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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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반준은 형주 무릉군 한수현 출신으로, 유표, 유비, 손권 삼국을 섬긴 인물이다. 젊은 시절 학문을 닦고 유표에게 등용되어 강하군 종사, 상향현 현령을 지냈다. 유비 휘하에서는 형주종사로 관우를 보좌했으며, 손권에게 귀순하여 보군중랑장, 분위장군을 역임했다. 무릉만 반란 진압, 여일의 전횡 견제 등 내치에도 기여했으며, 238년 여일이 처형된 후 손권에게 미움을 받았다.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국가를 위해 헌신한 인물로 평가받으며,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의 부하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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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준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원어 이름 | 潘濬 |
| 로마자 표기 | Pan Jun |
| 자 | 승명(承明) |
| 출생지 | 후난성 창더시 |
| 사망일 | 239년 |
| 직업 | 대신 장군 |
| 관직 | |
| 시중 | 태상(太常) |
| 임기 시작 | 229년 |
| 군사 직위 | 분위장군(奮威將軍) |
| 임기 시작 | 220년 |
| 임기 종료 | 229년 |
| 군사 직위 | 보군중랑장(輔軍中郎將) |
| 임기 시작 | 220년 |
| 봉작 | |
| 작위 | 유양후(劉陽侯) |
| 가족 관계 | |
| 친척 | 강완 |
| 자녀 | 반주(潘翥) 반미(潘祕) 손려의 부인 |
| 주군 | 유표 유비 손권 |
2. 초기 생애 및 경력
반준은 형주 무릉군 한수현 출신으로, 젊은 시절 송충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총명하고 기민하여 왕찬에게 높은 평가를 받아 형주 지역 인사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었다.[4] 30세 이전에 유표에게 등용되어 강하군 종사, 상향현령 등을 역임하며 뛰어난 치적을 쌓았다.
2. 1. 유표 휘하에서의 활동
유표가 형주를 다스릴 때, 반준은 강하군 종사로 임명되었다. 당시 강하군은 부패한 관리들의 횡포로 백성들의 고통이 심했다. 반준은 법에 따라 부패한 관리들을 엄격하게 처벌하여 백성들의 신임을 얻었다.[6] 이후 상향현의 현령(縣令)으로 부임하여 뛰어난 통치 능력을 발휘,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7]3. 유비 휘하에서의 활동
유비가 형주를 다스릴 때 반준은 형주종사로 임명되어 주의 사무를 처리했다. 212년부터 214년까지 유비가 익주를 유장에게서 빼앗기 위한 원정을 떠났을 때, 반준은 형주에 남아 관우를 보좌하며 주의 행정을 총괄했다.[8] 유비에게 신임을 받았지만, 양희전의 계한보신찬(季漢輔臣贊)에 따르면 관우는 반준을 미방, 사인과 같은 취급을 하며 중용하지 않았다고 한다.[41]
3. 1. 형주에서의 역할
209년 말경, 유비가 형주의 자사가 되자 반준을 보좌관으로 임명했다.[8] 212년부터 214년까지 유비가 익주를 유장에게서 빼앗기 위한 원정을 떠났을 때, 반준은 형주에 남아 관우를 보좌하며 주의 행정을 총괄했다.[8] 유비에게 신임을 받았지만, 관우와는 친교를 맺으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41]3. 2. 관우와의 관계
유비가 형주를 다스릴 때 반준은 그의 부하가 되어 형주의 종사를 맡았다. 유비가 익주로 들어갈 때 형주에 남아 주의 사무를 위임받았고, 유비에게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관우는 반준을 미방, 사인과 같은 취급을 하며 중용하지 않았다고 한다.[41]4. 손권 휘하에서의 활동
219년 여몽의 형주 침공으로 형주가 손권에게 넘어가자, 대부분의 유비 측 관료들은 손권에게 귀순했지만 반준은 홀로 저항했다. 그러나 손권의 설득으로 결국 오나라에 합류하여 보군중랑장, 분위장군 등을 역임하며 형주 지역의 군사를 담당했다.
반준은 20세 전후에 송충에게 학문을 배웠다. 『오서』에 따르면, 총명한 자질을 가지고 있었고 사람과의 응대는 기민했으며, 그 말은 이론적이었다고 한다. 왕찬에게 높이 평가받은 것을 계기로 형주의 인사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었다. 30세 이전에 유표에게 불려 강하군의 종사가 되었다. 당시 강하군은 부패한 관리들의 횡행으로 통치가 문란했지만, 반준이 그들을 법에 따라 처벌했기 때문에 백성들은 그의 엄격한 법 적용을 두려워하여 군 전체가 따르게 되었다. 그 후, 상향 현령으로 뛰어난 치적을 올려 사람들의 평판이 매우 높아졌다.
