붙인다.[187] 헤로도토스는 또한 "마구스가 없이는 기도나 제물을 드릴 수 없다"고 말했다.

5. 3. 건축

현존하는 아케메네스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은 키루스 2세의 수도였던 파사르가다에이다. 파사르가다에의 정문 건물과 알현실은 당시 건축술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기원전 518년 다리우스 1세가 수도를 페르세폴리스로 옮기면서 새로운 궁성 건설이 시작되었다. 이 궁성은 크세르크세스 1세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에 의해 거의 반세기 만에 완성되었다. 13m 높이에 가로 500m, 세로 300m 넓이의 터에 세워진 이 궁성은 제국 내 여러 영토에서 온 건축 자재와 인력을 총동원하여 완성되었다. 다리우스 황제는 레바논의 삼목, 에티오피아상아, 이오니아의 장식, 이집트의 은과 흑단 등 다양한 자재와 각 지역의 석공을 동원하여 수사의 왕궁을 지었다고 자랑했다.

아케메네스 시대의 건축, 특히 페르세폴리스 궁전은 조형미와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며 제국의 기능과 페르시아적 포용성을 보여준다. 건축 전체는 항상 페르시아적 고유미를 풍기게 한 점이 특이하며, 금 가공업에서도 이러한 특성이 돋보인다. 메디아 왕국에서 발달된 금 가공 기술은 후에 페르시아의 전통으로 계승되었다. 다리우스 1세와 크세르크세스 1세에 이르러 완성된 페르세폴리스 궁성 등 건축물은 고대 문명 세계의 가장 훌륭한 예술 작품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5. 4. 예술

아케메네스 제국 시대의 예술은 프리즈(frieze) 부조, 금속 세공, 궁전 장식, 유약 벽돌 조적, 뛰어난 장인 기술(석공, 목공 등) 및 정원 조경을 포함한다. 특히 금 세공 기술은 메디아인들에게서 유래하여 페르시아에 전해진 전통이다.[198] 옥서스 보물과 같은 유물이 이를 잘 보여준다.

페르시아인들은 제국 전역에서 다양한 스타일과 기술을 가진 예술가들을 등용했지만, 단순히 스타일을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독특한 새로운 페르시아 스타일을 종합적으로 만들어냈다.[198]

아케메네스 제국 건축과 미술 양면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예 중 하나는 웅장한 규모와 정교한 세공이 특징인 페르세폴리스의 대궁전이다. 다리우스 1세는 그의 수사 궁전 건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Yakanon 목재는 간다라(Gandhara)와 카르마니아(Carmania)에서 가져왔다. 금은 사르디스(Sardis)와 박트리아(Bactria)에서 가져왔다… 귀중한 석재인 청금석과 홍옥은 소그디아나(Sogdiana)에서 가져왔다. 터키석은 코라스미아(Chorasmia)에서, 은과 에보니이집트(Egypt)에서, 장식은 이오니아(Ionia)에서, 상아는 에티오피아(Ethiopia)와 신드(Sindh)와 아라코시아(Arachosia)에서 가져왔다. 돌을 다듬은 석공들은 이오니아인과 사르디스 사람들이었다. 금세공인들은 메디아인(Medes)과 이집트인(Egyptians)이었다. 나무를 다룬 사람들은 사르디니아인과 이집트인이었다. 구운 벽돌을 다룬 사람들은 바빌로니아인이었다. 벽을 장식한 사람들은 메디아인과 이집트인이었다.

6. 군사

키루스 2세가 페르시아 제국을 크게 확장하면서, 넓은 영토와 다양한 민족을 다스리기 위해 전문적인 군대가 필요했다.[17][18] 키루스는 강력한 육군을 창설하여 바빌로니아, 리디아, 소아시아를 정복했고, 그의 아들 캄비세스 2세는 이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를 정복했다.[121]

다리우스 1세는 해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페르시아 해군을 창설했다.[158] 페르시아 해군은 페니키아인, 이집트인, 그리스인 등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었으며, 페르시아 만과 카룬 강, 티그리스 강, 나일 강, 인더스 강 등 주요 강에서 활동하며 제국의 해상 무역과 치안 유지에 기여했다.[158]

마라톤 전투에서 페르시아 상륙함의 복원도.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리스 함선과 아케메네스 함선의 전투.


