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당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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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밀양 당씨는 경상남도 밀양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 성씨이다. 시조 당성은 고려 말 예부상서 박정수의 혼외자로, 다죽리(茶竹里)의 발음과 유사한 '당(唐)'을 성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설이 있다. 조선 개국원종공신을 배출하였으며, 조선 시대에는 6명의 과거 급제자를 냈다. 주요 인물로는 당성, 당몽현, 당언필 등이 있으며, 현대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인물들이 있다. 강원도 철원군 원남면 월봉리에 집성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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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당씨 - [성씨/가문]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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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관향 | 밀양 |
창시자 | 당성(唐誠) |
저명한 인물 | 당윤문, 당의남 |
2015년 인구 | 1,146명 |
순위 | 155위 |
역사 | |
시조 | (당성, 唐誠) |
주요 인물 | 당윤문, 당의남 |
당성 (唐誠) | |
역할 | (공조) |
공훈 | (공신) |
품계 | (가선대부) |
관직 | (공안부윤) |
2. 기원
밀양 당씨(密陽 唐氏)는 경상남도 밀양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밀양시 산외면 다죽리[茶竹里, 본래 예전 지명은 다원리(茶阮里)]의 토착민이 '다죽리'의 발음과 '당(唐)'의 발음이 유사한 점을 주목해서 한자를 빌려와 성으로 삼아 쓰기 시작했다.
다죽리는 꾀꼬리봉을 주산으로 하고, 동쪽으로는 평전산(平田山), 서쪽으로는 다원동산(茶院東山)이 감싸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넓은 들을 바라볼 수 있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조건을 갖춘 마을이다.
이 마을의 형성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지석묘군과 고분군 등이 분포되어 있던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모당천(毛唐泉)의 사적으로 보아 고려말 조선초에 이미 당씨가 살았다고 전한다.
시조 당성(唐誠)은 박정수의 혼외자이거나, 다죽리 마을의 재능 있는 평민이었다는 설, 고려 왕족이었다는 설, 외국에서 망명해왔다는 설 등이 있으나 모두 확실치 않다. 외국 망명설은 사대주의 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신빙성이 없고, 고려 왕족설은 특별한 근거가 없다.
당성은 박정수의 혼외자이거나 다죽리 토착민 중 특출난 인재였을 가능성이 높다. 임금에게 청하여 밀양을 본관으로 하사받아 유지한 것은 자신의 근본을 후세에 남기고자 한 것이다.
밀양 당씨는 조선 개국원종공신의 후예로 녹권을 하사받은 양반 성씨이다. 사대주의 사상이 강했던 조선시대 족보에는 원나라에서 들어온 것이라고 밝혔으나, 실제로는 한자를 빌려 온 성씨일 뿐이며 밀양시 '다죽리' 토착민이 처음 사용한 한국 성씨이다. 중국 당씨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조선 후기 홍길동전의 내용처럼, 혼외자는 슬픈 역사를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었을 것이다. 근본마저 바꿔 버린 당성은 말년에 비참한 심정이었을 것이고, 그래서 후손에게 죽게 되거든 무덤에 비문을 세우지 말라 했던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2015년 국세조사에 의하면 인구는 1,146명이고 535성 중 제 155위였다. 당씨의 본관은 밀양 외에도 경주, 청주, 남원, 영광 등 다섯 본까지 기록하는 문헌이 있으나 모두 세거지명에 불과하며, 오늘날에는 밀양 당씨 단본이다.
