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다드 공방전 (115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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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그다드 공방전 (1157년)은 1157년 셀주크 술탄 무함마드가 아바스 왕조의 수도 바그다드를 공격한 사건이다. 10세기 이후 쇠퇴한 아바스 왕조는 셀주크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1136년에도 바그다드는 공방전을 겪었다. 1157년 무함마드는 3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바그다드를 포위했으나, 칼리프의 방어와 누르 앗딘 마흐무드의 압박, 그리고 무함마드의 영토 내 문제로 인해 7월 13일 공성전을 중단하고 철수했다. 이 공방전은 아바스 왕조와 셀주크 제국의 관계에 변화를 가져왔고, 중동 지역의 정세 불안을 심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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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다드 공방전 (1157년)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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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분쟁 | 압바스-셀주크 전쟁 |
날짜 | 1157년 1월 12일 – 6월 13일 |
장소 | 아바스 왕조 바그다드 (현재의 이라크) |
결과 | 압바스 왕조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하마단 셀주크조와 모술의 장기 왕조 |
교전국 2 | 아바스 왕조 |
지휘관 및 지도자 | |
지휘관 1 | 하마단의 무함마드 2세, 모술의 쿠틉 앗딘 마우두드 |
지휘관 2 | 알묵타피 |
병력 규모 | |
병력 1 | 셀주크인 30,000명 |
병력 2 | 7,000명의 병사와 다수의 민병대 |
피해 규모 | |
피해 1 | 알려져 있지 않으나 심각함 |
피해 2 | 알려져 있지 않음 |
2. 전투 배경
10세기에 이르러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는 이슬람 세계의 상징적인 지도자로 남았지만, 제국 대부분 지역에 대한 실질적인 통치권은 상실했다. 많은 지방 총독들이 툴룬 왕조, 이흐시드 왕조, 하마단 왕조 등 독자적인 왕조를 세우며 중앙 정부의 통제를 벗어났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055년, 셀주크 제국의 투그릴은 알-카임 칼리프의 요청을 받아 부와이 왕조를 몰아내고 바그다드를 장악했다. 그러나 셀주크인들 역시 칼리프를 명목상으로만 존중했을 뿐, 칼리프가 세속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막으며 실권을 행사했다. 이는 향후 칼리프와 셀주크 술탄 간의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
2. 1. 아바스 왕조의 쇠퇴와 셀주크 제국의 부상
10세기에 이르러 아바스 왕조는 이전 영토 대부분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 많은 지방 총독들은 툴룬 왕조, 이흐시드 왕조, 하마단 왕조 등 자신들만의 왕조를 세웠다. 이 새로운 왕조들은 아바스 칼리프를 무슬림 세계의 상징적인 수장으로 인정했지만, 제국 중앙 정부의 통제는 거부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아바스 왕조는 칼리프가 예언자의 후계자라는 종교적 권위를 통해 무슬림 세계에 대한 정신적 지도력을 유지하려 했다.1055년, 셀주크 제국의 통치자 투그릴은 아바스 칼리프 알-카임의 요청을 받아 부와이 왕조로부터 바그다드를 점령했다. 그러나 셀주크인들 역시 칼리프를 표면적으로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을 뿐, 실제로는 칼리프가 세속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막으며 실권을 장악했다.
칼리프 알-무스타르시드(재위 1118년–1135년)는 16년간 통치했지만, 마지막 3년은 셀주크 술탄 기야스 앗딘 마수드와의 전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마수드는 1133년 1월, 칼리프로부터 바그다드에서 술탄 칭호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칼리프와 대립했다. 알-무스타르시드는 마수드를 상대로 군사 작전을 개시했으나, 하마단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자신의 군대에 의해 버려져 포로가 되었다. 그는 궁전을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사면되었으나, 술탄이 자리를 비운 사이 천막에서 코란을 읽던 중 암살단에 의해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현대 역사가들은 마수드가 암살을 사주했을 가능성을 제기하지만, 당대의 주요 역사가인 이븐 알-아시르와 이븐 알자우지는 이 문제에 대해 명확한 언급을 남기지 않았다. 알-무스타르시드는 붉은 머리카락과 푸른 눈, 주근깨를 가진 외모였다고 전해진다.[1]
아버지의 죽음에 복수하고자 했던 새로운 칼리프 알-라시드 빌라는 술탄 마수드의 사절을 모욕하며 갈등을 키웠다. 이에 마수드는 1136년 아바스 왕조의 수도 바그다드를 공격하여 50일간의 공방전을 벌였다. 공방전 중 바그다드 주민들은 칼리프에게 등을 돌리고 타히리드 궁전을 약탈했다. 결국 알-라시드는 모술로 도망쳐 칼리프 자리에서 물러났고, 그의 삼촌인 알-무크타피가 새로운 칼리프로 즉위했다.
