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희 (촉한)
1. 개요
양희는 촉한 시대의 인물로, 제갈량이 그를 알아볼 정도로 젊은 시절부터 명성을 떨쳤다. 그는 장완에게 발탁되어 대장군부 동조연을 지냈으며, 젠닝 군 태수, 자퉁 군 태수를 역임했다. 연희 4년에는 《계한보신찬》을 저술했다. 강유의 북벌에 참여했으나, 강유를 조롱하는 언행으로 인해 면직되어 평민으로 강등되었고, 경요 4년에 사망했다. 양희는 《계한보신찬》을 통해 유비, 제갈량 등 촉한의 주요 인물들을 찬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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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년 사망 -
첨해 이사금
첨해 이사금은 신라의 제12대 이사금으로, 재위 기간 동안 고구려와 강화 조약을 맺고 백제와의 교전에 집중했으며, 남당에서 정치를 행하고 부도를 등용하여 창고 관리를 맡기는 등 국가 기틀을 다지는 데 힘썼다. -
261년 사망 -
왕기 (백여)
왕기는 삼국시대 위나라의 청렴하고 공정한 관료이자 장군으로, 왕릉의 치적에 기여하고 조예에게 간언하여 백성을 위한 정치를 촉구했으며, 형주자사로서 오나라를 방비하고 제갈탄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사후 사공으로 추증되고 서진 시대에도 청렴함을 인정받았다. -
생년 미상 -
손니 알리
손니 알리는 송가이 제국의 군주로서 니제르 강 유역을 장악한 후 팀북투와 젠네를 정복하고 군사력을 강화하여 제국을 확장했으며, 전통 신앙과 이슬람교 조화, 법에 의한 국가 통제, 무역 확립 등 내치에도 힘썼다. -
생년 미상 -
김조국
김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2019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겸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2. 생애
양희는 어렸을 때부터 정기, 양태, 장표와 함께 이름을 널리 알렸으며, 제갈량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20세에 익주의 서좌(書佐)에서 독군종사(督軍從事)가 되어 공정한 재판으로 칭찬받아 속주부(屬主簿)가 되었다. 제갈량 사후에는 상서우선부랑(尙書右選部郞)이 되었으나, 장완의 중용을 받아 연희 원년(238년) 그가 대장군부(大將軍府)를 개설했을 때 동조연(東曹掾)이 되었다. 이후 건녕태수, 호군감군, 재동태수 등을 역임하였다.
연희 20년(257년), 강유를 따라 북벌에 참여했으나, 평소 강유를 불신하고 조롱한 탓에 강유의 미움을 샀다. 결국 강유의 주청으로 면직되어 서인(평민)으로 강등되었고, 경요 4년(261년)에 사망하였다.
2.1. 초기 생애
어렸을 때 정기, 양태, 장표와 더불어 이름이 널리 알려졌고, 제갈량도 그를 잘 알았다고 한다. 20세 때 익주(현재의 쓰촨성과 충칭시)의 서좌(書佐)에서 독군종사(督軍從事)가 되어 형벌을 공평하게 처리하여 속주부(屬主簿)가 되었다. 제갈량 사후, 상서우선부랑(尙書右選部郞)이 되었다.
2.2. 촉한에서의 관직 생활
어렸을 때 정기, 양태, 장표와 더불어 이름이 널리 알려졌고, 제갈량도 그를 잘 알았다고 한다. 바시 군 출신의 정기, 파 군 출신의 양태, 장표와 명성이 동등했으며, 양희는 정기를 그들 넷 중 가장 뛰어나다고 칭찬했다. 촉한의 승상 제갈량은 그들의 재능을 알아보고 높이 평가했다.
20세 때 익주(현재의 쓰촨성과 충칭시를 포함) 행정 사무소의 서좌(書佐)에서 독군종사(督軍從事)가 되어 형벌을 공평히 처결하였으므로 속주부(屬主簿)가 되었다. 제갈량 휘하의 승상부에서 주부로 승진했다. 234년 제갈량이 사망한 후, 양희는 상서우선부랑(尙書右選部郞)이 되었다.
이후 익주자사였던 장완에게 중용되어, 연희 원년(238년) 장완이 조서에 따라 한중에서 대장군부(大將軍府)를 개설하였을 때 양희도 동조연(東曹掾)이 되었다. 장완이 대장군으로 승진한 후 양희를 자신의 사무실 동부의 관리로 재배치했다. 양희는 남중랑장 참군을 역임했다. 242년, 장표가 마충의 뒤를 이어 래강도독이 되자 양희는 그의 부관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 윈난성과 구이저우성의 일부를 포함하는 젠닝 군 태수로 전임되었다.
