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박진경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박진경은 1918년(혹은 1920년) 경상남도 남해군 출생으로, 진주고등보통학교와 오사카외국어대학을 졸업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학병으로 징집되어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광복 후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조선경비대에서 복무했다. 그는 제9연대장과 제11연대장을 역임하며 제주 4.3 사건 진압 작전을 지휘하던 중 1948년 6월 18일 부하들에게 암살당했다. 박진경의 진압 작전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며, 그의 행적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진주고등보통학교 동문 - 이봉조
    이봉조는 '한국의 스탠 게츠'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대한민국의 재즈 색소폰 연주자이자 작곡가, 영화 음악 감독으로, 1960년대부터 다양한 히트곡을 작곡하고 영화 음악감독으로 활동하며 1981년 문화공보부 문화산업자문위원을 지냈다.
  • 제주 4·3 사건 관련자 - 이정재 (1917년)
    이정재는 일제강점기부터 한국 전쟁 이후까지 활동한 폭력배이자 정치 깡패로, 경찰 출신으로 동대문 상인 연합회 회장을 역임하며 자유당과의 유착을 통해 정치 테러에 가담했으나, 4·19 혁명과 5·16 군사정변을 거치며 사형당해 권력과 배신의 삶을 마감했다.
  • 제주 4·3 사건 관련자 - 송요찬
    송요찬은 일제강점기 일본군 부사관으로 복무하고 대한민국 국군 소위로 임관하여 4·3 사건 진압을 지휘했으며, 5·16 군사정변 이후 요직을 두루 거쳤으나 정치적 갈등으로 구속된 인물이다.
  • 암살된 군인 - 김창룡
    김창룡은 일제강점기 관동군 헌병으로 항일 조직 색출에 참여한 군인으로, 해방 후 대한민국 육군에서 정보 및 방첩 업무를 담당하며 숙군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특무부대장으로서 인권 침해 및 사건 조작 의혹, 김구 암살 사건 연루 의혹 등 각종 논란 속에 암살당해 역사적 평가가 엇갈린다.
  • 암살된 군인 -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은 30년 전쟁 당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위해 활약한 보헤미아 출신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축적했으나 독자적인 행보로 인해 암살당했다.
박진경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일본군으로 제주 복무후 4.3때 제주도민 학살주범
일본군으로 제주 복무후 4.3때 제주도민 학살주범
이름박진경
현지어 표기朴珍景
출생일1918년 12월 22일
출생지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남해군
사망일1948년 6월 18일
사망지대한민국 제주도 북제주군
배우자진양정공 정임환의 딸 정봉운
자녀양자 그 백형인 진용 씨의 아들 익주 군을 입양
박익주(朴翊柱) 1야전군 정보처장, 제5관구 부사령관을 거쳐 1980년 육군 준장 예편, 제11대, 12대 국회의원(경남 하동·남해)
부모박병철의 5남
본관밀양박씨(密陽朴氏) 밀성대군(密城大君)
군 경력
복무일본군 38군단 소위 (제주도에서 근무)
국방경비대 총사령부 인사국장
조선경비대 제9연대장 (중령) /11연대장 (대령진급 1948년6월1일부)
복무 기간1946년 2월부터 1948년 6월 18일
최종 계급대령
지휘제주도 4.3 사건
서훈 내역1950년 12월 30일 을지무공훈장
기타 이력대한민국 건군기의 군인. 김익렬 중령의 뒤를 이어 제9연대장이 되었다가 제 11연대장이 되어 제주 4.3 사건 초기 남로당 무장대에 대한 대유격작전을 지휘하였으나 암살당했다.
박진경의 장례식은 육군장 제1호로 기록되었다. 1952년 11월 7일 제주도민 및 군경후원회 명의로 박대령순직충혼비를 세웠다.

2. 생애

1918년(혹은 1920년) 12월 22일 경상남도 남해군 남면 홍현리에서 박병철의 5남으로 출생했다.[2][3] 진주고등보통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일본 오사카외국어대학 영어과 졸업 후 제2차세계대전 시에는 학병으로 징집되어 일본 마쓰도 육군공병 예비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공병 소위로 임관 되어 제주도에서 복무하였다.[2][3] 그리고 8.15 광복 이후에는 부산에서 우파단체인 경남국군준비대와 부설 군관학교에서 활동하다가 제5연대 창설 요원으로 1946년 1월 29일에 용사(이등중사)로 입대하였으며 우수하사관으로 추천되어 소위로 현지 임관(1946.4.25)[2] 하였다.[3] 그리고 1중대 보급관과 중대 인사계, 1대대 부관(현재 인사장교), 연대부관을 거쳐서 송호성 조선경비대 총사령관 전속부관과 비서실장 등을 거쳐 경비대 사령부 인사국장이 되었다.[4] 그리고 1948년 5월 6일~15일까지 제9연대장, 1948년 5월 15일부터 6월 18일 새벽 암살 시까지 제11연대장(33일) 등을 역임했다. 박진경은 11연대장으로서 1948년 5월 30일부터 6월 17일까지 남로당이 일으킨 제주 4.3 사건의 진압작전을 끝내고 그날밤에 제주도 지사가 베푼 대령진급축하연에 참석하고 돌아와 취침중에 부하들인 남로당 프락치들에게 암살 당했다.