2. 2. 알 무스타르시드와 마수드의 갈등
10세기 들어 아바스 왕조는 과거 영토 대부분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다. 많은 총독들이 독자적인 왕조를 세웠지만, 아바스 칼리프는 이슬람 세계의 정신적 지도자로서의 지위는 유지할 수 있었다. 새로운 왕조들(툴룬 왕조, 이흐시드 왕조, 하마단 왕조 등)도 칼리프를 예언자 무함마드의 후계자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1055년, 셀주크 제국의 통치자 투그릴은 알-카임 칼리프의 요청으로 부와이 왕조로부터 바그다드를 점령하며 셀주크 세력의 영향력이 커지게 되었다.알-무스타르시드(재위 1118년 ~ 1135년)는 16년간 칼리프로 재위했지만, 마지막 3년은 셀주크 술탄 기야스 앗딘 마수드와의 전쟁으로 얼룩졌다. 마수드는 1133년 1월, 바그다드에서 알-무스타르시드로부터 술탄 칭호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의 갈등은 깊어졌다. 알-무스타르시드는 마수드를 상대로 군사 작전을 시작했고, 두 군대는 하마단 근처에서 맞붙었다. 그러나 알-무스타르시드는 자신의 군대로부터 버림받고 포로로 잡혔다. 그는 궁전을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사면받았다.
하지만 술탄 마수드가 자리를 비운 사이, 알-무스타르시드는 자신의 천막에서 코란을 읽던 중 암살단의 사주를 받은 자들에게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현대 역사가들은 마수드가 암살을 지시했을 가능성을 제기하지만, 당대의 주요 역사가인 이븐 알-아시르와 이븐 알자우지는 이에 대해 명확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알-무스타르시드는 붉은 머리카락과 푸른 눈, 주근깨가 있는 외모였다고 전해진다.[1]
2. 3. 알 라시드 빌라와 1136년 바그다드 공방전
10세기 들어 아바스 왕조는 과거 영토의 상당 부분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 많은 총독들이 독자적인 왕조를 세웠고, 중앙 정부는 제국 내 분리 독립 움직임을 막지 못했다. 하지만 툴룬 왕조, 이흐시드 왕조, 하마단 왕조 등 새롭게 등장한 국가들이 아바스 칼리프를 이슬람 세계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예언자의 후계자로 인정했기 때문에, 아바스 왕조는 종교적 권위는 유지할 수 있었다. 1055년, 셀주크 제국의 통치자 투그릴은 알-카임 칼리프의 위임을 받아 부와이 왕조로부터 바그다드를 점령했다.알-무스타르시드(재위 1118–1135)는 16년간 칼리프로 재위했지만, 마지막 3년은 셀주크 술탄 기야스 앗딘 마수드와의 전쟁으로 얼룩졌다. 마수드는 칼리프의 대리인이었으나 둘 사이의 갈등은 깊어졌다. 다마스쿠스 공방전 직후, 알-무스타르시드는 1133년 1월, 마수드를 상대로 군사 작전을 시작했다. 마수드는 이미 바그다드에서 칼리프로부터 술탄 칭호를 받은 상태였다. 두 군대는 하마단 근처에서 격돌했으나, 알-무스타르시드는 자신의 군대로부터 버림받고 포로가 되었다. 그는 궁전을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사면받았다. 그러나 술탄 마수드가 자리를 비운 사이, 칼리프는 자신의 천막에서 코란을 읽던 중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암살은 암살단(Hashshashin)의 소행으로 알려졌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마수드가 살인을 배후에서 조종했을 가능성을 의심한다. 다만 당대의 주요 역사가인 이븐 알-아시르와 이븐 알자우지는 이 문제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알-무스타르시드는 붉은 머리에 푸른 눈, 주근깨가 있는 외모였다고 전해진다.[1]

아버지 알-무스타르시드의 죽음에 대한 복수심에 불탄 새로운 칼리프 알-라시드 빌라는 술탄 마수드가 보낸 사절을 모욕하며 적대감을 드러냈다. 이에 마수드는 1136년 바그다드를 공격하여 50일간의 공방전이 벌어졌다. 공방전이 길어지자 바그다드 주민들은 칼리프 알-라시드에게 등을 돌리고 반란을 일으켜 타히리드 궁전을 약탈하기까지 했다. 결국 알-라시드는 모술로 도망쳐 칼리프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의 삼촌인 알-무크타피가 새로운 칼리프로 즉위했고, 폐위된 알-라시드 빌라는 동쪽으로 망명했다.