아케메네스 해군은 함선 건조에 목재를 주로 사용했지만, 일부 함선에는 적함을 공격하기 위한 금속 칼날과 갈고리가 장착되었다. 함선은 돛과 인력으로 추진되었고, 돌이나 인화성 물질을 발사하는 공성기계도 갖추고 있었다.[158]

크세노폰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페르시아 해군은 강을 건너기 위해 함선을 연결하여 다리를 만드는 기술을 사용했다.[158][160][161] 다리우스 1세크세르크세스 1세는 이 기술을 활용하여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뉴브 강을 건너 스키타이와 그리스를 공격했다.[162][163]

6. 1. 구성

아케메네스 제국은 다민족 국가였기 때문에 제국을 방어하는 군대 역시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었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페르시아인, 마케도니아인, 메디아인, 그리스인, 이집트인, 스키타이인 등 다양한 민족들이 군대에 참여했다.[122]

크세르크세스 1세의 묘에 있는 왕좌를 든 병사들의 부조. 그들의 토착 의복은 그의 통치하에 있던 여러 지역들을 보여준다.


페르시아 군대는 크게 보병과 기병으로 나뉘었다.

  • 보병:
  • 불멸자: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히다르네스 2세가 지휘하는 1만 명의 정예 중장보병 부대였다.[147] 이들은 버들가지 방패, 짧은 창, 검, 활과 화살로 무장하고, 로브 아래에는 비늘 갑옷을 착용했다. 지휘관은 금으로 된 창 촉을 사용했다.[147]
  • 스파라바라: 페르시아 사회의 정규 구성원으로부터 징집된 병사들로, 어린 시절부터 군사 훈련을 받았다. 이들은 누비 린넨 갑옷을 입고, 2미터 길이의 창과 직사각형 버들가지 방패를 휴대했다.
  • 타카바라: 펠타스트와 유사한 부대로, 초승달 모양의 가벼운 버들가지 방패도끼, 가벼운 린넨 천과 가죽으로 만든 고유 무기를 사용했다.

  • 기병:
  • 전차궁수: 제국 초기에는 널리 사용되었으나, 후기에는 의례적인 역할로 축소되었다. 창, 활, 화살, 검, 비늘 갑옷으로 무장했다.
  • 기마병: 비늘 갑옷을 착용한 말을 사용했으며, 기수들은 보병과 유사한 무장을 했다.
  • 낙타 기병: 키루스 대왕이 티브라 전투에서 처음 도입했다.
  • 전투 코끼리: 다리우스 1세가 인더스 계곡 정복 이후 도입했을 가능성이 있다.


아케메네스 제국은 궁술에 크게 의존했으며, 복합궁과 삼엽형 화살촉을 사용했다.[149][150][151][152][153][154]

아케메네스 왕조의 왕이 그리스 호플리트를 죽이는 모습. 기원전 500년경~기원전 475년경, 크세르크세스 1세 시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6. 2. 보병

아케메네스 제국의 보병은 불멸자, 스파라바라, 타카바라의 세 집단으로 구성되었다. 아케메네스 제국 후기에는 카르다케스라는 네 번째 집단이 추가되었다.

불멸자는 헤로도토스에 의해 중장보병으로 묘사되었으며, 히다르네스 2세의 지휘 아래 항상 정확히 1만 명의 병력을 유지했다. 헤로도토스는 이 부대의 이름이 전사하거나 중상을 입거나 병든 병사는 즉시 새 병사로 교체되어 부대의 규모와 결속력을 유지하는 관습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했다.[147] 이들은 버들가지 방패, 짧은 창, 검 또는 큰 단검, 그리고 활과 화살을 사용했다. 로브 아래에는 비늘 갑옷을 착용했다. 일반 병사들의 창의 균형추는 은으로 만들어졌고, 지휘관 계급을 구분하기 위해 장교들의 창 촉은 금으로 만들어졌다.[147] 현존하는 아케메네스 제국의 유색 유약 벽돌과 조각된 부조는 불멸자들이 화려한 로브, 큰 귀걸이, 금 장신구를 착용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이러한 의복과 장신구는 아마도 의식 행사에서만 착용되었을 것이다.[148]

알렉산더 석관(기원전 4세기 말)에 묘사된 아케메네스 보병의 색채 복원.