제주 4.3 사건이 발발했는데 경찰력으로는 진압이 어렵자 미군정은 경비대 투입을 결정하였는데 4월 20일에 경비대 제5연대에서 1개 대대(대대장 오일균, 5월1일부로 제11연대 1대대)가 제주도에 투입되었다. 한편,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은 남로당 유격대 사령관 김달삼과 회담을 하였고 5월 5일에는 딘 군정장관이 주재한 회의에서 조병옥 경무부장과 몸싸움을 한 후 다음날로 해임되었다. 경비대 사령부는 진압부대로 5월1일부로 창설된 제11연대를 지명하였고 진압부대 지휘관으로 박진경 중령을 임명하였다. 1948년 5월6일, 박진경 중령은 제9연대(실병력 1개대대)장에 취임하였다. 이어 박진경 중령은 제주도로 이동한 제11연대장(3개대대)장에 5월 15일부로 취임하게 되고 제9연대 1 대대를 배속받음으로써 4개 대대를 지휘하게 된다.[5] 그리고 사상이 의심스러운 1대대장 오일균 소령을 사령부로 보내고 11연대의 2개 대대와 9연대 1개 대대 등 3개 대대장(대위 서종철, 대위 김용주, 대위 고근흥)을 5월 24일 충원 받았고 연대 참모 자문 요원 3명(대위 최갑중, 중령 김종평, 소령 백선진)도 보강된 후인 5월30일부터 4개 대대로 진압작전을 전개한다.

진압작전은 경찰이 해안에서 5Km까지 해안 지역을 담당하고 경비대는 5Km 이상되는 산악지역을 담당하였는데 5월 30일부터 6월 2일까지 4일간은 제주도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수색하는 것이고 6월 14일부터 17일까지 4일간은 한라산을 4개 방향에서 포위하여 한라산 정상쪽으로 수색하는 것이었다.[6] 작전이 끝난 후 밤에 도지사가 베푸는대령진급 축하연에 참석하였다가 돌아와서 집무실에서 취침 중, 18일 새벽 3시경 공산 프락치인 문상길 중위 등 부하들에 의해 암살되었다. 그리고 장례는 육군장 제1호로 서울에서 치러졌다.

한편, 1948년 5월 6일 박진경 중령이 항공편으로 서울을 떠나 제주도로 향하자, 이를 탐지한 남로당 중앙당은 급히 지도원(올구)을 제주도로 보냈는데 지도원은 5월 7일에 제주도에 도착했고 3일 후인 5월 10일에는 남로당 제주도당 대표 2명(군사책임자 김달삼, 조직책임자 김양근)과 경비대 남로당 프락치 대표2명(11연대 1대대장 오일균 소령, 9연대 정보장교 이윤락 중위, 부관 나희필 소위는 대대장 수행요원) 등 4명이 박진경 연대장 숙청을 결정하였다.[7] 그리고 박진경 연대장 암살은 6월 18일 남로당 프락치인 문상길 중위 일당이 실행하였다. 따라서 암살은 남로당 중앙당 올구(지도원)의 지령으로 이루어졌으므로 암살범의 배후는 남로당 중앙당이다.(북한과 남로당의 주장: 박진경이 살인마 였고, 보다 못한 부하 장교인 23살 청년 문상길이 부하들과 함께 살인마를 처단한 것이다.)

2. 1. 초기 생애와 군 경력

경상남도 남해군 남면 홍현리에서 1918년(혹은 1920년) 12월 22일 박병철의 5남으로 태어났다.[2][3] 진주고등보통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오사카외국어대학 영어과를 졸업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학병으로 징집되어 일본 마쓰도 육군공병 예비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공병 소위로 임관 되어 제주도에서 복무하였다.[2][3]

광복 이후 부산에서 우파단체인 경남국군준비대와 부설 군관학교에서 활동하다가 1946년 1월 29일 제5연대 창설 요원으로 용사(이등중사)로 입대하였다.[2][3] 우수하사관으로 추천되어 1946년 4월 25일 소위로 현지 임관하였다. 1중대 보급관과 중대 인사계, 1대대 부관(현재 인사장교), 연대부관을 거쳐서 송호성 조선경비대 총사령관 전속부관과 비서실장 등을 역임했다. 이후 경비대 사령부 인사국장이 되었다.[4] 1948년 5월 6일부터 15일까지 제9연대장, 1948년 5월 15일부터 6월 18일 새벽 암살 시까지 제11연대장(33일) 등을 역임했다.

1948년 5월, 제주 4.3 사건 진압을 위해 제주도에 파견된 제11연대장으로 부임하여 4개 대대를 지휘하며 진압 작전을 수행했다.[5] 경찰이 해안 지역을, 경비대가 산악 지역을 담당하여 5월 30일부터 6월 2일까지, 그리고 6월 14일부터 17일까지 한라산을 중심으로 수색 작전을 펼쳤다.[6] 작전 종료 후, 6월 18일 새벽 남로당 프락치인 문상길 중위 등 부하들에 의해 암살되었다.[6][7] 그의 장례는 육군장 제1호로 서울에서 거행되었다.

남로당 중앙당은 박진경 중령의 제주도 파견을 탐지하고 지도원을 급파, 5월 10일 박진경 연대장 숙청을 결정하였다.[7] 이에 따라 6월 18일, 남로당 프락치인 문상길 중위 일당이 박진경을 암살하였다.