유비가 형주를 다스리게 되자 그의 부하가 되어 형주의 종사를 맡았다. 유비가 익주로 들어가자 형주에 머물며 주의 사무를 일임받게 되었다. 유비에게 신임을 받았지만, 관우는 친교를 맺으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41]
229년 손권이 황제에 즉위하자 반준은 소부에 임명되었고 유양후에 봉해졌다. 이후 태상으로 승진하여 육손과 함께 무창의 수비를 맡았다.
딸을 손려에게 시집보냈으나, 232년 손려는 20세의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239년에 사망하였고 장남 반저가 그 뒤를 이었다. 『오서』에 의하면 반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해 차남 반비가 그 뒤를 잇게 되었고, 손권의 질녀에게 장가를 갔다고 한다. 여대전에 의하면 반준이 무창에서 맡던 일은 여대가 계승했다고 한다.
4. 1. 손권에게 귀순
손권이 유비의 형주 영토를 정복한 후, 형주의 관리들 대부분은 항복하여 손권을 섬기기로 했지만, 반준은 병을 핑계로 집에 머물렀다. 손권은 반준의 재능을 아껴 직접 설득에 나섰다. 하인들을 보내 반준을 침대에 누운 채로 데려오게 했고, 반준은 슬피 울며 낙담한 듯 흐느꼈다.[9] 손권은 반준을 위로하며 초나라의 왕들이 다른 나라 출신 인재를 등용했던 사례를 언급하며, 자신이 관대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섬기지 않으려는 것인지 물었다.[10]손권은 하인들에게 천 조각으로 반준의 눈물을 닦아주게 했다. 반준은 감복하여 침대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고 손권에게 항복하여 섬기기로 했다. 손권은 그를 치중으로 임명하고 형주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 자주 상의했다.[11] 얼마 후, 보군중랑장으로 임명하고 군대를 지휘하게 했다.[12]
4. 2. 무릉만 이민족 토벌
220년 초, 유비의 통치를 받던 무릉군(현재 중국 후난성 창더시 일대)의 전 관료였던 번주가 무릉의 토착 부족들을 선동하여 손권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손권의 다른 신하들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최소 1만 명의 병력이 필요하다고 말했지만,[13] 손권은 그들의 의견을 거부하고 반준에게 의견을 물었다. 반준이 5천 명의 병력으로 충분하다고 말하자, 손권은 "어째서 그렇게 자신만만한가?"[14]라고 물었다. 반준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판주는 남양군 출신의 명문가 출신입니다. 말솜씨는 있지만 웅변가의 재능은 없습니다. 판주가 과거에 군의 사람들을 위해 하루 종일 잔치를 준비하겠다고 말했지만, 정오까지 음식이 나오지 않아 약 10명이 일어나 떠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는 난쟁이의 키에 대한 거짓말을 간파하는 것과 같습니다.[15]
손권은 웃으며 반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반준은 5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판주를 처리했고, 그를 제거하고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16] 그의 성공에 대한 보상으로, 반준은 분위장군(奮威將軍)으로 승진했고, 상천정후(常遷亭侯)에 봉해졌다.[17]
231년 3월 또는 4월경, 오계(五谿, 문자 그대로 "다섯 개의 시내", 현재의 화이화, 후난 주변 지역을 지칭)에 거주하는 토착 부족들이 오나라의 통치에 반란을 일으키자 손권은 반준에게 황제의 대행 권한을 부여하고, 그에게 장군 여대를 감독하여 5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반란을 진압하도록 명령했다. 이 기간 동안 반준은 약속을 지키고 공정하게 보상과 처벌을 내렸다. 234년 12월까지 반란은 1만 명 이상의 반군이 사망하거나 포로로 잡히면서 종결되었다. 토착 부족들도 너무나 약화되어 오랫동안 다시 반란을 일으킬 수 없었다.[20]
4. 3. 내정에서의 활약
229년 손권이 황제에 즉위하자 반준은 소부에 임명되었고 유양후에 봉해졌다.[19] 이후 태상으로 승진하여 육손과 함께 무창 수비를 맡았다.[21]226년부터 보즐은 구구 땅에 주둔하면서 군권 확대를 꾀하여 사병을 모으는 것을 허락받고자 손권에게 요청했다. 손권은 보즐이 군벌화할 것을 걱정한 반준의 의견에 따라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또한, 명성이 높았으나 난폭한 행동을 일삼은 서종을 처형했는데, 이는 반준이 법과 원칙을 중시했음을 보여준다.[49]
230년, 위나라에서 투항한 은번을 주거와 학보 등이 칭찬했지만, 반준은 아들 반저에게 그와 교제하지 말라고 엄하게 꾸짖었다. 후에 은번이 위나라의 밀정으로 밝혀지면서 반준의 선견지명은 칭찬받았다.[49]
231년, 오계의 무릉만 이민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반준은 5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토벌에 나섰다. 234년 11월에야 반란을 진압했으며, 수만 명의 적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이민족 토벌 후 다시 육손과 함께 무창 수비를 맡았다.[42]
4. 3. 1. 여일의 전횡 견제
