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실리 스탈린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바실리 스탈린은 조세프 스탈린의 아들로, 1921년에 태어났다. 그는 군 경력을 쌓아 공군에서 복무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여러 훈장을 받았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빠른 승진을 거듭했지만, 아버지 사망 후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석방 후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했으며, 여러 미디어에서 묘사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바실리 스탈린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 |
| 본명 | 바실리 이오시포비치 스탈린 주가시빌리 |
| 출생 | 1921년 3월 21일 |
| 출생지 | 모스크바,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
| 사망 | 1962년 3월 19일 |
| 사망지 | 카잔, 타타르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소비에트 연방 |
| 군사 경력 | |
| 소속 | 소비에트 연방 |
| 군종 | 소비에트 공군 |
| 복무 기간 | 1938년 – 1953년 |
| 최종 계급 | 공군 중장 |
|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바르바로사 작전 베를린 전투 |
| 소속 부대 | 제1차 발트 전선군 제1차 벨로루시 전선군 |
| 훈장 | 붉은 깃발 훈장 |
| 가족 관계 | |
| 아버지 | 이오시프 스탈린 |
| 어머니 | 나데즈다 알릴루예바 |
| 자매 |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 |
| 이복형 | 야코프 주가시빌리 |
| 양형제 | 아르툠 세르게예프 |
| 배우자 | 갈리나 부르돈스카야 예카테리나 티모셴코 카피톨리나 바실리예바 마리야 누스베르크 |
| 자녀 | 알렉산드르 부르돈스키 |
2. 초기 생애
1921년 3월 21일, 바실리 스탈린은 조세프 스탈린과 나데즈다 알릴루예바 사이에서 태어났다.[1] 그는 아버지의 첫 번째 부인인 카토 스바니제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이복형 야코프 주가시빌리(1907년생)와 1926년에 태어난 여동생 스베틀라나가 있었다.[2][3] 가족은 조세프의 절친인 표도르 세르게예프의 아들인 아르템 세르게예프를 함께 키웠는데, 표도르가 아르템이 태어난 지 4개월 만에 사고로 사망했기 때문이다.[4]
어머니 나데즈다가 직업적인 경력을 추구했기 때문에, 유모인 알렉산드라 비초코바가 바실리와 스베틀라나를 돌보았다.[5] 바실리는 아버지의 관심을 끌기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편지를 썼지만, 스탈린은 응답하지 않았다.[12]
바실리는 최고 지도자의 아들이었지만 특별 대우를 받지 않고 일반인과 같은 교육을 받았으며, 호위 없이 노면 전차를 타고 통학했다. 1938년, 17세의 바실리는 군 복무를 희망하여 크리미아(Крым)의 카친 항공학교 입학을 희망했다. 이때 스탈린의 측근이었던 라브렌티 베리야에게 명령하여 은밀히 추천서를 쓰게 했다.
2. 1. 어머니의 자살과 그 영향