2. 2. 제주 4.3 사건 진압 작전

1918년(혹은 1920년) 12월 22일 경상남도 남해군 남면 홍현리에서 태어났다.[2] 진주고등보통학교와 일본 오사카외국어대학 영어과를 졸업하고 일본 마쓰도 육군공병 예비사관학교를 졸업 후 제2차세계대전 시 학병으로 징집되어 공병 소위로 제주도에서 복무하였다.[2] 광복 이후, 1946년 1월 29일 제5연대 창설 요원으로 입대하여 우수하사관으로 추천되어 소위로 현지 임관(1946.4.25) 하였다.[2][3] 이후 조선경비대 총사령관 전속부관, 비서실장, 경비대 사령부 인사국장 등을 역임했다.[4]

제주 4.3 사건이 발생하자 미군정은 경비대 투입을 결정, 1948년 5월 6일 제9연대장에 취임하였다.[5] 같은 해 5월 15일, 제주도로 이동한 제11연대장에 취임, 제9연대 1대대를 배속받아 총 4개 대대를 지휘하게 되었다.[5] 5월 24일에는 사상이 의심스러운 1대대장을 사령부로 보내고 3개 대대장(대위 서종철, 대위 김용주, 대위 고근흥)을 충원받았고, 연대 참모 자문 요원 3명(대위 최갑중, 중령 김종평, 소령 백선진)도 보강했다.[5]

1948년 5월 30일부터 6월 17일까지 남로당이 일으킨 4.3 사건 진압작전을 전개하였다.[6] 경찰은 해안 5km 이내 지역, 경비대는 5km 이상 산악지역을 담당했다.[6] 5월 30일부터 6월 2일까지는 제주도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6월 14일부터 17일까지는 한라산을 4개 방향에서 포위하여 정상으로 수색하는 작전을 펼쳤다.[6]

진압 작전 종료 후, 1948년 6월 18일 새벽 3시경, 제주도지사가 베푼 대령 진급 축하연에 참석 후 집무실에서 취침 중, 공산 프락치인 문상길 중위 등 부하들에 의해 암살당했다.[6] 장례는 육군장 제1호로 서울에서 치러졌다.[6]

남로당 중앙당은 1948년 5월 6일 박진경 중령이 제주도로 향하자 지도원(올구)을 급파, 5월 10일 남로당 제주도당 대표 2명과 경비대 내 남로당 프락치 대표 2명 등 4명이 박진경 연대장 숙청을 결정하였다.[7] 이에 따라 6월 18일 남로당 프락치인 문상길 중위 일당이 암살을 실행, 배후는 남로당 중앙당으로 밝혀졌다.[7] (북한과 남로당의 주장: 박진경이 살인마였고, 보다 못한 부하 장교인 23살 청년 문상길이 부하들과 함께 살인마를 처단한 것이다.)[7]

2. 3. 암살

1918년(혹은 1920년) 12월 22일 경상남도 남해군 남면 홍현리에서 출생한 박진경은 진주고등보통학교와 일본 오사카외국어대학 영어과를 졸업했다.[2][3]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학병으로 징집되어 일본 마쓰도 육군공병 예비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공병 소위로 임관, 제주도에서 복무하였다. 광복 이후 부산에서 우파단체 활동을 하다 1946년 1월 29일 용사(이등중사)로 입대, 우수하사관으로 추천되어 소위로 현지 임관하였다.[2][3]

조선경비대 총사령관 전속부관, 비서실장, 경비대 사령부 인사국장 등을 역임했다.[4] 1948년 5월 6일부터 15일까지 제9연대장, 5월 15일부터 6월 18일 암살 시까지 제11연대장(33일)을 역임했다.[5]

제주 4.3 사건 진압 작전(1948년 5월 30일 ~ 6월 17일)을 끝내고[6] 제주도 지사가 베푼 대령진급축하연에 참석하고 돌아와 취침 중, 6월 18일 새벽 3시경 부하인 남로당 프락치 문상길 중위 등에게 암살되었다.[6] 그의 장례는 육군장 제1호로 서울에서 치러졌다.

남로당 중앙당은 1948년 5월 6일 박진경 중령이 제주도로 향하자 지도원(올구)을 급파, 5월 10일 남로당 제주도당 대표 2명과 경비대 남로당 프락치 대표 2명이 박진경 연대장 숙청을 결정하였다.[7] 6월 18일 남로당 프락치인 문상길 중위 일당이 암살을 실행했다.

3. 논란

제주 4.3 사건 진압 당시에 사망했기 때문에 경상남도 지역에서는 국가유공자로 취급되어 왔다. 1952년 제주도 충혼묘지에 추도비가 세워졌고, 1990년 남해군 군민공원에 동상이 건립되었다.