스파라바라는 페르시아 군대의 중추를 이루었고, 방패벽을 형성하여 궁수와 같은 취약한 병력을 적에게서 보호하는 데 2미터 길이의 창을 사용했다. 이들은 페르시아 사회의 정규 구성원으로부터 징집되었고, 어린 시절부터 군인으로 훈련을 받았다. 먼 땅에서의 원정에 참전하지 않을 때는 페르시아의 광활한 평원에서 사냥을 했으며, 평화 시에는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우는 평범한 삶으로 돌아갔다. 이 때문에 전장에서 전문적인 능력을 갖추지 못했지만, 대부분의 상황에서 반격을 가할 시간을 벌 정도로 훈련이 잘 되고 용감했다. 누비 린넨 갑옷을 착용하고 큰 직사각형 버들가지 방패를 휴대했으나, 호플리트와 같은 중장갑 상대에게는 불리했고, 2미터 길이의 창은 훈련된 파랑크스와 교전하기에 충분한 사거리를 제공하지 못했다. 버들가지 방패는 화살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었지만 창으로부터 병사를 보호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러나 스파라바라는 동방의 훈련된 부대를 포함한 대부분의 다른 보병을 상대할 수 있었다.

아케메네스 제국은 궁술에 크게 의존했다. 주요 참여 국가는 스키타이, 메디아, 페르시아인, 그리고 엘람이었다. 복합궁은 페르시아인과 메디아인이 스키타이족으로부터 채택하여 그리스인을 포함한 다른 국가들에 전파했다.[149] 아케메네스 군대는 일반적으로 소켓형 3날(삼엽형 또는 스키타이형이라고도 함) 화살촉을 사용했다. 이 화살촉은 납이 섞인 주석 청동으로 주조되어 개별적으로 단조해야 했던 당시의 철제 화살촉과 달리 대량 생산이 가능했다.[150][151][152][153][154]

타카바라는 드문 부대였으며 강인한 유형의 펠타스트였다.[155] 그들은 초승달 모양의 가벼운 버들가지 방패도끼뿐만 아니라 가벼운 린넨 천과 가죽을 포함한 자신들의 고유 무기로 싸우는 경향이 있었다. 타카바라는 현대 이란을 포함하는 영토에서 모집되었다.

6. 3. 기병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아케메네스 제국의 기병에 대한 직접적인 정보가 없기 때문에, '기병' 섹션에 대한 내용을 작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전 답변과 동일하게, 주어진 정보를 바탕으로는 기병 섹션을 작성할 수 없다.

6. 4. 해군

키루스 2세에 의해 건국된 페르시아 제국은 강력한 육군을 보유한 육지 제국이었으며, 초기에는 실질적인 해군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원전 5세기가 되면서 해상 전통과 능력을 갖춘 그리스이집트 세력과 맞닥뜨리게 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다리우스 1세는 페르시아 함대에 투자한 최초의 아케메네스 왕이었다.[158] 그 당시에도 그리스나 이집트에 진정한 "제국 해군"은 존재하지 않았다. 다리우스 치하에서 페르시아는 최초로 정규 제국 해군을 창설하고 배치한 최초의 제국이 되었다.[158] 제국 해군의 인력은 이란 출신이 아니었고, 다리우스 1세가 제국의 전투함을 운용하도록 선택한 페니키아인(대부분 시돈 출신), 이집트인, 그리고 그리스인이었다.[158]