1932년 11월 9일, 바실리의 어머니 나데즈다 알릴루예바는 자살했다.[6] 아이들에게는 어머니가 맹장염 합병증인 복막염으로 사망했다고 알려졌지만, 10년 후에야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었다.[7] 스베틀라나는 훗날 어머니의 죽음이 오빠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회상했다. 그녀는 바실리가 13세에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술에 취하면 그녀를 욕하고 공격했다고 언급했다.[8] 그는 특히 스베틀라나에게 점점 더 폭력적으로 변했고, 모스크바 외곽의 다차인 주발로보에서 난폭하게 행동했다.[9]알릴루예바가 사망한 후, 조세프 스탈린은 더 이상 자녀들을 방문하지 않았다. 바실리와 그의 여동생은 유모와 스탈린의 경호원장만이 돌보았다. 아버지가 없는 바실리는 아버지를 위해 경호원으로 일했던 헝가리인 카로이 파우커와 가까워졌다. 파우커는 소련 밖으로 자주 여행을 다녔고 어린 스탈린에게 선물을 가져왔지만, 대숙청 동안 그의 외국 국적과 해외 여행은 탄압의 표적이 되었고, 그는 1937년 8월에 처형당했다.[10] 스탈린은 다른 경호원들과도 시간을 보내며 그들과 함께 술을 마셨다. 그는 나중에 자신의 삶 전체가 "어른들, 경호원들 사이에서 보냈다"고 회상하며 그것이 "자신의 사생활과 성격 전체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고 말했다.[11]
3. 군 경력
바실리는 1933년 모스크바 25번 모델 학교에 입학했으나 성적이 좋지 않았고, 선생님들은 그의 나쁜 행실에 대해 아버지와 자주 이야기했다.[14] 1937년 2번 특수학교로 전학했지만, 그곳 교직원들도 그의 행실을 바꾸지 못했다. 1년 후, 17세가 된 바실리는 카차 군사 항공학교(Kacha Military Aviation School)에 입학했다.[15] 그는 처음에 포병학교에 다니고 싶었지만, 그의 이복형 야코프가 이미 포병학교에 입학해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그들이 같은 군 부대에 있기를 원하지 않았다.[16]
바실리의 아버지는 학교에 그의 이름 때문에 어떤 특혜도 주지 말라고 지시했고, 그가 일반적인 병영에서 생활하도록 요청했다. 바실리는 이 학교에서 상당히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1939년 아버지에게 보낸 보고서에는 그가 "[레닌-스탈린의 당의 대의에] 헌신적이며", "국제 및 국내 상황과 관련된 문제에 관심이 많고 정통하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보고서에는 바실리가 공부를 잘 하지 않고, 근무 중에 수염을 깎지 않았으며, "비행 중 발생하는 돌발 상황에 잘 대처하지 못한다"고도 적혀 있었다.[17] 그는 1940년 3월에 학교를 졸업했고, 최종 성적은 "우수"였으며 공군 중위 계급을 받았다.[18]
3. 1.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소련은 1941년 6월 22일 독일의 침공을 받았다. 바실리는 1941년 8월 전선에 배치되었고, 신분을 숨기기 위해 이바노프(Ivanov)라는 성을 사용했다.[20] 스탈린의 아들이었기에 전투에서 거의 비행하지 않았고, 비행할 때는 편대를 동반했다. 바실리는 29회의 전투 임무에 참여했고, 두 대의 적기를 격추했다고 한다.[20] 소련 지도자의 아들이었던 그는 아버지의 정보원이라고 생각하는 동료들에게 미움을 받았다.[21] 1942년 봄, 모스크바로 돌아와 공군 상태 점검 역할을 맡았고, 전쟁의 나머지 기간 동안 주로 모스크바에 머물렀다.[20]새로운 역할에 지루함을 느낀 바실리는 1943년 4월 4일 모스크바 강에 폭발물을 투하하는 사고를 일으켜 자신과 비행 기계사가 부상을 입고, 기계사는 사망했다.[22] 이 사고로 강등되었지만, 1년 반 만에 다시 공군 사단장으로 승진했다. 이후 장군으로 승진했고, 24세에 소장이 되어 적군에서 최연소 장군이 되었다.[23] 그는 붉은 깃발 훈장(두 번), 알렉산더 네프스키 훈장, 수보로프 훈장 등 여러 훈장을 받았다.[23]
1941년 독소전쟁 발발 당시 공군 참모본부 부속 감찰 비행사였던 바실리는 12월에 20세의 나이로 소좌로 임관, 포병 중위로 전선에서 중대를 이끌고 있던 형보다 먼저 진급했다. 몇 달 후인 1942년 2월에는 21세의 나이로 대좌에까지 승진했다. 실무에서는 26회의 출격으로 격추 2기, 협동 격추 3기의 전과를 올렸다.