2. 1. 다죽리(茶竹里)와의 연관성
밀양 당씨는 경상남도 밀양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 고유의 성씨이다. 밀양시 산외면 다죽리(茶竹里) [본래 지명은 다원리(茶阮里)]의 토착민이 '다죽리'와 '당(唐)'의 발음이 유사한 점을 주목하여 한자를 빌려와 성으로 삼기 시작했다.[1] 다죽리는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으로, 꾀꼬리봉 아래쪽에 다원 1·2리, 평전산 기슭에 죽남동, 다원들 가운데에 율전동이 있다.다죽리는 옛 이름은 다원(茶阮)이라고 하는데, 이는 차나무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 차나무는 보두(步斗)라는 중이 엄광사 주변에 재배하였는데 이 마을까지 번식하였다고 한다. 600년 된 차나무가 혜산서원에 있다.[1]
이 마을에는 밀성 박씨 일파가 살았으나, 고려 말 조선 초 격변기를 거치면서 본래 이 지방 문벌귀족이었던 예부상서(禮部尙書, 고려 말 정3품 벼슬, 현대의 외교부장관 겸 교육부장관) 박정수의 후손들과 일파는 흩어졌다.[1]
밀양 당씨의 시조 당성(唐誠)은 고려 말 예부상서 박정수의 혼외자로서, 재물을 상속받기 위해 신분을 감추고 박정수의 손녀딸의 데릴사위로 들어가면서 '다죽리'와 발음이 유사한 '당(唐)'이라는 성을 쓰기 시작했다는 설이 있다. 또는, '다죽리' 마을의 재능 있는 평민이 박정수 손녀딸의 데릴사위로 들어가면서 출신을 감추기 위해 '당(唐)'이라는 성을 썼다는 설도 있다. 고려 왕족이 죽음을 모면하려고 신분을 감추기 위해 '당(唐)'이라는 성을 썼다는 설, 외국에서 망명해 왔다는 설 등도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1]
외국 망명설은 사대주의 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신빙성이 없고,[1] 고려 왕족설은 특별한 근거가 없다. 고려 왕족이 당나라 숙종 또는 선종의 후예임을 내세웠고, 당성의 묘가 개성 왕씨 묘와 같은 곳에 있다는 것을 근거로 주장하지만 증거가 없고 가능성도 낮다.[1]
당성은 예부상서 박정수의 혼외자이거나 다죽리 토착민 중 특출난 인재였을 가능성이 높다. 임금에게 청하여 밀양을 본관으로 하사받아 유지한 것은 자신의 근본을 후세에 남기고자 한 것이다.[1]
밀양 당씨는 조선 개국원종공신의 후예로 녹권을 하사받은 양반 성씨이다. 사대주의 사상이 강했던 조선시대 족보에는 원나라에서 들어온 것이라고 밝혔으나, 실제로는 한자를 빌려 온 성씨일 뿐이며 밀양시 '다죽리' 토착민이 처음 사용한 한국 성씨이다. 중국 당씨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1]
밀양 당씨 시조 당성은 1337년(충숙왕 복위 6)∼1413년(태종 13)에 실존했던 인물이다. 조선 후기 밀양 당씨 세보에는 당성이 당각(唐恪)의 6세손이라고 하는데, 당각은 송나라 때 (생년 미상) ~ 1127년까지 실존했던 인물이다. 당각은 송나라 철종 원우 9년(1094) 음등제하여 제거하동상평과 강동전운판관을 역임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당성과 당각 사이에는 약 250년의 시차가 존재하여 6세손이라는 것은 신분 세탁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1]
송나라 재상 당각의 후손이 고려에 가서 살았다는 기록은 중국에서 찾을 수 없다. 밀양 당씨의 계통이 송나라 때 재상 당각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은 허구이다. 유전학적으로 Y염색체 유전자를 대조해서 사실 관계를 명확히 할 수 있다.[1]
조선시대 이후 근대까지 밀양 당씨 시조 묘에는 이름이 새겨진 비석이 없었다. 당성은 최영 장군과 성석린의 논쟁에서 성석린을 죽여야 한다는 최영에게 율문을 던지며 반박할 정도로 기개가 있었던 인물이다. 그런 사람의 무덤에 비문이 없었다는 것은 자신의 출생 혹은 출신의 비밀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수 있다.[1]
당성(唐誠)이라는 이름은 성씨인 '당(唐)'은 '다죽리'에서, 이름인 '성(誠)'은 '밀양'의 옛 이름 '밀성(密城)'의 '성(城)'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발음이 비슷한 점에 주목해서 따왔다고 한다. 그러므로 밀양 당씨의 정체성은 '당성'이라는 이름에 새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1]
3. 역사
당성(唐誠)은 북송 휘종 시대의 재상 당각의 6대손이며, 중국 명주 출신이다.[4] 원나라 말기에 전란을 피해 고려에 귀화하여 정동행성 연사, 중랑장, 사평순위부 평사, 판전농시사 등을 역임했다. 1392년에는 개국원종공신이 되어 녹권과 상전 15결을 하사받았으며, 예부, 형부, 공부의 전서, 가선대부를 지냈다. 1398년 공조전서 재직 중에는 노비 소송에 대해 노비변정 도감을 비판하여 직에서 쫓겨났으나 곧 복귀하여 검교판 한성부사에 임명되었고, 문서응봉사 제조를 겸임했다. 1401년에는 태종에게 실무에 종사하고 싶다고 청하여 개성부 부류후에 임명되었으며, 1409년에는 공안부윤 등을 역임했다. 성실한 성격으로 율문·사대 문서에 능통했으며, 형정과 외교에 다대한 공헌을 했다. 태종 시대에 밀양을 사적되어 본관으로 삼았다.[4]
당성은 예부상서 박정수의 손녀를 아내로 맞아 2남 1녀를 두었다. 맏아들 당몽현(唐夢賢)은 자헌대부로 중추원사를, 차남 당몽량(唐夢良)은 가선대부로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했다.