초기에 페니키아인들이 시돈에서 함선을 건조했는데, 최초의 아케메네스 함선은 길이 약 40미터, 너비 6미터로, 한 번에 최대 300명의 페르시아 군사를 수송할 수 있었다. 곧 제국의 다른 국가들도 자체 함선을 건조하기 시작했고, 각 국가는 약간의 지역적 특징을 반영했다. 이 함선들은 결국 페르시아 만으로 향했고,[158] 페르시아 해군은 그곳에서 강력한 페르시아 해상 세력의 기반을 마련했다. 페르시아는 또한 서쪽의 카룬 강, 티그리스 강, 나일 강뿐만 아니라 인더스 강을 포함한 제국의 여러 강을 따라 100~200명의 군사를 수송하는 함선을 운용했다.[158]

아케메네스 해군은 카룬 강 연안과 바레인, 오만, 예멘에 기지를 두었다. 페르시아 함대는 카룬 강을 따라 치안 유지 목적으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페르시아 만을 통한 인도와의 무역에도 기여했다.[158] 다리우스의 해군은 당시 세계 강국이었지만, 기원전 397년 여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가 재무장의 일환으로 강력한 해군을 건설하여 기원전 394년 크니도스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이오니아에서 아케메네스의 권력을 재확립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나중에 이집트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에도 해군을 사용했다.[159]

선박 건조에는 목재가 주로 사용되었지만, 일부 아케메네스 함선은 함선의 운동량을 이용하여 적함을 베도록 설계된 금속제 칼날을 앞쪽에 장착했다. 또한 적함을 잡거나 위치를 조정하기 위해 측면에 갈고리가 장착되었다. 함선은 돛이나 인력으로 추진되었다. 페르시아가 건조한 함선은 독특했다. 해상 전투 측면에서 이 함선들은 돌이나 인화성 물질과 같은 발사체를 발사하는 두 개의 공성기계를 장착했다.[158]

크세노폰은 티그리스 강을 가로질러 37척의 페르시아 함선을 연결하여 만든 거대한 군용 다리에 대한 목격담을 기록했다. 페르시아인들은 각 배의 부력을 이용하여 연결된 다리를 지탱하여 보급품을 수송할 수 있었다.[158] 헤로도토스 또한 페르시아인들이 다리를 건설하는 데 함선을 사용한 여러 사례를 기록하고 있다.[160][161]

다리우스 1세는 흑해 북쪽의 스키타이 기병을 정복하려고 보스포루스 해협을 아케메네스 함선을 연결하여 만든 거대한 다리를 이용해 건너 다뉴브 강까지 진군하여 두 번째 배다리를 이용해 강을 건넜다.[162] 보스포루스 해협의 다리는 아시아와 유럽의 가장 가까운 지점을 연결했으며, 최소 1000미터 이상의 수면을 가로질렀다. 헤로도토스는 이 광경을 묘사하며 "다리우스의 다리"라고 불렀다.[163]

수년 후, 크세르크세스 1세그리스 침략 중에 비슷한 배다리를 건설했다. 페르시아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완전히 점령하는 데 실패했지만, 해상 활동의 전통은 페르시아 왕들, 특히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에 의해 계승되었다. 수년 후 알렉산더가 페르시아를 침략하여 인도로 진군하는 동안, 그는 기원전 327년 봄 인도 인더스 강에서 헤파이스티온페르디카스가 비슷한 배다리를 건설하도록 함으로써 페르시아의 전쟁 기술을 활용했다.[164]

7. 경제

아케메네스 제국 시대에는 광범위한 무역이 이루어졌으며, 제국의 먼 지역까지 상품 교역을 원활하게 하는 효율적인 기반 시설이 존재했다. 무역 관세는 농업 및 조공과 함께 제국의 주요 수입원이었다.[111][117]

다리우스 1세는 각 주(satrapy)의 생산성과 경제적 잠재력을 고려하여 조세 제도를 정비했다. 각 주는 매년 정해진 세금을 금이나 은으로 납부해야 했다.[111] 예를 들어, 바빌론은 1,000 탈렌트의 은과 군량미 4개월분을 납부하여 가장 많은 세금을 냈다.[111] 인도는 금을, 이집트는 곡물과 700탈렌트의 은, 그리고 120,000 단위의 곡물을 제공했다.[111]

헤로도토스에 따른 아케메네스 제국의 각 행정구역별 연간 공납량.