3. 2. 전후 활동 및 승진
1946년 소장으로, 1947년 중장으로 승진했고, 1948년에는 모스크바 군관구 공군(Air Forces of the Moscow Military District) 사령관이 되었다.[23]전쟁 후 바실리는 스포츠, 특히 아이스하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공군을 대표하는 팀인 VVS 모스크바를 육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1946-47 시즌의 초대 감독 겸 선수로 아나톨리 타라소프를 영입했다.[24] 그러나 타라소프는 선수 선발 문제로 바실리와 갈등을 빚었고, 한 시즌 후 CDKA 모스크바(후에 CSKA 모스크바)로 팀을 옮겼다.[25] 1950년 1월 5일, VVS 팀을 태운 비행기가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추락하여 팀 전체가 사망했다.[26] 그럼에도 불구하고 VVS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바실리가 팀을 정리하기 전까지 1951년부터 1953년까지 3년 연속 소비에트 챔피언십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바실리는 일개 조종사로서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휘관으로서의 실무 경험이 전무했기 때문에 사실상 명예직에 불과했고, 본인에게도 의욕이 없었다. 따라서 지위를 이용하여 취미인 스포츠 진흥에 열정을 쏟았다.
4. 스포츠 진흥 활동
전쟁 후 바실리는 스포츠, 특히 아이스하키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공군을 대표하는 팀인 VVS 모스크바를 육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1946-47 시즌의 초대 감독 겸 선수로 아나톨리 타라소프를 영입했다.[24] 그러나 타라소프는 선수 선발 문제로 바실리와 갈등을 빚었고, 한 시즌 후 CDKA 모스크바(후에 CSKA 모스크바)로 팀을 옮겼다.[25]
1950년 1월 5일, VVS 팀을 태운 비행기가 스베르들롭스크에서 추락하여(1950 스베르들롭스크 항공기 추락 사고), 팀 전체가 사망했다.[26] 그럼에도 불구하고 VVS는 아버지 스탈린의 죽음 이후 바실리가 팀을 정리하기 전까지 1951년부터 1953년까지 3년 연속 소비에트 챔피언십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바실리는 하키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사생활을 보냈으며, 부인이 된 갈리나 불드스카야도 하키 선수 블라디미르 메니시코프(Владимир Менишиков)의 소개로 만났다. 바실리는 그녀에게 푹 빠져 매일 밤 꽃다발을 들고 오토바이로 집에 찾아갔으며, 그녀에게 자랑하기 위해 모스크바 강 상공을 비행기로 선회하는 일까지 했다고 한다. 결국 갈리나는 그의 정에 이끌려 결혼에 응했다.
그의 노력으로 10개의 스포츠 팀이 조직되었지만, 그중에서도 자신이 GM을 맡았던 하키 대표팀이 가장 자랑거리였다. 1950년, 하키 대표팀은 이동 중 낙뢰로 인한 비행기 사고로 전원이 사망하는 재난을 당했지만, 바실리는 자신에게 책임이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새로운 멤버를 모아 팀을 꾸몄다. 그때 아버지 스탈린에게도 조심스럽게 보고했지만, 애초에 하키를 포함한 스포츠 전반에 관심이 없던 그는 선수들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고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32]
5. 몰락과 체포
1953년 3월 5일, 요세프 스탈린이 사망했다. 바실리는 아버지의 사망 직후 도착하여 술에 취한 채 아버지가 독살당했다고 주장했다.[27] 아버지의 사망 후 바실리에게는 긴 고난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국방부는 그에게 모스크바를 제외한 어떤 군관구의 지휘권을 맡길 것을 제안했지만, 그는 모스크바만을 원했다. 바실리는 원하는 보직을 거부당하고 군에서 강제로 예편되었다.[28]
아버지 사망 후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은 1953년 4월 28일, 바실리는 외국 외교관들과 함께 식당을 방문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그는 "외국 통신원을 만나면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해 주겠다"라고 큰소리쳤다고 하며, 이 발언이 화근이 되어 스파이 혐의를 받았다. 그는 소비에트 연방 지도자들에 대한 폄하, 반소비에트 선전, 그리고 직무유기 혐의로 기소되어 8년형을 선고받았다.[29] 재판은 비공개로 진행되었고, 그는 변호인의 조력을 받지 못했다.
1953년 12월, 그의 후원자였던 베리야가 스탈린 사후의 정치 투쟁에서 패배하여 처형되었다. 새롭게 등장한 니키타 흐루쇼프는 스탈린파에 대한 숙청을 진행했고, 바실리의 입지는 더욱 악화되었다. 그는 게오르기 말렌코프와 흐루쇼프에게 온정적인 결정을 간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약식 재판에서 징역 8년이 선고되었다.