민주화 이후, 4.3 당시 그가 시행했던 무차별 체포작전이 정말로 4.3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었냐부터 이전 사령관인 김익렬과의 비교에 이르기까지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그리하여 남해에서는 2005년에 그의 동상을 철거하려는 움직임이 시민단체들로부터 일었으나 동상은 현재도 여전히 남아 있다. 2017년에는 창원시의 현충일 추념식에서 박진경의 위패가 경남대표로 올라가 물의를 빚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 박진경 대령은 미군정의 지시에 따라 5.10 제헌의원 선거와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반대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을 위해 무장 투쟁을 하였던 제주도 남로당 인민 유격대에 대한 대유격작전(대게릴라 작전)을 한 것이다. 그의 산중 주민들에 대한 체포작전은 정상적인 대유격작전(현재 군 교리상 후방지역 작전중의 하나임)을 실시한 것이었다. 박진경 대령은 1948년 5월 6일 부임하여 6월 18일까지 총 2회의 연대급 작전을 실시하여 약 650여명의 포로를 포로 심문팀에 인계하는 등 대유격작전에서 요구되는 절차에 따라 작전을 한 것이다. 각종 1차 자료를 세부적으로 분석해 보면 작전간 사살 인원은 25명이었다. 이러한 작전결과를 두고 무차별 민간인 학살로 매도하는 것은 명백한 사실관계 왜곡이다. 박진경 연대장의 주민과 산중 인민유격대를 분리한 작전은 남로당 인민유격대의 강압으로 제주도 남로당의 5월 10일 선거에 대한 방해공작의 일환으로 인민유격대에 의해 강제로 산으로 끌려갔던 제주도 주민들이 다시 마을로 돌아오게 되었다.

3. 1. 제주 4.3 사건 진압 방식에 대한 비판

제주 4.3 사건 진압 당시에 사망했기 때문에 경상남도 지역에서는 국가유공자로 취급되어 왔다. 1952년 제주도 충혼묘지에 추도비가 세워졌고, 1990년 남해군 군민공원에 동상이 건립되었다.

민주화 이후, 4.3 당시 그가 시행했던 무차별 체포작전이 정말로 4.3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었냐부터 이전 사령관인 김익렬과의 비교에 이르기까지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그리하여 남해에서는 2005년에 그의 동상을 철거하려는 움직임이 시민단체들로부터 일었으나 동상은 현재도 여전히 남아 있다. 2017년에는 창원시의 현충일 추념식에서 박진경의 위패가 경남대표로 올라가 물의를 빚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 박진경 대령은 미군정의 지시에 따라 5.10 제헌의원 선거와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반대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을 위해 무장 투쟁을 하였던 제주도 남로당 인민 유격대에 대한 대유격작전(대게릴라 작전)을 한 것이다. 그의 산중 주민들에 대한 체포작전은 정상적인 대유격작전(현재 군 교리상 후방지역 작전중의 하나임)을 실시한 것이었다. 박진경 대령은 1948년 5월 6일 부임하여 6월 18일까지 총 2회의 연대급 작전을 실시하여 약 650여명의 포로를 포로 심문팀에 인계하는 등 대유격작전에서 요구되는 절차에 따라 작전을 한 것이다. 각종 1차 자료를 세부적으로 분석해 보면 작전간 사살 인원은 25명이었다. 이러한 작전결과를 두고 무차별 민간인 학살로 매도하는 것은 명백한 사실관계 왜곡이다. 박진경 연대장의 주민과 산중 인민유격대를 분리한 작전은 남로당 인민유격대의 강압으로 제주도 남로당의 5월 10일 선거에 대한 방해공작의 일환으로 인민유격대에 의해 강제로 산으로 끌려갔던 제주도 주민들이 다시 마을로 돌아오게 되었다.

3. 1. 1. 진보 진영의 비판

제주 4.3 사건 진압 당시에 사망했기 때문에 경상남도 지역에서는 국가유공자로 취급되어 왔다. 1952년 제주도 충혼묘지에 추도비가 세워졌고, 1990년 남해군 군민공원에 동상이 건립되었다.

민주화 이후, 4.3 당시 그가 시행했던 무차별 체포작전이 4.3 해결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었는지, 이전 사령관인 김익렬과의 비교 등에서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2005년 남해에서는 시민단체들이 동상 철거를 시도했으나, 동상은 현재도 남아있다. 2017년 창원시 현충일 추념식에서는 박진경의 위패가 경남대표로 올라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박진경은 미군정의 지시에 따라 5.10 제헌의원 선거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을 위해 무장 투쟁을 벌였던 제주도 남로당 인민 유격대에 대한 대유격작전을 수행한 것이다. 그의 산중 주민들에 대한 체포작전은 정상적인 대유격작전(현재 군 교리상 후방지역 작전 중 하나)이었다. 박진경은 1948년 5월 6일부터 6월 18일까지 총 2회의 연대급 작전을 실시하여 약 650여 명의 포로를 포로 심문팀에 인계하는 등 대유격작전 절차에 따라 작전을 수행했다. 각종 1차 자료를 분석해 보면 작전 간 사살 인원은 25명이었다. 이러한 작전 결과를 무차별 민간인 학살로 매도하는 것은 명백한 사실관계 왜곡이다. 박진경 연대장의 주민과 산중 인민유격대를 분리한 작전은 남로당 인민유격대의 강압으로 산으로 끌려갔던 제주도 주민들이 다시 마을로 돌아오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3. 1. 2. 보수 진영의 옹호