다리우스 대왕은 정확한 세금 계산을 위해 화폐와 도량형을 통일했다. 다리크는 최초의 금화였으며, 은화인 시글로스와 함께 아케메네스 제국의 이금속 통화 표준을 확립했다.[106] 정복당하거나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은 노예로 팔릴 수 있었으며,[112] 아케메네스 제국은 사유 노예 매매를 등록하고 초기 형태의 부가가치세를 과세한 최초의 정부였을 가능성이 있다.[113]

각 사트라피(총독령)들은 2,500킬로미터의 고속도로로 연결되었는데, 가장 인상적인 구간은 다리우스 1세의 명령으로 건설된 왕의 길이었다. 이 길은 수사에서 사르디스까지 이어졌으며, 특정 간격마다 역과 카라반사라이가 설치되어 있었다. 기병 급사(angarium)들은 15일 이내에 가장 외딴 지역에도 도달할 수 있었다. 헤로도토스는 "세상에서 이 페르시아 급사들보다 빠른 것은 없다. 눈도, 비도, 더위도, 밤의 어둠도 이 용감한 급사들이 임무를 신속하게 완수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기록했다.[118]

에크바타나와 아나톨리아를 연결하는 왕도의 일부. 이 도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사트라프 제도에 의해 상대적인 지역 자치가 허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의 눈과 귀"인 왕실 감찰관들이 제국을 순회하며 지역 상황을 보고했다.

또 다른 중요한 상업로는 쿠라산 도로로, 메소포타미아의 비옥한 저지대에서 시작되어 자그로스 산맥 고지대와 이란 고원,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사마르칸트, 메르브, 페르가나 계곡 등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이어지는 비공식적인 상업 루트였다. 이 도로를 통해 키로폴리스와 같은 국경 도시 건설이 가능해졌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이후, 이 고속도로는 그레코-불교와 같은 문화적 융합의 확산을 중앙아시아와 중국으로 이어주었고, 쿠샨 제국, 인도-그리스 왕국, 파르티아와 같은 제국들이 동서 간 무역으로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이 루트는 압바스 칼리파 시대에 크게 개선되고 공식화되어 유명한 실크로드의 주요 구성 요소로 발전했다.[119]

7. 1. 주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다리크


페르시아의 다리크는 최초의 금화였으며, 비슷한 은화인 시글로스와 함께 아케메네스 제국의 이금속 통화 표준을 도입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106] 다리우스 1세는 제국을 강화하고 페르세폴리스를 의례적인 수도로 확장했으며,[107] 은화와 금화를 기반으로 경제를 혁신했다.

7. 2. 조세 제도

다리우스 대왕은 각 도(satrapy)의 생산성과 경제적 잠재력을 고려하여 조세 제도를 정비했다. 각 주는 매년 정해진 세금을 금이나 은으로 납부해야 했다.[111] 예를 들어, 바빌론은 가장 많은 세금을 냈는데, 1,000 탈렌트의 은과 군량미 4개월분을 납부했다.[111] 인도는 금을, 이집트는 곡물과 700탈렌트의 은, 그리고 120,000 단위의 곡물을 제공했다.[111]

다리우스 항아리(기원전 340~320년)에 묘사된 아케메네스 조세징수관이 주판(Abacus)으로 계산하는 모습.
[114]

다리우스 대왕은 정확한 세금 계산을 위해 화폐와 도량형을 통일했다. 페르시아의 다리크는 최초의 금화였으며, 은화인 시글로스와 함께 아케메네스 제국의 이금속 통화 표준을 확립했다.[106]

정복당하거나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은 노예로 팔릴 수 있었으며,[112] 아케메네스 제국은 사유 노예 매매를 등록하고 초기 형태의 부가가치세를 과세한 최초의 정부였을 가능성이 있다.[113]

7. 3. 운송 및 통신

아케메네스 제국 시대에는 광범위한 무역이 이루어졌으며, 제국의 먼 지역까지 상품 교역을 원활하게 하는 효율적인 기반 시설이 존재했다. 무역 관세는 농업 및 조공과 함께 제국의 주요 수입원이었다.[111][117]