呂壹|여일중국어이 교사(校事)로 임명되어 가신들의 승진이나 처벌을 함부로 실시하며 권세를 제멋대로 휘두르자, 반준은 이에 격노했다. 건안태수 정주가 여일의 모략으로 감옥에 갇혔을 때 진표와 함께 손권을 설득하여 무죄로 풀어주게 했다.[54] 승상 고옹과 좌장군 주거까지 여일에 의해 연금되는 등 궁중이 혼란에 휩싸이자, 반준은 육손과 협력하여 여일을 제거하는 계획을 세웠다.[55] 여일은 황문시랑 사굉의 경고에 당황하여 고옹을 무죄 방면시켰다.[23]반준은 직접 손권에게 호소하려 했지만, 태자 손등의 간언조차 받아들여지지 않자 문무백관들을 모아 그 자리에서 여일을 죽이려고 계획했다. 하지만 여일이 사전에 이를 간파하고 참석하지 않아 계획은 실패했다.[24] 그 후에도 반준은 손권을 알현할 때마다 여일의 악행을 규탄했고, 보즐 또한 반준과 육손을 지지했다.[50]
이로 인해 여일에 대한 손권의 총애도 사라져 238년 여일은 처형되었다. 손권은 자신의 잘못을 문무백관들에게 사죄함과 동시에, 여일의 악행을 충고하지 않았던 중신들도 규탄했다. 반준은 육손과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 고통스러운 듯한 태도를 취해 손권을 불안하게 했다.[42]
5.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삼국지연의》에서 반준은 관우의 부하로 등장한다. 왕보는 반준을 "시기심이 강하고 이익을 탐하는 소인"으로 평가했다.[39] 형주 공방전에서 여몽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정사와는 다른 묘사로, 연의에서는 부정적으로 묘사되었다.
6. 평가
반준은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국가를 위해 헌신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진수는 《삼국지》에서 "반준은 사사로운 이익을 요구하지 않고 국가의 대사를 요구했다"라고 평가했다.[50] 양희의 계한보신찬에서는 미방, 사인, 학보와 함께 오나라와 촉나라 두 나라에서 배신자, 웃음거리라는 평가를 받았다.[41] (이는 진보적 관점에서 볼 때, 촉한 중심의 역사관에서 비롯된 평가로 해석할 수 있다.) 보즐은 반준을 경계하면서도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50]
7. 가계
반준은 아들로 반저와 반비를 두었다.[28] 장남 반저는 자가 문룡으로, 기병교위에 임명되어 군대를 지휘했지만 일찍 사망했다.[28] 반저는 유양후 작위를 이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했다.[26] 차남 반비는 손권의 이복 누이와 결혼하여 상향현의 현령을 지냈다.[28] 반비는 나중에 상서복야 직위에 올랐고, 형주의 대중정이 되었다.[29]
반준의 딸은 손권의 차남인 손려와 결혼했다.[27] 그러나 손려는 232년에 20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61
[2]
서적
Sanguozhi vol. 61
[3]
서적
Sanguozhi vol. 61
[4]
서적
Wu Sh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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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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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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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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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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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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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u Sh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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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nguo Yanyi ch. 73
[40]
서적
三国志 呉志 潘濬伝注『江表伝』
[41]
서적
三国志 蜀志 楊戯伝注『季漢輔臣賛』
[42]
서적
三国志 呉志 呉主伝
[43]
서적
三国志 呉志 呂蒙伝
[44]
서적
江表伝
[45]
문서
江表伝によると治中も兼任
[46]
문서
樊冑とも
[47]
서적
江表伝・『襄陽記』による
[48]
서적
三国志 呉志 周魴伝
[49]
서적
三国志 呉志 潘濬伝注『呉書』
[50]
서적
三国志 呉志 歩騭伝
[51]
서적
三国志 呉志 胡綜伝
[52]
서적
三国志 呉志 呂岱伝
[53]
서적
三国志 呉志 呂範伝付呂拠伝・朱然伝付朱績伝・鍾離牧伝注『会稽典録』朝廷内の討議は寡兵の鍾離牧を増援せず見捨てるつもりであったが、呉国(孫権)は鍾離牧を見捨てず、呉国の救援という威勢のおかげで、鍾離牧は生還することができたという
[54]
서적
三国志 呉志 呉主伝注『文士伝』
[55]
서적
三国志 呉志 陸遜伝
[56]
서적
呉書
[57]
문서
鳥の羽や絹を張ったうちわ形のものに長い柄をつけた道具のこ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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