얼마 후, 건강이 좋지 않아 양희는 젠닝 군의 직책을 사임하고 촉의 수도 청두로 돌아와 군대를 보호하는 호군 감군으로 복무하다가 회복되었다. 그 후 그는 쯔퉁 현 인근의 쯔퉁 군 태수로 임명되었고, 나중에 다시 청두로 소환되어 사성교위로 복무했다. 재임 중 양희는 정직하고 신중하며 단순하고 최소한의 방식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명성을 얻었다.
연희 20년(257년), 대장군 강유를 따라 군사 원정에 참여하여 조위와 싸웠고, 산시성 저우즈 현 동남쪽에 있는 망수에서 위군과의 전투에 참여했다. 양희는 줄곧 강유에 대해 의심과 불신을 품고 있었다. 술에 취하면 그는 종종 농담을 하고 강유를 놀렸다.
강유는 양희가 그를 조롱하는 것을 참는 척했지만 실제로는 양희에게 앙심을 품고 그에게 보복하고 싶어했다. 촉 군이 원정에서 돌아온 후, 누군가가 양희의 무례한 행동에 대해 촉 황실에 보고했다. 그 결과 양희는 직책에서 해임되고 평민 신분으로 강등되었다. 양희는 몇 년 후인 경요 4년(261년)에 사망하였다.
2.3. 강유와의 갈등과 죽음
연희 20년(257년), 대장군 강유를 따라 군사 원정에 참여하여 망수(芒水)에 이르렀다. 양희는 평소 강유를 내심 따르지 않았고, 술에 취하면 종종 강유를 조롱하거나 희롱하는 말을 했다. 강유는 겉으로는 이를 참는 척했지만, 실제로는 양희에게 앙심을 품었다.
원정에서 돌아온 후, 강유는 주청하여 양희를 면직시키고 서인(평민)으로 강등시켰다. 그 후 양희는 경요 4년(261년)에 사망하였다.
3. 성품 및 평가
양희는 성품이 단순하고 제멋대로였지만, 남에게 아첨하거나 지나치게 정을 주는 일이 없었다. 어릴 적 친구인 한엄(韓儼)과 여도(黎韜)가 곤궁한 처지에 놓이자, 그들을 돕고 변함없는 우정을 유지했다. 당시 초주에 대한 평가가 좋지 않았지만, 양희는 그를 높이 평가하여 칭찬했다. 이 때문에 유식자들은 양희를 귀하게 여겼다.
양희는 업무를 간결하게 처리하고,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도 말을 아끼는 것으로 알려졌다. 요령을 피우지 않았고, 사적인 인사나 선물을 주고받지도 않았다. 편지나 문서를 쓸 때도 한 장을 넘기는 일이 드물었다. 그러나 친구들을 진심으로 대하고 친절하게 대했다.
파서군 출신인 한엄과 여도는 양희의 어린 시절 친구였다. 한엄은 건강이 좋지 않아 관직에 나설 수 없었고, 여도는 부적절한 행위로 인해 해임되었다. 양희는 그들에게 재정적 지원을 제공하고 일상생활을 도우며 우정을 이어나갔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촉한의 관리인 초주를 재능이 부족하다고 여겼지만, 양희는 "우리와 같은 후세대는 이 훌륭한 사람만큼 훌륭할 수 없다."라고 말하며 그를 높이 평가했다. 이 때문에 양희는 초주의 재능을 알아보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장완과의 대화에서 양희는 때때로 답을 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이를 두고 양희가 윗사람을 업신여긴다고 비난하자, 장완은 "사람의 마음이 같지 않으니 저마다 얼굴이 다른 것과 같습니다. 겉으로는 따르면서 뒤에서 다른 말을 하는 것은 옛 사람이 경계하는 바입니다. 양희가 내 말이 옳다고 칭찬하려 한다면 그것은 그의 본심이 아니고, 내 말에 반대하려 한다면 나의 잘못을 드러내는 일이므로 그가 가만히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양희가 잘한 일입니다"라고 답했다.
진수는 양희를 "게으르고, 일도 적당히 손을 뺐지만,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아첨하는 말을 하거나, 과도한 애정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또한, 당시 평가가 낮았던 초주를 높이 평가하며 "우리 자손은 초주에게 미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칭찬했다.