흐루쇼프와 말렌코프에게 사면을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바실리 파블로비치 바실리예프"라는 이름으로 블라디미르의 특별 교도소(블라디미르 중앙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1960년 1월 11일에 석방되었다.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그에게 300RUB의 연금, 모스크바의 아파트, 그리고 키슬로보츠크에서 3개월간의 요양 휴가를 제공했다. 또한 그는 장군복과 모든 군 공훈 훈장을 착용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6. 투옥과 석방
아버지 요세프 스탈린이 사망한 직후, 바실리는 술에 취한 채 아버지가 독살당했다고 주장했다.[27] 아버지의 사망 후 바실리에게는 긴 고난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국방부는 그에게 모스크바를 제외한 어떤 군관구의 지휘권을 맡길 것을 제안했지만, 그는 모스크바만을 원했다. 바실리는 원하는 보직을 거부당하고 군에서 강제로 예편되었다.[28]
아버지 사망 후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은 1953년 4월 28일, 바실리는 외국 외교관들과 함께 식당을 방문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그는 소비에트 연방 지도자들에 대한 폄하, 반소비에트 선전, 그리고 직무유기 혐의로 기소되어 8년형을 선고받았다.[29] 재판은 비공개로 진행되었고, 그는 변호인의 조력을 받지 못했다. 새로운 소비에트 지도자들인 니키타 흐루쇼프와 게오르기 말렌코프에게 사면을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바실리 파블로비치 바실리예프(Vasily Pavlovich Vasilyev)"라는 이름으로 블라디미르의 특별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1960년 1월 11일에 석방되었다.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그에게 300루블의 연금, 모스크바의 아파트, 그리고 키슬로보츠크에서 3개월간의 요양 휴가를 제공했다. 또한 그는 장군복과 모든 군 공훈 훈장을 착용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1960년 1월 11일, 바실리는 예정보다 1년 정도 일찍 석방되었다. 석방 당시 정치 상황은 완화되고 있었으며, 전 장교로서 모스크바 시내 주택과 연금 300RUB이 지급되었다. 또한 공군 중장 시절 군복과 훈장 착용도 허가되었다. 그러나 바실리는 알코올 중독되었고, 그의 행실은 모스크바에도 알려졌다. 1960년 4월 9일, 크렘린에서 아버지 스탈린의 옛 친구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를 만나 금주를 강력하게 권유받았다. 4월 15일, 바실리는 치료를 위한 입국 허가를 중국 대사관에 요청했지만, 마침 중소 분쟁 한창이었기에 무산되었다. 최고회의 간부회는 그의 석방 취소와 명예 박탈을 결정하고 카잔으로 추방했다.
1962년 3월 19일, 카잔에서 급성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확실하지 않다. 2002년 11월, 모스크바의 트로예쿠로프스코예 묘지로 개장되었다.
7. 사망
바실리는 41세 생일 5일 전인 1962년 3월 19일 만성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했으며, 아르스코예 묘지에 매장되었다.[31] 1999년 소련 반대 선전 혐의(1953년 기소)가 군사 법원에 의해 기각되면서 부분적으로 복권되었다. 그의 시신은 2002년 네 번째 부인 옆 모스크바 묘지에 다시 매장되었다.[31]
1962년 3월 19일, 카잔에서 급성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확실하지 않다. 2002년 11월, 모스크바의 트로예쿠로프스코예 묘지로 개장되었다.