기원전 353년, 박트리아 사트라프가 훌미 총독에게 보낸 낙타 사육에 관한 편지


각 사트라피(총독령)들은 2,500킬로미터의 고속도로로 연결되었는데, 가장 인상적인 구간은 다리우스 1세의 명령으로 건설된 왕의 길이었다. 이 길은 수사에서 사르디스까지 이어졌으며, 특정 간격마다 역과 카라반사라이가 설치되어 있었다. 기병 급사(angarium)들은 15일 이내에 가장 외딴 지역에도 도달할 수 있었다. 헤로도토스는 "세상에서 이 페르시아 급사들보다 빠른 것은 없다. 눈도, 비도, 더위도, 밤의 어둠도 이 용감한 급사들이 임무를 신속하게 완수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기록했다.[118]

사트라프 제도에 의해 상대적인 지역 자치가 허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의 눈과 귀"인 왕실 감찰관들이 제국을 순회하며 지역 상황을 보고했다.

또 다른 중요한 상업로는 쿠라산 도로로, 메소포타미아의 비옥한 저지대에서 시작되어 자그로스 산맥 고지대와 이란 고원,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사마르칸트, 메르브, 페르가나 계곡 등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이어지는 비공식적인 상업 루트였다. 이 도로를 통해 키로폴리스와 같은 국경 도시 건설이 가능해졌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이후, 이 고속도로는 그레코-불교와 같은 문화적 융합의 확산을 중앙아시아와 중국으로 이어주었고, 쿠샨 제국, 인도-그리스 왕국, 파르티아와 같은 제국들이 동서 간 무역으로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이 루트는 압바스 칼리파 시대에 크게 개선되고 공식화되어 유명한 실크로드의 주요 구성 요소로 발전했다.[119]

8. 유산

아케메네스 제국은 광대한 영토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고 다양한 문화를 포용함으로써 후대 페르시아 왕조와 주변 지역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케메네스 시대에 조로아스터교는 이란 남서부에 전파되어 통치자들에게 받아들여졌고 페르시아 문화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이 종교는 전통적인 이란 신화의 개념과 신들을 공식화하고 자유 의지와 같은 새로운 사상을 도입했다.[183][184]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다리우스 2세 통치 기간 동안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인들이 신들의 형상, 사원, 제단이 없으며, 그것들을 사용하는 것을 어리석음의 표시로 여긴다고 기록했다. 그는 페르시아인들이 "태양과 달, 땅, 불, 물, 그리고 바람에게" 희생을 바친다고 주장하며, 이들은 고대부터 숭배해 온 유일한 신들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후대에 페르시아인들은 아라비아인과 아시리아인으로부터 우라니아 숭배를 받아들였는데, 아시리아인들은 이 여신을 밀리타라고 불렀고 페르시아인들은 아나히타라고 불렀다.

바빌로니아 학자이자 사제인 베로수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통치 후 70년 이상이 지난 후에 황제가 처음으로 신들의 숭배 조각상을 만들어 제국 주요 도시들의 사원에 안치했다고 기록했다.[186] 베로수스는 또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가 그 형상들을 세울 때까지 페르시아인들은 신들의 형상을 알지 못했다는 헤로도토스의 말을 뒷받침한다. 헤로도토스는 희생 방법에 대해 "그들은 제단을 세우거나, 불을 피우거나, 술을 붓지 않는다"고 덧붙였으며,[187] "마구스가 없이는 기도나 제물을 드릴 수 없다"고 말했다.