제주 4.3 사건 진압 당시에 사망한 것이기 때문에 그는 경상남도 지역에서 국가유공자로 취급되어 왔었다. 당장 제주도에서는 충혼묘지에 그의 추도비가 1952년 세워졌고, 창군동우회와 5연대창설동지회에 의해 1990년 남해군 군민공원에는그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박진경 대령은 미군정의 지시에 따라 5.10 제헌의원 선거와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반대하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립을 위해 무장 투쟁을 하였던 제주도 남로당 인민 유격대에 대한 대유격작전(대게릴라 작전)을 한 것이다. 그의 산중 주민들에 대한 체포작전은 정상적인 대유격작전(현재 군 교리상 후방지역 작전중의 하나임)을 실시한 것이었다. 박진경 대령은 1948년 5월 6일 부임하여 6월 18일까지 총 2회의 연대급 작전을 실시하여 약 650여명의 포로를 포로 심문팀에 인계하는 등 대유격작전에서 요구되는 절차에 따라 작전을 한 것이다. 각종 1차 자료를 세부적으로 분석해 보면 작전간 사살 인원은 25명이었다. 이러한 작전결과를 두고 무차별 민간인 학살로 매도하는 것은 명백한 사실관계 왜곡이다. 박진경 연대장의 주민과 산중 인민유격대를 분리한 작전은 남로당 인민유격대의 강압으로 제주도 남로당의 5월 10일 선거에 대한 방해공작의 일환으로 인민유격대에 의해 강제로 산으로 끌려갔던 제주도 주민들이 다시 마을로 돌아오게 되었다.

3. 2. 동상 철거 논란

제주 4.3 사건 진압 당시에 사망한 박진경은 경상남도 지역에서 국가유공자로 취급되어 왔다. 1952년 제주도 충혼묘지에 추도비가 세워졌고, 1990년 창군동우회와 5연대창설동지회에 의해 남해군 군민공원에 동상이 건립되었다.

민주화 이후, 4.3 당시 그가 시행했던 무차별 체포작전이 정말로 4.3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었는지, 이전 사령관인 김익렬과의 비교에 이르기까지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그리하여 남해에서는 2005년에 시민단체들이 동상을 철거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동상은 현재도 여전히 남아 있다. 2017년에는 창원시의 현충일 추념식에서 박진경의 위패가 경남대표로 올라가 물의를 빚기도 했다.

그러나 박진경 대령은 미군정의 지시에 따라 5.10 제헌의원 선거와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반대하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립을 위해 무장 투쟁을 하였던 제주도 남로당 인민 유격대에 대한 대유격작전(대게릴라 작전)을 한 것이다. 그의 산중 주민들에 대한 체포작전은 정상적인 대유격작전(현재 군 교리상 후방지역 작전중의 하나임)을 실시한 것이었다. 박진경 대령은 1948년 5월 6일 부임하여 6월 18일까지 총 2회의 연대급 작전을 실시하여 약 650여명의 포로를 포로 심문팀에 인계하는 등 대유격작전에서 요구되는 절차에 따라 작전을 한 것이다. 각종 1차 자료를 세부적으로 분석해 보면 작전간 사살 인원은 25명이었다. 이러한 작전결과를 두고 무차별 민간인 학살로 매도하는 것은 명백한 사실관계 왜곡이다. 박진경 연대장의 주민과 산중 인민유격대를 분리한 작전은 남로당 인민유격대의 강압으로 제주도 남로당의 5월 10일 선거에 대한 방해공작의 일환으로 인민유격대에 의해 강제로 산으로 끌려갔던 제주도 주민들이 다시 마을로 돌아오게 되었다.

3. 3. 현충일 추념식 위패 논란

제주 4.3 사건 진압 당시에 사망한 것이기 때문에 그는 경상남도 지역에서 국가유공자로 취급되어 왔었다. 당장 제주도에서는 1952년 충혼묘지에 그의 추도비가 세워졌고, 창군동우회와 5연대창설동지회에 의해 1990년 남해군 군민공원에는그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민주화 이후, 4.3 당시 그가 시행했던 무차별 체포작전이 정말로 4.3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었냐부터 이전 사령관인 김익렬과의 비교에 이르기까지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그리하여 남해에서는 2005년에 그의 동상을 철거하려는 움직임이 시민단체들로부터 일었으나 동상은 현재도 여전히 남아 있다. 2017년에는 창원시의 현충일 추념식에서 박진경의 위패가 경남대표로 올라가 물의를 빚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 박진경 대령은 미군정의 지시에 따라 5.10 제헌의원 선거와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반대하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립을 위해 무장 투쟁을 하였던 제주도 남로당 인민 유격대에 대한 대유격작전(대게릴라 작전)을 한 것이다. 그의 산중 주민들에 대한 체포작전은 정상적인 대유격작전(현재 군 교리상 후방지역 작전중의 하나임)을 실시한 것이었다. 박진경 대령은 1948년 5월 6일 부임하여 6월 18일까지 총 2회의 연대급 작전을 실시하여 약 650여명의 포로를 포로 심문팀에 인계하는 등 대유격작전에서 요구되는 절차에 따라 작전을 한 것이다. 각종 1차 자료를 세부적으로 분석해 보면 작전간 사살 인원은 25명이었다. 이러한 작전결과를 두고 무차별 민간인 학살로 매도하는 것은 명백한 사실관계 왜곡이다. 박진경 연대장의 주민과 산중 인민유격대를 분리한 작전은 남로당 인민유격대의 강압으로 제주도 남로당의 5월 10일 선거에 대한 방해공작의 일환으로 인민유격대에 의해 강제로 산으로 끌려갔던 제주도 주민들이 다시 마을로 돌아오게 되었다.