3. 공성전의 전개
(내용 없음)
3. 1. 셀주크 군의 진격과 칼리프의 방어 준비
1157년, 셀주크 술탄 무함마드 2세 이븐 마흐무드는 3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아바스 왕조의 수도 바그다드로 진격했다. 그의 동맹인 모술의 아타베그 쿠트브 앗딘 마우두드 역시 이라크 중부의 칼리프령 영토를 점령하기 위해 진격해왔다.[1] 1157년 1월 12일, 무함마드의 군대는 바그다드 서쪽 성벽에 도달했다.[1]이에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알무크타피는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힐라와 와시트에 주둔 중이던 모든 병력을 바그다드로 소집했다.[1] 그러나 2월이 되자, 칼리프는 티그리스강 서쪽의 도시 구역을 방어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는 서안 지구를 포기하고, 티그리스 강을 건너는 모든 다리를 파괴하라고 명령한 뒤 도시의 동쪽으로 거처를 옮겼다.[1] 무함마드의 군대는 큰 저항 없이 폐허가 된 바그다드 서부를 점령하고 그곳에 진영을 세웠다.[1]
한편, 칼리프 알무크타피는 바그다드 동쪽 지구의 방어 태세를 강화하는 데 집중했다. 성벽 위에는 여러 대의 투석기와 발리스타, 쇠뇌, 노포가 설치되었다.[1] 칼리프는 또한 바그다드 주민들에게 갑옷과 무기를 지급하여 무장시키고, 그들을 칼리프의 적으로 싸우도록 부추겼는데, 그는 칼리프, 즉 예언자의 계승자이자 움마의 지도자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기 때문에 셀주크 군대를 불신자라고 불렀다.[1] 또한, 재상 아운 앗딘 이븐 후바이라에게 부상당한 모든 병사에게 금화 5디나르를 지급하도록 명령하여 군대의 사기를 높였다.[1]
3월 4일, 술탄 무함마드와 그의 동맹군(쿠트브 앗딘의 재상 자인 앗딘이 지휘)은 바그다드 동쪽 지구에 대한 포격을 시작으로 총공격을 감행했다.[1] 그러나 바그다드 군대는 도시 민간인들의 용맹한 저항과 나프타를 활용하는 특수 부대(나파툰)의 활약에 힘입어 셀주크 군대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1][2]
3. 2. 초기 전투와 양측의 공방
1157년, 셀주크 술탄 무함마드 2세 이븐 마흐무드는 3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압바스 칼리파국의 수도 바그다드로 진격했다. 그의 동맹인 모술의 아타베그 쿠트브 앗딘 마우두드 역시 이라크 중부에 있는 칼리프의 영토를 점령하기 위해 모술에서 출발했다.[1] 1157년 1월 12일, 무함마드의 군대는 바그다드 서쪽 성벽에 도달했다. 이에 칼리프 알무크타피는 힐라와 와시트에 주둔 중이던 병력을 수도 방어를 위해 소집했다.[1]2월이 되자, 칼리프 알무크타피는 티그리스강 서쪽의 바그다드를 방어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는 서쪽 도시 지역을 포기하고, 티그리스강을 건너는 모든 다리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린 뒤 도시 동쪽으로 거처를 옮겼다.[1] 무함마드는 별다른 저항 없이 폐허가 된 바그다드 서부를 점령하고 그곳에 진영을 세웠다.[1] 한편, 칼리프는 도시 동쪽 지구의 방비를 강화했다. 성벽에는 다수의 쇠뇌와 발리스타가 설치되었다.[1] 칼리프는 또한 바그다드 시민들을 징집하여 무기와 갑옷을 지급하고, "예언자의 계승자이자 신도들의 왕자인 칼리프에게 맞서는 불충한 자들"이라며 셀주크 군대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시켰다.[1] 그는 재상 아운 앗딘 이븐 후바이라에게 부상당한 모든 병사에게 금화 5디나르씩 지급하라고 명하며 사기를 높였다.[1]
3월 4일, 술탄 무함마드와 그의 동맹인 쿠트브 앗딘의 재상 자인 앗딘은 바그다드 동쪽 지구에 대한 포격을 시작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바그다드 군대는 도시 민병대인 나파툰(그리스의 불과 유사한 인화성 물질을 사용하는 부대)의 활약과 시민들의 용기에 힘입어 이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1][2]
3월 29일, 셀주크 군대는 파괴되었던 다리 중 일부를 복구하고 다시 동쪽 지구를 공격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칼리프의 군대와 민병대, 나파툰의 거센 저항에 부딪혀 쇠뇌 등 장비를 잃고 후퇴해야 했다.[1] 셀주크 군대가 대형 망치를 이용해 성문을 부수려 시도했지만, 성벽에 설치된 쇠뇌 공격으로 망치를 파괴당했다.[1] 이후 양측은 결정적인 성과 없이 소규모 접전을 반복했다.[1]