종교적 관용은 아케메네스 제국의 "주목할 만한 특징"으로 묘사되어 왔다.[181] 구약성경은 페르시아 왕 키루스 2세가 기원전 539~530년에 유대인 백성바빌론 유수에서 해방시키고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했다고 전한다.[182] 키루스 2세는 여러 도시의 성지 복원을 지원했다.[181]

미트라[174]는 숭배되었고,[175][176] 그의 사원과 상징은 가장 널리 퍼져 있었으며,[177]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이름과 관련된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178] 대부분의 축제는 그에게 헌정되었다.[179][180]

페르세폴리스의 파르바하르 부조

8. 1. 후대 페르시아 왕조와의 관계

셀레우코스 제국 시대에 파르스 지역에서는 프라타라카(Frataraka) 왕조가 셀레우코스 왕조의 대표로 활동했다.[96] 이들은 기원전 3세기 말부터 기원전 2세기 초까지 통치했으며, 바흐바르즈(Vahbarz) 또는 바드프라다드 1세(Vādfradād I)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권력이 약해진 틈을 타 기원전 150년경 독립을 획득했다.[96]



파르티아 제국 시대에 페르시스(페르시스 왕들)의 왕들은 다레이우스 1세(Dārēv I) 때부터 "mlk"(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독립적인 통치자가 되었다.[97] 파르티아의 미트리다테스 1세(Mithridates I of Parthia)(기원전 171~138년경)가 페르시스를 장악한 후에도 페르시아 왕조들은 "mlk" 칭호가 새겨진 주화를 계속 주조할 수 있었다.[96]

다레이우스 1세는 처음으로 "mlk"(왕) 칭호를 사용했다. 기원전 2세기.


사산 왕조는 파파크(Pāpag)의 아들 샤푸르(Šābuhr)의 통치 기간에 페르시스 왕국을 흡수했다. 샤푸르의 동생이자 후계자인 아르다크시르 1세(Ardaxšir I)(아르다시르 1세)는 기원후 224년 파르티아 왕 아르타바누스 5세(Artabanus V of Parthia)를 물리치고 크테시폰에서 "샤한샤 이 에란"(šāhanšāh ī Ērān)으로 즉위하여 사산 왕조를 열었다.[97]

폰투스 왕국은 소아시아의 폰투스 지역을 중심으로 한 페르시아계 국가로,[98][99][100][101] 다리우스 1세아케메네스 왕조와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01] 기원전 281년 미트리다테스 1세(Mithridates I of Pontus)가 건국하여 기원전 63년 로마 공화정에 정복될 때까지 존속했다. 미트리다테스 6세 대왕 치하에서 최대 판도를 이룬 폰투스 왕국은 헬레니즘 세계에서 아케메네스 왕조의 혈통을 유지하며 번영했다.[101]

파르티아사산 왕조는 모두 아케메네스 왕조의 혈통을 주장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유전 질환(신경섬유종증)의 가능성을 통해 파르티아의 아케메네스 혈통 주장이 일부 확인되기도 했다.[102]

수사의 다리우스 궁전(Palace of Darius in Susa)에서 온 날개 달린 스핑크스, 루브르 박물관

8. 2. 폰투스 왕국과의 관계

Πόντος|폰토스grc 왕국은 소아시아 북부에 위치한 왕국으로, 아케메네스 왕조의 계보를 이었다고 주장했다. 이 왕국은 미트리다테스 6세 대왕의 통치 시기에 가장 크게 성장하여 헬레니즘 세계에서 중요한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9. 역대 군주

이름통치 기간주요 업적비고
키루스 2세기원전 550년–기원전 530년메디아 정복, 바빌로니아 정복, 바빌론 유수 해방, 사실상 아케메네스 제국 창시제1대 샤한샤
캄비세스 2세기원전 529년–기원전 522년이집트 정복
스메르디스기원전 522년키루스 대왕의 왕자라고 주장하며 제위 찬탈
다리우스 1세기원전 521년–기원전 486년제국 최대 확장, 페르세폴리스 건설 시작,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시작
크세르크세스 1세기원전 485년–기원전 465년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지속 (테르모필라이 전투, 살라미스 해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기원전 465년–기원전 424년
크세르크세스 2세기원전 424년
소그디아노스기원전 424년–기원전 423년크세르크세스 2세의 배다른 형제이자 경쟁자
다리우스 2세기원전 423년–기원전 405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기원전 404년–기원전 359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기원전 358년–기원전 338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4세기원전 338년–기원전 336년
다리우스 3세기원전 336년–기원전 330년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패배, 아케메네스 제국 멸망마지막 통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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