4. 평가

박명림은 박진경의 진압작전이 경비대의 힘을 과시하여 민중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고 유격대와 분리시켰으며, 유격대를 더욱 깊은 산 속으로 몰아넣었다는 점에서는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이 작전으로 인해 민중들이 경비대에 대한 상대적 호감을 반호감으로 전환시켰으며, 경비대 내부를 동요시켰고, 유격대에게 경비대도 경찰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적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어 더 큰 대립과 갈등을 불러 일으켰으며, 사태를 오히려 장기화시켰다는 점에서 실패였다고 평가하였다.[8]

나종삼은 박진경이 미군정의 제주도 작전 책임자 브라운 대령의 지침에 따라 작전을 수행했다고 평가했다.[8] 작전 내용은 해안에서 약 5km(일주도로에서는 4km)까지의 인구 밀집 지역은 경찰이, 해안으로부터 5km 이상의 산악 지역은 경비대가 담당하여 진압 작전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경찰과 경비대는 포로와 입산 주민을 포로심문센터에 인계하였고,[8] 이들은 경비대, 미군, 경찰 등으로 구성된 합동 심문조에 의해 심문을 받았다. 심문의 목적은 남로당 유격대와의 대공 용의점 파악 및 정보 수집이었다.[8]

박진경은 1948년 5월 30일에서 6월 2일까지 1차 작전, 6월 14일부터 17일까지 2차 작전을 실시하여, 입산 주민 595명과 포로 53명 등 총 650여 명을 합동심문센터에 인계하였다.[9][10] 6월 16일 자 미군 측 기록에 따르면 포로심문센터에는 3,000여 명이 인계되었는데 심문 후 대부분 석방하고 575명은 심문 중에 있었다.[11] 경비대 작전은 11연대의 미 고문관 두르스 대위에 의해 작전 내용이 사령관에게 보고되었으므로, 포로에 대한 고문이나 학살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나종삼의 주장이었다. 좌파 인사들이 박진경이 6,000여 명을 체포하여 학살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나종삼은 이는 근거 없는 주장이며, 조선중앙일보 1948년 6월 12일 자 기사를 왜곡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나종삼은 또한, 작전사령관 명령 없이 작전을 수행하는 부대장이 독단으로 학살 명령을 내릴 수 없고 그런 명령을 내린 사실도 없다고 주장했다. 제민일보 4.3취재반이 작성한 문건에 따르면, 박진경 재임 기간 작전 중 남로당 유격대를 사살한 전과는 25명뿐이며, 이 중 11명은 6월 3일 경비대와 경찰의 합동작전 전과였다.

초대 파월사령관을 역임한 채명신(육사 5기, 당시 9연대 1대대 3중대 소대장) 장군은 박진경이 양민을 학살한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구출하려고 했으며, 폭도 토벌보다는 입산한 주민들의 하산에 작전의 중점을 두었다고 증언했다.[12] 채명신은 이러한 양민보호작전이 인도적이면서 전략적 차원의 행동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유격전에서 유격대와 주민은 물과 물고기의 관계이므로, 유격대를 섬멸하려면 우선 주민을 유격대와 분리시켜야 한다고 덧붙였다.[12]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한 이세호(육사 2기, 당시 9연대 1대대 부대대장) 장군은 박진경이 인격자이며 참모총장이나 국방장관까지 할 수 있는 분이었다고 증언했고,[13] 합참 본부장을 역임한 류근창(육사 2기, 당시 제11연대 군수과장) 장군은 박진경이 훌륭한 분이었으며 양민을 무조건 학살할 성품이 아니라고 증언했다.[14] 나종삼은 이러한 증언들을 종합하여 박진경이 선배, 동료, 부하로부터 존경받는 참군인이었다고 결론지었다.

4. 1. 박명림의 평가

박명림은 박진경의 진압작전이 경비대의 힘을 과시하여 민중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고 유격대와 분리시켰으며, 유격대를 더욱 깊은 산 속으로 몰아넣었다는 점에서는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이 작전으로 인해 민중들이 경비대에 대한 상대적 호감을 반호감으로 전환시켰으며, 경비대 내부를 동요시켰고, 유격대에게 경비대도 경찰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적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어 더 큰 대립과 갈등을 불러 일으켰으며, 사태를 오히려 장기화시켰다는 점에서 실패였다고 평가하였다.[8]

한편, 다른 연구가 나종삼은 박진경 대령이 미군정의 제주도 작전 책임자 브라운 대령의 지침에 따라 작전을 수행했다고 평가했다. 작전 내용은 해안에서 약 5Km(일주도로에서는 4Km)까지의 인구 밀집지역은 경찰이 담당하고, 해안으로부터 5Km 이상의 산악지역은 경비대가 담당하여 진압작전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경찰과 경비대는 포로와 입산 주민을 포로심문센터에 인계하였고,[8] 이들의 심문은 경비대, 미군, 경찰 등으로 구성된 합동 심문조가 하였다. 심문은 남로당 유격대와의 대공용의점 파악과 남로당 유격대에 대한 정보수집이 그 목적이었으며, 이는 대유격작전의 기본이었다.