당몽현의 손자 당유징(唐有徵)은 통정대부로 영광군수를 역임했다. 당유징의 세 아들 모두 뛰어났다. 맏아들 당언우(唐彦佑)는 상호군을, 둘째 당언필(唐彦弼)은 무과에 급제하여 경원도호부사를, 막내 당언량(唐彦良)은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이 되었고 임진왜란에서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당몽량의 후손으로는 조선 세종 때 충좌위 부사과를 지낸 맏아들 당효원(唐孝元)과 그의 아들 당적(唐勣, 통훈대부로 삭녕군 군수를 지냄)이 유명했다. 당윤문(唐允文)은 중종 때 생원시를 거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사성과 봉상시정, 사복시정 등을 지냈다.
그 밖에도 원종공신에 책록된 당득흥(唐得興)과 당계흥(唐繼興), 대호군을 지낸 당윤흥(唐胤興), 사재감 첨정 당호건(唐好健), 훈련원부정 당건(唐健), 학자 당후민(唐厚民), 훈련원 판관 당국(唐國) 등이 가문을 빛냈다.
4. 인물
밀양 당씨는 고려와 조선 시대에 걸쳐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고려 시대 및 조선 시대 인물에 대한 내용은 하위 섹션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으며, 여기서는 현대의 주요 인물들을 표로 소개한다.
이름 | 직업 및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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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현증 | 전 부천시의원, 작가 |
당성증 | 축구감독, 전 대구 FC 감독 |
당석원 | 부산·진해 자유무역구청 유치1실장 |
당신상 | 전 LG 트윈스 선수 |
당우증 | 수원지방법원 행정3부 부장판사 |
당연증 | 부천시 상일동 세무회계사 |
당현구 | 원산조선소 기사장 |
당준상 | 수원시 문화유산관리과장 |
당현석 | 드라마 고백부부 출연 배우 |
당현우 | 법무법인 화우 전문위원 |
당현철 | 경기지부 안성시분회 약사, 중앙약국 운영 |
당현철 | 명례방협동조합 이사장 |
당현식 | 과학기술통신부장관상 수상 |
당용원 | 경기도 안성시청 건축과 건축민원1팀장 |
4. 1. 고려
당성(唐誠)은 예부상서(禮部尙書) 박정수(朴廷秀)의 손녀를 아내로 맞이하여 2남 1녀를 두었다. 맏아들 당몽현(唐夢賢)은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중추원사(中樞院使)를 역임했고, 차남 당몽량(唐夢良)은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4]당몽현(唐夢賢)의 손자 당유징(唐有徵)은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영광군 군수(靈光郡 郡守)를 역임했다. 당유징의 아들 3형제 중 맏아들 당언우(唐彦佑)는 상호군(上護軍)을 지냈고, 둘째 당언필(唐彦弼)은 무과에 급제하여 경원도호부사(慶源都護府使)를 역임했으며, 막내 당언량(唐彦良)은 무과에 올라 수문장(守門將)이 되었다. 당언량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어 명성을 떨쳤다.[4]
당몽량(唐夢良)의 후손으로는 세종 때 충좌위 부사과(忠佐衛 副詞果)를 지낸 당효원(唐孝元)과 그의 아들 당적(唐勣, 통훈대부로 삭녕군 군수를 지냄)이 유명했다. 당윤문(唐允文)은 중종 때 생원시(生員試)를 거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사성(成均館 司成)과 봉상시정(奉常寺正), 사복시정(司僕寺正) 등을 지냈다.[4]
그 밖에도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된 당득흥(唐得興)과 당계흥(唐繼興), 대호군(大護軍)을 지낸 당윤흥(唐胤興), 사재감 첨정(司宰監僉正) 당호건(唐好健), 훈련원부정(訓鍊院副正) 당건(唐健), 학자(學者) 당후민(唐厚民),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 당국(唐國) 등이 있다.[4]
4. 2. 조선