6월 29일, 술탄 무함마드는 미리 준비한 사다리를 이용해 성벽을 오르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전투 중 발생한 화재로 사다리가 모두 불타버려 실패로 돌아갔다.[1] 이러한 교착 상태 속에서, 쿠트브 앗딘의 형제인 누르 앗딘 마흐무드는 동생이 칼리프의 영토를 공격하는 것을 비난하며 셀주크와의 동맹을 파기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자인 앗딘은 공성전을 포기하고 모술로 돌아갔다.[1]
무함마드 역시 자신의 본거지인 하마단이 형제 말리크 샤에게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퇴각을 심각하게 고려하게 되었다.[1] 공성전을 계속하는 것이 실익이 없다고 판단한 술탄은 결국 바그다드에서 군대를 철수시켜 자신의 왕좌를 되찾기 위한 싸움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1157년 7월 13일, 바그다드 공성전은 칼리프 측의 방어 성공으로 막을 내렸다.[1]
3. 3. 공성전의 종결
3월 29일, 셀주크군은 다리 하나를 복구하고 바그다드 동쪽으로 건너가 공격을 재개했다. 그러나 칼리프의 군대와 바그다드 민병대, 그리고 화공 부대('나프툰')의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 이 과정에서 셀주크군은 투석기와 공성 망치 등 공성 무기를 잃고 후퇴해야 했다. 이후 양측은 결정적인 성과 없이 소규모 교전을 반복했다.6월 29일, 술탄 무함마드는 미리 준비한 400개의 사다리를 이용해 성벽을 오르려 했으나, 바그다드 수비군의 격렬한 화력 공격과 방어로 인해 많은 사상자를 내고 실패했다. 일부 기록에는 화재로 사다리가 소실되었다고도 한다.
한편, 장기 왕조의 누르 앗딘은 자신의 동생 자인 앗딘이 칼리프의 영토를 공격하는 것을 비난하며 셀주크와의 동맹을 파기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자인 앗딘은 공성전을 포기하고 모술로 돌아갔다.
결정적으로 술탄 무함마드는 자신의 본거지인 하마단이 동생 말리크 샤에게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공성전을 계속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술탄은 결국 바그다드에서 철수하여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한 싸움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1157년 7월 13일, 바그다드 공방전은 칼리프 측의 수성 성공으로 막을 내렸다.

4. 공성전의 결과 및 영향
(작성할 내용 없음)
4. 1. 아바스 왕조와 셀주크 제국의 관계 변화
10세기에 접어들면서 아바스 칼리프조는 대부분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상실했다. 많은 지방 관리들이 툴룬 왕조, 이흐시드 왕조, 함단 왕조 등 독자적인 왕조를 세웠다. 이들은 아바스 칼리프를 무슬림 세계의 상징적인 지도자로 인정했지만, 제국 중앙 정부의 통제는 거부했다. 1055년, 아바스 칼리프 알카임의 요청을 받은 셀주크 제국의 투그룰이 부와이흐 왕조로부터 바그다드를 점령했다. 그러나 셀주크 세력 역시 칼리프를 명목상으로만 존중했을 뿐, 칼리프가 실질적인 세속 통치에 관여하는 것은 막았다.4. 2. 중동 지역의 정세 불안
10세기에 이르러 압바스 칼리프조는 대부분 지역에서 통치권을 상실했다. 많은 지방 관리들은 툴룬조, 이흐쉬드조, 함단조 등 자신들만의 왕조를 세웠다. 이들은 압바스 칼리프조의 칼리프를 무슬림 세계의 상징적인 지도자로 인정했지만, 제국 중앙 권력의 통제는 거부했다. 1055년, 압바스 칼리프조의 칼리프 알카임의 요청을 받은 셀주크 제국의 투그룰은 바그다드를 부와이흐조로부터 빼앗았다. 그러나 셀주크인들 역시 칼리프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칼리프가 세속적인 통치에 참여하는 것은 막았다.참조
[1]
서적
The Crusades Through Arab Eyes
https://books.google[...]
Saqi
2012-07-15
[2]
웹사이트
Copper alloy dirham of Qutb al-Din Mawdud ibn Zengi, al-Mawsil, 556 H. 1917.215.1000
https://numismatics.[...]
American Numismatic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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