박진경 대령은 경비대 4개 대대(15개 중대 3,800여명)를 지휘하여[9] 5월 30일에서 6월 2일까지의 1차 작전과 6월 14일부터 17일까지의 2차 작전을 실시하였다. 작전 결과, 경비대 작전의 정보가 누설되어 남로당 유격대 주력은 놓쳤으나 1차 작전 시 입산 주민 595명과 2차 작전 시 포로 53명 등 650여 명을 합동심문센터에 인계하였다.[10] 6월 16일 자 미군 측 기록에 의하면 포로심문센터에는 3,000여 명이 인계되었는데 심문 후 대부분 석방하고 575명은 4개 심문팀의 심문 중에 있었다.[11]

좌파 인사들은 박진경 연대장이 6,000여 명을 체포하여 학살하였다고 주장하나 이는 근거 없는 주장이다. 이들의 주장은 김일성의 지령을 받고 남파된 간첩 성시백이 운용한 조선중앙일보 1948년 6월 12일 자 기사를 인용한 것인데, 그 기사에도 경비대와 경찰에 붙잡힌 폭도들이 6,000여 명이며 이들을 재판하기 위해 서울에서 판검사들이 파견되어 재판했다고 되어있다. 박진경 대령은 5월 6일 제주도에 부임했기 때문에, 6,000여명 학살 주장은 심각한 왜곡이다. 작전사령관 명령 없이 작전을 수행하는 부대장이 독단으로 학살 명령을 내릴 수 없고 그런 명령을 내린 사실도 없다. 1995년에 제민일보 4.3취재반이 작성한 문건에는 박진경 대령 재임 기간 작전 중 남로당 유격대를 사살한 전과는 작전 중 사살 25명뿐이며, 이 중 11명은 6월 3일 경비대와 경찰의 합동작전의 전과이다.

초대 파월사령관을 역임하였던 채명신(육사 5기, 당시 9연대 1대대 3중대 소대장) 장군은 "박진경 대령이 양민을 학살했다고 하는데 그는 양민을 학살한 게 아니라 죽음에서 구출하려고 했습니다. 4.3 초기에 경찰이 처리를 잘못해서 많은 주민이 입산했습니다. 그런데 박 대령은 폭도들의 토벌보다는 입산한 주민들의 하산에 작전의 중점을 두었습니다. 이러한 양민보호작전은 인도적이면서 전략적 차원의 행동입니다."라고 증언했다.[12] 그는 주민들을 선무공작으로 입산 무장대로부터 분리시키는데 주력했으며, 유격전에서 유격대와 주민은 물과 물고기의 관계이므로 유격대를 섬멸하려면 우선 주민을 유격대와 분리시켜야 한다고 덧붙였다.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한 이세호(육사 2기, 당시 9연대 1대대 부대대장) 장군은 "박진경 대령은 진짜 인격자이고 살아계셨다면 참모총장이나 국방장관까지 하실 분이시다. 성품이 독재형이 아니다."라고 증언했고,[13] 합참 본부장을 역임한 류근창(육사 2기, 당시 제11연대 군수과장) 장군은 "박진경 대령은 훌륭한 분이셨다, 양민을 무조건 학살할 성품이 아니다. 모두들한테 존경받는 인품의 소유자다."라고 증언했다.[14]

4. 2. 나종삼의 평가

나종삼은 박진경이 미군정의 제주도 작전 책임자 브라운 대령의 지침에 따라 작전을 수행했다고 평가했다.[8] 작전 내용은 해안에서 약 5km(일주도로에서는 4km)까지의 인구 밀집 지역은 경찰이, 해안으로부터 5km 이상의 산악 지역은 경비대가 담당하여 진압 작전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경찰과 경비대는 포로와 입산 주민을 포로심문센터에 인계하였고,[8] 이들은 경비대, 미군, 경찰 등으로 구성된 합동 심문조에 의해 심문을 받았다. 심문의 목적은 남로당 유격대와의 대공 용의점 파악 및 정보 수집이었다.[8]

박진경은 1948년 5월 30일에서 6월 2일까지 1차 작전, 6월 14일부터 17일까지 2차 작전을 실시하여, 입산 주민 595명과 포로 53명 등 총 650여 명을 합동심문센터에 인계하였다.[9][10] 6월 16일 자 미군 측 기록에 따르면 포로심문센터에는 3,000여 명이 인계되었는데 심문 후 대부분 석방하고 575명은 심문 중에 있었다.[11] 경비대 작전은 11연대의 미 고문관 두르스 대위에 의해 작전 내용이 사령관에게 보고되었으므로, 포로에 대한 고문이나 학살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나종삼의 주장이었다. 좌파 인사들이 박진경이 6,000여 명을 체포하여 학살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나종삼은 이는 근거 없는 주장이며, 조선중앙일보 1948년 6월 12일 자 기사를 왜곡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나종삼은 또한, 작전사령관 명령 없이 작전을 수행하는 부대장이 독단으로 학살 명령을 내릴 수 없고 그런 명령을 내린 사실도 없다고 주장했다. 제민일보 4.3취재반이 작성한 문건에 따르면, 박진경 재임 기간 작전 중 남로당 유격대를 사살한 전과는 25명뿐이며, 이 중 11명은 6월 3일 경비대와 경찰의 합동작전 전과였다.

초대 파월사령관을 역임한 채명신(육사 5기, 당시 9연대 1대대 3중대 소대장) 장군은 박진경이 양민을 학살한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구출하려고 했으며, 폭도 토벌보다는 입산한 주민들의 하산에 작전의 중점을 두었다고 증언했다.[12] 채명신은 이러한 양민보호작전이 인도적이면서 전략적 차원의 행동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유격전에서 유격대와 주민은 물과 물고기의 관계이므로, 유격대를 섬멸하려면 우선 주민을 유격대와 분리시켜야 한다고 덧붙였다.[12]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한 이세호(육사 2기, 당시 9연대 1대대 부대대장) 장군은 박진경이 인격자이며 참모총장이나 국방장관까지 할 수 있는 분이었다고 증언했고,[13] 합참 본부장을 역임한 류근창(육사 2기, 당시 제11연대 군수과장) 장군은 박진경이 훌륭한 분이었으며 양민을 무조건 학살할 성품이 아니라고 증언했다.[14] 나종삼은 이러한 증언들을 종합하여 박진경이 선배, 동료, 부하로부터 존경받는 참군인이었다고 결론지었다.