당성(唐誠)은 예부상서(禮部尙書) 박정수(朴廷秀)의 손녀를 아내로 맞아 2남 1녀를 두었다. 맏아들 당몽현(唐夢賢)은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중추원사(中樞院使)를 역임했고, 둘째 아들 당몽량(唐夢良)은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당몽현(唐夢賢)의 손자 당유징(唐有徵)은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영광군수(靈光郡 郡守)를 역임했다. 당유징의 아들 3형제는 모두 뛰어났다. 맏아들 당언우(唐彦佑)는 상호군(上護軍)을 지냈고, 둘째 당언필(唐彦弼)은 무과에 급제하여 경원도호부사(慶源都護府使)를 역임했으며, 막내 당언량(唐彦良)은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守門將)이 된 후 임진왜란에서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당몽량(唐夢良)의 후손 중에서는 조선 세종 때 충좌위 부사과(忠佐衛 副詞果)를 지낸 맏아들 당효원(唐孝元)과 그의 아들 당적(唐勣, 통훈대부로 삭녕군 군수를 지냄)이 유명했다. 당윤문(唐允文)은 중종 때 생원시(生員試)를 거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사성(成均館 司成)과 봉상시정(奉常寺正), 사복시정(司僕寺正) 등을 지냈다.
그 밖에도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된 당득흥(唐得興)과 당계흥(唐繼興), 대호군(大護軍)을 지낸 당윤흥(唐胤興), 사재감 첨정(司宰監僉正) 당호건(唐好健), 훈련원부정(訓鍊院副正) 당건(唐健), 학자(學者) 당후민(唐厚民),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 당국(唐國) 등이 밀양 당씨 가문을 빛냈다.
4. 3. 현대
이름 | 직업 및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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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현증 | 전 부천시의원, 작가 |
당성증 | 축구감독, 전 대구 FC 감독 |
당석원 | 부산·진해 자유무역구청 유치1실장 |
당신상 | 전 LG 트윈스 선수 |
당우증 | 수원지방법원 행정3부 부장판사 |
당연증 | 부천시 상일동 세무회계사 |
당현구 | 원산조선소 기사장 |
당준상 | 수원시 문화유산관리과장 |
당현석 | 드라마 고백부부 출연 배우 |
당현우 | 법무법인 화우 전문위원 |
당현철 | 경기지부 안성시분회 약사, 중앙약국 운영 |
당현철 | 명례방협동조합 이사장 |
당현식 | 과학기술통신부장관상 수상 |
당용원 | 경기도 안성시청 건축과 건축민원1팀장 |
5. 과거 급제자
밀양 당씨는 조선 시대에 총 6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9]
이름 | 자 | 급제년도 | 급제 내용 | 관직 |
---|---|---|---|---|
당윤문 | 성장(成章) | 조선 중종 20년(1525년) | 생원시와 진사시 2등 조선 중종 34년(1539년) 기해(己亥) 별시(別試) 병과(丙科) 문과[10] | 시정(寺正) |
당효달 | 선양(善養) | 조선 세종 29년(1447년) |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2등 생원시 | 충좌위 부사과(忠佐衛副詞果) |
당효명 | 백원(百原) | 조선 세종 29년(1447년) |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1등 생원시 | 봉사(奉事) |
당의남 | 선경(善慶) | 조선 인조 14년(1636년) | 병자(丙子) 별시(別試) 병과(丙科) 무과 | 우림위(羽林衛) |
6. 집성촌
참조
[1]
서적
Academy of Korean Studies 밀양당씨 密陽唐氏
http://terms.naver.c[...]
Academy of Korean Studies
[2]
논문
A Comparison of the Korean and Japanese Approaches to Foreign Family Names
http://www.sciea.org[...]
2014
[3]
웹사이트
KOSIS
https://kosis.kr/sta[...]
2022-11-18
[4]
뉴스
당성(唐誠)
http://encykorea.aks[...]
韓国民族文化大百科事典
[5]
웹사이트
당씨(唐氏) 본관(本貫) 밀양(密陽)입니다.
http://www.findroot.[...]
2022-07-26
[6]
간행물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LST_050_202_0122
[7]
문서
『국조문과방목(国朝文科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 106])
[8]
웹사이트
당성(唐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
[9]
간행물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LST_050_202_0122
[10]
문서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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