8. 사생활
바실리는 1921년 3월 21일 조세프 스탈린과 나데즈다 알릴루예바 사이에서 태어났다.[1] 그는 아버지와 카토 스바니제 사이에서 태어난 이복형 야코프 주가시빌리(1907년생)와 여동생 스베틀라나(1926년생)가 있었다.[2][3]
어머니 나데즈다가 직업적인 경력을 추구하는 데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유모인 알렉산드라 비초코바가 바실리와 스베틀라나를 돌보았다.[5] 1932년 11월 9일, 바실리의 어머니는 자살했다.[6] 아이들에게는 어머니가 맹장염 합병증인 복막염으로 사망했다고 알려졌으나, 10년 후에야 어머니 죽음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7] 스베틀라나는 어머니의 죽음이 오빠에게 큰 영향을 미쳐, 13세에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술에 취해 자신을 욕하고 공격했다고 언급했다.[8]
1940년 12월 31일, 19세의 나이로 모스크바 국립 인쇄 예술 대학교 학생 갈리나 부르돈스카야와 결혼했다.[18][19] 바실리는 하키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부인이 된 갈리나 불드스카야도 하키 선수 블라디미르 메니시코프의 소개로 만났다고 한다. 바실리는 그녀에게 푹 빠져 매일 밤 꽃다발을 들고 오토바이로 집에 찾아가고, 그녀에게 자랑하기 위해 모스크바 강 상공을 비행기로 선회하는 일까지 했다고 하며, 정에 이끌린 갈리나는 결혼에 응했다고 한다.
전쟁 후 바실리는 스포츠, 특히 아이스하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공군을 대표하는 팀인 VVS 모스크바 육성에 도움을 주었고, 1946-47 시즌의 초대 감독 겸 선수로 아나톨리 타라소프를 영입했다.[24] 그러나 타라소프는 선수 선발 문제로 바실리와 갈등을 빚었고, 한 시즌 후 CDKA 모스크바(후에 CSKA 모스크바)로 팀을 옮겼다.[25]
그의 노력으로 10개의 스포츠 팀이 조직되었지만, 그중에서도 자신이 GM을 맡았던 하키 대표팀이 가장 자랑거리였다. 1950년, 하키 대표팀은 이동 중 낙뢰로 인한 비행기 사고(1950 스베르들롭스크 비행기 추락 사고)로 전원이 사망했지만,[26] 바실리는 자신에게 책임이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새로운 멤버를 모아 꾸몄다고 한다. 그때 아버지 스탈린에게도 조심스럽게 보고했지만, 애초에 하키(를 포함한 스포츠 전반)에 관심이 없던 그는 선수들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고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32]
바실리는 41세 생일 5일 전인 1962년 3월 19일 만성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했으며, 아르스코예 묘지에 매장되었다.[31]
9. 수상 내역
![]() | 레닌그라드 방위훈장 3회 (1942년 6월 20일, 1944년 7월 2일, 1948년 6월 22일) |
![]() | 수보로프 훈장 2급 (1945년 5월 29일) |
|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훈장 (1943년 11월 3일) | |
| 전투공로훈장 (1948년) | |
![]() | 모스크바 방위훈장 (1944년 5월 1일) |
![]() | 스탈린그라드 방위훈장 (1942년) |
![]() | 독일전 승리 훈장 (1945년) |
![]() | 베를린 함락 훈장 (1945년) |
![]() | 바르샤바 해방 훈장 (1945년) |
![]() | 소련군 창설 30주년 기념 훈장 (1948년 2월 22일) |
![]() | 모스크바 건설 800주년 기념 훈장 (1947년) |
| 그룬발트 십자 훈장 3급 (폴란드, 1945년) | |
| 바르샤바 1939-1945 훈장 (폴란드, 1945년) | |
| 오데르-나이세-발틱 훈장 (폴란드, 1945년) |
참조
[1]
harvnb
[2]
harvnb
[3]
harvnb
[4]
harvnb
[5]
harvnb
[6]
harvnb
[7]
harvnb
[8]
harvnb
[9]
harvnb
[10]
harvnb
[11]
harvnb
[12]
harvnb
[13]
harvnb
[14]
harvnb
[15]
harvnb
[16]
harvnb
[17]
harvnb
[18]
harvnb
[19]
harvnb
[20]
harvnb
[21]
harvnb
[22]
harvnb
[23]
harvnb
[24]
harvnb
[25]
harvnb
[26]
harvnb
[27]
harvnb
[28]
harvnb
[29]
harvnb
[30]
harvnb
[31]
harvnb
[32]
뉴스
Crash Wipes Out Elite Russian Hockey Team, Killing Several Veterans of the N.H.L.
http://www.nytimes.c[...]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