4. 3. 채명신, 이세호, 류근창의 증언

박진경의 진압 작전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4.3 연구가 박명림은 박진경의 무차별 체포 작전이 민중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주고 유격대와 분리시켰다는 점에서는 성공했지만, 민심을 악화시키고 경비대 내부를 동요시켰으며, 사태를 장기화시켰다는 점에서는 실패라고 평가했다.[8]

그러나 4.3 연구가 나종삼은 박진경이 미군정의 지침에 따라 작전을 수행했으며, 해안 인근 지역은 경찰이, 산악 지역은 경비대가 담당하여 진압 작전을 수행했다고 평가했다. 또한 포로와 입산 주민은 포로심문센터에 인계되어 합동 심문조의 심문을 받았으며, 이는 대유격작전의 기본이었다고 설명한다.[8] 박진경은 1948년 5월 30일부터 6월 2일까지 1차 작전, 6월 14일부터 17일까지 2차 작전을 실시하여 입산 주민 595명과 포로 53명 등 650여 명을 합동심문센터에 인계하였다.[9][10] 6월 16일자 미군 측 기록에 따르면, 포로심문센터에는 3,000여 명이 인계되었는데 심문 후 대부분 석방하고 575명은 심문 중에 있었다.[11]

나종삼은 좌파 인사들이 박진경이 6,000여 명을 체포하여 학살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근거가 없다고 반박한다. 그는 이들의 주장이 간첩 성시백이 운용한 조선중앙일보 1948년 6월 12일자 기사를 인용한 것이며, 해당 기사에는 4.3사건 이후 6월 12일까지 경찰과 경비대에게 체포된 폭도들의 총 숫자가 약 6,000명이라고 되어있다고 지적한다. 또한, 작전사령관 명령 없이 부대장이 독단으로 학살 명령을 내릴 수 없고 그런 사실도 없다고 주장한다.[8] 1995년 제민일보 4.3취재반이 작성한 문건에 따르면, 박진경 재임 기간 작전 중 남로당 유격대 사살 전과는 25명뿐이며, 이 중 11명은 6월 3일 경비대와 경찰의 합동작전 전과이다.

초대 파월사령관을 역임한 채명신(육사 5기, 당시 9연대 1대대 3중대 소대장) 장군은 박진경이 양민을 학살한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구출하려고 했으며, 폭도 토벌보다는 입산한 주민들의 하산에 작전의 중점을 두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이러한 양민보호작전이 인도적이면서 전략적 차원의 행동이었다고 설명하며, 유격전에서 유격대와 주민을 분리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12]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한 이세호(육사 2기, 당시 9연대 1대대 부대대장) 장군은 박진경을 "진짜 인격자"이며 "참모총장이나 국방장관까지 하실 분"이라고 평가했고,[13] 합참 본부장을 역임한 류근창(육사 2기, 당시 제11연대 군수과장) 장군은 박진경을 "훌륭한 분"이며 "양민을 무조건 학살할 성품이 아니"라고 증언했다.[14]

5. 박진경 추도비

고(故) 육군대령(陸軍大領) 박진경(朴珍景) 추모비(追慕碑)는 원래 비석의 비문이 마모되어 내용을 식별하기 어려워 1985년 6월에 다시 세워졌으며, 원래 비석은 새 비석 앞에 묻었다. 비석 전면에는 '고 육군대령 박진경 추모비'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비석 후면의 내용에 따르면, 박진경은 밀양 박씨 밀성대군의 후예로, 1920년 1월 22일 경상남도 남해군 남면 홍현리 36번지에서 태어났다. 진주고등보통학교와 일본 오사카 외국어대학교 영어과를 졸업한 후, 광복과 더불어 국군 창설의 주역으로 헌신하였다. 국방경비대 총사령부 인사국장을 역임한 후, 11연대장으로 취임함과 동시에 육군 대령으로 승진하여 제주도 공비 소탕 작전을 지휘하다가 1948년 6월 18일 전사하였다.

박진경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30만 제주도민과 군경원호회가 합동하여 추모비를 세우고 추모의 뜻을 전하고 있다. 비석은 1952년 11월 7일에 세워졌다.

참조

[1] 기타
[2] 기타
[3] 서적 국군의 뿌리(50동우회편) 삼우사
[4] 서적 국군의 뿌리(50 동우회편 삼우사
[5] 간행물 육군역사일지, 제1집 육군본부 군사감실 1948-05-15
[6] 간행물 육군역사일지 제1집 육군본부 군사감실 1948-06-14
[7] 논문 한라산은 알고 있다(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 제주4.3위원회 1995-08-15
[8] 뉴스 현대일보 1948-06-03
[9] 서적 한라산은 알고 있다.
[10] 보고서 주한미 육군사령부 일일 정보보고서 1948-06-04
[11] 보고서 제주도 소요사태 1948-07-02
[12] 증언 2001-04-17
[13] 증언 2001-07-15
[14] 증언 2001-07-27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